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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舶 님의 서재입니다.

흑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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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金舶
작품등록일 :
2015.04.20 05:42
최근연재일 :
2015.07.0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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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09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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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필독자료>중원대륙에 있었던 고려제국

DUMMY

오늘은 원고려연합군 1 차 일본정벌을 통해서 중원대륙에 있었던 고려제국의 흔적을 찾아봅니다. 원과 고려가 중원대륙에 함께 있었느냐 아니면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느냐에 따라 전쟁에서 전략이 아주 달라져야 할테니까요. 사가들이 려몽연합군이라 부르는데, 저는 원고려연합군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고려는 몽고족에게 항복하였으며, 몽고 쿠빌라이는 대원제국을 건국한 후이므로 원고려연합군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황제국으로 했던 모든 국가의례관습을 왕국으로 격하하도록 지시하며, 고려는 그에 따릅니다.


고려원연합군 1 차 왜국정벌 전쟁의 개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제국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 다음 정복 대상으로 왜국을 선택합니다. 이때는 아직 남송이 임안부에 도읍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만, 마침내 쿠빌라이는 벼루어왔던 왜국정벌을 결정합니다.


먼저 드러난 사료에 따라 일자별로 정리해봅니다.


1274 년 1 월 3 일 원제국 황제의 명령서가 고려국에 접수됩니다. 명령은 왜국을 공략할 군병과 군수물자를 싣고갈 전선 900 척을 5 월 말일까지 제작하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원제국과 고려국 연합군 총수는 4만 명 입니다.


1274 년 고려국은 목수 3만 명을 동원하여, 5 월 말까지 전함 900 척을 제작 완료합니다.


1274 년 9 월 말 까지 몽골군 25000 명이 준비되어, 합포(지금 한반도 마산 지역)에 집결됩니다. 고려군 15000 명도 준비되고, 또 군량과 마필, 건초, 무기류 등도 준비가 됩니다.


1274 년 10 월 3 일 연합군은 합포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향합니다. 마산에서 대마도 까지 70 킬로미터 거리입니다.


1274 년 10 월 5 일 연합군은 대마도에 도착하여 방어군과 최초의 접전을 벌립니다. 대마도주는 방어군병 80 명을 데리고 나와 싸우다가 1 시간 만에 전원 전사합니다. 4만 대 80 의 싸움. 싸움이랄 것도 없겠지요.


1274 년 10 월 (일자 없음) 연합군은 대마도를 떠나 이키섬으로 향합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은 70 킬로미터 거리입니다.


1274 년 10 월 15 일 연합군은 이키섬에서 왜국 수비병 1000 명을 맞아 전투를 벌립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왜병 1000 명 모두 전사합니다. 4만 대 1000 의 싸움 역시 싸움이랄 것도 없겠지요.


1274 년 10 월 18 일 연합군은 이키섬을 출발하여 큐슈 하카다 만에 80 킬로미터를 항해하여 10 월 19일 도착합니다. 왜국 수비병 17000 명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1274 년 10 월 20 일 연합군은 상륙하여 왜국 수비병과 전투를 벌립니다. 왜국군은 패퇴하여 성으로 숨어들어 수성전에 돌입합니다. 연합군은 해안에서 배로 돌아와 휴식을 하게 합니다.


1274 년 10 월 21 일 새벽 갑자기 닥친 태풍에 배가 절반이상 파괴되고 일만오천 명이 물에 빠지는 흉사를 당하여 연합군은 패퇴하여 다시 합포로 돌아옵니다.

[그림 (오른쪽)여몽1차왜정도]


- 여기서 고려사 번역본을 잠시 보기로 합니다.


1274 년 겨울 10월


을사일.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지휘하게 하고,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을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를 부사(副使)로,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事)로,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副使)로 임명했다. 또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나유(羅裕)와 박보(朴保)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반부(潘阜)를 부사(副使)로 임명해 삼익군(三翼軍)이라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도원수(都元帥) 힌두[忽敦 : ?都]와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몽고·한족(漢族) 연합군 2만 5천, 아군 8천, 초공(梢工)·바닷길 안내자[引海]·선원 6천 7백 명과 전함(戰艦) 9백여 척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다. 이끼도[一岐島]에 이르러 천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삼대같이 즐비했다. 날이 저물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들이닥친 폭풍우로 전함(戰艦)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 많이 침몰했으며 김신(金侁)은 익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렬왕 즉위년(1274) 갑술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1) 진군 일정으로 보면 고려국은 중원대륙에 있었다.


먼저 중원대륙에 원제국이 있고, 고려국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가정하여, 제가 원나라 군권을 갖은 전략가가 되어 왜국 공략에 가장 좋을 전략을 세워봅니다.


- 한반도에 있는 고려국에게 전선 900 척을 제작하라고 하는 것을 동일합니다.

- 저는 몽골군 25000 명을 육지로 이동시키지 않고 8 월 말까지 천진 근처에 결집 대기 하도록 합니다.

- 고려군 15000 명에게 전선을 끌고 천진에 와서 몽골군 25000 명을 싣고 다시 합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군병을 효과적으로 전장에 보내는 방법입니다. 육로로 움직이는 것보다 해로로 움직이면 전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 또 연합군에게 대마도를 거치지 말고 교토(京都 당시 왜국의 도읍)를 바로 공격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제국의 전략가는 이런 전략을 세우지 않았나 봅니다. 어쩌면 섬이 많은 일본해라 암초도 많을 것이며 그래서 대마도부터 공격 시작을 하였나 그렇게 양보하기로 합니다. 또 군병 25000 명을 육로로 한반도에 보냅니다. 또 원제국의 대장군은 대마도를 공략한 후 무슨 일을 하면서 9 일이란 시일을 소모한 것일까요? 이 대목이 좀 이상하지 않는가요? 전쟁이라면 적이 예상치 못할 때에 기습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그야말로 병법의 기초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중원대륙에 있던 고려국을 한반도에 있는 것처럼 조작을 하다보니 그렇게 일정을 어거지를 만든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자료조사를 통해 서기 1274 년 경 바다에서 항해하는 범선에 대해 각종 값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당시 범선의 속도를 따져봅니다. 목표 방향에 대하여 순풍(順風)의 경우 시속 20 킬로미터 입니다. 역풍의 경우 시속 5 킬로미터 입니다. 그러므로 평균적으로 시속 10 킬로를 가정하면 상당부분 실제와 맞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마산에서 대마도 70 킬로미터인데, 이 거리면 7 시간이면 도착합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 역시 7 시간이면 도착하고요, 이키섬에서 하카다만 역시 8 시간이면 도착합니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왠지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제 고려국이 중원에 있었다고 가정하여 진군 일정을 추리하여 만들어 봅니다. 그때의 고려국 도읍은 개경으로 지금 산동성의 임치 근방이며, 원제국의 도읍은 북경 근방입니다. 그래서 연합군의 집결지로는 지금의 천진 근처가 가장 적절합니다. 저는 천진에서 4만 명이 집결하여, 전선을 타고 출발하였다고 가정합니다.

[그림 (왼쪽) 여몽1차 왜정 항로 고려가 중원대륙에 있을 때]


- 당년 10 월 3 일, 여몽 연합군 사만 명은 합포(중국 천진 근처)를 출발하였다. 천진에서 대마도까지의 항해로는 총 2500 킬로미터라 추정해보며, 시속 10 킬로미터로 항해시 250 시간 소요되며, 약 10 일의 일정입니다.

- 당년 10 월 14 일, 북서풍을 타고 11 일간의 여정 끝에, 왜국 대마도에 도착하여 한 시간만에 왜국 수비병 80 명을 살상하고 승리합니다. 이키섬으로 7 시간 걸려서 이동하여 앞바다에서 쉬고, 다음날 새벽 공격을 시작합니다.


- 당년 10 월 16 일, 이키섬에는 왜국 수비병 일천 명이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접전 끝에 일천 명 전원을 살상하고 승리합니다. 이키섬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하카다만으로 8 시간을 걸려서 이동하여 10 월 19 일 도착, 앞바다에서 밤을 보냅니다.

- 당년 10 월 20 일, 새벽에 하카다만에 상륙하여 전투가 시작됩니다. 왜국 수비병 17000 명은 연합군을 기다렸다가 대항을 하나 패퇴하여 성으로 도망가서 성문을 굳게 잠급니다. 연합군은 이날 육지에 머물자는 고려국 김방경 장군의 제안을 무시하고, 왜국의 습격이 두렵다고 주장하여, 배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


- 당년 10 월 21 일 한 밤중과 새벽, 갑자기 불어온 태풍에 전선 과반이 파괴되어 침몰합니다. 이로써 연합군 13000 명 이상 사망합니다. 왜국 원정군은 이렇게 허무하게 패퇴를 합니다.


왜국 정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국은 과연 한반도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중원에 있었을까요? 하카다만에서 패퇴한 연합군은 역순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그들은 합포에 몇 일 걸려 도착하였을까요? 10 일 아니면 20 일 이내에, 그도 아니면 30 일 이내에, 아니면 그 이상 걸려서 도착했을까요? 저는 그 시일이 길면 길수록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 대륙에 고려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깁니다. 이 글 마지막에 연합군 생존자들이 합포에 도착한 날자를 적어놓습니다. 독자 제위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2) 전선 900 척을 제작할 능력으로 보면 고려국은 중원대륙에 있었다.


먼저 고려국이 제작한 전선의 크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군병 4 만 명과 그들의 군량, 군마와 건초, 각종 철포류, 도검, 장창 활 화살 등 무기류 등도 갑옷 등을 먼저 무게 환산 해봅니다.


먼저 사서의 내용을 봅니다.


군병 1 명의 년간 미곡 소요량은 당시 자료에 3 석을 계산하였습니다. 환산하면 200 킬로그람 정도입니다. 4 만 명에 대하여 13만5천 석을 준비하였군요. 아마 유실(遺失)분에 대한 것도 계산한 모양입니다. 군마(軍馬)는 기마병이 아닌 경우라도 군장 수송용으로 군병 4 명당 1 필은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사람이 말 노릇을 해야하게 되니까요. 군마 만 필을 배에 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건초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저는 일일이 게산을 하여 평균적으로 전선 900 척에 척당, 45 명이 승선해야 하며, 미곡 150 석과 말 11 필을 실어야 하며, 마차 5 대와 물과 먹을것, 기타 군장, 무기류, 건초 등 계산하여 전선은 평균 적재톤으로 50 톤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장군들이 먹을 술과 돼지, 닭, 양 같은 것들도 산채로 모두 준비하였습니다. 계산해보니 목조 첨저형(바닥이 뾰족한) 3 돛 범선의 경우 적재톤수 50 톤이면 길이 27 미터, 넓이 7 미터, 깊이 3.5 미터 정도 크기입니다.


이런 배를 사서에 나온 것을 보면 고려국은 900 척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원제국 쿠빌라이 황제는 항복하여 속국이 된 고려국에게 왜국을 침공할 수 있는 전선을 건조하라 명령합니다. 지원(至元) 4 년(1274 년이며 지원은 쿠빌라이의 연호임) 1 월 3 일에 이 명령은 고려국에 접수 되었는데, 그 때부터 배를 만들 목수(木手)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3만 명을 모집하며. (전선 제작 인원 3만 명이 먹는 미곡 량은 33750 석 정확하게 사서에 나오는군요.), 1 월 16 일부터 조선(造船)에 사용할 나무를 산에서 베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5 월 30 일까지 총 900 여 척의 전함을 만듭니다. 넉 달 반 만에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지요.


저는 먼저 고려국의 재정 규모를 추정해보고 전선 900 척 제작이 국가에 얼마만큼 부담을 주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고려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고려국의 재정 규모는 얼마일까요. 조선국 초기의 기준으로 계산을 해본다면. 개국 당시 조선국 국민 수 약 500만 명입니다. 당시 현 수로 계산하면 1개현 평균 국민 수 8만 명으로 보면 62 개 현입니다. 고려국이 중원대륙에 있었다면, 조선국 개국과 비슷한 명나라 개국 시점 기준으로 맞춰보면, 전체 1000 개 현으로 보고, 1 개 현당 8 만 명, 계산하면 명나라 인구는 개국 시에 8000만 명 수준입니다. 여기에서 살기 좋은 동해안 인접 지역을 고려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즉 명나라의 산동성, 하남성, 남직예성, 절강성, 호광성, 강서성 이것을 더하면, 고려국 차지 현수 530 개 현입니다.


명나라 시기에 50 톤 목조범선 제작비는 척당 은자 1000 량 소요로 산정하여 총 90만 량 예산이 필요합니다. 인구 500만 조선국 초기 국가재정 년간 30 만 량이며, 이것이 한반도에 있을 고려국의 재정규모입니다. 중원대륙에 있었다면 인구 4200만 고려국 재정규모는 8 배 이상으로 250만 량 이상이며, 전선 900 척 제작비용 90 만량은 한반도에 있을 경우 3 년 분 재정이나 중원대륙에 있을 경우 약 4.5 개월 분에 해당합니다. 독자분 들 중 국가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비용은 민간에서 하는 것보다 절반이하로 소모될 것이라 주장하는 분도 계실터이지만, 저는 그 반대입니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는 무보수이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더욱 태만할 것이며, 효율이 떨어질 것이지요. 그러므로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것으로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연 고려국이 전선 제작 인력 3만 명을 그토록 빠른 시간에 모집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약 4.5 개월 들어서 900 척을 제작하려면 한반도에 있을 고려국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고려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고려국은 중원대륙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3) 군사전략으로 보면 사서에 나온 사실이 맞지 않다. 그러므로 고려국은 중원대륙에 있었다.


원제국 군병 2만5천 명은 몽고인과 한인의 합해진 군대였다고 나옵니다만, 그들이 북경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남쪽 합포(마산)에 도착하였다고 사서에 나옵니다. 북경에서 마산까지 거리는 육천 리 입니다. 2500 킬로미터로 산정합니다. 군대는 왜국정벌에 필요한 군량은 고려에 준비시켰으니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동 중에 먹을 군량을 갖고 가야하지요. 그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였을까요, 아니면 도보로 이동하였을까요? 말을 탓다면 시일은 빨라지지만 말먹이를 준비해야하고요, 도보라면 사람이 먹을 것만 준비하면 될테지요.


아마 도보 이동이 맞을 것입니다. 몽고군병은 말이 있었다고 해도 한족들에게까지 말을 주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보로 2500 킬로를 걸어가면 시일이 얼마나 걸릴까요? 맨손은 아니겠지요, 상당한 개인(個人)군장(軍裝)을 한 상태라 가정해봐야지요. 명나라 역참제도에서 역간 평균 거리가 30 킬로미터 쯤이었으니 하루 30 킬로로 계산해 봅니다. 2500 킬로미터를 90 일 걸려서 이동하여 합포에 도착했다고 봅니다. 석달 걸린 셈이네요.


먼저 이동 중에 석달간 25000 군병이 먹을 군량 계산입니다. 1 인당 50 킬로그람 필요합니다. 총 1250 톤 입니다. 이걸 사람에게 지울 수 없으니 말과 마차를 동원해야 하겠습니다. 마차 1 대당 2.5 톤 싣는 것으로 계산해봅니다. 마차 500 대가 필요하군요. 그에 따라 말 500 마리가 3 개월 먹을 건초가 필요하고요. 다시 마차를 추가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다른 군장비 등을 포함하여 적어도 마차는 1000 대가 필요합니다. 몽고군병들이 가져가는 말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계산해보니, 처음에 말했듯이 한반도에 고려국이 있었다면 전선을 만들어서 배를 북경 근처로 가져가서 군병과 일체를 배에 싣고 왔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서에서는 몽고병이 육지로 온 것으로 나옵니다. 뭐 육지라는 말도 없이 몇일에 도착했다고 나오는 것이지요. 군대의 전략에서 가장 먼저 따지는 것이 군량입니다. 이런 전략원칙에 비추어 보면 두말할 것 없이 고려국은 한반도에 있을 수 없지요. 조작을 하기는 했으나 모두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


첫 부분에 남겨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1274 년 겨울 11 월


기해일. 일본 원정군이 합포(合浦)로 귀환해 오자 왕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장일(張鎰)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게 했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전사한 자가 무려 13,500 여 명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렬왕 즉위년(1274) 갑술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기해일은 11 월 27 일 입니다. 패퇴한 후 36 일 걸려서 도착한 것입니다. 대마도가 경치가 좋아서 구경하고 오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아니면 전쟁에 이기지 못하여 처벌받을까봐 고의로 늦게 도착한 것일까요? 합포가 마산이라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36 일이나 걸리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099연합군해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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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자릿세를 내라 15.06.15 939 15 16쪽
73 난정의 소풍(逍風) 15.06.13 1,229 18 15쪽
72 아기씨 받기 실패 15.06.13 692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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