138회
아린은 옥좌의 방에서 성왕국 쪽의 전선을 살피며 밀고자의 보고를 들었다. 그녀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 알룬의 신력이 강해져서 감시가 힘들어진데다 성왕국 쪽의 전투도 나날이 격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알룬의 진영에 첩자를 심어두기로 했다. 배신을 대가로 안전을 약속받은 플레이어의 신도가 열심히 지껄였다.
"의외로 길드를 결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모두에게서 충성맹세를 받았지요."
"충성맹세? 그런걸로 연합이 지속될 수 있을리가 없을텐데?"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크게 실망한 아린은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있었다. 배신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맹세를 받을때에 이상한 권능을 사용했습니다. 충성맹세를 받는 대가로 신도들의 능력을... 흐윽!"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던 신도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놀란 아린의 신도들이 그를 부축했지만, 배신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버린 뒤였다.
'설마 동맹의 일탈을 체벌하는 권능이라도 습득한건가?'
레니아와 카엘 같은 인재들을 곁에 둔 알룬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린은 의외의 사태에 이를 악물고 접속을 종료했다. 그녀의 방에는 저택 관리인이 석상처럼 버텨서고 있었다.
최근 길드 내의 분위기가 많이 흉흉한데다 탈주자들도 많이 생겨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그가 아린의 호위를 담당하곤 했다. 아린은 저택 관리인에게 살짝 짜증스레 명령했다.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가서 알룬의 사촌과 부모님들을 잡아와. 가족을 인질로 잡으면 아무리 알룬이라도..."
"싫습니다."
저택 관리인은 짧지만 명료하게 대답했다. 아린은 그런 대답을 예상조차 하지 못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한다.
"뭐야?"
"적당히 하십시오 누님. 적대 플레이어들이야 원래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사이였지만, 이제 아무 관계도 없는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십니까?"
이 딱딱하고 충성스런 동생에게 누님이라고 불려본게 얼마만일까. 아린은 그런 감상을 뒤로하며 열을 냈다.
"좋아. 너 아니어도 시킬 사람은 많으니까..."
"소용 없습니다. 이미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놨습니다."
"... 너!"
격노에 사로잡힌 아린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이. 저택 관리인이 그녀를 쏘아보며 다그치듯 말한다.
"안 그래도 길드원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껏 누님께서 쌓아두신 인망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 있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옛 길드원의 가족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는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만약 그녀가 그런 짓을 벌인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충성파도 모조리 떨어져나가리라. 아린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하곤 입을 꾹 닫았다.
어렵사리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내뱉은 것은 다름이 아닌 사과였다.
"미안해. 내가 너한테 못 할 짓을 시켰구나."
"아닙니다. 제게 못할 짓이 아니라, 누님 본인에게 못할 짓입니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져요."
"그럼 전 일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보아하니 알룬쪽에서 대비책을 마련한 것 같은데... 이대로 암살을 진행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 그만두지요."
아린은 방을 나서는 그를 붙잡곤 걱정스레 물었다.
"... 넌 안 떠날거지?"
"저는 언제나 누님의 편입니다."
저택관리인은 아주 엷게 웃어보인 뒤 그녀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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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맹세를 받은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나는 고성의 곳곳에서 솟아오른 비보를 접하곤 혀를 씹었다. 아린의 첩자가 숨어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주변인들의 죽음에 당황한 플레이어들은 성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내 신도들은 아예 모두를 모아두고서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 밝혔다.
여기서 아린이 암살을 진행한 것이라고 우겨도 괜찮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기아스에 대해서 밝히는게 좋을 것이다. 기아스의 진실을 알게된 동맹들은 반역이라도 일으킬 것 처럼 소란을 피워댄다.
"배신을 하면 무조건 죽게 만드는 권능이라고? 그, 그럼 우릴 속인거잖아!"
"알룬님의 특성 스킬은 조금 다른 종류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건가?"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충성 맹세 따위는..."
갖가지 반응들이 용솟음치는 찰나. 교단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아슬론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거구의 전사가 무거운 표정을 보이자 알현실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 조용해졌다.
아슬론은 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꺼냈다.
"정말로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있었던건가?"
"네에?"
"충성맹세를 어기면 당연히 죽어야지. 만약 알룬님께 그런 권능이 없었더라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았을거다. 내게 죽는 것 보다는 기아스로 빠른 죽음을 맞는게 더 편할걸."
아슬론의 말에 더욱 아우성치는 사람들. 아슬론은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마저 압도할만한 성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언제 제발 좀 충성을 맹세해달라고 매달린 적이 있느냐? 알룬님께 충성을 맹세한 것은 너희다. 바로 너희가 알룬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기로 했다."
"하,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알룬님이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마음대로 죽여버린다 해도..."
"걱정마라. 알룬님께서는 그런 소인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소인배를 주축으로 삼고있는 진영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의미가 없는 논란 따위는 아린을 해치우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이 자리의 사람들은 내게 목줄을 쥐여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당장 내가 명령만 내려도 무조건 따라야하는 이들이 무슨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현명한 축에 속하는 플레이어들은 벌써부터 그것을 깨닫곤 다른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레니아가 아슬론의 옆에 나서며 모두를 조금 진정시켰다.
"여러분들께 걸린 기아스는 무척 강력하지만 그 조건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아린을 해치운 뒤에는 조건을 조금 조정하여 독립할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내가 각 교단의 주교들에게 걸어둔 기아스는 '내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일탈 행위를 한다 해도, 내가 그것을 배신이라고 간주하지 않으면 기아스가 발동되지 않는다.
물론 조건을 조정해봤자 목줄이 걸려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레니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에 화색을 띄었다.
그들이 자청해서 충성맹세를 한 것은 사실인 만큼, 명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꿇릴게 없다.
내 신도들은 어렵사리 반발을 잠재우곤 재빨리 원정 준비를 이어나갔다. 회의실에 도착한 레니아가 아까 논의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현재 성왕국은 철저한 수성으로 응전하고 있습니다. 괜히 반격을 시도해봤자 천리안에 읽힐게 뻔하니까 시간을 끄는거죠."
"이제 전력이 충분하니 자유 교역 도시로 진군할건가?"
아슬론이 기대를 가득 품고 묻자 레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성왕국 쪽 전선의 본대를 칠겁니다."
우리는 원래 자유 교역 도시를 점령하여 아린의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린을 완전히 패배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아린과 성왕국, 그리고 우리의 3강 체제가 완성된다.
신성 제국이 일어나기 전부터 유지되었던 3강 체제는 서로를 견제하며 평화를 누리는데에 꽤나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린은 가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
레니아가 회의실의 모두에게 현재의 목표를 재설정했다.
"성왕국 쪽은 로웬님의 마법이 있으니 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유사시에 그쪽 국민들을 저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당장은 아린을 해치우는데에 총력을 기울일게요."
"꼭 아린을 죽여야 할까요? 그쪽의 정예들을 모조리 죽이려면 우리쪽도 적잖게 상할 것 같은데..."
아가르타가 살짝 걱정스레 묻자 레니아가 잠시 고민했다.
"숨통을 끊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유 교역 도시를 빼앗고 남부에서 몰아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알룬님께 남부지방 전체를 바칠 수 있게 될거에요. 카엘님, 병력 편제는 어떻게 됐지요?"
"아직 진행 중이긴 한데, 금방 끝날겁니다. 알룬님의 깃발 아래에 온전히 뭉치니까 일이 굉장히 편하네요. 더 이상 교단 사이의 알력 따위를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이제야 일이 좀 제대로 되는 것 같군."
드물게도 시원한 표정을 지은 아슬론이 즐겁게 말했다. 그는 내 새로운 방식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반면 나는 아직까지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성난 신하들의 외침이 자꾸만 귓가에 메아리친다.
폭풍전야.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쟁이 재개되니, 내가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알레디우스에게서 양도받은 용족의 사체들을 이용하여 성물을 만들었다. 아린측은 이미 내가 만든 장비로 무장하고 있으니 이제와서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일을 해야할 것 같다.
평소에는 현실감이 없는 몸이 조금 원망스러웠으나, 지금만큼은 피로가 쌓이지 않는 이 몸이 고마웠다.
며칠 뒤. 정비를 마친 군대는 성왕국 쪽의 전선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이번 원정대의 규모는 자그마치 2만. 이전의 3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이다.
질 좋은 장비로 무장한 병력은 깃발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기세 좋게 나아갔다. 천리안을 가진 아린을 상대로 수 싸움을 벌이는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지라, 레니아의 전략은 무척 단순했다.
"본대를 빠르게 움직여서 단숨에 측면과 후면을 노립니다. 저쪽이 알아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움직여야하니 서둘러주세요."
우리는 그녀가 입안한 기동전을 실행하기 위하여 보급선을 줄이는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귀중한 재료들을 써가며 아공간 주머니 같은 성물을 잔뜩 만들고, 식량의 대부분을 특수하게 가공하여 부피를 줄였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빠르게 나아가는 군대를 내려다봤다.
- 작가의말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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