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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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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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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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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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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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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3장-개화開花(2)

DUMMY

계곡의 중간 지점까지는 마을 사람들도 자주 다니는 곳이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간 곳은 상당히 인적이 드물었다.

산등성이가 해를 가려 다소 어두운데다가 간혹 산짐승들과 마주칠 정도로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곳이다.

티엘이 멈춰선 곳은 그런 계곡 사이에 마련된 작은 공터였다.

아이의 보폭으로도 채 두 자리를 채우지 못할 정도로 좁은 장소였다.

이 곳이 진짜 '수련장'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은 공터는 단순한 입구일 뿐, 이 위 덧씌워진 또 하나의 공간이 진짜 수련장이다.

복잡한 결계와 의식을 통해 고정시켜둔 이공간은 마력을 이용해 정해진 조건을 맞춰주어야만 열린다. 티엘은 바위 하나에 손을 얹었다.

문의 역할을 하는 외부 결계석이었다.

'아첼이 어떻게 했더라······."

티엘의 마력이 바위를 적셔갔다.

바위 표면에 숨겨져있던 술식이 마력에 반응하며 가느다란 선과 이사드 문자가 떠올랐다. 결계식에 접속은 성공한 셈이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마력으로 그려진 문양들이 부드럽게 이동했다.

두어 번 더 건드린 끝에 '잠금쇠'를 찾은 티엘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분명 촉매로 주목나무 가지와 소나무를 태운 재, 그리고 마력을 머금은 머리칼이 약간 필요했던것이 기억났다.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나뭇가지에 묶고 잿가루를 살살 뿌리는 것으로 촉매가 완성됐다.

그러나 촉매를 돌 위에 올려놓고 마력을 흘려보내도 이공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뭔가 빼먹은게 있나?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티엘은 돌 위에 떠오른 주문식을 이리저리 넘겨보며 혹시 도움이 될만한 것이 적혀있진 않은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문득 희미한 인기척이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솜털이 구르는 듯한 가벼운 감촉이었지만, 정작 뒷목에 내려앉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왔구나?"

분명 눈이나 손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주위의 마력을 읽을 수 있게 됀 티엘은 자신의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미약하지만 지성을 갖춘 조그만 마력덩어리.

아직 육신을 갖추지 못한 작고 어린 생령이었다.

티엘은 작은 새를 불러들이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마력 덩어리는 그 곳이 자신의 둥지인 양 자연스레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 희미한 그림자 같은 것이 손안에서 몽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기본적인 육신조차 구성하지 못한 요정급의 생령이었다.

사실 그 생령은 며칠 전부터 티엘의 주위를 맴돌곤 했었다.

겉모습으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이 일대에서 생령의 기척을 둘 이상 느낀 적도 없고, 티엘을 볼 때마다 반겨주는 모습에서 은연중에 하나의 생령이 여러 차례 찾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제법 호기심이 많은 생령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 저것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자리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이동하여 티엘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또래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티엘에게는 친구나 동생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녀석이었다.

"내가 좋은거야?"

생령은 티엘의 손으로 날아와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고양이가 뺨을 부비는 행동과 비슷했다.

티엘이 약간의 마력을 뽑아 손 위에 올려두자 쪼르르 달려와서는, 잠시 망설인 끝에 그 것을 흡수했다.

티엘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느낌이 이럴까.

'지금 이 아이와 계약하면, 나도 영마사······, 흑마법사라 부를 수 있는걸까?'

카르티치스의 혈통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생령과의 친화력이 강하다. 하지만 생령을 다루는 것은 그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생령을 사역하는 데 있어, 제국과 공화국은 그 방식이 달랐다.

생령을 소환하고, 지배하여 명령을 내리는 것이 제국의 방식이다.

그러나 아첼의 경우, 생령에게 빌려온 마력을 술자가 운용하여 주문으로 위력을 증폭시키는 공화국식의 마법을 썼다.

물론, 어느 방식이든 티엘로서는 배운 적이 없었다.

굳이 배운다면 아첼처럼 공화국식으로 배워보고 싶었지만, 아첼은 어째서인지 생령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문득, 어제 활터에서 떠올랐던 것과 비슷한 욕심이 눈을 떴다.

아첼에게 실력을 증명해보이고 싶다.

인정받고싶다.

너무 자만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엿한 마법사로서 아첼과 나란히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엘의 머리를 스친 것은 집을 나오기 직전 아첼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입을 것, 먹을 것을 대기 위해 혼자서 사냥에 나서고, 돌아올 때마다 피로를 못이겨 쓰러지듯이 잠드는 것을 한두번 본 것이 아니었다.

만일 생령과 계약에 성공한다면, 아첼이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아첼이 짊어지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눈앞의 생령은 요정, 가장 낮은 단계의 생령이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틀어질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순간적인 충동에 휩쓸려 결정해도 좋은 것일까.

아첼이 어째서 흑마법을 가르쳐주지 않는지, 사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직 아냐. 아첼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

계약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아냐. 아첼은······.'

마음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일까. 마치 악마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속삭임이, 다름아닌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음의 흔들림은 그대로 마력에 드러난다.

티엘의 불안을 느낀 생령이 움직임을 멈췄다.

"미안,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기분이 상한 것일까. 생령의 움직임이 조금 힘이 없었다.

환각계의 생령이었다면 약간이나마 의심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속성조차 발현되지 않은 어린 생령 정도로는 '인간을 속여 마력을 빼앗는다'는 사고를 하지 못한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 티엘은 자신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생령에게 다시 약간의 마력을 내밀었다.

잠시 경계하던 생령이 주춤주춤 다가와 사탕을 받아가는 것처럼 조그만 마정석을 받아갔다.

그 작은 선물은 토라진 생령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티엘의 주위를 몇 바퀴 뱅그르르 돌던 생령은 다시 티엘의 머리 위로 톡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낮잠이라도 자려는 것처럼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태평한 그 움직임에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 느낌이다.

생령과 계약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낸 티엘은 머리 위의 생령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여 납작한 바위 위에 몸을 실었다.


결계를 여는 방법을 모르는 이상 이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초 예정대로 아스트라를 연습하는 것은 무리였다.

얌전히 마력 운용이나 연습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천천히 끌어올려진 마력이 손 안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기초적인 근력강화는 이제 어느정도 익숙했다. 제어에 실패하면 위험한 아스트라를 제외하고서,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수련법은 마정석을 형성하는 것 정도였다.

마력을 한 점으로 모으면 고유한 빛을 띄기 시작하고, 액상화하다, 마침내 투명한 결정을 이루게 된다.

본래라면 1 시안의 마력만 있어도 마정석의 형성은 가능하지만, 그래봐야 쓸데도 없고 난이도만 높아진다. 때문에 아첼이 제시한 기준은 50 시안이었다.

티엘의 마력 절반을 조금 웃도는 양이기에 실패하면 꽤나 지치는 일이다. 때문에 손 안에서 마력을 조금씩 집중시키는 티엘의 얼굴은 활을 쏠 때 만큼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때 갑자기 머리위에 있던 생령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차례 바르르 몸을 떤 생령은 티엘의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그 순간, 불현듯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름이 떠올랐다.

애냐.

흐릿한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생령을 볼때마다 머릿속에서 그 이름이 어렴풋이 울렸다.

이 생령의 이름은 당연히 그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혹은 티엘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인 것처럼.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이름을 입으로 말하면 뭔가 달라지는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새로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부르고 싶다.

하지만 불러선 안된다.

순간 티엘은 갑자기 불어닥친 갈등의 정체를 깨달았다.

'생령과의 계약? 어, 어째서?"

티엘의 실수는 하나였다. 이름모를 생령과 가까이 지냈다는 것.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면 상관 없었으리라.

하지만 티엘은 무심결에 생령에게 자신의 마력을 주었고, 이야기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교감을 이뤄버렸다.

예상치 못한 의식의 시작에 당황한 티엘이 생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생령은 티엘에게 맞기겠다는 것처럼 티엘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어렴풋한 진실이 머릿속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믿어보고 싶어.'

순간 머릿속으로, 생령들과 자연스레 대화하며 그 힘을 빌리는 아첼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동경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이미 시작된 계약의 의식을 취소하는 방법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가슴을 펴자.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첫 생령을 맞아들이자.

마을에 정착할 때까지 마주했던 흑마법사의 어두운 면은 잠시 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르자.

티엘은 한껏 끌어모았던 마력을 주변으로 펼쳤다.

놀랍게도 희푸른 마력은 스스로 선을 그리며 티엘을 감싼 작은 마법진을 그려냈다.

손으로 그려넣은 것이 아닌, 단순히 의지만으로 펼친 마법진 위에서, 티엘은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온 생령의 이름을 불렀다.

"애냐!"

속박을 풀고, 자신을 묶은 사슬을 끊어, 눈앞의 존재를 부른다.

속박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얽매어, 눈앞의 존재에게 답한다.

마법사가 이름을 부르고 생령이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두 존재는 하나로 엮이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계약의 시작이며, 흑마법의 시작.

두근두근 고동치는 가슴 속으로, 자신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또다른 감정이 가늘게 흘러들어왔다.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운,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 이상의 무언가를 만난 듯한 기분.

티엘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구분할 수 있는 그 감정들은 계약한 생령에게서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에 눈을 두어번 크게 깜빡이던 티엘은 주변의 마력이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내 마력도 마찬가지야······.'

티엘이 의도적으로 마력을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나 한결같은 속도로 혈관을 흐르던 마력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깊은 물살을 남기며 흐르고 있었다.

마력의 양이 늘었다.

아니, 정확히는 티엘의 것이 아닌 마력이 자연스럽게 섞인 채 함께 흘러라고 있었다.

티엘의 마력을 일부 끌어들인 생령, 애냐가 자신의 마력을 내어주며 점점 티엘의 마력을 늘려갔다.

생령을 소환한 상태이기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제법 소모했을 텐데도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차오르는 마력에 티엘의 마음은 들뜨고 말았다.

가슴속에 고여있던 마지막 불안감이 덧없이 쓸려나갔다.

티엘의 눈에 공터 옆을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이 들어왔다.

조심스레 손을 담그고, 개울물에 마력을 섞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졸졸 흘러가던 개울물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집어든 돌멩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던지자 얇은 얼음이 깨지며 제법 멀리까지 물방울이 튀었다.

뭔가, 가슴속을 막고 있던 것이 조금씩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지나치게 적은 마력량 때문에 고생했던 것들이, 이런 소소한 장난으로 조금씩 풀려나간다.

물론 티엘이 알고있는 술식은 별로 없었다.

원소의 구성도 하지 못하고, 단지 마력을 움직이는 것 정도만 배운 수준이다.

하지만 한 가지, 티엘이 술식을 알고 있고, 실제로 써본 적도 있는 주문이 딱 한 가지 있었다.

티엘은 하늘 높이 활을 겨누며 시위를 당겼다.

"새벽을 비추는 창이여!"

마력이 빠르고 정교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혼자서 끙끙대며 술식을 짜올리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순식간에 완성된 아스트라가 시위에 올라, 예리한 광채를 품은 채 해방을 기다렸다.

티엘의 마력만을 썼을 때처럼 주위로 한기가 맴돌지는 않았지만, 손 안의 아스트라는 지난 번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다.

티엘은 약간의 자신감을 담아 얕은 개울을 향해 아스트라를 날려보냈다.

쉬리리리릭-

효시(嚆矢)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졸졸졸 흐르던 물살을 꿰뚫었다.

조금 거친 입수로 인해 떠오른 물방울, 그리고 뒤이어 작은 폭발이 흩뿌린 물보라.

순간적으로 대기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미세한 세빙이 하늘을 수놓았다. 산의 그림자조차 닿지 못한 세빙은 오전의 햇살을 받아 보석 가루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게······, 흑마법······."

손이 가늘게 떨렸다. 떨림은 팔을 지나 가슴으로 이어가며 점점 커졌다.

흥분.

가슴이 벅찰 만큼 강렬한 흥분이 혈관을 따라 흘렀다.

언제나 짐덩이에 불과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생령과의 계약을 성공시키고 그 마력까지 끌어왔다.

해냈다는 생각이 작은 머릿속을 채우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얼굴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흥분 때문에, 티엘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바스락!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덜컥 놀란 티엘은 가슴이 철렁 하는 심정으로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 곳에는 아첼이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 손은 바로 옆에 있던 나무의 가지를 쥐고 있었던 듯 했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아첼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절대로 함부로 떨어뜨려선 안됀다고 강조했던 활조차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아첼이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충격의 중심에는 티엘이 있다는 것······.

"티엘, 너······?"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티엘의 얼굴 역시 창백해졌다.

서둘러 아첼에게 다가가려던 티엘은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넋을 잃은 것처럼, 아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탓이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공허한 얼굴이 '너, 지금? 지금 무슨······.' 등의 단편적인 단어를 중얼거렸다.

숨이 막혔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새삼스레 가슴속으로 뜨거운 열기가 확 밀려왔다.

아첼의 공허한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손이 입과 코를 꽉 틀어막은 듯 숨이 턱 막혀왔다.

멍하니 티엘을 응시하던 눈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움직였다.

겁먹은 티엘이 놓쳐버린 활, 그리고 티엘의 주위를 걱정스레 맴도는 생령의 기척.

순간 아첼의 눈이 차차 초점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또렷해지는 눈빛에 담긴 것은, 단 한 번도 티엘을 향했던 적이 없었던 싸늘한 분노, 그리고 실망이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조금씩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아첼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내딛어질 때마다 가슴을 누르는 죄책감이 무거워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표정이 너무나 두려웠다.

결국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짜악!

그리고 그 순간, 티엘의 눈앞에 불이 번뜩이며 메마른 소리가 호수변을 울렸다.

"아······?"

잠시동안 티엘은 자신이 따귀를 맞았다는것도, 무시무시한 힘에 떠밀려 쓰러졌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프다는 것보다, 아첼이 자신을 때렸다는 것에 더 놀라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답해, 이스티엘.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답해. 대답해······!"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분명 한여름일텐데도, 계곡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위아랫니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몸이 떨렸다.

마지막 이성을 간신히 남긴 듯한 한 마디가 티엘의 심장을 싸늘하게 얼려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들어올린 손이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졌다.

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뜨거운데도, 이상하게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 나는······."

티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첼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매서운 손찌검이 날아들어 또다시 고개가 꺾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분노한 아첼은 티엘의 멱살을 틀어쥐고 가까운 나무에 찍어눌렀다.

볼 안쪽이 터져 입안에 피가 가득 차버린 터라 안그래도 괴롭던 호흡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티엘의 손이 힘없이 아첼의 손목을 잡았지만 마력을 담지 않은 손으로는 아첼의 손을 풀어낼 수 없었다.

티엘의 가느다란 목이 꺾여버릴 듯 애처롭게 흔들렸다.

"큭,아······, 아체······하악!"

"말해. 말해! 말하라고! 대체 혼자서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말해애애애애애!"

아첼은 미친듯이 화를 내며 티엘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순간 아첼의 손에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죽는것도 무섭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을 죽인 아첼이 홀로 남을 것이 더 두려웠다.

아무리 자신이 실망을 안겨줬다고 해도, 그렇게 티엘을 죽여버린 아첼이 상처받지 않을리는 없으니까.

그 때 아첼의 힘을 채 이기지 못한 옷깃이 찢겨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티엘은 아픈걸 인지할 새도 없이 터져나오는 기침에 헐떡였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첼은 그 상태로 한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티엘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던 그녀는 마력을 끌어모아 티엘을 들이받았던 나무를 후려쳤다.

아스트라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몇 십년을 자랐을 소나무의 둥치가 도끼로 쳐낸 것처럼 터져나가며 신음을 흘렸다.

미처 손을 보호하지 못한건지, 나무를 친 아첼의 주먹도 엉망이 되어 피로 흥건해졌다.

그러나 아첼은 아무런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화를 참는 것처럼도,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흘러내린 핏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자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안 아무것도 못봤어······? 은비늘 호의 선원들에게서, 마령에게 습격받은 상단의 일원에게서, 아무 것도 느끼질 못했어? 그렇게 멍청했어? 그렇게 눈치가 없었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안그랬잖아. 그런데 왜······!"

아첼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조금 전과는 달리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티엘의 몸이 움찔거렸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아첼의 목소리는 비수처럼 티엘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첼은 감싸쥔 두 손을 그러쥐었다. 부서진 주먹에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더 많은 출혈이 일어났다.

"봤잖아. 다 보고, 알만큼 알았잖아. 흑마법사는, 영마사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거. 네가 몰래 마법서를 빌려왔을때, 솔직히 기뻤다는거 알아? 기초마법 뿐이지만, 차라리 너 스스로 알아나간다는게 진심으로 반가웠어. 나로서는 흑마법밖에 가르치지 못하니까. 그래서 일부러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흑마법사 따위 물려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왜 똑같이 바보같은 짓을 하는거야?"

대답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감히 용서해달라는 말 만큼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티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아첼이 자신을 때리길 바랐다.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때린다면 조금이나마 후련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첼은 그런 기회조차 주디 않았다. 상처난 팔을 휘두르다 핏방울이 뿌려지며 티엘과 티엘 주위의 땅을 적셨다.

아첼의 피를 머금은 흙은 스스로 움직여 특정한 이사드를 만들어냈다. 피를 매개로 한 결계술식이었다.

"넌 항상 그랬지. 쓸데없이 착해 빠져서는, 자기 앞가림보다 주위 사람을 도우려 했지. 얼빠진 계집애 같으니. 너만은 이따위로 살지 않길 바랐는데······."

"아······첼······."

"곱게만 자란 녀석이 쓸데없이 왜 남의 일까지 떠맡으려는거야.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이해는 하는거야? 할 줄 아는거라고는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것 뿐인 주제에!"

"아첼, 그래도 난-!"

"닥쳐!"

점차 아첼의 말이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티엘의 가슴에서도 뜨거운 감정이 서서히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아첼은 왜 항상 혼자서만 지고 가려는거야! 가족이잖아! 왜 나만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럼 아첼이 힘든건 뭐가 되는데! 나,남의 일까지 떠맡는다고? 우린 남이 아니잖아! 아첼이니까 돕고 싶은 거잖아!"

결국 그동안 마음 한 켠에 쌓아왔던, 일부러 잊고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기에, 가슴속에 묻어둔 서운한 감정은 오히려 더 많았다.

"그따위 알량한 생각으로 생령과 계약을 해? 그렇게 죽고싶은거야? 그렇다면 말해! 얼마든지 편하게 해줄테니까! 그 따위 물러터진 생각으로 돕긴 누굴 도와? 세상이 그렇게 친절하고 편하게만 보여?"

처음이었다.

이토록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날카롭게 대립한 적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고, 누구보다도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다른 사이이기도 할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두 사람의 생각은 서로에게서 조금씩 엇갈려있었다.

"약해지면 침식당해. 강해지면 유혹당해. 때로는 몸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영혼마저 빼앗겨. 매 순간 악몽을 보고, 매일 밤 죽음과 동침해. 하루 하루를 마지막으로 살아가며 애착을 가진 모든 것이 사라져버려! 지키고 싶은 것이 자신 때문에 바스라져버리는, 그런게 바로 흑마법사란 말이야!"

아첼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면서도 목소리에는 연민이 가득했고, 끓어오르는 마력때문에 상처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었지만 그러쥔 손아귀는 슬픔으로 떨고 있었다.

"전에도 내가 말했지. 넌 되도록 이기적으로 살아달라고."

"기억······나."

"한 번의 선의로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겠지. 살아가며 행복을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위기 앞에서는 그저 너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될 뿐이야. 그러니까 대가없는 희생이라는 건 없어. 그건 그저 위선일 뿐이야!"

"그럼 내게도 대가를 받아가! 아첼이 하는 일들, 나에게 대한 대가없는 희생 아니야?"

"끝까지 들어! 단순한 등가의 교환이 아니야. 열을 희생해 하나의 대가를 얻을 수도, 한 명을 희생해 모든 자를 구할 수도 있는게 흑마법의 원칙이야. 넌 제멋대로 바뀌는 저울대에 대체 뭘 믿고 희생물을 올릴 생각이야!?"

말문이 막힌 티엘의 등 뒤로 소리없이 움직이는 빛조각들이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티엘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떨어진 나뭇잎이나 돌 틈의 그림자를 타며 이미 그녀의 주위를 둥그렇게 감쌌다.

곳곳에는 이미 미세한 마정석의 파편들이 섞여있었다. 아첼의 피를 머금은 마정석들이 어둠 속에서 음험하게 빛났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티엘이 반사적으로 아첼을 바라보았다.

아첼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펼쳤다.

티엘을 감싸고있던 마정석들이 한 순간 새하얀 불길로 타올랐다.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는거야. 언제 사라져버릴 지 모르는 흑마법사니까. 그러니 마음가는대로, 이기적인 선택을 해버리는거야.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여서까지 말이야."

"잠깐마-"

"켈리아!"

더이상의 항변은 허락되지 않았다.

수호령 켈리아의 마력이 순식간에 새장처럼 솟구쳐 티엘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사이사이로 손이라도 내뻗을 수 있을 정도의 성긴 우리였다.

그러나 당황한 티엘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사이 계속해서 가지를 뻗은 마력은 어느새 반투명한 보랏빛의 벽으로 변해버렸다.

출구따위는 없었다.

커다란 원통형의 감옥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길은 오로지 머리 위로 뚫린 구멍 뿐. 그러나 매끈매끈한 내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티엘은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 벽을 때렸다. 그러나 켈리아의 마력은 이제 갓 어설픈 강화술을 익힌 티엘의 공격에 뚫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력으로 보호하던 손이었지만, 부딪힌 순간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 이거 풀어, 아첼!"

"늦었어."

아첼은 슬픈 눈으로 티엘을 보다 말없이 돌아섰다.

티엘은 막막한 심정에 창살을 마구 후려쳤다. 하지만 금새 손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힘껏 두드려도, 창살 자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어. 사흘쯤 머리나 식히고 있어. 아직 방법이 있을······, 있을······, 거······."

갑자기 말을 더듬는 아첼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첼의 몸이 크게 휘청 하더니 가슴을 움켜쥐며 나무에 기대섰다.

뭔가를 억누르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던 아첼은 잠시 비틀거리다 그대로 주저앉으며 갑작스레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꺾으며 입을 가린 그녀였지만, 순간적으로 탁한 붉은 빛이 티엘의 눈에 비쳤다.

잘못 본 것일까.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그러나 티엘의 바람과는 달리, 다시 한 차례 몸을 웅크린 아첼의 입에서는 더이상 손으로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가 울컥 터져나왔다.

끈적한 피가 돌과 나무를 적셨다.


작가의말

요정급 정도면 보통 개나 고양이 정도의 지능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됍니다.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정도는 구분 가능한 수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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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3) 19.07.14 149 2 37쪽
22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2) 19.07.13 150 5 54쪽
21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1) 19.07.13 142 4 44쪽
20 3장-개화開花(7) +2 19.07.12 171 6 46쪽
19 3장-개화開花(6) 19.07.12 155 5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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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개화開花(2) +2 19.07.08 181 5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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