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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3.05.19 16:52
최근연재일 :
2024.02.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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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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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글자수 :
29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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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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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파촉당문(巴蜀唐門) (1)

해당 소설은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으로, 특정 종교/단체/인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그 즈음 취암과 주진 두 사람은 호위병 넷과 함께 장사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의창에서 나흘이 걸렸을 테지만 진웅 일행이 걱정되어 걸음을 재촉한 끝에 사흘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장사에 도착하자마자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문천상을 만나러 제형부(提刑府)로 향했다.


제형부에 도착하자 문천상은 저번보다 더 야윈 얼굴로 각종 문서에 파묻혀 있었다. 취암과 주진을 본 문천상이 반갑게 뛰어나오더니 두 사람을 손을 한 쪽씩 잡고 말했다.


"선사 어서 오십시오. 아우도 어서오게."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형님?"


"보시다시피 잠잘 틈도 없다네. 그나저나 어찌 둘 뿐인가? 진아우와 장도사는?"


"천천히 말씀 드리지요. 먼저 남창에서 여기까지 저희를 호위해준 병사들이 형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해 함께 왔습니다. 인사들 드리시오."


주진은 사정을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을 남창에서부터 호위한 병사 넷을 소개했다. 자신들을 장사까지 무사히 호위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문천상을 실제로 본 병사 넷은 감격한 얼굴로 무릎을 꿇으며 읍을 했다.


"문대인을 뵙습니다!"


"내겐 각별한 분들인데 먼길 호위 하느라 고생들 많았네. 오늘 하루는 푸짐하게 먹고 푹 좀 쉬게."


"감사합니다, 대인."


문천상이 비서랑(秘書郞, 정8품의 관직)에게 병사들의 대접을 부탁하고 두 사람에게는 자리를 권하며 향차를 내었다. 주진은 병사들이 물러나고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남창에서 의창에 이르기까지 일행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소상히 아뢰었다.


사정을 모두 들은 문천상은 잠시 고민에 빠졌고, 진웅 일행이 걱정된 주진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문천상에게 부탁했다.


"이곳 사정도 좋지 않겠지만 병사들 일부만이라도 무공산으로 보낼 수 없겠습니까?"


"시간이나 병력의 문제가 아닐세. 삼교맹 창설을 떠나 그간 조정과 무림은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해왔지. 금단파 도사들이 고작 병사 넷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의창으로 갈때까지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숫자를 떠나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공격하는 것은 조정과 적대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칠 수 없었던 것이지.


조정 역시 마찬가지네. 사정은 안타까우나 팽가 역시 금단파 소속으로 외부에서 보면 이건 어디까지나 금단파 내부의 문제야. 그런데 지방관인 내가 독단적으로 병사를 보냈다가는 무림에 일에 괜히 끼어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네. 게다가 금단파는 남송 조정과도 깊은 연을 맺고 있고, 아직까지 삼교맹에 들어가지도 않았지. 지금 상황에서 굳이 명분도 없는데 자극해서는 안 되네."


주진이 낙담한 얼굴로 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허나 고작 넷으로 금단파 도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사히 무공산에 도착했다한들 금단파 도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텐데 말입니다."


"일단은 무사하길 빌 수 밖에... 의창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니 일단 서찰을 보내놓도록 하지. 그나저나 선사, 갔던 일은 어찌 됐습니까?"


"대인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더이다."


"대번에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역시나로군요. 그나마 선사께서 가셨으니 기대를 걸어봄직 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온다는 얘기는 없었습니까?"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다고 하더군요."


주진은 문천상에 따로 취암에게 무언가 부탁한 것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괜히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할까봐 굳이 묻지 않았는데 그때 부관 하나가 들어오더니 문천상에게 보고 했다.


"손님이 또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구라 하던가?"


"그 것이... 파촉의 당문이라 합니다."


그러자 평소에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던 취암도 조금은 놀란 듯 했고, 문천상의 얼굴에서는 화색이 돌며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안으로 모시게!"


잠시 후 고수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여섯의 수하를 거느린 채 부관의 안내를 받고 본당으로 들어왔고, 문천상에게 읍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당문의 당중기(唐仲奇) 문대인을 뵙습니다."


문천상이 당중기의 손을 덥썩 잡으며 답했다.


"이리 빨리 오실 줄이야...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문주. 이쪽으로 오시지요. 선사와는 잘 아실 테고 여기는 저와 형제의 연을 맺은 주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주대협."


"당문주를 뵙습니다."


파촉의 당문(巴蜀唐門).


훗날 사천당문(四川唐門)으로도 알려지는 당문은 원과 송 두 나라의 전쟁이 격해지던 남송말 본문 전체가 칩거에 들어가 있었다. 문천상은 그간 수차례 당문을 포섭하려 노력했지만 당문은 이를 번번히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인즉 자신을 버린 남송 조정에 대한 뿌리깊은 원망 때문이었다.


원래 당문은 의병현(宜宾县, 지금의 이빈시)와 대나무숲이 바다를 이룬다는 촉남죽해(蜀南竹海)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허나 단평의 입락(端平入洛)으로 남송에 극도로 분노한 몽골군은 번번히 파촉을 노렸고, 그때마다 파촉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당문은 남송군 편에 서서 반몽산성을 쌓는 등 몽골군의 침입에 격렬히 저항했다.


특히 원 헌종(몽케 칸)이 침략했을 당시에는 맹공의 부장이자 남송의 명장이었던 왕견(王堅, 1198~1264) 휘하에서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맡으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원래 당문은 대대로 가문에 내려오던 당가권(唐家拳)이 있었으나, 맨주먹으로 몽골 기마병을 상대하긴 무리였다.


때문에 당문은 지형을 활용하는 한편 몽골군이 식수를 얻지 못하도록 우물에 독을 풀고, 휴대가 간편한 수전(袖箭), 투전(投箭)을 사용해 몽골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당문은 물자가 부족하면 화살의 활대를 꺾어 촉이라도 던지며 저항했고, 그마저도 없을 때 대나무를 깎아 죽창을 만들어 싸웠다. 그마저도 없으면 두 손에 흙을 집어 몽골군의 눈에 뿌리고, 손발이 잘리면 이빨로 물어 뜯어서라도 파촉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당문이었다.


훗날 당문이 명문세가임에도 비열하게 독과 암기를 사용한다고 알려진 것은 정작 몽골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저항했던 처절한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반대로 명이 세워진 이후 황실에서 당문에 면사철권을 하사하고 명문세가로 인정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몽골군 원수였던 왕덕신(汪德臣, 1222~1259)이 단신으로 조어성에 항복을 강요할 당시 돌팔매질로 왕덕신을 낙마시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당문의 솜씨였으며, 무엇보다 왕덕신의 죽음으로 흥분한 원 헌종이 직접 조어성 인근에 이르렀다 돌아갈 때 뒤를 노려 치명상을 입힌 것 역시 당문이 이룬 쾌거였다.


결국 이때 입은 부상에 전염병까지 얻은 헌종은 죽음에 이르렀고, 죽기 직전 남긴 유언은 단 두가지로 조어성을 함락하거든 하나도 남녀노소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죽이라는 것과 파촉의 당씨는 씨를 말리라는 것이었다. 이후 파촉에서 몽골군은 당씨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이는 족족 잡아죽였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당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촉당문이 아닌 사천당문이라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사천(四川)이란 지명 자체가 원나라 때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어성에서의 승리는 남송의 멸망을 막았지만 결국 파촉 일대는 폐허로 변했고 당가 역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당문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는 커녕 조정으로부터 엄청난 냉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승상 가사도였다.


당시 조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왕견은 승상 가사도의 질시에 못 이겨 우울한 말년을 보내다 죽음에 이르렀으며, 가사도는 자신이 참여한 악주 전투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조어성에서 당문의 활약을 모두 기록에서 삭제하고 어떠한 포상도 하지 않았다. 일개 가문이 정식 부대를 앞서는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믿기 힘들고,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모시던 주군이 죽고, 간신 가사도가 권좌에 올라 조정을 쥐락펴락하자 당문은 더이상 남송 황실에 대한 미련을 접고 고향인 파촉을 떠나 호남과 강서 일대에서 은거에 들어간다. 이때 남은 당문 사람들이 자리잡게 도움을 준 것이 문천상의 사부인 강만리였다.


이후 사부로부터 당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문천상은 곧은 절개를 가진 사대부답게 조어성에서 당문의 공이 크니 이제라도 당문을 예우하고 전공에 걸맞는 벼슬과 하사품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여러차례 썼지만 그렇지 않아도 문천상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가사도는 그의 모든 상소를 묵살한다.


결국 문천상은 자신의 가산을 털어 남창 옆 백장산(百丈山) 일대에 은거하던 당문에게 예물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운다. 그리고 얼마 전 사부 강만리를 따라 호남제형으로 부임하자 취암에게 부탁해 당문이 다시 한번 멸국을 코 앞에 둔 남송을 위해 나서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남창에서 진웅 일행이 금단파 도사들을 상대할 당시 취암이 자리를 비운 것은 남창에서 당문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으며 문천상이 취암에게 별도로 이런 지시를 내린 것 역시 특별한 연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훗날 파촉당문의 절기라 일컬어지는 만천화우(滿天花雨)를 알려준 것이 바로 취암의 사부 장노대(張老臺)였기 때문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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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해동제일검 (2) 24.02.20 19 0 9쪽
54 해동제일검 (1) 24.02.17 2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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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연심(戀心) (2) 23.07.20 39 0 13쪽
40 연심(戀心) (1) 23.07.18 43 0 12쪽
39 강만리(江萬里) 23.07.13 46 0 9쪽
38 파촉당문(巴蜀唐門) (2) 23.07.12 46 0 10쪽
» 파촉당문(巴蜀唐門) (1) 23.07.11 66 0 10쪽
36 기연(奇緣) (2) 23.07.10 64 2 13쪽
35 기연(奇緣) (1) 23.07.07 72 2 10쪽
34 옥추보경(玉樞寶經) (6) 23.07.07 53 2 12쪽
33 옥추보경(玉樞寶經) (5) 23.07.06 57 2 12쪽
32 옥추보경(玉樞寶經) (4) 23.07.05 51 0 10쪽
31 옥추보경(玉樞寶經) (3) 23.07.05 51 1 12쪽
30 옥추보경(玉樞寶經) (2) 23.07.04 6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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