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조회수 :
19,941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01 19:43
조회
525
추천
17
글자
27쪽

1장 - 초혼招魂(2)

DUMMY

'흑마법사라는 직업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고달픈 직종이라니까.'

권호를 받은 마법사,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는 손에 들고있던 술병을 한모금 비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국의 병사들을 감시하는 입장에서 태연스레 술병을 비우는 모습은 지탄받아 마땅할테지만, 적어도 아첼에게 그것을 지적할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영마사(흑마법사)는 그녀의 말처럼 상당히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일단 계약을 맺은 생령의 마력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거나, 생령 자체를 불러내어 사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이긴 하다.

그러나 일단 레가야와 피앙투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는 글러먹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흑마법사로서의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생령과의 경계가 얇아져 마령으로 전락해버릴 가능성도 높아지니까.


고위의 생령들은 본래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녀석들이고, 따라서 한순간의 실수나,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해버린다면 그 다음은 보장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흑마법사를 두려워한다.

언제, 무슨 이유로 재앙이 될 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영마사나 생령들조차도 자신들이 언제 그렇게 돼버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의 의지도 없이 재앙으로 변해버린다니, 영마사라는 존재만큼 불안정한게 또 뭐가 있을까······.

아첼은 다시 한모금 술을 들이켰다. 등에 새겨진 각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마력이 상당히 많이 떠돌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생령들이 숨을 죽이며 긴장하고 있는 듯 했다.

"어이, 적당히들 해. 너희들도 나도 서로 먹고살자고 이 짓거리 하는거잖아. 그쪽에서만 너무 좋아 날뛰면 내쪽에서는 부담된다고."

아첼은 쓰게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해도, 신언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마력은 생령과 흑마법사를 흥분시킨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목덜미에 닿은 듯한 감각은 쉽게 익숙해지기도 어렵고, 익숙해져서도 안된다.

술병 바닥에 조금 남아있던 술을 마저 비운 아첼은 빈 병을 손에서 몇번 굴리다 멀찍이 던져버렸다.

쨍그랑! 벽에 부딪혀 깨진 병 조각이 횃불의 빛을 받아 기괴한 빛으로 빛났다.

그 모양이 어쩐지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처럼 보였던 아첼은 가볍게 마력을 일으켜 바람을 흘려보냈다.

살짝 일어난 흙먼지가 병 조각을 뒤덮으며 흉흉한 눈빛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온 어느 병사가 병 조각을 밟았다.

옅게 덮였던 흙먼지가 벗겨지며 우득, 하는 듣기싫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다가온 병사의 분위기는, 그런 미미한 불안감을 덮을 만큼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첼레란도님. 미라야 진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그게 무슨소리에요. 마도병단은 아직 움직이질 않았는데?"

"그게······."

병사가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아첼은 각인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고 왕성쪽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주위를 휩쓸며 대기를 울렸다. 아첼이 경계하고 있던 미라야 진지가 아닌, 등 뒤에서부터의 움직임이었다.

"······제길. 조심해요!"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급격한 마력의 역류가 피부를 간질거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 중 하나, 내부에서부터의 공격이다.

등에 새겨진 각인이 순식간에 활성화되며 옷 아래로 희미한 빛을 내뱉었다. 아첼은 허리에 걸려있던 활을 재빨리 뽑아들었다.

"경비대장에게 보고 해요! 빌어먹을 항쟁이라고!"

"예, 예!"

시위를 풀어놓은 채 부려놓았던 대궁이 거짓말처럼 반대로 꺾이더니 순식간에 시위가 걸렸다.

순간적인 근력 강화로 손쉽게 활시위를 연결한 아첼은 그대로 빈 시위를 당겼다.

빈 활을 튕기는 것은 활에 괜히 부담을 안기는,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시위를 당긴 순간, 허공에서 검은 빛이 수렴하며 검은 화살로 엮여 비어있던 시위에 얌전히 몸을 내맡겼다.

겨냥하는 데 시간은 거의 들지 않는다.

가늘게 떨리던 화살이 서슴없이 하늘을 갈랐다. 영격술(靈擊術)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위 술식, 아스트라(Astra;靈弓)였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효시(嚆矢)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밤하늘을 등에 업은 검은 화살이 표적을 꿰뚫었다.

순간 아스트라를 이루던 마력은 그대로 붕궤, 폭발을 일으키며 단숨에 막대한 마력의 안개로 산화한다.

아첼은 허공에 뿌려지는 마력을 되짚었다. 자신의 마력 외에 이질적인 마력······.

마법이라는 일탈을 일으키는 주제에 지나칠 정도로 얌전한 마력이다.

흑마법사의 마력이라면 보다 거칠고 빠르게 흩어진다. 즉, 지금 아첼의 공격을 맞받아 친 것은 '신언사'의 마력이다.

"빌어먹을······. 대체 약혼식까지 하면서 뭣 때문에 항쟁을 거는거야. 대놓고 엿이나 먹이겠다는거야, 뭐야!"

아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연달아 시위를 당겼다. 치명적인 힘을 품은 아스트라가 미라야 병사들의 숙소 위로 빗발쳤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첼은 흑마법의 나라 레가야에서 차석 궁정마법사 자리를 따낼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다. 어줍잖게 머릿수만 많은 백마법사 몇 명을 역으로 눌러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게다가 아첼이 적진의 기세를 묶어둔 동안 레가야 측에서도 두 손 놓고 놀고 있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의 마력을 품은 화살이나 마탄이 아첼의 아스트라를 따라 미라야 진지에 펼쳐진 방어결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라야 쪽에서도 간혹 대응사격으로 몇몇 주문들이 날아들었지만 반격 자체는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미라야의 진채를 유심히 살피던 아첼은 어느 순간부터 진지 안쪽의 인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눈치채고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지······. 익시온."

아첼은 조용히 계약한 생령중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익시온, 벼락의 속성을 지닌 생령의 이름을 부르자 아첼의 마력이 생령에게로 흘러들어가고, 반대로 생령은 자신이 품고 있던 마력을 아첼에게 건넨다.

새로운 마력이 손끝에서 빠르게 응집되며 만들어낸 화살은 검은색이 아닌 꿈틀거리는 은백색이었다.

그 속성은 힘을 빌린 생령의 마력과 같은 뇌격. 마치 뇌신이라도 된 듯, 격렬하게 방전하는 번개의 화살을 쥔 아첼은 다시 또다른 생령의 이름을 속삭였다.

"천 개의 방패, 세워라. 켈리아."

이번에는 자색의 마력이 아첼을 중심으로 퍼졌다. 스스로 가지를 치며 이리저리 뻗어가던 자색의 마력은 원형의 마법진을 이룬 뒤 성장을 멈췄다.

대신 마법진의 원주를 따라 엷은 자색의 반구가 펼쳐져 마력방패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방어진을 구축하는 동안, 몇개의 화염구가 아첼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미라야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내성 방향이다.

'이 빌어먹을 땅에서는 하루도 마음놓을 수가 없는건가? 제발 무사해야 돼, 티엘.'

"그 애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쳤다간 봐. 너희들 뼛조각 하나 안남길테니까!"

악에 받친 고함소리와 함께 선명한 백색의 번개가 밤하늘을 갈랐다.

익시온의 마력을 머금은 아스트라는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먹잇감을 노렸다. 미라야의 마법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애써본들, 아스트라를 막아냈을 때는 다소나마 피해를 입은 후일 것이다.

아스트라 자체도 다루는 자가 적지만, 아첼이 사용하는 아스트라는 그 얼마 안되는 영격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조금 다른 독자적인 아스트라다.

단순한 마탄과는 달리 치밀한 술식으로 짜여져 있어 단순히 마탄으로 영격하는 것으로는 힘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 실은 마력은 특별히 벼락의 속성. 어줍잖게 방패 따위로 막으려 들었다간 순식간에 감전당할 터였다.


하지만 상황은 아첼의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잠깐······. 지금 대체······?"

미라야의 마법사들은 아군을 보호하거나 아스트라를 파해하는 대신 강력한 범위공격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양패구상으로 들어올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첼은 기겁하며 켈리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자색의 마력방패가 강화된 직후, 아첼을 중심으로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첼은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에서 희푸른 빛이 얼비치자 재빠르게 검지를 세워 지면에 미끄러뜨렸다.

그녀의 손을 따라 희푸른 선이 그어지며 마법의 문자, 이사드가 바닥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라피온! 다들 정신차리고 대응사격해!"

한순간 몰아친 광풍이 밀집해있던 레가야의 병사들을 밀쳐 흩어지게 만들었다.

순간 밤하늘을 가로지른 화염의 창이 아첼에게 직격으로 꽂혔다. 집채만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뜨거운 열풍이 주위를 뿌리채 뒤흔들었다.

그러나 마력을 살라먹는 미친 불꽃은 순식간에 갈갈이 찢겨나갔다.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아첼은 자신의 손 안에서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폭풍을 다시금 하나의 화살로 바꾸어 어느 이름모를 미라야 병사를 꿰뚫었다.

평범한 화살처럼 표적을 꿰뚫고, 뒤이어 그 궤적을 따라 폭풍이 다시 해방된다. 불운한 희생자들의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하지만 더 빠르게 쓰러져가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레가야 쪽이었다.

어느 정도 실력있는 마법사들은 반 가량이 연회장을 지키기 위해 불려나간데 비해, 미라야의 신언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진지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아첼이 지나칠 선전한 것도 함정이었다.

일부러 마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버림패를 둔 것일 뿐. 덕분에 저 쪽은 마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마법사들이 느긋하게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로 광범위 주문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점차 일반 병사들의 수가 의미를 잃어갔다.

"켈리아! 환상의 벽, 불락의 요새를 펼쳐라!"

아첼의 외침과 함께 켈리아의 마력방패가 전력으로 전개되었다.

마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지만, 대신 마법으로도 쉽게 파손되지 않은 켈리아의 마력장벽이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났다.

이것으로 일반 병사들도 지원사격을 이어갈 수 있다. 병사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살에는 모두 주문이 부여되어있었다.

적의 마법으로부터 안전할 수만 있다면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막 무너져가려던 전선이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 차례 숨을 돌린 아첼은 남은 마력을 신중히 계산하며 또다른 생령의 이름을 외쳤다.

"이프라이엘!"

아첼의 생령중 가장 강력한 계약자가 눈을 떴다.

기사급의 생령이니 그 강함만큼이나 부릴때의 반동 역시 무시할 수 없었지만 전장에서의 활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매혹의 밤안개' 아첼레란도에게 그 권호를 가져다 준 이프라이엘의 속성은 '환영(幻影)의 불꽃'과 '맹독의 숨결'.

그의 마력은 환각과 중독을 일으켜, 대규모의 지옥도를 펼친다. 그런 이프라이엘의 마력을 담은 화살은 단 한 발만으로도 전장의 판도를 뒤바꾸는 전략병기다.

다시 활에 걸린 마력의 화살은 검은 색. 하지만 아첼 자신의 마력으로만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 표면에 언뜻언뜻 녹색의 흐름이 비쳐 보였다.

그러나 아첼은 화살을 쏘아낼 수 없었다.

불현듯 자신의 화살이 거칠게 방전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유모를 마력의 폭주는 지극히 위험하다. 아첼은 이를 악물며 다급히 아스트라를 구성하던 마력을 다시 제어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라야의 군세를 잠재우지 못하면 레가야는 치명타를 입게된다. 레가야에 큰 애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녀는 레가야 소속의 마법사다.

그 책임을 위해 위험을 각오하고 최강의 아스트라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쉽게 파해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미라야에 있다면?

이미 싸움은 진 것이나 다름없다. 최후의 한 수를 읽혀버린 도박사는 패배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러나 여전히 의혹은 남는다.

'어째서?'

조금 전 쏘아진 익시온의 아스트라는 아직도 조금씩 꾸준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아스트라를 막을 수 있다면 어째서 먼젓번의 아스트라는 아직도 내버려 두는가?

"그거야 간단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체력은 아껴두는게, 좀 더 위험한 일을 막을 수 있을테니까."

그 순간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아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들려왔다.

늙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익숙했고, 절대로 이 곳에서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망을 가져오는 목소리였다.

빠드득, 하며 음산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아첼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채 천천히 돌아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싱긋 웃었다.

"그래······,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이건가요. 최악의 장소에서 최악의 만남이군요."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말일세."

산책중에 마주쳤다는 듯 평화로운 어조였지만, 그의 주위로 흐르는 마력은 그 잔잔한 표정과는 반대로 격렬하게 들끓으며 웅성이고 있었다.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마력이 거칠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티엘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미리 드레스 안쪽으로 몰래 숨겨뒀던 평상복을 입은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숲은 생각보다 깊었다. 아마 어느 구석에는 수백년간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곳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숲에 사는 생명체들은 만나기 어려웠다. 그 흔한 새소리 하나,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기이한 숲.

티엘은 그것이 생령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가야의 몇몇 숲은 생령들의 보금자리였다. 이제 막 태어난 생령, 혹은 갑작스레 주인을 잃은 생령들이 흔히 숲에 몸을 숨기고 안식을 취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영들은, 인간을 습격할 힘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새삼스레 걱정할 필요 같은 것은, 그다지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끌어당기던 부름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발코니 근처의 나무를 타고 내려오느라 팔다리에 상처가 난 것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티엘은 자신을 부르는 존재를 찾아 헤맸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조난당한 사람이 마실 물이 없어 바닷물을 마셔버려 미칠듯이 심해지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계속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한걸음 가까워질때마다 밀려오는 압박감에 더욱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한 걸음이라도 멈추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아······."

얼마나 헤맨 것일까. 이미 시간조차 잊었던 티엘은 갑자기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단 한걸음. 그 한걸음만에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호수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런 호수가 란에 있었을리가 없다. 그 호수의 넓이는 어림짐작으로도 란 시가지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다면 일종의 이공간(異空間)이나 결계(結界), 혹은 이계(異界)일 것이다.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고, 차분한 기분이다.

천천히 호수가로 다가간 티엘은 투명한 수면에 비치는 달빛에 넋을 잃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떨어뜨린 거울처럼 보였다.

까마득히 펼쳐진 호수는 수없이 흩어져있는 별들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티엘은 가만히 손을 내려 호수에 담갔다. 고요한 거울이 일렁이며 밤하늘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티엘은 바로 이 호수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란에서 이런 호수를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이스티엘만이 무언가의 인도로 이 호수에 당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수에 손을 담그는 순간 가슴을 옭죄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호수가 무엇때문에 자신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말없이 고요한 이 호수는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일까.

"날······, 불렀어요······?"

소녀의 질문에 수면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호수가, 이 풍경이 자신을 불렀다면, 이 질문에 대답 또한 돌아오리라.

막연한 생각만으로 던진 물음에, 잔잔하던 호수 위로 가벼운 물결이 일어났다. 작은 파도처럼 다가온 물결이 티엘의 손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부름을 들은 이는, 그대인가.

순간 메아리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호수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듯한 속삭임은 묘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어딘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잠시 티엘을 살펴보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다시 티엘의 손을 간지럽혔다.

-어째서인가······ 그 어린 나이에 어째서 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가. 그 작은 몸으로 이 곳을 찾아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갓 10여년을 산 그대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짐일터. 그대가 과연,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누구죠? 어디에서 말하는 거에요?"

-······이 곳, 이 환영의 세계가 곧 나다.

"환영의 세계······? 이 호수? 이 호수랑 숲을 말하는거야?"

-그렇다, 설원의 새벽이여.

티엘은 조금씩 더듬으며 목소리를 향해 외쳤다. 모호하게 울리던 목소리는 점차 선명해지며 티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티엘은 자신을 부르는 그 칭호에 적잖게 놀랐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순한 별명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사로서 가지는 두 번째 이름, 권호.

하지만 권호는 임의로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인조차 나타나지 않은, 아니, 아직까지 마력조차 깨우치지 못한 티엘이 권호를 가지고 있을리는 없다.

"그 이름, 날 부른 거에요······? 하지만······."

티엘은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분명한 목소리로 재차 확인하듯 호수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호수는 그런 티엘의 부정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안타깝구나.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이라면······.

갑자기 어두운 호수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수 중앙에서부터 티엘이 있는 방향으로 호수가 얼어붙고 있었다.

아니, 얼어붙는다는 말은 적절치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얼음의 길이 자라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얼어붙는 호수는 그녀를 노리는 칼날처럼 보였다.

티엘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자리에 있었다간 순식간에 저 얼음에 먹혀버릴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망쳐야 할까?

설원의 새벽이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목소리는 티엘이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설원의 새벽이여. 나는 너를 해칠 수 없고, 해칠 마음도 없다. 그저 길을 열어주려고 한 것이다.

그 목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티엘보다 뒤쪽의 나무들까지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티엘 자신은 아무런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서늘한 기분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

서리가 내릴 정도로 싸늘한 바람인데도, 마치 무더운 여름날의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가까이 오라.

"어디로······?"

-호수 가운데로.

티엘의 시선이 머나먼 호수를 향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체력이 다하기 전까지 도착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도와주겠다. 자아, 천천히, 걸음을 딛어라.

마치 티엘의 생각을 읽은 듯한 목소리에 조금 용기를 얻은 티엘은 조심스럽게 얼음으로 만들어진 다리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얼음다리는 생각보다 더 튼튼했다.

조금 힘주어 밟아도 출렁이거나 금이 가는 느낌은 커녕,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밟는 것 같은 단단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조심조심 몇 걸음을 딛던 티엘은 조금씩 마음을 놓고 편하게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을 걸은 후에는, 완전히 마음을 연 채 힘차게 걸음을 딛었다.

순간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열세 살 꼬마의 모습이었던 물그림자는 몇 걸음을 걷는 사이 수 년을 건너뛴 것처럼 빠르게 자랐다.

얼마 후에는, 조금 차가워보이는 스무 살 안팎의 수려한 소녀가 수면에서 티엘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티엘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호수의 중앙에 도달했다.

티엘이 호수 중앙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수면에 비치던 소녀는 어느새 어린 티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고, 결국 별다른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한 티엘은 조금 긴장한 눈으로 시선을 끌어내렸다.

"어?"

그러나 무심결에 호수 바닥을 내려본 티엘은 뒤늦게 탄성을 질렀다.

검고 투명한 수면 아래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호수 자체가 조금씩 빛을 내기라도 하는 양, 그녀가 서 있는 얼음 섬이 옅은 빛에 물들었다.

티엘은 조금 쭈뼛거리며 섬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깊고 깊은 호수 아래 희고 거대한 존재가 잠들어있었다.

한 때 하늘을 찢었을 날개를 접고, 모든 것을 휩쓸던 숨결조차 사라진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한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몸체는 물결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고요함이, 아무도 찾지 않아 버려진 유적처럼 느껴졌다.

순간 용의 모습이 조금씩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가느다란 파문이 번진 탓이었다.

흠칫 놀란 티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뺨이 젖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나······, 왜······?"

당황해 뺨을 몇 번이고 훔쳤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죽은 것처럼 잠들어있는 용의 모습이 슬퍼보였다.

그러나 서글픈 기분과 함께, 뜻밖에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함께 찾아들었다.

장대한 날개를 빈틈없이 감싼 깃털은 첫눈처럼 희면서도 옅은 광채를 머금고 있었고, 몸을 한 바퀴 휘감은 긴 꼬리는 옅은 별빛을 받아 수백 가지 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제서야 티엘은 자신이 저토록 아름다운 존재가 초라하게 버려져 있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용이 있어야 할 곳은 깊은 물 속이 아닌, 드넓은 하늘이었다.

-모든 빙정령(氷精靈)의 근원. 시원(始原)의 용······. 안식의 주, 혼돈의 그림자가 남긴 그의 일부.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려퍼졌다.

시원의 용. 티엘은 무의식중에 그의 말을 되짚었다.

신언사의 7대 신언과 함께 마법사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경지, 소멸의 신 '우룬' 엘드리안이 남긴 열 둘의 용.

티엘이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무수한 영마사를 키워낸 카르티치스 대공가의 핏줄이었다.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첼의 기사급 생령인 이프라이엘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 마력의 기운에 짓눌려 호흡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저 용이 눈을 뜨면, 분명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온 몸을 떨던 티엘은 뜻밖에도 몸을 돌려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차디찬 물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그래도, 이대로 떠나면······, 안됄 것 같아요······."

두려움에 떨면서도, 닿지 않을 심연을 향해 손을 뻗는 이유는 단 하나.

저 차가운 심연 속에서, 흰 용이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 뿐. 그것은 어쩌면 영마사, 흑마법사로서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순간, 마법사와 생령 사이의 계약은 시작된다.

호수 깊은 곳에서부터 싸늘할 정도로 푸른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있었던 용이 눈을 뜨며,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대가 이런 어린 나이에 내 부름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그대는 나를 받아들이는군.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의 뜻에 따르지. 이는 운명으로 엮인 맹약이며 나는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호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울처럼 잔잔하던 수면의 한 가운데가 조금씩 치솟아오르며 거세게 출렁였다.

얼음의 다리는 거친 파열음과 함께 부스러졌지만 이스티엘이 서 있는 얼음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눈부신 한 쌍의 날개가 물살을 갈랐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용의 입에서부터 하늘을 울리는 긴 울음소리가 퍼져나왔다.

용이 수면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솟구친 거대한 물기둥이 산산히 부서졌지만, 무수한 물방울 중에서 티엘에게 닿은 것은 단 한 방울도 없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흩날리는 세빙(細氷)이 주위를 감싸며 아름다운 윤무를 추었다.

헤아릴 수 없는 미세한 얼음 결정들이 제각기 반짝이며 얼어붙은 호수를 꿈처럼 아름답게 빚어냈다.

그 어떤 보석도, 그 어떤 세공도 지금의 이 풍경만큼 아름답지는 않으리라.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벅참 감동이 작은 가슴을 가득 메웠다.

볓빛을 두른 채 신비로운 노래를 부르던 용은 천천히 고개를 낮추며 티엘에게 다가왔다.

얼음처럼 투명한, 푸른 빛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티엘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대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거대한 눈 속에서, 불현듯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칼라가스······."

호면에 기묘한 빛이 파문처럼 번졌다.

-인간의 아이여, 설원의 새벽이여. 얼음의 용 칼라가스가 그대의 이름을 묻겠다.

"이,이스티엘.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에요."

이스티엘.

그 이름의 의미는 '별'. 아름다운 별하늘 아래, 밤하늘 빛의 머리칼을 지닌 소녀.

이처럼 어울리는 이름도 없으리라.

거대한 흰 용, 칼라가스는 티엘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깨달은 티엘은 조심스럽게 용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용에게 있어서는 거의 티끌처럼 작은 손일테지만, 칼라가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칼라가스의 전신이 눈부신 빛으로 휘감겼다. 세빙도, 깃털도, 푸른 눈동자도 예리한 섬광 사이로 사라지며, 이내 호수와 밤하늘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것에 놀랄 새도 없이, 갑자기 싸늘한 냉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 칼라가스가 티엘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불타올랐던 바로 그 자리였다.

쇄골 아래, 날카로운 얼음 바늘이 새기는 문양.

마력각인이었다.

통증과 함께 눈앞이 아찔해져온 티엘은 저도모르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부디 조심하라.

아련하게 멀어지는 칼라가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티엘은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작가의말

주인공 보정...일까요?



문단 재정리 하는 도중에 오타가 많이 보이는군요. 으윽, 죄송스러워라...8^8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4장-방황彷徨 (3) +2 19.07.16 131 6 40쪽
25 4장-방황彷徨 (2) 19.07.15 133 5 34쪽
24 4장-방황彷徨 (1) +2 19.07.14 160 4 41쪽
23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3) 19.07.14 149 2 37쪽
22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2) 19.07.13 150 5 54쪽
21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1) 19.07.13 142 4 44쪽
20 3장-개화開花(7) +2 19.07.12 171 6 46쪽
19 3장-개화開花(6) 19.07.12 155 5 36쪽
18 3장-개화開花(5) 19.07.11 153 7 37쪽
17 3장-개화開花(4) 19.07.10 167 6 38쪽
16 3장-개화開花(3) 19.07.09 163 5 38쪽
15 3장-개화開花(2) +2 19.07.08 180 5 26쪽
14 3장-개화開花(1) 19.07.07 164 4 30쪽
13 2장-막간幕間(7) 19.07.07 180 6 37쪽
12 2장-막간幕間(6) 19.07.06 177 5 41쪽
11 2장-막간幕間(5) 19.07.06 196 8 42쪽
10 2장-막간幕間(4) +4 19.07.05 207 9 34쪽
9 2장-막간幕間(3) 19.07.05 187 9 35쪽
8 2장-막간幕間(2) 19.07.04 213 6 43쪽
7 2장-막간幕間(1) 19.07.03 208 8 30쪽
6 1장 - 초혼招魂(5) 19.07.03 219 9 28쪽
5 1장 - 초혼招魂(4) +2 19.07.02 288 10 35쪽
4 1장 - 초혼招魂(3) +2 19.07.01 383 10 40쪽
» 1장 - 초혼招魂(2) +2 19.07.01 526 17 27쪽
2 1장 - 초혼招魂(1) +8 19.07.01 1,594 14 31쪽
1 +8 19.07.01 1,572 17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