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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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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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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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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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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4장-방황彷徨 (1)

DUMMY

제국력 875년, 제도(帝都), 로셀.

제국력이라는 이름에서 착각하기 쉽지만, 대륙에서 사용하는 역법은 시엘리아 제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현재는 대륙의 북서방으로 밀려난 구(舊) 제국, 익티아누스의 시대에 완성된 역법이다.

그러나 363년 전 세워졌던 이 제국이, 오늘날에는 대륙 최강국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제국의 심장은 오늘,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여섯 대공국과 제국을 상징하는 색색의 깃발이 끝도없이 늘어진 성벽 위로 향유에 적신 꽃잎이 거의 안개처럼 보일 정도로 뿌려졌다.

더불어, 어느 곳을 보더라도 화려하게 장식된 자줏빛 황기(皇旗) 역시 현란하게 펄럭였다.

그 아래로 새하얗게 물들인 갑주로 전신을 감싼 기사들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모여드는 장면은 제국의 위엄을 드높여주었다.

혹여 기상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마법사들에 의해 하늘마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게 개였다.

거리 한두 개 따위가 아니다.

제도 전체를 뜨겁게 달구는 이 축제 분위기는 아마도 제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쪽의 알게이드 산맥에서부터 서쪽의 루안 해까지, 북부의 빙원지대부터 광활한 남해에까지 이르는 대륙 최강국의 주인.

그 이름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것이다.

대관을 축하하기 위한 이 축제는 앞으로 일주일간 이어질 예정이었다.


오늘은 바로 선제의 붕어 이후 삼 년, 기나긴 국상 기간이 끝나는 날이자 제국의 황태자 아쉬칼페인 시엘 카이라가 즉위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은 오히려 그런 거창한 직함을 안쓰럽게 보이게 만든다.

즉, 누구보다 높아야 할 황제의 자리가, 결국은 번드르르한 겉치레라는 사실이다.

대제국 시엘리아의 진정한 주인은 옥좌에 앉아 홀을 든 황제가 아닌, 그 아래 머리를 조아린 여섯 명의 대공왕이다.

오랫동안 패자로 군림해온 익티아누스를 제 몸처럼 아꼈던 여섯 기사들과 함께 도전해 꺾어낸 엔지칼 대제.

그는 자신의 친우들을 유난히 아낀 탓에 새로운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거의 대등하게 나누었고, 그로 인해 점차 황제와 대공들의 균형이 뒤집히며 이어내려온 특이한 권력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것은 훗날, 역대 황제들 중 대부분이 대공들에게 끌려다니는, 이 우습지도 않은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제도를 물들인 자주빛 깃발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매끄러운 자주빛의 바탕 위에 아로새겨진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섯 자루의 검과 성배다.

성배를 중심으로 펼쳐진 여섯 자루의 검은 황제를 지키는 여섯 대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보면 여섯 대공에 가로막힌 이름뿐인 황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로 목이 날아가는 황제의 권좌 위에서도 때때로 대공왕들을 휘어잡고 강력한 통치를 펼친 명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제국민들은 이유모를 기대 속에서 신황제의 즉위에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이 그랬듯이 만인의 광대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꿈꾸며 처절하게 짓밟힌 패배자가 될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이번에야말로 그 직위에 걸맞는 강력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 * *



법황청에서 나온 대주교 하드루에인은 그 모든 사실을 떠올리며 계단을 걸어올라오는 새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젊은 황제의 얼굴은 막 깎아낸 것처럼 날카로웠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선대 황제들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것일까.

황제의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자라면 보이기 쉽지 않은, 오만하고 당당한 패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황제들이라고 달랐던가.

벌써 2대, 황제의 즉위식에서 그들에게 의미없는 축복을 내려주는 하드루에인은 안타까운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 젊은이 또한, 얼마 가지 못해 닳고 부러져 꺾이고 말리라.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대주교의 감상 따위는 하등 의미가 없다는듯, 의식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레 진행되어갔다.

하드루에인은 엄숙하게 백옥 물병을 들어 아쉬칼페인의 두 손에 부었다.

"······이리하여 제국의 고귀한 황제가 되려는 자, 아쉬칼페인 시엘 카이라에게 우리 주 아이넬라 유르마인의 이름으로 그 각오를 묻노라."

이어지는 것은 황제의 기도문.

앞으로 어떤 황제가 되고 싶은지를 담은 기도문으로 여신께 황제의 자리를 허락받는 의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황제는 이 기도문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제국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한 표석일 뿐, 그들의 의지가 제국을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쉬칼페인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하드루에인은 잠시 의식을 중단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짧게 심호흡을 한 황제는 두 손을 모아 가볍게 이마에 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피와 율법의 지배자, 모든 진리의 감시자, 영원의 불길을 수호하시는 주 아이넬라의 이름으로, 여섯개의 검과 지팡이를 거머쥔 자로써 사해(四海)의 만민을 거두어 살필 것을, 어머니 아이넬라의 가르침을 받들어 우룬의 사심에 물들지 않을 것을, 일곱 개의 법과 열 둘의 용을 마주하더라도 내 권속을 버리지 않을 것을 주의 영광 앞에 온 몸을 바쳐 맹세하오니, 이 언약이 깨어지는 날 이 영혼을 찢어 연옥의 불길로 사른들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강단있는 목소리가 다소 섬뜩한 기도문을 이어갔다.

말없이 기도문을 듣던 하드루에인은 내심 혀를 차며 한숨을 삼켰다.

'아직 어리군.'

황권의 안정과 영광을 노래하는 기도문은 사용된지 몇 세기는 지난 오래된 것이었다.

제국의 유구한 역사를 살펴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드문 기도문이다.

저도모르게 대공왕들의 분위기를 살핀 대주교는 다행히 조용하게 가라앉아있는 여섯 대공왕의 표정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제 어머니께서 그대의 이름에 존귀한 두 이름을 더하니, 이후로 그대의 이름은 아쉬칼페인 샤티네스 아르노 시엘 카이라로 불릴 것이며 황실과 천상에서 칭송받을지라."

대주교는 복사(Acolite)가 받쳐든 보관(寶冠)을 들어 신황제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어서 다른 두 명의 복사가 다가와 황제의 앞에 부복하며 두 개의 신물을 하나씩 내밀었다.

섬세한 세공이 돋보이나 한 면에 커다란 흠집이 난, 수정으로 이루어진의 왕홀.

그리고 역시 화려하지만 끝이 뾰족하지 않은, 참수검처럼 평평한 날끝을 가진 여섯 개의 단검.

이는 각각 교권의 수장인 법황과 속권의 상징인 여섯 대공왕을 상징하는 신물이며, 동시에 그 모든 힘들이 황제에게 귀속됨을 상징하는 보물들이다.

각기 흠집을 가진 이유는 황제 스스로가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라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건들을 직접 받아드는 일 또한 이례적인 일로, 보통은 신물을 새겨넣은 장신구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역시 아쉬칼페인의 강경한 요청에 의해 실물을 제작해 가져온 것이었다.

신물을 받아든 황제는 자연스레 두 신물을 뒤따라온 시종들에게 맡기며 황제의 권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여섯 개의 검이 잇따라 차례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대공왕들의 검이 교차하고, 그 위로 황제의 검이 내려앉았다.

"정령의 가호와-!"

"성령의 축복과-!"

"엘드리안의 불멸과-!"

"아이넬라의 영광을-!"

"황제폐하-!"

"만세-!"

가장 먼저 여섯 대공왕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흘러나오며 신황제의 등극을 알리고, 이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며 머나먼 곳에서까지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황제는 그 함성에 답하지 않았다.

오직, 세워 짚은 검 위로 침착한 눈빛만을 뿌리며 서있을 뿐이었다.




* * *



황도의 깃대 가장 높은 곳에서 휘날리는 것은 물론 자주색 바탕에 금색으로 여섯 자루의 검을 그려넣은 황제의 깃발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저 깃발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여섯 자루의 검, 즉 여섯 명의 대공왕들이다.

황제를 이루는 것은 모두 대공왕에게서 나왔다는, 함의라고도 할 수 없는 유치한 수준의 상징물이다.

게다가 황제의 깃발과 불과 한 뼘도 차이나지 않는 높이에서 흔들리는 깃발이 하나 더 있다.

그 자리는 매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바뀌는, 황제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수호자'의 자리이다.

이번 황제의 치세동안 빛나는 검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것은 푸른 바탕에 새겨진 새하얀 해룡이다.


르비아는 문득 레가야를 상징하는 해룡과 눈꽃의 문양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레가야에 눈이 많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 춥고, 폭설로 해마다 골머리를 썩히는 미라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그려넣은 것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한 건지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승계한 것을 축하드리오, 레가야 공, 카르티치스."

그 때 누군가가 회의장 한 켠을 홀로 거닐던 르비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르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 상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이전의 도움은 감사드립니다, 미라야 공 샤르세인."

미라야의 주인, 올파인 마야드 샤르세인은 품위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옷깃 사이로 붉은 빛의 보석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레가야에서 보낸 최상급의 마석들 중 하나였다.

협력의 대가로 '선물'한 마석의 수는 확실히 레가야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그 것을 간단히 손에 넣은 미라야의 힘은 말할 수도 없이 강해졌을 터였다.

샤르세인은 그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런 자리에까지 마석을 달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르비아는 짐짓 눈치채지 못한 척 부드러운 웃음으로 흘려넘겼다.

유치한 도발은 받아줄 필요도 없다.

두 대공왕이 먼저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다른 대공왕들도 하나둘씩 르비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찌되었건 재미있는 일이로군. 하필이면 선황 폐하의 국상중에 항쟁으로 자리를 이어받은 덕에 정식 즉위가 너무 늦었던 것 같구려. 게다가 이번 대에서 폐하를 지키는 검은 레가야가 쥘 차례인데, 그 황제와 함께 즉위한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소이까?"

"휄카야에서도 제게 관심이 있으셨나보군요? 하하하, 나름대로의 영광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휄카야의 대공 레이리게 아일레 팔라비스는 여성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호탕하게 웃었다.

대륙 철광산의 사 할을 지배하는 그녀의 손가락에는 묘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공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는, 십여 조각으로 갈라진 쇳조각을 물린 반지였다.

하지만 그 것이 대륙 광산조합을 좌우지하는 철각인 반지라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다.

열 일곱 곳의 광맥에서 채굴한 쇳조각에 마법을 걸어, 광맥이 고갈되면 해당하는 조각이 녹슨다는 그 반지는 얄미울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쉽게 마르지 않을 재력을 과시하며 묘하게 선정적인 눈웃음을 짓는 대공의 시선이 천천히 르비아를 훑었다.

다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불길하다고 느낄 탐욕이라는 이름의 사기(邪氣)로 반짝이고 있었다.

"조만간 철각인에 빗금이 그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시원의 용처럼 억누르기 힘든 전력은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겐 꽤나 무서운거니까."

르비아는 모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맛좋은 간식이라도 집어삼킨 듯한 능글능글한 웃음을 당장 얼굴에서 뜯어주고 싶은 심정을 누르는 것은 꽤나 성가신 일이다.

제국의 대공왕이자 시원의 용의 지배자.

어느 쪽이든 굉장한 이야깃거리인 것은 마찬가지다.

시원의 용은 하나의 국가조차 억제하기 힘든 강력한 비대칭 전력이고, 그 존재만으로도 타국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누르는 힘이 된다.

그 사실이 간단히 퍼져버려서야 레가야를 견제하려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리 시원의 용을 거느리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자리잡았다고는 할 수 없는 르비아다. 둘 이상의 대공국이 작정하고 찍어누르면 버틸 수 있을리가 없다.

아예 즉위 초부터 손발을 묶어두겠다는 미라야의 질 나쁜 장난이었다.

'능구렁이 같으니······.'

날카로운 시선이 소리없이 부딪혔다.

천연덕스러운 미소 아래 찢어질 듯한 웃음을 숨긴 샤르세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반응을 보니 휄카야는 반쯤 미라야의 손을 들어준 듯 했다.

선왕, 미노스티야가 준비하던 휄카야와의 조약이 르비아의 항쟁으로 인해 공중으로 떠버린 탓이다.

휄카야의 광산에서 채굴되는 우룬의 사슬을 넘겨받는 대신 하급 영장을 제공하기로 한 조약은 굳이 레가야에게만 솔깃한 제안이 아니다.

마석을 다루지 못한다는 아쉬움만 넘으면 미라야라는 대체수단도 있다.

더불어 선왕과의 의리를 선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결정인만큼, 르비아의 레가야 장악에 조금이라도 혼선을 빚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 모두 레가야와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 않은만큼, 이런 뒷공작이 일어나는 걸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이 이런 귀찮은 일로 번진 듯 했다.

'이까짓 장난질로 날 견제해보시겠다······. 착수를 잘못하셨군.'

르비아는 투명한 붉은색의 액체가 가볍게 찰랑거리는 가느다란 유리잔 하나를 들어 여대공에게 내밀었다.

팔라비스가 흔쾌히 잔을 받아들자 손 안에서 작은 마력결정을 만들어 잔의 주둥이에 꽂았다.

무색 투명한, 얼음같은 결정은 유리잔의 옆을 타고 부드럽게 굽이치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음······."

팔라비스의 눈이 갸름해졌다.

조각의 만듦새에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

유리잔에 새겨진 꽃의 문양. 그 모습은 휄카야의 깃발에도 있는 세 장의 깃털과 닮아있었다.

르비아의 뱀은, 바로 그 문양을 집어삼키려는 듯 보였던 것이다.

"휄카야의 강궁병대가 꺾지 못한 적은 없다지요. 철의 여왕께서 엄살이 심하십니다."

미라야의 늙은 개가 흘린 정보는, 고작해야 흥미거리에 불과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르비아가 힘을 가졌기 때문에 흥미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거스르는 것 보다는 편승하는 것이 이득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면, 굳이 위험한 흐름에 몸을 맞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르비아는 오른손으로 옷깃을 바로잡으며 가볍게 목깃의 장식단추를 매만졌다.

은연중에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아르타야 대공, 리카드라 솔 디안-실카르는 문득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황제의 기도문도 나름대로 의미심장하지 않았소이까? 이 늙은이의 구미를 당길 정도로 재미있는 황제가 될 것 같더이다. 다른 대공들께서는 어째 생각하오?"

샤르세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러나 미라야의 늙은 대공이 입을 열기도 전에 미르다야의 무라사 라본 이카넬이 말을 이어받았다.

"하기야, 지금도 비사야의 라벤티아와 회담을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신황제가 대공 하나하나와 대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작 이번 대의 '수호자'인 레가야를 가장 마지막에 만난다는 것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되는군요."

"어쩌면 카르티치스 공께서는 조금 성질나쁜 고양이를 길러야 할지도 모르겠구려."

"하하하하, 걱정이 너무 심하시오? 황제라는 자리가 그리 대단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쉽게 알게 될테니까요. 오히려 젊은 대공과 좀 더 친분을 다지고자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순식간에 이야기의 흐름이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샤르세인 공은 당혹스러워하며 다시 레가야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넣으려 했지만 더이상 그의 이야기를 받아주는 대공은 없었다.

아르타야, 미르다야, 그리고 레가야의 삼개국은 즉위식에서 황제가 보인 특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점점 부풀려갔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저울질을 하던 휄카야마저 이내 저울추를 따라 움직였다.

휄카야의 레이리게 아일레 팔라비스마저 한 마디씩 내뱉기 시작하자 대화에서 배제된 것은 자리에 없는 비사야와, 샤르세인의 미라야 뿐이었다.

용병과 암살자들의 나라 아르타야.

레가야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남부에서 남해와 맞닿는 위치에 있지만, 레가야의 영향력에 밀려 해양세력은 없다고 해도 좋을만큼 볼품없다.

더불어 제국 동남부의 국경을 가르는 알게이드 산맥은 이미 자원이 고갈되버린, 그저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밖에 남지 않아 결국 자구책으로 그림자에 파고드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다.

때문에 아르타야인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억누르지 못할 불길이 잠들어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미친 불꽃이 되어 모든 것을 불태울수도, 강력한 순풍이 되어 제국이라는 배를 움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느냐다.

르비아는 이미 미라야에 대한 대책으로 미르다야와 아르타야를 끌어들였다.

마법에 비교적 취약한 기사들의 땅 미르다야에 미라야에 준하는 강력한 마법적 지원을 약속하고, 몇 대 전의 항쟁 이후 한 세기가 넘도록 갇혀있는 아르타야에는 몇몇 무역항을 개방해주는 것으로 레가야의 무역업에 어느정도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비사야?

무역강국 레가야의 도움이 없다면, 비사야의 그 마르지 않던 풍족함도 서서히 마르게 되어있다.

단순히 세력비만 보아도 일대 삼.

여기에 휄카야는 미르다야와의 친분을, 비사야는 레가야와의 오랜 근린관계를 가진 곳. 실질적으로 미라야만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미라야에서 제공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결국 마법적인 지원 뿐이고, 그마저도 레가야가 지분을 차지해버리면 마찰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국 미라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흔들리는 휄카야에 매달리는 것 정도가 전부다.

'자아, 어떻게 할 생각이냐, 샤르세인. 남은 패도 없는 주제에 계속 머리를 들이밀어 볼테냐?'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휄카야를 제외하면, 이제와서 미라야가 손을 써볼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미끼를 깔아둔 것일까. 아니, 대체 어떻게 그 미끼를 던지고, 물게 만들었단 말인가.

고작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배경도 없었던 르비아는 어느새 제국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샤르세인 대공은 부들부들 떠는 손을 슬며시 숨기며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눌렀다.

패자는 승자의 앞에서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기 전에.

패자에 대한 관용은 잠꼬대에서도 찾지 말라.

제국의 대공가 사이에서 전해오는 오랜 격언이며 동시에 삶의 지침이었다.

'그래, 이제 첫 발은 내딛었다.'

르비아는 자연스레 몸을 돌리며 남쪽을 바라보았다.

옅은 바람이 불어오며 가볍게 회장을 쓸어갔다. 바람에 흩날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새삼스레 매만진다.

'지금부터는 긴 기다림이 있을테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끝을 넘어 와주기를 기다리겠다······. 피의 복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아련한 신파극의 끝이 될 것인지, 기대 속에서 기다리지. 자, 여기까지 와보거라, 이스티엘.'




* * *



공화국의 서남부는 피앙투스의 다른 지역과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다도해가 자리잡아 수십, 수백 개의 바위섬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공화국 서남부 지역은 복잡한 다도해 지형의 특성상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곳이 군데군데 있는 곳이었다.

자연히 바위섬들 중 커다란 몇 개의 섬에 해적이나 도망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일종의 범죄 지구를 만들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다보니 겨우 한두 개의 섬에서 시작된 세력은 어느새 공화국 자체의 행정력과 맞먹을 수준까지 성장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서북부의 중심 도시인 가이신시(市)는 그야말로 자유와 방종의 도시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검은 조직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대규모 시장이 조성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는데, 남해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양의 재화를 공화국에 바쳐 '사략선'으로 인정받던 해적들의 전통 덕에 이루어진 일종의 공생관계의 결과물이었다.

일일 거래량만 해도 2천만 칼브람.

농담삼아 도시국가 하나라도 세워봄직하지 않느냐는 말이 괜히 도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도(商都)라고까지 불리는 가이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질구레한 범죄들이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말썽도 많은 법이지만 이 자유의 도시에서는 '범죄 또한 자유'라는 불문율 하에 최소한의 치안 유지만을 행하고 있다.

덕분에 상해를 입히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절도 행위는 숨쉬는 듯 일어나고 있었다.

만일 소매치기를 당한다면 하루 뒤 앞사람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찾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 기이한 곳이 바로 가이신이다.

그러나 이런 막돼먹은 거리에서도 안전한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다.

대부분은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가까이 하기에 꺼려지는 사람들 뿐이라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가이신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는 한 구둣방이 있었다.

멜딘이라는 노파 혼자서 운영하는 구둣방은 유행에도 뒤지고, 또 워낙 외진 곳에 있다보니 대부분은 모르고 지나가는 망해가는 가게였다.

그러나 그런 멜딘의 구둣방을 찾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막 골목으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굴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큼지막한 후드를 눌러쓰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두운 색의 로브로 몸을 감싸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가녀린 인상을 주는 작은 체구만은 눈에 밟혔다.

잠시 골목 어귀에서 주위를 살피던 그는 조금 잰걸음으로 낡아빠진 문을 밀었다.

낡은 문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

어둑어둑한 가게 안은 몇 개의 램프를 켜둔 덕에 발그스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쩌다가 헤메어 들어온 사람들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신발들이 그 힘없는 빛에 초라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가게 주인은 나름대로의 장인의식은 있는지, 여전히 가죽을 자르고 꿰매며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가게 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겨우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다.

잿빛으로 세어버린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맨 노파는 가게로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반도 남지 않은 치아 때문에 오히려 조금은 무서워 보인다.

"여. 제법 오래간만이구만. 그간 잘 살았나?"

"보시는 대로."

두터운 후드 아래에서 들린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껏해야 열대여섯이나 먹었음직한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 나이또래에 어울릴 만한 발랄함이나 사랑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기라고는 모르는 것처럼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갑다. 가까이 다가오면 베어버릴 듯 날을 세운 목소리였다.

마치 누구도 곁에 두지 않으려는 것처럼 잔뜩 가시를 세운 그 분위기 덕에, 그 여린 목소리는 오히려 더 특이하게만 느껴졌다.

멜딘이 유난히 저 소녀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멜딘은 조그만 의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 내놓았다.

그러나 찾아온 소녀는 의자에 앉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한동안 안보이던데, 정말 무슨 일 없었나?"

"굳이 말할 이유라도?"

"쌀쌀맞기는. 미운 정도 정인게야. 이 바닥에서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뭐, 좋아. 오늘은 뭘 가지고 왔는지 보기나 하자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브 안쪽에서 몇 개의 가죽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하나 하나가 크기에 비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내려놓는 주머니에는 무언가 단단하고 무거운 것이 들어있는지, 내려놓는 순간 달각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소녀가 주머니들을 내려놓고 물러나자 멜딘은 느긋한 손놀림으로 가죽손질에 쓰는 칼을 꺼냈다. 그리고 주둥이를 묶은 끈을 잘라내고 주머니 안의 물건들을 조그만 협탁에 쏟아냈다.

짐승의 사체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한가득 쏟아졌다.

뿔이나 이빨, 한 뼘 정도 되는 뼛조각, 무슨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몇 장의 가죽 등, 구둣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도 종종 섞여있었다.

비취색을 띄는 손바닥만한 비늘 두어 장을 살피던 멜딘이 흡족한 얼굴로 소녀를 돌아보았다.

"호오, 이번에도 단단히 한 몫 뜯어가려고 작정을 해 왔군? 흠집 있는 것도 거의 없고, 다들 상태가 좋아. 게다가······."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물건 중 조금 독특한 물건이 있었다.

탁한 붉은빛의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이었다.

멜딘은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병 자체는 멜딘이 지난 번에 소녀에게 팔았던 물건이다.

천연수정을 가공해 만든 특별한 병은 안에 담긴 물건이 산패하는 것을 억제해주는 주문이 걸려있었다.

물론 가격은 제법 비싼 편이지만, 안에 든 물건은 그럴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피인가? 용케도 가져왔군. 회복이나 부활속성 맞겠지?"

"얼마나 줄거죠?"

"어디, 한 번 제대로 감정을 해 봐야겠지. 페오니언."

멜딘의 손바닥에서 새빨간 빛이 새어나왔다.

생령이 품은 마력이었다.

선홍색의 마력이 빠르게 선을 그리며 눈동자의 형상을 그려냈다.

페오니언은 탐색계 생령 중에서도 다소 드문, 사물이나 마력의 성질을 읽어낼 수 있는 생령이었다.

멜딘이 손을 탁자 위로 가져가자 몇 번 깜빡이던 눈동자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녀가 가져왔던 마령들의 사체 위로 조그마한 눈동자의 낙인이 번져갔다.

"사백 칼브람 정도 쳐주면 되겠나?"

소녀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주머니에 들어있던 심장석까지 합치면 약 오백 칼브람.

멜딘은 천천히 가게 뒤쪽으로 가 새 주머니를 꺼내고, 그 안에 금화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올 때마다 한 재산 챙겨가는구만, 그래. 그 정도 벌었으면 한동안 쉬어도 되잖겠어?"

"······무슨말이죠, 그거."

멜딘은 피가 든 유리병을 흘끗 가리켰다.

"아마 저 녀석 때문에 한 달 정도 앓아누운 거겠지? 솜씨 좋은거야 잘 알지만 그 정도로 몸을 혹사키셔야 되겠나 싶어서. 아아, 물론 나도 시시한 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다가 너, 확실하게 죽는다."

"그래서요? 당신이 참견할 일은 아닐텐데요?"

역시 지나칠 정도로 날카롭다.

멜딘은 묵직하게 채워진 주머니를 꽉 묶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피차 손해볼 정도로 열심히 뛰지는 말라는거지. 안 그래?"

"그런 참견, 필요 없어요."

매몰찬 손이 멜딘의 손에서 주머니를 채갔다. 그리고 볼일을 마친 이상 더이상 있을 필요는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문을 나서버렸다.

그러나 기세좋게 문을 나선 소녀는 채 몇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벽에 기대섰다.

목 아래로부터 끓어오르는 신음을 애써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신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왔다.

이를 악물로 통증을 참던 중 코 안쪽에서 뭔가 흘러내린다 싶었다.

툭툭 떨어진 코피가 가슴 언저리를 붉게 물들였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조용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겨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묵묵히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한참을 돌아, 언제나 몸을 누이는 여관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몇 시간이 넘게 걸렸다.

소녀는 저녁조차 거른 채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두터운 후드를 내팽개치듯 벗어버리자 조금 숨통이 트인다.

땀으로 흠뻑 젖어 이마와 목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넘기자 그제서야 숨겨져있던 새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통과 피로로 얼룩진데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얼음처럼 서늘하지만 섬세한 얼굴의 선이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 더해 보기드문 자색 눈동자로 인해 더더욱 눈에띄는 얼굴이었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 인상은 분명 불안하고 위태로운 뒷골목의 삶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로 열 여섯이 된 소녀, 이스티엘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티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멜딘의 말대로, 이대로 뭔가에 쫒기듯이 사냥을 반복할 때마자 확실한 죽음이 가까워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초췌하고 생기없는 눈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하얗게 타버린 입술을 보고 있자니 뭐라도 먹어두는게 좋겠지만, 더이상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진 티엘은 힘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마령을 잡아 심장석이나 사체 일부를 파는 것은, 아첼과 함께 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티엘 자신이 그 위험도를 더더욱 올리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

지나칠 정도로 마령을 '죽이는' 것에 빠져, 후퇴해야 할 때를 놓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파멸적으로 사냥에 나설 때를 제외한 티엘은 거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지냈다.

오로지 마령을 죽이는 동안만 삶의 실감을 느낀다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첼을 죽인 것이 마령이라서?

이미 그 마령은 소멸한지 오래 전인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그 것에 매달리는 것일까?

언제나 티엘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가슴에 맺힌 무언가가, 너무나 답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티엘을 덮쳤다.

가늘게 떨리는 손, 바짝 말라들어가는 입, 어두운 방의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바라보는 듯한 기척.

생각보다 먼저 반응한 두 손이 순식간에 시위를 걸고 당겨 하얗게 백열하는 아스트라를 맺었다.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음산하게 비웃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림자는 환영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티엘은 어느새 자신의 호흡이 전력으로 달음박질이라도 한 듯 거칠어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아스트라를 해제하려 했다.

순간 갑작스레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황급히 아스트라를 풀며 세면대로 달려간 티엘은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한 뒤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뱃속은 텅 비어있는데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직도 사로잡혀있어.'

티엘은 얼굴을 감싸쥐며 긴 탄식을 토했다.

아첼이 죽은 뒤 몇 달 간, 시도 때도없이 나타나는 환각 때문에 그야말로 미치기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

아첼을 찌른 그 마령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미소로 음산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탈진할 때까지 허공에 아스트라를 날린 일도 있었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며 아무 때나 환각을 보는 일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도 심신이 크게 지쳐있을 때는 간혹 헛것을 보는 일이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마법에 익숙해졌고, 실제로 마령들을 죽여 돈을 벌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과거의 망령 앞에서만큼은 그 때처럼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만일까. 어둠을 무서워하게 된 것이.

문득 티엘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섯살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미노스티야는 마력을 깨우치지 못하는 티엘에게 넌덜머리를 내다, 어느 날 갑자기 빛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들어오지 않는 완전한 암실에 그녀를 집어진 적이 있었다.

사흘.

어둠 속에 갇혀있던 시간은, 무려 사흘이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잔혹하게도 환각주문으로 촉각까지 단절시켜버린 탓에, 자신이 바닥에 쓰러진건지 아니면 벽에 뺨을 기대고 있는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티엘은 끝없이 공허한 어둠속을 헤메며,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사흘째 밤, 뒤늦게 이야기를 들은 아첼이 큰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한 채 문을 날려버리고 구출하러 올 때까지.

훗날 알기로는 그 암실에 마력을 채워넣어 생령을 끌어들이고, 오감을 차단해 예민해진 육감으로 그 생령들을 느끼라는 취지였다고 했다.

그러나 여섯살짜리 아이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일이라는 것은, 미노스티야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그 탓에 티엘은 한동안 그림자를 밟는 것만으로도 구토해버릴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완전히 헤어나오기까지는 거의 이 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어둠은 두려울 것도 없었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던 순진한 아이가 원초적으로 느낀 공포였을 뿐이니.

지금이라면, 그 암실에 다시 갇히더라도 좋으니 아첼이 살아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니까.

목 아래까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힘겹게 밀어낸 티엘은 식은땀을 닦으며 손등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짚었다.

'억지로라도······, 쉬어야 할텐데······.'

죽기 싫다면 최소한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멜딘에게 넘긴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사흘 정도를 밤낮없이 싸웠다.

마력도, 체력도 이미 한계에 달한데다 크고작은 부상들도 돌봐야했다.

또 마령과 싸우는 도중에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그러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해도 티엘이 쓸 수 있는 주문은 고작해야 긁힌 정도의 상처를 낫게하는 것 뿐이었다.

물로 얼굴을 닦아낸 티엘은 힘없는 손으로 몇 안되는 짐을 뒤졌다.

상처를 치료하고, 악몽 없이 잠들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적거려도 빈 약병만 몇 개 보일 뿐, 남아있는 약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오늘 아침에 상처에 바른 약이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티엘은 침울하게 신음을 흘렸다.

신경질이 난 티엘은 빈 약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신경이 지나치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진정하자······.'

이 이상 체력이든 감정이든 소모해봐야 좋을 일은 없다.

목에 걸고있던 목걸이를 두 손으로 감싸쥔 티엘은 깍지낀 손을 이마에 대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티엘에게 어둠과 정적이란 편안한 휴식의 장소라기보다는 싫은 기억을 돌이키는 자극에 가까웠다.

결국 어둠을 견디다 못한 티엘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빛이 필요했다.

속에서 안받더라도 일단 배를 채우고, 밝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안정을 되찾는게 좋다.

나간 김에 약도 함께 사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티엘은 벗어던졌던 두꺼운 후드를 다시 뒤집어쓴 뒤 식당으로 내려갔다.


한창 사람들이 붐빌 시간이다보니 여관 주인과 급사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대낮의 거리보다 더 활기찬 느낌이었다.

조금, 아니, 상당히, 불편했다.

"아앗, 죄송해요! 주문하실래요? 오늘 쿠키 맛있게 구워졌는데 한번 드셔보실래요?"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잠시 망설이던 티엘에게 급사가 다가왔다.

이 여관의 급사는 티엘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였다.

말은 높이면서도 나이가 엇비슷할 티엘에게 조금쯤 친근한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싼 걸로."

하지만 티엘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쌀쌀맞은 태도로 선을 그었다.

오히려 어머니인 여관 주인은 티엘에게 쭈뼛거리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자면, 딸인 급사소녀도 상당히 별난 성격이었다.

소녀는 약간 실망한 듯한 얼굴로도 쾌활하게 대답하며 주방 쪽으로 달려들어갔다.

솔직히 지나치게 밝아서 조금 상대하기가 부담스럽다.

한숨을 내쉰 티엘은 조용히 자리를 옮겨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았다.

조명도 잘 닿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빈 술통 두어 개가 굴러다니는지라 제법 어두운 자리였지만, 밝은 자리에 앉아 어둠을 직시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등지고 앉는 편이 조금 더 마음이 편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환각을 직시한다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으니.

"푸하하하하! 그거 정말?"

"얘는, 그게 웃을 일이니?"

"뭐 어때? 너 좋아하는 술 한잔이 기다리는데!"

근처 테이블에서 떠들썩한 대화가 오갔다.

네 명 정도 되는 일행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며 기세좋게 떠들고 있었다.

'조금······, 부럽다.'

마지막으로 웃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탁자만 바라보고 있던 티엘은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자 일부러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즐거워 보이는 그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또다시 떠나버릴까봐 가까이 다가설 용기도 없는 주제에, 외로움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차라리 정말 인형이라도 돼버린다면 외로움따윈 몰라도 좋을텐데.

수프와 빵의 맛조차 끈적하게 달라붙는 자조에 씁쓸해져갔다.

그 때 문득 주의를 끄는 단어가 들려왔다.

마령.

초점없이 풀려있던 티엘의 눈매가 꺼져가던 불씨처럼 파랗게 달아올랐다.

"요새 카틴 강가에서 마령이 종종 나온다던데 어떻게 할래요?"

"그 비슷한 소리 듣고 접때 성 밖 들판에 갔다가 허탕친거 잊었어?"

"허탕쳤다기보단 누가 먼저 쓸고간 거 같던데······."

달칵.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접시가 한 걸음 물러났다.

조금 전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티엘이었다.

스스로를 미끼삼아, 마령이 나타나기 좋은 장소에 일부러 마력을 흘려보내고, 그에 이끌려나온 마령들을 닥치는대로 쓰러뜨리길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제멋대로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티엘은 오히려 그 상황을 즐겼다.

방금처럼, 뜻하지 않게 마령들이 몰리는 장소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성 밖의 들판, 정확히는 아간티아 농장 주변을 한바탕 뒤엎은 것은 약 두 달 정도 전의 일이었다.

한 번 마령들을 쓸어버린 뒤에는 한동안 마령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그러나 대화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카틴 강가 쪽은 확실하게 마령들이 출몰하는 듯 했다.

카틴 강변에서 마령을 사냥한지는 약 반 년 정도 된 듯 했다.

이쯤이면 지맥에 마력이 회복될 때도 되었다.

이렇게 소문을 통해 마령들이 나타날 정도로 대지의 마력이 회복되었다고 판단되면 남은 것은 직접 확인해야했다.

실제로 마력이 모여들었다면 사냥······, 아니, 학살의 시작이다.

어둠 속에서 떨던 소녀는 더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다는 것조차 가뿐히 잊어버린 티엘은 조용히 활과 별의 서를 챙겨들고 어두운 밤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티엘은 얼굴은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어느새 누군가가 따라붙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번엔 꼬리가 밟혔네.'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길을 걷는 일반인이지만, 뒷골목에서 살며 자기도 모르게 길러진 눈에는 어느 정도 어설픈 자세가 들어와버린다.

벌써 방향을 세 번을 꺾었지만 줄기차게 쫓아오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

뒷골목에는 크게 몇 개의 패거리가 있고, 자기들 나름대로 세력다툼을 하는 편이다.

물론 가이신에 뿌리내린 '조직'들의 말단에 불과한것이 '패거리'지만, 알게모르게 영향력이 있다보니 서로 좋은 말을 가져가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것도 흔해빠진 일이었다.

문제는 티엘처럼 패거리에 속하지 않으려는 영업자들이다.

대개는 패거리에 드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거절하지는 않지만, 혹시 소속을 거부한다면 텃세 때문에 제대로 발 붙이기가 힘들다.

물론 티엘은 후자에 속하면서도 오히려 패거리들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이기 때문에 한번 뒤를 밟히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물고 늘어져 소속을 청해오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방향을 꺾는 순간, 미행자의 옷깃 안쪽에 붙인 검은 천조각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검은 고양이'······? 한 달 전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더니, 이번엔 운이 없네. 어쩔 수 없나?'

발걸음이 점차 사람이 없는 골목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목을 피한다는 것을 눈치챈 상대 역시 더이상 모습을 숨기지 않은 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미행자가 거리를 좁히려는 순간 티엘쪽이 몇 배는 빠르게 걸음을 내딛어 오히려 거리를 벌렸다.

티엘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가까스로 원래의 거리를 회복하지만, 그 이상 다가온다면 지체없이 다시 거리가 벌어진다.

얼굴조차 마주보지 않는 눈치 싸움이 이어지던 와중, 점차 두 사람이 걷던 골목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후미진 골목을 앞장서 걷던 티엘은 결국 참다 못해 뒤돌아섰다.


작가의말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3년 후]로군요. 보시다시피 티엘은 트라우마를 전혀 못이겨낸 상태입니다(...)
예전에 holmes 스트레스 척도를 한 번 적용해본 적이 있는데, 성인 기준으로 치면

 (사회적 의미에서 보면) 감금- 63
 일가 친척 혹은 가족의 사망(아첼, 시녀장 메리온 2명. 미노스티야는 제외) - 63*2
 본인의 부상 또는 질병 53
 해고(가정에서 본의아니게 쫓겨남) 47
 사업의 재적응(아첼 사후 마령사냥 난이도 증가) 39
 재정적인 변화 38
 친한 친구의 사망(비교적 가까웠던 가신 카릭스. 아첼은 가족으로 여기니 제외)37
 채무(여관에 장기투숙하고 있는만큼 지속적으로 지출 강제)31
 일의 책임상 변화 29
 거주환경 변화 25
 거주지 변화 20
 사회활동 변화 18
 수면습관 변화(잦은 악몽으로 인한 수면장애) 16
 가벼운 법률 위반(불법으로 흑마법 사용) 11

 합계하면 무려 557이라는 미친 수준. 300이상이면 정신질환 가능성이 높아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한 수준인데 상담은 커녕 이 상태로 3년간 묵혔으니 제정신 유지하고 있는게 용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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