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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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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0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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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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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8쪽

1장 - 초혼招魂(5)

DUMMY

카릭스의 손이 기묘한 문자를 그렸다.

허공을 미끄러지는 손끝의 움직임을 따라 공중에 선명한 마력의 선이 그어지고, 동시에 부러진 칼날에도 동일한 형태의 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렌은 마지막 힘을 다해 칼날을 뽑아내려 몸을 뒤틀었지만, 그보다 카릭스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더 빨랐다.

비명과 포효가 어지럽게 얽히는 숲에서도 유난히 맑고 선명한 소리가 따악 울렸다.

"카치엘! 억눌러라!"

손가락을 튕긴 순간 갑작스레 번갯불에 휘감기는 이사드에 당황한 노마법사가 명령을 내렸다.

추적령의 심장에 박힌 칼날은 조금 전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그리고 훨씬 더 거친, 마치 죽어가는 자의 단말마와도 같은 눈부신 뇌광(雷光).

그것은 심장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아닌, 심장석 자체를 소모해서 뿜어내는 것이었다.

-쌔애애액!

한계를 넘어, 자신의 소멸을 대가로 불사르는 마지막 마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령들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렌의 전신을 휘감은 번개의 사슬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카치엘은 그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겉날개를 펼쳐 헬루타를 보호하는 자세만을 취했다.

그 사이 비명을 지르던 렌은 점점 심장을 파고드는 전격에 미쳐 날뛰며 애꿎은 나무나 바위를 할퀴고 쪼았다.

추적의 속성을 지녔지만, 이미 카릭스의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그의 심장은 기어이 일렉티아의 전격에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한 번 균열이 가기 시작한 심장석은 순식간에 균열을 넓혀가며 조각조각 갈라지고,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막대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생령의 심장석이 폭주하며 일어나는 쌍소멸 현상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 생령들은 아무런 술식도, 제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그 과정에서 좁은 지점에 지나칠 정도로 응집된 마력은 순간적으로 주위에 있는 물질을 분해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철벽을 자랑하는 카치엘조차도 덮쳐오는 위기감에 쇳소리를 내며 전력으로 마력을 뿜어냈다.

본래 카치엘의 마력은 마주 닿는 마력을 먹어치워 역습을 가하는 속성이다. 아무런 제어도 되지 않는 단순한 마력 덩어리는 그의 먹이이자 무기나 다름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카치엘마저도 감히 삼켜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은 되돌려치기는 커녕, 오히려 방어를 전개한 카치엘을 밀어붙이며 맹포하게 날뛰었다.

'죽을 생각인가, 카릭스!'

헬루타는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잡았다.

자신의 생령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헬루타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를 빼앗은 것은 상찬할 일이다.

그러나 정작 카릭스에게는 이런 재앙에서 몸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이런 식의 자살공격은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괜히 입맛이 썼다. 하지만 눈을 태워버릴 듯한 광구(光球)는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가까스로 뭉쳐있던 마력들이 흩어지고, 겨우 눈을 뜬 헬루타는 쯧쯧 혀를 차며 필리아스의 마력으로 후끈거리는 열기를 강제로 식혔다.

폭심지 부근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질 정도로 굉장한 구덩이가 패여있었다.

중심부의 흙은 타다못해 아예 녹아내렸고, 곁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릴 정도로 짙은 마력의 향기가 배어 얼마나 많은 마력이 응집되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주변의 나무들은 죄다 허리가 부러져 바깥쪽으로 쓰러져있고, 그 중 절반 가량은 숯덩이가 되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다.

카치엘의 마력으로 어느 정도 피해를 억눌렀는데도 이 정도라면, 두 생령의 심장이 제대로 폭주를 일으켰을 때의 참상은 감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부러 폭주를 유도했다지만, 겨우 정령 하나와 기사 하나의 쌍소멸이 이렇게까지 엄청날 줄은 몰랐군······."

간신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헬루타는 허탈한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열기 속에서 카릭스가 무사할 리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첼레란도를 상대했을 때는, 그녀가 어떤 생령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미리 대비를 해 두었었다.

그랬기에 다 늙어 노쇠해진 몸으로도 전성기의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강했던 아첼을 상대로도 경미한 상처밖엔 입지 않았다.

그러나 카릭스의 경우는 달랐다.

마지막 순간, 그가 사용한 것은 아첼의 아스트라를 흉내낸 듯한 응용술식이었다.

힘을 한 곳에 응축해서 물리적인 타격으로 방어를 뚫은 뒤, 내부에서 폭발시키는 특유의 발현식은 익히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극히 어렵다.

게다가 그것을 뒷받쳐줄 생령의 힘에서도 헬루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으니, 카릭스가 해낸 것은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대단한 실적이었다.


유일한 탐지수단인 렌을 잃어버린 이상 헬루타는 더이상 티엘을 쫓을 수 없다.

더군다나 아무리 체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노쇠한 몸을 끌고 연속으로 격전을 치른 헬루타의 소모는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즉, 카릭스는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헬루타의 발을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헬루타는 그리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측은한 기색을 보이며 눈앞의 구덩이를 천천히 우회했다.

마지막 폭발과 함께 날려간 것인지, 카릭스는 주위를 온통 시뻘건 피로 칠해놓은 상태로 부러진 나무둥치에 기대어 있었다.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 육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필리아스에게 물렸던 팔은 산채로 얼어붙어 설령 녹인다고 해도 그대로 썩어들어갈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정도가 카릭스의 전신 중 가장 가벼운 상처였다.

산 채로 뇌격과 마력 폭풍에 휘말린 그는 전신이 반쯤 타버린 상태로 마지막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폐가 절반 이상 타버렸을텐데,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부터가 신기한 상황일 것이다.

헬루타는 씁쓸한 얼굴로 카릭스의 곁에 다가섰다. 굳이 일격을 더할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숨이 끊기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아직까지 자네에게 권호가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이 '성자의 방패'를 꺾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라 주었거늘."

"······으큭······노쇠한······, 이긴 건······. 자랑이 아니······."

그저 눈을 뜨고 있는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텐데, 카릭스는 굳이 입을 열어 헬루타의 말을 받았다.

이미 승패는 갈렸다.

이 결투의 승자는 카릭스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는, 다시 사이 좋은 사제로 돌아가도 좋지 않을까.

헬루타는 쓸쓸하게 웃으며, 그런 카릭스의 속내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네의 공녀님은 내 손을 떠났지. 자네는 분명히 날 이겼네. 스승으로서, 이처럼 기쁜 일은 없지. 축하하네."

카릭스 역시 남은 힘을 긁어모아, 힘없이 웃었다.

왜 배신한 것인지 따위는 묻지 않는다.

뜻이 다르면, 혹은 모시는 분이 다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이 '배신'을 준비하기 위해 오랜 세월 미노스티야에게 허리를 굽힌 헬루타는 충분히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카릭스는 이미 촛점이 사라진 눈으로 헬루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70여년을 살아온 노마법사는 애석하다는 듯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카릭스는 오랫동안 자신을 아껴주었던 헬루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이만······공녀······지키지 못한······벌······ 대공······전하를 뵈러······."

"그럴텐가."

헬루타는 카릭스의 손을 잡아주며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는 이도 없이 떠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이제 그만 쉬게나."

적막한 숲속을 찬 바람이 한바퀴 휘감았다.

카릭스는 몇 번 숨을 몰아쉬더니 한 차례, 거칠게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었다.

헬루타는 나직하게 탄식하며 카릭스의 아직 감지 못한 눈을 감겨주었다.

마법사들의 원칙이다. 마법사끼리의 결투에서 패배해 죽은 자에게, 살아남은 자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

애초에 카릭스는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티엘은 도망치고 카릭스는 죽어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릴 정도의 나이도 씁쓸한 마음을 감춰줄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네. 공녀님이 간 방향은······, 미라야의 사람들이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매복병들이 숨어 있었으니. 아마 빠져나가시긴 어려울테지. 그러니 자네를 대신해······, 지네의 공녀님이 무사히 빠져나가길 대신 기도해주지. 이 늙은이의, 마지막 선물이네."



* * *



정신없이 달리던 티엘은 어느새 주위에 적병들이 몰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티엘은 조심스레 방향을 꺾고 소리죽여 한참을 걸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잡히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느새 사방에서 조금씩 들려오는 풀 소리는 거의 포위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직 티엘의 위치를 확정하지는 못한 듯, 불빛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이 상황에서 인기척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러나 티엘로서는 멀리서 불빛이라도 보일라치면 기겁하여 방향을 꺾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점점 떨어져가는 체력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나무 위나 풀숲에 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저 가빠진 숨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입을 틀어막은 채,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술래잡기였다.

하지만 상황은 티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티엘이 미처 깨닫지 못한 발자취가 점점 자신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미라야의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는 '사미라의 가루'라는 것이 있다.

마력이 깃든 물체에 달라붙는 성질이 있어 마법사의 추적에 곧잘 사용되는 물건이다.

마법사의 피에는 마력이 상당히 많이 녹아있고, 따라서 사미라의 가루는 마법사의 혈흔에 쉽게 반응한다.

아직 마력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티엘이지만, 그 핏속에는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녹아들어있다.

대대로 그 혈손들에게 강력한 마법사의 재능을 건네주었던 카르티치스의 피가, 지금은 그녀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로 변해 있었다.

제대로 감싸지 않은 팔의 상처에서 소리없이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사미라의 가루는 그런 티엘의 피에 반응해 어둠속에서 음산한 빛을 뿌렸다.

티엘은 나름대로 적병을 피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한 마리의 여우처럼 그들의 몰이사냥에 휘말린 상태였다.


가엾게도 티엘이 그것을 눈치챈 것은 너무 늦은 시점에서였다.

점점 불빛과 마주치는 간격이 짧아지면서도, 특정한 방향으로는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상황.

겁에 질려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라고는 해도, 그것이 반복되는 이상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다고 누가 포기할 줄 알아······?'

이미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필사적으로 외치던 카릭스의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포기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무리 함정으로 몰린다 해도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은 있으리라 믿으며.

그러나 다음 순간, 숲이 끊기며 눈 앞으로 들이닥친 풍경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차없이 짓밟아버렸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거세게 몸을 뒤채는 검은 강물.

대륙 최대의 대하, 카제린 강.

때때로 풍랑이 인다는 말처럼, 바위에 부딪히는 물이 허연 거품을 머금은 채 맹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필이면 숲에서 툭 튀어나온 좁은 벼랑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사냥감처럼,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티엘의 전면에 있는 숲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더이상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병사들이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숨이 탁 풀려버린 티엘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껏 도망친 곳이 이런데냐? 운도 참 없구만. 뭐, 우릴 원망하진 마라. 항쟁이라는게 다 그런거 아냐? 모든 것을 얻든가, 모든 것을 잃든가."

"잃는 것 중에 뭐뭐가 들어가는데?"

"뭐, 재산이나 목숨, 아니면 순결?"

"저런 어린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드냐?"

"안할거냐? 너도 이미 눈이 벌건데. 푸하하하하!"

티엘은 자기들끼리 웃어대며 한발 한발 다가오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혁대를 푼 자, 번들거리는 더러운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자, 킬킬거리며 웃는 자······.

병사들에게는 '생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지 멀쩡하고 심장이 뛰는 상태로만 가져다주면 된다는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항쟁에 진 자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조차 남지 않는다.

가져가봐야 어차피 공개적으로 목을 치는 데나 쓰일 처형용 인형이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차오르는 모멸감과 분노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이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이 터지며 새빨간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쟁.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다.

제국의 역사에서 넘칠 정도로 찾을 수 있는 세력다툼이며, 지금 이 시대에도 봉신들의 영지에서 곧잘 일어나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참혹하다고만 여겼던 제국의 '전통'은, 생각 이상으로 두렵고, 아프며, 추악했다.

"모든 것을 얻든가······ 모든 것을 잃든가······라고······."

가만히 손을 들어 피를 훔친 티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가서던 병사들은 순간 움찔 하며 멈춰섰다.

조그만 여자애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커다란 눈에 서린 독기는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서도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곧 그들은 티엘이 빈손이고, 단검이나 비수를 숨길 만한 곳도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다시 한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티엘은 망설임없이 몸을 돌렸다.

절벽 아래로부터 불어온 날카로운 바람이 티엘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뭐해! 잡아-! 뛰어내린다-!"

티엘의 의도를 알아챈 병사들은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뛰어 내리는것은 상관없다. 욕구해소야 굳이 열세 살짜리 꼬맹이가 아니어도 가능하고, 공개처형이야 시체만 걸어두고 목을 베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시신은 확보해야한다! 적어도 그 수급은 가져가야 공적을 인정받을게 아닌가!

티엘은 체력이 떨어졌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민첩하게 절벽을 가로질렀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힘을 다해 땅을 박차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티엘의 옷깃에 닿았지만, 공교롭게도 때마침 다시 한 차례 불어닥친 날카로운 바람이 병사의 손끝에 걸린 옷깃을 난폭하게 잡아챘다.

아슬아슬하게 붙잡힐 뻔 했던 옷자락이 병사의 손끝을 빠져나갔다.

더이상 그 무엇도 티엘을 가로막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 어떤 구속도 없이, 머나먼 심연을 향해 떨어져갔다.

"이젠······."

마지막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별빛을 머금은 하늘과 심연같은 강의 모습이었다.


이 풍경, 이 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일까.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무섭다고 느끼며, 전신으로 번져가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맞겼다. 티엘의 의식이 심연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 *



태양이 막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비췄다.

어둠에 잠겨있던 홀이 점차 빛을 되찾으며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색조를 천천히 나타내기 시작했다.

거의 박살이 나다시피 한 테이블과 수천 개의 유리조각으로 변한 샹들리에를 뒤덮은 것은 이제 검붉게 말라가는 선혈이었다.

홀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한껏 피에 젖은 채 음울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항쟁 성공을 축하하네."

"감사하군요. 덕분에 쉽게 끝났으니."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나, 흑천의 날개. 나야말로 자네 덕을 봤지 않은가."

적염의 사자 에일런은 피에 젖은 옥좌에 앉아있던 르비아를 올려보았다.

대공왕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란드리아가 그옆에 고요히 서 있었다.

에일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라면 응당 감격할 수밖에 없는 신화적인 존재이지만, 용이 이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무겁게 가라앉는 마력을 견디는 것은 아무래도 제법 버거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미노스티야의 발악으로 연회장 안에 들어왔던 마법사들은 에일런을 제외하면 전멸해버린 상태다.

이왕 기습을 한다면 단번에 대공의 목을 따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을 터.

그러다보니 르비아나 그란드리아를 보는 눈이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란드리아. 수고했다."

에일런의 기색을 읽은 르비아가 그란드리아에게 말했다.

검은 용이 날개를 펼쳐 스스로를 감쌌다. 거대한 육신이 금새 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그와 함께 주위를 짓누르던 중압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한 결 호흡이 편안해진 에일런은 시룡이 안겨주던 위압감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시원의 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만나니 대단하군. 게다가 계약자까지 있으니 두려울 정도야. 정말로 멋지군."

뜻밖에도 에일런은 순수하게 찬사를 보냈다.

권호를 받은 시기는 에일런이 몇배는 빠르다. 하지만 에일런은 자신보다 어리면서도 더 높은 계위에 오른 르비아를 향해 스스럼없이 찬사를 보냈다.

열 아홉, 마법사로서는 시작도 하기 어려운 나이에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다는 것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재능이다.

때문에 많은 신언사들은 영마사는 재능만 의존한다며 경멸하거나 우습게 보지만, 에일런은 일반적인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르비아가 그란드리아와 계약하는 장면을 지켜보았기에 여느 신언사와는 달리 영마사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감탄은 거기까지.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곧 위정자로서의 재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항쟁에 성공했더라도, 그 뒷처리까지 말끔하게 끝내지 않는다면 향후 더더욱 성가신 골칫거리로 변해버린다.

에일런은 한 명의 마법사에서 다시 미라야의 지팡이로 돌아와 르비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정리는 어느 정도 되었는가?"

"미노스티야는 가신들 하나 하나가 꽤 강하긴 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죠. 대부분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다만?"

"가장 중요한 두 명. 전 공녀 이스티엘과 차석 궁정마법사였던 아첼레란도······. 이 두 사람은 아무래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사살, 구속, 어느쪽도 보고가 들어오질 않더군요."

"성자의 방패가 그 쪽으로 갔었던가······. 역시 노년에 무리였던 모양이군."

아첼레란도야 큰 문제가 아니다.

헬루타와의 격전에서 최후의 수인 파드미엘의 아스트라까지 쓰면서도 수세에 밀렸지만, 그 상태에서도 악에 받쳐 마력을 흩뿌린 끝에 미라야의 포위망을 뚫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헬루타에게 입은 상처도 만만치 않았고, 본인 역시 마력을 극심하게 소모하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적어도 아첼레란도가 마음놓고 쉴 만한 곳까지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녀 혼자로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주인을 잃고, 홀로 떨어져버린 낙오자 하나.

단신의 힘은 강할지 모르지만 감히 르비아에게 대적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이스티엘은 다르다.

마지막까지 이스티엘을 보았다는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했다. 시신을 확인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혹시나 그녀가 살아있다면 또다른 항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시원의 용을 거느린 르비아가 보기에 티엘은 조금의 위기감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카르티치스 대공가의 혈통, 그 하나를 보고 항쟁에 끼어들 세력은 골치아프다.

즉, 티엘의 존재는 미풍으로 거목을 꺾을 수도 있는 최악의 변수인 것이다.

하지만 헬루타가 추적 속성의 생령 '렌'을 잃어버려 사실상 절벽 아래를 수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작해야 '탐색'속성의 생령이 몇 있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써먹기가 힘들다. 살았건 죽었건, 티엘이 절벽 아래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탓이었다.

"일단 레가야 안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볼 방도는 있겠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테지. 국경 검문소에는?"

"항쟁 시작과 함께 경계령을 보내 놨습니다. 하지만 역시 빈틈이 많겠지요."

"계승받을 생령중에는?"

르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카르티치스 대공가에는 역대 대공들에게 대대로 계승되는 생령이 있다.

그러나 계승되는 생령들 중에서도 추적의 속성을 가진 생령은 없었다.

렌과 같은 추적 속성 자체는 드물지 않지만, 고위 생령에서 찾아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카릭스의 마지막 일격은 생각 이상으로 큰 손해인 셈이다.

"뭐, 더이상은 신경쓰지 않겠네."

"압니다. 미라야와 레가야의 연합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앞으로의 행운을 비네."

"이건 가져가셔야지요."

르비아는 손에 들고있던 것을 에일런에게 던졌다.

비수처럼 날아든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잡아낸 에일런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것을 손안에서 굴렸다.

신언사에게 알맞게 가공된 심장석, 마석이었다.

르비아가 미라야에 약조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시룡 그란드리아의 처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대정령급 생령의 심장석을 가공한 마석.

생령의 역침식을 억누르는 마력적인 조치는 오직 령마사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신언사만을 길러내는 미라야에서는 레가야의 마석이 꽤나 탐나는 물건이었다.

대정령급의 마석이라면 그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마석을 받아든 에일런은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들었다.

희미한 녹청빛을 띠는 구슬이 그의 손 안에서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석으로 마력을 증폭시킨 에일런은 바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선명한 붉은빛의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활짝 펼쳐지며 순식간에 이동진을 만들어냈다.

"즉위식때 다시 보지, 대공왕 전하."

에일런이 발을 뗀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르비아는 그의 마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끼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에일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찾지 못한 것이 아직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야룬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일런이 나간 뒤 채 30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동안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르비아의 말은 의미없이 허공에만 울리는 듯 했다.

"부르셨나요."

하지만 르비아의 의미없는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여전히 연회장 안에는 르비아 말고 어떤 형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여성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빙룡의 심장은 아직 찾지 못했나."

"흔적조차도."

"의외로군. 가장 가까운 속성을 지닌 너라면 찾을 줄 알았는데. 너와는 남매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아무리 용의 심장이라 해도, 칼라가스는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죽은 지 오래 된 용의 심장은 쉽게 찾을 수 없지요. 만일 깨어났더라도, 제 감각의 범위를 넘어가면 역시 찾는것은 불가능할테고."

"깨어났을 가능성은? 혹은 누군가가 심장석만을 탈취할 수 있나?"

"알 수 없어요. 전 대공왕이 일부러 마력을 흩어놓았던 것 같군요. 마지막까지 번거롭게만 하는군요. 하지만 칼라가스의 심장석이라면 성좌의 주인이 아니고서는 건드리지 못할테죠. 당신이 그랬듯이."

야룬다는 호흡처럼 느껴져야 할 칼라가스의 마력을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난 듯 했다.

하지만 르비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노스티야가 만일에 대비해서 왕성 전체를 마력으로 덧씌우다시피 해 두었기에, 한발 늦게 왕성에 도달한 르비아는 어찌 손 써볼 수가 없었다.

미노스티야로서는 단순히 미라야를 견제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죽은 뒤에까지 르비아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미안해. 너를 탓할 일은 아니었지. 사과를 받아주겠어?"

"그런 걱정이라면 접어두세요. 그보다 이것을. 남쪽의 절벽 근처에서 발견한 물건입니다."

르비아의 옆에서 갑자기 수증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안개를 마음대로 다루어 사람의 모습을 빚어내는 것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수증기는 잠시후 흰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묘령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찢겨진 천 쪼가리가 들려있었다.

티엘의 옷 조각이라면 야룬다가 가져올 리가 없었다. 이미 티엘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르비아는 그 천 조각을 받아들었다.

역시나 보통의 천 조각은 아니었다. 미묘하게 느껴지는 손 끝의 감촉이 다르다.

"마력이······. 조금 스며들어 있군."

"이스티엘님의 마력은 아닙니다. 아첼레란도의 마력이군요."

옷 조각에 스며든 마력에서는 죽음 속성의 느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르비아는 쓰게 웃으며 천 조각을 움켜쥐며쥐었다.

헬루타가 아첼과 교전을 벌인 곳은 티엘이 실종되었다는 그 절벽과 정 반대 방향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첼의 옷자락이 절벽에서 발견되었다면?

그는 옥좌를 내리치며 속삭였다.

"히펠라, 모든 가신들에게 알려라. 항쟁을 이것으로 종료한다. 더이상 생존자를 찾아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젠 즉위식을 준비할 때다."

허공에 암녹색의 마법진이 화려하게 나타났다.

마치 수레바퀴처럼 펼쳐지며 빙그르르 회전하던 마법진은 잠시 후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너도 좀 쉬어 둬. 아마 한동안은 부를 일이 없을테니까."

"알겠습니다."

야룬다는 나타났을 때처럼 수증기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마침내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르비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쟁의 흔적을 눈으로 되새기기라도 하듯 연회장 전체를 내려보던 그는 테이블 한 구석에 장난처럼 놓여있던 물건을 발견했다.

어젯 밤, 그 난리 속에서도 용케 깨지지도, 쏟아지지도 않은 술잔이었다.

르비아는 천천히 그 잔에 다가갔다.

키리아 열매로 빚은 맑은 푸른빛의 술에 피가 섞여 옅은 자줏빛을 만들고 있었다.

제국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키리아 주(酒)······. 사실상 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음료수.

하지만 르비아는 피에 젖은 손으로 기꺼이 잔을 집어들었다.

'이제, 너와 이렇게 잔을 들 날도 없겠지. 이스티엘.'

그는 그 잔을 빈 옥좌를 향해 들어올렸다.

이제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숙부, 미노스티야 대공을 위해 잔을 들어올린 그는 씁쓸한 자조를 담아 외쳤다.

"당신의 평안에 저주 있기를."

르비아는 피섞인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옥좌를 향해 잔을 집어던졌다.

이상하리만큼, 하늘은 맑았다. 너무나도.


작가의말

1장 초혼, 종료입니다.


음...일단 시작점이라 딱히 큰 굴곡은 없네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까지는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재미는...있으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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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장-막간幕間(1) 19.07.03 208 8 30쪽
» 1장 - 초혼招魂(5) 19.07.03 219 9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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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19.07.01 1,572 17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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