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노 (albino) (2)
다행히 균열은 모두 D급 이하 규모였다.
'이 정도면 고은이와 함께 나가는 게 좋겠구나.'
나는 고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표정이 변한 나를 갸우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은아. 지금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열리고 있어."
"헉! 그럼 위험한 거야?"
"아니. 다행히 균열의 크기가 작아서 막을 수는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 각성자 관리국은 제주도에서 일 안하는 거야?"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는 걸로 아는데,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음.. 난 어떻게 하지??"
"나랑 같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게 더 안전할거야."
"알았어. 나 지켜줘야 해~"
고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를 믿는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아앗!"
호텔 밖은 각성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이질적인 공간의 파열음으로 출렁였다.
'이.. 이런.. 최소 수백 개다..'
마치 게이트 시대의 프로토타입을 보는 것 같았다. D급 이하의 괴수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 균열에서 뛰쳐나온다면 이 일대에는 큰 혼란이 생길 것이다. 아직 사람들은 균열을 인지하지 못한 듯 했지만, 나와 고은이는 그 균열들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무.. 무서워.."
"걱정하지 마. 넌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
각성자가 일반 세계에서 힘을 쓰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이 많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서도 안 되고, 균열에 결계도 쳐야 한다. 지난 번 윤치호의 이슈 때문에 승인 받지 않은 힘을 쓰는 게 부담스러웠다. 나는 급하게 추성수에게 연락을 했다.
"뭐? D급 균열이 수백 개?"
"네. 제주고 관리국은 아직 감지 조차 못한 것 같아요."
"결계가 없으면 균열 사냥은 불법이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일단 내가 빨리 각관에 연락해볼게."
"네. 부탁할게요."
다급해 보이는 내 얼굴을 보며 고은이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녀도 제법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위험한 게 아니야. 다만 균열을 정리하려면 각관의 승인이 필요해."
"지금 급한 거 아냐? 왜 바로 처리 할 수 없는 거야?"
"각성자들이 함부로 행동하면 혼란이 생기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죽을 수도 있잖아. 만약 승인이 안 나면 그걸 지켜봐야해?"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치지직 터지기 시작했다. 추성수의 연락은 아직이었다.
'미치겠군..'
내 손을 잡고 함께 균열을 기다리는 고은이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런 고은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때 추성수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어떻게 되었어?"
"이제 막 터지기 직전이에요."
"하아. 미친 새끼들. 지금 제주도 각관에 연락이 갔는데, 사태 파악해보고 연락하겠다네."
"지금 사태 파악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곧 괴수들이 쏟아져 나온다니까요."
"이럴 때 보면 각관 개새끼들 진짜."
각성자 관리국의 백서에는 지금과 같은 사태가 원전이 터질 확률보다 낮다고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대처 방안이 없으면 어쩌나.
"다정아, 지금 네가 나서면 뒤집어쓴다. 절대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사람들이 죽는다니까요."
"너 전에 윤치호라는 놈 잡고 나서, 각관에서 조사 나왔잖아. 이번에 사고 치면 백퍼야."
"이게 어떻게 사고 치는 게 되냐니까요. 긴급 상황이에요."
"알아! 임마!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니가 나서서 좋은 일했다 치자. 사람들이 알아 줄 것 같아?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책임은 있는 대로 뒤집어쓰고. 그렇게 호구 될 거야?"
추성수의 말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 나를 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 각성자 관리국이 져야 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수 천 명의 사람들 목숨이 위급한데, 그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는 단 말인가.
"일단 기다려!"
추성수는 군인 출신다웠다. 상부의 지시가 없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나 역시 각성자 부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권한 없는 작전을 함부로 수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저 균열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기어이 균열이 터져버렸다. 10여 마리의 E급 괴수가 음습한 거리에 튀어나왔다.
"고은아. 일단 여기에 있어."
고은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가볍게 한 번 안아줬다. 그리고 강화신체를 일으켜, 균열 쪽으로 튀어 날아가 버렸다.
"하앗!"
나는 주먹으로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아스팔트가 쩌억 갈라지면서, 사람들은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꺄아악!"
"지진이다! 도망쳐!"
일대에 한 순간 혼란이 일어났다. 나는 우리가 머무르던 호텔의 옥상에 한 번 작은 폭발 같은 것을 일으킨 후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리곤 첫 번째 균열이 터진 곳으로 달려갔다.
"큐오오우~"
다 자란 진돗개 크기의 E급 괴수들이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바퀴벌레 같은 느낌으로 어두운 거리를 활보했다. 녀석들을 잡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 만이 아니다. 하지만 곧 대량으로 쏟아져 나올 몬스터들을 인명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파지지직!"
첫 번째 균열에서 나온 놈들을 잡는 사이 두 번째 균열이 터졌다. 그리고 곧 세 번째, 네 번째 균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해보자. 이것들아.'
나는 전력을 다 했다. 범위 공격이 터져 나왔고, 주변의 건물이 흔들렸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포에 떨 것이다.
'빨리 도망들 가라고..'
괴수들이 몸이 아스러지며 우직거리는 촉감이 손에서 느껴졌다. 불쾌했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내가 괴수를 잡는 속도보다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수백 마리의 괴수들이 균열에서 흘러나와 나를 감쌌다. 과거 이토 준지의 만화에 바다에서 올라온 벌레와 생선을 합친 괴수들에게 주인공이 포위당한 장면이 있다. 지금 내가 딱 그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찮은 것들이..'
내가 발을 내딛는 곳, 내 주먹이 닿는 곳 마다 10여 마리의 괴수들이 아스러졌다. 하지만 앞서도 말 했듯,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미치겠구나..'
그때 팔을 휘감고 있는 탐식이 괴수들의 마나에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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