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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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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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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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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34쪽

4장-방황彷徨 (2)

DUMMY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티엘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뒤따라오던 자가 멋쩍게 웃으며 얼굴을 보였다.

도심에서 가끔 마주치는 소매치기 소년이었다.

"이렇게 멈출 때까지. 어때, 지난 번 제안은 생각해 봤어?"

소매치기 소년은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는 티엘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킬킬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알아, 지난번에 거절했다고 말할 생각이지? 그냥 그동안 마음이 변했나 싶어서 다시 물어 본 거라고. 혼자 뛰어다니려면 참 힘들잖아. 안그래?"

"그걸 기억한다면 뒷 말도 생각 날텐데? 패거리들에 낄 생각은 없어."

"언제까지 혼자 뛸 수 있을것같아? 지금도 무리해서 일어난거 다 알고 있어. 걸음걸이, 호흡, 뭐 하나 멀쩡한게 없는걸 보니 걸어다니는 시체 수준인데. 우리쪽 들어오면 섭섭찮게 대접해준다니까. 너 정도면 실력이든 다른거든, 어떤 면으로든 말단은 금방 벗어날거라고."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끈적한 시선이 티엘의 몸을 훑었다.

티엘의 얼굴이 더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가이신에 온 이후, 주기적으로 달라붙는 잔챙이들 덕분에 짜증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눈에 보이자마자 그 헤죽거리는 얼굴을 아스트라로 날려버리지 않는 것은 단순히 경비대, 나아가 검은 가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지 딱히 자비심을 가진 것 때문이 아니다.

경멸어린 눈을 가늘게 뜬 티엘이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까. 내가 여기서 널 죽이면, 과연 앞으로도 계속 따라붙을 녀석이 있을까."

골목 안에 싸늘한 냉기가 불어닥쳤다.

시장 건달패들이 흔히 하는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협박이지만,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소년도 가슴이 시릴 정도의 살기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상대는 마법사다.

설령 무기를 들지 않았을 때 기습하더라도,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조직원 십여 명 정도는 저승길 길동무로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는 녀석이다.

뒤늦게 긴장한 소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득 소녀의 손에 들린 활에 시선이 닿았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손이 슬며시 품에 숨겨놓은 너클로 향했다.

활을 쓰는걸 보면 초근접 거리에서는 약하지 않을까.

그 거리라면 활을 쏘는 것보다도 주먹질이 훨씬 빠른 법이다.

솔직히 고운 소리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단지 실력과 얼굴이 썩 괜찮다고 해서 저렇게까지 건방진건 역시 열받는다.

"애냐."

티엘은 소매치기가 꿈지럭거리는 것을 보며 짧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칼라가스를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실질적으로는 칼라가스보다도 더 오랫동안 계약상태였던 생령, 애냐.

아직 육신을 완벽하게는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미 어엿한 정령급의 생령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 마력에서 드러나는 속성은 환영.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다른 어떤 속성보다도 다채로운 활용이 가능하다.

애냐의 마력이 빠르게 소매치기 소년을 휘감았다.

막 지면을 박차며 달려오려던 소년은 순간적으로 발이 엉키며 지면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 강한 환각은 아니다.

단지 오감을 교란시킨 것 뿐이었다.

하지만 당한 사람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빙빙 도는듯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이, 이 개 같은 년이! 이, 이리 와! 당장 그 잘난 면상을 으깨줄테니까! 제기랄, 왜 이렇게 눈앞이 도는거야!"

소매치기가 욕지거리를 하며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찾아 헤메는 것을 지켜보던 티엘은 한숨을 내쉬며 남은 마력을 팔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소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바람을 들어주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그가 자신에게 하려고 하는 짓을 되돌려 줄 뿐이었다.

"쿠억!"

마력으로 강화한 팔이 소매치기의 복부를 올려쳤다. 소녀의 가느다란 팔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티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정사정 없이 소년의 얼굴을 쥔 채 강하게 밀쳤다.

소년의 머리가 지면에 강하게 부딪히며 약한 뇌진탕을 일으키고, 그와 동시에 애냐의 마력도 듬뿍 흘러들어가 가까스로 붙들던 의식마저 잠재운다.

잠시 후 깊이 잠들어버린 소매치기 소년을 한쪽에 잘 눕혀둔 티엘은 메마른 얼굴을 한 채 다시금 카틴 강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귀찮은 들고양이 한 마리를 쫒아낸 듯한 가벼운 태도였다.


카틴 강에 도착한 티엘은 예정 외로 써버린 마력을 가늠하며 주의깊게 주위를 살폈다.

카틴 강은 시가지 안쪽을 통과하는 제법 큰 강으로, 바닥이 얕고 유속이 느려 평소에는 어린애들의 놀이터나 연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유명했다.

하지만 마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직 사람이 제법 남아있을 시간인데도 강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다행이야.'

사람들이 있으면 아무래도 마력을 쓰기 껄끄러워진다.

특히나 아직 티엘의 실력이나, 애냐의 마력 수준으로는 기억조작같은 복잡한 주문까지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마음껏 날뛰기 위해서는, 이렇게 완전히 비어있는 상태가 좋다.

"애냐."

티엘의 발치에서부터 연기같은 자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천천히 몸을 감싼 마력이 이내 티엘의 모습을 어둠속에 파묻었다.

이것으로 쓸데없는 참견쟁이가 붙을 일도 없어졌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자라면 코앞까지 다가오지 않는 이상, 티엘을 발견할 수는 없을테니.

더불어 모습을 숨기는데 사용한 마력의 향기는 은은하게 퍼져나가 굶주린 생령들을 자극하는 미끼이기도 했다.

턱, 터벅!

오래 기다리지 않아 냄새를 맡은 마령들이 푸른 안광을 흘리며 홀린 듯 몰려들었다.

하지만 티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이형의 육신을 갖춘 녀석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몰려든 것은 대부분 평범한 들개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제대로 육체를 구성하지 못한 덜떨어진 마령들이다.

마법사의 피 맛을 알고나서 그것에 취해버린 몇몇 정령들이 무리하게 짐승의 몸에 빙의해 마법사를 습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 정도의 적에게는 아스트라조차 필요 없었다.

별의 서에 담아두었던 마력을 한껏 끌어올려 전신에 두른 티엘이 천천히 속도를 올려 들개 무리로 뛰어들었다.

달빛에 허옇게 빛나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쳤다.

첫 번째 들개의 돌격을 가뿐하게 흘려낸 티엘은 허공에 떠오른 들개의 뒷목을 잡아채며 칼라가스의 마력을 강제로 밀어넣었다.

"크와아악!"

빙룡의 마력이 들개들의 체내로부터 날카로운 얼음들을 만들어냈다. 몸 안쪽으로부터 갈갈이 찢긴 들개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빠르게 쓰러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두 번째 들개의 돌격을 사뿐히 피한 티엘은 날카로운 얼음창을 던져 막 몸을 돌이키려는 들개를 꿰뚫어버리고, 바닥을 얼려 뒤늦게 달려오는 또다른 들개들의 발을 잡아챈다.

움직임이 멈춘 들개들의 머리 위에서는 난데없이 예리한 얼음 조각들이 빗발치듯 쏟아져 마령화한 육신을 잘게 찢었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물론, 칼라가스의 마력은 아직 티엘에게는 조금 버겁다.

별의 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 되는 잔챙이들에게 벌써부터 빙룡의 마력을 써 대면 마력 소모를 버텨내지 못한 티엘이 전투 중간에 기절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티엘은 오히려 그것을 바란다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싸늘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나와. 이 정도의 마력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 자, 나와. 어서 나와! 어서!"

마력에 찌든 들개들의 피냄새가 강바람에 멀리 퍼졌다.

그러자 뒤늦게 그 냄새와 티엘의 마력에 반응한 마령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티엘은 홍소를 터뜨리며 빠르게 시위를 건 활을 당겨 그림자 하나를 꿰뚫었다.

막 일그러진 이형의 육체를 드러내려던 마령 한 체가 눈부시게 빛나는 화살을 맞고 눈 앞에서 산산히 폭발해 피와 마력을 흩뿌렸다.

"가자, 칼라가스. 사냥의 시작이야!"

어느 정도 수가 모이길 기다렸던 것인지, 최초의 한 마리가 달빛아래 모습을 드러내낸 후 그 수가 두 자리에 이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각양각색의 속성과 형체를 지닌 마령들의 무리는 티엘을 완전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탁 트인 지형이기에 등을 보호할 벽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티엘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낭패감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손을 떨리도록 만드는 것은 공포가 아닌 흥분이다.

평소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살의를 풍기며, 티엘은 새카맣게 몰려드는 마령들의 한 가운데로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피와 비명, 그리고 조금은 슬픈 광소(狂笑). 일그러진 광연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 *




다음날 새벽. 지칠대로 지친 티엘은 새벽 시장 근처를 힘겹게 지나고 있었다.

사실, 어제의 격전을 치르기 전에도 이미 한계까지 내몰린 몸이었다.

그런 상태로 칼라가스의 마력을 아낌없이 뿌려댔으니 전신이 너덜너덜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새벽 안개가 옅게 끼어있는 시장을 거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유령 그 자체였다.

물론 피에 젖은 옷은 여관에서 재빨리 갈아입고 나왔지만, 제대로 싸매지 못한 상처는 지독할 정도로 쓰라리고 아팠다.

하지만 이 시간에 걷는 것은, 티엘에게 몇 안되는 낙중 하나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도 적고, 무엇보다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쐬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상쾌한 일이다.

지치고 심란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복잡하게 끓어오르던 마음도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오늘은 그 소소한 낙도 조금은 빛이 바랬다.

왠지 거리가 조금 부산스러운 느낌이었다.

간밤의 피로에 약간의 짜증이 더해진 티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마력을 일으켰다.

'애냐, 부탁해.'

아주 옅게 전신을 감싼 애냐의 마력이 티엘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겨우 2,3년만에 패거리들을 따돌리면서도 안정적인 '벌이'가 가능했던 것은 반쯤은 애냐의 덕분이었다.

특히 기척을 죽이고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면 온갖 이야기와 정보가 귓가로 흘러들어왔으니,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데도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거의 훈련받은 암살자에 준하는 수준으로 기척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무시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너, 도달할 장소 아니다, 이 곳."

"또 그러네. 로비, 너도 이참에 사고 싶은거 있으면 사. 가이신만큼 뭐 사기 좋은 곳도 드물다고. 고물상 뒤져보면 뭔가 나올지 혹시 알아?"

"머리 아파. Kraspde, 아니, 계획, 변하게 만들면 힘들어져."

때 아닌 소란을 만들어내는 것은 새벽부터 꽤나 시끄러운 사람들이었다.

가이신에서 본 적 없는 외지인들이었다.

쾌활하게 지껄이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외국인인 듯 어색한 말투를 보이는 남성의 목소리.

평소라면 가볍게 지나쳤을, 아무래도 좋은 타인들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날 선 칼처럼 선명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단순히 피곤해서 신경이 곤두선 탓인지, 아니면 간만에 찾아드는 어떤 예감인지, 알 수 없었다.

티엘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없이 가슴을 누르는 불안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옅은 새벽안개 때문에 시계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다행히 지금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내 티엘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매끄러운 금발을 어깨 근방으로 짧게 자른 발랄한 분위기의 20대 초반의 여자, 그보다 서너 살쯤 많아보이는 빨간 더벅머리의 남자.

체격은 둘 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보는 이의 등골을 싸늘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을 감싼 칠흑빛의 제복.

심장을 옭아맬 듯 무겁게 가라앉은 검은 빛은 분명히 흑마법사들이 가장 꺼려하는 어느 집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티엘은 반사적으로 두 사람의 허리춤을 살폈다. 둘 모두 왼쪽 허벅지에 똑같이 생긴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칼집에 새겨진 은빛 문양.

그것은 다름아닌 가시나무를 형상화한 문장이었다.

'검은 가지······!'

순간적으로 걸음걸이가 어긋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가뜩이나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대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은 마당이다.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줄여야했다.

겉모습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감정이 흐트러지면 애써 감춰둔 마력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라도 마력이 새어나갈까, 호흡조차 멈춘 티엘은 속도를 슬쩍 늦춰 기사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인파가 적은 것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다.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어갈 방법도 없으니 그저 주의를 끌지 않으며 시야 밖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를 눈치챈 것처럼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딱 멈췄다.

"리아."

"······신고 들어온 데는 여기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리 멀리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순간 리아라고 불린 여기사가 몸을 돌렸다.

직감적으로 들켰다는 것을 알아챈 티엘은 즉시 몸을 돌렸다.

"레나타!"

금발의 여성쪽이 생령의 이름을 외쳤다.

낭패였다.

마력을 발산하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지금의 티엘은 미약하게나마 애냐의 마력을 두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이 독이 됐다.

싸움은 애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는 대 마법사전에 익숙할 특수부대원이며 그것도 두 명이나 된다.

안그래도 만족스럽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다친 티엘에게, 이렇게 탁 트인 장소는 불리했다.

다행히도 몇 걸음만 달리면 하수도로 이어지는 골목이 있었다.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고 시가전을 벌이지 않으면 승산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막 내딛으려던 발 아래쪽에서 위화감이 흘렀다.

마력의 흐름이었다.

중화시킬 시간조차 없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몸을 일으킨 흙과 돌무더기가 티엘의 발을 잡아챘다.

'대지령?'

탐색령의 일종인 추적령을 제외한다면, 누군가를 찾을 때는 풍속성과 함께 가장 유용한 속성이다.

단순히 몸을 숨기는것만으로는 따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티엘은 이를 악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느긋하게 마력을 중화시킬 시간은 없다.

붙잡힌 다리를 마력으로 강화하고, 한 손으로 지면을 스치듯 어루만지며 재차 마력을 흘려넣었다.

"바람을 딛어라!"

티엘이 바닥에 펼쳐진 옅은 빛의 마법진을 박찼다.

순간 티엘을 구속하던 흙더미가 힘없이 부서지며 티엘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티엘이 만들어낸 도약주문, 선풍의 질주였다.

최대 세 번까지 마력판을 형성하여 중력, 관성을 무시한 채 폭발적으로 가속하는 이 주문은 사용하기에 따라 거의 비행주문에 가까울 정도의 움직임이 가능했다.

물론 단순히 몸을 화살처럼 쏘아보내는 것이기에, 조금 전 티엘을 묶은 구속이 조금만 강했더라면 발목이 그대로 뽑혀나갔을 지도 모른다.

마력으로 강화술을 걸었는데도 발목 관절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티엘의 어린 나이에 방심이라도 한 것인지, 대지령의 구속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안일했어.'

사실, 가까이서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들킨 가장 큰 이유는 티엘이 이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씩 새겨진 마력의 흔적 때문이었다.

짧은 기간만 지냈더라면, 혹은 장기간 체류하더라도 마력을 최대한 억누른 상태였다면 대지에 남은 마력의 흔적은 금새 사라진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전력으로 마력을 쏟아내며 마령과 싸워온 티엘의 마력은 하루나 이틀 정도로 흩어지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변방지역이라고, 별다른 용건이 없이는 검은 가지의 시선이 닿지 않으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기어이 목을 물어뜯은 셈이었다.

"저기, 별로 다치게 할 생각은 없거든? 잠깐 이야기좀 해보지 않을래?"

막 지붕 위로 올라선 티엘의 귀에 문득 여기사 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초조하게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두 기사는 그리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기사쪽은 상황을 지켜보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어색하게 웃던 여기사는 친한 척을 하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 적대 의사는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진해서 마령의 입속으로 걸어들어갈 사람도 없다.

티엘은 얼굴을 굳히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어, 저기-!"

남은 마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거리를 어느 정도나 벌려야 대지령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애냐의 마력으로 눈속임이 가능할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으니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체력이라도 충분하거나 별의 서라도 가득 차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초조하게 남은 마력을 헤아리던 티엘은 마음을 굳히고 지붕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몸에 오랫동안 뒷골목을 전전하며 쌓인 균형감각이 빛을 발했다.

각력을 조금만 보조하면 지상에서 따라 달리는 것보다 더 적은 마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건물 하나를 완전히 가로지른 티엘은 곧바로 다음 건물의 지붕을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거리가 모자라더라도 선풍의 질주로 재차 도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막 뛰어오르려던 지붕이 삽시간에 멀어져갔다.

'발목에 뭔가가······? 어느틈에?'

티엘은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지면에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낙법을 배운 적도 없고, 전신에 돌릴 마력도 부족한 상황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어자세였다.

다행히 운 좋게도 추락하던 지점에는 빈 상자가 여럿 쌓여있었다.

그러나 미처 대비하지 못한 충격은 어설프게 몸을 웅크린 티엘의 전신을 덮쳐왔다.

"크흑, 아으아악!"

피로로 통증에 대한 저항이 약해진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미처 내뱉지 못한 숨이 쥐어짜이듯 신음으로 터져나왔다.

그나마 어딘가 부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제대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위안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티엘을 향해, 딱한 표정을 지은 여기사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에구······. 미안. 정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움직임이 빨라서 조금 거칠게 하고 말았네. 괜찮아?"

금발의 여기사, 리아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미세한 빛이 움직였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은사가 그 손끝에 걸려있었다.

티엘의 다리를 잡아챈 것의 정체였다.

리아는 티엘의 다리에 감겨있던 은사를 풀고, 대신 한쪽 팔을 자신의 팔과 묶었다.

다리가 묶여서야 제대로 걸을 수 없을테니 일종의 수갑 대용이었다.

그러나 티엘은 리아가 은사를 묶는 동안 의식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진 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반항은 할 거라고 생각했던 리아는 나직하게 탄식하며 가방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티엘의 다리를 치료해주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직후, 리아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망할, 전언 철회다. 미안할 필요는 없겠는데."

순간 번쩍 눈을 뜬 티엘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환각계의 마력으로 통증을 억누르고, 쓰러진 척을 하며 기회를 보려고 했던 티엘은 은연중에 일으킨 마력에 반응해 몸을 물리는 리아를 보며 내심 혀를 차고 말았다.

치료, 혹은 체포를 위해 다가온 리아에게 환각을 씌워 추적을 피할 생각이었지만, 수상한 낌새를 미리 눈치챈 바람에 계획이 무위로 돌아갔다.

"혹시라도 날 어쩌고 튈 생각이었다면, 이 근방에는 카르나의 사슬로 이미 결계를 깔아뒀다는걸 알려줄게. 함부로 도망치다간 크게 다칠걸."

리아의 말대로, 주위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은사가 세밀하게 깔려 있었다.

영장사(靈杖師) 중에서도 가장 뒤어나다고 칭송받는 엘트리안의 작품 중 하나인 카르나의 사슬.

마력을 이용해 가느다란 은사를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능 뿐이지만, '사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어지간해서는 만들어낸 끊어지지 않는다는 위명을 가진 물건이었다.

잘못 뛰어들었다간 끊어지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칼날같은 은사에 갇혀 험한 꼴을 보기 십상이다.

티엘은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 카르나의 사슬을 풀어내려 시도했다.

그러나 저항하려 할 수록, 은사는 티엘의 마력을 집어삼키며 점점 더 강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팔이 절단되지 않을까.

티엘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물들었다.

리아는 움직임을 멈춘 티엘이 슬슬 포기했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번에도 무기는 꺼내들지 않은 채 다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넘어진 티엘을 일으켜주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시가지에서 생령까지 쓰고, 잘도 날뛰어줬네, 너. 이 정도로 난동을 부렸으니,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것도 이해하지?"

말없이 상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티엘은 티엘은 왼손으로 가볍게 은사를 쥐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아니, 팔을 휘감은 쪽의 옷소매는 이미 은사에 가늘게 찢어지고 있었다.

무리하게 뿌리치려든다면 뼈까지 잘라버릴 기세였다.

순간 티엘의 눈에 약간의 광기가 스쳤다. 그 눈에서 싸늘한 빛을 읽은 리아는 순간적으로 오한을 느꼈다.

자포자기, 아니, 자기파멸에 가까운 기이한 감정.

사선을 수없이 넘어다닌 닳고 닳은 검은 가지의 기사조차 한 순간 움츠러들 정도의 뒤틀린 상처.

"아!"

다음 순간 티엘이 은사를 쥔 왼손을 힘껏 꺾었다.

극도로 예리한 은사는 잘못 당기면 정말 뼈까지 파고드는 위험한 물건이다.

느닷없는 자해에 깜짝 놀란 리아는 다급하게 은사를 조금 더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티엘은 상처 하나 없는 팔을 휘둘러 마력을 뿌리며 리아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휘둥그렇게 떠진 리아의 눈 앞으로 문득 한 가닥의 가느다란 실이 너울거렸다.

티엘의 팔을 묶고 있었던, 끊어져버린 은사 가닥이었다.

'카르나의 사슬이 잘렸다고?'

기사급의 생령조차 쉽게 끊을 수 없는 은사가 아직 새파랗게 어린 소녀의 손에서 거미줄처럼 끊어졌다는 사실에 리아의 움직임이 다소 경직됐다.

칼라가스, 시원의 용이라는 반칙이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것을 과연 그 누가 눈치라도 챌 수 있었을까.

리아가 보인 빈틈을 타 마력이 끊겨 사라져가는 은사를 잡아챈 티엘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은사에 걸고 강하게 당겼다. 그리고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마력을 불어넣은 뒤 허공으로 흩뿌렸다.

공중에 떠오른 머리카락이 제각기 물고기처럼 허공을 가르며 모여 희푸른 마법진을 그렸다.

"칼라가스!"

"젠장, 레나타! 스펠글로스!"

새하얀 용이 살얼음을 깨부수듯 소환진 안쪽에서부터 날아올랐다.

순간적으로 나타난 생령에 리아 역시 생령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지럽게 풀려나간 은사가 단단하게 조여들며 한 장의 방패를 만들고, 그 위로 새카맣고 반들거리는 암석이 자라나며, 다시 암석 위에 붉은 빛이 깃들어 삼중의 방벽을 쳤다.

마력의 구성 속도만 따지면 티엘보다 훨씬 빠른 노련한 대응이었다.

그 사이 하늘로 날아오른 칼라가스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하루 세 번 까지 허용된 용의 가장 강력한 무기, 숨결.

아직 성체가 아닌 칼라가스로서는 하루 한 번, 그마저도 범위와 위력이 크게 줄어든 상태가 한계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원의 용으로서 지닌 소멸의 권능만큼은 온전히 남아있다.

사용한 후의 후유증도 티엘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기에, 지난 밤의 격전 중에도 마지막까지 아껴둔 비장의 수였다.

두터운 성벽에 필적할 정도로 강인한 리아의 방벽은, 겨우 작은 매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새하얀 용의 숨결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손쉽게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리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상대의 공격이 자신의 방벽을 가볍게 찢는 것을 보며 경악에 젖었다.

막 태어난 용은 유년체의 생령보다도 약하다.

아성체도 아닌, 유년체의 용이라면 기사급의 마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리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시원의 용, 칼라가스였다.

그녀가 자랑하는 방벽은 부서지는 것조차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소멸하며 단숨에 꿰뚫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던 흰 빛무리는, 이내 리아마저 탐욕스레 삼켜버릴 듯 매서운 속도로 쇄도해왔다.

"그만!"

순간 티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칼라가스의 숨결을 끊었다.

바닥까지 긁어낸 마력으로 더이상 칼라가스를 유지할 여력도 없었던 티엘은 거친 숨을 삼키며 자신의 계약령을 불러들였다.

흰 용은 순순히 계약자의 곁으로 돌아가 티엘의 어깨에 앉았다.

시간으로 치면 찰나라고밖에 할 수 없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리아는 주위가 이미 한겨울처럼 싸늘해진 채로, 어느새 서리까지 두껍게 쌓여있는 것을 보며 살짝 몸을 떨었다.

"하아, 그 용 대체 뭐야? 그나저나 방금 날 죽이는게 더 간단했을텐데. 조금 의외네?"

티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넌지시 리아에게 제안을 건넸다.

"여기서 그만 물러나주시면 어떤가요."

"용까지 데리고 있는 흑마법사를 놔두라고? 그거 농담이지?"

힘없이 짓는 쓴웃음이 우울하게 번졌다.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 근처에서 마령들을 사냥할 뿐, 별다른 일은 벌이지 않을거에요."

"그거 말 안돼는거 알지? 이미 온 도시에 네 마력이 쌓여있어.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쌓여가는데 마령들이 더 찾아오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걸 노리고 있는걸로 보이는데. 안그래? 아니면, 너 자신이라도 먹이로 주려는 거야?"

리아가 말하는 것은 도시에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한 채 마령들 틈으로 몸을 던지는, 죽기 위해 싸우는 듯한 태도를 꿰뚫는 질문이었다.

정곡을 찔린 티엘이 날카롭게 리아를 쏘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한 미소가 리아의 입가에 걸렸다.

"거절이야. 그리고 재차 애원하는 것도 거절. 날 죽이지 않으면 널 놓아두진 않을거야. 하지만······, 너, 아직 사람 죽여본 적 없는거겠지? 기억을 지우려는 어줍잖은 짓이나 시도하고, 그게 실패하니 어설프게 말로 설득하려 들고······. 왜. 용의 숨결에 던져두면 꿈에라도 나올까봐 그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던지는 시덥잖은 도발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마다 돋아난 가시는 무의식중에 티엘의 두려움을 정확히 찾아 꿰뚫었다.

악에 받쳐 시위를 당기더라도, 티엘이 살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령을 상대로 할 때 뿐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풀던 리아는 허리에 차고 있던 얇은 세검을 뽑았다.

"애초에 너, 너무 물러. 아직 발버둥 칠 수 있는 상대를 눈앞에 두고, 너무 여유가 넘치는걸."

"아-"

당황한 티엘이 무심코 별의 서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미 간밤에 모든 마력을 써버린 별의 서는, 티엘의 애타는 손짓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티엘이 흠칫 놀라는 사이, 리아는 생령의 이름을 다시 외쳐 선공권을 잡아가고 말았다.

"레나타! 지맥의 열쇠, 거인의 발걸음이여!"

발밑이 강하게 떨리며 티엘이 있는 자리가 점차 함몰되기 시작했다.

지면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며 티엘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우묵하게 패여들어가고 있었다.

티엘은 반사적으로 붕괴 지역을 벗어나려 했지만,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려 도무지 걸음을 딛을 상황이 아니었다.

도약하려고 해도, 마찬가지로 지면으로 발이 파묻히며 제대로 힘을 실어 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이미 리아의 손에서 뻗어나간 은사는 티엘의 전신을 단번에 휘감으려는 듯 몇 겹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조여들고 있었다.

'마력이 없어······!'

도약주문이든 뭐든 사용해야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몸은 마력조차 제대로 회복되질 않았다.

별의 서에 아직 마력이 남아있다면 좋을텐데.

눈을 질끈 감은 티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꽉 눌렀다.

마력이 없다면, 생명력으로 대체하면 된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으로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칼라가스! 애냐! 바람을 딛어라!"

잘게 부서진 땅거죽을 뒤엎어버리며 십여 개가 넘는 얼음기둥이 지면 아래에서부터 원형으로 솟아올랐다.

막 조여들던 은사가 얼음기둥에 걸려 더이상 안으로 파고들 수 없게 되었다.

당황한 리아가 은사를 잡아당겨 힘을 실었지만, 은사는 얼음을 파고드는 대신 겨우 표면을 깎아내며 사방으로 미세한 얼음조각들을 피워올렸다.

뒤집힌 지면에서 피어난 흙먼지에, 얼음기둥에서 튄 세빙이 뒤섞이며 시야가 온통 검고 뿌연, 진흙탕으로 이루어진 연막으로 가득 덮여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티엘이 몸에 두른 것은 환각령인 애냐의 마력이었다.

조금 전처럼 다시 탐지당하는 것을 막기위해, 아예 도약주문까지 더해 리아와의 거리를 크게 벌린 티엘은 착지와 동시에 이를 악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대로 숨어야 해. 빨리, 빨리!'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더이상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애냐가 소리까지 막아주길 바라며, 티엘은 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힘겹게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티엘이 저지른 마지막 실수였다.

"솔페이람."

기사의 수는 둘이었다.

한 명의 기사는 첫 조우 후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사가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판단력이 흐려질대로 흐려졌던 티엘은 갑자기 들려온 남성의 목소리에 경악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한 줄기의 바람이 머리 끝을 날카롭게 스쳤다. 마치 폭풍의 전조처럼 탁하고 불길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조금 전의 바람을 도화선 삼은 듯한 맹포한 바람이 폭풍처럼 골목을 꿰뚫었다.

단순히 안개를 찢는 정도가 아닌, 단단하게 돌로 포장된 바닥을 갈아엎어버릴 정도의 광풍.

이미 바람이라기보다는 무형의 칼날로 모든것을 난자하는 것에 가까운 폭풍이었다.

티엘이 기억하는 라피온의 바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차라리 대정령 쉬피아네드가 불러 일으키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에 가까운 미친 바람이었다.

지면에 몸을 웅크리려 했던 티엘의 몸이, 겨우 겉바람만으로 휩쓸려 떠오를 정도로.

"크흡-!"

바람에 끌려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버티던 도중, 겨우 한 조각의 바람이 티엘의 허벅지를 스쳤다.

건드렸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러나 그 얼마 안되는 마력이 살을 스치는 순간, 마치 수십 개의 칼날이 허벅지를 난자하는 것처럼 살점이 한 움큼이나 뜯겨나갔다.

"흐그으으윽!"

비명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옷깃을 악물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에 결국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애냐의 마력으로도 채 잠재울 수 없는 통증이 뇌리를 하얗게 불태웠다.

결국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가까스로 유지해오던 애냐의 마력이 끊겼다.

"흐아아아아악!"

격통이라는 말조차 채 담지 못할 아픔이 티엘을 유린했다. 티엘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결국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의 기사, 올로비스는 티엘을 정확히 인지하고 주문을 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흙구름을 치워버린 올로비스는 내찔렀던 창을 회수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흔히 '광풍령'이라고도 불리는 솔페이람의 마력 속성은 '폭풍의 날개'.

일단은 풍속성이라 안개를 날려버리는데는 유리했지만, 조금만 양이 많아도 광풍을 불러일으키는지라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위험이 높았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은 이미 그가 염려했던 상황 이상이었다.

하마터면 솔페이람의 마력에 휘말릴뻔 했던 리아는 씩씩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로비, 조심해! 솔피는 너무 과격하단말야!"

"미안. 미안함······, 아니, 사과 줄게. 의도가 가진건 아니었어."

"의도한게 아니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쩔쩔매는 올로비스의 목소리와 쨍쨍한 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엘은 옷깃을 입에 문 채 이를 악물며 다리를 끌어당겼다.

허벅지를 난자하다시피 한 상처에서는 지금도 뜨거운 피가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근육까지 상해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지혈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험할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상처를 눌러도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조금도 줄지 않는다.

게다가 핏자국이 워낙 선명하게 남아버린 바람에 모습을 숨기는 것도 사실 불가능했다.

고통과 눈물로 얼굴을 적신 티엘은,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내지 못할 희박한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맞긴 채 무기력하게 벽에 기대 눈을 감아버렸다.


작가의말

전부터 여러 차례 언급된 검은 가지가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대 마령, 대 생령, 대 흑마법사전 스페셜리스트들인데다가, 전투에 이골이 난 녀석들이라 동급 마법사들이랑 붙어도 승률이 매우 높은 인간병기들이죠.


아. 올로비스 대사가 요상한건 오타가 아니라, 올로비스 본인이 말이 어색한 겁니다. 리가르트 왕국 출신인데, 공화국어에 익숙해지질 못하고 있거든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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