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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3.05.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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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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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의 변(靖康之變)이 벌어지기 몇해 전, 더이상 송(宋)에는 화북을 지킬 힘이 없없고 요금 오랑캐의 땅에서 살고 싶지 않던 복주(福州)의 진수(陣琇)는 한번도 밟은 적 없는 머나먼 땅 고려로 망명하여 여양현(現 충남 홍성군 장곡면) 덕양산 아래 정착한다.



여양현에서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무도를 가르치던 진수의 명성은 개성까지 전해졌고, 그가 범상치 않은 무인임을 알아본 고려 예종(睿宗, 1079~1122)은 국자감 칠재(七齎)가운데 무신 양성을 위해 병서와 무예, 즉 무학(武學)을 가르치는 강예재(講藝齋)를 그에게 맡긴다. 말 그대로 파격이었고, 애초부터 강예재 신설에 반대했던 문신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예종은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킨다.



인종(仁宗, 1109~1146)이 즉위한 후 진수는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인종은 그를 고려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임명했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하니 바로 여양 진씨의 시조가 된다. 무신을 탐탁치 않았하던 인종이었으나 진수만은 무척 아껴 따로 진총후(陳寵厚)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진총후의 아들 진준(陳俊) 역시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용력(勇力)으로 여진과의 전쟁에서 이름을 알렸고, 단숨에 병졸에서 수비대장으로까지 승진한다. 결국 대장군을 거쳐 참지정사에까지 오른 진준은 1173년 무신정변 당시 무신들이 모든 문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려 하자,



"우리가 원한을 가진 사람은 이복기, 한뢰 같은 놈들인데 무고한 사람을 모두 살해하고 가산을 빼앗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당장 중지하라."



라며 서슬퍼런 무신 정권의 칼날 앞에서도 당당히 소신을 밝혔고, 진준 덕분에 당시 많은 문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준이 문신들의 목숨을 구하자 세간의 사람들이 그의 음덕을 칭송하며 자손 대대로 번성할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음덕 덕분인지 진준의 차남 광수(光脩)는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오늘날 국방부 장관)에 이르렀고, 5남 광현(光賢)은 추밀부사를 지낸다.



진준의 손자 식(湜), 화(澕), 온(陳溫)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널리 이름을 알린다. 삼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하자 세간은 이 3형제를 가리켜 연주(聯珠, 꿴 구슬)라 하였다. 특히나 삼형제 중 가장 학식이 뛰어난 진화(陳澕)는 이규보(李奎報, 1169~1241) 함께 당대 고려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며 둘을 묶어 일명 쌍운주필(雙韻走筆)로 불린다.



진화는 이규보와 함께 무신정권에 충성했으나 두 사람은 늘 해좌칠현(海左七賢, 고려 후기 중앙정계를 떠나 서로 자연에서 교류하며 시작과 술을 즐기던 일곱 선비, 즉 이인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을 가리킨다. 중국 진(晉)나라 청담파 죽림칠현에서 따왔다.)을 부러워했다. 이규보는 칠현과 스스럼없이 교류하며 훗날 칠현으로부터 동참 제의까지 받으나, 진화는 무신정권 아래 최씨문객이라고 불리던 자신이 부끄러워 칠현과의 교류를 피하였다.



부친 진준을 따라 최씨 정권에 충성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오랑캐와 무신정권 아래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된 삶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진화였고, 특히 농촌의 피폐한 삶을 묘사한 도원가(桃源歌)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한다.



결국 이 도원가가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의 귀에도 들어갔고, 결국 진화는 지공주사(知公州事)라는 한직으로 밀려나 마흔 초반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항간에는 최우가 진화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복주의 진수가 고려로 망명하고 그 후손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무장과 문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당시, 원래 그들의 고국이던 대송(大宋)은 정강의 변으로 화북을 통째로 금에게 빼앗겼으며, 남송을 건국한 뒤 겨우겨우 요금이라는 늑대의 무리들을 쫓아낸 자리에는 마치 호랑이와 다를 바 없는 몽골이 나타났다. 대송(大宋)의 사직은 갈수록 위태로웠고 백성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주자(朱子, 본명은 주희(朱熹)이며 남송의 유학자로 성리학을 집대성함, 주자학의 창시자)의 증손인 주잠(朱潛)은 송의 국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1212년(강종 1년) 진수와 마찬가지로 아들 여(余)를 비롯해, 문하생 섭공제(葉公濟) 등 7명의 학사(學士), 그리고 식솔들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다. 주잠은 아들의 여의 이름을 여경(餘慶)로 바꾼 뒤, 그의 가족 및 자신을 따르던 문인들과 금성(現 전남 나주)에 정착했으니 바로 오늘날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작이다.



고려 고종(高宗)은 주자의 증손인 주잠이 고려 땅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송경(松京)으로 초빙하여 문하시랑에 제수코자 하였으나 주잠은 송나라 신하로서 다른 나라의 관작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그의 문하에 있던 섭공제(葉公濟)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후 주자의 후손이 고려로 망명했다는 소문을 들은 원(元)나라 조정은 주자의 후손을 찾아 대도로 보내라며 고려를 수차례 압박했으나,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주잠은 자신의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으로 고치고, 평생 다시 못갈 송나라를 그리워 하며 능성(綾城, 화순) 고정리(考亭里)에 숨어살았다. 고려 조정 역시 원에 주잠의 위치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의 아들 여경과 장손 열(悅)은 주잠과 달리 고려 조정에 몸을 담았다. 특히 고종때 문과에 급제한 주열은 원종 때는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청·전라·경상 3도의 안렴사(安廉使)를 역임했고, 충렬왕 때도 중용되어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주열에게는 흔(炘)과 니(泥)라는 동생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후 절손(絶孫)되어 기록된 후대는 없다.



송인(宋人, 송나라 사람)들만 자신의 나라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여진과 몽골을 피해 고려로 온 진수, 주잠과는 반대로 고려를 버리고 몽골을 택한 자들도 있었다. 바로 이안사(李安社)의 이야기다. 전주 이씨의 시조고인 이한(李翰)의 17세손이자 대장군 이양무의 아들로 태어난 이안사의 집안은 전주를 본관으로 삼고 그 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었다.



그의 백부인 이준의, 이의방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역적 중에 하나였으나 그럼에도 이안사의 아버지이자 이린의 아들, 이양무는 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른다.이씨 가문은 대대로 궁술에 능했는데 이때부터 "검(劍)은 척가(拓家), 권(拳)은 진가(陳家), 궁(弓)은 이가(李家)"라는 말이 세간에 전해졌다.



이안사는 젊을 적 자신이 연모하던 관기(관에서 관리하던 기생)를 산성별감(山城別監)이 강제로 취하자 젊은 혈기를 못 참은 이안사는 가병을 이끌고가 관아를 찾아가 별감을 목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에 산성별감은 급하게 지주(知州, 오늘의 도지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실제로 별감을 어떻게 할 생각을 없었으나 관아 앞에서 행패를 부린 것이 조정까지 보고되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안사와 가병들을 진압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결국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외가가 있던 삼척에 터를 잡게 되는데 이 때 이안사를 따라 나선 백성들이 무려 수천(기록상으로는 170여호)이 넘었다. 이렇게 수천이 따라 나선 것은 지방의 이름난 호족을 당장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고려 조정이 망가진 탓도 있었으나 대대로 전주에 뿌리 내리며 살아온 이안사 가문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안사가 삼척에 자리 잡은지 얼마 안돼 기생을 두고 싸운 산성별감이 안렴사(按廉使)에 올라 삼척으로 순시를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안사는 다시 식솔들을 이끌고 동북면 의주(現 함경북도 원산)에 자리 잡는다. 이 사이 이안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늘었고 오히려 세력은 더 커졌다. 고려 조정 역시 이안사가 이러다 오랑캐(여진)쪽에 붙을 수도 있다며 차라리 죄를 사하고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이안사는 죄를 사면받고 의주병마사에 임명되어 고원(高原)을 지키게 된다.



의주병마사에 임명된 이안사는 좌절했다. 관직을 받긴 했으나 고려 조정으로부터의 지원은 전무(全無)했다. 부임지의 수비대는 군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오합지졸이었고, 결국 이안사는 전투마다 자신을 따르던 가병들을 이끌고 선봉에서 싸워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몽골군을 물리쳐도 돌아오는 것은 배고픔과 추위 뿐이었고, 전주에서부터 자신을 따르던 가병들도 전투에서 희생되거나,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1254년 쌍성에 주둔하던 원나라 적장 산길(散吉)은 이안사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내 두차례나 선물과 식량을 전하는가 한편, 항복해온 이안사를 대도에 추천하였고, 원으로부터 오동(斡東, 알동)천호 겸 달로화적(다루가치, 達魯花赤)에 임명된 이안사는 산길을 평생의 은인으로 대하며 고려 침략을 함께 한다.



고려의 조정은 이안사가 고려를 배신하고 원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병마사로 임명할 것이 아니라 그때 어떻게든 척살해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으나 그로부터 4년 뒤인 1252년 무오정변(戊午政變)이 발생하며 최씨 정권은 종식되었고 당시 집권자이던 최의(崔竩, 1233~1258)를 김준과 함께 신의군을 앞세워 주살하고 고종에게 정권을 바친 장본인이 바로 이안사의 외사촌, 대사성(大司成) 류경(柳璥, 1211~1289)이었다.



고려가 원과 강화를 맺은 데다 정권이 김준과 류경의 손에 들어가니 이안사는 고려로부터 더이상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이안사는 고려인이고 여진족이고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력으로 받아들여 더욱 그 기반을 강화하니 바로 이 이안사가 조선의 목조(穆祖),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여기까지가 송(宋)을 떠나 고려를 택한 이들과 고려를 버리고 몽골을 택한 이들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그 후손들의 전해지지 않은 비화들이다.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외가가 있던 삼척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던 시절, 공교롭게도 진화의 사촌 아우이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낸 진택(陳澤)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삼척으로 내려온다. 전주의 이름난 호족 이안사의 이름은 송경(개경)까지 알려져있었고, 이안사 역시 진택이 쌍운주필 진화의 사촌 형제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초청한다.



때마침 주잠 역시 아들 여경과 함께 고려를 유람하던 중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일대)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증조부 주희의 명성은 이미 고려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이안사가 연 연회에 세 사람이 한데 모이게 된다.



평소 중화(中華)와 송나라에 관심이 많던 이안사는 주희의 후손으로 알려진 주잠이 실제 주희의 후손인지 확인하고자 그를 초청한 것이었으나, 주잠을 만난 이안사는 주잠이 주희의 증손이라는 것을 실제로 확인하고는 주자의 직계마저 버린 송에 더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가 고려를 버리고 원나라로 넘어간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세 사람의 인연은 이후 그다지 깊지 않았으나, 이안사의 4남 이행리, 진택의 아들 진교, 그리고 주잠의 아들 주여경은 비슷한 또래라 금세 가까워졌다. 이안사가 안렴사와의 문제로 삼척을 떠나 의주로 갈때 이행리의 권유로 진교와 주여경은 역시 함께 의주로 떠났고, 이안사가 의주병마사로 부임하자 이행리와 함께 최전선에서 활약한다. 하지만 이 셋의 운명도 결국 갈리고 말았으니 바로 1254년 이안사가 고려를 버리고 원으로 넘어가면서다.



고려의 무인 집안 출신인 진택이나 주희의 후손인 주여경은 고려에는 더이상 미래가 없으니 함께 하자는 이행리의 간곡한 권유에도 원에 귀의한 이안사를 결코 따를 수 없었고 결국 거느린 식솔들과 함께 떠나기로 한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잡을 수 없던 이행리는 자신의 외삼촌이자 정방(政房, 고려의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관청)을 맡고 있던 류경에게 두 친우를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마무리는 아름답지 못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하겠으나, 결국 나라가 갈리듯 세 사람, 그리고 그 후손들의 운명도 극적으로 갈렸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20년 뒤, 진교의 아들 신의군 별장 진웅(陳雄)은 성곽에 올라 저 멀리 탐라 북쪽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몽(麗蒙)연합군에게 진도를 뺏기고 남은 부대를 김통정 장군이 수습하여 탐라로 넘어온지 어언 두 해가 다 되갈 무렵이었다.



당장 들이닥칠 것이라 생각했던 조정과 몽고군은 탐라부 수비대만 증원할 뿐 본격적으로 정벌하러 오지 않았다. 사실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탐라를 정벌하고 싶었으나, 몽고 입장에서는 진도의 삼별초를 정벌한지 얼마 안돼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친 후 남송 정벌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원나라 입장에서는 고려 조정이 이미 항복했고, 진도의 삼별초도 정리한 마당에 무리하여 탐라 정벌까지 급하게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알 리 없던 삼별초 입장에서는 여원연합군을 방비할 시간을 벌었지만, 탐라를 거점으로 삼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탐라는 본디 척박한 땅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논밭이 적어 식량은 더더욱 그러했다. 결국 함선을 이끌고 육지로 나가 식량 및 물자를 공수해오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기에 삼별초의 주공격대상은 조운선이 드나드는 십삼조창(十蔘漕倉, 조세명복으로 납부한 미곡을 보관하던 창고)이었다.



진도를 거점으로 할 당시부터 경상지역에서 활약하던 좌승선 유존혁(劉存奕)이 함선을 이끌고 탐라와 가까운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며 조운선이나 관아를 약탈하기도 했지만 고려 조정도 손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삼별초 함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섬을 비운다던가, 전과 다르게 여러 고을의 관아가 합심하여 삼별초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십삼조창은 정규군이 대거 수비군으로 편성되어 더이상 공격하기가 힘들어졌다.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강도나 진도도 해안선을 다 방비하기엔 너무 넓었는데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탐라의 해안선을 전부 방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국 천혜의 요새였던 진도의 용장성도 결국 무너졌는데 아무리 성을 쌓는다 한들 상륙할 여원연합군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강도나 진도는 대규모선이 상륙할 지점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사실 탐라는 여원연합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고 상륙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장수들 사이에서는 탐라에서 상륙한 여원연합군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함선을 이끌고 나가 해상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더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탐라인들마저 서서히 삼별초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도 진도의 삼별초가 토벌되면 결국 탐라로 향할 것을 예측하고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가 야별초지유 고여림(高汝霖) 등과 함께 탐라를 미리 방비하러 들어갔으나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군에 무참히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삼별초는 언제가 반드시 닥칠 여원연합군의 공격을 막고자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고여림이 자신들을 막기 위해 축조하던 환해장성을 이번에는 여원연합군을 막기 위해 계속 쌓기로 한다.



다만 탐라 해안선을 방어할 성벽과 장성을 쌓기에는 삼별초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탐라인들을 억지로 끌고 와 항파두리 토성 작업에 투입시켰으나, 이미 식량이 부족하던 삼별초는 인부들에게 노역만을 강요할 뿐 식량을 나눠주지 않았고 하필 그해 흉년까지 들어 먹을 것이 없던 탐라인들은 배가 고파 인분(人糞)을 먹어가면서 일을 하게 된다.



삼별초가 탐라에 입도할 당시만 해도 나름 호의적이었던 탐라인들은 계속되는 노역으로 인해 삼별초에 대한 불만이 점차 증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 보낸 악덕 관리들이 차라리 인정머리는 있었다는 이야기가 탐라인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했다. 진웅을 비롯해 일부 삼별초 장수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고는 있었지만 이런 모습에 극도의 자괴감을 느꼈다.



병력이 수급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였다. 조운선이나 관아를 약탈할 때 아무리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할지라도 사상자는 반드시 나오는 법이다. 진도에서 항쟁할 시절에는 삼별초의 대의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고, 삼별초 역시 관아를 습격할 때면 제일 먼저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진도에 있을 당시만 해도 자신도 삼별초에 들어오고 싶다는 노비나 천민들이 넘쳤고, 각지에서 삼별초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도가 섬이라고는 하나 물때가 맞으면 뗏목을 타고라도 넘어올 수 있을 정도로 육지와 가까웠고, 삼별초 역시 함선을 이끌고 반란이 일어난 지역해안으로 가 삼별초에 지원하는 노비들을 데려오기에도 용이했다.



하지만 탐라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탐라는 육지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 적어도 어선은 물론 뱃길을 아는 선원이 있어야 건너올 수 있었기에 직접 탐라로 넘어온 노비들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삼별초가 탐라로 거점을 삼으면서 진도에서처럼 재빨리 반란세력에 호응하기는 어려웠고, 반란을 일으킨 노비들 역시 점점 더 조정에 의해 손쉽게 제압되었다.



한번은 나주 쪽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함선을 탈취해 30여명 되는 노비들이 탐라로 넘어온 적이 있엇고 삼별초는 그들을 무척이나 환대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고려 조정에 의해 계획된 작전이었다.



탐라로 넘어온 노비들 가운데는 조정에서 보낸 살수들이 여럿 섞어있었고, 그들이 탐라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중이던 김통정 장군을 급습했다. 급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김통정 장군을 지키던 호위무사 둘이 죽었고, 결국 그때 나주에서 건너온 노비들은 다음날 모두 처형당했다.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삼별초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뭣보다 타고난 무인이던 김통정 장군 역시 총기나 열정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점점 더 술과 여자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우리가 먼저 진도로 쳐들어가서 진도를 다시 되찾거나 송경으로 가서 한판 싸워보고 죽자는 이들도 생겨났다.



상황이 이럴수록 뼈저리게 아쉬운 것은 바로 삼별초에 구심점이 될만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진도에 있을 당시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承化侯 王溫)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삼별초가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는 명분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의 진도 정벌 당시 사령관이던 배중손(裵仲孫) 장군이나 야별초지유 노영희(盧永禧)를 잃은 것 이상으로 왕온은 물론 그의 아들인 왕환(王桓)까지 홍다구(洪茶丘)의 손에 잃은 것은 아주 뼈아픈 실책이었다. 어떻게든 그 두 사람을 가장 먼저 탈출시켰어야 했음에도 경황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



여몽연합군의 공격 자체가 갑작스러운 탓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족을 그자리에서 죽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호위가 소홀하기도 했고, 뭣보다 홍다구의 뿌리깊은 복수심을 간과한 탓도 컸다. 제 아무리 몽골의 장수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족을 그리 쉽게 죽일 것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자 삼별초에게 고려의 왕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부족한 물자와 인원, 잃어버린 구심점, 방어하기엔 너무 넓지만 그럼에도 척박한 탐라의 환경까지 모든 것은 삼별초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진웅은 여원 연합군의 침략이 머지 않았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고 무언가 수를 내어야만 했다.



물론 삼별초가 지난 2년간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도에서 항쟁하던 당시부터 왜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해상전투에 도가 큰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으로 첩장(牒狀-일종의 국서)을 보내 호병(胡兵) 수 만을 청군(請軍)하는가 하면, 탐라로 건너온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일본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일본으로부터 원조에 대한 회신은 한 차례도 없었다.



진웅을 비롯해 삼별초가 자세한 내막을 알리는 없었다. 실제로는 진도의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다른 정권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일본은 3년 전 고려첩장과는 너무도 다른 내용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분명 3년 전 첩장에는 몽골의 덕에 귀부하여 군신의 예를 이뤘다고 적혔는데, 이번에는 야만적인 오랑캐를 따를 수 없어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적혀있었으니 말이다.



일본 조정은 이 두 첩장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삼별초의 첩장을 12조목으로 세세히 따져 정리했으니 이것이 후대까지 전해지는 고려첩장불심조조 (高麗牒狀不審條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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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가사도(賈似道) (3) 24.02.28 17 0 8쪽
57 가사도(賈似道) (2) 24.02.21 15 0 10쪽
56 가사도(賈似道) (1) 24.02.20 22 0 8쪽
55 해동제일검 (2) 24.02.20 18 0 9쪽
54 해동제일검 (1) 24.02.17 21 0 11쪽
53 배후(背後) (5) 24.02.16 22 0 8쪽
52 배후(背後) (4) 24.02.16 24 0 8쪽
51 배후(背後) (3) 23.08.08 44 0 10쪽
50 배후(背後) (2) 23.08.03 30 0 9쪽
49 배후(背後) (1) 23.08.02 35 0 11쪽
48 귀환(歸還) (6) 23.08.01 32 0 14쪽
47 귀환(歸還) (5) 23.08.01 36 0 13쪽
46 귀환(歸還) (4) 23.07.31 31 0 11쪽
45 귀환(歸還) (3) 23.07.28 36 0 11쪽
44 귀환(歸還) (2) 23.07.27 37 0 11쪽
43 귀환(歸還) (1) 23.07.26 41 0 11쪽
42 연심(戀心) (3) 23.07.24 36 0 12쪽
41 연심(戀心) (2) 23.07.20 39 0 13쪽
40 연심(戀心) (1) 23.07.18 43 0 12쪽
39 강만리(江萬里) 23.07.13 45 0 9쪽
38 파촉당문(巴蜀唐門) (2) 23.07.12 46 0 10쪽
37 파촉당문(巴蜀唐門) (1) 23.07.11 65 0 10쪽
36 기연(奇緣) (2) 23.07.10 63 2 13쪽
35 기연(奇緣) (1) 23.07.07 72 2 10쪽
34 옥추보경(玉樞寶經) (6) 23.07.07 52 2 12쪽
33 옥추보경(玉樞寶經) (5) 23.07.06 57 2 12쪽
32 옥추보경(玉樞寶經) (4) 23.07.05 51 0 10쪽
31 옥추보경(玉樞寶經) (3) 23.07.05 51 1 12쪽
30 옥추보경(玉樞寶經) (2) 23.07.04 6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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