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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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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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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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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2)

DUMMY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따뜻한 인간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군다나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만한 커다란 상처를 입은 뒤에 찾아온 인연이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흑마법사는 어린 아첼에게 성심껏 마법과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아첼은 스승조차 놀랄 정도로 빠르게 모든 것을 익혀나갔다.

제자를 골라낸 스승의 눈은 정확했다.

아첼의 재능은 그야말로 악마가 내려주었다고 할 만큼 뛰어났다.

제대로 된 소환 의식도 없이 첫 시도만으로 생령과 계약했던 소녀는 겨우 몇 년 만에 정령급의 생령을 기사로까지 키워냈다.

재능만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성장할 수 있는 흑마법이지만, 유서깊은 마법사 혈통도 아닌데다가 열 다섯도 채 넘기지 못한 햇병아리에게 각인까지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을 뒤집는 수준이다.

그녀를 거두어준 스승은 그 빠른 성장에 누구보다도 기뻐하면서도,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빠른 성장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너무나 빠른 성장은 그만큼 빠른 파멸을 불러온다.

둥지를 벗어나지 못한, 날개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은 햇병아리가 발길질만으로 둥지를 무너뜨린다면, 어미새로서는 더 버티는 것도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때때로 아첼이 보여주는 기적같은 성과들을 보며, 흑마법사는 매일같이 환희와 절망을 번갈아 맛보고 있었다.




* * *



"오늘은 어디까지 나갔지?"

"에일브리드 솔의 시공간 역치 이론까지 끝냈습니다."

아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마법사는 놀란 표정을 감추려 특유의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워낙 아첼의 진도가 빠르다보니, 수업은 아예 서재에서 마음대로 자료를 보며 독학하도록 하고 간간이 점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몇 년간 연구하던 술식을 마무리 지어줄 막바지 단계에 들어가버려서 좀처럼 신경써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나흘에 한 번씩 아첼을 찾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마법사는 아첼이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조만간 '문'이 열리면 찾아가 봐야겠군. 이걸 이해했다면 다들 뒤집어질텐데."

"다 스승님 덕분이죠."

부드러운 미소가 자연스레 얼굴에 떠오른다.

처음 스승과 함께 살기 시작할 때는 대답 하나를 할 때마다 경직된 얼굴로, 그야말로 나뭇토막같은 느낌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함께 지낸지도 어느새 6년.

아첼은 스승과 대화할 때면 언제나 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유년기의 마지막 날 완전히 깨져버린 신뢰를 어렵게나마 회복한 흔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흑마법사는 아첼이 짓는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행여 악몽이 되풀이될까 걱정하듯, 힘이 들 때면 오히려 시원스레 웃어버리는것은 아첼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버릇이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내심 안쓰러워하고는 있었지만, 어찌 달래줄 방법은 없었다.

그 자신부터가 사람을 대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리라.

아첼이 제출한 보고서를 다 읽은 마법사는 피곤하다는 듯 두 눈을 쓸어내렸다.

아첼은 얼른 우려둔 홍차를 스승에게 건넸다.

마법사는 차를 마시면서도 한동안 눈을 비비고 있었다.

왼손의 검지손가락 위로 마치 반지처럼 새겨진 각인은 요 며칠간 조금 색이 옅어져 힘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연구가 어딘가 막히신거에요?"

"도저히 매듭이 풀리질 않는군. 이론은 간단한데 말이지."

아첼의 스승이 연구하는 것은 바로 다소 특별한 영장이었다.

일반적인 물건에 마력처리를 하거나, 처음부터 마력을 품은 재료로 '그릇'을 만들고 그 위로 여러가지 기능을 덧붙이면 마도기(魔道器)가 완성된다.

그 마도기 중에서도, 마력과 술식을 증폭시키는 물건들을 영장(靈杖)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영장이라고 해도 결국 도구에 불과하고, 사용자에 따라 그 위력이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는 영장 내부에 마석을 핵으로 박아넣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영장이라는 '그릇'에 생령을 담아 효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일종의 지능형 무장(Intelligent Weapon)으로, 고대 이피안 시대에 이미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기술을 되살리는 연구였다.

몇 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안정화의 열쇠가 되는 술식을 조금씩 짜올릴 수는 있었다.

문제는 빙의체가 될 영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제국쪽엔 도움이 될 자료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렵사리 부탁한 물건인데도 별 소용은 없더구나. 이래서야 어렵사리 구한 '그걸' 써볼 날은 요원하겠군."

"'그것'이라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법사는 어두운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 아첼은 조금 주저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스승님께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어요."

"아니, 아니. 이건 내 연구니까 굳이 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아, 그렇지. 아스트라에 관심있다고 했지 않았냐? 내 예전에 아스트라를 연구한 적이 있으니 그 때 자료 정도는 보여주마. 그나마도 제대로 완성된 것은 아니니 큰 기대는 말고."

뻔히 보이는 말 돌리기였지만, 아첼은 굳이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스승도 뭔가 생각이 있기에 아첼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흑마법사가 꺼내준 새커멓게 손때를 탄 닳아빠진 종이 뭉치를 얌전히 받아들었다.

종이 자체가 낡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 종이 위에 얼마나 고치고 새로 쓴 부분이 많은지 펜촉에 긁힌 자국만으로도 종이가 날강거릴 정도로 울어있었다.

어지럽게 늘어선 여러 개의 도안과 마력의 운용, 수식 계산, 취소선과 연결선 등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난해한 서류 다발이었지만, 그걸 보는 아첼의 얼굴에는 어느새 홍조가 가득했다.

스승을 따라 활을 익히면서, 동시에 아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는 혀를 쯧쯧 찼다.

애초에 저 것도 더 이상 진도가 안나가는 폐품이다.

박을 못은 있는데 망치가 없어진 판이라 손을 대 봤자 나올 건더기도 없다. 그걸 가지고 저렇게 좋아하는걸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그럼 한동안 이거, 빌려갈게요."

"좋을대로 하려무나. 아니, 그냥 가져도 돼. 그거 더 쓸 일 없으니까."

아첼은 종이 뭉치를 품에 안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훑어본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술식 체계가 머릿속에 들어서는 것을 느꼈고,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실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자리를 뜬 아첼은 재빨리 방으로 돌아와 방의 이곳 저곳으로 부산하게 돌아다녔다.

방의 곳곳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첼은 숨겨져있던 구멍들을 열고 그 안에 주먹만한 크기의 봉헌물을 집어넣었다.

봉헌물을 위한 자리는 사방의 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는 조그만 고리가 있어서 봉헌물을 매달 수 있었으며, 방바닥의 중심에도 작은 구멍이 숨겨져 있었다.

배치가 끝난 여섯 개의 봉헌물은 방 전체를 중심으로 펼쳐져 하나의 결계식을 이루었다.

정확한 배치에 의해 마력이 반응하며 봉헌물 사이로 특유의 공명음이 울렸다.

짧은 영창과 함께 방 곳곳에 설치한 봉헌물이 밝게 빛나며 공간이 일부 반전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와 완전히 다른 이계는 아닌, 이 방에 덧씌워진 이공간을 오갈 수 있는 마법이었다.

방에서 마법 수행 하기에는 썩 훌륭한 마법이다.

아첼은 이공간의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류 다발을 낱낱이 풀어 헤쳤다.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듯한 양피지 조각들은 아첼의 손으로는 모아 쥐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양이었다.

하나씩 살펴보는 대신, 아예 바닥에 연구자료를 쫙 깔아놓은 아첼은 재빨리 내용들을 훑어보며 서로 연결되는 내용들만 모아 따로 분류했다.

스승이 워낙 중구난방으로 끄적여둔 자료라 그대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아스트라와 같은 영격술은 마법으로 구현할 수 없다.

수천 수만 번 단련을 통해 몸으로 익히는 손끝의 감각이 일으키는 마력의 움직임. 그 미세한 감각을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때문에 젊은 시절의 스승이 시도한 것은 단순한 우회책이었다.

아스트라의 본질, 즉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을 구현하는 것으로 목표를 한정하고 여러개의 술식을 조합해 실현한다.

과정을 배제하고 결과만 보는 어처구니없는 시도였지만, 어느 정도는 분명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마력의 소모도, 구성 시간도 지나치게 낭비돼. 차라리 이 부분은······.'

아첼의 머리가 기민하게 회전하며 수십 가지의 가설을 점검했다.

문헌에서 보았던 아스트라의 특징들을 되짚어가며 스승이 쌓아올린 이론을 처음부터 다시 짜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았다면 단 한 마디를 내뱉었으리라.

이는 인간이 아니라고.

마력의 응축, 발산, 변환, 가속.

중심축으로 잡혀있던 주문들을 모두 파기한다.

환각, 왜곡, 변이, 폭발, 전혀 연관이 없는 술식들이 맞물려 새로운 의미를 자아낸다.

의미없는 수많은 술식들의 목적은, 어처구니없게도 '구현할 수 없는 경험의 구현'이었다.

쓸 데 없이 남겨지는 잔여술식이 다른 것과 뒤섞여 또 하나의 식으로 변이하고, 거기서 생겨난 오차는 또다른 오차와 엮여 하나의 답을 이룬다.

수백 가지가 넘는 무수한 주문들의 조합, 그 가운데 단 한 번의 헛걸음조차 생겨나지 않는다.

겨우 한나절 뒤, 아첼은 들뜬 눈으로 완성한 술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거 정식 계약조차 없이 생령의 힘을 이끌어냈던 과정을 넘어서는 결과의 창출.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던 아첼의 이상성이 그 순간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훗날 아첼은 그 당시의 자신을 꿰뚫어보며 우울하게 웃었다.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 * *



아첼이 자료를 빌려가고부터 일 주일이 흐른 뒤. 마법사는 머리를 쥐어뜯던 손으로 책상을 힘껏 내려쳤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대정령의 마석을 완벽하게 제어해내는 영장의 구현이다.

그러나 주문식을 아무리 다듬고, 아무리 뛰어난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기사급 마석부터는 그릇이 버텨내질 못했다.

단순히 마석을 결합하는 것 뿐이라면 이미 상용화되어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석을 핵으로 삼아 의지를 갖고, 외부의 마력이 없이도 자체적으로 기능하는 특수영장이다.

아예 영장에 맞춰 마석을 가공하기 위해 무리해서 심장석을 구해오기도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과는 언제나 하나다.

영장을 이루는 재료의 마력과, 마석 자체에 깃들어있는 마력이 반발하며 그대로 폭주해 일종의 마력 폭탄으로 변해버린다.

순수하게 마력만으로 짜올려 만들어지는 생령의 육신을 대체하기에는, 아직까지 마력화한 재료는 너무나 약했다.

'성공만 한다면 제어력이 떨어지는 이들도 보다 강한 마력을 다룰 수 있을터인데.'

위력만 나온다면 굳이 구하기도 어려운 대정령의 심장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때문에 이번에는 둘 이상의 마석을 연결해 출력을 높이려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상위 생령의 마석과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아도 바뀌지 않는 결과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부서진 마석의 파편을 만지작거리던 마법사는 손가락에 마력폭발으로 인한 화상이 몇 군데 생긴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거 참 맘대로 안되는구만. 생령이든 인간이든, 가슴 속은 다들 제멋대로라니까. 후우, 아첼 녀석도 점점 커가면서 대하기 어려워지고······. 이거 팔자에도 없는 애비 노릇이로군.'

마법사는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아첼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일, 만일 조금이라도 아첼의 재능이 지금보다 떨어졌더라면 아마도 서슴없이 맡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첼의 재능은 지나치게 뛰어났다. 영장을 만드는 영장사(靈杖士)로서도, 그리고 생령을 다루는 흑마법사로서도.

전자의 재능이라면 좋다.

얼마든지 개화해도 좋고, 그 재능이 만개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후자는 안됀다.

스승으로서는 최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말이지만, 흑마법사의 재능은 없을 수록 좋은 것이다.

뛰어난 흑마법사일 수록 생령과 가까이 서게 되고, 더 강한 생령과 계약할 수 있으며, 뜻하지 않은 상황에 휘말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흑마법사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을 파멸시키거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파멸시키거나.

어느 쪽이든, 인간으로서의 행복은 산산조각나 부서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보여줄 수는 없는거지.'

마법사는 자신이 몇 겹으로 엄중히 봉인해둔 '그 물건'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위험한 물건.

혹여 마석을 이용한 영장 개발에 성공한다면 그에 맞춰 가공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입수한 대정령급 생령의 심장석이었다.

혹여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찍부터 마력을 삼켜 부활할 것을 염려해 마력을 고갈시키는 특수결계를 내부에 설치해두기까지 했지만, 하필이면 공간계 마력을 타고난 생령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첼 정도의 재능있는 마법사를 감지한다면, 아마 심장석만으로도 공간도약을 시도할지 모른다.

"그러고보니 아첼, 이 녀석. 근 일 주일 째 보이질 않는데······?"

자신이 설치해 둔 이공간 주문이라 한계는 제대로 알고 있다.

이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방을 더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개념이다.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역으로 안에 있는 사람을 따로 보호하는 기능은 없다.

혹여 무슨 일이 있어 갇혀버렸다면 그 안에서 굶어죽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순간 마법사의 눈앞을 스친 것은 자신이 건네주었던 아스트라 술식의 초안, 그리고 술식의 폭주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아첼의 모습이었다.

'이런 바보같으니, 스승이라는 놈이 제자에게 이렇게나 관심이 없을수가 있나!'

황급히 아첼의 방으로 달려간 마법사는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조금 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 아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은 커녕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마법사는 조금 주저하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사는 방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삭막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숨막힐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방은 약간의 먼지만 제외하면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객실이라 할 정도로 사람 냄새가 부족했다.

책상과 의자 위에 쌓인 먼지, 환기를 하지 않은 묵은 공기의 냄새. 적어도 며칠 이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는 증거 뿐이다.

눈살을 찌푸린 마법사는 벽과 천장, 바닥에 설치한 결계석을 확인했다.

결계석, 봉헌물에 주입한 마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멍청한 제자 놈이······. 오팔리온!"

마법사는 단숨에 품에서 단검을 꺼내 허공에 그었다.

오팔리온의 속성은 해주(解呪), 지금 발동중인 주문을 일부 비틀어내는 드문 속성이었

다.

시뻘건 마력의 궤적을 따라 덧씌워진 이공간의 단면이 한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열어라 대양의 문, 숨긴 자가 숨겨진 것을 부르노라!"

마법사는 마력을 담은 칼 끝으로 격리된 공간의 문을 억지로 비틀었다. 기존의 주문에 끼어들은 새로운 주문이 반발하며 가늘게 문이 열렸다.

찔러넣은 칼을 비틀며 간신히 열린 틈을 벌린 마법사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첼레란도!"

마법사는 다급히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밀어넣었다.

어렵사리 벌려놓은 입구는 저항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아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찢어진 공간이 회복되며 이계화된 세계는 원래의 방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다행히 아첼은 무사했다.

어딘지 겁먹은 듯한 눈으로 난입한 스승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딱히 다친 곳은 없었다.

눈가가 꺼멓게 죽어있는데다가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한걸 보면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뭔가에 몰두해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얗게 타들어간 입술을 보면 식음마저 전폐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스승의 모습에 조금 놀란 아첼은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 스승님?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묻고 싶다. 대체 며칠씩이나 이공간에서 뭘 했던거냐?"

쯧쯧 혀를 차던 마법사는 무심코 주위를 흘끗거렸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리쳐던 흔적중 일부가 순간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희미하게 남은 수백 개의 이사드. 그리고 공간에 남아있는 마력의 잔재.

'그럴리가?'

그의 눈이 미친듯이 움직이며 이공간에 남겨진 마력의 흐름을 읽고 이사드를 쫓았다.

경악하는 스승의 모습을 눈치챈 아첼은 아첼은 초췌한 얼굴을 떨구며 스승의 얼굴을 살폈다.

"스승님······."

저 수많은 이사드들은 무엇을 위해 새긴 것인가.

단절, 해주, 파기, 무언가를 끊어내기 위한 수많은 술식의 잔해가 그 곳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조차도 미처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마법사는 천천히 단검을 끌어당겼다.

"우르티아."

칼날의 궤적을 따라 하얀 벼락이 튀었다.

평소에는 강력한 벼락을 다루는 공격적인 성격이지만, 동시에 '탐색'의 속성 또한 가지고 있는 이중속성의 생령, 우르티아.

그 마력은 이공간을 무너뜨릴 기세로 뻗어나가는 벼락이 되어 남아있던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를 후려갈겼다.

벼락불로 이루어진 거목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그러나 그 거목은 바람에 휘말리는 불꽃처럼 크게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꺾이며 불규칙한 흉터를 남겼다.

공간의 비틀림으로 인한 왜곡현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이미 필요한 것을 모두 얻어낸 상태였다.

그의 목적은 저 마력을 분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력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었으니.

"칠선 후반······, 속성은 '시공의 여행자'······."

늦었다.

그가 그토록 숨겨두려고 했던 대정령의 심장은, 이미 그의 수중을 떠나 육신을 완성인 이후였다.

마법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시나무처럼 떨고있는 아첼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떨고있느냐."

"스, 스승님! 저, 저는, 저는······."

"저 대정령과 계약한 것이냐?

아첼은 감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생령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이프라이엘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물 흐르듯이 손쉽게 이어져버린 계약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을 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짚단 위에서 불에 매혹되어 그를 휘두르는 아이는, 이내 그 불이 짚단을, 그리고 자신을 태워버릴 것을 알지 못한다.

마법사는 아첼에게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내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다.'

지금 아첼레란도가 지배하는 생령은 셋.

이프라이엘은 '환영의 불꽃'과 '맹독'의 속성을 가진 기사급의 생령이며, 파드미엘과 켈리아는 각각 '죽음'과 '수호'의 속성을 정령이었다.

사실 기사 급의 영을 거느리는 것도 일반적으로 서른 중반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느 정도 유서깊은 마법사 가문 출신이 거들먹거릴 수 있는 것도, 다른 이들보다 친화력이 조금 더 강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겨우 열네 살에 기사급을 포함해 세 체의 영을 거느린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이제는 대정령까지 거느린다?

과연 그 부담이 어느 정도나 무거워질지, 그는 감히 상상할 수조자 없었다.

안타까웠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두고 성장해나갔다면 좋았을 것을, 한 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해버린 아첼은 스스로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아첼레란도. 네가 켈리아와 계약한 이후, 나는 더이상 생령과 계약하지 말라고 말했다. 기억하느냐."

"하, 하지만-!"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너로서는 지금의 계약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그리 말했었다. 내 너를 믿었다. 그 믿음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

저 수많은 이사드와 마법진은 계약을 끊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재적인 아첼이라고 해도 절대적인 원칙을 뒤바꿀 수는 없다.

인간과 생령은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다.

아첼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스승에게 매달렸지만, 마법사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 재능을 보고 너를 거두었고, 네 그릇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면 너를 버리겠다고 했다. 기억 하느냐?"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스승님! 요, 용서해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스승으로서 제자의 성장을 축하해줘야 하겠으나, 흑마법사로서 이토록 급격한 성장은 곧 파멸과 같은 말이지. 그래, 네 그릇은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도 다르구나. 너무나 뛰어나고, 너무나 안타까워. 하지만, 더이상 나로서는 널 지켜줄 수 없다."

아첼의 재능은 처음 그가 생각한 것으로는 십분의 일도 재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고작 여섯 해도 채우지 못한 짧은 시간동안 쌓아올린 것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여기서 끝이다.

더이상 가르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불씨.

아첼의 얼굴이 슬픔으로 비통하게 일그러져가는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지만, 더이상 끌어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파문이다."

"거짓······, 말. 거짓말이시죠? 스승님!"

"이미 각인이 새겨진 실력자이니, 조만간 '문'이 열리면 정식으로 권호와 허가를 받아라. 혼자서라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문에서 내 이름을 대던, 감추던, 그것은 네 자유다. 하지만 나는 너를 제자로 인정하지 않을것이며, 네가 찾아오더라도 다시 너를 보지 않을 것이다."

"스승님!"

"두 말 하지 않겠다. 배웅은 하지 않으마. 원하는 자료가 있다면 가지고 가도 좋다."

마법사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이계를 빠져나가기 위한 출구용 결계석으로 다가갔다.

아첼은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절 버리지 마세요! 으흐흑,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뿌리쳐야 한다. 이 아이는 위험하다. 순식간에 그 엄청난 재능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그 여파로 주위의 모든 것을 함께 태워버릴 아이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정말, 그게 다인가?'

마법사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매정하게 돌아섰던 그는 옷자락에 매달린 아첼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마음에는 아직 한 점 동정심이 남아있었다.

모든 것에 버려졌던 아이가 아니던가.

신의 장난, 혹은 악마의 저주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재능은, 분명 이 아이가 바라기에 얻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6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보아온 아첼은 지식보다, 강대한 힘보다, 소박한 칭찬 한 마디에 더 기뻐하는 순진한 아이였다.

"아첼."

"흐흐흑, 제발! 이렇게 빌테니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아첼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매달렸다.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다시 저 차가운 세상에 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이해받고, 이해하며 살고싶다.

남의 시선을 겁내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네게 느끼는 위기감이,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히 아직까진, 그런 질투가 추하고 더럽다는걸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한 해, 아니 반 년, 아니, 어쩌면 내일 무너질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아첼. 너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버렸다. 눈부실 정도로 엄청난 성장이지. 하지만 그게 가끔은 독이 돼.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때로는 너 자신에게도"

재능만을 보고 기르겠다던, 아첼의 그릇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다면 언제까지나 지켜주겠다던 약속.

"그래, 아첼레란도, 너는 이미 나를 예전에 뛰어넘었다. 이 내가 수십 년을 바쳐 쌓아온 것을 한 순간에 따라잡는 너의 그 재능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렵고, 부러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너는 너무나 쉽게 이뤄냈으니까. 그러니 떠나라. 아직 내가 너를 자랑스러운 제자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내가 너를 두려운 재앙으로 여기기 전에. 기사급의 생령을 넘어 대정령과 계약해버린 너라면, 나로서는 아무런 바람막이도 되어줄 수 없으니."

"하지만 제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아첼을 보았다.

그동안 자식처럼 길러온 제자였다. 정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제 그가 책임져줄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치밀어올랐던 분노와 열등감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애틋한 연민이 조금씩 그 빈자리를 채웠다.

콧등이 시큰해져오는 것을 애써 밀어내며 다시는 불러볼 수 없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충고를 해주기 위해서, 마법사는 아첼의 가슴을 울리는 미소를 지어냈다.

"레가야로 가거라. 대륙에는 더 넓은 세계가 있어. 그 곳에서 너를 위한 답을 찾아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미안하다."




* * *




며칠 뒤, 라티앙의 시장에 허름한 로브를 둘러쓴 아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날따라 사람이 워낙 많아 이리저리 인파에 휩쓸리던 아첼은 한참 후에야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겨우 몇 분 휘말린 정도였지만 그새 숨이 턱에 닿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벽에 기대 숨을 고르자니 눈앞이 핑핑 돌았다.

허름한 로브 안쪽에는 스승이 마지막 인사로 챙겨준 돈이니 보석 등 귀중품이 제법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친 상황에선, 오히려 무겁기만 한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첼은 옷 안쪽으로 느껴지는 금붙이를 살짝 쥐어보았다.

대충 뱃삯이 얼마인 지는 알아보았으니 돈으로 바꾸든, 써버리든 어떻게든 이 무거운 물건들을 처리해야 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호흡이 회복된 아첼은 그제서야 자신이 기대섰던 가게를 들여다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궁시점.'

그러고보니 마법사라면 당연히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할 영장이 없었다.

스승 아래에서 사용하던 영장은 '문'에서 술식 시연을 하는 도중 파손되어버렸고, 당장 영장화할 수 있는 물건도 원한다고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장 없이 주문을 쓰기엔, 인간의 육신이 가진 한계가 있다.

술식의 반동을 받아내고 위력을 증폭시킬 매개물인 영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마침 아스트라는 화살을 기반으로 한 술식이다.

스승에게서 활 다루는 법도 함께 익혔고, 이제까지 몇 번쯤 영장을 바꿔오면서도 활 종류가 손에 가장 잘 맞았다.

무엇보다도 아스트라 술식을 완성해 체득한 이상 활을 쓰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잠시간의 고민을 마친 아첼은 당당하게 궁시점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 혼자인가?"

어두운 가게 안, 가게를 보고있던 오십대 후반쯤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희끗한 새치가 많이 섞인 머리와 눈가의 주름이 상당한 연륜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꿈틀거리는 근육질의 억센 팔에서는 반대로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첼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눈매였다.

부드럽고 서글서글 하면서도 어림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는 무언가가 잠든, 마주보기 어려운 기묘한 시선에 저도모르게 떨어지려는 고개를 억지로 잡아세웠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아첼의 모습을 본 가게 주인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활 하나만 보여 주세요."

"심부름 시킨 사람 체구를 알아야 맞는 활을 추천해줄텐데. 활은 몸에 맞추는게 좋아."

"······제가 쓸 건데요."

"활 쓸 줄은 알고있나?"

아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의 황당하다는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주인은 벽에 걸어둔 활중 하나를 꺼냈다. 가게 안의 활중 그나마 약한 활이었다.

그는 활을 꺾어 어렵지 않게 시위를 걸어보이고는 도로 풀어 아첼에게 건넸다. 주인의 손에서는 가늘어보였지만, 실제로 쥐어보니 아첼의 손목 절반 정도는 되는 꽤 굵직한 활이었다.

"주목나무로 만든 활이다. 이걸 한번 걸어보거라."

아첼은 군소리 없이 활을 잡고 힘을 주어 구부렸지만 그 가늘디 가는 손목으로 활을 꺾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가게 주인도 일부러 그걸 노린 것으로,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대신 직접 깨달으라는 의미에서 활을 준 듯 했다.

"말도 안됀다는건 알겠지. 그만 가보거라. 아직 네게는 일러보이는구나."

"잠시만요. 아직 할 수 있어요."

상대의 의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잠시 아첼은 곧바로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옅은 검은 빛의 안개가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르며 두 팔을 가볍게 감쌌다.

애초에 처음부터 단련되지도 않은 팔로 활을 다룰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서서히 강화 주문에 기대는 정도를 줄여갈 생각이었으니,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만큼은 전력으로 강화를 걸어도 좋으리라.

평소의 몇 배 이상으로 강화된 팔이 조금씩 활을 구부렸다.

굵은 나무로 된 몸체가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라워하는 주인을 흘끗 쳐다본 아첼은 활을 부러뜨릴 기세로 강하게 꺾었다.

사실 아첼이 요령이 없어서 그랬을 뿐, 원래는 지금의 절반 정도의 힘으로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활이었다.

몇 번 헛손질을 한 끝에 금새 힘을 어떻게 써야될지 요령을 잡은 아첼은 뻣뻣하게 반항하는 활을 가볍게 제압해 시위를 걸었다.

"마음에 들어요. 이걸로 할게요.."

"······과연. 제 몫은 할 수 있다는 거로구나."

놀라는 것도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제 열렸던 '문'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한 사람의 마법사로 인정받았다.

매혹의 밤안개, 아첼레란도.

최연소로 권호를 받은 마법사이자, 고유 술식으로 아스트라를 구현해낸 자.

스승의 이름조차 대지 않은 채, 다른 누군가의 지원조차 받지 않는 상태로 자신의 계보를 직접 만들게 된 아첼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러나 주인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아첼의 손에서 활을 받아들었다.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이 활은 영장으로는 부적합해.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지속적으로 마력을 버텨내지는 못하지. 그런데도 괜찮겠나?"

"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력은 생각보다 불안정한 힘이다. 약한 소재에 마력을 담으면 그 소재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다.

그나마 일반적인 소재중 마력을 잘 머금는 것은 목재와 몇 가지 광물류, 그리고 마물의 신체 일부 정도다. 그 외에는 생령에게서 얻는 고급 마법재료들이라 결론적으로 영장의 단가는 매우 높은 편이다. 일반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미처 모르고 있던 아첼은 아쉽다는 듯 손에 들고있던 목궁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기왕 고급 술식을 알아냈는데 정작 쓸 수는 없는걸까.

하지만 문득 묵직한 주머니가 떠오른 아첼은 작은 희망을 걸고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 걸로 어느 정도까지 살 수 있어요?"

아첼은 뱃삯을 낼 정도만 남긴 채 가진 금붙이를 죄다 쏟아냈다.

스승이 챙겨준 것이 워낙 많아서 금화와 마석을 합쳐 일만 칼브람 상당의 귀중품이 눈을 어지럽혔다.

마석들도 마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색이나 투명도 등이 빼어나 보석으로의 가치도 상당한 고급품들이었다.

"이 정도면 적게 잡아도 팔구천 칼브람은 넘지. 가출이라도 한 건가?"

"그런건 아니에요. 아무튼, 마법사용 활 있어요, 없어요?"

가게 주인은 당돌한 아첼의 말에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턱을 긁적이던 주인은 잠시 후 낡아빠진 상자 하나를 꺼내 아첼에게 보여주었다.

오래되어 낡았다기보다는 자주 손을 타다보니 손때를 탄 것 같은 허름한 상자였다.

"아직 완성한 건 아니지만, 최고급 재료로 만든 작품은 있지."

주인은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재료를 알 수 없는 검은 활 하나가 얌전히 들어 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활이 뿌리는 무겁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아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새카만 몸체에 역시 검게 물들인 금속질의 장식이 비늘처럼 겹쳐져 달라붙은 특이한 형태였다.

빛을 삼키듯 윤기조차 흐르지 않는 새카만 몸체는, 그 색만 제외한다면 나무나 금속이 아닌 뼈를 가공한 것처럼 보였다.

"용의 뿔과 뼈, 그리고 우룬의 사슬로 만든 활이지. 아직 세공을 마치지 않았지만, 스스로 세공할 수 있다면 너 자신에게 최적의 영장으로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될거다. 어때, 이 정도면 마음에 드나?"

"한 번, 쥐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조금 떨리는 손길이 활을 들어올렸다.

알 수 없는 온기가 손바닥을 휘감았다.

손 안으로 달라붙는 듯 편안하게 쥐어지는 활에 시위를 걸고 마력을 불어넣자 은은한 공명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활도 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구나."

더 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첼은 카운터에 있던 돈을 전부 쓸어담아 주인에게 건넸다.

"다른 건 더 필요 없나?"

"화살이라면 필요 없어요.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가."

아첼은 주인이 건네주는 활을 가방에 쑤셔넣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주인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 우룬의 사슬로 만든 화살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화살은 필요 없다니까요."

"우리 가게에서 첫 활을 산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뿌연 화살 촉 안쪽에 씌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 화살 끝에 실린 무게를 잊지 말라.'

"활은 무기지. 무기를 든 사람은, 그 손에 쥔 것의 무게를 절대 잊으면 안된다."

주인의 말에 흠칫 놀란 아첼은 주인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주인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아첼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에게 인사한 뒤 가게를 나왔다.

하지만 궁시점을 나온 아첼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배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적지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할 일도, 남은 일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졌다.

자주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곳을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만날 사람도, 가볼 장소도 없다니.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던 걸까.

이유모를 후회가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이제 여길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까?'

허탈감에 빠진 아첼은 자신의 뒤를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채 깨닫지도 못했다.

그저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던 아첼은 한참 후에야 자신 외에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미행? 아, 이런. 설마 활 때문인가?'

걸음을 조금 빠르게 하며 몇 굽이를 돌았지만 발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늘고 있었다.

아마도 뒤를 밟는 자들이 눈독들이는 것은 새로 산 활일 것이다.

제법 크기가 큰 활은 아첼의 가방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재질을 한눈에 알 수는 없겠지만,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으니 욕심이 날 만도 했다.

흘끗 뒤돌아보니 패거리가 이미 모였는지 대여섯 명이 골목 한쪽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이프라이엘.'

환각을 뿌려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생각한 아첼은 조용히 이프라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때 건달패도 몰이를 끝낼 생각이었던 모양인지 골목 반대쪽에서 다시 예닐곱 명의 건달이 나타나 길을 막아버렸다.

미처 마법을 완성시킬 시간도 없었다.

그리 넓은 골목이 아니라 두세 명 정도만 어깨를 붙여도 길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앞뒤로 두 겹이나 쌓인 포위망을 뚫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첼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벽으로 뒷걸음질쳤다.

"이봐. 등에 짊어진 거, 좀 봐도 될까?"

우위를 점했다 생각한 한 사람이 아첼의 등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걸어왔다.

아첼은 조심스럽게 팔을 뒤로 뻗어 활을 쥐었다.

어차피 놈들은 아첼의 활은 뺏어서 쓰려는 것 보다는, 팔아서 유흥비를 마련할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아첼의 활은 세우면 거의 그녀의 키에 이를 정도의 대궁이다.

저 얼간이들이라면 시위를 건 활만 봐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할테고, 아예 활시위를 당기면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다.

"잠깐만, 그걸로 돼? 저정도면 반반한 편이잖아?"

"에이, 저렇게 어린걸로 뭘 하자고? 일단 돈만 좀 뜯어내자."

지저분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무시하며 가뿐하게 양 팔을 강화했다.

사실 이 상태로 주먹만 휘둘러도 한 두 명쯤 쓰러뜨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체격차가 워낙 큰데다, 제대로 체술을 익힌 것도 아닌 아첼로서는 그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 명을 상대해야 한다.

어쩌다 잡히면 그 순간 분노한 건달들의 주먹앞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스트라든 뭐든, 마법으로 기선을 제압하는게 몇 배는 나으리라.

"야, 안들려? 활 내려 놓으라고."

건달이 짜증을 부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완력으로라도 활을 빼앗으려는 듯 한 손은 주먹을 당겨쥐고 다른 손은 활을 향해 쭉 펼친 자세였다.

하지만 아첼은 몸을 숙여 건달의 팔 아래로 빠져나간 뒤 바닥을 박차며 활을 뽑아 들었다.

나름대로 첫 출발을 준비하며 산 활을 이딴 곳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쪽에 몸을 굽히기도 싫었다.

"타앗!"

시위를 걸기까지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활은 믿을 수 없을만큼 팽팽하게 당겨져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력이 워낙 강한 활이라 그냥 휘둘러도 종잇장 정도는 베어버릴 만큼 시위가 단단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세잖아?'

시위를 걸자마자 아스트라를 준비하려 했던 아첼은 활의 장력이 자신의 예상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근력강화로 활을 당기는 것조차 힘들다. 아스트라를 만들만한 마력은 미처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때 궁시점의 주인이 준 화살이 떠올랐다. 아첼은 곧바로 화살을 꺼내 절피에 먹였다.

"저, 저저, 저거 조심해!"

"썅! 무슨 계집애가 저런 활을 당겨?"

아첼은 조금 전 서있던 벽의 반대편에 붙은 채 활을 이리저리로 겨누며 위협을 가했다.

건달들은 갈팡질팡하며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열 몇 살짜리 꼬맹이가 쉽게 활을 걸어 당기는걸 보면 그리 강한 활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식용 활이라, 재료는 고급으로 사용했지만 위력은 형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하나, 저 꼬마가 이상할 정도로 힘이 세서 제대로 된 활을 다룰 줄 아는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니, 그 전에 꼬마 수준에서 걸 수 있는 활이라고 해도, 근거리에서 쏘는 화살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는 충분한 위력을 가진다.

뜯어먹기 쉽게 생겼다고 해서 몰려왔는데 어디 한 군데 구멍이라도 뚫린다면 오히려 큰 손해가 아닌가.

그 때 건달패의 두목인 듯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을 탁 뱉더니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아첼은 즉시 활을 그 남자에게 겨눴다.

하지만 건달 두목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가오지 마!"

"지랄하네. 사람은 커녕 짐승도 쏴본 적 없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아첼은 이를 악물며 활을 조금 더 당겼다. 활이 부들부들 떨리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기세가 되었다.

"오, 오지 마! 마지막 경고야!"

하지만 그것은 아첼의 실수였다.

이를 드러내고 요란하게 짖는 개는 오히려 사람을 물지 않는다.

지나치게 가시를 세우는 모습에 오히려 긴장하고 있던 건달들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그러면 그렇지, 네까짓게.

비웃음으로 물든 시선이 아첼을 향해 모여들었다.

굶주린 들개들 앞에 던져진 심정이, 이런 것일까.

"오지 말라니까!"

두목이 한 걸음 더 다가오자 저도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쳐버렸다.

"나라면 진작 쐈다, 멍청아. 덮쳐!"

건달들은 아첼이 활을 쏠 용기가 없다고 믿어버렸다.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감이 힘없이 끊어져버리며 예닐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아첼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소녀는 감히 활을 자신들에게 겨누지 못했다.

건달들은 혹시나 여자애가 도망갈까 봐 어깨를 단단히 붙이며 천천히 포위망을 좁혔다.

자신들을 가지고 논 괴씸죄로 확실하게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어디 한 두 군데쯤 부러져 보면 남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도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어뜯는다는 사실을.

"크아아아악!"

별안간 건달 두목이 한 눈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시뻘건 피가 흐르며 바닥을 물들여갔다.

건달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소녀의 손에서 화살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소녀가 들고있던 그 희뿌연 화살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후였다.

"너, 너 이새끼, 진짜로 쐈냐!"

"저 년이 감히!"

건달들이 우르르 두목에게 몰려가며 포위망이 풀렸다.

하지만 충격으로 다리가 풀려버린 아첼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놓쳐버린 화살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내, 내가······, 사람을 쏴버렸어?"

처음부터 사람을 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조준을 어긋나게 했었다.

실수로 화살을 놓치던 순간도 최대한 방향을 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의 손을 떠난 화살은 한 사람의 눈을 찢어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아, 저 년 잡아! 똑같이 눈을 찢어줄테니 잡아오란 말이야! 크아아악!"

두목은 광분하며 화살을 뽑아낸 뒤 사정없이 부러뜨려버렸다.

자기 말마따나 아첼의 눈을 후벼파낼 생각인지 피로 흠뻑 젖은 채 부러진 화살을 꼭 쥐고 하나 남은 눈을 악귀처럼 부라렸다.

오히려 주위에 있던 건달들이 그런 두목의 귀기어린 모습에 기가 질려 구역질을 느낄 정도였다.

겁에 질린 건달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아첼에게 다가가 팔다리를 붙들었다.

저항도 하지 않는 어린 아이에게 해코지를 한다는 것을 영 꺼름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두엇 나타났지만 두목의 태도는 너무나 완강했다.

"네년이 내 눈을 먹어치웠으니 나도 하나 받아가야겠지?"

아첼은 촛점없는 눈으로 붉게 물든 화살과 피투성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왜 시작한 쪽은 저쪽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지은 것은 내가 된 걸까.

이유모를 눈물까지 흘러내리며 머릿속이 비어갔다.

"뭘 우는거야!"

짝! 목뼈가 삐걱일 정도의 충격이 닥쳐오며 아첼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목은 아첼의 눈에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 화살을 가져갔다.

손가락 한 번만 놀리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을 거리에서 다시 가슴을 파헤치는 단어가 귓가에 울린다.

"처음부터 잠자코 내놨으면 좋을 것을······. 악마같은 년, 다 네 죗값이다."

악마.

왜?

신부님의 얼굴이 떠올라. 우룬의 씨?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는 버려졌어. 부모님에게, 신부님에게.

나는 혼자야. 스승님도 내 곁에 남아주지 못했어.

악마라서?

나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거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저도 모르게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저항이나 분노의 표시와는 다른, 절규에 가까운 새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히려 건달 두목이 흠칫 놀라 화살을 치울 정도였다.

단번에 이마가 깨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만해애애애애!"

촤아아악!

갑자기 골목에 피비린내가 더해졌다.

정갈하던 회색의 벽돌에 거품섞인 피가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건달들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어,어어억······."

패거리중 한 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뜯어낸 것 같은 참혹한 상처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목에서부터 명치까지 살점째로 뜯겨 새하얀 늑골을 드러내는 그 상처는 두말할 것 없는 치명상이었다.

남자는 잠시 비틀거리다 허물어지듯 쓰러져버렸다.

"으아아악!"

"뭐야! 갑자기 뭐야!"

습격한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잡고있던 아첼마저 내팽개친 건달들은 주머니 안에서 단검을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 힘 없는 날붙이를 휘둘러도 진상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본능적으로 둥그렇게 모여 선 그들은 귀신처럼 다가온 무언가가 등을 쑤시진 않을까 두려워하며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사람살려! 아아아악!"

또다시 한 사람의 희생자가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없는데도 인간의 팔이 툭 떨어져나갔다.

희생자의 첫 비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팔이 잘려나가고, 이어 목이 비틀려 꺾여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져나온 피가 건달들의 얼굴을 적셨다.

살아남은 이들의 입에서도 죽어간 이들과 똑같은 처절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하란말야! 왜 나야! 왜 나한테만 그러는거야! 왜 이유없이 나를 괴롭히는거야! 왜애애!"

아첼의 비명같은 외침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울부짖다가 금새 속삭이기도 하고, 이내 미친듯한 괴성을 지르는 등, 완전히 미쳐버린 것만 같았다.

두목은 이 모든 일이 아첼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도노릇 하며 살아온게 일이 년 일이 아니다. 그동안 별의별 사람들을 털어봤지만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현상도 저 악마년의 수작임이 분명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죽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패거리들이 오히려 전부 살해당한다!

"이 빌어먹을 년, 죽어라아아!"

두목은 뽑아든 단검을 들고 미친듯이 울부짖는 아첼에게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있던 단검의 칼날은 아첼의 목에 닿기도 전에 맥없이 떨어져나갔다.

단면이 믿을 수 없을만큼 매끄러워서, 마치 처음부터 잘려진 상태로 만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건 말도 안-"

쩌억.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두목의 몸은 두 조각으로 갈라진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의 피는 단 한방울도 아첼에게 닿지 못했다.

허공에 투명한 방패라도 있는 것처럼, 촤악 뿌려진 핏방울이 뭔가에 가로막혀 후두둑 떨어져내렸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이 장소가 상식과는 동떨어진 곳임을 깨달은 건달들은 대경실색하여 골목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골목으로 나서려는 순간 뭔가에 의해 발목이 잘려나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옥의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 사이로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비명과 피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눈뜨고 볼 수 없을 무참한 살육이, 좁은 골목에 내려앉았다.




* * *




"일어나라."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인지 알 수 없을 무렵, 아첼은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실수로 쏜 화살이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그 사람을 찾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아첼의 뺨을 잡았다.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된 아첼은 시선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상대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얀 로브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던데다가, 로브에 달린 후드까지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드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잘 깎아낸 조각처럼 날카로운 선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인간다운 생기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한쪽만 늘어뜨려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아첼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다, 당신은 누구에요!"

"대정령 실리안, 계약자의 부름에 응해 왔지."

아첼은 흠칫 놀라며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대정령.

완전한 육신을 갖춘, 지극히 드문 생령들의 왕.

일반적인 생령이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확률은 너무나 희박하기에, 대정령의 수는 거의 늘지 않는다.

자연히 대정령이란 쉽게 만날 수도 없는 존재였고, 특히 주인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대정령은 농담으로 웃어넘길 정도로 보기 어렵다.

그러다 문득, '계약자'라는 이름이 뇌리에 박혔다.

설마 그 때, 이공간 안에서 계약이 맺어졌던 생령이, 이 자인 것일까.

"나, 날 도와준건가요?"

"일단은 그렇다. 그대가 나를 불렀고, 나는 부름에 응했지."

"제가, 제가 당신을 불렀다고요?"

아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생령을 보았지만, 실리안은 물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적으로 부른 것 같군. 확실히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 하겠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나와 정식으로 계약할 수준은 아니로군. 어쩔 수 없지만, 대가는 받아가겠다."

"대가? 으, 으으윽!"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아첼을 덮쳤다. 억누를 새도 없이 온 몸이 고통에 뒤틀렸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며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한동안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로 격한 아픔이 몸 이곳저곳을 찔렀다.

"내 속성은 공간계의 마력, '시공의 여행자'. 시원의 열 두 근원에 가까운 힘이나, 그렇기에 대가 또한 작지 않군. 미안하지만 그대의 수명을 조금 깎아낼 것이다. 양해해주면 좋겠군."

"머, 멋대로 도와주고는······, 대가라니······. 으흐으윽!"

"멋대로?"

실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황은 정 반대였을텐데. 오히려 내심 이런걸 바라지 않았나?"

문득 대정령이 손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엄청난 피비린내가 엄습해왔다.

생선 손질을 할 때나 고기를 다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예 핏덩이를 코 앞에 가져온 듯한 역한 비린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첼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욱······."

실리안의 등 뒤를 바라본 순간, 아첼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막기위해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처참하다는 말조차 모자란 지옥도가 펼쳐져있었다.

원래 인간이었는지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한 유해와, 골목을 가득 채워버린 채 끈적하게 말라붙어가는 피웅덩이.

진흙처럼 질척이는 것은 갈갈이 찢긴 살점과 내장이고, 그 위에 꽃처럼 피어난 것은 조각조각 부서진 뼛조각이다.

열 네 살 소녀의 정신으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내, 내가, 내가 이런 걸······? 이런 걸 바랐다고?"

온 몸이 죄책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견디지 못한 아첼은 허리를 꺾으며 벽에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을만큼 쏟아지는 눈물이 온통 얼굴을 적셨다.

얼굴에 말라붙었던 피가 눈물과 섞이며 다시금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붉은 얼룩을 남겼다.

"으흑, 으흐흐흑, 으아아아아아!"

사람을 죽였다.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씻을 수 없는 핏자국이 영혼을 적셨다.

아첼은 자신이 정말로 악마의 딸이라도 할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지만, 그것이 곧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아첼은, 목숨이 위협받았다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해도 한 순간에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처참하게 죽여버렸다.

대체 이 죄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까.

누가 나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에게 사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책망하지 마라."

오열하며 자책하는 아첼의 등 뒤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그 내용은 아첼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저들을 죽인 것은 나다. 소망하는 것은 죄가 아니야."

"하지만, 흐흑,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죠?"

"그들의 죄는 그들에게서 끝났다. 그대는 저들의 죄를 알 필요도, 알 의무도 없다."

실리안은 한 손을 들어올린 뒤 피바다를 향해 크게 저었다. 그러자 골목을 온통 적셨던 피와 살점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없애버리는 것일까.

무심코 그런 질문을 떠올린 아첼은, 다시 한 번 시체들의 참혹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허리를 꺾었다.

실리안은 더 토해낼 것도 없이 헛구역질을 하는 아첼을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려 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그대가 왜 슬퍼하는지도 알지 못하겠군. 하지만 그대의 슬픔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의 주인이이 될 자여."

피비린내가 옅어졌다.

더이상 그 근원이 되는 끔찍한 흔적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허공에 남아있는 희미한 냄새가 전부일 뿐이었다.

실리안은 아첼의 짐에서 깨끗한 천 하나를 꺼내 아첼의 이마에 감았다.

"그러니 이것만은 기억하라. 오늘의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작가의말

이 파트는 아무리 다듬어도 어색한 것 같아 슬펐습니다... 스승, 이름없는 흑마법사의 감정선을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사실 이프라이엘과 계약했을 때도 조금만 잘못했으면 이런 꼴이 났을겁니다. 역으로, 들쪽에서 괜히 아첼을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저렇게 참혹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가능성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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