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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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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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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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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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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7쪽

2장-막간幕間(7)

DUMMY

며칠간, 마을을 오가며 점점 사람들과 친해진 티엘은 돌아올 때마다 뭔가를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나무꾼 우즈가 이사온 기념이라며 낡은 평상을 개조해 만들어준 침대가 방 안에 자리잡았고, 아넬라가 자투리 천을 이어붙이고 오래된 솜을 채워 만들어준 두툼한 담요가 두 개로 늘어난 침대 위에 하나씩 놓여있었다.

벽에는 잡화점의 로인이 가져다준 큼직한 훈제육 덩어리가 두 개 걸려있다.

정작 돈을 주고 사온 물건은 한 줌도 되질 않아, 없는 살림에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인심이 두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달라진 것은 그 뿐만은 아니었다.

며칠간 요양한 아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영체역류정도는 금방 낫는 법이다.

아직 손상되었던 마력은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전력으로 마력을 쥐어짜 전투를 하는 정도만 아니라면 주문을 쓰는 것도 무리는 없었다.

때문에 아첼이 병상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한 것은 뜻밖에도 사냥이었다.

바람 속성의 생령 라피온으로 온 숲을 뒤져, 겨우 사흘 만에 큼지막한 멧돼지를 두 마리나 잡아 온 아첼은 공회당에서 정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떠들썩한 잔치를 즐겼다.

하지만 무한정 쉴 수만은 없었다.

미리 계곡 안쪽에 보아두었던 공터에 안전을 위한 결계를 설치하고, 주문했던 활 과녁도 어느새 한 켠에 단단히 고정시켜두었다.

본격적으로 티엘을 위한 수업이 시작된 것은, 윌란에 정착한 지 일 주일 째가 되는 날이었다.

"······마법의 모든 것은 두 가지에서 시작돼. 유동적인 흐름, 정적인 결과. 결과를 특정해 흐름을 이끌고, 흐름을 유도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게 마법사의 일이라고 했지?"

"으······으응."

"그러나 흐름은 반드시 결과로 귀결되고, 결과는 반드시 새로운 흐름을 열지. 그런데 사랑하는 티엘. 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단다."

상냥하게 웃던 성모의 얼굴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의 얼굴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넌 왜 그게 안돼는거야! 마력을 익힌지가 언젠데 아직도 기초 운용도 쩔쩔매는건데!"

"나, 나도 몰라!"

정정. 티엘이 활 줄을 거는것부터가 최우선 목표다.

티엘의 마력 다루는 솜씨는 좀체 늘지를 않았다.

목적없이 마력을 흩뿌리는건 가능했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리 마력이 빙결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무작정 뿜어내는것은 주위가 워낙 더워 온도를 낮출 일이 있을 때 말고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티엘은 아첼이 아무리 도와줘도 마력을 응집시키질 못했다.

애꿎은 손은 물집이 잔뜩 잡혔지만 야속한 활은 미세하게 굽을 뿐, 시위를 걸기엔 한참 모자라기만 했다.

"마력을 뿌리지 말고 팔을 감싸라니까······. 에구구, 그만, 그만!"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내다보니 점점 파랗게 질려가는 티엘의 안색을 보던 아첼은 한숨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고작해야 80시안.

티엘의 마력량은 고작 그 뿐이었다.

이제 막 마력을 깨우치는 초보 마법사들이 보통 그 배 이상은 지닌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절망적인 마력량이다.

티엘이 가진 마력이 질 자체는 굉장히 높은 만큼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일어난 변화는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다.

더구나 마력을 다루는 기술은 이론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너무나 순도높은 마력은 다루기 힘들고, 그러다보니 얼마 없는 마력을 다 쓰기도 전에 지쳐 나가떨어지는게 티엘의 현실이었다.

"자, 티엘. 천천히- 이렇게 해봐."

아첼은 티엘의 팔을 잡고 마력을 흘려넣었다.

티엘의 몸에 남아있던 마력이 잠시 거부반응을 일으키다, 이내 밀려들어오는 아첼의 마력에 눌려 흩어졌다.

아첼은 흘려넣은 마력을 조심스레 움직여 티엘의 팔을 감쌌다.

일부러 천천히 시범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미 이것도 수십 번은 되풀이된 일이었다.

티엘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건지 주눅든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 경험이 축적되면 자신감을 잃는건 당연하지만, 첫 시작부터 지나치게 어려운 과제에 마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 번씩 언성을 높이긴 하지만, 티엘 본인의 자괴감이 더 크리라는 것은 아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기를 죽여놨나? 휴우, 이렇게나 힘들 줄 알았으면 좀 약한 활로 사올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이런 물건 또 언제 구한다고······. 으윽······.'

아첼은 흘끔흘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티엘 몰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상태로라면 마력만 훈련시키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리하게 마력 훈련만 시키다간 티엘이 크게 다친다.

그도 아니라면 부족한 마력을 보충하는 또다른 수단이 있긴 있다. 생령과 계약하면, 비교적 마력을 여유있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첼은 티엘에게 흑마법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발을 들이면 후회해도 너무나 늦은 일이 되어버릴테니.

그래서 오히려 티엘을 다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영격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력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아도 생령과의 교감이 강한 카르티치스의 피를 타고난 티엘이다.

혹여 마력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생령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서 한 발짝 잘못 딛어버리면 목숨을 담보로 마력을 쓰는 흑마법사가 된다.

그러니 생령에게 기대지 않을 정도로, 티엘 본인의 기량을 길러두는 것은 양보할 수 없었다.

최소한 몸을 지킬 아스트라만큼은 완벽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하아, 좀 쉬었다 해라. 몸 상할라."

"아, 응."

티엘은 쭈뼛쭈뼛 서있다 어색한 동작으로 한 쪽에 앉았다.

아첼은 저도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다 티엘이 움찔 하는것을 보고는 남 몰래 속으로 삼켰다.

가르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배우는 사람에게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안그래도 의기소침한 티엘에게 안좋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아첼은 티엘의 활 옆에 놓여있었던 자신의 활을 꺼내들었다. 잠시 활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이 힘있게 활채를 끌어당겨 쥐었다.

티엘은 슬쩍 아첼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전혀 힘들지 않은듯한 동작이 이어진다. 가볍게 양쪽을 쥐고 꺾는다.

평소에는 쇠막대기같이 단단하던 활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며 몸을 뒤틀었다. 팽팽하게 걸리는 시위는 활이 제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가차없이 막았다.

이어 아첼은 연습용으로 가져온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겨 겨냥했다.

화살이 가볍게 떨리고 티엘의 가슴도 가늘게 떨린다.

떨리는 시(矢).

가슴 졸인 끝에 다다르는 해방.

마침내 화살이 날아갔다.

긴장의 끝에서 해방되는 화살은 언제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과녁에 날아든 화살은 여지없이 명중이었다.

연속하여 모두 다섯 발, 시위를 떠난 화살은 멀리 떨어진 표적의 중앙을 단숨에 꿰뚫었다.

단순히 활을 다루는 것에서도, 아첼은 흔히 보기 어려운 실력자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활을 당기고, 화살을 내보낸다.

우아할 정도로 부드러운 그 움직임은 아첼 본인의 기량과 마력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아첼의 팔 힘은 그리 강하지 않다.

물론 아직 어린 티엘에겐 비할 수 없지만, 건장한 마을 청년인 칼에게는 도무지 당해내지 못할 수준이다.

그렇지만 활을 당겨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아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저 무서운 강궁을 당겨 아스트라를 날려보낼 것이다.

문득 티엘은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짓물러있긴 하지만 아직 희고 가늘기만 한 팔이다.

꼼지락거리던 손이 무심결에 활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시위조차 걸지 못한 활로는 빈 활을 당겨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설령 시위를 걸어도,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면 반 뼘조차도 당기지 못할 것이다.

언제쯤이면 자신도 이 활을 다룰 수 있을까. 조금은 분하고, 씁쓸하다.

"쉬라면 좀 쉬어, 제발. 언제까지 말을 안들을래?"

티엘이 다시 활을 잡고 용을 쓰는 것을 본 아첼은 쏘던 활을 내려둔 채 티엘에게 다가와 활을 빼앗았다.

당황한 티엘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첼은 그런 티엘의 손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그리고 다소 부루퉁해지는 티엘의 이마에 딱밤까지 날려주었다.

"조바심 내지 마. 활도, 마력도 천천히 배우는거야."

"하지만 난 항상 배우는게 늦는걸······."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까 소리지른건 내가 잘못했어. 네 잘못이 아닌걸. 화를 내야하는건 너였는데."

아첼은 쓰게 웃다, 문득 다시 티엘의 손을 끌어다 자세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티엘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놓았다.

"도와줄테니까, 다시 해 보자. 마력을 놓쳐도 좋으니까, 한 번 쏴 보는거야."

"으,응?"

"자, 한 눈 팔지 말고."

실패만 끝없이 경험하면 누구라도 낙담하는 법이다. 작더라도, 성공의 쾌감을 맛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나 마력을 다루는 것처럼 정신상태에 영향을 받기 쉬운 일이라면 더더욱.

예상대로, 티엘의 마력은 이미 거의 다 고갈되어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고집을 부리고는 있지만, 이래서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조차 불가능해진다.

아첼은 조용히 티엘의 마력에 맞추어, 티엘이 의도하는 대로 마력이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시범이라기보다는, 티엘에게 마력을 빌려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모래성을 쌓기 위해서 한 줌의 모래보다는, 한 자루의 모래가 더 유리한 법이다.

하지만 아첼의 마력은 무려 육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짙은 농도였다.

겨우 2선의 마력에도 허덕이는 티엘이 다루기에는 다소 벅찼다.

어쩌면 티엘이 실수하는 것으로 아첼의 마력마저 엉켜 둘 다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티엘 역시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신중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티엘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그 필사적인 노력이 보답받은 것일까.

티엘에게는 다소 무거웠을 아첼의 마력이 마침내 가느다란 두 팔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조금씩, 긴장 속에서 활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며칠사이에 몰라보게 좋아지긴 했어······.'

마력을 깨달은지 아직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아첼의 마력까지 다뤄내는 것을 보면 그저 마력량이 모자라 그런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게다가 이제 막 근력 강화에 성공한 녀석이, 자기 힘으로는 건드리지도 못하던 활을 이 정도나 꺾었다면 합격점을 초과달성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려던 아첼은 티엘의 얼굴을 본 순간 차마 멈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는 필사적인 표정.

고작 열세 살 어린애의 집중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앞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더 움직여준다면 시위가 걸린다.

그 한 마디를 넘기 위해, 티엘은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의식을 기울이고 있었다.

'뭐가 널 그렇게 떠미는거니, 티엘. 그렇게까지 다급해할 건 없는데. 설마 내게 짐이 되고싶지 않아서 그러는거야······?'

다소 날카로워 보이던 갈색 눈동자가 조금 기세를 잃었다.

대공가의 아이라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철이 드는건 아니다.

오히려 여물지 않은 가치관에 헛바람이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을 자신을 위한 제물로 쌓아올리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차라리 그렇게 당당한 모습이었다면 조금쯤 안쓰러운 마음이 덜했을까. 지나치게 어린, 아니, 순진한 마음은 쉽게 상처입을텐데.

너무 착하기만 한 것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법이다.

아첼은 가슴을 졸이며, 티엘과 마찬가지로 고집스레 버티는 활 끝을 응시했다.

'제발, 부탁이야. 걸려 줘.'

입술이 바짝 말라들어가는 그 순간, 마침내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던 활이 겨우 고집을 꺾었다.

몇 번이나 교묘하게 빠져나갔던 고리가 거짓말처럼 제 자리에 걸리며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꺾인 활 끝에 가까스로 시위가 걸렸다.

피잉, 하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침내 가느다란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됐어! 해냈잖아! 꺄아아! 티엘, 드디어 해냈어!"

정작 시위를 건 티엘보다도 곁에 붙어있던 아첼이 먼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히려 티엘은 시위를 건 것 만으로도 전신에 힘이 빠져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티엘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활 시위를 가볍게 튕겨보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울었다.

집중이 흩어진데다, 마력을 전해주던 아첼도 떨어진 탓에 이미 팔의 강화는 풀려있었고, 그 때문에 손바닥 전체로 쥐고 당겨도 시위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의 강궁이라면 어설프게 만든 판금갑까진 우습게 꿰뚫는다. 제대로 단련해온 것도 아닌 소녀의 힘으로 당긴다는것이 더 신기한 물건이다.

오히려 시위를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상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자, 봐. 하면 돼잖아.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동시에 큰 계단을 올라선거야. 축하해."

"고, 고마워."

티엘은 아첼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뒤늦게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티엘 역시도 뛸 듯이 기뻤지만, 아첼이 너무 요란스럽게 기뻐한 것 때문인지 이제와서 환호성을 지르기에는 뭔가 애매해진 기분이었다.

아첼은 웃는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을 한 동생을 보며 다시 한 번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쏴 보는 것까지 하기로 했잖아. 천천히 당겨볼까?"

"정말 쏘는거야······?"

"그럼 그걸로 나무라도 할 생각이니."

"나 화살 안가져왔는데······."

아첼이 가져온 화살은 습사용이 아닌 실전용이라, 서투르게 다루다 망가지기라도 하면 조금 곤란하다. 그리고 티엘의 얼굴은 아직 시위도 걸지 못하는 실력으로 화살까지 들고다닐만큼 두껍지 않았다.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쏘라면 못 쏠 것도 없겠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된 연습이 될 리도 없다.

티엘은 화살을 가져올 생각으로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첼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특유의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티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려고?"

"화살 가져 오-"

"누구 맘대로?"

때때로 아첼이 귀신보다 더 무서워지는 이유는 바로 저 웃음 때문이리라.

순간 티엘의 머릿속을 스친 단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스트라.

따로 화살을 지니지 않아도 활을 쏠 수 있게 해주는 고위 영격술식.

하지만 본래 영격술이라는 것은 가르친다고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몸에 쌓인 감각을 바탕으로, 무의식중에 마력을 움직이게 되는 특수한 기술이 영격술이다.

특히나 아스트라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나 어려운 것으로, 활이 표적을 꿰뚫는다고 해도 사수에게는 어떤 감각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첼은 그런 상식을 비웃듯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문득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가늘지만 꽤나 탄탄해보이는 나뭇가지는 살짝 휘었다 놓는 것만으로도 제법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랐다.

회초리로 쓰기에는 딱 좋은 물건이다.

티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어머, 왜 그러니?"

"아하하하하, 아첼. 그건 갑자기 왜 꺾은거야?"

"그을쎄? 왜일까나?"

"으힉!"

티엘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꼭 감았다.

아첼의 표정을 보니 왠지 굉장히 즐거워보였고, 두 손으로 가볍게 나뭇가지를 잡고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사신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평소 아첼의 성격은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마주 웃던 사람을 때릴 수 있을만큼 능청스럽기도 하다.

간만에 약점을 잡았으니 이런식으로 복수하는걸지도······.

하지만 잠시 후 티엘은 아첼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췄다는걸 깨달았다.

아첼의 표정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푸흡, 큭, 크하하하하! 너 진짜 웃기다? 누가보면 내가 막 때리고 그러는 줄 알 거 아냐? 크크크크큭!"

순간적으로 티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또 속았다는 사실에 아첼의 웃음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다.

티엘은 아첼의 입을 막을 기세로 두 팔을 휘두르며 허둥거렸다.

"노, 놀리지 마!"

"큭큭크, 아, 알았어. 그만, 그만 웃···근데 웃기잖아! 웃길 짓을 해놓고 웃지 말래? 큭큭······."

다시 보니 아첼은 나뭇가지 끝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잡고 있었다. 마치 화살을 잡은듯한 손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한바탕 회초리를 휘두를 기세였으면서 잘도 저렇게 말한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티엘은 뚱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다, 대뜸 아첼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야, 놔! 아파!"

"그만 웃어!"

"알았어. 아휴, 여자애가 저렇게 표독스러워서 어쩜 좋으니."

"아체엘!"

"아야야, 알았다니까!"

성질 고약한 언니와 동생의 실랑이가 겨우 잦아든 뒤, 아첼은 자신의 활에 나뭇가지를 올려놓았다. 마치 나뭇가지를 화살 대용으로 쏠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첼은 그 상태에서 시위를 놓는 대신, 짧게 몇 마디를 읇조리며 시위에서 자유로운 새끼손가락으로 나뭇가지를 살짝 건드렸다.

아첼의 손에서부터 은은한 검은 색의 마력이 흘러나와 나뭇가지를 뒤덮었다.

이내 나뭇가지가 있던 곳에 자리잡은 것은 검은 기운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아스트라였다.

"이렇게 하면 돼. 간단하지?"

"언닌 원래 아스트라를 만들 줄 알잖아."

"얘가 안믿네. 자, 만져봐."

아첼은 자세를 풀고 티엘에게 아스트라를 넘겼다.

티엘은 움찔움찔 놀라며 조심스럽게 아스트라를 넘겨받았다.

"원래 아스트라는 시전자 말고는 만질수도 없어. 그리고 그거, 한 번 부러뜨려봐."

티엘은 반신반의하며 화살 양쪽을 잡고 꺾어보았다.

그리 어렵지 않게 화살이 부러지며 아스트라를 이루던 마력이 풀려나 주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그리 강하지 않아 겨우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정도였다. 별다른 환각이 보이지도 않았고, 티엘의 손에 상처를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안에 두 동강난 나뭇가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

당연히 나뭇가지는 아스트라에 휘말려 사라졌을거라 생각했던 티엘은 신기하다는듯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으로 아무리 살펴본들 나뭇가지가 아스트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아첼은 다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아스트라를 건 뒤, 이번에는 직접 화살을 쏘았다.

검은 화살은 표적에 박히자마자 안개처럼 흩어지고, 대신 나뭇가지가 박혀있었다.

"반 아스트라(Semi Astra;半靈矢)라는거야. 원리는 근력강화랑 똑같아. 술식은 천천히 가르쳐줄테니까 따라서 해봐."

본래 아스트라가 형성되면 마력과의 반발로 나뭇가지같은 약한 물체는 바스라져버린다.

반 아스트라라는 개념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티엘이 조금만 더 영격술에 관심이 있었다면 알 수 있었으리라.

겨우 스물 두 살의 아첼이 고위 영격술 아스트라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본래 이론으로 체계화할 수 없는 손끝의 기술을, 수많은 술식의 연계를 통해 마법으로 구현해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마법으로 아스트라 구현을 시도했으나 성공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정형화된 글로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예외는 있다.

단 한 명의 예외.

십 대의 어린 나이에 '아스트라 술식'을 완성시켰으며,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매혹의 밤안개 아첼레란도의 주문.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신만의 비전술식을, 아첼은 망설임 없이 티엘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이었다.

아첼은 티엘의 손에 들려있던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빼앗은 뒤 티엘의 뒤에서 손을 잡고 직접 인도했다.

아첼의 마력이 티엘의 팔을 타고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그 뒤를 티엘 자신의 마력이 천천히 뒤쫓아간다.

마침 조금 전 시위를 걸며 한껏 들떴던 덕분인지, 그 짧은 시간 치고는 티엘의 마력도 상당량 회복되어 조금 전보다도 마력을 움직이는 것이 수월한 편이었다.

"-형태구성은 나눠서, 응. 그 뒤에 다시 잡아주고."

어린 시절부터 완성해 평생을 가다듬어 온 비전이지만, 아첼은 숨길 이유따위는 없다는 듯 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고 있었다.

술식이 어긋났을 때의 변형점, 변환식, 시시콜콜한 주의점들.

하나하나 말하자면 밤을 세도 모자를만큼 자질구레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자칫 지루할수도 있는 이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티엘은 오히려 즐거웠다.

오랫동안 아첼과 함께 지내면서 이런저런 가르침들을 받아왔지만, 그것을 실제로 성공시킨 적은 없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아첼이 가르쳐준 무언가를 완성해냈고, 그에 화답하듯 또다른 무언가를 함께 배누고 있다.

아첼과 함께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티엘에겐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었다.


티엘은 아첼을 따라 손끝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아첼과는 달리 손이 지나간 뒤로 마력의 선이 희미하게 그어져 빛을 낸다.

천천히 나뭇가지 주위에 마력이 모이며 나뭇가지 전체가 희푸르게 물들어갔다.

"강하게 맺어 줘."

점점 화살의 모습을 갖춰가는 마력을 보며 아첼이 한마디를 던졌다.

너무 많은 마력이 들어가지 않도록 진땀을 빼던 티엘은 아스트라에 들어가는 마력을 조금씩 더 늘리기 시작했다.

반투명하게 비치던 나뭇가지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푸르게 빛나는 마력이 어설프게나마 형체를 갖춰갔다.

그 형태는 아스트라와 매우 흡사했다.

물론 모양만 비슷할 뿐, 단순히 접촉과 함께 폭발해버리는 일반적인 마탄이라면 아스트라라고는 부를 수 없다.

화살의 형체를 갖추고 표적을 파고든 뒤 모든 위력을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스트라의 진면목이다.

아첼은 마른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티엘의 티엘이 완성한 아스트라에 가까이 가져갔다.

다행히도 단순 접촉만으로 폭발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대강 성공한 것 같은데. 잠깐······. 뭔가 이상한데······?'

그럭저럭 만족하려는 찰나 마력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애초에 연습용으로 위력을 낮추기 위해 만든 반 아스트라 술식인만큼, 소모하는 마력도 매우 적다.

그러나 티엘이 들고있는 아스트라는 이미 그 수준을 넘긴 상태였다.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지거나 해서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들어간게 분명했다.

"티엘, 너무 강해! 힘 빼!"

어느새 아스트라는 완연한 청백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길이 또한 본래대로라면 나뭇가지의 길이를 살짝 넘는 수준에서 멈춰야 할 것이 오히려 부러지기 전보다도 길었다.

믿을 수 없게도, 티엘이 만들어낸 것은 거의 완벽한 아스트라에 가까웠다.

정상적인 절차로 구성하지 못했으니 정상적인 아스트라에 비해 위력은 약할지도 모르지만, 저 화살 안에 들어간 마력의 양으로 보면 웃고 넘어갈 수준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언제 폭주해서 터질 지 모른다는 것만 제외하면, 지나치게 우수한 결과다.

"말도 안돼···."

"이, 이거 어떻,게 해······?"

티엘은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물을 막았다 한번에 터뜨리면 굉장한 힘으로 휘몰아치듯, 억제하던 마력을 조금 늘리자마자 거의 한계치까지 마력이 몰리는 바람에 아스트라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던 것이다.

"마력 끊을 수 있겠어?"

"아, 안돼! 멈추질 않아!"

이런 바보.

조금 전까지 자랑스러운 동생이었던, 지금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사고뭉치를 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물론 초보자에게 아스트라를 쏴보라고 부추긴 아첼의 책임이 더 크지만, 일단 눈앞의 상황을 보면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그럼 그냥 쏴버려. 내가 도와줄게."

"아, 알았어."

아첼은 한번 심호흡을 한 뒤 티엘의 손을 끌어 활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마력을 풀어 자신과 티엘의 팔을 보호했다.

마력의 갑옷은 두 사람의 팔을 보호하는 동시에 서로 떨어지는 것도 막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티엘의 마력이 바닥나며 아스트라의 유지가 굉장히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서 아스트라가 폭발하면 무슨 꼴이 일어날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혀를 차며 단숨에 활을 만작까지 당기자 티엘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스트라는 작은 폭풍이라 해도 좋을만큼 멋지게 폭주하고 있었다.

대체 어느 바보가 이런 꼬맹이한테 활을 쏴보라 시킨걸까. 슬슬 자아비판까지 시작된 아첼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잡념을 털었다.

"놔!"

피이잉! 아첼의 구령과 함께 해방된 아스트라는 초심자가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후폭풍을 남기며 시위를 떠났다.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이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는 사이 표적까지 날아든 아스트라는 광포하다는 말을 보여주듯 단숨에 표적을 꿰뚫었다. 소나무로 짜맞춘 단단한 표적은 누군가 톱으로 잘게 찢어놓은 것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난 채 바닥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아스트라의 파괴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표적지를 고정해둔 바위가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통째로 폭발하며 사방으로 돌가루를 날렸다. 그러고도 힘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듯, 아스트라는 쉴 새 없이 미쳐 날뛰었다.

아스트라가 날아간 궤적에는 용이라도 파헤치고 지나난 것처럼 엄청난 흔적을 남기며 일직선의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사선 끝에는······,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두 사람의 집이 있었다.

"어어어어어? 아, 안돼! 멈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황망히 집으로 달려갔다.

깊은 산, 그것도 계곡 바로 앞에 있는 집이라 바람구멍 하나 뚫리면 벽난로를 아무리 때도 밤새도록 오들오들 떨어야 한다.

티엘은 또 사고쳤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졌고, 아첼 역시 자신인지 티엘인지 모를 누군가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미친듯이 산길을 달렸다.

다행히 과녁 하나와 나무 두 그루를 꿰뚫는동안 힘이 많이 떨어진 아스트라는 두터운 통나무로 보강한 벽을 완전히 부수지는 못한 채 반쯤 박혀있었다. 술식이 불안정했던게 천만다행이었다.

날아오며 지속적으로 마력폭풍을 일으킨 바람에 계곡을 벗어난 시점에서는 이미 위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듯 했다.

가까스로 안도한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란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스트라가 뚫어놓은 구멍은 주먹 하나가 드나들 정도의, 비교적 작은 크기였다. 저 정도라면 수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으이그, 못살아. 하늘로 쏴도 됐잖니. 아아아, 내가 가르친 사람이 많은건 아니지만 정말 최악의 제자로다."

"그, 그러니까 오늘은 안 쏜······, 댔잖아."

"뭐? 으휴, 내가 늙는다, 늙어. 이래서야 영······. 아-"

뭔가 이상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아첼은 이마를 찌푸리며 티엘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티엘은 어정쩡하게 아첼에게 끌려올 뿐이었다.

다급해진 아첼은 티엘의 뒷덜미를 잡아채 휙 던져버렸다.

"망할! 너 이따 보자!"

"에? 잠까-"

콰아앙!

최후의 순간까지 상황을 이해해 보려던 티엘의 노력은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벽에 가만히 박혀있던 아스트라가 폭발하며 어마어마한 흙먼지와 파편을 흩뿌렸다. 다행히 파편을 맞지는 않았지만 자욱하게 깔린 먼지구름은 피할 방도가 없었다.

티엘과 아첼은 둘 다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콜록대며 손으로 먼지를 날렸다.

하지만 구름처럼 피어오른 흙먼지는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아첼은 신경질적으로 라피온을 불렀다.

"······망할. 오늘 잠은 다 잤네."

거의 들으라는 투로 중얼거리는 아첼의 목소리는 묵직한 죄책감이 되어 티엘의 고개를 떨궜다.

아스트라가 박혀있던 자리에는 티엘 정도의 체구라면 손쉽게 드나들 수 있을만한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폭발에 날려간 흙도 어른 무릎 깊이는 될 것 같다.

바깥에서 보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안은 어떨까?

티엘은 쭈뼛거리다 쪼르르 달려가서 구멍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으히익!"

티엘은 기겁하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안과 아첼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굉장히 불안해진 아첼은 심호흡을 몇 번 한뒤 구멍쪽으로 다가갔다.

강력한 충격파로 뜯겨나간 나무 부스러기들이 참 애처롭다.

아스트라의 안쪽에는 표면보다 농도가 진한 마력이 들어있었는지, 티엘의 마력 속성이 구현되어 집안 여기저기가 죄다 얼어붙어 있었다.

물론 집안에도 온통 먼지가 가득했고 벽 가까이에 있던 가구는 그야말로 땔감도 안 될 수준의 나무 부스러기로 변했다. 가재도구는 후폭풍에 흩어져 난장판이 벌어졌다.

잠시 신음성을 삼키던 아첼은 갑자기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티엘의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던 티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후다닥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은 이미 너무나 늦어버린 후였다.

이미 아첼은 터져나오는 분노를 가득 실어, 티엘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고 있었다.

"이 멍청한 꼬맹이! 힘 조절 하나 못해서 집을 박살내냐아!"




* * *




"······그런 일이 있어서요······."

티엘은 자신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로인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차마 떳떳하게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그 날 청소는 하루 종일이 걸렸고, 덕분에 아첼은 완전히 지쳐 아직도 눈을 못뜬 상태였다.

사과의 표시로 아첼이 좋아하는 사과파이라도 만들어 줄까 싶었던 티엘은 무턱대고 로인의 잡화점까지 내려오긴 했지만, 역시 전날의 소란을 해명하는 것은 조금 많이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일단 다치지 않은게 다행이구나. 아, 일단 여기 앉아있어. 배고프면 좋을대로 하나 골라서 먹고."

"감사합니다······."

로인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한동안 굉장한 소음을 냈다.

그동안 티엘은 쭈뼛거리다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나저나 사과의 의미로 요리를 해준다는건 알겠는데, 파이 만들 줄은 알아?"

"······아."

귀족 출신이 파이같은 요리를 할 줄 알 리 없다.

매일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티엘이긴 했지만, 대부분 그리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간단한 식단일 뿐이다. 그마저도 무엇보다도 아첼이 절망적으로 요리를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충 반죽해서 구우면 되겠지 싶었던 티엘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딴청을 피웠다.

만드는 법도 모르면서 당돌하게 파이를 만들겠다 선언하는 티엘이 황당했던 로인은 '의외로 웃긴 녀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나마 물어보니 화덕은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 적당한 도구랑 재료만 있으면 만드는게 어렵진 않으리라.

"책은 몇 권 없지만 한 번 찾아보자. 불 조절은 할 줄 아는거지?"

"네에······."

티엘은 처량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로인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가게 안은 책을 찾는데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물론 책이란 비싼 물건을 사 갈 사람이 거의 없는 촌구석이라 그동안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이런 일이 생기면 피곤한건 어쩔 수가 없다.

로인은 구석에서 유리 등피가 있는 자그만 램프를 꺼내 불을 밝혔다.

이것저것 쌓아놓는 게 취미라더니, 팔리지도 않을 저런 비싼 물건은 뭘 저리 많이 들여다 놓은 것일까.

"저쪽 선반 맨 아래쪽에 종이로 싸둔 꾸러미 보이지? 저 중에 있을거야."

로인은 티엘에게 램프를 건네주며 책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티엘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구석에 쳐박혀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콜록콜록! 머, 먼지가······."

찾는 이가 없으니 어마어마한 먼지가 쌓여있다.

식료품은 판매대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신경써서 관리하는 것 같았지만 이런 구석쪽은 청소도 대충 하는 모양이었다.

책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있는 가죽 모자나 새 잡는 그물같은 물건들도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티엘은 연신 손으로 먼지를 흩어놓으며 책을 싼 포장을 풀었다.

램프에 등피를 씌워두지 않았다면 불이라도 이라도 날 듯 했다. 로인이 어째서 유리 등피까지 있는 고급 등잔을 구해두었는지 뒤늦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먼지에 연신 기침을 하며 악전고투를 한 끝에, 마침내 책을 감싼 포장을 모두 풀었다.

네다섯 권 뿐인 책은 하나같이 오래된 고서같은 느낌을 주었다.

티엘은 한쪽부터 천천히 책의 제목을 따라갔다. 그때 문득 티엘의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검게 물들인 가죽 장정에, 표지 모서리에는 금속 보강까지 되어있는 한 눈에도 값비싼 서적이었다.

무심결에 손을 뻗은 티엘은 책의 표지를 살짝 넘겼다.

제목조차 박혀있지 않았던 겉표지와는 달리, 안쪽에는 그녀의 흥미를 확 당기는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아저씨!"

티엘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책을 뽑아들고 로인에게로 달려갔다.

마침 들어온 손님에게 고개만 끄덕여 인사한 티엘은 그대로 로인에게 책을 내밀어보였다.

"뭐니? 이거 요리책은 아닌데? 이런 책도 있었나?"

"이 책 얼마에요?"

마력 조작 입문.

티엘이 집어든 책은 마법을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읽는 기본서였다.

마력을 다루는 기본적인 요령과 주의점에 대해서 상세히 적혀있는 책으로, 보통 백마법사들이 스승 아래서 처음 접하는 교재이기도 했다.

물론 아첼이 마력 운용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첼은 처음부터 생령과 계약해 그 힘을 빌리는데서 시작한 반면, 티엘은 자신만의 마력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지금의 티엘에게는 백마법사의 방식이 더 어울렸던 것이다.

하지만 로인은 눈까지 반짝이며 즐거워하는 티엘을 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꼬마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싸디 비싼 책 한 권을 살 수준은 아닐것이다.

사실 티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애플파이의 재료를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꼭 살 필요는 없어. 깨끗하게만 보고 돌려주면 빌려가도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그런 책 필요한 사람이 또 있는것도 아니고."

어디서 들여왔는지 기억도 안나는 책이다.

일단 책이라는 물건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비싼 물건이니 '빌려준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작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저런 책은 심심풀이로도 읽을게 못된다. 필요한 사람에게 그냥 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와아아! 고맙습니다!"

티엘은 책을 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로인은 피식 웃으며 티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나저나 요리책은 찾았니?"

"아차-."

"······아직 어린 녀석이 뭐가 그리 급하냐, 인석아. 가서 요리책도 찾아와."

"정말요? 고마워요, 아저씨!"

다른 물건들을 넘어뜨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흥분한 꼬마는 결국 로인이 나서기 전까진 조금도 진정하질 못했다.

식재료 살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뭐가 들었는지 모를 상자에 걸터앉아 책을 뒤적거리는데,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몸이 쉴새없이 들썩거렸다.

그림이라곤 복잡한 도식만 가끔 있는 빽빽한 책이 뭐 그리 재미있는 것인지,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서 머리가 아플만도 하건만 진지한 얼굴로 탐독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로인이 파이 재료를 작은 자루에 담고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그제서야 그걸 깨달은 티엘은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보기 드문 모습이라 가게에 들어온 다른 손님들도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 날 저녁, 티엘은 정성껏 준비한 요리와 함께 아첼에게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그리고 아첼은 흔쾌히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초 목적이었던 파이는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집에 적당한 조리기구가 있는지 깜빡한 요리사의 말로라고나 할까.

"화덕······, 날아가버렸었지······."

"괘, 괜찮아. 맛만 있으면 됐지. 응?"


작가의말

2장 막간편 끝입니다. 겨우 두 자매가 안주할 곳이 생겼네요.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좋은 때지만, 과연 어떨까요.


이번에 언급된 영격술(靈擊術)은 말 그대로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가 영체를 상대하는 기술들입니다.  검을 예로 들면 칼끝으로 적을 베다, 칼끝이 살짝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서도 ‘베는’ 감각을 유지하고, 이걸 점점 늘려나간 끝에 먼 거리의 적을 원거리에서 벨 수 있게 되는 식. 완전히 익숙해지면 나뭇가지나 맨손으로도 검격이 가능해지니, 무협지의 검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다만 마법사와는 마력을 다루는 방식이 전혀 달라서, 오히려 이 둘은 거의 호환이 안됩니다. 마법으로 영격술을 구현해낸 아첼이 그냥 괴물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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