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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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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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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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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0쪽

1장 - 초혼招魂(3)

DUMMY

대공왕 미노스티야는 내심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심장 부근에 새겨진 각인이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고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사나흘 전부터 천천히, 조금씩 시작된 마력의 고동은 은연중에 불쾌감을 유발한다.


물론 미라야에서 온 마법사들중에서 각인을 가진 자들 역시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마법을 쓰는 신언사와, 생령을 지배하는 영마사는 짊어지는 부담이 다르다.

수많은 생령들과 계약하고, 대정령마저 거느리고 있는 미노스티야라면 이 정도의 반발에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레가야의 영맥을 지배하는 미노스티야의 힘은 레가야 내에서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해진다.

대등한 실력을 가진 자를 상대하더라도 레가야 영지 내에서라면 마력의 칠할 가량만 사용해도 가볍게 짓누를 수 있을 정도이니,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마법사들이라면 아마 바닷 밑바닥에 거꾸로 쳐박힌 듯한 극심한 중압을 느낄 터였다.


하지만 미노스티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흥분한 생령들이 조금씩 신경을 곤두세우며 쓸데없이 힘을 소진한다.

미노스티야가 '불편한' 정도로 끝나는 동안, 다른 가신들이나 봉신들이라면 수족 하나가 떨어져나간 수준으로 힘이 억제되고 있을 터였다.

'올파인. 견제라고 하기에는 과도한 시위로군.'

미노스티야는 불쾌한 눈으로 연회장 안을 살폈다.

미라야가 자랑하는 마도병단은 대부분 란의 외곽지역에 있는 그들의 숙소에 머물렀다. 언제 이빨을 들이밀 지 모르는 독사를 품으로 끌어들이는 얼간이는 없으니.

그러나 최소한의 호위병력이 따라오지 않는 것은 국가의 위신 문제이기에, 제 3공자 아키온의 호위로 따라들어온 마법사가 극소수 연회장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 한 명, 사실상 호위 병력의 지휘관 격으로 따라온 자. 미노스티야가 은연중에 내리누르는데도 태연한 얼굴로 중압을 받아내고 있는 '적염의 사자' 에일런.

미라야의 숱한 신언사 가운데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다.

제법 성가신 일이다.

레가야에서 에일런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기 직전까지 상당한 피해를 낼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이 곳은 레가야의 수도 란. 레가야 전역을 감싸는 대령결계(對靈結界)의 핵이 위치한 곳이다.

흑마법사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재수없게 눈먼 마법이 날아들어 결계를 망치게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수석 궁정마법사 헬루타 마야드 그람마인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에일런과 대치하게 하여 좀 더 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테지만, 이미 늙을대로 늙어버린 노마(老馬)는 현재 병상을 지키는 중이었다.

평생토록 레가야에 충성을 바쳐온 늙은 마법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깎아가며 싸울 것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억지로 시켜 못할 것이야 없겠지만, 병약한 그를 보조하기 위해 오히려 효율은 급락해버릴테니까.

불편한 신음소리가 목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물론 그것을 풀어놓을만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미노스티야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서 이 불쾌한 상황을 묵인해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어차피 지금의 이 약혼동맹은 미라야에서 '그 물건'을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얼마 안있어 자연스레 파혼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는 저 귀찮은 신언사들을 국외추방시키는 것만 남는다.

'다만 문제는 골치아프군.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인가······.'

대공은 한달 전 미라야에서 보내온 서신을 떠올렸다. 문장이야 이것저것 덧붙여서 화려했지만 그 내용은 대공국간에 오가기 꽤나 어려운 것이었다. 일종의 지원요청서였으니 말이다.

서신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얼마 전 유적을 발견해 탐사한 결과 강력한 생령의 심장석을 발견했다. 그러나 심장석의 파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대정령 내지는 용급의 심장석으로 추정된다. 강력한 흑마법사를 보내 이 심장석을 처분해준다면 고맙겠다.]

빌어먹을 것들.

저 콧대높은 미라야가 '강력한 흑마법사'라고 찝어 말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레가야에서도 셋 정도밖에 없다.

그러나 아첼레란도는 더 이상 생령을 거둘만한 여력이 없다. 젊은 나이에 헬루타와 비견될 정도로 성장한 녀석이니 함부로 망가지면 곤란하다.

헬루타 역시 이미 늙어 여행이라고는 저승길 가는 것 말고는 전혀 불가능할 정도의 늙은이였으니 일을 맡길 수가 없다.

게다가 미라야에서 파기가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할 정도의 강력한 생령이라면, 생명력이 약해진 늙은이가 제대로 거둘 수 있을리도 만무하다.

결국 어처구니 없게도 대공왕 미노스티야가 직접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일단은 접어두는 수밖에···.'

미라야가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저렇게 뻔뻔한 것은 그 물건이 대정령급 이상의 심장석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생령의 힘의 근원인 심장석은 가공을 통해 마법사의 마력을 크게 증폭시킬 수도 있고, 이미 계약한 생령의 능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물론 가공이 되지 않은 심장석이라면 마력을 부어넣어 고위급 생령을 곧바로 되살려 복속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나 기사급 생령이 대정령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마력을 감안해보면 더더욱 허투로 날릴 수 없는 기회다.

강력한 생령은 레가야에 있어서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다. 그걸 모르지 않을 미라야가, 굳이 '파기하려 했다'는 말을 써보냈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위협이다. 와서 가져가지 않으면 정말로 부숴버리겠다는 것이다.

'미라야의 늙은 여우가 상하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할만큼 돌아버린건가.'

비웃음을 삼키던 대공왕은 문득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이스티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이 마음대로 이탈해버린 딸에게 싸늘한 경멸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기어들어가도 좋다고 허락한 적 따위는 없었으니까.

본인에게는 썩은 나뭇토막 이상의 가치가 없더라도, 최소한 레가야 대공녀라는 직함은 걸려있지 않던가.

미노스티야는 조용히 마력을 움직였다. 가벼운 바람이 그의 곁을 살며시 떠돌았다.

"쉬피아네드."

대공왕의 그림자가 한차례 크게 일렁였다.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화려한 가면의 남자였다. 봄바람을 연상시키는 옅은 녹색의 예복을 두른 남자는 가면 사이로 조금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금빛의 눈동자 아래에는 옅은 비늘의 흔적이 보였다.

날카로운 바람을 연상시키는 그 남자는 곧바로 미노스티야에게 예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움직임에 휘말린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며, 그 사이로 가려져있었던 한 쌍의 작은 뿔을 살짝 드러냈다. 생령, 그 중에서도 인간에 가깝게 몸을 구성해낸 대정령(大情靈)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목소리만으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듯한 미성이었다.

"이스티엘을 찾아라. 이런 혼잡한 상황에서는 너 말고 맡길 자가 없다."

"아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사라지신겁니까? 또 팔이나 다리 하나쯤 부러뜨리기라도 하신건지, 원. 생령인 제가 보더라도 그런 상처를 달에 한 번 입는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가벼운 조소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공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은 인간일지라도, 쉬피아네드는 근본적으로 령에서 화한 존재. 생령 중에서도 최상위의 위치를 차지하는 대정령이다.

원한다면 강력한 폭풍을 일으켜 일대를 폐허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살아있는 재앙의 화신에게, 인간의 대공이라는 직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미노스티야가 쉬피아네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대정령급의 생령을 거둘 수 있는 강력한 마력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레가야 전역을 뒤덮은 대결계의 주인이라는 것 덕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일단 자신에게 머리를 굽힐 수밖에 없는 계약령에게 몸을 굽히는 일은 없다.

강력한 생령일 수록 강력한 마법사가 아니면 계약을 맺을 수 없다.

미노스티야만한 마법사를 찾지 못하는 이상, 쉬피아네드는 지금의 주인이 죽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에 명령에 따르라."

"알겠습니다."

쉬피아네드는 그의 오만한 말투에 벌레 씹은 표정을 하며 인사도 없이 물러났다.

단지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지만, 발걸음을 딛은 순간 바람에 녹아버리듯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미노스티야는 쉬피아네드의 인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의 대공, 쉬피아네드. 탐색의 속성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란 전체의 바람을 읽을 수 있는 그라면 어지간한 탐색령 이상으로 빠르게 티엘을 찾아낼 수 있다.

어느새 방향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멀어진 쉬피아네드의 마력에서 주의를 거둔 미노스티야는 말없이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단단한 흑단목에 금이 가며 음산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연회장의 소란 탓인지, 대정령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애초에 티엘이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런 소란을 틈탔기 때문일 터였다.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혼란은,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왕은 엉거주춤 따라붙으려는 가신들을 물린 뒤 창가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느릿한 걸음으로 대공왕에게 다가왔다.

워낙 느릿한 걸음이라 알아챈 뒤에는 이미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이후였다.

소리없이 접근한 뱀처럼 기분 나쁜 움직임의 주인은 다름아닌 미라야의 대공자 아키온이었다.

몸에 배어버린 듯 자연스러운 예법이 흘러나왔지만 어딘지 어색한 점은 감출 수 없다. 볼모로 온 주제에 적국의 왕 앞에서 태연할 수 있을 인재는 아닌 듯 했다.

하기야, 그러니 볼모로 보내지는 것이겠지만.

"강녕하셨습니까."

"좋은 밤이군, 대공자."

뜻밖에도 아키온은 말을 주저하거나 목소리를 떨지는 않았다.

미노스티야는 의외의 반응에 아키온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사실상 버려진 패라고는 해도, 그 역시 적지 않은 세월을 대공가에서 살아남은 자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나름대로 재주가 있거나, 아니면 쥐죽은 듯 숨죽여 살아온 겁쟁이던가.

이제까지 미노스티야가 알고있던 아키온은 명백히 후자였다.

강력한 영마사들을 배출해온 레가야의 카르티치스 가와 마찬가지로, 미라야의 샤르세인 가는 누대에 걸쳐 빼어난 신언사들을 길러내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키온은, 대놓고 말하자면 썩 훌륭한 자질을 가진 자는 아니었다.

단순히 품은 마력이 많다는 것 뿐, 마력을 느끼는 감각, 마력을 제어하는 기량이 없다면 그저 '우수한 씨앗'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무시해왔던 것과는 달리, 아키온은 미노스티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받쳐주는 것일까. 쉬피아네드가 티엘을 찾아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 소일거리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어떤가. 레가야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드는가?"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더할나위없이 편안한 마음입니다. 게다가 마도에 몸담은 자로서 황홀하기까지 한 곳이 바로 레가야의 수도인 란이 아닙니까?"

미노스티야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왕국이나 공화국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레가야를 벗어난 지역에서 영마사(흑마법사)의 대우가 어떠하던가.

영마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신언사(백마법사)들의 나라, 레가야의 대공자가 입에 담기에는 상당히 무거운 도발이다.

하지만 대공왕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애비나 아들이나 천박한 도발이나 하는 자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곳은 레가야의 심장, 카르티치스의 영토다.

강자는, 약자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법이다.

"과언이네. 귀공의 나라 또한 마도의 깊이가 결코 레가야에 뒤쳐지지 않음을 내 모르지 않아."

"허나 미라야에서는 그 모든 지식이 무겁게 가라앉아있을 뿐입니다. 흑마법처럼 빠르고 격정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미라야의 공자가 흑마법에 관심을 두다니, 의외로군."

"앞으로 몸담을 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습지도 않은 말이다.

흑마법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강력한 친화력을 지닌 자가 아니면 대성하기 어렵다.

하물며 대천사들의 마력에 찌들대로 찌든 미라야의 핏줄에서 뒤늦게서야 흑마법의 자질을 찾아낸다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미노스티야가 그렇게 비웃을 때에도, 아직 아키온의 말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말로만 들어오던 대정령급의 영을 견식할 기회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바람의 대공 쉬피아네드. 아름답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습니다."

'······쉬피아네드를 알아봤다고?'

미노스티야의 눈에 뒤늦은 의구심이 깃들었다.

쉬피아네드는 완전하게 인간의 육신을 갖춘 생령인 대정령이다.

물론 강력한 마법사라면 알아볼 가능성이 없지야 않지만, 미노스티야가 알고있는 아키온의 재능 정도로는 그를 알아볼 능력이 없다.

"······자네, 눈이 꽤 날카롭근. 대부분은 평범한 마법사 정도로 오해하거늘."

"그야······. 관심이 많았으니까요."

아키온은 살짝 웃으며, 마치 연극이 끝나자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처럼 왼손을 들어 가슴을 덮었다.

그 기묘한 미소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온다.

가면극을 끝낸 배우가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연기하던 가면을 벗어던진 그 자신으로 돌아가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니까.

미노스티야는 그 순간, 요 며칠 자신을 괴롭혀온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언사의 마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있는 그 무언가가 원인이었다!

"제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어찌 무관심하게 잊어두고 있었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숙부님-!"

쨍그랑!

아키온이 몸을 완전히 굽힌 순간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미노스티야는 곧바로 옷자락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미노스티야라면 어지간한 공격주문 따위, 그 정도 만으로도 충분히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터져나온 빛은 열기도, 전격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저 미라야의 3왕자 아키온의 모습만이 빛가루가 되어 유리처럼 깨져나갔을 뿐이었다.

"네 녀석은······."

환영의 장막이 날카롭게 깨져나가고 난 자리에는 아키온의 모습을 벗은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칼이 소름끼치도록 하얀 피부와 대비되며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칼날, 단 하나의 적을 베기 위해 수 년을 기다린 칼날같은 분위기가 소년에게 묻어났다.

제국의 귀족층이라면 누구나 맡을 수 있을 짙은 피의 냄새.

한 두 사람의 목숨이 아닌, 제 나이보다 많은 사람들의 피를 마신 처형자의 관록이 손짓 하나 하나에 배어있었다.

그러나 미노스티야가 혀를 차는 것은 그의 분위기가 아닌, 마력의 흐름이었다.

고작해야 열 아홉, 약관도 되지 않은 풋내기에 불과하지만 품고있는 마력은 보기 드물게 정갈했다.

소년은 마력의 여운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비밀의 문을 열듯 소년의 눈이 열렸다.

싸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는 일종의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빨려들 듯, 혹은 지배당할 듯,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을 것 같은 눈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기이한 매력이 푸르게 타오른다. 미노스티야는 그 눈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저토록 선명하지도, 빛을 품고 있지도 않았던 흐리고 죽은 눈이었을 뿐인데, 어느새 되돌아온 눈은 먹이를 노리는 이리처럼 이상한 광채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아마 처음부터 저 불씨는 그의 가슴속에 있었으리라. 그저 때를 기다리며, 미노스티야의 눈을 속여왔을 뿐.

소년의 이름은 르비아 시스피케라 카르티치스, 왕의 추방자이자 미노스티야의 조카였다.

미노스티야는 흩어지는 마력의 냄새를 맡았다.

마력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생령이 없더라도 경험에 비추어 그 속성을 어림짐작 하는 것은 가능하다. 게다가 르비아가 사용한 생령의 마력은, 미노스티야로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생령의 마력이었다.

"환영의 불꽃······. 과연, 그새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성장시킨거로군."

"유라칼드는 제가 가장 처음으로 계약한 생령이었잖습니까."

태연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대공왕의 눈을 가늘어졌다.

"내 진작 너의 숨통을 끊었어야 했거늘. 죽이려 손을 써도 끈질긴 벌레처럼 빠져나가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구나."

담담한 목소리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애초에 제국의 대공가에서 어디 가만히 고개숙이고 떠나가는 자가 있었던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어느새 돌아와 목을 노리는 자들이 대공가의 핏줄이다.

유학을 핑계로 대공의 손을 벗어나려 했던 르비아와, 그런 르비아를 사고를 가장해 숙청하려 했던 미노스티야의 시선이 싸늘하게 부딪혔다.

"어찌되었건 티엘의 약혼식인데 소식조차 보내지 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섭섭했지요."

"재미있군. 그런 이유로 약혼식을 파토낸 것이냐?"

"적어도 티엘이라면, 아키온 공자보다는 저를 반기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연회장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연회의 천박한 분위기에 몸을 숨겼던 미라야의 마법사들은 어느새 미노스티야를 중심으로 반원형의 진을 그린 상태였다.

불쾌한 신언사의 마력이 대기중으로 풀려나가며 미노스티야의 각인을 자극했다.

미라야의 마법사 중 권호를 가진 자는 르비아와 에일런을 포함하더라도 고작 셋. 반면 레가야 쪽에는 권호를 받은 이가 다섯이며, 그를 제외하고서도 열 명 가량의 마법사가 있었다.

미노스티야가 굳이 힘을 쓸 것도 없이 레가야측의 마력이 미라야의 마법사들을 찍어눌렀다.

그나마 적염의 사자 에일런이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미노스티야를 제하고도 전력차가 두 배 가량 나는 상황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자신이 데려온 마법사들이 밀리는 와중에도 르비아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뭔가 믿는 것이라도 있는가?'

대공왕의 손끝이 가볍게 움직였다. 순간 주위의 마력이 한 점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마법사들과 힘을 겨루던 에일런이 기습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염의 창, 적염의 날개. 분노하는 용의 숨결이여, 적을 삼켜라! 벨레이드 가이크!"

주문의 구성도, 영창 속도도 빠르다.

순간적으로 적의 마력을 밀쳐내고 그 짧은 틈에 주문을 완성시킬 정도라면, 그리고 그것이 영마사도 아니라 순수한 신언사라면 확실히 미라야에서 한 손 안에 들 실력이라 말할 수 있다.

창살처럼 예리한 불꽃이 미노스티야를 향해 날아들었다.

화염의 격류는 물리적인 관통력이 매우 강한 주문이며, 동시에 착탄과 함께 맹렬한 화염폭풍을 일으키는 특성이 있다.

르비아가 유효범위에 들지 않을거라 확신한것인지, 아니면 르비아를 버림패로 삼으려는 것인지 애매했다.

그러나 미노스티야는 그저 단순히 마력만을 끌어올려 날아드는 화염의 창을 잡아챘다.

에일런에게 '적염의 사자'라는 이름을 부여해주었던 그의 성명절기가 대공왕의 맨손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붙잡혀버렸다.

대공왕의 마력에 억눌린 주문은 미노스티야를 집어삼켜야 할 폭염조차 일으키지 못한 채 처참하게 짓눌려 부서졌다.

손 안에 남은 마력의 파편을 떨어뜨린 미노스티야는 여전히 뜻모를 미소를 짓고있는 르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네 녀석이 항쟁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적염의 사자 정도의 거물까지 빌려줄 이유는 없다. 대체 미라야는 어떻게 움직인거냐."

"왜, 불안하십니까?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까봐?"

분명히 우위에 선 것은 미노스티야일 터였다.

연회장 안에서 미라야의 세력은 극히 위축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비장의 수로 데려왔을 에일런조차 미노스티야에게 제대로 타격을 입힐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쯤 했으면 아실텐데요. 그 손으로는 제 옷깃조차 쥐지 못한다는걸."

에일런의 강력한 주문조차 우습게 깨뜨리던 미노스티야의 손길은 허공에 못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약간만 더 뻗는다면 르비아의 머리를 쥐어 터뜨릴 수 있을텐데도, 대공왕의 막대한 마력으로도 그 앞의 보이지 않는 벽을 깰 수 없었다.

얼굴을 찌푸린 미노스티야의 마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 위에 새겨진 각인이 점점 강하게 요동치며 미노스티야의 몸에 흐르는 마력을 제멋대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의지도 아니며, 연회장 안의 이질적인 마력에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복속되어 있던 가장 강력한 생령, 쉬피아네드가 누군가와 전력을 다해 싸우며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누구냐. 올파인이 직접 오더라도 레가야 내에서 쉬피아네드를 직접 상대하진 못한다. 대체 누구를, 아니, 대체 어떻게 불러온거냐!"

"숙부님도 잘 아실만한 조건입니다."

르비아는 활짝 웃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순수해보이는 미소였지만, 그 눈빛에 얼핏 비치는 것은 광기에 가까운 살의였다.

그 일그러진 웃음이 미노스티야의 분노를 일깨웠다.

"미라야의 심장석을 말하는건가? 우습군. 네가 대정령급의 생령을 감당할 수 있더냐? 갓 스물도 되지 않은 녀석이? 대담한 것은 인정하지만 실력과 담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네 그릇이 과연 그것을 담을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장난질로 마령으로 전락하기라도 할 생각이더냐!"

키득.

순간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미노스티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감히 대공왕이 말하는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대공왕이 말을 마치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그 웃음소리는 이어졌다.

웃음소리의 주인은 바로 르비아였다.

르비아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애써 죽이며 미노스티야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불길하다. 지나친 자신감은, 그를 마주하는 자에게는 불안감을 가져오는 법이다.

미노스티야는 심장을 죄어오는 듯한 불안감을 노려보았다.

"감당할 수 있냐······. 감당할 수 있냐고 물으셨습니까······? 하, 아하하하하! 겨우 대정령을? 겨우 대정령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르비아의 웃음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유쾌하다 못해 광기까지 비칠 정도로 커진 그의 웃음소리는 좁은 홀을 온통 메워버릴 듯 했다.

르비아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미친듯이 웃다, 갑자기 오른쪽 팔의 소매를 찢어냈다.

미노스티야는 그의 오른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법사로서 어느정도의 경지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마력 각인이다.

그러나 그의 오른팔이 완전히 드러났을때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뿌리내렸던 각인이 완전히 변해있었다. 분명히 손바닥 정도였을 각인은 팔꿈치에서 손목에 이르는 팔뚝 전체를 휘감은 복잡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 형태도 이전과는 달랐다. 각인이 성장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 가당치도 않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휘감기며 팔뚝을 온통 뒤덮은 기이할정도로 매서운 기운은,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르비아의 각인도 각인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공왕의 각인이 일으키던 반응도 끊겨버렸다. 쉬피아네드의 자취가 눈 녹듯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전투가 끝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취가 사라지진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쉬피아네드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아닌 쉬피아네드의 죽음. 대정령급의 생령조차 이리도 간단히 죽여버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미라야에서 극비리에 '문'이 열렸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르비아는 미노스티야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국마다 희미한 검은 연기가 가늘게 올라왔다.

연기에서 풍겨나는 마력의 잔향은 아첼레란도가 가진 생령중 하나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생령의 이름은 파드미엘, 속성은 죽음.

파드미엘은 기사급에 이르는 강력한 생령이었지만, 눈앞의 마력은 결코 그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가 새롭게 권호를 받았죠."

미노스티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악다문 그의 잇새에서 무언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권호라고 했느냐."

"예. 극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미 권호를 가지고 있던 자에게 새로운 권호가 주어졌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아실테죠."

르비아가 다시 팔을 들어올렸다. 복잡하게 새겨진 각인이 천천히 맥동하기 시작했다.

르비아에게 깃들어있는 마력, 그리고 르비아가 지배하고 있는 마력이 하나로 엮여 실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천천히 숨을 쉬듯 마력을 피워올리는 각인이 불길하게 불타올랐다.

심장이 조여왔다.

대공의 자리에 앉은 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등줄기를 따라 맹렬히 달렸다. 대공의 입에서 거친 호명이 떨어졌다.

"······가이피스, 키안, 벨라드, 아키체, 류미카!"

순간 몇개의 샹들리에가 동시에 깨져나갔다.

비산하는 유릿조각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와 함께 광원(光原)이 사라진 그림자에서 검은 형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형체는 아니다. 온갖 동물들을 아무렇게나 뒤섞은 듯, 기괴한 육신들이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다.

에일런이 화염 격류를 시전하기 전 미리 불러놓았던 어둠 속성의 생령들이었다.

거대한 큰 턱을 부딪히는 갑충, 기괴하게 뒤틀린 채 무수한 입을 여닫는 부정형의 기둥, 무수히 많은 가시털을 빳빳이 세운 야수, 제각기 다른 모습을 취한 생령들이 주인의 명을 기다리며 음산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쳐라!"

다섯 생령 모두 육체를 완성한 기사급의 생령들이었다. 하나를 상대할 때 조차, 마법을 쓰지 못하는 병사라면 서른 명 이상을 희생시켜야 하는 재앙급의 힘이 일제히 르비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진 힘만으로는 쉬피아네드 혼자서 저 다섯을 상회하지만, 한 번에 호흡을 맞춰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는 공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이 곳은 미노스티야의 궁이다. 기사급의 생령만으로도 어지간한 대정령이나 용마저 상대할 자신이 있는 미노스티야에게는, 어쩌면 쉬피아네드 이상의 강력한 일격이라고 할 수도 있을터였다.

그러나 르비아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피하거나, 하다못해 생령을 부르는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쉬피아네드를 쓰러뜨린 조력자를 기다리는거냐. 아니면 다섯이나 되는 기사급 생령을 맨몸으로 상대하겠다는거냐.'

차라리 필사적인 저항을 보였다면 안도할 수 있었으리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핏덩이로 만들며 연회장에 긴 흉터를 남기는 생령들 앞에서, 그들이 마치 정원의 나비라도 되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미노스티야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는 소용없습니다, 숙부님."

인간의 표정이 어디까지 소름끼칠 수 있는지, 미노스티야는 깨닫고 말았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들어올린 손이 마력을 흩뿌렸다.

마력은 안개처럼 르비아의 주위를 휘감았고, 잠시 후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산 폭풍, 미친 바람.

옅은 안개 사이로 번뜩이는 빛이 수없이 스쳐지나갔다. 그 마력은 방어를 위해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것들을 가차없이 베어내기 위한 반격이었다.

단단한 갑주를 가진 가이피스가 처음으로 르비아의 마력에 스쳤다.

강철보다 단단하다고 자부하던 껍질이 진흙처럼 간단히 베여나가며 흉폭한 갑충이 순식간에 잘게 찢겨나갔다.

키안도, 벨라드도, 단 한 순간조차도 몰아치는 칼날의 폭풍 앞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가까스로 멈춰선 류미카조차도, 스스로의 마력을 뚫고나온 르비아의 팔에 붙잡혀 가차없이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뭐·····?"

다섯 마리의 생령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마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영장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생령을 불러내 미노스티야의 생령을 약화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맨 몸으로, 마력만을 흩뿌려 다섯 체의 생령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었다.

그저 그런 보통의 생령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자그마치 기사급의 영들이 이토록 간단하게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일이었다.

미노스티야는 르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커다란 의혹과 분노로 흔들렸다.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대공왕과는 반대로, 르비아는 여전히 가볍게 웃으며 미노스티야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러나 르비아의 웃음 띤 눈을 직시한 사람은 그 안에 숨어있는 살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쌓이고, 뭉친, 원독에 가까운 살기를.

"아참, 미라야에서 발견된 그 심장석 말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녀석이었는지."

르비아는 마치 이웃에 누가 이사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서는 점차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안개처처럼 점점 짙어지는 그 형상은 분명히 생령이었다.

미노스티야는 마침내 르비아의 생령을 볼 수 있었다.

저런 터무니없는 녀석이었을 줄이야.

강력한 생령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천천히 나타나는 '녀석'은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엄청난 존재었다.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계셨겠죠. 미라야와 혼인 동맹을 가장해서라도 가져야겠다 생각하셨으니. 하지만······. 숙부님도 이 정도일 거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하셨을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용이었다.

저 강대한 생령들의 우두머리이자 근원. 적에게는 한없는 공포와 악몽으로, 아군에게는 절대적인 승리의 화신으로 각인되는 존재.

그 어떤 적의도 뚫지 못할 칠흑의 비늘과, 보는 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세 개의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이마에 새겨진 신대의 언어는 세상에서 단 열 두 존재에게만 허락된 이름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원의 용······."

"다시 한 번 소개하죠. 르비아 시스피케라 카르티치스. 권호는 성좌의 주인, '흑천의 날개'. 시룡(弑龍) 그란드리아의 계약자."

르비아의 당당한 선언에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허탈한 마음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절망적이기에, 미노스티야는 이내 연회장이 울릴 정도로 격하게 일갈했다.

"그란드리아······. 하하하, 시원의 용? 시원의 용이라고? 하하······하하하하하!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냐!"

시원의 용이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말처럼 쉽게 발견될 것이었나? 한 시대에 한 명 나타나는 것으로도 넘칠 정도라 말하는, 마법사로서는 최고의 경지다.

르비아의 재능은 분명 뛰어난 편이었고, 그를 경계해 미리 싹을 자르려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감히 시원을 담을 그릇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은 잔혹했다. 헛소리 집어치우라며 강경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눈앞의 용이 평범한 생령이 아니라는 사실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고뇌를 즐기기라도 하듯, 르비아는 한껏 비웃음을 담은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미라야에서 발견된 심장석에 대해서 아실테지요? 대정령 이상의 강력한 생령의 심장이라고 전해드렸을텐데 말입니다."

"설마······! 하지만 발견된 건 심장석이라고 했다. 너 정도의 마력으로는 불가능해! 대체 어떻게 부활시킨거냐!?"

"예. 심장석이 발견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서안 어디에서도······."

이윽고 검은 용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매서운 포효도, 절대적인 죽음을 선고하는 숨결도 내뿜어지지 않았지만, 단지 그 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시룡의 강림과 동시에 그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죽음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나 기둥이 서서히 모래로 부스러지고, 엉망으로 짓이겨졌던 음식물들은 순식간에 메마르며 썩어갔다.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공기를 마신 자들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쓰러졌고, 독이라도 마신 것처럼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며 또다른 지독한 독을 뿜어냈다.

그 죽음의 장 가운데, 오로지 르비아만이 평온한 얼굴로 검은 용에게 몸을 기댔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시룡 역시 두 앞발로 르비아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죽음의 현현(顯現), 그 자체로서.

검은 용은 잠시 후 부드럽게 고개를 내려 르비아에게 친근하게 머리를 기대었다. 르비아는 그 콧등을 애무하며 역시 친근한 눈으로 용을 바라보다, 미노스티야를 향해 조소했다.

"그 심장석이 '잠든 채로 발견되었다고는' 하지 않았을테니까."

르비아의 말이 사형선고처럼 떨어진다. 미노스티야는 이를 갈며 르비아를 노려보았다. 이제 승산은 없었다.

본래 용이란 생령중에서도 최상위 계층이지만, 그중에서도 단 열 둘, '시원의 용'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애초에 격이 다르다.

대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신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말 그대로 모든 생령들의 시발점인 존재들이니.

쉬피아네드를 공격한 것도 분명히 그란드리아였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패가 다 드러나버린 도박사는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법.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르비아는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는 미노스티야를 보며 조금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미노스티야를 위해 일부러 그란드리아의 마력을 해방하도록 했지만, 생각보다 그가 오래 버티는 바람에 애먼 사람들만 죽어가고 있었다.

"추하군. 승패는 갈렸다, 미노스티야. 그 더러운 목숨, 이제 놓는 것이 어때?"

"건방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냐고는 묻지 않겠어. 난 당신에게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아. 당신도 내 아버지에게 칼을 찌르며 죄책감따위 느끼지 않았을테지?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건 하나 뿐이야. 당신의 그 더러운 피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

"르비아!"

일갈의 포효와 함께 주위의 유리창들이 일시에 깨져나갔다. 검푸른 마력의 구체가 십여 개나 허공에 허공을 누볐다.

단순한 마탄이 아니다. 하나 하나가 살아 움직이듯 연회장을 휘젓고 다니며 미라야의 마법사들을 덮쳤고, 조금 뒤에는 아직 살아있는 레가야의 마법사들과 귀족들의 심장마저 꿰뚫기 시작했다.

산 자의 마력을 강탈해 타오르는 악랄한 주문은 한 명의 피를 뒤집어쓸 때마다 점점 그 기세를 더해갔다.

그와 동시에 미노스티야의 몸 주위로는 검고 흰 기이한 불꽃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솟구쳤다.

대공의 몸을 두르는 흑염의 휘장이 그란드리아의 마력에 맞서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심연의 사제 미노스티야, 그 권호에 어울리는 마력 방출에 상당한 수의 귀족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갔다. 르비아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비쳤다.

'시원의 용이라 해도 그 주인이 아직 일천한 몸, 그 힘을 제대로 다룰 가능성은 낮다. 일격에 저 마력을 뚫으면······.'

가신들이라면 애초에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니, 목숨쯤 거두어도 상관 없다.

봉신들? 그들 역시 충의를 맹세했거나, 혹은 기회를 틈타 르비아에게 붙을 녀석들이다.

그 하찮은 생명을 불태워, 감히 항쟁을 걸어온 애송이를 잠재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놈들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수많은 마법사와 인간의 마력과 생명력을 빨아들인 마탄들은 기사급의 평균치를 웃돌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신하들의 목숨을 짜내 만들어진 재앙이, 검은 불꽃의 뱀과 함께 날카로운 창이되어 르비아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마현(魔弦)의 꼭두각시."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쇄도하던 마탄도, 바닥을 가르던 흑염도 거짓말처럼 제자리에 멈춰섰다. 있을 수 없는 현상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미노스티야는, 문득 허공에 어지럽게 드리워진 마력을 눈치채며 이를 갈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수백 가닥의 실이 마탄과 흑염을 몇 번이고 꿰뚫고 있었다.

그 모든 실의 한 끝은 르비아의 그림자로 이어져있었다.

야릇한 웃음과 함께 르비아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수한 실들이 서로 교차하며 붙들고 있던 미노스티야의 마탄을 갈갈이 찢었다.

그와 동시에 미노스티야의 가슴으로부터 수십 개의 가시가 치솟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슴을 꿰뚫린 그 직후에서야 깨달을 정도로 은밀하고 빠른 일격.

몸 속에서부터 내장을 찢고 솟아난 검은 가시들은 표면에 묻은 피조차 빨아삼키듯 짙은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채로 전신이 꿰뚫린 미노스티야의 입에서 경악이 섞인 핏덩이가 툭툭 떨어졌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고도 즉사하지 않은 대공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가시를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서 먹물처럼 짙은 마력이 흐르고, 이내 검은 가시들을 일제히 바스러뜨렸다.

그러나 용의 마력을 깨뜨린 위용에도 불구하고, 그가 얻어낸 것은 비참하게 바닥으로 쓰러질 권리 뿐이었다.

끈적한 핏덩이가 목을 타넘어 울컥 쏟아졌다. 황제조차 무릎꿇릴 수 없다는 육대공의 한 사람이었던 미노스티야였지만, 즉사를 간신히 면한 치명상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물어지듯 쓰러진 그의 귓가에 조카의 싸늘한 미소가 다가왔다.

"조금은 놀랐군. 오랜 세월 마력을 다뤄온 경험과 그걸 뒷받쳐줄 마력량 덕분인가? 고작해야 육선의 마력으로 그란드리아의 마력을 깨뜨릴 줄이야."

"······쿨럭!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두거라······. 네 녀석······,큭, 은 이스티엘······을, 쿨럭! 죽일······생각인가······?"

"이제와서 당신이 할 말이 아닐텐데. 애초에 그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지. 당신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으니까."

"크으하하하하하······!"

피를 씹으며 분노하던 대공왕이 피에 물든 손을 들어 르비아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뭐가 그리 우습지?"

"너는······, 네 녀석은······! 그걸 죽이지 못한다. 크, 크흐흐흐흐, 쿨럭! 내가······, 내가 널 모르더냐? 너는, 그걸 죽일 수 없어. 크하하하!"

르비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자신의 딸을 '그것'이라고 부른 것인가.

하지만 동요는 순간일 뿐,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은 르비아는 차갑게 내뱉었다.

"과연 어떨까. 말했지? 이 땅에, 네놈의 피는 남기지 않아. 설령 티엘이 내 앞에 당도한다고 해도, 그 아이가 과연 검을 들 수나 있을까? 그 물러터진 녀석이?"

미노스티야의 얼굴에 광기와 집착이 짙게 피어올랐다.

"그건 내가 길러낸 후계······,자다. 언젠가 네 녀석의 목을 찌를 비수이며······, 네 소망을 독살할 독약이다······!"

"······끝까지 딸이 아닌 도구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말 끝도 없이 추악하군."

화르륵! 조금 전 미노스티야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공왕의 적을 불사르는 대신, 미노스티야 자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한 순간 미노스티야였던 것을 모조리 태워버린 흑염은 나타날 때 그랬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대공왕이 부여잡았던 자신의 옷을 불쾌한 표정으로 털어낸 르비아는 몸을 일으키며 연회장 안의 그림자들을 향해 외쳤다.

"쓸어버려라! 살아있는 것들을 남겨두지 마라!"

대공왕 미노스티야 필레인 카르티치스.

카르티치스 대공가의 서른 두 번째 주인이며, 항쟁으로 목숨을 잃은 다섯 번째 대공왕. 872년 3월 27일 서거.

시룡의 포효와 함께 카르티치스 대공가의 '항쟁'은 또 한번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미노스티야는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그냥 불량아빠 정도였는데, 다듬고 다듬다보니 막장부모 소리조차 못 붙일 악질이 돼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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