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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3.05.19 16:52
최근연재일 :
2024.02.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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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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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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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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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가사도(賈似道) (2)

해당 소설은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으로, 특정 종교/단체/인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가사도는 이미 첩보를 통해 몽골의 주력이 양양성의 공략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3년 정도를 버틴다면 지친 몽골이 먼저 화친을 제시하거나 병력을 물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쿠빌라이는 공방이 길어지나 회군을 검토한 적이 있으나 양양공방전을 이끌고 있는 유정은 송나라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양양 정복이 남송 정벌의 시작이자 끝임을 주장하며 쿠빌라이를 설득시켰고, 결국 가사도의 예상과는 다르게 몽골군은 100리에 이르는 토성을 쌓으며 양양공방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


어떻게든 몽골이 양양성을 정벌할 생각이라는 것을 확인한 가사도는 어떻게든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장강의 물길을 뚫어내기 위해 수군을 보내는 한편, 결사대를 동원에 양양성에 물자를 전달하려 했으나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로 그쳤다. 또한 하귀와 이정지 역시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물자를 전달하려고 했으니 한차 막대한 몽골군의 포위를 뚫어내는데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특히 도종 7년(1271년)에는 여문덕의 사위인 범문호가 10만에 이르는 송나라 수군을 이끌고 포위된 양양성을 구원하고자 했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는 몽골의 수륙 연합군에 산산히 격파되어 패주하고 말았다.


또한 양양성을 포위한 몽골군은 송나라가 가진 전력을 양양성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전선을 넓히며 번번히 훼방을 놨고 일부는 아예 장강을 도하해 내려오기도 했기에 송나라의 병력 또한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가사도는 다급히 인근의 세가와 무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공전법과 타산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세가와 무가들은 멸국의 위기에서도 결국 나서지 않고 재물을 지키기에 바빴으며 아예 일부는 양양성이 함락도 되기 전에 몽골에 투항하고 만다.


그 사이 몽골군의 포위망은 점점 더 견고해졌고 결국 양양성과 번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외부로부터 어떤 물자도 전달받지 못한 채 외로운 방어전을 이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양양성의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은 결코 몽골에 무릎 꿇을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결국 양양성과 연결된 번성이 몽골군의 회회포(回回砲)에 공략된 후 먼저 무너졌고, 곧장 양양성이 다음 목표가 되었다. 몽골은 양양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한편 이미 투항한 여문환의 부장들을 통해 여문환에게 지속적으로 항복을 권유한다. 결국 더이상 뾰족한 수가 없음을 깨달은 여문환(呂文煥)이 결국 항복하면서 치열했던 양양공방전은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결국 양양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가사도는 좌절했으나 그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양양성이 함락되자 몽골군은 지체없이 장강을 넘기 시작했고 송나라 수군들이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중과부적인 상황이었다.


이제 전쟁이 최전선은 회남과 양주 일대로 바뀌었고, 이곳마저 잃는다면 수도 임안이 바로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가사도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황주에 있던 하귀를 수군 총사령관인 회서안무제치대사(淮西安撫制置大使)로 임명하고 장강을 넘어오는 몽골군을 막도록 했다.


하귀가 가사도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막내인 하송(夏柏)을 후방으로 빼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장남을 잃은 하귀는 자신은 언제 죽어도 상관없지만 남은 두 아들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허나 가문을 이을 차남 하송은 하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대송의 백전노장으로 아직도 전선에 계신데 어찌 자식이 후방에서 평안히 있을 수 있겠냐며 몽골군과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을 고집했다.


막내인 하백 역시 부친과 형님이 전장에 계신데 본인이 어찌 가만 있겠냐며 종군을 자청했다. 최전선에서 자신과 함께 두 아들 모두 종군했다가 멸문을 먼저 당할 판이니 하귀는 가사도에게 최악의 상황이라도 막내만큼은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가사도를 직접 찾은 것이었다.


가사도는 양양성 함락의 책임을 지고 파직 당한 이정지의 복원을 위해 하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회남지역 방어를 위해서는 이정지를 다시 복귀시켜야만 하는데 이정지에게는 정적이 많았고 특히 하귀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이 그의 복귀를 반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장군의 부탁인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당장 황실로 불러들이겠습니다. 대신 장군께서도 조만간 제 부탁 하나를 꼭 들어주셔야겠습니다."


"간청이라 함은?"


"상보(祥甫, 이정지의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파직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불러들인단 말입니까?"


"당장 불러들이겠다는게 아닙니다. 꼭 불러들어야 될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미리 장군의 동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흠... 상보가 제 말을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아듣게 잘 이야기 하겠습니다. 들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공께서 부탁하시는데 따라야지요. 그나저나 문산(文山, 문천상)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듣자니 호남제형으로 부임했다던데..."


문천상의 이름을 들은 가사도가 얼굴을 찌푸렸고, 가사도의 표정을 살핀 하귀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 싶었는지 급히 물러났다.


문천상. 가사도에게는 있어 최대의 정적이자 애증의 존재.


사실 예전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천상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맹공이었고, 가사도는 그런 맹공의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고 악주 전투에서 가사도가 승리하여 개선하자 문천상은 가사도를 대송의 영웅이라며 칭송했고, 재상에 오른 가사도가 송나라를 병들게 만든 외척인 사씨 일가와 환관들을 배척하자 사대부들을 규합하여 가사도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 역시 문천상이었다.


공전법과 타산법을 시행할 당시에도 권귀들을 비롯해 대지주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지만 끝까지 시행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문천상이 황실 재정을 메꾸려는 가사도의 의도를 이해하고 문천상 본인부터 일가가 소유한 토지를 내놓으며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따르는 사대부의 불만을 잠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문천상을 위해 가사도 역시 태학생의 처우를 개선하여 나름의 보답을 한다.


그러나 둘의 사이가 틀어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칸의 자리에 오른 홀필열이 학경을 보내 악주에서의 화약(和約)을 지키라며 학경(郝經, 1223~1275)을 국신사(國信使)로 임명하고 송나라에 보낸 것이다.


실제로 가사도는 악주 전투 당시 홀필열에게 양군의 군대가 서로 많이 상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며 화의를 청한 적은 있으나 홀필열의 주장처럼 칭신(稱臣, 신하를 자청함)과 조공을 약속한 적은 결코 없었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가사도 본인에게 송나라 조정을 대신해 그렇게 중대한 내용을 결정할 권한이 있을 리 없었고, 홀필열 역시 몽가의 사망 직후라 대칸에 오르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사신의 파견에 연유를 알 수 없었던 가사도는 학경에게 돌아가라 일렀지만 학경은 황명을 거스를 수 없으니 그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회하(淮河)를 건너 진주에 이르렀고, 마찬가지로 융통성 없고 고집스러운 이정지는 허락없이 송나라의 땅을 밟았다면 사신인 학경을 진주(真州)의 관사에 구류하고 이를 가사도에게 보고했다.


학경이 방문한 목적이 드러나자 가사도는 몽골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몽골과 전쟁을 할만한 여유는 없었다. 언제고 몽골을 다시 송을 침략하겠지만 그럼에도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결국 가사도는 학경을 불러들여 제시한 조건이 과하니 세부적인 조건과 기일을 논의한 뒤 홀필열에게 보내는 서찰을 전달하기로 한다.


그러나 주전파들은 가사도에게 재상이 밀약을 맺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학경을 임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냐며 강력히 학경의 입궐을 반대했고 문천상 또한 대송의 어찌 몽골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 있느냐며 그들 편에 섰다.


이후 가사도와 문천상은 급격히 사이가 틀어지는데 문천상은 황제에게 올리는 조서에 승상인 가사도를 조롱했으며 가사도가 이 사실을 알고 질책하자 결국 문천상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다.


이후 가사도는 인재 한명이 아쉬운 시기인데다 문천상의 재능을 아까워해 여러차례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종용하지만, 오히려 대쪽같은 문천상은 가사도에게 승상이 물러나지 않는 한 복귀할 생각은 없다며 가사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가사도 역시 더는 문천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그렇게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악연이 되었다.


아직 재상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가사도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결국 악주화약은 몽골을 뻔한 책략이라며 몽골과의 화친을 거부했고, 학경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후 몽골은 기다렸다는 듯 재침략을 준비했고, 가사도 또한 머지않아 몽골이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본격적인 방어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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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가사도(賈似道) (3) 24.02.28 17 0 8쪽
» 가사도(賈似道) (2) 24.02.21 16 0 10쪽
56 가사도(賈似道) (1) 24.02.20 22 0 8쪽
55 해동제일검 (2) 24.02.20 18 0 9쪽
54 해동제일검 (1) 24.02.17 21 0 11쪽
53 배후(背後) (5) 24.02.16 22 0 8쪽
52 배후(背後) (4) 24.02.16 24 0 8쪽
51 배후(背後) (3) 23.08.08 44 0 10쪽
50 배후(背後) (2) 23.08.03 30 0 9쪽
49 배후(背後) (1) 23.08.02 35 0 11쪽
48 귀환(歸還) (6) 23.08.01 32 0 14쪽
47 귀환(歸還) (5) 23.08.01 36 0 13쪽
46 귀환(歸還) (4) 23.07.31 31 0 11쪽
45 귀환(歸還) (3) 23.07.28 36 0 11쪽
44 귀환(歸還) (2) 23.07.27 37 0 11쪽
43 귀환(歸還) (1) 23.07.26 41 0 11쪽
42 연심(戀心) (3) 23.07.24 36 0 12쪽
41 연심(戀心) (2) 23.07.20 39 0 13쪽
40 연심(戀心) (1) 23.07.18 43 0 12쪽
39 강만리(江萬里) 23.07.13 45 0 9쪽
38 파촉당문(巴蜀唐門) (2) 23.07.12 46 0 10쪽
37 파촉당문(巴蜀唐門) (1) 23.07.11 65 0 10쪽
36 기연(奇緣) (2) 23.07.10 63 2 13쪽
35 기연(奇緣) (1) 23.07.07 72 2 10쪽
34 옥추보경(玉樞寶經) (6) 23.07.07 52 2 12쪽
33 옥추보경(玉樞寶經) (5) 23.07.06 57 2 12쪽
32 옥추보경(玉樞寶經) (4) 23.07.05 51 0 10쪽
31 옥추보경(玉樞寶經) (3) 23.07.05 51 1 12쪽
30 옥추보경(玉樞寶經) (2) 23.07.04 6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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