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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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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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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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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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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3장-개화開花(6)

DUMMY

몇 번이나 약속을 지키라는 듯 눈치를 살피던 티엘은 멀리 떨어진 아첼을 흘끗거리며 로니의 귀에 입을 가져간다.

"사실 내일이 언니 생일이에요. 그래서 선물을 사 주고 싶은데······."

"아하······."

아첼의 생일은 1월 15일, 바로 내일이었다.

그동안의 감사를 담아, 제 손으로 번 돈으로 선물을 사 주고 싶었기에 다소 억지까지 부려가며 무리하게 용돈을 모은 것이었다.

티엘이 미리 봐둔 물건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게다가 가격이 수시로 오르내리는 까탈스러운 물건이었기에, 생전 처음으로 돈 걱정을 하며 한푼 두푼 저금해 여유있게 자금을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생일이 가까이 다가오니 그 물건이 적당한지, 다른 좋은 물건은 더 없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 바람에 이리저리 고민하던 차였다.

"착하네. 선물은 뭘로 하려고 했는데?"

"목걸이에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언니는 장신구 같은걸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요."

티엘은 귀걸이 한쌍 외엔 반지나 팔찌 하나도 없는 아첼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폭 쉬었다.

아아, 왜 이렇게 바보같았을까.

하지만 몇 달 전, 심장석을 처분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본 목걸이는 티엘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은색 줄에 두 개의 초승달 장식이 겹쳐진 단순한 형태의 목걸이.

겹쳐진 초승달 위에 놓인 장식부를 열면 초상화 따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초승달.

매혹의 눈동자라고도 불리는 초승달은, '매혹의 밤안개'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는 문양이었다.

게다가 그 목걸이는 생령의 기운을 어느정도 안정화시켜주는 하급 영장이었다.


아첼에게 듣기로 '원'에 소속된 정식 흑마법사는 정화석이라는 물건으로 마력을 안정화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첼에게는 정화석이 없었고, 최근에는 제법 나아진 상태라고는 해도 여전히 손상된 마력을 모두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정화석을 조금이라도 대체해줄 수 있는 물건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목걸이 곁에 짧막하게 적힌 설명서를 읽고서 눈이 번쩍 트인 티엘은 일단 목걸이의 주인에게 자신이 그 목걸이를 살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두었다.

그러나 생일이 하루 하루 다가오며 뒤늦게야 가장 중요한게 생각났으니······.

티엘은 자괴감에 빠져 벽에 이마를 찧으려 했다.

로니가 말리고 아첼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자 얼른 시치미를 떼긴 했지만 역시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시로 나가는건 내일이라고 했으니 선물을 사려면 더이상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 미리 준비를 안해둔게 이렇게나 후회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로니는 해맑게 웃으며 티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구나. 걱정 마. 티엘의 선물이라면, 그게 뭐든 아첼도 기뻐할거야."

"그럴까요······?"

"그럼. 선물에서 가장 중요한건 마음이야. 그리고 티엘도,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잖아?"

그제서야 티엘은 웃음기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아첼한테 가봐. 언니가 걱정 많이 하더라. 선물을 주면서 멋지게 사과하렴. 알았지?"

"네! 고맙습니다!"




* * *




"어제 로니랑 무슨 얘기를 했어?"

"비밀이라니까, 비밀!"

"나원 참······. 쪼끄만한게 비밀은 대체 무슨 비밀이니. 언니는 슬프다."

다음날 정오, 아델에 도착한 두 자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미줄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었다.

마법 기물을 취급하는 가게가 꽤 깊은 구석에 박혀있기 때문이었는데, 거의 짜증이 날 정도로 길이 복잡해서 몇 차례나 와 본 길이어도 헛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길이 복잡한 것도 있지만, 일부러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종의 결계 같은 것을 둘러둔 상태이니 헤메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첼이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지표를 찾아냈다.

가까스로 가게를 찾은 아첼은 한동안 영장사(靈杖師)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어제의 심장석을 삼백 칼브람이라는 두둑한 금액에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나저나 삼백이라니, 제법 많은데. 좋아, 너도 같이 사냥한거니까 네 몫은 챙겨줘야지."

아첼은 티엘에게 10 칼브람짜리 금화 세 개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티엘이 군말없이 돈을 챙기자 싱긋 웃으며 두 개를 더 꺼내 쥐어준다.

"그래도 이번엔 고생 많았으니까 좀 더 줄게."

"진짜?"

"뭘 그렇게 좋아하는거니? 이럴 때는 딱 애라니까. 후후훗."

아첼의 웃음기 가득한 핀잔에도 티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아첼은 짐짓 창피하다는 듯 걸음을 재촉해 티엘과 떨어졌지만 티엘의 맑은 웃음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굳이 막지 않았다.

"그나저나 벌써 점심때네. 추우니까 뭔가 따뜻한거 먹으러 갈까?"

"잠깐만, 아첼. 나 잠깐 다른데 갔다 와도 돼?"

깜짝 선물을 위해 비밀을 지키는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다.

선물을 사는 장면부터 보여서야, 놀래켜주는 의미가 없다.

"응? 뭐 살거 있어? 같이 가줄게."

"별거 아니니까 따라오진 말구. 응? 나 혼자 잠깐만 다녀올게."

아첼의 눈이 티엘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티엘은 슬쩍 몸을 돌려 아첼의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아첼은 평소보다 조금 불룩해진 티엘의 주머니를 알아채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요새 이 녀석이 받아간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다. 뭘 사고 싶어서 돈을 타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은 해두는게 좋지 않을까.

"이상한거 사면 혼난다."

아첼은 선고라도 하듯 티엘에게 딱 잘라 말했다.

"윽, 이상한거라니? 너무해."

"애가 큰돈 가지고 다니면 욕심 생기는 법이야. 절대 안돼."

망했다.

순조롭게 풀려가던 계획이 마지막에 좌절되자 거의 울먹거릴 지경이 된 티엘은 떼라도 써야 하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간절한 눈으로 아첼의 팔을 붙들고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첼의 표정은 단호했다.

새삼 아첼의 둔감함이 안타까워진 티엘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에?"

그때 갑자기 아첼이 피식거리더니 티엘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찬 바람에 얼얼하던 이마에 따끔한 아픔이 찾아오며 저절로 눈물이 맺혔다.

동시에 아첼은 파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훗, 그래도 그건 네 돈이니 사고싶은거 사도 상관 없어. 네가 열심히 번 돈이잖아? 그럼 나한테 굳이 허락 받을 필요는 없는거야. 좋아, 조심해서 갔다와. 알았지? 그리고 끝나면 바로 '닐렌의 유리잔'에서 만나는거다?"

"응!"

티엘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돌려 신나게 달렸다.

이번엔 방금 전 눈길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충분했기 때문에 조금도 헤매지 않았다.

모퉁이를 세 번 돌자 다시 마도구점이 눈에 들어왔다.

티엘은 조금씩 미끄러지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가게 안까지 뛰어들어갔다.

"넌 조금 전에 왔던 애 아니냐? 뭐 놓고간 물건이라도 있어?"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난쟁이 노인이 티엘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아첼에게 산 심장석을 가공하느라 탁자 위에는 단안경이나 줄, 안정용 시약 등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마석 가공은 상당히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보통은 작업중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안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인은 작업 도구를 한 쪽으로 확 밀어버리고 티엘을 마주한다. 티엘은 제법 묵직한 지갑을 어루만지며 주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전에 여기 있던 목걸이, 아직 안팔렸죠?"

"목걸이?"

티엘은 급한 마음에 손으로 목걸이의 모양을 대강 그렸다.

"이렇게, 이렇게 초승달 두 개가 겹쳐진 목걸이요. 아직 있죠?"

"초승달······ 두개······. 아, 안정화 술식이 걸린 목걸이 말하는거로군? 그야 일전에 그렇게 팔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잖으냐. 오, 그렇군. 오늘이 그 날인 게로구나?"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한 켠에 따로 빼 두었던 나무상자를 티엘 앞에 밀어주었다.

티엘은 조금 긴장한 손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은빛 초승달과 그 가운데의 새겨진 여신의 상이 맑은 빛을 뿌려 티엘의 혼을 쏙 빼놓았다.

금방이라도 파르르 떨릴 듯한 여신의 날개깃도, 목걸이의 외곽을 따라 부드러이 물결치는 파도도, 섬세하게 새겨진 문양은 대공녀로서 좋건 싫건 수많은 장신구들을 봐온 티엘의 눈에도 더없이 아름다웠다.

아첼에게도 잘 어울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얼마에요?"

노인은 느릿한 손으로 너덜너덜한 장부를 꺼내 뒤적거렸다.

가장자리가 울어서 두꺼워진 장부는 조금만 더 있으면 후두둑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지만 노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원하는 항목을 찾아내 티엘에게 보여주었다.

삼백 오십 칼브람.

막 흥분에 젖어있던 티엘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이번에 넘긴 심장석보다 더 높은 가격이다.

'삼백 오십?'

낭패다.

티엘이 알고있기로는 분명히 삼백 칼브람이었다.

처음 목걸이를 본 날 가격을 물어봤을 때도 대략 삼백쯤 한다는 대답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그 동안 재료비가 변동이 있었다면······.

장부를 자세히 살피던 티엘은 300이라는 숫자 위에 줄이 그어지고, 몇 차례나 고쳐진 끝에 맨 위에 350이라는 숫자가 올라앉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값이······."

"최근 원자재 값이 폭등해버려서 어쩔 수가 없구나."

티엘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어떻게든 달래보려 애쓰며 지갑을 뒤집었다.

10칼브람 금화가 좌르르 흘러내려 작은 산을 만든다.

그동안 저금한 돈 전부를 꺼낸 티엘은 금화를 열 개씩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세 본다고 해도 금화의 수는 변하지 않았다.

그 곳에 있는 것은, 50칼브람이나 모자란 삼백 칼브람 뿐이었다.

"자, 잠시만요!"

티엘은 황급히 다른 주머니를 다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열세 살 어린아이가 50칼브람이라는 거금을 주머니에 넣고다닐 리가 없다.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그래봤자 몇백 칼람 정도였다.

저도모르게 손에 힘이 빠지며 동전들이 손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미안하구나."

"아······."

실수다.

분명 영장은 정해진 가격이 없고, 재료비의 변동에 따라 가격차이가 쉽게 생긴다.

하지만 그래봐야 하급 영장, 평균적으로 5칼브람 이상 가격이 변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하필이면 최근 공화국의 최대 은광인 리멘그람 광산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 은의 값이 폭등했다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목걸이의 주 재료는 리멘그람의 은과 우룬의 사슬이었다.

다른 재료라면 몰라도, 영장에 들어가는 은은 지역에 따라 마력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에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티엘은 작은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목걸이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분하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티엘은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쓸쓸하게 돌아섰다.

"얘야, 잠시만 기다리렴."

-달칵!

하지만 노인은 티엘을 멈춰세우며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조금 더 작은 함을 새롭게 꺼냈다.

노인은 손끝으로 상자를 열어 안에 든 것을 티엘에게 보여주었다.

흑단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함 안에는 티엘이 사려고 했던 것과 같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아!"

자세히 보면 완전히 같은 물건은 아니었다.

두 개의 크고 작은 초승달이 맞물리는 모습은 같았지만 크기가 훨씬 작았고, 표면에 자잘하게 새겨져있던 무늬도 없었다.

중앙의 로켓 역시 섬세한 조각을 더하는 대신, 옅은 푸른빛의 보석을 동그랗게 세공해 달아둔 형태였다.

원래 사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모양새였다.

그나마 가운데의 보석이 마석이었다면 어느 정도 영장으로서의 가치가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보기에만 예쁜 평범한 보석이었다.

"어떠냐. 가격은 이백 칼브람이다. 조금 밋밋하고 힘도 약하지만,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정화식은 새겨놓았단다."

티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잔뜩 어두워졌던 얼굴이 해맑은 웃음으로 변하는 것을 본 노인은 모처럼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두 번째로 꺼내든 목걸이도 재료비만 이백 칼브람이 들어간 물건이다.

티엘이 본 장부는 어디까지나 재료값을 기준으로 적힌 것 뿐, 실제 가격은 거기서 추가로 더 붙게 된다.

하지만 노인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몇십 칼브람이 작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성인에게는 크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금액도 아니었다.

반면 이 어린 꼬맹이에게는 단돈 일 칼브람의 가치조차 말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라는 사실은, 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목걸이가 티엘의 손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상자를 두른 리본을 한차례 건드리자 그 위로 작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간단한 봉인 마법으로, 마력으로 깨뜨리지 않으면 풀리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야말로 구맙구나. 조심해서 가보렴."

"네! 감사합니다!"

노인이 건넨 거스름돈과 선물 꾸러미를 챙긴 티엘은 가게를 나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하늘엔 구름이 밀려와 새하얀 눈송이가 조금씩 쏟아지고 있었다.

천천히 떨어지던 눈송이가 손에 떨어지자 문득 손에 든 물건이 떠오른 티엘은 혹시 물이라도 묻을까 목도리를 풀어 선물을 감쌌다.

그래도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편이라, 어제처럼 앞이 안보이는 지경은 아니니 다행이다.

티엘은 옷깃을 세워 찬바람을 막으며 잰걸음으로 닐렌의 유리잔을 향했다.




* * *



아델 시 중앙에는 조그만 광장이 있다.

가끔 음유시인이나 싸구려 마법사들이 푼돈벌이를 하러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연인들이나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량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이 광장의 입구에는 꽤 커다란 식당이 있었다.

공화국 북부의 토속 신앙에서 약초를 나눠주는 여신의 이름을 딴 이 찻집은 그 이름답게도 이런 작은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유리 세공품을 장식으로 내걸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첼은 마침 창가 자리에서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래뵈도 단골이라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어도 입맛 다실 거리는 나왔던 모양인지 빈 접시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하지만 가게 안으로 막 들어온 티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첼은 금새 생기를 찾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잖아. 어디 갔다 오는거야?"

"미안. 이따가 다 말해줄게."

티엘은 아첼의 반대편에 앉으며 선물 꾸러미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아첼이 궁금한듯 흘깃 보긴 했지만 새침한 표정으로 답을 피했다.

"뭐 먹을래?"

"아첼은 뭘로 하려고?"

"아무거나."

"그럼 내가 시킨다? 여기 주문 받아주세요!"

티엘은 커튼을 걷고 나타난 종업원에게 아첼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호들갑스럽게 일어나 주문을 취소한 뒤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혹시······그러면······어때요?"

티엘이 요구하는 것이 뭘 위한 것인지 눈치챈 종업원은 살짝 미소지으며 티엘에게 몇 가지 제안을 속삭였고, 두 사람이 잠시동안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자 혼자 소외된 아첼은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종업원의 목소리가 가끔 들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단어 한두개라 도무지 맥락을 잡을 수가 없다.

"요즘 쟤가 진짜 이상한것 같지? 은근히 나 두고 따로놀기 좋아하고. 소외되는 언니 맘을 아는 지 모르겠네. 흥, 이제 맘 식었다 이거지?"

종업원이 진한 미소와 함께 멀어지자마자 혼잣말을 가장한 아첼의 뚱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간 티엘이 자꾸 자길 따돌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서운했던 모양이다.

티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오래간만에 아양을 떨어봤지만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는 자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것이 한편으로는 티엘을 놀려먹으려는 짓궂은 심보도 섞여있다는 것을, 티엘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창밖을 보는 것도 티엘의 순진한 모습에 저도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십 년 이상 묵은 능구렁이를 상대로 비밀을 지키기엔, 순진한 열세 살짜리의 양심이 너무나 무겁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알아서 말하려나? 후후후, 여전히 귀엽다니까.'

"여기 주문하신대로 나왔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돌아와 뚜껑을 덮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티엘이 뭘 주문했을지 궁금해진 아첼은 고개만 슬쩍 돌렸다가 뚜껑이 씌워진 것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다음 순간 종업원이 내려놓은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은 정성스럽게 세공 된 유리잔이었다.

보통 사용하는 자기 찻잔이 아니라, 제법 비싼 것을 시켰을 때에나 따라오는 유리잔이다.

게다가 잔에 가득 담긴채 감미로운 향을 퍼뜨리는 것은 대륙 북부의 찬 바람을 맞아야만 자라는 유릴렌 차였다.

익티아누스 제국령이나 미라야 북부는 가야 볼 수 있었고, 이런 외진 도시에서는 찾기도어려울 귀한 물건이다.

무역강국 레가야를 떠난 이후로 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찻잎이었다.

문득 아첼의 눈가에 묘한 향수가 스쳤다.

레가야 왕궁에서 티엘과 함께 마시던 것이 바로 이 유릴렌 차였으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던 날들, 티엘과 정원에서 보내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종업원은 계속해서 접시를 내려놓은 뒤, 중앙의 하나만 빼고 덮개를 열었다.

키리아 타르트와 사과 파이의 달콤한 향기가 입맛을 돋우고, 따끈한 닭고기 수프는 냄새만으로도 추위를 잊게 해주었다.

다과회에 어울릴법한 조그만 병 안에는 설탕에 절여진 새큼한 과육이 들어있었다. 제국에서 아첼이 즐겨 찾았던 앵두 절임이었다.

그밖에도 식탁에는 한 상에 어울린다고는 하기 어려운 음식들이 십여 가지나 올라와 있었다.

하나 하나는 도저히 연결고리가 없을만한 차림이었지만, 그 가운데 단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올라온 요리들은 모두, 레가야에서 티엘과 함께 먹던 음식들이라는 점이었다.

내심 놀라는 와중에 덮개를 열지 않은 중앙의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점원은 마지막 접시는 열지 않고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커튼을 치고 물러났다.

"아, 설마······."

뒤늦게 뭔가 깨달은 아첼은 천천히 접시 덮개를 들어올렸다.

티엘은 눈을 반짝이며 아첼의 얼굴을 살폈고, 아첼이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해맑게 웃었다.

접시 위에는 소담스러운 케이크 한 조각이 들어있었다.

새하얀 크림 위에는 아첼의 머리칼을 연상시키는 밝은 갈색의 초콜릿으로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사랑하는 아첼, 스물 세 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축하해, 아첼."

티엘은 곧장 환하게 웃으며 축하의 말을 꺼냈다.

아첼은 당황한 듯 버벅거리다 티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제서야 그녀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단어가 한순간 떠올라버린 아첼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처럼 허둥댔다.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에······. 어떻······게? 아니,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건 내가 할 말이잖아. 세상에 자기 생일정도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어야지. 나도 잊어버렸으면 어쩔 뻔 했어?"

티엘은 한 켠으로 치워두었던 선물을 아첼의 앞에 놓았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아첼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른 티엘은 간혹 눈가를 훔치면서도 깨끗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작 티엘 역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조금 젖어든 눈으로 아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숨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다.

한참 후에야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아첼은 몰래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눈가가 발갛게 물든 채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막 목걸이를 걸어보려던 아첼은 문득 그것을 티엘에게 살짝 내밀었다.

아첼이 원하는 것을 눈치챈 티엘은 쪼르르 달려와 직접 아첼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던 모습보다 몇 배는 더 어울리는 모습에 다시 한 번 환한 미소가 터져나왔다.

"내 생일, 기억하고 있을줄은 몰랐네. 어릴 때 한 번인가 스쳐가는 말로 말해줬는데."

"그야 아첼이 생일 때마다 바쁘다고 얼굴도 안보고 나돌아다녔으니까 그런거지. 그래도 이렇게 챙겨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스물 세 살이 된거 축하해, 아첼. 그리고······ 요 며칠 속썩인 것도 사과할게. 미안해, 아첼. 많이 서운했지?"

아첼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이렇게 생일을 챙겨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니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훌륭한 선물을 받았는데 그런건 당연히 잊어버리지, 바보야. 그리고 원래 이런건······, 점심이 아니라 저녁에 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눈가엔 여전히 이슬이 맺힌 주제에 입은 퉁명스러웠지만 티엘은 배시시 웃으며 유리잔을 들었다.

별 수 없다는 듯 아첼도 따라서 잔을 들어올려 가볍게 부딪힌다.

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며칠이나 고민해왔던 화려한 생일 축하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 * *



그날 오후, 아첼은 티엘과 같은 또래가 된 것 처럼 명랑한 모습을 보였다.

어느 가게에서는 음유시인을 만나 노래를 듣기도 했고, 어느 가게에서는 그동안 벼르기만 했던 것들을 사들고 나오기도 하며 아무 걱정없이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집에서 조촐하게 케이크를 만들고 선물을 줄 생각이었지만 예상 외의 변수 덕에 마무리가 훨씬 나았던 것 같다.

"꽤 늦어버렸네, 히히히. 아차암, 아체엘. 배 안고파?"

"별로. 워낙 이것저것 사먹은게 많잖아. 그나저나 여전히 정신 좀 차려볼 생각은 없는거니?"

"왜애애?"

"흐유, 됐다."

가볍게 술까지 한잔 걸친 아첼은 자기를 따라 같이 술을 마셔버려 뻗어버린-사실 먹인 것은 아첼이긴 했지만- 티엘을 업은 채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

윌란 마을은 오가는 사람도 워낙 적어서, 길이라고 해봐야 겨우 우마가 지나갈 수 있는게 한계였다.

자연스레 길동무는 서로 뿐이었으니 생일에 짐덩이를 짊어져야만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나마 티엘이 술버릇은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동안 죽은듯이 자더니, 어느새 잠에서 깨서는 종알종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주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취한 티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쨍쨍거리는 느낌이라 들어주고 있다보니 조금은 피곤한 것도 같다.

'그래도 이렇게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은거겠지?'

아첼은 티엘을 받치던 두 손을 다시 추스르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 반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조각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별, 그래. 이스티엘. 오늘은 정말로 기뻤어. 어쩌면 네 덕분에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운 걸지도 모르겠다.'

등 뒤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속마음을 혼잣말로 중얼거린걸까 흠칫 놀라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첼이 좋다는둥, 자기가 생일을 챙겨줬으니 다음엔 아첼이 챙겨달라는 둥 잠꼬대같은 소리 뿐이었다.

피식 웃은 아첼은 흥겨운 기분을 한껏 즐기듯, 갑자기 노래 한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네 노래 강물에 보내며

네 웃음 달빛에 새기며

하늘에서 내려온 별빛,

땅의 포근함에 안겨 잠드네.


티엘도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아첼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적막한 길을 맑은 목소리가 조금씩 채워갔다.

레가야 지방의 설화중 하나에서 유래한 동요는 티엘이 어릴 적, 시녀장 메리온이 곧잘 불러주던 노래였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시녀장 메리온이 문득 생각나 눈가가 젖어들어간다.

다행히 목소리는 별로 떨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평온한 시간을 깨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리라.


고요한 밤안개 손끝에

조용한 숲이슬 그 안에

낯설고 홀로남은 별빛,

혹시라도 외롭지는 않은지?


"별들이 왜 반짝이는지 알아?"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티엘은 아첼의 뜬금없는 소리에 반문했다.

그러나 아첼은 바로 대답해주는 대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고, 티엘 역시 아첼을 따라 시선을 하늘에 두었다.

그 곳에는 두 사람이 조금 전까지 흥얼거리는대로 지상에 내려온 것처럼 보일만큼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것은 하얗게, 어떤 것은 파랗게, 형형색색으로 하늘을 수놓는 그 작은 빛 조각들을 보며 아첼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일지, 티엘은 궁금해 하면서도 섣불리 재촉하지는 않았다.

"별들은 새벽을 부르기 위해서 반짝이고 있는 거야."

"······그게 뭐야아. 애들이 듣는 이야기도오 아니고."

애 취급 하지 말라는 듯, 티엘의 목소리는 조금 장난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지금쯤 혀를 쏙 내밀고 히죽히죽 웃고 있으리라.

그러나 아첼은 살짝 미소지으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꿈꾸는 것처럼 즐거우면서도 몽환적이어서, 마치 이야기속에 흔히 나오는, 고대의 비밀을 살짝 들려주는 탑의 공주님을 떠올리게 했다.

"해가 지기 직전에 하늘을 보면 떠 있는 별이 있지? 이피안어로는 발라키스티엘, '잇는 별'이라고 불러. 그런데 재미있는건, 이 별은 새벽하늘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별이기도 하다는거야. 그 때의 이름은 아레니스티엘, '샛별'이라고 불러. 그러니까 그 별은 말이지, 어둠이 왔을 때 빛을 잊지 않도록 그 기억을 나눠주는 존재야. 새벽이 올 때 까지 말이지."

"해가 뜨면 다시 사라지는데?"

"······넌 애가 너무 감수성이 없어."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던 말인지, 티엘의 짓궂은 말에 모처럼 분위기를 잡았던 아첼도 평소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티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그런 아첼의 등에 뺨을 부볐다.

이거 사람인지 고양인지 모르겠네, 하고 피식 웃은 아첼은 티엘을 흔들며 일부러 조금 쨍쨍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르면 됐고. 술 깼으면 이제 내려 와."

"싫어. 조금만 더."

"열세 살이나 먹어서 어리광은. 아니, 이제 곧 열 넷인가? 그 나이면 이미 처녀야, 이것아. 그렇게 어리광쟁이니까 아직도······."

뚜둑.

평소처럼 실없는 말을 건네려던 아첼의 걸음이 뚝 끊겼다.

앞으로 움직이는 대신 시선을 빠르게 움직여 사방을 훑었다.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었을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시선이 끈적하게 뒷덜미에 달라붙는 듯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적진 한 가운데 맨몸으로 들어갔을 때와 같은 불길한 느낌.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마력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알아채는 메스꺼운 예지.

문득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그루의 나무가 혼자서만 사시나무처럼 심하게 떨었다.

'잘못 걸렸다.'

아첼은 잇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꽉 잡아! 파드미엘-!"

갑자기 티엘의 몸이 뒤로 홱 쏠렸다.

각력을 강화한 아첼이 티엘을 업은 채 나는듯 달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아첼의 등에 매달린 덕에 나동그라지는 일은 면했지만, 아첼이 느낀 불안감은 여과없이 티엘에게 전해지고 말았다.

티엘은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첼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일그러진 울음소리와 함께 마력의 파동이 거세게 몰려왔다.

하필이면 지근거리에서 마령이 눈을 뜬 것이다.

아첼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등 뒤를 향해 검은 마법진이 팔찌처럼 걸려있는 한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탄이 화살처럼 튕겨나갔다.

조약돌 크기의 마탄이 막 뒤로 따라붙으려던 마령에게 정확하게 꽂혔다.

"쌔애애액!"

살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으로 내지른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첼의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등 뒤의 무시무시한 소리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티엘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감각을 억누르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 두 사람을 노리는 마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꺄아아악!"

빽빽한 비늘로 뒤덮인 사마귀같은 마령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미친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파드미엘의 마력에 맞아 상반신이 반쯤 녹아내린 상태였지만 힘을 깎기는 커녕 화만 돋군 듯 그야말로 광분한 채 성한 다리들을 뒤흔들며 쫓아오고 있었다.

"아, 아첼! 끄떡도 없어!

"뭐? 이런······! 오늘 만월이었지! 아, 정말! 다 좋다가 끝에와서 이게 뭐야!"

"그, 그럼 어떻게 해?"

"중간에 작은 숲으로 가자. 거기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거야."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최대한 빠른 전략을 내놓는다. 마령 하나 정도라면 상대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 덕분이리라.

게다가 치명상까지는 아니었지만, 파드미엘이 남긴 상처도 있으니 장기전이 된다면 유리한 것은 이쪽이다.

티엘은 그리 오래지 않아 목표로 했던 숲길에 접어들자마자 활을 꺼내든 티엘은 아첼의 등에서 내려오며 재빨리 시위를 걸었다. 그리고 아직 아스트라를 걸지 않은 빈 시위만 당긴 채로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별의 서를 챙겨오긴 했지만 어제 소모한 것은 아직 채워넣지 않은 상태라, 저장해둔 아스트라는 되도록 아껴놔야 했다.

아첼 역시 이번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을 생각으로 처음부터 파드미엘의 마력으로 아스트라를 짜올렸다.

심장석을 구하는 것보다는 일단은 생존이 우선이다.

아이카가 완전히 차올랐을 때 영과 대적하는 것은 평소보다 몇 배는 위험한 일이다.

계약한 생령들도 어느정도 강화되긴 하지만, 공화국식의 마법체계에서는 모든 마력의 행사는 결국 마법사의 역량에 좌우된다.

오히려 지나치게 강대해진 마력을 갑작스레 끌어들이면 자멸해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아첼과 티엘은 평소보다 약해진 힘으로, 평소보다 강하고 광폭해진 마령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긴장 속에서 결코 달갑지 않은 정적이 찾아왔다.

기회를 노리는 것일까, 아니면 걱정한 것만큼 강하지는 않았던 것일까.

마탄에 맞았던 사마귀 마령은 금방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새 술기운을 완전히 걷어낸 티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쉴새없이 시선을 움직였다.

서로 등을 맞댄 상황에서, 자신이 실수하면 아첼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왔다.

"티엘. 너무 긴장하지 마."

"미, 미안."

새삼스레 경험의 부족이 실감됐다.

이제까지 아첼과 마령을 사냥할 때는 상대보다 먼저 적을 발견하고, 되도록 원거리에서 급습하는 방식을 이용해왔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사냥하는 쪽이 아닌 사냥 당하는 쪽이다.

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이상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나친 긴장은 오히려 실수를 부른다.

아첼이 긴장을 풀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테지만, 티엘의 작은 심장은 아직 목숨을 건다는 사실에 충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요동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티엘은 재빨리 활을 들어 머리위로 쏘아붙였다. 아첼이 제지할 시간조차 없었다.

"캬아악! 키아아악!"

깜짝 놀란 티엘이 기겁을 하며 비켜선 자리로 툭 떨어진, 박쥐를 닮은 커다란 생명체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티엘의 아스트라는 마령의 목덜미에 꽂혀있었다.

아첼은 말없이 활을 당겨 놈의 머리에 아스트라를 날렸다. 발버둥치던 마령이 절명하며 검은 잿가루가 휘날렸다.

하지만 막 안심하려는 순간, 티엘은 미친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냐! 이 녀석이 아냐! 조금전에 따라오던 마령은 이 녀석이 아니야!"

"······뭐?"

아첼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령이 벌써 둘, 그것도 어느정도 육체를 갖춘 녀석들이 나타났다.

게다가 한 놈은 방심 때문인지 허무하게도 죽어버렸지만, 다른 하나는 숙련된 암살자처럼 스스로의 기척을 완전히 죽인 상태였다.

도망갔을리는 없다.

어디선가 기회를 노리며 지켜보고있을 확률이 지나치게 높다.

아첼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티엘이 반사적으로 아스트라를 쏘았을 때, 자칫하면 순간적인 빈틈을 타고 치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공격도, 회피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빈틈을 노출시켜선 안됀다.

아첼은 별수없이 마력을 끌어모아 채찍처럼 휘둘렀다.

쓸데없는 소모가 많아지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끝을 따라 파도처럼 퍼져나가던 마력이 일대를 훑었다. 순간 어느 한 지점에서 저항이 느껴졌다.

'됐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죽인채 살금살금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마음을 조금 놓으려는 순간 다시 신경줄을 건드리는 저항이 느껴진다.

방향도, 거리도 다르다. 그리고 저항의 수준도 달랐다.

"자, 잠깐. 이게······ 방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세 번째의 마령?

풀어지려던 손이 활을 다잡았지만 그 순간 또 마령의 수가 늘었다.

주위로 풀어낸 마력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아첼이 감지해낸 마령의 기척은 벌써 두 자리 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뭐야, 이 반응은? 대체 뭐냐고?"

"왜, 왜그래, 아첼?"

자연물은 그 정도 규모의 충돌을 일으킬 수 없었고, 무시할 만큼 작은 영이라면 곧바로 밀려나기에 오히려 깨끗하다.

불쾌할 정도의 저항을 보이는 마력원들은 틀림없는 마령의 무리다. 거기다가 어떻게 돼먹은 일인지, 하나하나가 육화한 기사급의 마령들이다.

그 동안 티엘과 함께 사냥하던 것과는 격을 달리하는, 대규모의 마령 강림.

사냥꾼이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먹히던 자가 먹는자를 노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쓰러뜨리느냐 마느냐였던 문제는 그들이 모르는 사이, 이미 '살아남느냐 아니냐'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첼······?"

아첼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느낀 티엘이 불안감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첼은 보기 드물 정도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일개 인간의 마법사가 이 상황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최소한 티엘이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 것조차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첼은 마음을 다잡으며 가빠진 숨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지금 그녀가 흔들리면, 티엘 또한 불안감에 먹혀버린다.

"티엘, 미안해. 이번엔 너만 지켜주기는 힘들 것 같아."

그러나 약한 소리와는 달리, 아첼은 티엘이 선물한 목걸이를 꽉 움켜쥐며 마력을 일으켰다.

더이상 흔들리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혼자서 못뚫는다고?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혼자로 안되면 둘이다.

아첼이 티엘을 지키고, 티엘이 아첼을 지키면, 저 달이 질 때까지 버티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다!

"그러니 너도, 끝까지 내 등을 지켜줘야 해?"

더이상 잴 것도 없었다.

아첼은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올리며 빠르게 시위를 튕겼다.

겨우 한 호흡에 여섯 발이나 되는 아스트라가 어둠을 찢었다.

아스트라는 폭발하는 대신, 지면에 꽂히며 동시에 마력을 해방해 화려한 원진을 그렸다.

아첼을 중심으로 여섯 방향에 핀 꽃이 저마다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며 정해진 마력으로 만개했다.

마력으로 이뤄진 화원의 중심에 선 아첼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눈앞에서 교차시키며 주문을 외쳤다.


작가의말

나쁜 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때 끼어들곤 하더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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