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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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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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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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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2장-막간幕間(6)

DUMMY

이튿날. 티엘은 새벽 일찍부터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로 이해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의자에서 잠들었을 자신이 어째서인지 침대에서 눈을 떴다는 것.

다른 하나는 주위가 상당히 어두워졌다는 것.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티엘은 하품을 삼키며 창문을 열었다.

'밤까지 자버린 걸까 싶었는데. 새벽인가?'

이미 바깥은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 아첼은 보이지 않았지만, 짐은 그대로 남아있는걸 보니 잠시 바깥에 나가있는 것 같았다.

티엘은 대충 머리를 쓸어넘기며 문을 열어젖혔다. 새벽의 찬 공기가 늘어붙어있던 잠기운을 단숨에 몰아냈다.

하루의 반 가량을 잠으로 보낸 덕분인지 그 동안 쌓인 여로는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상쾌함이었다.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며 한껏 아침에 취했던 티엘은 한참이 지나고나서야 자신이 깬 이유를 알아채고는 방 밖으로 다다닥 뛰쳐나갔다.

생각대로 아직 어두컴컴한 마당에 나와있던 것은 아첼이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들고 흙바닥 위에 뭔가를 그리다 티엘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체엘, 좋은아침."

"어라, 무슨 일이니? 애늙은이도 아니고 뭐하러 이 시간에 일어난거야?"

"칫, 일찍 일어나도 뭐라 그래. 뭐해?"

"직접 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을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원이었다.

가장자리 안쪽을 따라 술식 구동을 위한 이사드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원을 중심으로 세 개의 조금 작은 원이 다시 그려져있고, 각각의 원 역시 큰 원과 마찬가지로 자잘한 글자들을 품고 있었다.

일종의 결계 술식인 모양이었다.

"마법진? 무슨 주문인데?"

"응, 대충 환각결계랑 마력저항결계는 설치해두는게 좋지 않을까 싶으니까. 아무래도 귀찮은게 달려들면 별로 좋을건 없잖니. 너 활 배울 자리도 나중에 봐둬야 할거고. 거긴 방음부터 해서 좀 더 세밀하게 술식을 짜올려야지."

아첼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말갛게 빛나는 투명한 돌들을 몇 개 꺼내들었다.

마력을 응축시켜 결정화한 것, 흔히 마정석(魔精石)이라 불리는 돌이다.

마법사들 사이에서흔 흔히 이런 식으로 마정석을 만들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생령의 심장석으로 만든 진짜 마석에는 미치지 못한다.

무리하게 마력을 짜내지 않는 한 반 영구적으로 마력을 만들어내는 마석에 비해, 마정석은 저장해둔 마력을 다 쓰면 사라지고, 그나마도 응결시킨 마력이 조금씩 새어나가 사라져버리는 물건이다.

하지만 효율은 조금 나쁘더라도, 단순히 마력만 있으면 만들 수 있기에 따로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단기간 마력을 저장할 때는 흔히들 쓰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주문을 유지시키려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이야기가 또 달랐다.

이 정도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정석을 만들어봤자, 아첼이라면 반 시간 쯤 쉬는 걸로 소모량을 충분히 회복할 수있다.

귀찮게 결계석을 깔고 봉헌물을 바치는 노고를 감수하는 것에 비하면 이 쪽이 오히려 훨씬 간단하기까지 했다.


적당한 위치에 마정석을 올려놓자,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대강 그려넣은 엉성한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마력반응에 만족한 아첼은 마정석을 거둬들인 뒤 티엘을 손짓으로 불렀다.

"티엘, 내 가방에서 새까만 주머니좀 가져다줄래?"

"이거?"

"응, 그거. 막 만지진 말구. 숯가루라 그을음 묻을라."

제법 큼직한 주머니 안은 곱운 숯가루가 반 정도 들어차 있었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숯가루를 한 줌 가득 꺼낸 아첼은 천천히 집 주위을 돌며 대강 그려뒀던 원을 덧그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떨어져내린 숯가루는 하나의 굵은 선을 그리며 오두막과 근처의 빈 땅을 모두 에워쌌다.

행여 숯가루가 날아갈까 걱정하긴 했지만, 다행히 이슬을 머금은 땅 덕분에 선이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선을 완성한 아첼은 주의깊게 이사드와 상징들까지 그려넣은 뒤 다시 마정석을 설치했다.

살짝 흐려진 선이 먹으로 그린 것처럼 선명하게 조여들며 바람도 없이 머리칼이 휘날렸다.

마법진이 완성된 것이다.

더이상 마력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후아아앗! 뻐근해! 이런거 일일이 그리는 것도 일이네 ."

검은 선이 바닥으로 스며들듯 자연스레 환영을 덮어쓰는 것까지 확인한 아첼은 허리를 펴며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뚜둑거리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아침은 마을에 내려가서 먹자."

티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산길을 걷는 것도 꽤 기분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깬 두 사람의 머리는 꽤나 멋진 모양으로 흐트러져있었고, 산발을 한 머리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정돈하는게 가장 급할 듯 했다.

두 사람은 연신 하품을 하며 집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어제의 목욕으로 이미 물통은 텅 비어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위 틈에 마련된 자그만 물통에는 물이 조금 고여 있었지만, 산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굉장히 차가웠다.

"으으으, 차가워······."

계곡에서부터 끌어온 물은 여름의 초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아첼은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새벽의 찬 바람도 한몫 해서 이미 두 손이 발갛게 얼어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더더욱 추위를 탈 줄 알았던 티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찬 물에 머리를 담갔다.

"아, 안추워?"

"응. 이거, 기분 좋아."

그러고보면 티엘은 야영 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추위를 타지 않았다.

레가야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터라, 아첼은 혹시 자신을 배려해서 억지로 참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지만, 지금 보니 티엘은 진심으로 상쾌해하며 태연하게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쟤가 원래 저랬던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첼은 잠시 후 그냥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버렸다.

본인이 고생스럽지 않다면 그걸로 충분한 일이다.

딱히 뭔가 계기가 될 일도 없었고, 그냥 티엘의 고유 마력이 빙결계 속성을 지닌 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후으암······. 뭘 먹지······. 왜 사람은 꼭 뭔갈 먹어야 하는거야?"

이럴 때 보면 정말 아첼만큼 게으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레가야에서는 어느 정도 격식은 차렸기 때문에 허물없이 지내는 티엘도 모르고 있었지만, 겨우 몇 주 동안 지내며 보아 온 아첼은 그동안 쌓아왔던 인물상을 사정없이 깨뜨리고 있었다.

애초에 침대에서 기어나오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이 새벽에 잠을 깼다는 것 부터가 신기할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티엘의 눈이 불만을 품고 아첼에게 향했다.

아침마다 아첼을 깨워 억지로라도 음식을 입에 밀어넣어온 티엘이지만, 여행 도중도 아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곳에서까지 똑같이 나오면 곤란하다.

한숨을 쉬며 일부러 걸음을 조금 빨리 한 티엘은 고개는 앞으로 둔 채 시선만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땅 위에 누운 그림자 아첼의 걸음이 조금 어색했다.

속도도 느렸지만, 그 이전에 왼쪽 다리를 조금 절고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티엘은 바람처럼 몸을 돌려 아첼을 노려보았다.

"아첼, 왜 그래. 어디 아픈거야?"

"그렇진 않은데 왜?"

"다리 절고있잖아."

"어?"

아첼은 이제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티엘의 심장은 쿵쿵 거세게 뛰고있는데도 아첼의 반응은 '아, 또 왜 이래?' 정도에 불과했다.

마치 지금 다리를 저는 사람이 티엘인 것처럼 너무나 태연한 모습에 오히려 곁에서 보는 티엘쪽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레 몇 걸음 더 걸어보던 아첼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나 젖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왼쪽 다리를 짚어보는 손가락도 가늘게 떨리는 듯 했다.

화들짝 놀란 티엘은 재빨리 집 뒤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말을 묶어둔 곳이 별채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말을 타고 의사를 부르러 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첼은 달려나가려는 티엘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별 일 아냐, 바보야. 허둥대지 마."

"별 일이 아닌데 사람이 맥없이 주저앉는게 말이 안돼잖아!"

티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질끈 감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아첼이 뜨끔해질 정도의 기세였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아첼은 또 이 녀석에게 상처를 준 건가 싶어 티엘의 안색을 살폈다.

씩씩대면서도 흐느끼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꽤 놀란 듯 했다.

아첼은 티엘을 부르려다 가만히 손을 뻗어 티엘을 끌어당겼다.

티엘은 또다시 떨고있다.

항쟁의 날 이후로, 티엘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쉽게 겁먹고, 떨었다.

죽음을 느껴서일까?

누구의?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 치고는 물러터졌다.

티엘의 눈이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아첼이었다.

누군가가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어린아이의 눈을, 아첼은 감히 밀어낼 수 없었다.

스스로의 무심함에 한숨을 푹 쉰 아첼은 티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오른팔로 티엘을 감싸안았다.

"하아, 이거 진짜 별일 아니야. 영체역류(靈體逆流)라고, 길어야 일주일이면 나으니까 걱정 마. 너도 참 걱정이야. 이렇게 여려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니. 울보에 겁쟁이로 키운 적은 없는데말야."

"날마다 숨기기만 하면서. 흑, 무서워. 언니가 아프면 어떡할지 무섭단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아프면 말할테니까, 뚝 그쳐. 응?"

사실 영체역류 현상은 흑마법사들에게서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흑마법사는 자신의 몸에 자신의 마력과, 계약한 생령의 마력을 동시에 담고 있기에 가능하면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마력의 균형이 무너져 생령의 마력이 지나치게 마법사의 몸에 많아질 경우 일시적인 생령의 침식이 일어나며 특정한 신체 기능이 약화된다.

이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점차 육체 침식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금방 회복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아첼은 항쟁의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력을 써 왔다.

그런 주제에 마정석을 만든다고 요 며칠간 마력을 지속적으로 퍼냈으니, 균형이 무너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대충 티엘을 진정시킨 아첼은 가만히 마비된 다리에 마력을 밀어넣었다. 손 끝으로 마력을 바늘처럼 찔러넣어 무뎌진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역류가 낫거나 빨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임시 방편으로 약간은 감각을 회복할 수는 있다.

"으이그, 너 세수 다시 해야겠다. 얼굴이 이게 뭐니?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씻고 왓!"

아첼은 티엘의 등을 떠밀며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티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아첼은 티엘이 사라지자마자 눈썹을 찌푸리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이 짓도 못해먹겠군. 겨우 이 정도 마력으로 역류가 일어날 줄이야. 하아, 이번은 그럭저럭 넘긴다지만 앞으로는 어쩌지?"

영체 역류 자체는 희귀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갖춰진 이후로는 어지간해선 볼 일이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티엘을 구할 때 수명과 생명력윽 대량으로 소모해버린 탓에, 이전에 비해 반동이 커진 것이 분명했다.

본래는 이번의 두 배 이상의 마력을 한번에 끌어내도 문제없던 그녀다.

생각보다 몸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해버린 아첼은 보다 신중해질 필요를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나저나 언니라······. 얼마만에 들어보는 소리인지, 원.'

한숨을 푹 내쉰 아첼은 수첩을 한 장 뜯어내 그 위에 몇 가지를 적기 시작했다.

목수에게 활 과녁을 몇 개 주문하고 잡화점에선 뭘 사오라는 등,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쓰러질 정도로 역류가 일어났으니 아무리 대담한 아첼이라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은 집에서 푹쉬면서 마력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다.

마침 티엘도 준비를 끝내고 말 한 필을 끌어오고 있었다.

'조만간 저 말도 한 마리는 팔아버리고 나귀를 사는게 나을텐데.'

짐말이 아닌 평범한 말은 밭이라도 갈게 했다간 제대로 버티질 못한다.

이것저것 계산을 끝낸 아첼은 티엘에게 수첩을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같이 내려가는건 안되겠다. 이 언니는 좀 쉴테니까, 이것들좀 사올래?"

"······알았어. 빨리 갔다 올게."

"그러렴."

티엘은 아첼에게 목록을 받아들었다.

이것저것 필요한게 꽤 많아보였지만 일단 말을 타고 가는거니 들고오기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목록의 반 쯤은 티엘도 알아볼 수 있는 풀의 이름들이었다.

향초로도 사용되는 세이지, 엉킨 마력을 풀어주는 아스모네, 혈류의 흐름을 북돋는 피스칼, 여러 마법약의 보조 재료로 들어가는 휘령초(輝鈴草) 등 마법약 재료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약초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들판에서 한 나절만 있어도 이 목록의 반 가량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티엘이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게 잘라 말린 것들이다.

성의 약재창고에서 본 적이 있기에 특유의 향 정도는 기억하지만 생풀이 어떻게 생겼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와 본 마을에서 약재상이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말을 재촉한 덕에 오래지 않아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 쪽으로 가면 공회당이고······. 잡화점은 어디였지······?'

작은 마을이라고는 해도 어제 처음으로 와 본 곳이다. 칼이 주의깊게 설명해준 것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이제 막 온 사람이 벌써 마을 지리를 익힌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약재상, 아니, 이런 규모의 마을이라면 잡화점에서 어지간한 물건들을 전담하고 있을테지만, 다른 집과 구분할만한 간판 같은 것이 붙어있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꽤 이른 아침인데도 주위에 사람들이 조금 있다는 것이었지만 아직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이라 말 거는것도 상당히 쑥쓰러웠다.

'어, 어떻게 하지?'

티엘은 말에서 내렸다.

조그만 어린애가 커다란 말을 몰고 다니는게 신기해보였는지, 아니면 낯선 사람이라 경계하는 것인지 몇몇 마을사람들이 티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티엘을 두고 귀엽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티엘이 알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티엘은 잔뜩 긴장해서 주위 분위기를 읽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괜히 주눅이 들었던 티엘은 잠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훌쩍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금 쭈뼛거리면서도 가장 가까이 서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침 일찍 약초라도 캘 생각이었는지 옆구리에 망태기를 찬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귀여운 꼬마가 다가오자 인심좋은 웃음을 지어 티엘을 안심시켰다.

간신히 용기를 낸 티엘은 조금 주저하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하지만 여전히 낯가림이 조금 있는 티엘은 말을 가볍게 더듬었다.

"안녕. 못 보던 얼굴인데, 어제 이사왔다는 애구나? 이름이 뭐니?"

"이스······, 티엘. 이스티엘이에요."

"아줌마는 아넬라라고 부르면 된단다. 티엘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네에."

아넬라의 푸근한 웃음이 티엘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기 시작했다.

촌장인 마르파가 말했듯, 안그래도 작은 규모였던 마을은 역병으로 그 수가 더욱 줄어든 상태였다.

근처 도시에서 사제들이 나와 필사적으로 병과 싸웠지만, 지금도 마을에는 일가족이 모두 떠나버린 바람에 태워버린 집터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어린 아이를 잃은 집도 하나나 둘이 아니다보니 오래간만에 마을에 찾아든 어린아이가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예쁜 아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니?"

티엘은 손에 들고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티엘과 함께 종이를 바라본 아넬라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외국에서 온거니? 미안한데 잘 모르는 글이구나."

티엘은 아차 싶어서 무안하게 얼굴만 붉혔다.

대륙만 해도 익티아누스와 시엘리아 두 제국의 말은 같지만, 저 멀리 왕국과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바다 건너의 섬나라, 피앙투스에서 말과 글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 제국생활로 잠시 잊은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것인지, 공화국 출신인 아첼이 제국어로 글을 써준 덕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티엘이야 대공가의 일원으로 각국의 언어를 상당히 능숙하게 쓸 줄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야 자국어 말고는 모르는게 당연하다.

"죄송해요. 제국에서 온지 얼마 안돼서······. 이, 읽어드릴게요!"

"아냐, 괜찮아요. 우리 말도 능숙한게 대견하기만 한걸."

티엘을 뺨을 발갛게 붉히며 목록을 하나하나 읽어주었다. 아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티엘의 말을 들었다.

"음, 약재상은 시에 나가야 있어. 그래도 이 약초들은 아마 잡화점에서 구할 수 있을거야. 널빤지같은건 나무꾼 아저씨가 간단한 가구 정도는 만들고 있으니까 한번 여쭤보렴. 어디보자······, 잡화점은······."

"안녕, 아넬라. 새벽부터 유괴라도 해온겁니까? 웬 꼬마가 있어요?"

아넬라의 말허리를 자르며 누군가가 경쾌하게 인사를 해왔다.

순간 티엘은 아넬라의 푸근한 얼굴이 세상사 귀찮다는 나른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넬라를 부른 것은 지나가던 후리후리한 청년이었다.

버드나무 가지로 보이는 것을 입에 문 채 빙글거리는 얼굴은 금방 잠에서 깬 듯 나른하게만 보였다.

"어제 이사온 아이야, 티몬."

"오호, 얘가 걔였구만. 난 또 해도 안떴는데 아줌마가 처음 보는 애를 달고 있길래. 오, 이런 실례를."

"유괴니 뭐니 택도없는 소리 그만 해. 애가 길을 모르니까 안내해주려는 거야."

"그래요? 잡화점 갈거면 같이 가지 않을래, 꼬마? 나도 잠깐 들를 일이 있거든. 아줌마는 산채 뜯으러 가시던 길 바쁘지 않습니까? 해뜨면 쇠어버린다고 새벽같이 나왔으면서."

"암만 그래도······."

아넬라가 갈등하는 모습이 티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면 저렇게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걸까.

정작 티몬은 티엘의 시선을 알아차리자 맞겨두라는 듯이 씩 웃었다. 오히려 그 미소에 마음이 더 심난해지는 것은 아는지 모를 일이다.

"애를 데리고 장난치기만 해봐라, 티몬. 혼을 내 줄테니. 우즈네 집도 안내 해줄거 아니면 말을 말아라."

"나야 시간은 많으니까. 까짓것 그러죠, 뭐."

"······불안하지만 한 번 믿어보겠어. 애 잘 부탁해. 알았지?"

아넬라는 한숨을 폭 쉬더니, 영 못미덥게 고개를 끄덕이는 티몬을 다시 바라보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티몬이 말한대로,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가려면 해가 뜨기 전에 미리 움직여야만 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아넬라는 티엘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일단 안내는 해 줄거야. 하지만 장난 걸면 무시해요. 알았지? 그리고 저 녀석이 이상한 짓 하거들랑 언제든지 소리를 질러."

유괴범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아넬라가 아니라 티몬이 아닐까.

문득 티엘은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무튼 또 봐. 티몬, 너도 티엘 잘 바래다 주고."

"예이, 예이."

아넬라는 옆에 찬 망태기를 손으로 부여잡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그 직후 티몬은 쾌활하게 웃으며 티엘의 어깨를 펑펑 두드렸다.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머리 하나는 차이나는 체격에 티엘의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가자, 꼬마야."

"제 이름, 티엘이에요."

티몬은 조금 전에도 티엘을 그렇게 부르더니, 이번에도 또 '꼬마'라고 불렀다.

물론 자신이 꼬마라 불릴 정도로 어린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사실이라도 대놓고 말하면 화가 나는 법이다.

그러나 티엘이 약간 뚱한 목소리로 이름을 다시 말해주었는데도, 티몬은 그렇게 부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름같은거 외우기 귀찮으니 꼬마라고 부르련다. 하하하하, 노려봐도 소용없다고? 자! 잡화점으로 가볼까, 꼬마야?"

티엘은 발끈하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티몬은 낄낄 웃으며 티엘을 피해 거리를 벌렸다.

다 큰 어른이 애를 놀리면서 저렇게 명랑하게 웃을 수 있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순수하다고 말해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정작 티엘로서는 그런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티몬은 계속 도망다니면서도 티엘의 약을 올렸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끓어오른 티엘은 끌고왔던 말을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말고삐를 단단히 틀어쥔 티엘은 제 발로 뛰어 티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꼬마야, 뛰다가 다친다!"

티엘은 고삐를 잡아당기며 티몬에게 달려갔다.

"꼬마라고 부르지 말아요, 아저씨!"

"꼬마를 꼬마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오빠라고 불러!"

"싫어요!"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던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씩 두 사람의 소동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새 입소문은 퍼져 새로 이사온 자매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두 사람중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귀엽게 생긴 아이가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니 너나없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아이들이 사라진 마을에서는 티몬 정도가 아마 가장 젊은 축에 들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른 시간부터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두 사람이 마을을 쏘다니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종종 티몬에게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티엘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약이 바짝 오른 티엘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티엘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존재감을 알려가고 있었다.


티몬은 일부러 티엘에게 마을 구조도 가르칠 겸, 한편으로는 장난도 칠 겸 길을 빙 둘러서 잡화점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조금씩 길은 익힐 수 있었지만, 흥분해서 쫒고 쫒기던 가운데 체력이 바닥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결국 잡화점에 도달했을 무렵, 티엘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완전히 녹초가 돼버리고 말았다.

어깨 너머로 티엘의 모습을 살핀 티몬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잡화점을 운영하는 로인에게 뭔가를 부탁한 뒤 다시 티엘에게 되돌아왔다.

"어라? 벌써 지친거냐?"

"하아, 하아, 저, 전혀요."

조그만 녀석이 말 한 필을 끌고서 온 마을을 뛰어다녔으니 말이라도 나오는게 용하다.

티몬은 티엘을 잡화점 문앞의 작은 의자에 앉혔다.

"달리기 연습이라도 좀 해야겠다, 꼬마야."

"하아, 그걸, 말이라고, 해요? 흐읍······."

티엘은 연신 땀을 훔치며 투덜댔다.

하지만 그 때 로인이 가게 안에서 티몬이 부탁한 물건을 가지고 나왔다. 티몬은 눈을 찡긋하더니 티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씹어봐. 좀 나을거다."

그것은 말린 풀잎이었다.

여러 장을 겹쳐 말린 뒤 압착해 만든 것이었는데, 바짝 마른 갈색의 잎에서는 알 수 없는 시원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의미로 내미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티엘은 손을 뒤로 뺀 채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풀잎을 살폈다.

이내 티몬을 향해 불신 가득한 시선이 꽂혔다.

"좀 믿어라, 믿어."

티몬은 풀잎을 티엘의 입에 쑤셔넣었다.

화들짝 놀란 티엘은 풀잎을 뱉으려 했지만 티몬은 그녀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당황한 티엘은 엉겁결에 당장 뱉어내려 했던 마른 풀잎을 힘차게 씹고 말았다.

갈색의 잎이 바스라지며 의외로 상쾌하면서도 강렬한 향이 입안을 채웠다.

조금 역할 정도로 진한 향기였지만 티몬의 손은 여전히 입술을 짓누르고 있었고, 때문에 뱉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가빠오던 호흡도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터질 듯 뛰던 심장박동도 빠르게 돌아왔다.

풀즙의 쓴 맛과 짙은 향이 괴롭기는 했지만 씹을 수록 몸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티엘이 먹은 것은 야스티안이라는, 혈액순환과 호흡을 안정시켜주는 효능이 있어 종종 약용으로도 쓰이는 향초였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차로 마시거나 탕약으로 우려내지, 잎 자체를 씹어먹는 일은 거의 없다.

"미안, 꼬마야. 장난이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사과 받아줄거지?"

"네, 받아 드릴게요."

티엘은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 직후 티몬이 고개를 돌린채 큭큭 웃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원래 야스티안은 차로 우려 마시는 허브라서, 그냥 먹으면 굉장히 쓰다.

아무것도 모르는 티엘처럼 말려서 단단하게 압착시킨 것을 그대로 씹어먹으면 효과는 빠를지 몰라도 쓴맛과 너무 짙은 향 때문에 굉장히 고생한다.

효능 때문에 고맙다는 생각밖에 못했지만 쓴 맛에 눈물까지 찔끔 난 그녀는 한동안 부르르 떨며 고통을 삭였다.

"일단 들어와."

두 사람을 지켜보던 로인이 뒤늦게 티몬의 장난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티엘이 아직도 울상을 짓고 있자 물 한 잔을 내어준 그는 비좁은 가게 바닥을 점거한 상자를 쌓아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참 후에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진정한 티엘은 로인에게 아첼이 부탁한 약초들의 목록을 불러주었다.

말없이 웃던 점원은 장부를 꺼내 목록을 체크했다.

"집에 누가 아프니?"

"언니······,요. 약초같은건 기초정도는 알아서 직접 약을 만든다고 했어요."

"그래? 마침 아스모네는 어제 막 들여놨거든. 다른 약초들도 싱싱한게 같이 들어왔으니까, 최대한 좋은 걸로 골라줄게."

"고, 고맙습니다!"

점원은 한쪽 벽에 달려있는 문을 당겼다. 안에는 말린 풀이나 약재가 들어있었다. 로인은 한동안 부스럭거리면서 약재 창고 안을 뒤졌다.

그동안 티엘은 잡화점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잡화점 안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한쪽 선반 위에는 장식용인지, 아니면 실제로 팔려고 들여놓은 물건인지 커다란 아르타야의 전통 도검이 올라앉아 있었다. 두터운 날과 끝으로 가며 넓어지는 도신 덕분에 도검이라기보다는 도끼에 가까운 흉악한 물건이다.

그런 무식한 칼에 기대어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귀엽게 생긴 곰인형이었다. 조그만 깃털로 장식한 머리띠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바로 위에 진짜 곰이라도 상대할 것 같은 큰 칼이 있으니 괴리감의 극치를 자아낸다.

반대쪽 벽에는 박제된 사슴 머리가 있었는데, 두 개의 뿔에는 각각 가죽으로 만든 외투와 말린 물고기 묶음이 걸려있다.

"저 인간, 이것저것 모으길 좋아하거든. 그래서 가게가 좀 정신이 없지."

티몬은 티엘의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대변하듯 약재창고 안쪽에선 '어라? 이게 왜 여기있어?'따위의 중얼거림이 때때로 들려왔다.

"그나저나 형. 사비나 아줌마는 어딜 가시고 혼자 가게를 봐?"

"어머니? 약간 몸살기가 있다셔서. 맞다, 티몬 너한테 5 칼브람 받으라던데."

"쳇, 기억력도 좋으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티몬은 나직한 소리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쩐지 흥겨운 그의 노랫소리에 티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노랫소리는 잠시도 쉬지않고 이어져, 로인이 드디어 약초꾸러미를 들고 나왔을 때 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 온거니까 좀 싸게 줄까? 450 칼람만 줘. 뭐 더 필요한거 있어?"

"식재료도 얼마쯤 챙겨주실래요?"

"알았어. 사흘 먹을 정도면 돼니?"

"네. 아무거나 챙겨주세요."

티엘은 500 칼람짜리 금화를 점원의 손에 올려놓았다.

로인이 이런저런 식재료를 찾아오고 가죽 주머니를 뒤져 거스름돈을 꺼내는동안 티엘은 고개를 돌려 티몬을 보았다.

"아저씨는 뭐 안사요?"

"뭘 사?"

"여기 올 일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아- 맞다. 그랬지, 참."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던 티몬은 잠시 후 아넬라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피식 웃었다.

"여기 들를 일이 있다고 한거지 뭐 산다고는 안했다."

"심심하다고 와서 그냥 가지 말고 뭣좀 사라, 인마."

로인이 핀잔을 주는 소리가 들렸지만 티몬은 픽 웃기만 했다.

결국 그는 로인이 이스티엘에게 거스름돈을 챙겨주고 난 뒤 자신의 엉덩이를 발로 찰 때 까지 아무 물건도 사지 않았다.

로인은 한숨을 푹 쉬고는 티엘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저 녀석 말썽 안부리게 잘 부탁한다. 알았지?"

"노력해볼게요."

포장지로 잘 싼 짐을 말에 매어준 로인은 티엘에게 나무꾼의 집을 대강 알려주었다.

하지만 약도도 없이 그냥 말로만 설명을 듣자니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잡고 물어볼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속하게도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거라곤 -잡화점에서 훔쳐온 듯한-사과를 씹고있는 티몬 뿐이었다.

"너도 먹을래?"

"그거 또 어디서 났어요?"

"그, 글쎄다."

"훔친거에요?"

"어······. 그럴걸······?"

"나쁜 아저씨!"

파악! 티엘은 티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티몬은 열몇 살 짜리 어린애의 발길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굉장히 얄밉게 헤실헤실 웃어댔다.

일부러 약올리는 듯 아삭아삭 큰 소리로 사과를 씹어먹는 티몬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티엘은 발끈 열이 올라 다시 그의 다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어라? 티엘이구나! 아침부터 혼자 무슨 일이니? 어······. 그것도 저런 녀석하고."

"인사 치고는 거칠구만. 형도 아침부터 무슨 일로 돌아다니시는가?"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탁 얹혔다. 반사적으로 빠져나가려던 티엘은 문득 아는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집까지 안내해줬던 칼이었다.

그는 다른 손에 다리가 부러진 의자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꽤나 반가운 목소리라 티엘의 마음도 살짝 들떴다.

순간적으로 티엘의 주위를 훑어본 그는 -어째서인지 다소 실망한 듯 보였지만- 장난스레 티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칼."

티엘은 다소 편안하게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한 번 얼굴을 본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쉽게 나오는 편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칼에게 재잘재잘 떠들며 티몬의 악행(?)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자기를 꼬마라고 놀려대고 잡화점 주인을 괴롭혔으며 심지어 잡화점의 물건을 훔치기까지 했다!

티몬의 얼굴에서 어색한 웃음이 떠오를 때 쯤엔, 이미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칼은 설명이 이어질수록 묘한 표정을 짓다, 대뜸 티몬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조금 전과 같은 자리였지만, 이번에는 채인 다리를 싸쥐고는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바닥을 뒹구는 티몬의 귀에 거의 으르렁거리는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진한 애를 데리고 참 잘 하는 짓이다."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네. 덕분에 꼬마도 마을 지리는 알게 됐잖아?"

"······너 말야, 세상 너무 편하게 사는 것 같지 않냐. 응?"

"좋은게 좋은거지 뭐. "

이런 사람에게 더 말을 해 무엇하랴.

칼은 참담한 표정으로 티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린 것이 이런 못된 녀석을 만나 고생했구나.

티엘 역시 한숨을 쉬며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보단 아저씨가 더 힘들었겠어요.

"야, 야. 아침부터 세상 무너진 듯한 그 표정은 뭐냐?"

"알면 다행이네. 우즈 씨네 가는 길이면 내가 데려간다. 의자 다리가 부러져서 새로 하나 구하려는 참이거든."

칼은 그렇게 말하면서 티몬을 흘끗거렸다.

말은 꺼내지 않아도 당장 꺼지라는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티몬은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 암. 그래주면 나야 편하지."

티몬은 티엘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그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티엘의 볼이 부어올랐지만 티몬의 손은 티엘의 머리를 산발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피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도 찰거머리처럼 붙어오는 티몬의 손 때문에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져 앞을 가릴 지경이다.

티몬의 손은 티엘의 머리에 새집을 두 개는 만들어놓고서야 멀어졌다.

"그럼 다음에 보자, 꼬마야."

"부디 길 가다가 넘어져요, 아저씨. 간절히 기도할게요."

"좋을 대로 하려무나."

티몬은 아까 부르던 콧노래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까운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구야."

칼은 이마를 짚으며 티엘을 번쩍 들어 말에 앉히고 티엘 대신 고삐를 잡아 끌었다.

이상하게 서두른다 싶어 무심코 뒤를 돌아본 티엘은 칼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멀찍이 돌아가는 척 했던 티몬이 당당하게 두 사람을 뒤따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아저씨 원래 저런거에요?"

"아, 너도 곧 알게 될거야. 티몬 아르벨. 마을의 장난꾸러기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서로의 귀에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한 사람은 말 위에 올라앉긴 했지만 워낙 키가 작았고, 말도 완전히 다 큰 녀석은 아니라 어느정도 키가 비슷했다.

"어찌 된게 애들보다 더 유치하게 장난을 즐기는 녀석이지. 악의적인 장난은 안하지만 애초에 장난이라는 점이 나빠! 다들 알면서도 당해주는 것도 문제겠지만. 흠흠. 아무튼 우리 마을에서 의사 비슷한 걸 맡고 있는 녀석이야. 독학으로 약초 공부를 한 모양이더라고. 아르벨 아저씨가 그걸 알고 꽤나 좋아하긴 하셨지."

티엘의 눈에 의구심이 담겼다. 하는 짓을 보면 도저히 못 믿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뒤를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에게는 무관심이 약인 법이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끔거리긴 했지만 결국 그녀는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나무꾼의 집에 도착했다.

정말 외지인이 들어올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간판 같은 것은 전무한 이 마을에 거의 유일하게 집주인의 직업을 확신할 수 있는 집이었다.

한쪽 벽에는 숫돌과 묵직해뵈는 도끼가 나란히 걸려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티엘의 키는 가뿐히 넘길 듯한 장작더미가 쌓여있었다.

장작더미 너머로 삐져나온 만들다 만 가구들은 집주인이 목공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즈, 안에 있죠? 우-즈!"

칼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너무 무례한게 아닌가 싶었던 티엘은 칼의 옷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칼은 그녀의 신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더욱 목청을 높였다.

다행히 티엘의 걱정과는 달리, 아침잠을 깨는 바람에 분노한 집주인의 멱살잡이는 볼 수 없었다.

꽤 멀찍이서 따라오던 티몬이 두 사람을 따라잡을 무렵에서야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우즈는 귀가 꽤나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원래 짙은 회색이라, 막 내리기 시작한 흰 머리가 잘 부각되지 않는 중년의 나무꾼은 게으른 하품과 함께 침침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꼭두새벽부터 웬 일이란 말인가. 아, 칼이로군."

어딘지 말투가 재미있는 사람이다.

"꼭두새벽이라뇨. 해 뜬지가 언젠데요."

"그런가. 자네는 너무 부지런한듯 하네."

칼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칭찬에는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이거나 고쳐줘요. 삐그덕대는게 좀 심하다 했는데 다리 하나가 나갔더라고."

"서글픈지고. 어이하여 새 의자를 사는 대신 고쳐달라는겐가. 거 얼마나 한다고. 요새 일감이 뚝 떨어져 놀고있다네."

"일은 이 녀석이 물고 왔으니까 걱정 말아요."

우즈는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티엘쪽으로 돌아섰다.

"자넨 또 누군가?"

티엘은 안간 힘을 쓰며 웃음을 참았다.

오는 길에 칼에게 들었는데, 젊었을 때는 시인이 되겠다며 시집 한 권을 구해 읽던 사람이었단다.

그가 읽은 시집은 평생 그 한 권이 전부였고, 그가 이제껏 지은 것이라고 해봐야 톱밥과 송진으로 이뤄진 장작탑이 전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애써 교양있는 말투를 고수하고 있다니, 어떤 면에서는 꽤나 멋진 인생인 셈이다.

티엘은 우즈에게 맞춰주려는 듯 허리를 숙이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조금 고풍스러운 인사로 자신을 소개했다.

"계곡의 바람결에 몸을 맞기게 된 티엘이라고 합니다. 지극한 환대에 감사드리겠습니다."

"어? 어, 그래. 고맙······, 아, 아니, 가, 감사하네. 드, 들어오게나."

곁에서 보고 있던 두 남자는 풋 하는 웃음을 감추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기보다 한 술 더 뜨는 티엘에게 당황한 우즈는 한참이나 말을 더듬었다.

다시 고개를 든 티엘도 조금 짓궂게 킥킥 웃었다. 주춤거리던 얼굴에 어느새 나이다운 발랄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사이 몇 번의 헛기침으로 웃음을 그친 칼이 다가왔다.

"어제 이사온 애에요. 활 과녁이 필요하다나?"

"어, 난 우즈라고 하네. 그런데 갑자기 과녁은 어쩐 일로 필요한겐가."

우즈는 수염이 비죽비죽한 턱을 긁적였다. 머리속으로 필요한 재료들을 대충 계산해보는 것이다.

"언니가 활을 가르쳐준대요. 과녁 두 세개 쯤 사오라고 했어요."

"알겠네. 세 개 만들어 놓을테니 닷새쯤 후 찾으러 오게나. 칼, 자네 의자도 그 때쯤 고쳐놓도록 하지."

두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무꾼에게 선금을 건넸다.

티엘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대강 가늠했다. 세 시간쯤 걸렸나? 이미 해는 완전히 떠올라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올라갈거니?"

"네. 언니도 기다릴 거에요. 아, 오늘 고마웠어요, 칼 아저씨."

"잘 가고, 아첼 씨한테도 안부 전해줘."

"네!"

"······꼭이다? 꼭 전해주는거다?"

티엘은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말은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멀어져가는 티엘의 뒷모습을 보던 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쟤 언니 마법사라고 했지? 이런데까지 들어오려 애쓴다면 헛짓거리하는 백마법사, 아니면 흑마법사겠군."

"그게 중요한가?"

티몬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형도 흑마법사가 뭔진 알거야. 더구나 애가 저 나이에 저렇게 위축되있는거 보면 꽤 큰 일 치르고 도망나왔을 확률이 높다고 봐. 도망자 신분, 언니가 흑마법사라는거, 그거 애가 감당할만한 거 아니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정말 자신 있는거야? 정말 쟤들 편 되줄 거 아니면, 어설프게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이야. 쟤들한테 상처만 남을테니까."

"······적어도 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죄없는 애들 못살게 굴고싶진 않다."

티몬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럼 더 걱정 안해도 되겠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꽉 막힌 형이 쟤들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니까. 뭐, 금방 친해지겠구만?"

"안가봐도 돼겠냐? 어디 아프니까 약초 사가는 거 아냐?"

"마법사는 자기관리가 철저하니까. 내가 안가도 알아서 잘 처신 할걸."

티몬은 의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장난스러운 태도에 가려져있을 뿐, 마을의 약사 노릇을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언행은 가벼워도 그 뒤에서는 알게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진지하게 챙기는 것이 그의 본 얼굴이다.

때문에 칼은 그가 티엘을 놀리기만 하고서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는 것에 조금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몬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엘이 사 간 약초들은 이미 곁눈질도 확인을 마쳤다.

별다른 처방 없이도 구할 수 있는 만큼 부작용같은 것도 별로 없었다.

만약 보다 전문성이 필요한 약이 있었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가서 도왔을테지만, 마법적인 병은 그의 소관이 아닐 뿐더러, 그 정도로 효과가 가벼운 약재들만을 가져가는걸 보면 증세 자체도 그리 무겁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본다는 듯한 태도에 마지못해 수긍한 칼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티몬에게 눈을 흘겼다.

"그나저나 장난좀 작작 쳐라. 애들 좋아하는건 알지만 온 동네가 시끄럽다고."

"아하하하하. 이렇게도 안하면 마을이 시체밭 같잖아?"


작가의말

일상파트에서도 흥미와 긴장을 적당히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써도 이 부분은 어렵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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