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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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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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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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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3장-개화開花(5)

DUMMY

착각이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기척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티엘은 반사적으로 의심가는 상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첼?"

대답은 없었다.

티엘은 조용히 침대 아래로 손을 가져가 연습용 화살을 꺼내 허리춤에 꽂았다.

마을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그것도 일부러 숨죽인 채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산짐승이든, 아니면 그 외 다른 무언가든, 적어도 인간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똑,똑!

그 때 갑자기 문에서 들린 둔탁한 소리가 적막을 뚫었다.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간신히 틀어막은 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고리를 풀었다.

"티엘. 너 저 소리 들었니?"

다행히 문이 다 열리기 전에 들려온 목소리는 아첼의 것이었다.

"아첼도 들었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

티엘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있던 아첼은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던 사냥복을 입은 채 집안 구석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약간 긴장한 시선은 금방이라도 나타날 적을 대비하려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더군다나 아첼의 손에는 그녀의 활까지 쥐어져 있었다.

부려놓은 상태가 아니라, 시위까지 걸려 당장에라도 살을 날려보낼 수 있는 상태다. 억지로 마력을 쓴 것이 분명했다.

"아첼, 마력 쓰면 안돼잖아!"

"쉿. 뭔가 집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어. 너도 들었지만, 인간은 아니야."

아첼은 소리도 없이 몇 걸음 정도 앞으로 갔다.

바짝 긴장한 티엘도 발소리를 죽여 아첼의 뒤를 쫓았다.

아첼은 잠시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어디선가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용물을 조금 꺼냈다.

마력에 반응하는 사미라의 가루였다.

아첼은 은은하게 반짝이는 가루를 아낌없이 주변에 흩뿌렸다.

은색의 먼지구름이 풀썩 퍼져나가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마력과 반응하며 황금빛으로 달아올랐다.

콰앙!

그때 갑자기 나무로 된 덧창 하나가 박살나며 집 안으로 파편이 날아들었다.

누군가 망치로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나뭇조각과 먼지가 집 안으로 잔뜩 날아들었다.

"흡!"

티엘은 반사적으로 연습용 화살을 매겨 부서진 창문을 향해 쏘았다.

얇긴 해도 나무로 만든 창은 그리 쉽게 부서지진 않는다.

누가 돌을 던졌다고는 해도, 온 힘을 다해 무게를 싣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파편을 날리진 못한다.

그러나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 까지의 시간은 도망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는데도, 정작 돌을 던질만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 흩어진 나무 부스러기 사이에도 돌멩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흔적은 가까운 거리에서 강렬한 폭발로 파편을 흩뿌리는 아스트라의 파괴흔과 닮아있었다.

"티엘. 눈 감아!"

순간 아첼이 사미라의 가루를 부서진 창 근방에 다시 한 번 넓게 흩뿌렸다.

은색의 가루가 먼지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다, 조금 전처럼 한 부분에서 마력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 나타난 형체는 느린 속도로나마 허공을 가로지르며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익시온!"

섬광이 허공을 찢었다.

아첼의 손 끝에서 터져나온 벼락이 막 창틀을 넘어가려던 금색 먼지 덩어리를 꿰뚫었다.

익시온의 마력에 반응한 은입자들이 제각기 빛을 발하며 순식간에 주위가 황금빛으로 물들었지만, 다행이 아첼이 노렸던 '그 녀석'의 모습은 분명히 구분해낼 수 있었다.

"환각령······."

익시온의 마력에 꿰뚫려 모습을 감추었던 마력이 깨진 '그 녀석'은 애냐와 비슷한, 안개 덩어리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티엘은 모습을 드러낸 생령을 보며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뚜렷한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먹물처럼 검은 몸체를 지닌 생령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만약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더라면 온 집안을 절절한 비명으로 뒤덮었을만큼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문득 그 모습에서 애냐를 비춰본 티엘은 측은한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첼은 그런 티엘의 손을 잡아채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습격했어. 아직 육신이랄 것도 없는 녀석이 이미 마령화가 시작됐다면 더더욱 위험해."

"하지만, 아직-"

"앞으로 이런 장면 자주 보게 될거야. 가엽지만, 이미 지성을 잃어버린 '미친 영'들은 다시 구원할 수 없어. 그게 아니라면, 이 녀석이 기사급으로 성장할 때 까지 내버려둘 생각이니?"

날카로운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첼 역시, 아직 어린 생령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티엘 못지 않게 씁쓸해하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아. 설령 심장석이 형성되서, 그걸로 다시 부활시킨다고 해도 그건 다른 생령이지. 하지만 마령을 동정해선 안돼. 아니, 오히려 가엾게 여긴다면 더더욱 안식을 주는게 중요해."

이름없는 영이 마침내 소멸했다. 티엘은 침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계약하지 않았더라면, 애냐도 이렇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리라.

하지만 티엘이 감상에 젖을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아첼은 손가락 끝으로 활시위를 가볍게 튕겨보며 다시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오후 수련은 빼자. 갑자기 나타나긴 했지만, 아무 이유없이 태어난건 아닐거야. 근처에 자연적으로 마력이 고인 곳이 생겼다면 다른 집에도 나타날 수가 있어. 기억하지? 혹시 모르니까 오후엔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결계를 설치하자."

"알았······어."

아첼은 결계를 칠 지식은 있지만 마력을 사용하면 안되고, 반면 티엘은 지식은 없어도 마력은 어느 정도 쓸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는 티엘은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려 의식을 전환하고 아첼의 뒤를 따랐다.

자매가 우선 향한 곳은 공회당이었다.

혹시 생령이 나타난 집이 또 있다면 공회당에 민원이 들어왔을 터였다.

마르파 노인은 없더라도 건물을 지키러 나와있던 사람은 있을테니 사고가 있었다면 바로 들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혹시 무슨 일 없었나요?"

"저기, 무슨 일은 아첼네에 일어난 거 아냐? 산짐승이라도 들이닥쳤나 아니면 정신 팔린 남정네가 뛰어들었나? 차림이 그게 뭐야."

오늘 공회당에 나와있던 사람은 흔히 '윌란의 큰엄마'라고도 불리는 이안이었다.

두툼한 살집이 인상적인 그녀는 정신없이 산길을 내려온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제서야 스스로를 돌아본 자매는 흠칫 놀리며 얼굴을 가렸다.

얇은 실내옷에 구겨진 외투만 걸친 티엘, 급하게 나오느라 부츠도 짝짝이로 신고, 심지어 한쪽 다리는 옷이 밀려 불룩하게 부풀어오른 아첼.

산발을 한 머리는 너 나 할것 없이 두 사람 모두 볼만하다 싶을 정도였다.

나름대로 급한 일이라고 머리도 마르기 전에 뛰쳐나온덕에 누가봐도 급하게 도망쳐나온 듯한 차림이라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다.

이안은 한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빗을 가져와 티엘을 앉히고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새삼 별명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 허둥지둥 나왔어들? 산짐승이라도 나온거야?"

"산짐승은 아니구요. 유령 비스무리한거랄까?"

아첼은 이안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묶으며 대강 대답했다.

생령이니 마령이니 설명해도, 어차피 마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냥 유령이나 다를 바가 없다.

"호랑이도 없는 산에 유령이라니 뭔가 웃기는 얘기구만. 그래도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다는 사람은 딱히 없었는데. 유령도 젊은 애들이 반가운건지 원. 자, 이걸로 머리라도 묶어둬."

"고마워요. 이제까진 이런 일 없었죠?"

아첼은 혹시 도움될만한 것이 없나 싶어 한쪽의 서류함을 끌어당겼다.

엉성하더라도 지도 하나가 있으면 편할테지만 이런 시골마을에 제대로 된 지도가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아첼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약도라도 있길 바라며 서류함을 계속 뒤적거렸다.

"있을리가 있나. 그런 재주꾼은 없는걸. 티엘이 또 사고친거라면 모를까."

"이, 이젠 실수 안한다니까요?"

"쯧쯧. 어디 '나 실수한번 해봐야지' 할때만 실수를 하던? 그리고 머리는 관리 잘 하랬잖니. 머리가 길어서 금방 상한단말이다. 자, 끝났어."

이안은 주머니에서 꺼낸 끈으로 티엘의 머리까지 묶어준 뒤 아첼을 도와 서류함을 뒤졌다.

다행히 두 사람이 달라붙자 목적하던 지도가 금방 발견되었다.

몇 년 전쯤 작성해두었던 자료라 달라진 점이 꽤 많았기에, 이안은 조그만 숯 조각을 가져와 그 위에 변경 사항들을 대강 표시해주었다.

사실, 사람이 늘어난 곳은 아첼과 티엘이 사는 산기슭의 오두막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있던 집이 사라졌다는 표시 뿐이다.

"후우, 나온 김에 마을 한 번 쭉 돌아봐야겠네요."

"그 유령같은걸 잡으려는 거야?"

"네. 혹시 모르잖아요. 양 잃어버리고 불침번 서는 것보다는, 미리 개 한마리 묶어두는거죠."

아첼은 머릿속으로 술식을 정리하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 마을 전체를 덮어버리는 큰 결계를 세우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작성하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 티엘이라면 결계를 유지하는게 불가능하다.

마을이 그리 넓지 않기에 대규모로 설치할 필요는 없지만, 애초에 그걸 그릴만한 마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집집마다 소규모 결계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작고 간단하게 영체를 물리는 정도의 결계라면 자연에 퍼져있는 미세한 마력만으로도 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몇 주 정도는 고생할테지만 반대로 그 몇 주만 견디고, 그 사이에 마령을 유인해 해치우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안의 말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생령이 발생하는 일은 꽤 오래 전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고인 마력을 모두 소모해버린 뒤에는 다시 그만큼 오랜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잠잠하게 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저흰 가볼게요."

"으응, 수고해. 끝나면 우리집에 놀러와요. 간만에 맛있는 것좀 해줄테니까."

"진짜요? 후훗, 진짜로 찾아갈거에요~!"

사무실을 나온 두 사람은 가까운 집부터 들르기로 했다.

티엘로서는 안심이었다.

아첼의 말에 의하면 '초심자가 눈감고 그려도 충분한 수준'이라니 서툰 실력이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 이거요? 집에 잡귀신이 나오는 바람에 혹시 여러분한테도 나올까봐서요. 이거 하나 그려두면 악몽도 잘 안꿀거고. 아, 그리고 부부사이가 아-주 좋아지는 효과도 있을걸요?"

단순히 영체가 꺼려하도록 만드는 주문이지만, 아첼은 약간의 짓궂은 거짓말을 더해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귀신때문인지, 아니면 잠자리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을 아줌마들이 굉장히 좋아했다는 점이리라.



* * *




873년 1월 14일.

어느새 새 해가 밝고, 그로부터도 다시 이 주나 지나갔다.

그리고 추운 겨울답게, 벌써 이틀째나 펑펑 쏟아지는 눈이 세상을 온통 묻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쌓여가고 있었다.

아직 신년 분위기도 남아있는데다 날씨도 움직이기엔 별로 좋지 않은 시기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한가로이 벽난로의 온기를 즐기는 대신, 마령을 잡기위해 추운 산 속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커다란 활을 들고 다니는 두 자매의 경우처럼.


아첼과 티엘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따뜻하게 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덕에 칼바람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바람은 막아도곱아버린 손은 쉽게 녹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녹이고자 함부로 불을 피울 수도 없다.

사냥감을 노리면서 위화감을 줄만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해야하는 법.

특히나 기사급의 생령이나 마령쯤 되면 오감만 해도 비상하게 날카롭다.

연기 냄새 정도는 금방 들킬 것이다.

결국 아무리 추워도 몸을 붙이고, 두꺼운 옷에 몸을 파묻는 것이 한계였다.

아첼은 시리다못해 아플 지경인 손에 필사적으로 입김을 불었다. 활을 쥔 손에는 장갑이 끼워져있지 않았다.

아무리 주문으로 구현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스트라는 본래 손끝의 미세한 감각이 중요한 영격술이다.

손이 곱아서 둔해지더라도 장갑으로 촉감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티엘 역시 맨손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라면, 손을 비비는 그녀의 동작은 춥다기보다는 따분하다는 느낌에 가깝다는 것.

동상이라도 걸릴까 봐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릿하게 손을 비비던 티엘은 오히려 제 옷자락을 끌어당겨 아첼의 빨갛게 언 손을 덮어주었다.

"으으, 추워 죽겠네. 왜 이렇게 안보이는거야?"

동생의 말없는 배려에 뭔가 찔리는 것인지, 숨죽인 채로도 불평이 한아름 쏟아졌다.

"눈치챈거 아닐까?"

"설마. 기사급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단말야."

아첼의 예상과는 달리 생령들의 출몰은 끊이지 않았다.

겨우 몇 주만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석 달 가량이나 이어진 이상 마력의 샘을 찾아 파괴해버리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온 산을 뒤져도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모인 곳은 없었다.

어쩌면 산 전체가 생령의 탄생지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만이 짙어졌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대규모 강림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정령이나 요정이 조금씩 나타나는 수준이라 집집마다 새긴 결계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점차 육신을 갖춘 마령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기사급쯤 되는 마령이라면 그런 어설픈 결계따위 오히려 반가워하며 습격해올 것이다.

그 정도 마령이 매일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산 기슭을 돌아다닐 때면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사상자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첼의 당부에 따라 산에 오를 때는 최소 대여섯 명씩 모여 다녔고, 혹시 마령과 마주친다면 아델 시에서 사온 성물을 뿌리고 도망쳐왔다.

아첼은 마령이 나타났다면 맞서지 말고 반드시 도망치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몇 번씩 강조해서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그 흔한 멧돼지도 덫을 놓지 않으면 잡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마령을 평범한 활과 몽둥이로 때려잡는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마을에서 마령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마력을 회복한 아첼과, 그 아첼을 보조할 수 있는 티엘 두 사람 뿐이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이 엄동설한에 마령을 쫓아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장기적으로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다.

몸은 고생스럽지만, 마령의 심장석을 내다 파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익이 된다.

게다가 실전을 거치며, 티엘의 실력이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희소식이었다.

이제는 티엘도 두어 발 정도는 아스트라를 쓸 수 있었다.

활을 잡은 기간에 비하면 의외로 활 실력도 나쁘지 않아, 옆에 따라붙으면 아첼의 부담이 확연하게 줄어들곤 했다.

정작 아첼은 위험하다며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저 영악하고 눈치 빠른 녀석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아첼, 저기."

"왔어?"

"왔어."

먼저 마령을 발견한 티엘이 숲을 가로질러 한 지점을 가리켰다.

소리없이 쌓이는 눈발 너머로 눈보라를 일으키며 숲을 헤치는 마령의 모습이 자그맣게 보였다.

상아처럼 생긴 여섯개의 이빨만 없다면 문어에 가까운 형태였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다리에는 빨판 대신 위협적인 가시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어와 '닮았다' 정도일 뿐, 곳곳이 무너지고 일그러져 정상적인 육체라고는 부를 수가 없었다.

힘겹게 뻗는 촉수 몇 개는 나무뿌리처럼 가느다란 촉수가 갈라져 나오고, 어떤 촉수는 심지어 물갈퀴처럼 이질적인 모습으로 뭉개져있었다.

거기에 더해 억제되지 않은 마력이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미묘한 불쾌감.

상한 음식의 냄새처럼,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불쾌한 마력이다.

두말 할 것 없이 마령이었다.

멀리서 봐도 심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생긴 것 답게 산행에 지친 모양이었다.

"구르르?"

갑자기 마령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코를 높이 치켜들었다.

잠시 그런 불편한 자세를 취하던 마령은 다른 방향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두 사람이 숨어있는 수풀을 노려보았다.

마력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티엘은 대뜸 아첼을 흘겨보았다. 아첼은 난처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차, 눈치채버린 거 같은데?"

"아첼 탓이야."

"어머머, 내가 뭘?"

점차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마령의 머리가 위로 들려올라갔다.

질척거리는 두터운 살가죽 밑에 감춰져있던, 머리의 반 가량을 차지하는 거대한 입이 쩍 벌어졌다.

악어처럼 불규칙하고 거친 이빨 사이로 뜨거운 김이 새어나왔다.

"구아아아아악!"

포효를 내지른 마령은 두 사람을 향해 촉수를 뻗었다.

나무나 바위를 휘감고 육중한 몸을 끌어당기는 기묘한 움직임은 덩치에 비해 제법 재빠른 편이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한 촉수가 휘감았던 나무들은 어설픈 톱질로 난자당한 것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깎여나갔지만, 덩치에 비해 무게는 가벼운 편인지 그런 엉성한 돌격에도 쓰러지는 나무는 없었다.

덩치만 보고 움직임도 둔중하리라 예상했던 아첼은 조금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잔뜩 오그라들어 반도 펼쳐지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촉수의 수는 모두 열 하나.

그 모든 촉수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며 돌진해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눈사태였다. 마령이 날뛰며 엉망진창으로 날아드는 흙과 얼음, 그리고 나무나 돌의 파편들이 아첼의 마력장벽에 부딪혔다.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을 짓누르는 마력역시도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제어하지 않는 그저 단순하게 흩뿌려지는 마력은 거칠고 조잡했다. 하지만 농도만큼은 기사급에 걸맞을만큼 짙었다.

"흠, 내일은 문어나 사올까. 그거라면 내가 구워도 괜찮겠지?"

그러나 나란히 서서 활을 당기는 두 자매의 얼굴에는 긴장감따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쾌활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으윽. 저런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어? 그리고 아첼은 주방 들어가지 말라니까. 화덕이 불쌍해."

"알았어, 알았어. 참 편식이 심하다니까. 자, 셋 하고 갈거야. 하나, 둘, 셋! 라피온!"

"하늘의 별, 새벽을 여는 창이여!"

두 줄기의 빛이 두 사람의 손을 떠났다.

아첼처럼 무영창으로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경지는 아니었지만, 티엘의 아스트라 역시 그리 느린 편은 아니다.

술식의 구현 속도는 처음 아스트라를 성공시킨 때보다 확연히 빨라져있었다.

반 박자 빠르게 쏘아진 아첼의 화살이 보다 먼저 마령의 눈앞에 도달했다.

너덜너덜해진 피부를 찢으며 파고든 아스트라가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그 안에 담겨있던 폭풍을 풀어놓았다.

극도로 압축되었던 바람이 일제히 터져나오며 마령의 살을 찢고 붉은 피를 흩뿌렸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든 티엘의 아스트라가 아첼의 아스트라를 뒤따르듯 찢겨져 있던 상처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르아악!"

고통에 못이긴 마령이 몸부림쳤다.

커다란 몸집에서 솟구친 핏방울은 거의 소나기처럼 넓은 범위에 후두둑 떨어지며 눈밭을 검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핏방울은 금새 검은 잿가루로 변해 사라졌고, 이내 그 자리에는 단지 마령이 몸부림친 흔적만이 남았다.

그러나 정작 그 피가 흘러나왔던 상처는 물컹거리는 역겨운 움직임과 함께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얕았어!"

티엘의 마력속성은 빙결.

본래라면 상처를 얼어붙게 만드는 치명적인 일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령은 티엘의 마력을 자신의 마력으로 억눌러, 막 폭발하려는 아스트라의 위력을 죽여 단순히 상처를 찢어놓는 상처로 깎아내렸다.

아직 티엘의 마력이 약하기에 본능적으로 뿜어내는 마력에도 간단히 눌려버린 탓이었다.

그저 살갗을 찢는 정도의 상처는 생령에게 거의 타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화를 돋굴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금 전의 화살을 신호로 삼듯, 동시에 몸을 일으켜 빗발치듯 아스트라를 쏘아보내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던 마령이 촉수 하나를 힘껏 휘둘렀다. 그 움직임을 따라 마력이 몰아치며 순간적으로 촉수가 늘어나는 듯한 착시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공격은 내가 막아줄테니까 계속 쏴. 힘 좀 빼줘야 얌전해지겠네."

아첼은 들이닥치는 촉수를 향해 타다닥 가볍게 뛰어들었다.

촉수를 휘감은 어두운 주홍빛의 마력이 굵은 채찍처럼 휘몰아쳤다.

그에 대항해 아첼이 불러낸 생령은 수호의 속성을 지닌 켈리아였다.

하지만 켈리아의 마력은 아첼을 보호할 방패가 되는 대신 나무들을 박살내며 휘둘러지느라 속도가 느려진 마령의 촉수를 잡아채는 수갑이 되었다.

"샤아아아악!"

무기이자 방패로 삼던 촉수 하나가 묶여버린 마령은 나머지 열 개의 촉수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광분하기 시작했다.

아첼은 쾌활하게 웃으며 켈리아의 마력으로 생령의 촉수를 흘려보내며 이리저리 시선을 끌었다.

분노에 미친 마령은 아예 주위를 완전한 평지로 만들겠다는 듯 손에 잡히는 대로 나무나 돌을 박살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덕분에 아첼을 공격하는 데 몰두해버린 열 개의 촉수 사이로 커다란 빈틈이 벌어졌다.

"애냐!"

티엘의 아스트라가 마령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그 짧은 빈틈을 찔렀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온 숲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마력의 속성에 기대지 않는, 순수하게 마력량을 늘린 아스트라였다.

먼저 쏘아보낸 것에 비해 거의 두 배 가량의 마력을 담은 아스트라는 마령의 몸통 깊숙한 곳에 박혀 제법 커다란 상처를 만들어냈다.

뜻밖에 큰 충격을 받아 광분하던 마령이 괴성을 지르며 자신이 쓰러뜨렸던 통나무를 단단히 휘감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화살을 날리는 성가신 마법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집어던졌다.

변방의 작은 성문이라면 무리없이 부술 수 있을만한 위력적인 일격에 아첼의 손길이 흰 눈밭을 스쳤다.

"켈리아!"

자색의 마력이 한 순간에 펼쳐져 둥그런 막을 이루었다.

육중한 통나무가 방벽의 상단을 내려찍자 방어막 째로 조금 밀려나며 내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켈리아의 마력은 금 하나 가지 않고 여유롭게 통나무를 흘려냈다.

오히려 약간의 마력조작으로 만들어낸 충각에 의해 던져진 통나무가 두 조각으로 쩍 갈라졌다.

아첼은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마력을 움직였다.

켈리아와 라피온의 마력이 뒤섞여 두 조각 난 통나무를 허공에 고정시키더니, 투명한 발리스타로 쏜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마령에게 되쏘아보냈다.

그 동안 티엘은 별의 서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마법서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스스로 펼쳐지며 책장을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아스트라!"

별의 서에서 몇 장의 깃털이 빠져나와 산산히 부서졌다.

깨진 빛조각은 티엘의 손을 휘리릭 감아돌며 희푸른 마력의 화살로 변했다.

모두 합해 다섯 발.

티엘은 다섯 개의 아스트라를 차례로 활에 매겨 마령을 향해 날렸다.

통나무를 얻어맞아 씩씩거리던 마령이 다시 한차례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마력을 뿌렸다.

"일주일 동안 만든건데. 아까워."

"아스트라 정도는 실전에서 바로바로 쓸 수 있게 연습해."

아첼은 다시 라피온의 아스트라를 만들면서 툴툴거리는 티엘에게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흐뭇한 기색이 가득했다.

광분하는 마령의 빈틈을 찌른 다섯 발의 아스트라.

별의 서에 저장해두었던 주문들은 티엘의 마력만으로 짜올린 평범한 아스트라였다.

몸통을 노렸더라면 처음 한 발처럼 마령의 힘에 상쇄되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테지만, 티엘이 노린 것은 마령의 다리 부근이었다.

미처 중화되지 않은 빙결 속성의 마력은 지면의 눈과 얼음이 반응하며 어느새 단단하게 자라난 얼음 우리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만들어낸 얼음이 아닌, 실제로 쌓여있던 눈을 매개로 한 만큼 그 강도는 마령의 힘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창살이 마령을 묶은 위치는 몸통에서 촉수가 뻗어나오는 그 뿌리 부근.

힘을 쓰기 애매한 위치에 자리잡은 얼음들은 당황한 마령의 발을 완전히 묶어주고 있었다.

아첼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마령에게 두 발의 아스트라를 쏘아보냈다.

아무리 마력으로 상처를 수복하는 생령이라도 치명상을 여러 차례 입으며 마력을 소진해버리면 더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죽는다.

아첼이 노린 것은 뇌와 심장 부근.

혹여 심장을 꿰뚫다 심장석까지 상할까 염려해 위력은 조금 낮추긴 했지만, 이미 티엘의 활약 덕분에 상당량의 마력을 재생에 소진해버린 마령을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머리와 몸통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마령이 마침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서서히 쓰러졌다.

아첼은 혹시라도 마령이 죽은 척을 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 시험삼아 나뭇가지를 꺾어 가볍게 날려보냈지만, 나뭇가지에 맞은 마령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두 자매의 손이 경쾌하게 맞부딪혔다.

"잘했어, 티엘. 이젠 제법 능숙하네? 별의 서를 안썼다면 좋았겠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이야."

아첼은 티엘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사실, 마령 한 마리 잡는데 굳이 티엘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다.

오히려 티엘까지 신경쓰느라 아첼의 움직임에 다소 제약이 생기는 면도 있다.

그걸 감수하는 이유는 사실상 티엘을 위한 실전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마력의 양은 여전히 형편없지만 예상 외의 상황에 즉석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부분은 제법 훌륭했고, 마력을 다루는 면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확인했다.

기분이 좋아진 아첼은 콧노래를 부르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데도 재생되고 있던 마령의 가시 중에서 온전한 것들이 하나 하나 다듬어져 작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그냥 심장석을 뽑아버리거나 부숴버리면 육신은 그대로 잿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심장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육신의 일부를 보존처리와 함께 갈무리해두면 심장석과 분리되어도 소멸하지 않는다.

이렇게 얻은 마령의 육신은 마법의 촉매나 영장의 재료로 제법 짭짤한 값에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별로 건질게 없어보였다.

문어 마령의 다리에 달려있던 가시들은 대부분 부러져버려서 온전한 것은 열 개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값이 나갈 듯 보였던 커다란 엄니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자잘한 균열이 이빨을 빙 두르고 있으니 어디 쓸래야 쓸 수가 없다.

혀를 차며 생령의 몸통으로 칼을 가져간 아첼은 잠시 후 피에 흠뻑 젖은 보석 하나를 꺼냈다.

생령의 핵이자 근원, 심장석이었다.

아첼의 곁에 나란히 앉아 가시나 힘줄 등 사체를 갈무리하던 티엘조차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토할것 같아······."

"어쩔 수 없잖니. 이걸 안꺼내면 시체는 썩어 없어지기 전엔 남아있는데다가, 우리 생활비도 나오지 않는단다."

아첼은 그렇게 말하면서 티엘을 놀리기라도 하듯, 눈앞에서 심장석을 던졌다 받는 장난을 계속했다.

그녀의 손과 보석에 묻어있던 피는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다 바람에 흩어져 날아갔다.

마령의 시체 역시 갈무리해둔 것을 제외하고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주위에 부러진 나무라던가, 두 사람의 몰골, 파헤쳐진 눈만 아니라면 마령이 있었다는 증거같은 것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끝났으니까 이제 로니 아줌마네 가자."

"으으으, 빨리 내려갈래. 오늘은 씻고 바로 자고싶어."

두 사람은 그제서야 품 속에 넣어뒀던 두툼한 장갑을 꺼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참으로 꺾일 생각을 모르는 추위였다.



* * *



열심히 손을 비비며 내려왔지만 마을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깨 위에 내린 눈이 잔뜩 쌓여 몇 차례나 무너진 뒤였다.

하지만 아첼과 티엘은 다소 급한 손놀림으로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어요."

"어서오······. 어머머 세상에, 얘들아, 감기들겠다! 얼른 들어와서 몸좀 녹여."

로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더니 마른 수건과 모포를 두개씩 들고 다가왔다.

젖은 겉옷을 벗어 빈 의자에 걸친 두 사람은 로니가 건네준 모포를 온 몸에 감고 벽난로 근처로 의자를 끌고가 불을 쬤다.

"이 겨울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다니?"

"일이죠, 뭐."

"하루쯤 쉰다고 굶는 것도 아닐텐데. 하루 이틀쯤은 외상 받아 준다고? 그래, 뭐 줄까?"

"데운 우유랑 피야른 주 한 잔씩, 거기에 간단한걸로 2인분 가져다주세요."

아첼은 여전히 애주가다.

피야른 주는 증류주의 일종으로, 공화국 북부나 산간지방에서 추위를 잊기 위해 마시는 상당한 독주였다.

물론 날씨가 추워서 마신다고는 하지만, 스물 남짓한 아가씨가 쉽게쉽게 마실만한 술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주문을 받아본 로니는 두말없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불을 쬐던 아첼은 어느정도 손이 녹자 주머니를 뒤적거려 심장석을 꺼냈다.

살아있는 생령에게서 정확한 속성을 알아내는 것은 '감지'계열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심장석으로, 그것도 대강 큰 방향성만 알아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미리 감정을 해두어야 심장석을 팔 때 감정가를 아낄 수 있으니 가볍게 볼 일도 아니다.

옅은 녹색의 심장석을 손에 쥔 아첼은 가볍게 심장석을 건드렸다.

심장석은 밀어넣은 마력을 흡수하고 얼마간의 마력을 내뱉는다.

아첼은 꽤나 여러번 심장석을 톡톡 건드리며 마력을 뽑아냈다.

"이 정도면 오선 정도려나? 3천 시안 정도에······. 속성은 대지계열인 것 같은데. 대지계는 비슷비슷하니 이 이상은 모르겠다."

"꽤 비싸겠네? 언제 팔러 나갈거야?"

티엘은 아첼의 감정을 듣자마자 관심을 보이며 달라붙었다.

아첼은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티엘이 아첼을 따라 사냥에 나선 이후로는 수익의 십분의 일 정도를 용돈으로 주고있었다.

물론 용돈을 주는 것까진 별 문제 없다. 문제는 티엘이 가끔씩 위험수당이라던지 추가금이라던지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얼마씩 더 뜯어간다는 점이다.

딱히 어디다 돈을 쓸 일도 없는데 언제부터 저리 돈독이 오른건지, 이 녀석이 돈 걱정이라고는 모르는 레가야 대공가 출신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내일 가는데, 이번엔 돈 더 안줄거야."

"왜애? 아체에엘. 티엘은 용돈이 받고 싶어요오."

"닭살돋아, 떨어져! 야, 그만 해! 다 큰게 어디서 아양이야?"

결국 꿀밤을 몇 대는 맞고서야 떨어진 티엘은 머리를 감싸쥐고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아첼은 코웃음을 치고는 비어있는 자리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더군다나 때마침 로니가 음식을 내오는 바람에 티엘의 작전은 그대로 물건너가고 말았다.

용돈벌이에 실패한 꼬마는 잠시 불만어린 얼굴을 하다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요새 대체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돈을 달라는거야?"

"비-밀-."

"하아, 열 몇살짜리가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결혼도 안했는데 너 때문에 애엄마 된 기분이 든다, 얘."

팬케이크에 도수 높은 술이라는 미묘한 조합인데도 아무 상관 없는지 아첼의 접시는 빠르게 비어갔다.

어쨌건 추위에 한참이나 노출되어있던 몸이라, 생각 이상으로 지치고 허기가 졌던 것이다.

그러나 티엘은 깨작깨작 식기로 장난을 칠 뿐 음식은 그다지 먹지 않았다.

심지어 우유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아 미지근한 김을 내며 식어가고 있었다.

"왜 그래, 티엘. 어디 안좋아?"

용돈 안준다고 토라질 녀석도 아니고, 얼굴에도 서운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어딘지 생각에 잠긴 것 같으면서도 멍해보이는 시선이 눈에 밟혔다.

얘가 어디 아픈건지, 아니면 뭔가 걱정이라도 있는건지, 아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티엘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티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저런 뻔한 말을 누가 믿으랴.

당연히 아첼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티엘을 빤히 쳐다보았고 티엘은 한숨을 쉬며 팬케이크를 크게 조각내 한 입에 밀어넣었다.

다 식은 우유까지 단숨에 마셔버린 티엘은 의자를 끌고 어기적 어기적 벽난로 앞으로 돌아갔다.

'어라라, 진짜 무슨 일 있나? 얘가 왜 이러지?'

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라고 해도 겨우 스물 둘, 아첼도 아직 어린 나이다.

아무리 티엘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지만 이런 점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첼은 잠시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다가 결국 손짓으로 로니를 불렀다.

먼 발치에서 티엘이 아첼과 떨어져 앉아있는걸 본 로니도 뭔가 심상찮다고 여긴 것인지, 다른 손님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뒤 종종걸음으로 아첼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로니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아첼 역시 나지막하게 속삭여 대답한다.

"티엘이 갑자기 좀 우울해 보이는데 왜 그럴까요?"

"우울하기보다는······.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하긴, 저 나이쯤 되면 이런저런 고민 할 때기도 하겠다."

"고민? 열세 살짜리가 무슨 고민이 있다고요······."

"속 깊은 애일수록 어른들 몰래 속앓이 하는거란다."

아첼은 로니의 말에 다시 티엘을 쳐다봤다.

무슨 고민을 하길래 저렇게 축 늘어져있는걸까.

오히려 로니의 말을 듣자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욱 커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요를 보이던 아첼은 티엘의 뒷모습을 안절부절 못하며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애냐와 계약할 때도, 몰래 마법서를 구해 탐독하는 등 은근히 눈치를 보였던 티엘이다.

물론 그 때 같은 바보같은 짓은 더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울며 사과했던 녀석이니 또 사고를 칠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또 다른 면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냥 용돈 조금 더 쥐어줄 걸 그랬을까요······?"

"티엘이 용돈을 달라고 했어? 하지만 그런 데 욕심 부릴 애도 아니고, 그런 것 치고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데?"

아첼도 겨우 20대 중반을 넘긴 어린 나이였다. 익숙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첼의 표정을 본 로니는 걱정 말라는듯 아첼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걱정 말아. 내가 잠깐 가서 물어볼테니까."

가끔은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이기에 보이지 않는것도 있는 법.

이런 일은 아첼보다는 다른 사람이 맡는게 나았다.

마지못해 수긍한 아첼은 잘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티엘에게 다가가는 로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티엘?"

"으왓!"

티엘은 로니가 바로 등 뒤까지 온 것조차 모른 채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러다보니 로니가 가볍게 어깨를 톡톡 건드렸을 뿐인데도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등 온갖 난리를 피웠다.

"노, 놀랐잖아요!"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길래 오는줄도 모르고 있었니?"

"그, 그러니까아- 에, 음, 뭐랄까······."

평소엔 보기 드문 당황한 모습이다.

로니는 생긋 웃으며 넘어진 티엘을 일으켜 세웠다.

당황한 티엘은 일어서자마자 다시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했지만 로니가 손을 꼭 잡고있어 도로 넘어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로니는 티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눈높이를 맞췄다.

티엘은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눈길을 자꾸만 피했지만 그럴때마다 로니는 티엘의 어깨를 잡아당겨 다시 시선을 맞췄다.

몇 번쯤 실랑이를 반복한 뒤, 마침내 티엘은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긴장한 눈으로 로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대신 입술은 단단히 걸어잠근 성문처럼 꼭 다물려 있었다.

"비밀은 지켜줄테니까, 무슨 고민인지 아줌마한테 말해볼래?"

옅은 불신의 눈초리.

로니는 피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첼 부탁으로 온 건 맞지만, 아첼에겐 절대 말하지 않을게. 물론 나쁜 일을 계획하는게 아니라는 조건이야."

"정······말이죠?"

"그러엄. 약속할게."

"약속이에요? 꼭 지켜줘야해요?"

로니는 이상할 정도로 비밀 엄수를 요구하는 티엘을 보며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작가의말

과연 티엘의 비밀은?

설마 아첼이 염려하는 것처럼 또 대형 사고 터뜨리진...않겠죠...? ^^a;;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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