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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실세 왕백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암사
작품등록일 :
2022.06.14 22:05
최근연재일 :
2024.02.25 01:09
연재수 :
1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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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801
추천수 :
1,166
글자수 :
581,133

작성
22.06.18 21:18
조회
1,128
추천
11
글자
12쪽

무사와 건달을 얻다

안녕하세요.




DUMMY

뜬금없기도 하고 충격적일 수도 있는 제안이었지만 의외로 무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은 유 공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소.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무명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백수를 바로 알아본 것과 내상을 입어 기가 많이 상한 상태인데도 집 주변의 암기들을 바로 조작할 수 있게 준비해두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에서 이 무빈의 경험과 능력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수가 누구보다도 먼저 이 무빈을 찾으려 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무빈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보였다. 눈에는 생기가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으로 인해 팔다리의 살은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고, 손톱도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백수는 나무로 만든 조잡한 잔에 든 물을 한 모금에 다 털어넣고 무빈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맑고 시원한 물 맛에 머리속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모용 세가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을 것이 뻔한 사람을 찾아왔을 때는 그만한 생각이 있어서 온 거 아니겠나? 이 대협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우리도 알고 있고 미리 조사도 해 뒀어. 가족들을 못 본지 최소한 1년은 넘었겠지? 일단 대협의 처와 자식들은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모용 세가의 본채에서 가까운 무도관 중 하나에 머물고 있는데,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들에 대한 대우는 나쁘지 않아. 아이들도 모용 세가의 학사들에게 글을 배우고 있다고 하더군."


이 무빈의 눈빛이 격정적으로 흔들렸다. 백수의 말대로 무빈은 처자식을 본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요령성의 모용 세가에 잡입했지만 저 멀리 지붕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겨우 훔쳐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음 고생이 심할 아내에게 따뜻한 한 마디 전해주지 못하고 도망쳐온 것이 지금까지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무빈은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백수와 무명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무명은 2년 전이나 다를 게 없었고, 백수는 그 사이 마치 여인이 된 것처럼 아름다운 청년으로 변했지만 총기가 가득한 눈동자와 또랑또랑한 음성은 그대로였기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들놈은 글재주가 없어서 회계를 가르쳐볼까 했소. 어린 딸아이는 그래도 글을 곧잘 익히긴 했는데 쓸 데가 있을까 싶어 글 스승을 붙이진 않았지. 모용 세가에서 내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었는지는 몰랐소."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모용 세가에서 그들을 데리고 있는 이유는 당신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모용 선화는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당신이 몇 해 더 몸을 숨긴다고 그들을 풀어주진 않을 거야. 지금이야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려고 글도 가르치고 잘 먹이고 재우지만, 주위 시선이 뜸해질 때면 본색을 드러내겠지. 아이들과 당신 부인은 본문 제자들의 몸종으로 붙이거나 막일이나 시키는 인부가 될 거야.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미안해할 것 없소. 2년 전 당신들과 헤어진 후, 내게는 모용 선화의 심복인 구 숙정이라는 계집이 따라붙었소. 제 주인 못지않게 치밀하고 교활한 자객이고 뛰어난 고수이기도 하지. 난 그녀의 독침에 혈도를 공격당해서 대부분의 무공을 잃었소. 모용 세가에 돌아가면 죽을 것이고, 옛 주인에게 잡히거나 운 좋게 잡히지 않아도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마지막으로 가족들이나 한 번 보자는 생각에 모용 세가에 잡입했는데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타오르더군.

솔직히 지금도 딱히 묘안이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버티다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이러고 있다오."


"그 기대가 그대와 처자식들을 살린 거야. 나는 혼인을 하지 않아서 다 안다 할 순 없겠지만, 가장이 가진 책임이 무엇이고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는 우리 아버지를 봐서 어느 정도 알지. 당신이 여기서 몇 년을 허비하는 동안 가족들에게는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몰라. 교활하면서도 자비가 없는 모용 선화는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지금 잘 해주고 있다고 안심할 수는 없어. 결국 어찌 되었든 당신은 가족들을 모용 세가에서 구해내야 된다는 얘기야.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리 할 수 있게 도와주지."


무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백수를 비웃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지금 당신의 형세도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소만. 상단에서는 제거된 거나 마찬가지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곁에 있는 호위 무사 말고는 도울 사람도 없지 않소? 대체 어떻게 모용 세가의 심장부에 있는 내 가족들을 구해낸다는 겁니까?"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좀 해뒀지. 당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실수 없이 계획대로만 되면 가족들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만 지금은 우리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지금 답을 들었으면 좋겠어."


무빈은 오랜 시간 자객으로 살아온 그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사실 집 밖에서 처음 두 사람을 봤을 때부터 무빈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저 두 사람과 자신의 인연이 가볍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듣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창한 인연이 될 것 같긴 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해도 지금보다 더 할 것 같지 않았다.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없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을 지켜보며 살다가 죽느니, 죽기 전에 가족을 위해 뭐라도 해보고 죽는 게 이 무빈다운, 그리고 한 사람의 남편이자 아버지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이 무빈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똥냄새가 사방에 가득찬 동네이긴 해도 말산촌의 우물물은 단 맛이 나고 깨끗하기로 주변 마을에까지 소문이 난 약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마셔온 이 물을 앞으로는 못 마시게 된다 생각하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든 무빈은 물을 한 잔 더 떠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럼 공의 제안은 내가 가족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는 대신 당신의 무사가 되라는 거요? 그것도 전 무림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의 호위 무사가 되라? 나야 가족들 구하고 목숨을 내놓으라는 거라면 괜찮은 거래이긴 하오만 내 목숨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군."


신중한 성격의 무빈에게 이 정도 반응은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허락으로 봐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 백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물론 건강한 당신이어야 함께 할 가치가 있지.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자신도 있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지금 알았을텐데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백수와 무빈의 만담이 지겨워졌는지 무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꼭꼭 숨어있는 곳까지 알고 찾아왔는데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왔겠나? 주공께서 당신을 예전 모습으로 돌려줄 테니 걱정말고 무기나 챙기시오."


집을 나서는 무명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는 무빈에게 백수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원래 저런 성격이니 앞으로 같이 일을 하려면 적응을 해야 할 거야. 저 친구 말대로 빨리 치료에 들어갈수록 회복도 빠를테니 당장 출발하자고. 당신을 치료해줄 의원이 있는데 지금 객잔을 찾는 중이라 술을 더 먹기 전에 빨리 마을을 뜨는 게 좋을 거야."


"... 이 마을에 객잔 따윈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곧 돌아오겠네. 무명이가 항 선생을 찾아올 때까지 짐이나 싸둬."


"그런데 이제 제 주인이 되셨는데 뭐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제가 알기론 모용 세가에서 저만 쫓는 게 아닌 것으로 아는데."


"역시 무공 뿐 아니라 머리도 좋네. 이제 내 이름은 왕 백수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불러."


무빈은 왕 백수라는 이름을 되새기며 포권으로 군신의 예를 갖추었다.


"그럼 왕 대협이라 부르겠습니다."


"음... 대협은 좀 낯 간지럽고 내 스승님께서 불가의 제자셨으니 왕 대사라고 부르면 좋겠어."


"대사가 훨씬 더 낯 간지러운 것 같습니다..."


"대협이라 하면 강호의 사람 같잖아. 난 지금까지 강호에 몸 담았던 적이 없으니까 대사가 더 낫지 뭐."


그 때 멀리서 항 량의 이무기도 놀라 달아날 고성과 짜증 가득한 무명의 낮은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니 뭔 놈의 마을에 술 파는 곳이 하나 없느냐아!!!"


"선생은 평생 이런 곳에서 살아야 돼. 어제도 술을 다 토하고서 무슨 술을 또 찾나, 돈 아깝게..."


"무슨 소리야, 술은 진탕 마시고 토하라고 있는 것이다아!!!!"


"오늘 피를 토해보는 것은 어떠하냐."


"에이이잉~. 술이 없으니 손이 너무 가벼워서 침을 놓을 때 실수를 할 지도 모르겠구나아~. 혈도를 잘못 짚으면 어찌 하나~."


"어쩌긴. 그 즉시 죽는 거다."


무빈은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다니는 실력 없는 유랑 악단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조금 불안해졌지만 자신감 넘치는 백수의 당당한 모습을 믿기로 하고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모습을 담 너머로 지켜보는 초롱초롱한 눈들이 있었다. 바로 명색이 말산촌의 건달 두목인 자호와 그의 똘마니들이었다. 자호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강호인들의 대화였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천계에서 내려온 듯한 미모를 가진 청년이 말산촌의 똥 푸는 남자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온몸이 시퍼런 썩은 동태같은 남자를 말이다.


'인품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여기서 누굴 데려간다면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호는 잠시 고민해보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저 매우 예쁜 청년에겐 뭔가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다.(놀랍게도 여기까진 맞았다) 그래서 너무 튀는 사람을 쓰기보다는 비실비실한 자를 데려가서 주변의 시선을 피하려 하는 것이다. 저런 사람같지 않은 외모를 가진 자라면 황실의 중요인물일지도 모른다. 황실의 권력다툼에 밀려 중원의 끝자락까지 도망쳐온 불운한 황족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자호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사실 말산촌은 중원의 끝자락이 아니었지만 마을 근처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자호는 그걸 몰랐다)

그렇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저 사람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면서 자호는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들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석두와 만도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없으면 이 천둥벌거숭이들은 누가 거둘꼬... 영걸을 그냥 놔두지 않는 세상의 풍파가 야속할 뿐이로구나.'


자호는 저녁에 혼자 있을때 먹으려고 무빈의 집에서 몰래 숨겨뒀었던 감자를 꺼내 석두와 만도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기 먹을 걸 나눠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두목의 새로운 모습에 얼이 빠져 있는 부하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호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대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더라도 꼭 말산촌으로 너희들을 찾아오마.

살아남아라, 그것이 강호의 유일한 법도이니.'


"왜 그래요? 감자 다시 데워놓으라구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똘마니들을 둔 채 자호는 집을 나서는 백수 일행의 뒤를 무작정 쫓았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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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고치 속에 든 것은 22.07.21 854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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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어떤 죽음에 명분이 있는가 +4 22.07.12 960 10 12쪽
45 피로 물든 손 +2 22.07.09 984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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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부자의 해후, 형제의 해후(2) +2 22.07.02 1,030 12 12쪽
39 부자의 해후, 형제의 해후(1) +1 22.06.30 1,032 1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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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모용 세가 침투(3) +2 22.06.25 985 11 13쪽
35 모용 세가 침투(2) +2 22.06.25 1,005 10 12쪽
34 모용 세가 침투(1) +2 22.06.23 1,052 11 11쪽
33 요령성 잠입(2) +2 22.06.21 1,065 10 14쪽
32 요령성 잠입(1) +2 22.06.20 1,096 11 11쪽
» 무사와 건달을 얻다 +2 22.06.18 1,129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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