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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3.05.19 16:52
최근연재일 :
2024.02.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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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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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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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위기의 삼별초

해당 소설은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으로, 특정 종교/단체/인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성벽 너머로 탐라의 북쪽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고민하던 진웅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것은 자신의 친우(親友)이자 주여경의 서자, 신의군 별장 주진(周晉)이었다.




"한참 찾았네. 오늘도 하염없이 그렇게 바다만 바라만 바라보고 있었나?"




"언제 왔는가?"




"방금. 장군께서 찾으시네."




"무슨 일로?"




"중산국에 보낸 함대가 지금 막 돌아왔다고 하네. 같이 가세."




몽골에 밀려 진도로 쫓겨난 삼별초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는 첩장을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중산국(中山國 - 지금의 오키나와)으로도 사신을 파견했다. 중산국의 존재는 일찍이 삼한(三韓)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고, 자주는 아니나 이따금 고려와도 교류를 하고 있었다.




탐라의 어부 가운데는 풍랑을 만나 중산국에 표류했다 돌아왔다는 이들의 이야기도 종종 전해졌다. 그럼에도 중산국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바가 많았고, 김통정은 중산국을 직접 다녀온 적이 있다는 탐라인을 앞세워 함대를 구성한 뒤, 사절을 파견했다.




진웅이 내성의 막사로 들어서자 이미 김통정 장군을 비롯해 좌우별초 사령관들과 간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통정 장군 왼편으로는 함대 사령관으로 중산국에 다녀온 좌승선(左承宣) 유존혁의 모습도 보였는데 혈색은 좋았으나 출발했을 때에 비해 조금 마른 모습이었다.




진웅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군."




김통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우측에 있던 야별초 지유 김혁정(金革正)이 답했다. 그가 바로 실질적으로 남은 삼별초의 참모 역할을 하는 군사였다.




"괜찮네. 어서 앉게."




진웅과 주진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 이문경(李文京), 수비대장 이시화(李時和) 등 다른 장군들이 모두 도착하였고, 회의는 시작되었다.




이미 유존혁의 표정에서 파견이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눈치챘지만 고생한 이들을 생각하면 이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존혁은 침착하게 중산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산국은 충승도(沖縄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는데 자기들 말로 우치나(うちな)라고 하거나 본도(本島)라 하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손씨(天孫氏)의 후예라고 전해지는 중산왕(中山王)이 다스리고 있는데 덕이 높고 훌륭한 임금입니다.



중산왕은 송(宋)으로부터 불교를 들어와 극락사(極楽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섬 곳곳에는 성(城, 구스쿠)이 여기저기 지어져있는데 알사(按司, 아지)라는 족장들이 성을 맡아 다스리고 있습니다."




김혁정이 물었다.




"섬이라...탐라보다 큽니까?"




그러자 유존혁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직접 말을 타고 둘러보았는데 확실히 탐라보다 작습니다. 가구수는 다해서 2만호가 채 안된다 하더이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에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김통정 역시 잠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예상했다는 듯 유존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충승도 자체가 탐라 이상의 천혜의 요새에 수군이 약한 몽고군이 함선을 이끌고 넘어오기엔 쉽지 않은 곳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중산왕이 평소 중화를 흠모하고 고려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다며 우리 삼별초가 얼마든지 건너와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비록 탐라보다 작다하나 이 곳에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여원연합군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중산국으로 건너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일부는 호응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반대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다. 김원윤(金元允)이 그 중 하나였다.




"탐라보다도 작은 중산국에서 무슨 후일을 도모한다는 말입니까?"




유존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소? 적어도 중산국은 정확한 길잡이가 없으면 찾기 어려워 몽고군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극히 적소. 게다가 중산국에 들어와 있는 남송의 상인에게 들으니 배로 이삼일 거리에 보도(寶島)라는 탐라보다도 훨씬 더 큰 섬이 있다고 하더이다. 그 곳에서 남송까진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하오."




"남송에 그렇게 큰 섬이 있단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소만."




"송나라 땅은 아니라더이다. 다만 최근에 원(元)을 피해 보도에 자리잡은 한인(漢人)들이 꽤 많이 있다지요. 그 상인에게 듣자니 원나라가 병사 수십만을 동원해 양양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지만 여문환 장군이 이끄는 양양성은 거뜬히 버티고 있다더구려. 강남에는 식량과 물자가 넘쳐나고, 몽고와 싸우기 위해 수십만 장병들이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양양성을 수비하는 남송군은 부족한 물자와 거듭되는 공격으로 인해 거의 한계에 닥친 상황이었으나, 남송의 상인은 그런 사정까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이유인 즉 승상 가사도를 필두로 남성 조정에서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 민심을 안심시키고자 수십만 몽고 병사들이 양양성을 뚫지 못하고 5년째 고전하고 있다며, 결국 몽골군이 후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거짓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이 후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빼면 양양성이 점령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고, 원나라의 남하가 지체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남송이 굳건히 버티고 있단 상인의 말에 유존혁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고, 이를 전해들은 다른 삼별초 장수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존혁이 전한 소식에 여기저기서 함성이 쏟아졌다.




"오오!"




유존혁이 김통정을 보며 말했다.




"김장군, 말씀드렸다시피 탐라에서 이렇게 버티는 것은 너무 무모합니다. 식량도 물자도 너무 부족하고 아시다시피 조운선이나 관아를 습격하는 것도 더는 무리입니다. 중산국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김통정이 대답없이 침묵하자 잠자코 있던 진웅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김통정의 허락에 진웅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좌승선의 말씀처럼 탐라에서 이리 버티는 것보다 중산국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유존혁은 진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진웅을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다만..."




"다만?"




"김장군(김원영)의 말씀처럼 중산국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없겠지요. 거기에 숨어서 원이 망하고 남송과 고려가 다시 사직을 회복할 날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유존혁이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차라리 남송으로 건너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진웅의 파격적인 제안에 막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본에 첩장을 보내고 중산국까지 사절을 파견하면서도 남송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남송과 고려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에 파탄이 났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진이 세운 금조(金朝)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남송이 금나라를 끔찍히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북송을 멸망시킨 나라이자 천자였던 휘종과 상황 흠종을 비롯해 대부분의 황족이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한 정강의 변(靖康之變)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역시 금나라가 못 마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윤관이 별무반을 앞세워 여진을 정복할 때만해도 부모의 나라로 받들며 절대 고려땅을 넘보지 않겠다던 여진이 강성해서 금조(金朝)를 세우고 오히려 나아가 형제국이 될 것을 강요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진을 한낱 오랑캐 취급하던 고려는 금과 송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형제국을 넘어 강성해진 여진에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하는 군신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하지만 고려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고 금조가 몽고-남송 연합에 의해 망할 때까지 나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는 남송과의 관계 역시 유지하고자 여러차례 조공을 보내기도 했으나 남송은 자신들의 원수인 금조와 고려가 가깝게 지내는 고려를 보며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고, 급기에 국교를 아예 단절하기에 이른다. 이후 금조가 망하고 강성해진 몽골이 남송과 고려 모두를 침략하면서 두 나라는 동병상련의 신세가 되었으나, 누가 누구를 도울 상황도 아니었고 각각 몽고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서로가 손을 내밀 명분도 없었고, 내민들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려의 많은 선비들을 비롯해 중화의 상징적인 나라, 남송(南宋)은 형제의 나라이자 군신의 예를 다 해야 하는 나라로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국교는 단절되었지만 상인들은 계속 남송과 고려를 오갔으며 여진과 몽고를 피해 고려로 건너 온 송인(宋人)들도 상당수였다. 진웅과 주진 역시 그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김혁정이 장중을 조용히 시키자 진웅이 말을 이었다.




"양양은 중원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몽고는 5년 가까이 수십만 병사를 쏟아부으면서도 양양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건 다시 말해 남송의 수군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몽골 수군은 기병에 비하면 형편 없는 수준이고 그렇기에 남송 수군에 막혀 해로로 남송을 침범하지 못하고 양양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남송이 여유 있는 상황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수년간 전투로 다져진 경험많은 우리 군이 합류한다면 분명 남송은 쌍수를 들고 환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들 말 없이 반응만 살피던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파두리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중랑장 이신손이었다.




"누가 송나라 놈들 아니라고 할까봐... 쯧쯧쯧"




그 말에 진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옆에 있던 주진이 그의 팔을 붙잡아 말리며 말했다.




"송과 고려는 본디 형제와 다름 없는 사이로 남송에서 고려로 건너와 터를 잡은 이들이 수만입니다. 진별장의 집안 역시 여양군(驪陽君, 진총후)께서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시며 대대로 고려에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그걸 모를 리 없으실 텐데 송나라 놈들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신손이 주진의 말을 비꼬며 답했다.




"아이고, 대단하신 주자의 후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구만!"




그러자 김혁정이 다그치듯 이신손에게 말했다.




"중랑장이 과했소.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한 배를 탄 형제와 다름없거늘 괜한 분란 만들지 마시오!"




이순공이 진웅과 주진에게 시비를 건 것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삼별초 내부에 뿌리깊게 내린 좌우별초와 신의군 출신들의 갈등 탓이 컸다. 삼별초는 문벌귀족의 사병조직이던 야별초 출신의 좌우별초와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이들의 모아 만든 신의군으로 구성되어 소위 세 개의 별초라 하여 삼별초라고 불렸던 것인데 이 삼별초가 정규 군대로 편성되어 대몽고 항쟁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 약 이십여년 전이었다.




진도 용장성이 함락된 이후 사실 좌우별초와 신의군이 구분이 의미가 없어진데다, 실제로 노비를 비롯해 탐라 토착민들까지 받아야 할 상황에서 삼별초는 형식적인 구분만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장수들은 달랐다. 좌우별초 장수들은 아무래도 최씨정권(崔氏政權)을 비롯해 권력자의 지근거리에서 충성하던 가문 출신들이 많았고, 신의군 장수들은 남송 출신이나 중앙에 연이 없는 지방별초 출신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때문에 좌우별초 출신들은 신의군을 근본이 없다며 무시하기 일쑤였고, 몽고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신의군 역시 거드름 피우는 좌우별초가 못마땅한 것이 당연했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탐라까지 내쫓긴 상황에서 두 집단의 원망의 대상도 극과 극으로 달랐다.




권력의 가까이에 있던 좌우별초는 몽고보다는 자신을 내친 고려 조정에 대한 원망이 컸고, 반대로 몽고에 포로로 끌려갔다 탈출한 자들이나 남송 출신으로 이루어진 신의군의 경우에는 고려 조정보다는 몽고에 대한 증오가 엄청났다. 단순히 본인만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노예가 되거나, 살해당한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김혁정이 차분한 말투로 다시 진웅에게 말했다.




"남송으로 모두 건너가는 건 너무 무모한 생각일세."




"당장 건너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첩장을 보내 화친을 맺음과 동시에 형세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지요. 저희가 남송으로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반대로 남송 수군이 건재하다면 원군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요. 남송 수군 일부가 넘어와 여원군의 상륙을 함께 막는다면 육지에서도 호응하는 자들이 많을 테고, 몽고의 전력도 분산시킬 수 있을 겁니다."




유존혁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양양성에서 5년간 버텼다는 소리는 반대로 남송은 양양에 틀어박혀 한발짝도 진군하지 못했다는 소리이기도 하네. 그저 막는데 급급하다는 것이지. 누굴 도울 형편이 못될 걸세."




"일단 첩장을 보내 상황을 확인한 뒤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혹여 남송 쪽에서 거절한다고 해도 부족한 물자라도 구해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김통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병사가 대략 몇이나 되오?"




김혁정이 답했다.




"4천이 조금 안 됩니다."




"송경쪽 움직임은 어떻소?"




"원에 병사를 요청했다 들었고 각지에서 조운선(哨馬船)을 건조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지휘관은?"




"김방경입니다."




"역시 그인가..."




자타공인 고려 제일의 장군, 김방경(金方慶). 진도에 웅거할 당시 전함을 이끌고 출정한 김방경의 뒤를 쳐 대장선으로 뛰어든 삼별초는 김방경을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으나, 김방경마저 살기를 포기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의 부장 김천록(金天祿)이 단모(短矛, 짧은 창)를 들고 무쌍을 펼쳐 김방경을 구해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김방경과 김천록이 건재한 이상 여원연합군의 탐라 상륙은 시간 문제였다.




김통정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김혁정에게 물었다.




"군사의 생각은 어떻소?"




"중산국으로 거점을 옮기자는 좌승선이나 남송에 첩장을 보내자는 진별장이나 모두 나름 일리가 있는 의견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 성 하나를 지키기에도 빠듯한 병력이고 탐라를 떠난다면 더 이상 육지에서 호응을 얻기 힘들 테지요."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소?"




"이리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부족한 물자를 충당할 겸 좌승선께서 함선을 이끌고 중산국으로 가 물자를 공수하는 동시에 중산왕을 설득해 탐라로 병력을 보내달라 다시 한번 요청하는 것이지요. 일단 중산왕의 환심을 사야하니 강도에서 챙겨온 보화를 함께 보내심이 좋을 듯합니다. 동시에 남송으로 첩장도 보내는 것입니다. 다만 화북을 점령한 몽고 수군이 해안선 일대를 지키고 있을 수도 있으니 대규모 함선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여야 하겠지요."




김통정이 그말을 듣고 지시를 내렸다.




"좌승선께서는 함선 50척을 이끌고 중산국으로 가 필요한 물자를 공수해 오십시오. 군사는 교환할 품목은 좌승선과 상의하시오. 출발은 사흘 뒤요. 그리고 이순공(李順恭) 장군."




"네. 하명 하십시오."




"장군께서는 사신단의 수장으로서 남송으로 보낼 첩장을 맡아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군사, 첩장은 군사께서 작성해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송구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순공 장군이 혼자 가는 것보다는 중산국에서 남송까지 고작 사흘이면 닿는다고 하니 좌승선께서 남송 조정에 진상할 물품을 좀 더 구해 남송에서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산국으로 보낼 물품이 빠지고 나면 조공하기엔 남은 것이 없을 테고 그렇다고 남송 조정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장군께서는 일단 명주(明州)로 들어가서 좌승선을 기다리되 머무는 동안 양양성을 비롯해 송원(宋元)간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또한 파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소."




"다만 배가 풍랑을 만나 도착이 늦어질 수도 있고 중산국에서의 일정이 미뤄질 수도 있으니 장군께서 도착하고 보름이 지나도 좌승선께서 도착하지 않으시거나 따로 기별이 없으면 직접 남송 조정에 장군께서 직접 첩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하염없이 명주에서 기다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최소한의 진상품은 일단 챙겨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김혁정과 이순공의 대화가 끝나자 김통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 별장 진웅."




"별장 진웅!"




"별장 진웅은 벼슬을 섭낭장(攝郎將)으로 올린다. 또한 병사 2백과 함께 함척 5척을 이끌고 사흘 뒤 남송 명주(明州)로 출발하는 이순공 장군을 부관으로서 수행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김혁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일단 조정의 간자가 있을 수도 있고 함선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수 있으니 이장군의 함선도 좌승선의 함대와 함께 일본을 향해 가다가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좌승선의 함대는 중산국으로, 이장군의 함선은 남송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남송쪽 사정을 제대로 모르니 남송으로 가는 함대는 전함보다는 조운선으로 하는 편이 낫을 듯 싶습니다."




"그리 하시오. 회동은 이것으로 마치겠소."




다음날부터 좌승선이 이끌 함선에 교환할 물자를 싣고 함선에 탈 병력을 나누느라 삼별초 진영은 분주해졌다. 좌승선의 함대에는 중산왕에게 바칠 고려산삼을 비롯해 강도에서 가져온 화문석, 불감(佛龕, 나무, 돌, 쇠 등으로 만든 작은 불전)등이 실렸고, 삼베를 비롯해 식량과 교환할 물자들도 포함되었다. 마찬가지로 남송 조정에 진상할 고려산삼을 비롯해 화문석, 나전칠기 등이 배에 실렸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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