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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舶 님의 서재입니다.

흑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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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金舶
작품등록일 :
2015.04.20 05:42
최근연재일 :
2015.07.0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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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18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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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필독자료>중원대륙에 있었던 고려제국

DUMMY

사서에서 서기 1126 년 정강의변(靖康之變)이라 부르는 사건 다음의 국서 3 종입니다. 금나라는 40 일간의 공격으로 1126 년 11 월 북송의 도읍 개봉을 함락하고 황제 부자(夫子)와 황족, 신료 400 여 명 등 포로 수천 명을 잡습니다. 이로써 송나라 세력은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북송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는 고종으로 즉위하고 임안에 도읍을 하여 남송을 세웁니다.


** **


서기 1127 년 (고려 인종 5 년, 정미년) 9 월 병진일

왕이 천성전(天成殿)에서 금나라 임금이 보낸 조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명을 받들어 강한 적국을 멸망시키고 새나라를 세워주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이 아니니, 짐의 울타리가 되는 제후들에게 이 사실을 널리 알려야 마땅할 것이다. 당초 북송[北宋]이 유주(幽州)와 연주(燕州)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서로 통교하고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기에 우리 선황제께서는 그 간절한 요청을 애긍히 여겨 바로 허락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맹세를 저버린 채 도리어 우리로부터 도망간 자들을 받아들여 상호간에 원한을 만들었으며 뒤이어 황제가 된 조환(趙桓)도 조길(趙佶)이 했던 짓을 되풀이 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포용했으나 그들은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못했으며 결국 하늘과 사람의 분노를 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군대는 단 한 번의 출정으로 쉽사리 그들의 소굴을 전복시켰으며 이로써 그들의 종묘[宗廟]는 지킬 수 없게 되었고 황제 부자는 포로가 되었다.


서로 간의 불화가 깊어져 결국 왕조가 교체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임금의 자리[神器]는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해 새 황제를 책봉하기로 결정했다. 그 나라 백성들도 지극히 어진 이를 염두에 두고 다들 그 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사람을 추천해 왔다. 이에 금년 3 월 7 일 원수부(元帥府)에 지시해, 사람을 보내 송나라 황제 부자와 연왕(燕王)·월왕(越王)·운왕(?王) 등 황족 470여 명을 우리 조정으로 압송해 오게 했다. 또 멸망한 송나라에서 태재(太宰)를 지냈던 장방창(張邦昌)을 대초황제(大楚皇帝)로 책봉해 금릉(金陵)에 도읍하게 했다. 아아! 죄로 가득 찬 악인의 수괴를 잡는 성과를 거두고 천하를 새롭게 하는 위업을 이룩했으니 마땅히 함께 경축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에게 관복, 서대(犀帶), 금은, 비단필 등의 물건을 내리니 도착하거든 받도록 하라.” [네이버 지식백과] 인종 5년(1127) 정미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 **


금나라는 북송의 황제 부자(父子)를 포획하여 압송해 감, 이로써 북송이 망하였으며, 남송이 시작됨. 대초국의 도읍 금릉(金陵)이 현대의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이라고 하지만 사천성 어느 곳일 가능성이 많음.


** **


서기 1128 년 (고려 인종 6 년, 무신년)

3 월 정해일. 송나라의 강수(綱首)인 채세장(蔡世章)이 고종(高宗)의 즉위를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왔다.


6 월 정미일. 송나라에서 국신사(國信使)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양응성(楊應誠)과 제주방어사(齊州防禦使) 한연(韓衍) 등을 보냈는데, 양응성이 강정(江亭)에 이르자 접반소(接伴所)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우리 일행이 곧 벽란정(碧瀾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귀국은 예절을 깍듯이 지키는지라 우리가 미리 일러두지 않는다면 필시 번거로운 의례를 마련하느라 헛된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두 황제께서 먼 곳에 계시기 때문에 신하된 우리로서는 음악을 듣거나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전례에 따라 국왕께서 황제의 조서를 받고 표문을 올릴 때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 외에 잔치 자리에서 풍악을 잡히는 일은 사양하겠습니다. 아울러 의대(衣帶)와 화주(花酒)도 사양하겠습니다.”


6 월 기사일. 수창궁에서 송나라 황제의 조서를 접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운이 중도에 쇠미해져 변방에 변란이 발생한 바, 왕위를 계승한 짐이 이제 천하를 안정시킬 계책을 세우려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삼한은 여러 대에 걸쳐 우리와 동맹을 맺은 나라로 진작부터 빈번히 사신을 보내 수많은 공물을 바쳐왔으나 어려운 우리의 사정 때문에 오랫동안 답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안 허다한 변고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평소에 품은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이에 금나라에 보내는 편지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노니,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는 것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국난을 극복하고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니 반드시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첨부하는 변변치 못한 물품들은 의전상 관례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양응성과 한연 등을 국신사와 부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아울러 예물로 관복, 도금한 은그릇, 채색한 포백, 산차마(散差馬) 등의 물품을 내린다.”


양응성 등이 객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음과 같은 어록(語錄)을 올렸다.


“예전 주나라 왕실이 큰 난관에 처하자 어떤 사람이 진(晉) 문공(文公)에게 ‘제후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우선 주나라 왕실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니, 제후들이 신임하게 만드는 것이 또한 가장 의로운 일입니다.’고 충고했습니다. 이 충고에 따라 진 문공은 주나라를 안정시켰고 결국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 사실은 역사기록[書典]에 실려 아득한 후대에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발해의 동쪽에 자리잡은 귀국은 그 곳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로 불렸으며 대대로 우리에 대해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국교를 맺은 이래 우리 조정은 조금도 변함없이 귀국을 각별히 예우해 은혜를 베풀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 곤경에 처해 있는데다 뜻밖에 오랑캐들이 간교한 책동을 부리는 바람에 두 분 황제께서 멀리 피랍되어가는 일까지 발생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한시도 편히 지내지 못하고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는 형편입니다.


돌이켜 보면 귀국은 예와 의를 굳게 지켜 왔으며 또한 우리 조정으로부터 타국에 견줄 수 없는 큰 은혜를 오랫동안 받아 왔습니다. 바야흐로 이 위급한 때를 맞아 우리의 요구에 부응함이 도리상 당연할 것이며 진실로 대의에 따라 황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는 처음 보위에 오르시자 사신을 보내 고려국왕의 안부를 묻게 하고 또한 해로를 통해 피랍되어간 두 황제를 모셔오도록 분부하셨습니다. 황제께서 보내신 조서를 받던 날에 직접 하나하나 말씀드린 바가 있으며 이어 관반소(館伴所)에 보내 거듭거듭 정성을 다해 간곡히 부탁드렸으니 모든 것을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귀국에서는 금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험준해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지만, 과거 우리 역대 조종대에 금나라 사람이 귀국의 사신을 따라와 공물을 바칠 당시에도 길이 잘 통했거니와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귀국에서는 금나라가 역시 이 길을 통해 사신을 보낼까 걱정하시지만, 금나라는 거란을 쳐부순 뒤로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해서 사신을 보내오니 필시 이 길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금나라 사람들이 이 일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사단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시지만, 저희들은 이번 사신 길에 다만 호위병 110명을 대동하고 국서 및 예물을 가지고 가서 화친을 도모할 뿐 서로 싸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귀국은 단지 해로로 우리 일행을 국경까지 안내해 주면 족할 것입니다. 또한 먼저 금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서 가부간에 통보를 받으면 그만이며, 혹시 사신의 인원수를 줄이라고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따를 것이니 그 때문에 쓸데없는 사단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일행이 귀국의 길을 경유해 두 황제를 맞아오게 된다면 2백 년에 걸친 충성스러운 의리가 손상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역대 황제께서 돌보아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이전보다 더욱 크게 귀국의 공로에 보답할 것이며, 천하의 모든 나라들도 더욱 귀국을 우러러 보고 그 높은 의리에 감복할 것이니 진실로 끝없는 경사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귀국의 중신들도 모두 우리 조정을 받들어 도운 충성으로 장차 길이 전해질 포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일시적인 저 개인의 이익을 노린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언이니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의논하여 저희들의 일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갑자기 세력을 떨치게 된 저 오랑캐들이 우리 중화와 오래 전에 맹약했던 바를 저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국왕께서는 이 사안에 대해 지체하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는 조상 이래로 성의껏 상국을 섬겨왔습니다. 때문에 신종(神宗)으로부터 태상도군황제(太上道君皇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같은 집안처럼 여기셨으니, 그 각별한 은혜와 예우를 어찌 말로써 쉽사리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께서 구태여 보답을 요구하지는 않으시겠지만 감격한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저의 심정입니다.


두 황제께서 적국으로 피랍되시는 바람에 온 나라가 울분에 차 근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 때 달려가 위로의 말씀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신하된 나의 마음이 어찌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현 황제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여러 대신들의 충성스러운 뜻은 필시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킬 터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돕는다면 어찌 두 분 황제께서 황량한 오랑캐 땅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시겠습니까? 조속히 도읍의 대궐로 돌아오셔서 온 천하 백성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늘 축원하는 바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등극하시자 먼저 시신(侍臣)편에 조칙을 전달하게 하시면서 저희나라로 하여금 해로를 터서 두 분 황제를 맞아오게 분부하셨으며, 사신 일행이 조서를 전달하면서 또한 사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이어 공문을 보내 간곡히 뜻을 밝혔으니 어찌 분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저 여진족은 애초 각 부락별로 살면서 정해진 군주도 없었기에 진작부터 우리나라에 신하로 복속했으며, 때로는 우리 사신들을 따라서 상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강성해져서 늘 국경지대에 긴장을 조성하다가 근자에는 결국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상국에 대해 침략을 감행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후 군사력이 더욱 커져 저희나라에 신하를 일컫도록 강요하면서 외교상의 의례를 일체 우리가 과거 요나라에 했던 것과 같이 행하게 하는 바람에 우리로서는 부득이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이 호전적인데다 우리가 상국에 대해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국경 가까이에 있는 성과 보루를 수리하고 병사를 주둔시켰으니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의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터에 상국의 사신 일행이 길을 빌려 자기네 땅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해서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앞으로 그들은 필시 상국에 답방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우리나라의 길을 빌려 사신을 상국에 입조시키려 할 것이니, 그리되면 우리가 무슨 말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해로가 편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면 우리나라는 국토를 보전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며 그들은 장차 상국의 회남(淮南) 양절(兩浙) 등 연해 지방도 넘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일만 없다면 우리가 왜 감히 황제의 분부를 좇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실로 중대한 일로써 저희들이 꾸며내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신들께서는 저희의 충정을 잘 살펴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고 돌아가 황제께 그대로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종 6년(1128) 무신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 **


이상 3 종의 국서를 독자분들이 자세히 읽어보면 모두 알게될 것입니다. 이씨조선에서 기록한 고려사는 완전 조작된 것이며, 이렇게 글 중에서 서로 논리가 어긋나는 것도 발견됩니다. 다른 것은 버려두고 해로에 관한 것만 살펴봅니다. 송나라는 고려에 해로를 빌려달라고 하며, 고려는 그것을 거절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해당 고려사 원문에서 해로라고 번역된 어귀들입니다.

해로를 통해 = 就煩津發 (배가 닿는 곳이 진 津 입니다.)

귀국은 단지 해로로 우리 일행을 국경까지 안내해 주면 족할 것입니다. = 貴國第 津發, 使人一行至界上.

저희나라로 하여금 해로를 터서 = 欲令小國津發前去,

해로가 편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면 = 苟知海道之便

- - - -


남송은 임안(臨安)에 도읍 하였다고 역사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에 항주시내에 있는 임안이라는 곳이 남송의 도읍이라고 합니다. 또 회남(회하의 남쪽), 양절(전단강의 남북) 지역을 송(상국)이 잃을 것을 염려하는 부분이 나와있는데, 이것 역시 고려가 잃게될 것을 염려해야 문맥에 맞습니다. 또 남송은 고려에게 해로를 빌려달라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이 바닷가에 있다면 바로 자기들이 배를 타고 떠나면 되는 것인데요. 바다건너 저멀리 떨어져 한반도에 자리해있다는 고려에게 해로를 빌려달라고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송나라 사신이 육로로 고려에 왔을까요, 아니면 해로로 고려에 왔을까요? 벽란정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차라리 바로 그 길로 금나라에 찾아가지 않고서요?


유일하게 해로를 빌려달라고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남송이 바닷가의 항구를 갖지 못하고 있으며, 항구에 갈 수 있는 방법은 고려가 해로를 터주는 길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뿐이지요. 남송의 도읍은 현재의 운남성 내에 있었으며,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길이 멀고 험했으므로, 당시에 현대의 산동, 강소, 하남, 절강, 복건, 광동, 안휘, 강서, 호광, 광서 지역까지 점유하고 있던 고려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고려제국 황제에게 송나라 왕이 청원을 하였으며, 고려황제가 거절하는 것을, 고려왕에게 송나라 황제가 명령하는 것으로 조작하여 바꿔치기한 것이지요. 그러나 해로(海路)라는 것만은 어쩌지 못해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추구하여 조작임을 밝혀낼 것이라고는, 명나라와 이씨조선의 송사, 금사, 고려사 조작한 놈들이 꿈에도 짐작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요, 어쩌면 조작을 해야만하는 사가(史家)가 피눈물자국으로 남겨두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고요. 역사는 이긴자의 조작물입니다. 그리고 원시부터의 모든 역사 역시 조작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제 지워진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간혹 남아있는 진실의 조각들은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상과 같은 검토를 한 후 아래와 같이 고려, 대금, 남송 삼국의 위치를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남송은 원나라에 멸망 후 그 유신(遺臣)들이 항주와 영파 근처에서 상당기간 복송(復宋) 운동을 계속합니다. 첨부한 지도에서 고려국 하단 물음표(?) 있는 곳은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후 원나라에 통치권을 넘겨주었지 않나 짐작되는 부분이기에 구획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있는 나라가 무엇인지는 완전히 삭제를 하였으므로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림 남송시대 삼국의 위치]

078남송위치.jpg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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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2 金舶
    작성일
    15.06.18 12:43
    No. 1

    내일, 모래 2 일 쉬게 되었습니다. 애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金舶
    작성일
    15.06.20 18:48
    No. 2

    고려제국 수도 개경은 현재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로 추정됩니다. 제남이라 생각하시는 분을 염려하여 부기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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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필독자료>중원대륙에 있었던 고려제국 15.07.09 1,280 7 17쪽
98 절현(絶絃)의 고사(古事) 15.07.08 1,095 13 15쪽
97 그냥 덮어두어야 하는 이유 15.07.07 1,072 14 14쪽
96 고소(告訴) 보다는 협상(協商) 15.07.06 794 14 12쪽
95 아린총관 자리잡다 15.07.04 992 15 15쪽
94 비룡방의 보고서(報告書) 15.07.03 1,152 13 14쪽
93 <필독자료>과감한 추측 15.07.02 1,101 13 13쪽
92 속죄은(贖罪銀)을 내시오 15.07.02 1,041 15 13쪽
91 거산(巨山)에서 일어난 참사(慘事) 15.07.01 1,100 15 15쪽
90 호구(虎口)에 들어서다 15.06.30 970 14 14쪽
89 전쟁준비 +1 15.06.29 1,187 12 15쪽
88 칼을 뽑으면 칼이 주인노릇한다 15.06.28 973 17 12쪽
87 배반하지 못하는 이유 15.06.27 961 14 12쪽
86 기사회생(起死回生) +2 15.06.26 1,131 13 11쪽
85 포박그물에 잡히다 15.06.25 1,080 16 13쪽
84 분노의 수레바퀴 15.06.24 1,006 15 15쪽
83 흑응회 전토 500 무를 갖추다 15.06.23 1,120 13 11쪽
82 천가 둘째 공자 15.06.22 1,084 14 9쪽
81 선아의 눈물 15.06.22 1,129 16 11쪽
80 소산(小山)의 비밀(秘密) +1 15.06.20 1,229 17 10쪽
79 미필적 고의(故意) 15.06.20 866 15 10쪽
» <필독자료>중원대륙에 있었던 고려제국 +2 15.06.18 1,457 14 16쪽
77 누르하치 딸을 시집보내다 15.06.18 1,192 13 16쪽
76 조선국(朝鮮國) 병탄을 상주(上奏)하다 15.06.17 1,160 17 16쪽
75 누명(陋名)을 쓰다 15.06.16 1,130 15 14쪽
74 자릿세를 내라 15.06.15 939 15 16쪽
73 난정의 소풍(逍風) 15.06.13 1,229 18 15쪽
72 아기씨 받기 실패 15.06.13 692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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