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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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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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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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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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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1장 - 초혼招魂(4)

DUMMY

란은 꽤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는 도시다.

조금 떨어진 도심지와 항구는 평지에 세워져 있었지만 왕성이 있는 곳은 지대가 높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자체로는 그리 기이할 것도 없겠지만, 왕성이 들어선 대지가 마치 창처럼 좁고 높게 솟아있다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대하(大河), 카제린 강이 도시를 갈라놓기에, 도심지와 왕성이 올라앉은 절벽을 잇는 것은 초대 대공의 이름을 딴 다리, 카제린 대교가 유일하다.

얼핏 보기에는 불편하기만 한 이런 구조는 항쟁, 그리고 그 항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대공가 내에서의 항쟁이라면 당연히 왕권다툼인 만큼 자국민의 피해를 꺼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공왕을 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지나쳐야 할 곳이 바로 도심지라는 것은 대규모 군대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고, 반대로 방어하는 쪽에서는 그만큼 대응할 시간을 갖출 수 있는 법이다.

백성을 인질로 삼는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런 방패로 목숨을 구한 대공 역시 그리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역으로 말하자면, 항쟁이 일어났을 때 패배한 쪽은 달아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깊은 밤중이건만 주변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거대한 숲의 일부를 마음껏 유린하는 불길도 일조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몇 개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많은 횃불이었다.

숲을 불태우는 화마(火魔)보다도 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은 살의와 학살의 불꽃이다.

성 안에 살아있는 것을 남기지 않겠다는 추악한 살의가 그들을 부추겼다.

항쟁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쥐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심지어 패배자와 손을 잡았던 자들까지도, 더이상 인간으로서 살아갈 가능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그들에게 준비된 미래는 고작해야 세 가지. 타버린 잿더미나,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이, 그리고 그 두가지가 되기 직전까지 도망치는 자들.

"하아······, 하아······, 윽!"

언제부터 자신이 달리고 있었던 것인지, 티엘은 미처 떠올리지도 못했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눈부신 빛을 보고 정신을 잃었던 것 까지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찾은 직후 눈에 들어온 것은 비명과 혼란으로 가득한 성과 숲 외곽지역의 상황이었다.

정황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돌아선 티엘은 더더욱 깊숙한 숲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가지에 긁히고, 넘어져 깨진 상처를 보살필 시간 따위는 없다는 것은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도 명확하기만 했다.

곳곳에서 미친듯이 피어오르는 불꽃과 비명소리,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횃불의 빛이 의미하는 것이 항쟁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항쟁이 벌어진 이상,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제국의 일곱 대공국의 하나인 레가야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직함은 이 상황에서 도움은 커녕, 오히려 방해만 된다.

'무서워······. 싫어, 무서워······!'

정황상 이미 그녀의 아버지는 패배한 것이 확실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얼핏 보인 병사들의 복색은 조금은 낯선 미라야의 양식이었고,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는 뽑아든 검이나 갑주에 끈적한 핏자국을 묻히고 있었다.

발각되면, 죽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티엘은 란의 구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찾는 병사들의 목적은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리라.

어리다지만 대공의 여식, 그 외모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어린 여자. 아마 욕보일대로 욕보여진 뒤, 자유롭게 죽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산 채로 썩어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티엘의 체구는 또래에 비해서도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눈앞의 수풀이 부스럭거릴 때마다 작은 토끼처럼 놀라면서도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고, 몸을 낮춰 조용히 웅크린다.

공들여 기른 검은 머리칼이 유난히 흰 피부를 가리며 어두운 수풀 속에서 보호색이 되어준다.

그렇게 숨어있는 덤불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병사들은 티엘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지저분한 욕짓거리를 쏟아놓으며 다시 사라졌다.

목숨을 건 숨바꼭질에 몸이 덜덜 떨렸다.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몸을 말고 있던 티엘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숲의 그림자 사이로 뛰어들었다.

'누굴까······.'

대공왕들의 왕좌가 언제나 혈육의 피로 물들었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오늘의 참사는 쉽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공가의 항쟁에 타국의 힘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계승권을 지닌 사람도 티엘과 사촌 오라버니 르비아 뿐.

그러나 르비아가 아버지를, 아니, 자신을 죽이려 할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젠가 물에 빠진 티엘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물에 뛰어든 적도 있는 르비아다.

그가 항쟁을 일으킨다면 내일은 레가야가 신언사들의 나라로 바뀐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일이 일어나는 모양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단순히 타국의 힘을 빌린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어느 한 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던 수많은 군사들과, 젊지만 비슷한 연배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적염의 사자' 에일런까지 함께라면 지금처럼 레가야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의 병력이다.

몇 대를 거슬러 올라서야 간신히 대공가의 피를 찾을 수 있을 지방 귀족 한 두 명이 빌려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친혈육보다도 더더욱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을 의심하는 것만은, 티엘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접어둔 티엘은 쓰라린 상처를 감싸지도 않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력은 다루지 못하지만, 생령들의 존재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대해온 그녀다.

생령의 기척 정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티엘은 일부러 생령의 기운이 진한 곳을 찾아 도망다녔다.

레가야 전역을 뒤덮은 대령결계의 영향을 받은 생령들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혹여 조금 난폭한 녀석이 있더라도, 결계의 주인인 대공왕과 그가 정한 직계 후계자에게는 손을 대지 못한다.

하지만 미라야에서 온 자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마법사가 아니라면 생령의 모습만 보아도 겁을 먹을 것이고, 그 것은 다시말해 티엘이 달아날 수 있는 소중한 활로가 된다.

하지만 레가야의 수도 란, 그 거대한 도시의 윤곽을 그리는 티엘의 머릿속에서는 안전하게 시가지로 뚫고 내려갈 방도만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작 지금 달리고 있는 곳 조차도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이렇게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짓밟히는 일만 남을 테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어린아이에게 판단력이라는 것이 남아있을리 없다.

정신없이 달리던 와중에 미라야의 갑옷을 입은 병사가 세 명이나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넘어지다시피 멈춰선 티엘은 곧바로 뒤돌아 달리려 했지만, 이미 따라붙었던 다른 병사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티엘의 어깨를 누군가가 와락 움켜쥔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꺄아아아아!"

"공녀님, 눈 감으십시오!"

심장이 철렁 떨어지려는 찰나, 귓가에 들려온 것은 티엘이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가신 중 한 명인 카릭스 이드마의 목소리였다.

티엘은 새파랗게 질린 채로도 그 말을 따라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뒤로 기울어지던 등이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에 받쳐졌다.

"카루알!"

젊은 마법사는 생령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젊은 나이이기에 아직 권호를 받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수석 궁정마법사 헬루타가 직접 선별해 제자로 기른 그 기량은 거짓이 아니다.

카릭스는 동년배에 비해서도 상당히 숙련되고 강한 마법사였다.

허공에 펼쳐진 백색의 마법진이 순간적인 섬광을 불러내며 추적자들의 시야를 단숨에 불태웠다.

"크아악! 뭐야, 이거!"

"내 눈!"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눈에는 태양빛을 직접 올려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인 강렬한 자극이다.

눈뜬 장님이 된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무기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눈먼 칼날이 귓전을 스치며 나무와 흙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카릭스는 티엘을 품에 감싼 채로도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검을 능숙하게 피하며 적진 사이를 누볐다.

혹시 피가 튀어 티엘이 놀랄까 염려한 카릭스는 일부러 칼등으로 적병을 후려쳤다.

가장 가까운 놈의 머리를 힘껏 차올리고, 그 기세를 살려 검을 휘둘러 두 녀석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움켜쥐려는 자들의 안면에 그대로 철권을 꽂아넣었다.

순식간에 세 명이나 해치워버린 카릭스는 티엘을 다시 등 뒤로 보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새 남아있던 병사들은 이미 시력을 회복하고 무기를 똑바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병사들이 쥔 검은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어 휘두를 때마다 옅은 잔상을 남겼다.

미약하게나마 마법이 깃든 무기였다.

마법사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은, 신언사에 익숙한 동시에 마법이 깃든 무기를 들고있기 때문이리라.

광역주문을 대비해 거리를 벌린 채 다가오는 두 적을 바라보던 카릭스는 순간적으로 발을 굴러 바닥에 떨어져있던 병사들의 무기를 차 올렸다.

그와 동시에 카릭스가 쥐고있던 검의 칼날에 푸른 빛의 문양이 나타났다.

"하늘의 창, 섬광의 바람! 파도쳐라, 일렉티아!"

푸르스름한 마력을 머금은 칼날이 횡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칼날에 엉겨붙어있던 마력이 막 떠오른 두 자루의 검에 옮겨타고, 다시 그 검들은 카릭스의 검에 튕겨나가며 한 순간 새파란 벼락의 파도로 변했다.

뇌격계 주문의 특성상 조준이 조금 부정확해도 적에게는 적중한다.

때문에 카릭스는 즉시 몸을 돌려 이스티엘을 감싸안았다.

혹시라도 벼락이 튀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티엘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크아아악!" "그만······, 어어어억!" "아, 안돼-!"

카릭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비명소리와 피와 살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작은 소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티엘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며 카릭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카릭스의 주문은 두 명의 병사만을 불태우는데 그치지 않았고, 이미 제압해 쓰러뜨렸던 세 명의 병사까지 휘감았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끔찍한 최후를 목도한 티엘의 가슴이 겁먹은 아기새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하지만 카릭스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끊임없이 시초신 아이넬라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입니다, 공녀님······. 다행입니다."

카릭스의 연한 갈색 머리칼과 회색의 옷은 이미 여기 저기 피로 물들어있었다.

연회장 근처를 돌아다니며 경계태세를 갖추던 카릭스다. 아마 그도 이 곳까지 오면서 수 차례는 적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카릭스는 자신의 상처를 돌볼 생각도 없이, 그저 티엘이 진정할 때까지 자세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전신을 떨던 티엘은 겨우 만난 아군을 힘껏 껴안았다.

"카릭스 경······."

"아시겠지만 항쟁입니다. 전하께서 금방 제압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위험합니다. 궁성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울테니,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안전하게 머물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사람들은요?"

누구를 묻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어린 공녀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셋. 그 중에서도 지금 걱정할 만한 사람은 둘이다.

"메리온 시녀장은 전력이라 할 수 없으니 괜찮을겁니다. 차석 궁정마법사라면 이 레가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한 분이니 어떻게든 무사하실테죠. 공녀님만 무사하시면, 곧 다시 만나실 수 있을겁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주워섬기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미노스티야가 살아있다면, 감히 미라야의 병졸들이 활개를 치며 돌아다닐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셔야 할 작은 주군을 눈앞에 두고서, 그녀를 더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넣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욕짓거리를 삼키며 자신을 합리화한 카릭스는 티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안전한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카릭스는 티엘을 살짝 안아들었다. 티엘은 저항조차도 하지 않았다.

티엘이 혹시 뒤를 돌아볼까 봐 조심스레 그녀를 받친 카릭스는 티엘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슬프다던가 겁을 먹은 정도가 아닌, 그것조차 느낄 수 없는 듯 넋나간 표정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이 작은 소녀를 어떻게 지켜내야 할 것인가······.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느낌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카릭스는 그대로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티엘은 운좋게도 시가지로 내려가는 길에 상당히 가까이 와 있었다. 절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예상 밖으로 방향을 잘 잡은 셈이다.

카릭스는 또다시 시초신 아이넬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주위로 마력을 퍼뜨렸다.

영마사와는 달리 기분나쁠 정도로 차분한 마력이 걸려든다면 분명 신언사의 것이다.

물론, 잘못 사용하면 이쪽의 위치까지 알리게 되는 위험한 수단이지만, 탐색계의 생령을 가지지 못한 카릭스로서는 당장 주변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근방에는 신언사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군. 마력을 다소 낭비하더라도 빨리 이 숲을 벗어나는게 우선이야.'

마침 주변에 신언사도 없겠다, 아낌없이 마력을 뿌려 도주 경로를 찾아내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 생각한 카릭스는 남아있는 것 중 절반 정도의 마력을 끌어내 주위로 퍼뜨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나 다름없는 너저분한 탐색법이다.

탐색령의 마력이 아닌 한, 단순히 마력으로 훑는 것은 손으로 더듬어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법 넓은 범위를 훑을 수 있다는 장점을 빼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형편없다는 단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제길! 정작 중요한 부분은 보이질 않아. 시가지로 내려가는 길목을 살피는게 우선인데······. 게다가 생각보다 병사가 많아. 어렵군······'

혹시 티엘에게 불안감을 안겨줄까 두려운 카릭스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오늘 밤 안에 티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실 수 있을지 걱정하는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다.

신언사의 유순한 마력따위가 아니다. 거칠게 날뛰는 짐승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영마사의 마력이다.

하지만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카릭스의 형태와는 달리 한 방향으로 집중되는 형식이었다.

누군가 생령에게 탐색, 아니, 추적을 명했다!

'헬루타 님?'

탐색이나 추적 속성의 생령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마력양이라면 거의 기사급의 생령이다. 해당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헬루타는 고령인데다가 병까지 않고 있어 이번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했지 않은가.

불길한 예감이 카릭스를 덮쳤다.

분명히 익숙한 마력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등골이 서늘했다.

'서······, 설마? 아냐. 그럴리가 없다!'

카릭스는 수석 궁정마법사 헬루타를 떠올렸다.

처음 권호를 얻은 날 부터 오늘날까지 레가야를 위해 평생을 바친 충신이다. 그가 항쟁에서 대공왕의 혈육인 티엘을 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써 그렇게 자위하려 했지만 지금은 항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다.

게다가 헬루타는 르비아를 상당히 아꼈다.

미노스티야가 대공위에 오르기 전, 그의 형이었던 시스피케라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시스피케라가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당한 이후에야 미노스티야에게 왔다는 사실을, 카리스는 애써 잊으려 했다.

하지만 카릭스는 자신의 바람이 부질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항쟁 자체는 처음 겪는다고는 하지만 카릭스 역시 이 피와 투쟁의 나라, 시엘리아의 인간이었으니까.

"필리아스!"

그 순간 또 하나의 강력한 마력이 바로 곁에서 폭발적으로 활성화 되었다.

거친 쇳소리를 울리며 허공에 몇 개의 가느다란 선이 나타났다. 빛으로 사람을 베어버릴 듯 섬뜩한 반사광이 카릭스의 눈앞에서 번뜩였다.

카릭스는 실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끼쳐오는 한기에 검을 바닥에 찔러넣으며 온 몸으로 검신에 매달렸다.

급제동의 축이 된 무릎과 검신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지만, 가까스로 카릭스의 몸이 멈춰섰다.

필리아스의 빙사(氷絲)가 순식간에 주변을 침식하고 있었다.

오염이 퍼지는 것처럼 빠르고 단순한 마력행사지만 그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살짝이라도 닿았다간, 마력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은 순식간에 전신이 얼음으로 뒤덮여버릴 것이다.

"일렉티아!"

검을 뽑거나 마력을 다듬을 시간 따위는 없다. 거의 반사적으로 부른 생령은 자신과 이질적인 마력을 향해 더불어 마력을 뿜어냈다.

차디찬 한기와 백열하는 전격이 맞부딪히며 잠시동안 주변에 돌풍을 일으켰다.

일렉티아의 마력은 새하얗게 작열하는 마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방출된 마력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친듯이 날뛰며 얼음을 녹여버렸다.

그러나 순간적인 마력폭발의 충격으로 카릭스는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땅에 떨어지는 순간 티엘을 감싸 충격을 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처가 없진 않을 것이다.

"공녀님!"

"괘, 괜찮아요······."

티엘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얼음파편에 긁히기라도 한 듯 길게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제법 깊이 베여 오른쪽 소매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상처를 감쌀 시간은 없었다. 상대의 발자국 소리는 지척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가까웠다.

카릭스는 몸을 굴리며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일렉티아의 마력이 다시 차오르며 벼락불이 칼날을 휘감았다.

어두운 숲 속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며 아직 그림자에 감춰져있던 습격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봐주기라도 하려는 듯,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릭스는 점차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병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헬루타 님."

궁중의 수석 마법사는 여유를 가득 머금은 채 빛 아래로 나왔다.

혹시, 혹시라도 위기에 빠진 주군을 위해 달려왔다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주군의 하나뿐인 딸을 보는 눈에서는 결코 충성심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왕의 최측근이 주군을 배신했다.

갑옷 안쪽에 심장을 노리는 비수가 꽂혀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군을 배신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이 제국의 방식이고, 이것이 제국인의 충성심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헬루타가 충성을 바친 것이 미노스티야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제국인은 단 한 명의 주인만을 섬기며, 그를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는 자들이기에.

진짜 주군을 위해서라면, 거짓 주군을 위해 거짓 충성을 연기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밤중에 고생이군, 카릭스 경. 항쟁이 일어난 마당에 자리만 지키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일흔이 되어가는 노마법사의 모습이 티엘의 눈에 비춰졌다.

인자한 할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이지적인 학자의 느낌을 주는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포로 다가왔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며 조금씩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노마법사의 옷에는 이미 누군가와 격전을 치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즐겨 입던 흰 옷에 여기저기 핏자국이나 그을음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갈갈이 찢겨진 왼쪽 소매 너머로 보이는 왼팔은 거멓게 죽어있었다.

독에 중독된 상처는 아니다.

마른 나뭇토막처럼 생기를 잃은 채 천천히 썩어가는 저 상처는 분명히 죽음속성의 마력이 남긴 상처다.

헬루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는 레가야 안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자의 방패라는 권호를 지닌 레가야의 방패에 깊은 상흔을 남길만한 죽음 속성의 생령.

그에 부합하는 생령은 카릭스가 알기로 단 하나, 아첼레란도의 계약령인 파드미엘 뿐이다.

'저 상흔은 분명히 파드미엘의 마력이다. 거기에 단순접촉이 아니야. 마력으로 억눌렀지만 분명 아스트라에 당한 상처다. 파드미엘의 아스트라라면 아첼레란도님의 최후의 수······. 아무리 상위자라지만 그 아첼레란도님조차 당했다는 이야기인가.'

파드미엘. 이프라이엘과 함께 기사급의 생령으로서, 이프라이엘이 전략병기라면 파드미엘은 대인 병기의 의미가 강하다.

이프라이엘처럼 대규모 피해를 줄 수는 없지만, 한 개체를 노릴 때라면 '죽음'의 속성만큼 위력적인 속성도 드물다.

단 한 번 뿐이지만 파드미엘의 화살의 위력을 본 적이 있는 카릭스는 아첼과 대치하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라면 다르다.

수석 궁정마도사 헬루타 마야드 그람마인, 또는 '성자의 방패' 헬루타.

방어에 한해서라면 대공 미노스티야조차 뛰어넘을 거라고 칭송받는 레가야 흑마법의 이인자.

아군으로 있을 때는 무엇보다도 든든한 방패였지만,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난 헬루타의 모습은 병으로 수척해진 얼굴에도 그야말로 사신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카릭스는 이를 악물며 한 발을 조심스레 물러서 티엘을 보호했다.

"병석을 털고 일어나신 걸 보니 축하드려야 할테지만······, 적어도 반갑다고 말할 상황은 아니군요.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이것'의 덕을 보고 있지. 말하자면 나는 지금 내 생명을 깎아가며 서 있는 거라네."

헬루타의 손에는 수수한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보석을 깎아 나선 모양의 고리를 만든 특이한 형태의 반지였다.

겉보기에는 조금 특이할 뿐이지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재질은 바로 마석, 생령의 심장을 가공한 물건이었다.

자체로도 막대한 힘을 머금은 마력의 결정체인 마석에, 무언가 술식을 새로 새겼다면 더할나위없는 강력한 영장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늙어버린 몸, 그마저도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려 약해질대로 약해진 노마법사를 전투에 밀어넣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대체 얼마나 강력한 영의 심장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미라야조차 대쪽같은 자존심을 꺾고 간혹 우리나라로 심장석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지. 개중에는 꽤 강력한 생령의 심장석도 있다네. 궁정 마법사라면 이런 정도의 심장석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말이야. 그걸 깎아서 영장을 만드는 것 정도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알 바 아닙니다. 당신이 생명을 깎아가며 앞을 막은 목적이 궁금할 뿐입니다."

"라피다멘테와 싸웠다는 것은 눈치챘겠지? 그렇다면 두 말 하여 무엇하겠나. 자네가 뒤에 숨긴 공녀님을 내어 주겠나."

아첼의 이름이 들리자 티엘의 몸이 움찔했다.

티엘이 유독 아첼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그 이름을 꺼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헬루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더없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두 개의 사탕을 주고는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같은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 너그러움조차 티엘을 향한 것이 아닌, 카릭스를 향한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지금 내 목숨을 깎아가며 이곳에 서 있네. 그러니 긴 시간은 줄 수 없어. 내 그분께 잘 말씀 드려 보겠네. 이대로 가기에는 아까운 목숨 아닌가."

"······공녀님을 지키기로 맹세한 목숨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역시 공녀님을 해칠 생각은 없어. 일반병들은 무시하는 것 같지만, 일단 가능하면 생포해 오라는 명이 있었지."

"광장에서 공개처형하기 위해서? 제가 그따위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헬루타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릭스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자신의 검을 눈 앞에 똑바로 세웠다.

"사람이 두 개의 목숨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헬루타. 당신도 잘 아실테지요."

헬루타는 기사급의 생령을 셋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속성은 '추적', '빙결', 그리고 '성자의 수호'와 '반격'. 비록 공격적인 면에서는 특출나다고 할 수 없지만, 방어라는 면에서는 최상위로 꼽히는 '성자의 수호'와 '반격'의 속성이 문제가 된다.

헬루타의 권호, '성자의 방패'가 바로 그의 생령 '카치엘'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카릭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가 가진 생령은 전격의 일렉티아, 빛의 카루알 뿐이다.

영마사는 결투에서 비교적 빠르게 마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계약한 생령의 수가 적을 수록 각 상황에 대한 대응 방법이 크게 제약된다는 것이 단점이다.

카릭스로서는 헬루타의 방어를 뚫을 만한 힘은 없다.

반대로 방어태세로 전환해 모든 생령들의 마력을 모은다고 해도, 필리아스의 강력한 빙결주문을 막을 자신은 없었다.

주문식을 구축해 위력을 증폭시키려고 해도, 헬루타가 그것을 내버려둘 이유도 없다.

결과는 이미 눈에 보였다. 당장 죽느냐, 아니면 한 순간이라도 더 발목을 잡아두느냐의 차이 뿐.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공녀님."

카릭스는 등 뒤의 공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이런데서 주저앉았다간 아첼 님도, 저도, 모두 개죽음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목숨을 이어받아 어디서라도 살아 주십시오. 이 곳······, 시가지로 내려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곳입니다. 남서쪽으로 가십시오. 너무 남쪽으로 내려가시면 절벽뿐이니 주의하시고······."

"카릭······스 경······?"

"제가 마력을 폭발시키면 바로 뛰어가시면 됩니다. 아마······. 병사들은 공녀님이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 예상하고 있을 테니 일단 시가지로 빠져나가시면 안전합니다. 그 후에는 다른 나라로 어떻게든 빠져 나가십시오."

"저, 저······혼자 도망쳐봤자······."

평소라면 어떻게든 달래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다. 카릭스는 재차 설득하는 대신, 마력을 폭발시키는 동시에 이스티엘의 등을 떠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 가서 살아남아! 죽어버린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티엘은 순간적으로 들린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울음을 머금고는 카릭스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게 두진 않는다! 쫓아라, 필리아스, 렌, 카치엘!"

노마법사의 노호와 함께 세 마리의 생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날개를 펼친 뱀 필리아스, 일곱개의 눈을 가진 편익의 새 렌, 거울같은 등갑을 가진 딱정벌레 카치엘.

완전히 육신을 갖춘 기사급의 생령들은 단순히 육체로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카릭스조차 단신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어마어마한 전력이 계약자의 의지에 따라 숲의 그림자를 향했다.

"막아라, 일렉티아!"

그러나 카릭스의 굳은 의지에 따라 푸른 벼락이 꿈틀거리며 생령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갈이 찢어지는 뇌격이 그물처럼 퍼지며 지속적으로 생령들을 옭아맸다.

하지만 일렉티아의 마력은 본래 한 순간 폭발적인 위력을 내뿜고 사라지는 벼락속성이다. 장시간 뇌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마력을 빠르게 태우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바닥에 검을 꽂은 채 일렉티아의 힘을 유지하던 카릭스는 초조한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때 불규칙적으로 타오르는 벼락을 노려보던 카치엘이 다른 생령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카치엘의 속성은 '성자의 수호'와 '반격'. 강철처럼 단단한 겉날개를 펼친 카치엘은 일부러 뇌전의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거칠게 방전하던 마력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급격하게 방향을 꺾었다.

적의를 품은 벼락이 자신의 주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자신과 계약한 생령의 마력이라면 재차 생령을 통해 제어가 가능했을테지만, 저 벼락은 카치엘의 마력에 휘감겨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상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일렉티아!"

다시 한 번 푸른 문양을 머금은 칼날이 허공을 찢었다.

벼락과 벼락이 서로 상쇄되며 주위의 흙과 나무를 새카맣게 태웠다. 그러나 벼락을 상쇄하는 것과 동시에 발 아래에서 싸늘한 냉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필리아스의 마력이 실처럼 바닥을 잠식하며 카릭스를 에워싸려 하고 있었다.

생령의 힘을 재차 끌어오려고 해도, 짧은 시간에 연속적으로 힘을 펼친 일렉티아에게는 한 호흡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카릭스는 옷깃에 꽂아두었던 장식용 단추를 뜯어 바닥에 던졌다.

화속성의 마력이 담긴 보석이 산산조각나며 빙결 속성의 마력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불꽃과 냉기가 부딪히며 격렬한 수증기를 피워올렸다.

잠시 후 지진이라도 난 듯한 충격과 함께 바닥이 거북의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졌다. 아슬아슬하게나마 방어에 성공한 흔적이었다.

"공화국식의 마법은 느리지. 하지만 자네에게는 그리 나쁜 수는 아니었겠군. 아첼레란도에게서 배운겐가?"

단순히 결투에서의 효율을 생각하자면, 생령을 소환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지시하며 마법사 스스로도 별개로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제국식, 레가야식의 흑마법이 가장 빠르고 강력하다.

반면 공화국식의 흑마법은 생령의 마력을 빌려와야만 하기에 다소 느리고, 기본적인 위력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카릭스가 그것을 감수하고 공화국식의 마법을 함께 익힌 것은, 마법사의 기량에 따라 생령의 마력을 더욱 강력하게 발현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카릭스는 다른 생령들을 보호하려는 듯 한 걸음 앞에 서있는 카치엘을 노려보았다.

마력을 흡수, 반사하는 '반격'과 물리적인 충격을 흡수하는 '성자의 수호'는 서로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한다.

그 흡수량을 뛰어넘는 강력한 공격만이 철벽같은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아직 힘이 모자란 카릭스의 생령들만으로는 기사급의 방어계 생령을 뚫을 힘이 없다.

'노려야 할 것은 단 한 점.'

생령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감지 수단은 인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티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추적속성의 생령인 렌 뿐. 일곱개의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티엘의 마력을 쫓는 저 생령만 쓰러뜨린다면, 헬루타가 티엘을 찾아낼 가능성은 크게 떨어진다.

물론 그 사실은, 렌을 거느리는 헬루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렌은 세 체의 생령 중에서도 언제나 후방에 위치하며, 반드시 카치엘의 등 뒤에 숨어 카릭스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비록 헬루타 본인은 노쇠하여 직접 마력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세월에 깎여나가지 않는 생령들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까다로운 상대였다.

"포기하게. 어차피 자네가 시간을 끈다고 해도 렌의 마력이면 티엘을 찾아낼 수 있어. 말 그대로 개죽음일세."

"······퉷."

폭발의 여파로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찌르기라도 한 것일까.

끈적한 핏덩이가 숨통을 가로막으며 잔 기침이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억지로 검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 카릭스는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손으로 찍어 칼날에 먹였다.

검신에는 이미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규열이 잔뜩 번져 있었다.

마력의 부하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카치엘의 껍질을 쳤을 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인지, 어느쪽이든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피를 먹여 마력의 동조를 높인다고 해도 검신 자체가 붕궤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때문에 헬루타는 조금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의 힘으로는 날 꺾을 수 없네. 비키게. 죽이고 싶지는 않아."

"비켜설리 없다는걸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마력으로 근육을 강화한 카릭스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주변의 나무줄기를 발판삼는 입체적인 움직임은 카릭스의 특기였다. 젊은 나이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헬루타를 상대로 꺼내들 수 있는 몇 안되는 패였다.

그러나 막 헬루타의 등 뒤를 잡으려는 순간, 오히려 카릭스의 목 근처로 싸늘한 냉기가 다가왔다.

필리아스가 그의 목을 노리고 커다란 턱을 벌렸다. 단검처럼 빛나는 송곳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몸을 빼려고 해도, 카치엘의 마력이 어느새 카릭스를 둘러싸는 마력방패를 친 상태였다.

부술 수 없는 모루와 자유자재로 급소를 노리는 망치.

하지만 카릭스는 오히려 왼팔을 휘둘러 필리아스의 입 안으로 쳐넣었다.

예리한 이빨이 살을 파고들며 순식간에 상처부위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카릭스는 필리아스를 떼어내는 대신 악착같이 검을 휘둘렀다.

안그래도 균열이 가 있던 그의 검이 카치엘의 마력방패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부러졌다.

아니, 부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뭣-?"

칼날은 부러진게 아니라,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었다. 부서진 검의 절반이 마력을 머금은 채로 화살처럼 렌에게 향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마력을 머금은 칼날 정도라면 그리 대단한 공격은 아니다.

하지만 카릭스의 칼날을 감싼 것은 놀랍게도 아스트라였다.

반 아스트라(Semi-Astra). 특정한 물체를 매개로 삼아 아스트라를 형성하는 편법은 분명 아첼이 드물게 사용하는 특수한 기술이었다.

아첼의 아스트라는 흔히 보는 것들과는 다르다. 본래 영격술에 속하는 것을 마법으로 구현해낸 아첼의 아스트라는, 동일한 양의 마력으로도 몇 배는 효율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스티엘에게 집중하다 뒤늦게 아스트라를 눈치챈 생령은 어떻게든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실수다.

차라리 영체화를 하는 편이 보다 안전했다.

헬루타의 입에서 '사라져'라는 명령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카릭스의 일갈이 그 실수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확정지었다.

"카루알-!"

순간 헬루타의 일갈을 끊으며 강렬한 섬광이 폭발했다.

눈을 찌르는 빛에 소환을 해제하려던 마력이 순간적으로 어긋났다.

막 영체화하려던 렌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고, 그 찰나의 빈틈을 따라 일렉티아의 마력을 머금은 칼날이 생령의 가슴을 꿰뚫었다.

찰나의 시간, 카릭스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우연히도 가슴에 박힌 칼날이 심장석이 있는 부분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비록 품은 마력이 렌에 미치지 못했기에 심장석을 단번에 부수지는 못했지만, 이질적인 마력이 몸 중심에서 폭발하는 것은 생령에게도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다.

왼팔의 뼈가 필리아스의 턱 아래에서 바스라지는 끔찍한 감각을 무시한 채, 상처에서 흐른 피를 받은 손이 렌의 심장을 파고든 칼날을 향했다.

"일렉티아, 모든 것을 불태워라!"


작가의말

제국식 흑마법은 흔히 말하는 소환계열. 생령 본체나, 그 마력+의식 일부만을 소환해 부리는 방식. 빠르고 위력적이지만 제어가 어렵죠.

공화국식 흑마법은 단순히 마력을 빌려와 본인이 사역하는 방식. 제국식에 비해 느리지만 추가로 위력 향상도 가능하고, 비교적 섬세한 제어가 가능합니다.


백마법은? 공화국식보다도 느리지만, 대신 이쪽은 속성 제한이 느슨하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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