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노 (albino) (1)
수연 선배는 비상임 이사로 일하기 때문에 회의가 아니면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이 약간 흐르며, 그녀를 향해 기울었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평정심을 찾고나니, 고은이에게 미안했다. 좀 많이 미안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내가 흔들리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상처를 받았다. 그녀를 위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고은아. 오늘 볼 수 있어?"
"왜?"
"그냥.. 이유가 있어서 보나."
"치. 뭐야.."
전화기로 들려오는 그녀 목소리는 아닌 척 해도 좋아하고 있다. 요즘은 가능하면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만나려 노력한다.
"음.. 그럼 홍대로 올래?"
"그래. 그리로 갈게.."
"헤헤~ 이따 봐!"
고은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무조건 선물을 샀다. 그녀가 뭐를 좋아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달콤한 쿠키나 초콜릿 같은 디저트를 줬다.
"얘가 나를 돼지로 만들려고 그러나.."
성의를 생각해서 한 두 입 정도 먹는 듯 했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먹지는 않았다. 고은이는 은근히 몸매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옷을 선물해보았다.
"이런 건 하지 마. 버리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잖아."
네. 하아. 그럼 어쩌지? 그 다음에는 반지와 목걸이를 선물해 보았다. 고은이는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위화감이 든다고 거절했다.
"생각 해 보니까, 하나 가지고 싶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눈동자를 굴리며 최대한 능청스럽게 말하는 고은이의 목소리가 무척 귀여웠다.
"뭔데? 그게 뭐야?"
"공짜로 말 해줘도 되나?"
"내.. 내가 뭘 하면 되?"
"음.. 회사 휴가 이틀 쓸 수 있나? 우리 바쁘신 사장님?"
"이틀? 한 달 정도 지나면.."
고은이가 나를 째려본다.
"가능한 빨리 만들어볼게.."
"진짜? 사징님! 너무 무리 안하셔도 되요. 미천한 여자친구는 그런 거 없어도.."
"다음 주! 다음 주에 휴가 낼게!"
"흐음? 안 해도 되는데.. 사장님이 영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다면 저야 그 뜻을 따르지요오~"
휴우.. 된 건가 드디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애교스럽게 변한 고은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제 풀린 것 같구나..'
싱글생글 웃고 있는 고은이는 인터넷으로 뭔가를 클릭 클릭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우리 여행가자."
"여행?"
"응. 제주도로. 너 제주도 가본 적 있어?"
아.. 그녀가 원한 선물이 여행이었구나.
"친척 분이 제주도에 사는데.. 관광지 말고 진짜 제주도가 너무 아름답다는 거야. 한 번 내려오라 하셨는데, 너랑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설마 친척 분에게 날 소개 하려고?"
"아.. 좀 그런가?"
"윽. 남자친구랑 둘이서 여행 가는 걸 너희 부모님이 알아도 괜찮아?"
"어머 어머. 그건 안 되지."
고은이는 사이트 검색을 멈추고 컴퓨터의 모니터를 노려봤다.
"그냥 알리지 말고 가자."
"난 제주도 어디가 좋은지 모른단 말야."
'괜찮아. 그냥 운전하면서 다니면 되."
"아아. 맞다 맞다. 다정이 너 운전 할 줄 알지?"
고은이의 표정이 밝게 빛났다.
"그럼 비행기 표 예약한다!"
"알았어."
제주도 여행을 위해, 회사가 아닌 주말에 박아연들과 함께 하는 균열 사냥을 쉬어야 했다.
"그래. 급한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
"죄송해요. 가능하면 쉬지 않으려 했는데."
"괜찮아. 나도 한 번씩 빠지잖아. 너무 열심히 하려는 것도 병이야."
"다음 주에 꼭 뵐게요. 감사해요."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이제 여름이다. 나라는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지만, 고은이는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했다. 다들 거리로 몰려 나가 대한민국을 외치는 동안 우리는 한가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우와!! 야자 나무 진짜 보기 좋다!!"
제주 공항에 내린 고은이가 던진 첫 감상이었다. 낯선 곳에 오니, 고은이나 내 팔에 착 달라붙는다. 이럴 때 보면 아직 어린 소녀 같다. 한 없이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는 사실은 의외로 사람에게 안정감과 심리적인 만족감을 준다.
'헤헤~ 좋다."
고은이의 설레는 마음이 내게도 느껴졌다. 나는 제주도를 꽤 자주 방문한 편이지만, 이번 여행처럼 설렌 건 처음인 것 같다.
공항에 붙어 있는 렌터카에서 차를 빌렸다.
"오빠 달려!"
풉~ 이게 언제적 개그였더라. 고은이는 마냥 신이 났다.
"얏호!!"
내가 처음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성산 일출봉이다. 이곳은 10년 후 중국인이 매입하면서 엉망이 되는 지역이지만, 아직은 개발도 거의 되지 않았고 천혜의 아름다움이 보존되어 있었다.
"와!! 여기 진짜 멋진데?"
일출봉의 모습을 보며 고은이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녀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저기 서봐. 내가 한 컷 찍어줄게."
"싫어. 풍경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건. 그냥 내가 보고 좋았던 것만 남길래."
그러더니 고은이는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셀카를 찍었다.
"헤헤~ 내가 좋아하는 거.."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쭈~ 이제 제법 웃을 줄도 아시네요."
그녀가 내게 다가와 활짝 웃으며 입을 맞췄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2일 동안 제주도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와! 생각 했던 것 보다 훨씬 멋진 것 같아.."
나 역시 회귀 후에도 부동산 투자 목적으로 제주도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오늘처럼 편하게 경치를 관광하기 위해 느긋하게 구경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훼손되지 않은 제주도의 풍경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둘째 날 저녁. 우리는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함께 방에서 힘께 맥주를 마셨다.
"아~ 아쉽다!"
"그러게.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더 보고 싶네."
"헤헤~ 내 말 듣길 잘했지?"
"응.. 잘 했어. 건배~"
고은이는 활짝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얏!"
맥주를 마시려던 고은이가 순간 이마를 잡으며 잡고 있던 맥주잔을 놓쳤다.
"고은아! 왜 그래? 괜찮아?"
"아.. 어.. 왜 갑자기 두통이.."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방금 전 미세한 두통을 느꼈다.
'균열인가?'
가까운 곳에 균열이 열리면, 주위의 각성자들은 그 뒤틀린 마나에 영향을 받는다. 약한 각성자 일수록 균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 나 같은 경우는 서울에서 열리는 C급 이하의 마나는 레이더를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여긴 뭔가 다르다.'
고은이는 계속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 했고, 나 역시 이질적인 마나의 기운으로 약간의 편두통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고은아. 괜찮아?"
"아.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파.."
"이리 손 좀 줘봐."
나는 고은이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가 받는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는 듯 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고은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독 제주도에 왔을 때 심하게 통증을 느끼곤 했었지..'
나는 짐가방에 넣어온 마나 감지 레이더를 열어보았다.
'이.. 이럴 수가..'
호텔 주위에 수많은 균열이 촘촘하게 열리고 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이.. 이건 대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