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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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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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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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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4장-방황彷徨 (5)

DUMMY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났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공화국 수도 팔람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린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진 것처럼 매우 기뻐하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아마도 외성벽 바깥에서 인형마를 돌려보낸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눈길을 끌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지속적으로 마력을 소모하는 인형을 해제해도 된다는 것은 충분히 반길 일이기는 했다.

린델은 돌아가자마자 침대로 기어들어가 하루 종일 자는 것으로 피로를 풀겠다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지쳐서 질질 끌릴 지경이었던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지며, 어느새 힘차게 길을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티엘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들뜬 린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기사단 본부인 '가시나무의 뿌리' 는 뜻밖에도 중심가 근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흑마법사들이 스스로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것이며, 동시에 국가가 국민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의도적인 입지였다.

국민들이 꺼려하는 흑마법사를 필요에 의해 등용하는만큼,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흑마법사들에게는 그리 유쾌한 발언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런 대외적인 의도따위에 신경쓰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린델은 '파견나갈 때 마차 빌리기가 좋다'며 약간의 비꼬는 투를 섞어 킬킬 웃었다.

"교통이 편리하다는 건 좋은 점이긴 하겠지만. 앞으로 너도 통감하게 될걸?"

린델은 대문 앞에 멈춰선 뒤 티엘을 향해 살짝 몸을 비켜주었다.

기사단 본부의 문은 마치 오래된 대저택의 문처럼 고풍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문 위에는 기사단의 이름과도 같은 가시나무를 새기고, 그 바로 아래에는 마찬가지로 기사단을 상징하는 거대한 까마귀가 자리잡고 있다.

가시나무에서는 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메마르고 날카로운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지러운 곡선으로 덩굴처럼 뒤엉키는 가시나무는 뜻밖에도 비밀을 숨긴 듯한 신비로운 멋이 배어나왔다.

날개깃을 펼쳐 가시나무 숲을 감싸앉는 거대한 까마귀 역시도 눈길을 끌었다.

깃털 끝의 갈라진 모습이나 부드럽게 흐르는 털의 결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차라리 살아있는 새를 나무로 바꾸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한 솜씨가 돋보였다.

팔람의 모습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티엘이었지만, 예술품에 가까운 문의 조형에는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린델의 헛기침 소리가 티엘을 일깨웠다.

약간 미안해하는 얼굴의 린델이 배시시 웃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자, 들어가야지? 언제까지고 서있을 수는 없잖아."

"아······, 그랬었죠. 죄송해요."

"아냐. 슬슬, 갈까?"

린델은 까마귀의 머리를 본딴 문고리를 힘차게 밀었다.

경량화 주문이라도 걸어둔 것인지, 커다란 크기에 비해서 가볍게 열린 문은 새로운 식구를 환영한다는 듯 활짝 열려 안쪽을 드러내보였다.

"아!"

문을 지나치는 순간, 티엘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얇고 투명한 막을 통과하는 듯한 감촉과 함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물에 젖은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진 듯한 가뿐한 기분은 어딘지 조금 익숙한 느낌이었다.

티엘은 무심결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 느낌은 혹시······."

"몸이 좀 가벼워졌지? 이 안쪽은 정화구역이야. 부담을 많이 줄여줄거야."

정화구역. 린델의 말을 들은 티엘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를 보호하는 동시에, 생령의 성장을 촉진하여 마령 발생을 억제하는 결계식.

레가야 전역을 아우르는 대령결계(對靈結界)와 비슷했다.

레가야에서 나고 자란 티엘에게는 익숙하다못해, 알아채지 못한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물론 대공녀 시절에는 생령과 계약조차 하지 못했으니 마냥 티엘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가야의 결계와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대령결계는 레가야 출신의 마법사들조차 해석하지 못한, 대공가의 비전주문중 하나다.

머나먼 타국에서 완전히 동일한 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무리인 셈이다.


일단 결계에 몸이 익숙해진 티엘은 겨우 숨을 돌리며 문 안쪽의 시설을 살폈다.

어린 시절, 아첼에게 검은 가지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나 우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지녔을거라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정작 문 안으로 들어와 본 티엘의 감상은 훨씬 수수하고 단촐한 것이었다.

'평범한 저택?'

누군가가 신경써서 가꿔둔 것 같은 작은 정원, 오후 햇살을 받으며 차 모임을 가지기 좋은 식탁과 의자, 그리고 정갈한 분위기를 품은 본관 건물.

아무리 봐도 무시무시한 인간병기들을 수용해놓은 병영이라기보다는, 그저 늙은 귀족이 느긋한 노년을 위해 준비한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저택 뒤쪽에 마련된 연무장에는 표적지라던가, 대련용 무기들을 비치해놓는 등 조금은 예상한 것과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본다면 오히려 연무장 쪽이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우린 제식 훈련같은건 따로 없으니까. 마법은 검이랑 다르지."

티엘의 시선을 눈치챈 린델이 가볍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황당해 하는 티엘을 뒤로 한 린델은 성큼성큼 걸어 본관 건물로 들어섰다.

본관은 2층 구조였다.

일층에는 기사들의 휴식을 위한 커다란 거실과 서재, 공방, 그리고 스무 명 남짓한 기사들의 숙소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예산 배정이 짠 편인지 대개 이인 일실을 사용한다고 했다.

예산책정이 부조리하다며 예산을 짜는 행정관들을 씹는 린델의 얼굴에 은은하게 살기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현재는 남녀 비율이 극도로 차이가 나다보니 시설 사용은 여유로워서 좋다는 자조적인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좋은지 나쁜지, 어느 한 쪽으로 확실히 해 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야. 들어 가자."

몇 개의 방을 지나치던 린델이 문득 어느 방 앞에 멈춰섰다.

열쇠로 잠긴 문을 열자 두 사람이 쓰기에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이 드러났다.

티엘은 약간의 호기심을 보이며 문 바깥에서 먼저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침대와 책상, 옷장이 두 개씩, 작은 탁자 하나와 개인용 의자가 두 개.

문득 두 대의 침대 중 하나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다 뛰쳐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티엘의 시선을 눈치챈 린델이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 침대의 주인이 누구일지 직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나랑 리아가 쓰는 방이니까 일단 짐은 여기 두자. 이참에 옷도 갈아입는게 좋겠다. 이 옷, 빌려줄테니까."

린델의 말에 자신의 옷을 확인해본 티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말을 타고 질주했던 몸이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흙먼지도 제법 묻은 옷으로 첫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

린델이 꺼내준 옷은 흑백의 정장이었다.

다소 넓은 칼라와 소매 끝단이 흰 빛을 띄어, 검은 가지의 제복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여사제의 옷을 연상시켰다.

"먼저 갈아입어. 난 옆방에서 갈아입고 올테니까."

티엘을 배려한 린델은 눈치 빠르게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모처럼 혼자 남겨진 티엘은 뜻모를 한숨을 폭 내쉬며 빠르게 단추를 끌렀다.


여행에 걸맞는 옷만 고른 것이라도, 리아의 취향이 한껏 들어간 옷들은 입고 벗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단추와 매듭, 그리고 끈. 제법 서두르고 있는데도 허리띠를 풀기까지는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칼로 끊어버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떠오를 무렵, 갑자기 바깥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린델이 돌아오는걸까. 린델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티엘은 잠시 고민하다 아직 매듭을 다 풀지 못한 옷을 억지로 당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티엘이 입은 것은 평소처럼 자신이 고른 옷이 아닌, 리아가 멋대로 떠넘긴 옷이었다.

허리의 선을 강조하는 몇 개의 넓은 띠는 귀찮을 정도로 몸에 달라붙어 간단히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끝부분의 매듭조차 지나치게 단단히 조여져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아에겐 미안하지만, 칼로 끊어야······.'

"오, 벌써 왔냐, 린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갑작스레 벌컥 열렸다.

몸을 숨길 새도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맞부딪혔다.

흠칫 놀란 남성이 무심결에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선이 흔들리는 남자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시, 실례했습니다!"

남성은 금새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부리나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정작 티엘은 문고리가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에 애매한 신음을 흘릴 뿐, 그리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어깨와 윗가슴 약간이 드러났을 뿐, 속살까지 내보이는 사태에는 이르지 않았다. 게다가 뭣보다도 화를 내기에는 한 발 늦은 애매한 상황이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고리를 건 티엘은 재빨리 방안에 있던 칼로 매듭을 잘라낸 뒤 되도록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린델의 옷은 그리 손을 많이 타진 않았다.

"······새로 온 애한테 참 잘하는 짓이네요, 아드란. 애초에 다른 사람의 방문을 열 때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셔야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거 리아 하나로도 충분할텐데요."

"으윽, 리아 때문에 너무 편하게 생각했나봐. 아, 아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는 건 알지만."

"저였다면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내일 아침 동료들 얼굴을 못보게 만들었을거에요. 기사단 내 치한이라니, 세상에."

"부탁이니 그 이상 말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문 가까이로 가니 단단히 화가 난 린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걸쇠를 풀고 문을 열어보니 조금 전의 남성이 린델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보였다.

티엘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훈계중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티엘에게로 모였다.

"다 입었어? 하아, 미안해. 예의라고는 모르는 짐승이 돌아다니는걸 잊었네. 소리라도 지르지 그랬어."

"별 일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 여차했으면 잘라버렸을텐데."

"거 참 무서운 소리를 태연하게 하네!"

남자는 못내 억울하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린델은 뚱한 표정으로 부목을 대고 붕대까지 칭칭 감고있던 그의 팔을 콕 찔렀다.

요란한 비명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에도 전신을 누덕누덕 기워놓고 목소리는 잘 나오네요. 이번엔 며칠이나 노는 거에요?"

"놀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일 주일 정도는 더 있어야 뼈가 제대로 붙는다더라고."

린델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남자를 훑어보다, 마지못해 소개한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은 아드란 자스. 우직하게 마령이랑 정면대결밖에 못하는 바보야. 나중에 혹시라도 이 녀석이랑 한 조가 되면, 그 땐 마령보다 이 녀석을 조심하는게 좋아. 소위 미친 개 같은 남자거든."

"뭐, 부정은 안해. '흑섬'의 아드란이다. 잘 부탁한다."

아드란은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무심결에 다친 오른팔을 내밀려고 했던 그는 다시 한 번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고 말았다.

린델이 티엘에게 써 주었던 것처럼 치유주문서를 사용하면 금방 낫겠지만, 그 쪽은 아무래도 쉽게 사서 쉽게 쓸 정도로 값싼 물건은 아니다.

린델 본인부터도 자신이 다쳤을 때 주문서를 쓰기보다는 붕대를 감고 드러눕는 편이라고 했으니, 기사에 대한 대우치고는 굉장히 서글픈 현실이었다.

티엘은 불안감을 담은 시선으로 린델을 바라보았다.

린델은 뻔뻔스럽게도 '이런 게 일상이야'라는 표정으로 응수해왔다.

참으로 선배다운 태도다.

"아흐으, 아파라. 아, 참. 그러고보니 이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닌가? 둘 다 단장님이 기다리고 있던데? 일단 이야기는 살아남아서 하기로 하고, 먼저 올라갔다 오라고."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헛소리를. 가자, 티엘. 리아만큼이나 닮으면 안되는 사람은 피해야지."

"너 말이 심한 거 아냐······? 야, 야! 무시하지 마아!"

린델은 빠른 걸음으로 티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처량한 아드란의 목소리가 길게 울려도 새침한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를 때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살짝 피어있었다.

화를 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장난에 가까운 것.

아드란도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기사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린델도 웃음을 거둘 때가 왔다.

그리 넓지 않은 이층의 정면, 흑단으로 만들어진 묵직한 문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린델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린델 올핀, 복귀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

안에서 들려온 것은 싸늘하고 무거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고압적이고, 날카롭다.

목소리만으로도 여기까지 오며 만났던 기사들의 반응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린델의 손에 의해 문이 열린 직후, 티엘은 자신이 받은 인상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왔다.

일부러 인간성을 잘라낸 것처럼, 오로지 흑과 백의 무채색으로 전신을 두른 여인이 그 곳에 있었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검은 제복에서부터 티엘만큼이나 짙고 검은 머리칼, 그리고 군데군데 드러나는 새하얀 피부가 눈이 아프도록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교차하는 명암 사이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빛을 띄는 것은 소름끼칠 정도로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맹금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싸늘한 눈은 작열하는 불꽃을 얼음으로 가둔 것처럼 맹렬하면서도 싸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시선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얼음처럼 새하얀 얼굴의 왼편은 검은 안대로 가려져있었다.

그런 눈으로, 그런 모습으로, 악명높은 검은 가지의 수장은 조용히 서류를 읽으며 빠르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유려한 필체를 남기는 모습은 전형적인 문관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문득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본 티엘은 그녀가 마령과 싸우는 기사들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가늘고 긴,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태도 한 자루.

이상할 정도로 긴 검신은 우아함과 난폭함을 동시에 가진, 그 주인을 똑 빼닮은 특이한 검.

그 주인과 마찬가지로, 칼집 속에 잠들어 있으면서도 주위를 슬며시 짓누르는 듯한 묘한 검이었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완전히 압도당했던 티엘은 뒤늦게 눈을 돌려 책상 위의 명패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메이트리아크 카르날 오블리비언.

읽던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긴 메이트리아크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입구 근처에서 시립해있는 린델을 바라보았다.

"늦었군."

순간적으로 린델의 몸이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파견지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지쳤겠지. 고생했다, 린델."

겨우 몇 마디 말 사이에 린델의 얼굴이 몇 번이나 안색을 바꾸었다.

가까스로 생기를 찾은 린델은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보고부터 드릴까요?"

"아니, 보고는 내일 듣도록 하지. 가서 쉬도록."

린델의 얼굴에 작은 당혹감이 스쳤다.

검은 가지로 연행되온 마법사와 면담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임무 보고를 뒤로 미루는 일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단장의 재량에 참견할 수는 없다.

린델은 곧바로 인사를 마치고 뒤로 돌아섰다.

"행운을 빌어."

린델은 문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내 무거운 침묵이 혼자 남은 티엘의 어깨를 눌러오기 시작했다.

서랍 아래에서 몇 장의 서류를 챙긴 메이트리아크는 자신의 자리 바로 앞에 있던 작은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갸름한 타원형의 탁자 주위에는 여섯 개의 의자가 빙 둘러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들고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뒤집어놓은 메이트리아크는 티엘을 향해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앉지. 세워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겠지?"

언제 불러둔 것인지, 메이트리아크가 말하는 순간 소리없이 문을 열고 시종이 나타났다.

그림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묵한 시종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빠르게 찻잔을 돌린 뒤 유령처럼 사라졌다.

인간이 아닌걸까.

으스스할 정도로 생기가 없었던 시종의 모습에 선뜻 찻잔을 들어올리기가 어려웠다.

"우선은 환영한다. 검은 가지 기사단의 장, '경계의 감시자' 메이트리아크 카르날 오블리비언이다."

"이스티엘 라피다멘테입니다."

문 소속이 아니기에 당연히 권호는 없다.

동시에 티엘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으니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본명을 숨기는 것도 가능할터였다.

이후 '문'에 소속될 때 문제가 생길 여지는 있지만, 지금 당장 몇 수 앞까지 내다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티엘이 대답한 순간, 메이트리아크의 시선이 티엘을 찔렀다.

마음 속까지 꿰뚫어볼 듯한 예리한 시선이었다.

호흡, 시선, 손가락의 작음 움직임, 무엇 하나라도 작은 실수가 있다면 곧바로 속내를 짚어낼 것 같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아직 무뎌지지 않은 티엘의 직감은 분명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심 타는 속을 억누르며 긴장하는 것까지 읽은 것일까. 문득 메이트리아크의 가느다란 입술이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음산하고 두려운 미소였다.

"재미있군. 라피다멘테라. 네 이름은 그게 아닐텐데?"

얕은 수작을 알아봤다는 듯한, 약간은 날이 선 목소리.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희미하게 남아있는 제국식의 억양. 제국에서는 어느 강력한 흑마법사 가문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려운 짙은 흑발. 거기에 보기 드문 자안(紫眼). 어린 나이에 용과 계약이 가능할 정도의 강력한 생령 친화력. 아직 더 필요한가?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메이트리아크는 책상 위에 엎어두었던 서류를 집어 티엘의 앞으로 밀었다.

티엘은 한 방 먹었다는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흰 종이에는 872년 3월 레가야 항쟁에 관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자료의 끝 부분 일부만을 가져온 것인지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항쟁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던 대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담겨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중간 즈음에는 항쟁이 일어났을 즈음에 그렸던 티엘의 초상화까지 실려 있었다.

삼 년이 흐르며 레가야 성에 걸린 초상화와는 제법 달라졌다고는 하나, 그 그림을 다른 사람과 착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래서야 부인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다.

티엘은 조금 딱딱한 얼굴로 다 읽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눈동자가 티엘의 얼굴을 비췄다.

"제국의 항쟁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특히 레가야와 미라야, 두 마법국가 내의 항쟁이라면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실제로 너처럼 피앙투스로 망명하는 경우는 적지 않아. 실제로 이 나라까지 도착하는 자가 적을 뿐이지."

"······그럼 제가 왜 숨어있었는지도 아시겠군요."

"안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까지."

삼 년.

어둠 속에 숨죽여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지만, 그런 이들을 찾아내 사냥하려는 자에게는 짧은 시간이다.

오히려 삼 년 동안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검은 가지의 눈을 속였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그 신중한 성격은, 분명 앞으로도 도움이 될 터였다.

"일단 이 곳에 들어온 이상, 나로서는 검은 가지에 들어오라는 제안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원에도 이름을 올려야할테니 본명 그대로라면 네게도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겠지. 가명을 쓴 것은 레가야 공, 르비아의 눈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지?"

"······지금, 누구라고 하셨죠······?"

차분히 이어지던 목소리가 끊겼다.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뒤바뀌었다.

그 중심은, 방의 주인인 메이트리아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티엘이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르비아?"

텅 비어버린 목소리가 무의미한 말을 중얼거렸다.

"'흑천의 날개', 르비아 시스피케라 카르티치스. 그 외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메이트리아크는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는 듯 약간 짜증스레 대답했다.

설마 항쟁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았을터였다.

제국 귀족가의 계보는 곁가지가 거의 없는 가느다란 형태였고, 따라서 티엘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계승권을 갖고있는 자는 르비아 뿐이다.

이 조건 하에, 항쟁으로 티엘을 칠 인물이 또 누가 있을것인가.

그런데도 티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순간 메이트리아크는 리아와 올로비스가 올려보냈던 보고를 떠올렸다.

"······어리석은 것. 설마 스스로의 의식을 묻어버린거냐."

티엘이 사용한 마력의 속성은 빙결과 환각이었다고 했다.

리아가 신경써서 설명한 것은 칼라가스라는 이름의 빙결령이었다.

물론, 마법사인 이상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이는 없다.

하지만 메이트리아크가 주목한 것은, 저 유명한 시원의 용이 아닌 다른 하나의 생령이었다.

환각의 속성은 수많은 마력의 속성 가운데서도 인간의 정신에 관여하는 은밀하고 위험한 마력이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환각 주문은 현실을 보는 눈을 가리고, 무의식중에 특정한 기억이나 사고를 묶거나, 고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현실에서 도피해버리는 것을, 마법사들은 '의식을 묻는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환각이나 환영계의 마력을 다루는 자들 가운데는 종종 있는 일이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위해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묶어버린다.

다시말해 티엘은 조금 전까지 '항쟁의 배후'를 떠올리는 것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피했던 현실을 강제로 다시 직시해버린 상황이라면, 마음의 준비조차 할 수 없었던 당사자가 과연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도 망가지기 직전의 상태인,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정신으로.

'실수했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하게 김을 피워올리던 찻잔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아니, 아예 수면에서부터 새하얀 눈꽃이 피어나며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티엘이 의식적으로 일으키는 한파가 아니었다.

일부러 마력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감정에 휩쓸려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메이트리아크가 아닌, 그 마력의 부하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티엘의 목숨이 위험했다.

"진정하고 정신차려라. 의식을 놓치면 죽는다. 정신차려!"

하지만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미 멍해진 티엘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가슴을 가득 메우는 복잡한 심경을 뭐라고 불러야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어선 안됐다.

그 이름을 들어선 안됐다.

굳게 잠겨있던 마개가 뽑히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을 분노, 슬픔, 배신감들이 제 빛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이며 끓어올랐다.

'르비아, 오라버니······.'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겨왔던 단 한 사람의 배신.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단지, 인정할 수 없었다.

르비아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이상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을테니까.

어금니가 부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무심결에 내려다본 두 손에는 스스로의 마력이 엉겨붙어 자라난 얼음이 얇게 뒤덮여있었다.

티엘은 차갑게 얼어붙은 손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이마는 아무리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음으로도, 조금도 식힐 수 없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죠?"

뜻밖에도 얼음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오를만한 것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꺼진 불처럼 무언가 결여된 것에 가까웠다.

여전히 티엘의 마력은 불규칙적으로 일렁이고 있었고 얇은 갑옷처럼 두른 얼음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메이트리아크는 티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왼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자색의 마력이 타오르며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있던 태도가 주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명장 엘트리안이 만든 검, '황혼의 인도자'는 익숙한 위치로 움직여, 금방이라도 티엘을 베어버릴 듯한 자세를 취했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손에 걸리는 무게만으로도 이미 티엘을 베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디 검을 뽑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 메이트리아크는 기복없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목숨, 어디에 쓰려는 것이냐."

"······이미 당신의 물건이니 손대지 말라는건가요?"

"조금 전까지 죽은 것처럼 텅 비어있던 녀석이 무서울 정도로 타오르고 있지. 놓아준 그 순간 제 불길에 삼켜지리라는 것이 뻔히 보일 정도로. 아서라. 목숨의 가치를 잊은 자가 그걸 마음대로 내던질 수는 없어. 진정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게 아니라 그저 덧없이 목숨을 던질 생각이라면, 네가 저 문을 나서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티엘에게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대기중의 수분을 얼어붙게 만들며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마력이 싸늘한 광채를 머금고 거미줄처럼 퍼져갔다.

뿌드득 거리는 음산한 소리를 내며 새하얀 마력 위로 날카로운 얼음이 솟아났다.

뒤이어 건조하던 방 안에서 한겨울의 벌판을 연상시키는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고, 지면을 타고 흐르는 얼음은 어느새 메이트리아크의 발목을 잡아채려들었다.

순간 번개같은 섬광이 방의 중심을 갈랐다.

메이트리아크가 들고있던 태도로 탁자를 베어가른 것이었다.

바닥을 부술 기세로 성장하던 날카로운 얼음기둥들이 일제히 잘려나가며 새하얀 파편들을 사방으로 튀겼다.

검을 피해 자리를 박차며 뒤로 거리를 벌린 티엘은 몸을 낮춘 채 뜨거운 숨을 토했다.

"달리 쓸 데도 없는 목숨인데, 하다못해 죽을 자리 정도는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동경하는 척 할 뿐인 네가?"

태도의 칼끝이 티엘을 향했다.

활을 걸지 못한 이상, 티엘로서는 그 거리를 넘어설 수단이 없었다.

칼을 세워든 메이트리아크가 느릿하게 한 발을 내딛었다.

칼날에 떠밀려 뒷걸음치던 티엘의 등이 어느새 벽에 닿았다.

"사흘 전, 네가 올로비스와 리아와 마주쳤을 때 이미 네 몸은 지나친 전투로 망가진 상태였다고 들었다.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연전을 치른 흔적이 남아있었다더군. 죽어도 상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건가? 그렇게 죽음을 바란다면 이야기는 간단해. 지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 그만이지. 네가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목 앞에 떠있었다.

침을 삼키면 목젖이 살짝 스칠 정도였다.

메이트리아크의 말처럼 한 걸음만 앞으로 나서도 치명상이다.

그러나 얼어붙은 다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겠지. 네가 한 것은 각오가 아니라 포기일 뿐이니까."

메이트리아크가 싸늘하게 내뱉은 말에, 막 꺼져가려던 티엘의 반항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마령을 향한 살의, 르비아를 향한 증오는 거짓이 아니겠지. 어디까지나 네 거짓된 자멸욕구를 위한 방패로 삼았을 뿐. 죽음에 가치를 찾는 이들은 흔히 삶에서 도망친 자들이다. 상처입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는 주제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용기도 없어. 그러니 누군가를 핑계삼아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르는 방법을 택하지. 겨우 스물도 되지 않은 풋내나는 아이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건 무언가 뒤틀렸다는 의미이고."

목을 짓누르던 태도가 칼집으로 되돌아갔다.

메이트리아크는 태도를 칼집 째 바닥에 세워짚었다. 손잡이로부터 칼집을 타고 흘러내린 짙은 보랏빛의 선이 방바닥을 조용히 뒤덮어갔다.

아직까지 공중을 떠돌던 티엘의 마력이 새롭게 끼어드는 이질적인 마력에 빠르게 밀려났다.

주문식 하나 없이, 티엘의 마력이 불러왔던 냉기가 순식간에 거두어져 갔다.

그저 희미하게 젖은 자국만 남긴 채 마지막으로 불던 바람까지 사라진 뒤, 메이트리아크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티엘에게 조용히 충고했다.

"복수가 무가치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절박한 마음이라면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수가 이루어졌을때의 이야기야. 복수를 가장한 자살따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티엘은 반박할 수조차 없다는듯, 어깨를 떨며 고개를 떨궜다.

이를 악물며 분노를 억누르는 소리도, 몇 차례나 연속해서 방 안을 울렸다.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다음 순간, 조용한 중얼거림과 함께 티엘의 손아귀에 흰 빛무리가 엉겨붙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겨우 삼선을 넘길 정도였던 마력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만큼 짙고 순수한 마력이 농후하게 휘몰아쳤다.

메이트리아크는 마력을 감지하는 즉시 몸을 약간 틀었다.

사선으로 흘리거나 튕겨내는 것이라면, 메이트리아크 자신보다 더 강한 마력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티엘의 두 손 안에서 서서히 창의 모습으로 자라나는 마력은 이미 팔선급에 이르고 있었다.

마력의 근원이 리아가 이야기했던 용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메이트리아크의 짐작이 맞다면, 저 일격은 막거나 흘릴 수조차 없을 가능성이 있었다.

메이트리아크는 망설임 없이 태도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태도의 지나치게 긴 칼날은 빠른 공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슬푸른 칼날의 예기(銳氣)는 티엘을 자극해, 마력의 가속에 박차를 가했다.

시원의 용, 칼라가스.

멸신 엘드리안의 권능이 깃든 그 숨결은 휘말린 모든 것들을 무로 되돌린다.

무고한 피를 보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상대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목숨은 노리지 않아.'

티엘은 일부러 숨결이 아닌, 평범하게 칼라가스의 마력만을 끌어와 주문을 구성했다.

메이트리아크가 용의 숨결로 착각해 물러서준다면 그걸로 좋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목숨을 거둘 생각은 없다.

끝까지 방해한다면, 그저 두터운 얼음으로 발을 묶은 채 빠져나가, 활과 별의 서만 챙긴 채 선풍의 질주로 빠르게 도망칠 뿐이다.

이를 악문 티엘은 아직 반도 채 빠져나오지 못한 태도의 손잡이를 겨냥했다.

검을 쳐내고, 그 부분을 기점으로 대량의 얼음을 출현시켜 검 자체를 봉인할 생각이었다.

복잡한 계산식을 빠르게 정리하며, 주문을 시동시키기 위한 이름을 불렀다.

"칼라-"

그 순간, 거짓말처럼 뽑혀나오던 태도가 칼집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검을 뽑는 동작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납도라니, 적을 눈 앞에 두고 할 짓은 아니다.

티엘의 공격은 얼마든지 받아칠 수 있다는 여유의 표현인가?

그러나 빛을 뿌리던 검신이 칼집에 완전히 가려진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던 마력이 폭발하며 날카로운 화살처럼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티엘은 잘 알고 있었다.

마력을 움직여 특정한 현상을 구현하는 마법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단련된 동작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마법을 모르는 자가 마(魔)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

영격술(靈擊術)이었다.

그러나 빠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다.

채찍의 끝자락처럼, 티엘이 가까스로 인식한 순간 이미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마력 덩어리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티엘의 명치에 내려꽂혔다.

폐가 터져버리는 것 같은 격통과 함께 티엘의 몸이 거칠게 떠올랐다.

"카학!"

말에게 걷어차이기라도 한 듯한 충격이 전신을 내리찍은 탓에 순간적으로 의식의 끈을 놓칠 뻔 했다.

충격은 티엘 뿐만 아니라 방 전체를 꿰뚫은 듯, 천장과 벽 곳곳이 떨리며 가느다란 먼지가 흘러내렸다.

부딪힌 충격으로 건물이 울리는 마당에,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벽에 쳐박혔던 티엘이라고 멀쩡할리도 없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힘겹게 숨을 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고, 치유 주문서로도 아직 다 낫지 않았던 다리에서도 다시 상처가 터져 옷자락을 시뻘겋게 물들여갔다.

"위력은 최대한 줄였지만 일단은 움직이지 않는게 좋아. 내장파열은 피했지만 늑골에 금이 갔을테니."

티엘은 흐려진 눈을 들어 가까스로 메이트리아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메이트리아크는 칼집째로 검을 다시 풀어놓으며 담담하게 말을 마쳤다.

일격에 한 사람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어버리고도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괴물같은 인간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무엇 하나 확실하게 이루지 못하는 자신은, 얼마자 보잘것 없는가.

티엘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또렷하게 들리던 메이트리아크의 목소리도 점차 멀어져가고, 차가운 어둠이 온 시야를 덮어갔다.

다시 반발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던 메이트리아크는 지나치게 조용해진 티엘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이미 그 곳에는 영혼 없는 인형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일까 염려하며 가까이 다가갔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티엘을 대신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 있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잔향이었다. 굉장히 옅지만, 분명 환각계의 속성을 지닌 마력이었다.

"······또 도망친거냐. 가엾은 아이로구나."

대답은 커녕 작은 반응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묻어버린 것 이상의 중증이다.

꺼림찍한 기억만을 봉하는게 아니라, 아예 외부 세계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 철저한 도피였다.

검을 내려놓은 메이트리아크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티엘의 손을 모아쥐었다.

조금 전 불러일으켰던 마력의 영향인지, 다소 거친 그 손에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한 줌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짊어진 것이 무겁더라도, 간단히 버려서야 되겠느냐. 지금까지 널 지지해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쓸쓸한 독백이 덧없이 방안에 흩어졌다.


작가의말

오늘은 문장이 좀 거치네요...상태가 좀 안좋아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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