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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 님의 서재입니다.

초인의 세상에서 범인이 할 수 있는 것.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ITE
작품등록일 :
2020.05.19 20:08
최근연재일 :
2020.06.30 21:27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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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64
추천수 :
485
글자수 :
343,503

작성
20.05.1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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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이런 힘이 있었어??

DUMMY

쿠구구구구구...


하늘을 뒤덮을 듯이 피어오르는 자욱한 검은 연기 속. 나는 조심조심 주위를 살폈다.

매캐한 연기가 점점 걷혀감에 따라 시야가 확보되었고 그에 맞춰 웅크렸던 몸을 조금씩 폈다.



주변의 지면은 새빨갛게 달구어져 마그마처럼 되어 있었다. 나와 다른 한 사람. 예전 내 상사이기도 했던 전 초인 지원부의 국장. 이국수 국장이 서 있는 반경 몇 미터 정도의 영역만이 부자연스럽게 멀쩡했다.

곁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던 이국수 국장이 한탄했다.



"민간인이 있을지 모르는데 신경도 안 쓰는군요."



짐짓 태연한 척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떨려온다. 무시할까 하다가 대충 대답해 주었다.



"저들이 그런 걸 신경쓸리가요."



지금 이 참상은 한 사람의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리를 겨냥한게 아닌 몬스터를 공격하려다가 어쩌다 날아온 눈 먼 공격이다.

그들이 우리 일반 사람들을 신경도 안 쓰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마주 하고 보니 소문보다 더하다.

사람들 목숨을 벌레 취급하는 저런 자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래, 나와 이국수 국장은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

몬스터에게 인간을 보호해 달라는 보호 요청을.




이 세계의 주인은 이제 인간이 아니다.

몬스터는 어느 순간 세계를 뒤덮었다.


뇌리에 똑똑히 떠오르는 수 없이 많은 참상들.

예를 들어 옆집에 살던 살가운 부부. 남편은 살해 당했고 여성은 고블린이라 불리는 이계의 몬스터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끔찍한 짓을 당했다.

그건 약과다.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곳에서는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는 것은 기본이요 인육 파티까지 벌어지고 있다.


현재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에서 이러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걸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들은 인간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수장격인 자들이 이곳에 나타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협상을 위해서 왔다.


하지만 역시 그들이 우릴 협상 상대로 여겨줄 리가 없었다.

사람에 의해 핍박 받아 전쟁을 일으켜 차별을 없애고 오히려 인류를 지배하여 무릎 꿇린 그들이. 통칭.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뭐, 여기까진 이국수 국장의 입장이고. 내가 그들을 만나려는 목적은 따로있다.

몬스터들로 인해 일어나는 참상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목숨을 걸고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 정도로 나는 이타적이지 않다.

슬슬 쫄리는데 어서 나타나주지 않으려나...



"하하하. 역시 자살행위였어."

"국장님."

"그렇지 않나요? 제비뽑기로 협상을 갈 사람들을 정하는 마당인데."


그의 말대로다.

나는 몰라도 이국수 국장은 제비뽑기로 인해 운 없이 협상단에 뽑힌 케이스였다.

지금은 몰라도 예전 권력을 떵떵 떨쳤던 그는 이런 일에 적임자는 아니었다.


나야 친구들은 잃고 가족에겐 절연 당하고, 개인적인 사정 탓에 여기저기서 비웃음을 산 덕에 인생에 그다지 미련은 없었으니 이번 일에 적임자라면 적임자랄까.

하지만 온 지 몇 분도 안 되어 죽을 뻔 할 줄이야.


원래 이 지역이 위험하긴 했다.

얼마 전 몬스터 출몰을 사전에 경고해주는 공습 경보에서 위험 랭크가 최고로 치솟았던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도 조심하면서 다니면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목숨을 위협할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무른 생각이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피해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하늘이 새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 일대가 폭발에 휩쓸렸다.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국장이 팔목에 낀 팔찌 아티팩트 덕분이다.

한번 방어막을 펼치는 것으로 그 힘을 다했는지 망가져서 너덜거리고 있었으니 이젠 최소한의 보험도 없는 셈이다.

걸음을 다시 옮기기가 막막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기회다. 위협적이던 몬스터들은 사라졌고 공격을 가한 자가 근처에 있을 테니 목적 완수까지 금방이다.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때.


쿠구구구구구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쩌저저적 갈라지고 땅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고층 건물의 몇십 배는 되는 크기를 가진 무언가가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온몸이 쩌릿쩌릿 울린다.



"...재앙급 몬스터군. 그들은 저걸 잡으러 온 것 같군요."



현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광경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순간.


드르륵.


빙그르르 돌아가는 안면의 구체. 괴물의 눈으로 추정되는 동그란 것과 눈이 마주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탓이 아니다.


우어어어어어어어.


재앙급 몬스터가,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벌레처럼 작을 우리를 인식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고작 걸어오는 것 뿐인데 그것만으로 제대로 설 수도 없을 정도의 지진이 일었다.


제기랄. 죽었다. 아티팩트도 뭣도 없는데 산과도 같은 저런 괴물에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마냥 죽음을 기다릴 순 없다. 적어도 최소한의 목적은 이뤄야지.

근처에 그들이 있을 테니 조금만 시간을 벌면 몬스터를 해치워 줄지도 모른다.




"국장님! 도망칩시다!"

"......"



국장은 다리에 힘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려는 찰나였다.


스걱.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직후 쩌저적 소리가 위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고개를 쳐 든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하늘이......갈라졌어?

......앗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몬스터는? 황급히 몬스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갈라진 하늘, 그 아래에 있던 재앙급 몬스터가 딱 멈춰 있었다.


잠시 후.

산만한 몸통을 가진 몬스터의 몸이 반으로 양단되어 대지에 쓰러졌다.


쿠구구구구구구.



땅이 진동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쓰러진 거체에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늘을 가른다는 존재는, 난 한 명밖에 모른다. 분명 검후라 불리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때였다.

분명 방금 전에는 없었던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가운데,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한 명씩 늘어났고 어느새 우리는 일곱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그마처럼 펄펄 끓는 대지가 평지인 마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그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우릴 노려보았다.


그들이다.

초인이다.



"옷이 더러워 지겠네."



안경을 쓴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발로 바닥을 한번 툭 두드렸다.

그러자 펄펄 끓던 대지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초인명. 만물자.



"그래서. 이것들 누군지 알겠냐?"




대검을 짊어진 남자의 질문에 만물자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럼 우리 중 아는 놈은 아무도 없겠구만."


장담하듯 말하는 남자의 말에 대답한 건 만물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저 자는 알아."


붉은 로브와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괴인.

괴인에게서 튀어나온 뾰족한 여성의 목소리.

적의를 숨기려고도 않는 목소리의 주인은 후드를 내렸다.

어딜가도 미인이란 소리를 들을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마에서 턱까지 가로지르는 흉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분명 그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매체를 통해 수십 번도 넘게 접했던 여자다.

이 자가 방금 전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공격으로 우리를 태워 죽일 뻔 했던 공격의 소유자가 분명하다.

적도 아군도 집어삼키는 끔찍한 광역기의 소유자 홍의 마녀.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국수 국장을 노려보았다.



"초인 지원부의 이국수 국장이다. 다들 한 번 쯤은 들었지?"

"나는 모르겠는데."

"너는 이제야 나타났으니까."



대검을 짊어진 남자에게 쏘아붙인 홍의 마녀가 적의 가득한 눈초리로 이국수 국장을 쏘아 보았다.



"여기까진 뭐 하러 왔지? 일부러 죽어주러 오셨나?"



이국수 국장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대답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알기로 이국수 국장은 이 홍의마녀와 악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까 전부터 국장이 겁을 집어먹은 것은 홍의 마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려는데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정해."


홍의 마녀가 돌아보자 검은 생머리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일단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자."


절세의 미녀. 그렇게 칭할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절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청초한 미녀.

하지만 누가 지켜줄 필요는 없겠지.

그녀가 바로 최강의 검격을 자랑하며 불과 1분전에 하늘을 갈라버린 검후니까.


"그녀의 말대로 입니다. 일단 들어보도록 할까요."


지금 말한 이가 이들의 리더격인 인물, 초인명 천상의 광휘.

그는 화려한 장식이 된 하얀색의 성의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광신도라고 불리는 기사 복장의 여자가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납게 우리를 노려보는 저 근육...저게 야수의 왕인가? 그를 포함해 도합 일곱. 나머지는 어디있지?

그리고...'그'는?

면면을 둘러보는데 검후가 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내가 뭐라도 했나?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요."


천상의 광휘가 다시 한 번 우리를 재촉했다.

이국수 국장이 나서기를 기다렸지만 초인들의 기에 짓눌렸는지 위축되어 도저히 입을 열 상태로 보이지 않았기에 내가 나섰다.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협상."


내 말을 되뇌듯 중얼거리는 천상의 광휘. 그 순간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머리를 세운 남자. 초인명 야수의 왕이라 불리며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사내다. 근데 야수의 왕이라니...나만 구린 이름이라 생각하나?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야수의 왕의 비아냥이 꽂혔다.


"협상이라고? 이 새끼들이 주제를 모르네? 협상이 아니라 부탁이겠지?"

"...네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엿 같은 초인 새끼들.

내 인생을 망친 존재나 다름없는 놈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불쑥 화가 났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내가 순순히 말을 바꾸자 야수의 왕이 재미없다는 듯 켁 소리를 냈다.


"부탁이란?"

"뻔하지 뭐. 시민 대피를 도와달라던지, 아니면 적어도 우리 공격에 민간인을 휘말리게 하지 말아 달라던지 그런 거겠지?"

"야수의 왕님."

"니들이 멋대로 붙인 칭호로 날 부르지 마라."


시발 그럼 눈에 보이는 대로 근돼 양아치라 불러줄까. 이 새끼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엄청난 살기가 나를 휘감았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 용건으로 온 것도 맞습니다만. 사실은 제 개인적으로도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당장이라도 날 죽일듯이 앞으로 걷는 야수의 왕. 아 너무 나댔나.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데 손짓으로 그를 제지한 천상의 광휘가 나를 보았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란 무엇이죠?"


천상의 광휘의 말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주인공'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국수 국장은 어찌나 놀랐던지 딸꾹질을 했고 일곱 명 전부가 동요하고 있었다. 몇 명은 불쾌 몇 명은 흥미인가.


천상의 광휘는 흥미 쪽이었다.


"그를 만나게 해 달라는 이유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이를 빠드득 간 야수의 왕이 움직인 찰나. 검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엉?! 비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할 거다."

"우리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검후와 야수의 왕 사이에서 심상이 찮은 기류가 돌았다. 그걸 제지한 것은 만물자의 이제 알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기억났다."

"뭐가?"

"저 겁대가리 없는 놈이 누군지. 분명 초인으로 판정을 받았다가 나중에서야 일반인으로 판명된 특이 케이스였지."

"......"


특이 케이스라서 날 기억해주다니. 거 참 영광이다.

그것때문에 주위에서 얼마나 비웃음을 샀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름이 분명 엄청 특이했었는데. 뭐더라?"

"뭐 좋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을 하러 가죠."

"엉? 저놈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자고?"

"네."



천상의 광휘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릴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그의 용기를 봐서 살려주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당신."

"어...넵."

"주인공을 만나려는 저의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해두겠지만, 우린 민간인의 피난을 도울 생각도, 그들을 배려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럼 살펴 가시기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후와 야수의 왕, 홍의 마녀를 제외한 나머지가 일제히 사라졌다. 홍의 마녀는 이국수 국장을 죽일듯 노려보면서도 이내 사라졌다.


"쳇."


야수의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우리와 검후를 흘겨보더니 사라졌고 검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란 게 뭐죠?"

"아, 그건..."


말꼬리를 흐리며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자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곤란한가 보군요."



검후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이 지역에서 벗어나시길. 방금 전 제급 몬스터와는 비교도 안 될 몬스터가 나타날 겁니다."


무릎을 굽힌 그녀는 다음 순간 하늘 저 너머로 쏘아져 사라졌다.

방금 전 몬스터. 재앙급이 아니라 제급 몬스터였구나.

그들이 떠나가고 나서도 실감이 들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다.




"겁도 없군요 당신은."



이국수 국장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럴리가요. 권리를 사용하겠다고 했을 땐 솔직히 쫄았습니다."

"그런데 왜 주인공을 만나겠다는 겁니까?"

"비밀입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국수 국장이 하 헛김을 뱉었다.


"당신은 듣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군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요."

"그거 칭찬입니까?"

"아무렴요. 일단 여기서 벗어납시..."


그 순간. 저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이변이 일어났다.


후두둑.


이국수 국장이 삼등분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현실성 없는 광경에 입을 벌린채 멍하니 바라보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또 보네?"



야수의 왕이 비웃음을 가득 물고 손을 흔들었다. 그가 어느 순간 손을 앞으로 향했고. 동시에 왼쪽 발목에서 뜨거운 통증을 느낀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커헉...!"


본능적으로 튕겨 일어나려 했는데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삐걱이며 움직여 아픈 왼쪽 다리를 보았는데, 발목이 보이지 않았다.

발목이 절단된건가. 빌어먹게 아프다. 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위기상황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벗어나지? 기동력을 잃었고 상대는 두 다리가 멀쩡했더라도 속도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공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나오는 결론은 절망적이었고 욕지거리밖에 할 수 없었다.


제길. 이 빌어먹을 자식. 뭐가 그렇게 열 받아서 우리같은 피래미를 죽이려고 돌아오는데? 똥개새끼.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내게 이죽이죽 웃으며 걸어오는 똥개.




"야. 아까 말 잘하더만? 설득이라도 해 보시지? 내가 널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저 또한 초인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직 죽을 수 없다. 살아야 한다.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날 비웃었던 모두에게 보란듯이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뭐였단 말인가.


수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그런 것들을 알고도 아무것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등신이냔 말이다.

비굴하더라도 이 순간을 모면해야한다.


하지만 야수의 왕은 낄낄댔다.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초인이니 죽이지 말아 달라고?"

"그런 셈입니다만..."

"아까 들었다. 반푼이란 거 아냐? 보통은 초인 판정을 잘못 받아도 곧바로 오류라고 뜨는데 네놈은 일년이 지나서 떴다던가? 나도 기억하고 있어."

"......"



응. 나도 기억한다.

처음 판정때는 분명히 초인 판정을 받았다. 몇 번이고 확인해도 초인이 맞았다. 어째선지 그 후엔 아무리 검사를 받아도 일반인 판정이었지만.

어째서 처음엔 초인 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너 같은 새끼는 세상에 없는 게 이득 아니냐?"



아 틀렸다.

이놈. 살려줄 마음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야수의 왕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보여줘 봐."



목숨 구걸이라 생각했는지 내게 기회를 주는 야수의 왕.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내 가운뎃 손가락을 보고.



"이거나 드십시오. 똥개 새끼야."


곧바로 사지가 날아가 버렸다.

고통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해야 할 텐데 분노가 고통을 이긴 것일까. 아니면 상상 이상의 고통에 육체가 멋대로 통각을 끄기라도 한 걸까. 내 입은 쉴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아깐 천상의 광휘나 검후한테 쫄아서 나대지 못하더니 이제 와서 하는 꼴 봐라. 그러니까 니가 양아치라고 소문난 거야 이 새끼야."

"닥쳐."

"넌 다른 초인들이랑 달리 딱히 사람들한테 핍박받지도 않았었잖아? 지 꼴리는대로 하다가 초인의 세상이 열린 것 뿐이잖아. 운도 좋은 새끼."


뚜둑.


야수의 왕의 혈관에서 위험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이제 됐어. 죽어라 너."



그의 손에서 푸른 태풍같은 에너지가 솟구치더니 거대한 발톱 모양이 되었다.

사지 날아간 무력한 일반인 죽이기엔 너무 화려한 기술 아닌가.


"꺼져. 멍멍아."


난 끝까지 그를 놀렸다.

그래야만 가슴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테니까.

제길.

결국 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사람이고 초인이고 비웃음만 사고 이대로 죽는 건가.

내 인생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에너지의 발톱이 나를 찢었고, 나는 원자 단위로 분해되며 의식이 어두워져 갔다.


그런 줄 알았을 때.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회광반조가 발동 됩니다.]


키우우우우웅!



...무슨 소리지?


"뭐야?!"


야수의 왕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해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지?

왜 시야가 평소대로지? 사지가 잘렸는데...

나는 이내 내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아니. 뿐만이 아니다.

이건, 뭐지?

평생을 느끼지 못했던 육체에서 용솟음 치는 강력한 힘.

눈앞의 저 괴물이 우습게 보일 정도의 힘이 내게 깃들어 있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의아해 하는 내 눈 앞에 갑자기 창 하나가 나타났다.




[스킬. 회광반조.


타인에게 죽음의 순간을 맞았을 시 그 타인의 두배의 능력을 갖고 일정시간동안 부활한다. ]


...이거 혹시 게임의 스킬창 같은 건가?

엥? 일정 시간 동안 부활...? 그제야 내 눈에 왼쪽 하단에 이제 막 56을 넘어가 55로 내려가는 숫자가 보였다.

뭐야. 산 줄 알았더니 저 시간이 다 되면 다시 죽는 건가?


하지만 아까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저 빌어먹을 새끼를 족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흐읍!"


오른손에 대충 휘둘러도 산을 부술 것만 같은 에너지가 맺히고 형상을 이루어나갔다. 야수의 왕과 똑같은 발톱 모양이었지만 다른 게 있다면 색깔이 붉었다는 것이다.


"너, 너 그건 내 스킬...!!"



말하는 녀석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그렇구나. 이게 초인이 보는 세상이구나.

지금이라면 뭐든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지금의 나를 감당할 만한 자는 주인공 정도 뿐이겠지.


나에게 한대 맞고 정신을 차렸는지 분노한 녀석이 몸에서 강대한 에너지를 뿜으며 공격을 해왔다. 눈이 멀 정도의 오러를 몸에 두르고 마구잡이고 육체를 휘두르는 똥개.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일부러 그걸 기다리고 공격 하나하나를 청면에서 쳐부셔 주었다.


"이게! 이게에에!"

"뭐 임마."


안면에 날아오는 주먹에 마주 주먹을 내질렀다. 으지직. 육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똥개가 고통에 찬 표정을 짓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주먹과 나를 번갈아보면서 점점 얼굴에 공포심이 어리는 똥개.

그제서야 깨달은 모양이다.

지금은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크...크윽...이봐들! 도와줘어!!"


공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사자후.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스킬을 도움요청에 쓰다니. 어째 웃음이 나왔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너 검후랑 다른 녀석들이 몬스터랑 교전한다 싶으니까 여기 왔잖아?"



그들이 한동안 오지 못할 것을 알고서 나를 죽이러 온 것이다.

이제와서 요행을 바라면 쓰나.



"대체 너 뭐냐! 어떻게 갑자기...!"



뭐긴 뭐야 죽을 때가 되서야 스킬 발동하는 똥망캐지

나도 초인은 초인이었단 소리다. 초인판정이 이상하게 날 만도 했네.

나는 히죽 웃고 말해주었다.


"내가 뭐냐고?"

"으윽...!"

"지옥에 가서 물어 봐! 이 새꺄!"


나의 공격이 녀석의 팔 다리에 쏟아졌다.

아까의 나처럼 사지가 잘린 채로 땅에 떨어진 녀석이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우아아아아아악...!!"



나는 그런 녀석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재생하고 있는 놈은 내가 가까워질 때마다 공포가 가증되는지 오줌마저 지렸다.


"사, 살려줘...!!"

"지금까지 몇 명이 너에게 그 말을 했지?"


그게 야수의 왕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더 갖고 놀고 싶었으나 이젠 시간이 다 되서 어쩔 수 없었다.


파지지직.


야수의 왕의 몸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절묘한 힘조절을 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숨이 끊어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는 꼬라지를 보니 마음에 조금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단말마가 멎고. 주위는 고요했다.


이제 시간은 20초도 남지 않았다. 대략 15초?

이 시간이 끝나면 난 틀림없이 죽겠지.

그래도 죽기전에 야수의 왕씩이나 죽이다니. 당초 세웠던 목적은 거의 이루지 못했지만 뭐라도 하고 죽었구나.

그때. 나의 기감에 기척이 잡혔다. 총 여섯 개.


처처처척.


나를 둘러싼 여섯 명의 인영들. 몬스터를 처치하고 온 걸까?

천상의 광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그 힘은 뭐죠?"

"......"

"정체가 뭡니까? 당신은 뭐 하는 자입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천상의 광휘가 조용히 격왕을 부르라고 중얼거렸다. 아 맞아.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격왕이라면 지금 이 상태로도 질 지도...

하긴 승패는 상관없다. 이제 곧 죽는데 뭐.

남은 시간은 10초. 마지막 유언으로 뭐가 좋을지 고민하는데 만물자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이야기부터 들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검후가 만물자를 멈춰 세웠고 만물자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봉해놓고 대화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두 사람이 흠칫했다. 주저앉았던 내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 5초...

여섯 명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나는 히죽 웃었다.


"내가 누구냐고?"


어차피 죽는 거. 내 이름이나 새기자.

똑똑히 들어라.

여기 이런 사람이 있었다.



"김범인이다!! 이 개같은 초인 새끼들아!!"





5초가 지나고 새까먼 어둠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이게 죽음인가. 신기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좀 더 제대로 살아볼 텐데.

흑역사를 다 잊을만큼 떳떳하게 살아볼 텐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초인의 세계라는 미친 세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볼 터인데.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특수스킬. 회귀가 발동됩니다.]





그리고 난 회귀했다.

초인들이 가장 들끓었던 10년전의 세계로.


작가의말



오랜만의 글입니다.

실력이 부족해 많이 어설픈 글이지만 조회수 천을 목표로 공모전 기간 내 열심히 써 보려고 합니다.

부디 재밌게 봐 주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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