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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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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1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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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6쪽

3장-개화開花(7)

DUMMY

"켈리아, 라피온, 이프라이엘-! 들어라, 그림자의 광대여! 왕의 길을 막아라. 일그러진 환상과 보이지 않는 거짓 성벽, 베일로 칼날을 두고 침향대신 창검을 두어 여왕의 침전을 지켜라! 익시온, 파드미엘, 아틸리아-! 새벽 별조차 잊어버릴 가시나무의 벽을 둘러라. 수호의 위(位)에는 그림자의 왕, 그대들이 섬기는 역천과 원죄의 용. 사계(四界)의 길을 막고 나아가 진리를 숨겨라!"

여섯 생령의 마력이 일제히 깨어나 지면을 달린다. 뻗어나가는 마력이 서로 얽히며 탄탄한 벽을 만들었다.

길고 복잡한 영창과 제어식을 통해 몇 겹이고 두 사람을 둘러싼 방벽은 더더욱 강렬한 빛을 발하며 성채같은 웅장함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첼은 거기서 멈추지 않도 또다시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적원(寂原)을 꿰뚫어라!"

날붙이로 긋기라도 했는지 양 손목에 생긴 상처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손으로 받으며 짧막한 영창이 끝났다.

동시에 손에 고여있던 피가 부글부글 끓다가 사라지며 아첼의 주위로 빽빽한 가시덩굴을 연상시킬 정도의 무수한 아스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첼! 그렇게 대규모로 마력을 쓰면-"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아? 이 정도는 이해해 줘. 아, 그리고 등은 너한테 맞긴다고 했지? 지금부터 긁힌 상처 하나당 하루씩 설거지 전담하는거다?"

마치 농담이라도 하듯 미소를 짓는 아첼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떨게 만들었다.

왜일까.

이토록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서,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가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불길한 예감이 조금씩 마음을 좀먹어간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 혼자서는 힘드니까 서로 지켜주는거야. 대단한 줄 알아. 내가 등을 맞긴 마법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라고. 그리고······. 아, 이런. 잡담은 더 못 하겠네! 쏴, 티엘!"

숲을 헤치고 뛰어오른 그림자가 만월을 가린다. 그리고 동시에 사방에서부터 이글거리는 눈동자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낄낄거리는 묘한 웃음소리가 그림자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첫 번째 그림자가 결계에 와닿는 순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첼은 미리 만들어두었던 아스트라를 일제히 전개시켰다.

수십 발의 아스트라가 무자비한 폭풍이 되어 주변 지형을 말 그대로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한 생령이 팔을 교차해 화살을 빗겨냈다. 무수한 화살이 방향을 꺾어 폭풍처럼 생령을 집어삼켰다.

하나의 화살을 쳐낸 자는 그 배가 넘는 화살에 꿰뚫리고, 다시 그 뒤를 넘으려는 자를 가로막으며 함께 폭발에 휘말려 산화한다.

첫 시도에서 결계를 넘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순간만에 피바람이 불며 자욱한 피냄새와 야릇한 잿가루의 냄새를 풍겼다.

위력은 굉장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마력을 잡아먹는 주문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넣었던 마력을 전부 소모해버린 주문은 매캐한 연기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고, 그 직후 마치 기회를 잡았다는 듯 제 2진의 공격이 시작됐다.

더이상 결계 바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든 마령들은 직접 달려와 결계에 몸을 부딪혔다.

"아윽-! 익시온!"

결계에 충격이 가해지자 시전자인 아첼에게도 피해가 전해졌다.

아첼은 마력이 조금씩 역류하려는 것을 이를 악문 채 버티며 익시온에게 마력을 보냈다.

한 순간 마력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일부 마령들이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대다수의 마령들은 섬전처럼 치닫는 익시온의 벼락폭풍에 그대로 몸을 내맡기고 말았다.

밤이 낮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 그리고 방전음.

그 위에 거친 비명소리까지 더해지자 차마 귀로 듣기 어려운 끔찍한 연주회가 완성된다.

하지만 마력이라면 기사급의 생령들인 그들 역시 충분할 만큼 가지고 있었다.

익시온의 마력이 분명 대단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사를 통해 한 호흡, 늦게 발현되는 마력이다.

느린 녀석들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전격에 휘말려 잿더미로 변해갔지만 겨우 몇 마리가 전부였고, 오히려 대부분은 전격을 피해 결계에 공격을 가했다.

"하아, 하아······. 파드미엘!"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광역주문이 다시 펼쳐졌다.

아무리 강력한 생령이라도 일정 시간동안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생령의 마력을 끌어와 사용하는 마법사에게도 역시 한계는 명백하다.

쉬지도 않고 한계에 달하는 마력을 몇 번이고 쥐어짜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마력의 균형이 무너지다 조금씩 역류하기 시작하자 아첼의 몸 이곳저곳에 내상으로 피멍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첼은 기어코 마법을 완성시켰다.

파드미엘의 마력이 결계 안쪽에서부터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우우우우!"

그 때 마령 한 마리가 결계에서 가장 약해진 부분으로 돌진했다.

와장창!

순식간에 결계 전체가 허물어져내렸다.

열댓 마리의 마령이 비웃기라도 하듯 마력이 스며든 곳을 헤집어버리고는 두 사람에게 몸을 날렸다.

티엘이 비명을 지르며 아스트라를 겨냥했지만 당연히 중과부적으로 위험한 상황.

그러나 오히려 아첼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켈리아. 파드미엘! 적원을 꿰뚫어 연옥의 가시밭으로 인도하라! 라피온. 거인의 한숨으로 방벽을 세워라!"

우우우웅! 콰과과과과과!

언령과 함께 땅에서부터 마력의 가시가 우후죽순으로 빽빽하게 피어났다.

발 딛을 곳조차 없이, 말 그대로 가시밭길을 만들어낸 검은 마력 덩어리들은 제각기 하늘로 치솟은 뒤 산산조각으로 쪼개지며 수십 개의 파편으로 갈라졌다.

밤하늘을 완전히 감춰버리는 수천 개의 파편이 섬뜩한 살기를 품고 마령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쉬이이익! 쉬잇, 쉬이잇!"

"크르륵, 쿠어어어!"

불꽃과 벼락이, 얼음과 강풍이 하늘을 어지럽힌다.

어두컴컴한 주변이 한순간이나마 환하게 밝혀질 정도의 마력이 곳곳에서 비산했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흩뿌려진 죽음의 낙인을 흩뜨리지는 못하고 하나하나 자색의 방패에 가로막혀 스러졌다.

마력의 방패는 공격이 그치자마자 사라졌고, 그 뒤에 기다리던 파드미엘의 마력이 무자비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찢고, 부수고, 잿가루와 죽음의 냄새를 두른 채 화려하게 춤추는 죽음의 무도(舞蹈).

아첼이 그 목숨을 깎아낼 각오로 매번 거대한 주문을 흩뿌릴 때마다 수많은 마령들이 바스라져 소멸했다.

그러나 주문이 크고 강대할수록 빈틈은 점점 커졌다.

아직 미숙한 티엘 혼자서는 아첼의 빈틈을 완전히 메꿔줄 수 없었고, 오히려 아스트라로 적을 흥분시키는 것밖에 하지 못해 때때로 아첼이 구해주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 틈을 타, 두 사람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마령들은 저마다 몸뚱이를 휘둘러 추악한 살의를 그대로 표출했다.

매 순간마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연신 등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아아악!"

"으헉!"

자신의 허리 둘레보다 두꺼운 괴수의 팔이 날아들자 엉겁결에 활을 들어 막은 티엘은 비명과 함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행히도 그 궤도에는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있던 아첼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충돌한 두 사람은 한데 엉겨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미, 미안해!"

티엘은 얼른 몸을 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느긋하게 사과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전신이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욱씬거렸다.

티엘은 다급하게 아스트라의 술식을 떠올리며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조금 전의 충격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아니면 티엘의 마력 운용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마력이 흐르는 순간 갑자기 활 몸 위로 가느다란 균열이 내달렸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려 하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활이 안쪽에서부터 터져나갔다.

"크흑!"

팔천 칼브람이나 주고 샀던 활이 단숨에 박살나 더이상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폭발하는 순간 튀어나간 파편들은 운 좋게 마령 하나를 벌집으로 만들어 쓰러뜨린 반면, 티엘에게는 그리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요행은 거기까지였다.

무기를 잃어버린 이상 대항할 수단이 없어져버렸으니.

"이, 이러면 안되는데······."

티엘은 허망하게 부서져버린 활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개도 없고 달도 지나치게 환한 지금,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까지 잃었다.

그런데도 마법사의 피에 굶주린 마령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섭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티엘의 심장을 옭아맸다.

티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무심결에 아첼에게 몸을 기댔다.

"콜록, 콜록!"

그러나 티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아첼은 몸을 숙인 채 거칠게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아니, 기침 뿐만이 아니다.

끈적한 피가 턱을 타고 흐르며 활과 가슴팍에 검붉은 얼룩을 남겼다.

"아, 아첼! 아첼, 괜찮아!?"

역류한 마력이 폐라도 건드린 건지, 아니면 부딪힐 때 늑골이라도 부러져 내상을 입은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폐를 다친 것은 치명상이다.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첼은 티엘을 밀어내며 활을 당기려 애썼다.

"콜록! 저, 녀석들-쿨럭. 해치,워야 쉴, 수, 있-쿨럭!"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티엘은 아첼을 등 뒤로 물리고 손에서 활을 빼앗아 들었다.

평소에는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아첼의 손에서 뭔가를 뺏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티엘이 다루기에 아첼의 강궁은 너무나 버거운 영장이다.

조금만 잘못 다루면 손가락이 잘려버릴 수도 있고, 활을 다루기 위해 지나치게 마력을 쓰며 탈진해버릴 가능성도 높다.

절대로 티엘이 그 활을 쥐도록 내버려둘 아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듯, 너무나 쉽게 그 활을 빼앗아 들 수 있었다.

'죽지 마, 아첼. 죽으면 싫어.'

아첼의 약해진 숨소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애냐의 마력을 끌어올려 아스트라에 흘려넣었다.

'읏, 무거워.'

그러나 아첼의 활은 티엘이 쓰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활이었다.

평소대로 근력을 보조해봤자 당길 수 있는 정도도, 속도도 평소의 반 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활을 다루는게 아니라 활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과했다.

티엘은 재빨리 애냐의 마력을 아스트라가 아닌 자신의 두 팔로 돌렸다. 손가락을 찢어버릴 것처럼 무겁던 시위의 압박이 조금 덜해졌다.

충분히 마력으로 단련되지 않은 팔에 과부하가 걸려 마력이 조금씩 어긋나는데다가, 시위에 쓸려 살갗이 벗겨지고 있었지만, 그 통증조차 잊은 티엘은 필사적으로 활을 당겼다.

더이상 마력을 쓰면 아첼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두진 않는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티엘이 아첼을 지킬 것이다.

별의 서에 남은 마법도 전부 털어낸지 오래였지만, 티엘은 그저 필사적인 마음만으로 하염없이 활을 당기고, 또 당겼다.

점점 마력이 떨어져가며 활을 당기는 속도가 느려져갔다.

어느 순간 박자를 놓칠 때마다 엉킨 기운이 미끄러지며 팔에 상흔을 남긴다.

물에빠진 짐승이 팔다리를 휘젓는 것처럼, 무턱대고 날아드는 마력을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피할 때마다 모든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을 느꼈다.

매 순간 귓가를 스치는 눈 먼 마력덩어리에 온 몸이 떨렸다. 하지만······.

"잃을 순 없잖아아아아!'

전신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프고, 무리한 술식을 반복하는 머리는 이미 앞이 흐리게 보일 정도로 지끈거렸다.

하지만 티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 스쳤는지도 모를 이마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한쪽 눈을 가리고, 손가락도 몇 개쯤 말을 듣지 않아 언제부터인가 두 손가락만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티엘은 쓰러지지 않았다.

이미 바닥났을 마력을 악착같이 긁어내며, 남아있던 마령들의 수를 하나 둘씩 천천히 줄여갔다.

반 시간.

한 소녀의 광기어린 절규와 함께 마침내 마지막 마령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아첼이 마지막으로 마법을 쓰고도 무려 반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티엘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아첼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콜록! 이거······, 설거지는, 내 몫······, 큽······."

"말 많이 하지마······. 많이 아프지?"

티엘은 자기 상처는 돌보지도 않은 채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힘겹게 뻗어 아첼의 턱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괜찮······같아. 좀 쉬면,콜록, 움직일 수······거야. ······니까 걱정······."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하지 말고 일단 쉬자. 응?"

티엘은 겉옷을 벗어 아첼에게 덮어준 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륵거리며 쇳소리가 섞인 거친 숨소리에 티엘의 가슴도 꽉 막혀왔다.

뭔가 몸을 따뜻하게 할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모닥불을 피워두면 짐승도 함부로 다가오지 않을테고,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불빛을 보고 도와주러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작거리라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려던 티엘은 문득 숲 저 안쪽에서 안광 같은것을 발견했다.

"아······."

한 마령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맨 처음 따라오던, 파드미엘의 마력에 당했던 마령의 모습.

조금 전, 그 끔찍한 난전 속에서도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한 마리.

아까부터 가슴을 옭죄는 불길한 예감이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피어난다.

"애냐!"

퉁기듯 몸을 일으킨 티엘은 아첼의 앞을 가로막았다.

예상대로 다가오는 마령은 최후의 최후까지 몸을 숨겼던 최초의 한 마리였다.

몸이 절반은 녹아내렸을텐데도, 어둠 속에서 다른 마령들을 먹어치우며 몸을 수복한 것인지 눈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멀쩡한 모습으로 회복한 상태였다.

마령은하나밖에 남지 않은 성한 눈을 불태우며 천천히 티엘에게 다가왔다. 더이상 숨지 않겠다는 듯 정면에서, 당당한 자태로.

티엘은 활을 당긴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가물거리는 적의 모습을 힘겹게 붙들었다.

그야말로 목숨마저 태워버릴 기세로 남아있는 마력을 있는대로 쥐어짜 아스트라의 술식을 만들어갔다.

'이걸로 충분해.'

최후의 아스트라를 시위에 건 티엘이 활을 당겨 겨냥까지 끝낼 동안 마령과 티엘 사이의 거리는 처음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녀는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며 시위를 놓으려 했다.

그러나 티엘에겐 살 자격조차 없었던 것일까.

거의 모이지도 않는 마력으로 그토록 힘겹게 짜올린 아스트라는,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심장에서부터 싸늘한 통증이 올라와 전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손끝엔 힘이라곤 들어가지 않고 흐려진 시야는 이제 적의 모습조차 잡을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온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쓰러진건가?

누가?

나인가?

아첼이 목이 터지도록 티엘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갑작스레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티엘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하윽!"

숨이 턱 막힐 듯한 격통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속박된 몸인데도, 단 한 곳만은 어느때보다도 선명하게 감각이 살아있었다.

왼쪽 쇄골 아래, 마치 무딘 비수를 억지로 쑤셔넣는 듯한 혹독한 고통.

'움직여!'

가위에 눌리면 몸의 끝 부분부터 움직여 풀 수 있다고 했다.

티엘은 안간힘을 쓰며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다, 나중에는 아예 혀라도 깨물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그러나 자신이 움직이긴 움직였는지, 아니, 아예 의식이 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티에······쿨럭! 티엘! 도, 도망······쿠훌럭! 아, 안돼!"

'움직여. 움직이라고! 제발, 제발 움직여줘!'

두근.

문득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이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심장박동이 들린다거나 한 것이 아닌, 가슴 위에 놓인 어떤 물건이 스스로 박동하는 듯한 느낌이다.

순간 티엘의 정신은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오르기 시작했다.

일 주일······.

두 달······.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그래, 거의 일 년 전에 가깝다.

항쟁의 날, 테라스에서 느꼈던 아픔과 같은 종류의 부름.

아이넬라가 자아낸 실을 우룬이 엮으며 나타난 기적같은 운명.

'칼라가스.'

의미없을지도 모르는 부름이 내면을 울렸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부름에 화답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곁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고통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피······해!"

등 뒤에서 신음섞인 아첼의 목소리가 티엘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고 돌아왔다.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잠시 밀어뒀던 상처들이 선명하게 느껴지며 압박해온다.

하지만 티엘은 자신의 몸이 더이상 묶여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에 젖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이대로 아스트라를 만들어 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애냐의 이름을 부르려 한껏 숨을 들이쉬는 순간, 티엘은 이미 코앞까지 당도한 마령의 얼굴을 보며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키르르르-"

코앞까지 당도한 마령이 고개를 갸웃 한다. 함정인지 고민하는 것일까?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대낫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발톱이 마령의 등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마치 화살을 쏘는 것처럼, 강력한 힘을 품은 채 앞으로 쇄도해왔다.

망설임 없이 그대로 찔러들어오는 지극히 단순하며 효율적인 공격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비되었던 티엘이 피하기에는 너무나 빨랐다.

가까스로 몸을 틀어도 심장을 살짝 빗겨 찔리는 정도의, 의미없는 회피 뿐.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지독한 장난이다.

죽음의 순간조차, 짧은 고통을 끝으로 해방되는게 아니라, 안타까움 속에서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걸까.

하나밖에 남지않은 마령의 눈에 희열이 감돌았다.

아마 티엘을 죽이더라도 아첼은 남아있으니, 마령 역시 오래 가지 못해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지 않는지, 아니면 그것으로도 좋은지, 마령의 눈에는 일말의 후회도 찾을 수 없었다.

우드득, 촤아아아아!

이내 단단한 것이 부러지는 소리와 축축한 것이 흩뿌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티엘의 몸이 뒤로 크게 흔들린 뒤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졌다.

시야는 검붉은 어둠으로 물들고, 마침내 희열을 맛본 마령의 포효는 시끄럽게 귓가를 어지럽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피 냄새, 으깨진 풀 냄새, 전신을 꿰뚫는 듯한 둔한 통증.

어째서인지 갑자기 감각이 확장된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귀찮을 정도로 세세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죽는 것일까.

'아첼······언니.'

혼자서 외로워하진 않을까?

미안하다며 슬퍼하진 않을까?

하지만, 혼자라도 살아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아첼이다.

이제 조금쯤 행복해져도 좋을 것이다.

아이넬라도, 우룬도, 그렇게까지 매정하진 않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티엘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떴다.


"흐으윽!"

입고있던 옷은 칙칙한 붉은 빛으로 젖어들어갔다.

지독한 피냄새에 머리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전신을 꿰뚫은 충격으로 말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반대로 뒤늦게나마 감각을 되찾아가는 온 몸은 주체할 수 없을만큼 부들부들 떨렸다.

손에 들고있던 활이 피에 미끄러지며 허무하게 비어버린 비명을 질렀다.

시야를 온통 메워버릴 듯한 선홍빛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티엘의 흐려진 눈에 비춰진 것은, 티엘을 대신해 마령의 발톱에 꿰뚫린 아첼의 모습이었다.

"아······, 첼······?"

거짓말.

왜 아첼이?

평소같은 생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성이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거짓말같은 장면은 악의섞인 장난이 아니었다.

마령의 발톱을 타고 붉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간헐적인 소리가 티엘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아체, 엘!"

아첼의 갈색 머리칼이 붉은 빛으로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머리칼을 흠뻑 적셔버린 선혈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 티엘을 끌어당긴 아첼은 그대로 티엘을 대신해 마령의 공격에 몸을 던졌다.

복부를 관통한 마령의 팔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팔로 사력을 다해 잡고 있는 아첼의 모습이 마치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아첼은 넋을 놓아버린 티엘에게 일갈했다.

"빠, 빨리, 도망······. 오,래······, 못, 버······으윽!"

티엘은 덜덜 떨면서도 떨어뜨린 활을 찾아 쥐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마령은 팔을 빼기 위해 몸부림치며 아첼의 몸을 정신없이 흔들었고, 그 때마다 현실감 없이 쏟아지는 피가 지면을 새롭게 덧칠해갔다.

하지만 아첼은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끝내 마령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제발 그만해!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가까스로 활을 들어올려도 시위를 당길 힘은 없었다.

손 뿐만 아니라 마력 역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너무 급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혹사한 몸이 지쳐버린 탓인지, 메말라버린 마력은 아무리 긁어모으려 해도 모이질 않았다.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정신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치사할 정도로 티엘을 절망에 밀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이 바보야, 빨리 하란말야! 아첼이, 아첼이 위험하잖아!'

한동안 아첼을 미친듯이 흔들던 마령은 아예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겠다고 결심한 듯 다른 팔을 치켜들었다.

아첼의 입가에 체념섞인 미소가 걸렸다.

"아, 아아,안돼! 안돼애애!"

애냐로는 안된다.

티엘 자신의 힘으로는 더더욱 부족하다.

누군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누구인지도 모를 무언가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쨍그랑! 파아아앗!

그 순간 티엘의 가슴팍에서 뭔가가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눈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로부터 내려꽂혔다.

눈을 찌르는 강렬한 흰 빛에 시야가 온통 하얗게 불타올랐다.

피투성이로 마령을 막는 아첼의 모습도, 그런 아첼을 멍청하게 보고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도,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세상을 가득 뒤덮는 광채만이 눈을 괴롭혔다.

불현듯 심장 부근에서 기이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불타는 듯 뜨거우면서도 얼어붙을 듯 차가운, 두 가지의 감각이 동시에 작열하며 뜨거운 낙인을 내려눌렀다.

-이는 죄인의 낙인이자 계승의 증거, 최초의 끝에서 최후의 시작으로 이어질 계약의 증명.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우듯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겨울 밤이라는 것을 일깨우듯, 싸늘하게 식어버린 겨울의 삭풍이 불어닥쳤다.

거대한 용의 날개짓처럼 전신을 울리는 무거운 기운이 녹아든 바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찬 바람에 마력과, 피와, 눈물이 섞여 꽃잎처럼 흩날렸다.

분노와 슬픔이 진하게 배어든 그 바람은 살아있는 모든 자들을 전율케 하는, 육신 없는 모든 자들을 압도시키는, 신화에서 현세까지 이어내려오는 시원(始原)의 바람이었다.

잊혀진 이름, 옛 것을 지키는 마력, 기적같은 만남과 운명같은 부활.

그 어떤 악마도, 마법사도 이해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작은 세계가, 그렇게 완성되었다.

-삐이이익! 휘이이이이잉!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어마어마한 바람소리가 귓청을 찢을 듯 적막을 메웠다.

금방이라도 어딘가 베일 듯, 날카로운 칼날을 연상시키는 바람이 영원히 이어질 듯 쉼없이 울렸다.

순간 티엘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다.

"칼라가스! 아첼을, 아첼을 구해줘!"

그 바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티엘은 그저 그 이름만을 믿고 울부짖었다.

피부에 닿는 바람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한 겨울, 가장 깊은 물에서 꺼낸 얼음처럼 싸늘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 차가운 바람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티엘의 몸을 얼려버리는 대신 부드럽게 휘감았다.

티엘은 이 바람이, 이 냉기가 그녀를 지켜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바람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바람과 빛이 아첼을 지켜주길 간절히 빌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을 다 지워버릴 듯 꿈틀대던 빛과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눈이었다.

가느다란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티엘의 머리위로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엘은 눈송이를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곧 눈앞의 이상한 흔적에 혼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용이 지나간 것처럼 깊은 고랑이 주변의 흙과 바위, 나무들을 거칠게 할퀸 것처럼 남겨져 있었다.

마령도, 아첼도, 그들이 남긴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흔적은 반듯한 일직선을 그리며 주위의 땅을 '소멸'시켜버린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것이라면, 주변을 휩쓴 '자국'의 주변에는 마치 서리라도 내린 것처럼 새하얀 얼음이 얇게 깔려 있었다는 것.

티엘은 잔뜩 굳은 얼굴로 얼음의 흔적을 쳐다보다, 조금 전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부근을 보았다.

"마력······, 각인······."

거친 싸움으로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새하얀 눈꽃의 문장이 보였다.

사라진 아첼, 사라진 마령, 갑자기 나타난 각인, 사라진 아첼······.

머리가 너무나 혼란스러워진 티엘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나 명쾌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누가, 아무라도 좋으니 누가 제발 대답을 해 주었으면······.

그때 문득 어깨에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티엘은 흠칫 놀랐다.

티엘의 어깨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은청색의 깃털을 가진 한 마리의 새가 앉아있었다. 조금 작은, 매를 닮은 새였다.

새의 푸른 눈은 무수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고요하고 깊었다.

끝으로 갈수록 색이 옅어지다 끝내 투명한 얼음조각으로 변하는 깃털은 한 장 한 장이 숨막힐 정도로 짙은 마력의 향을 품고 있었다.

발톱도, 섬세한 부리 끝도, 겨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워, 마치 누군가가 섬세한 손길로 빚어낸 얼음 조각인 것만 같았다.

"칼라가스······?"

반신반의하며,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 작고 예쁜 새가, 그 거대한 용과 같은 존재일까?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른 순간, 새는 고개를 돌려 티엘과 두 눈을 마주쳤다.

투명한 청색의 눈이 긍정을 뜻하고 있었다.

삐유륵.

하얀 부리 사이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티엘을 안심시켰다.

"네가 이런거니? 마령은? 아니, 그보다, 아첼은? 아첼은 어디있어?"

마령의 생사를 물으려던 티엘은 한박자 늦게 아첼을 떠올렸다.

이미 치명상을 입고있던 아첼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설마, 설마 마령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응? 아첼은? 무사한거야? 칼라가스, 대답해줘!"

티엘은 새파랗게 질려 필사적인 심정으로 칼라가스에게 물었다.

칼라가스는 티엘의 옷깃을 잡아 끌어 한 방향을 가르키더니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기, 기다려!"

티엘은 황급히 칼라가스의 뒤를 쫓아 달렸다.

칼라가스의 모습이 중간중간 사라졌지만, 모습을 놓칠 때마다 눈에 띄는 곳에 나뭇가지를 얼려놓아 방향을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티엘은 한 순간도 멈춰서는 일 없이, 이내 좁은 공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곳은 정말로 좁은 공터였다.

아니, 공터라기보다는 사실 나무 사이의 좁은 틈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첼이 두 팔을 벌리고 서면 딱 들어찰 정도로 좁은 그 공간에서, 커다란 나무둥치에 몸을 기댄 아첼의 모습이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아첼은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들어 버린 것처럼.

'설마, 아니지? 아첼. 날 두고 잠들어버린건 아니지?'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날까 두려워, 감히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지 못할 것이 무섭다.

자신의 이름을 더이상 불러주지 못할까봐 두렵다.

티엘은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아첼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피에 흠뻑 젖은 상처를 작은 손으로 꾹 누른 티엘은 소리높여 울지도 못한 채 숨죽여 흐느꼈다.

출혈량만 봐도 이미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내장도 갈갈이 찢겨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첼의 상처에는 회복이나 치유의 주문이 아닌, 소생의 기적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안돼. 안돼, 아첼······. 이런건 너무해······. 아첼!'

"아······. 티엘······?"

잠시 후, 움찔거리던 아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은 이미 파랗게 질려있었지만, 피에 젖어 오히려 평소보다 붉었다.

그러나 티엘은 그림자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아첼이 이렇게 힘없이 누워있는 것도 단지 추워서 그런 것 뿐이라 생각하려 했다.

"아첼? 괘, 괜찮은거지? 저, 정신차려! 잠들면 안돼!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티엘은 옷을 찢어 상처에 칭칭 감고, 다시 칼라가스의 마력으로 아첼의 상처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칼라가스 역시 티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아첼의 상처를 얼려버릴 정도로 강한 마력은 끌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첼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 한 마디가 묘하게 평온한 얼굴에 가득 쓰여있었다.

힘겹게 들어올린 손이 온통 얼굴을 온통 눈물로 적셔버린 티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아, 늦었잖니. 콜록, 잠들어버리는 줄 알았······어."

"괘, 괜찮은거지? 조금, 조금만 기다려. 얼른 의사한테······."

"그럴 거 없어."

아첼은 일어서려는 티엘의 손을 잡았다.

예전, 영체 역류가 일어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아첼의 손은 그때와 다르게 조금도 힘이 들어가있지 않았다.

뿌리치고 달려가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티엘은 아첼의 곁에서 오열하며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맞잡는 손에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 이지? 처음······, 보는건데. 예쁘구나. 후후후후, 그 목걸이······, 역시 생령이랑, 관계가 있었던 거네······."

아첼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실리안의 마력을 사용했었다.

칼라가스의 강림, 그리고 분노한 용의 숨결에 자신이 휘말리는 상황에서 티엘에게 '자신의 생령이 가까운 사람을 해한다'는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일이었다.

어차피 죽는 몸, 그나마 남겨질 사람을 위해 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결심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티엘의 절규는 애달팠다.

"죽지마. 응? 아첼······. 나 더 열심히 할테니까 죽으면 안돼. 으흑, 나, 난 아직 실수만 저지르는 바보같은 애란말야. 죽지마, 죽지마!"

"사랑하는······나의 별, 이스티엘."

"죽지마! 이건 명령이야! 아첼은 대공가의 신하니까 내 명령을 들어야 하잖아! 흐흑, 그러니까 죽지 마! 죽지 마아!"

아첼은 남은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네 말대로 네 곁에 조금만 더 있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텐데.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떨어지기 직전의 별빛처럼, 희미하게 지어보이는 미소는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다.

그 미소는 남겨질 자의 영혼에 새겨질 마지막 낙인이었다.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길 원하는 그 친숙한 목소리가 그 한 순간만큼은 이어지지 않길 바라게 되는, 저주와도 같은 한 순간이었다.

"이거, 받아가."

아첼의 떨리는 손끝이 티엘의 손등에 닿았다.

조금 전 마력각인이 새겨질 때와 비슷한 열기가 손등에 은은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아첼의 오른팔에 섬세하게 새겨져있던 각인이 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지고, 대신 티엘의 손등에 조그맣게 다시 나타났다.

"혹시라도······, 원, 가고싶다면······이거, 가져가. 도움······될거야······."

"그런, 그런거라면 아첼이랑 같이 가면 돼. 아니, 내일 당장 가자. 응?"

어느 순간 아첼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이 회복이 아닌, 마지막 순간의 반짝임이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타들어간 초의 심지가, 꺼지기 직전 튀어오르며 큰 불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것을.

"하하하······. 네 덕분에······, 즐거웠어. 방황하던 날들······. 그러나, 어둡고 어지럽던 내 생에······길을 찾아준 티엘, 네 덕분에······."

"그러지마. 그런 말 하지마, 언니. 흐흐흑, 그런 말은 몇 십 년 후에 해도 돼잖아!"

"언니······. 후후후, 그 말, 얼마만에, 듣는, 지, 모르겠······네."

마주잡던 손이 점점 무거워졌다.

시선은 점점 흐려지고 점점 모든 것이 멀어져갔다.

하지만 아첼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력을 다해 티엘의 얼굴을 보려 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그래고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얼굴을.

"울지 마······."

아첼의 주위에 문득 색색의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위로 희미한 모습이 하나씩 겹쳐지기 시작했다.

맹독의 아틸리아, 바람의 라피온, 수호의 켈리아와 우레의 익시온.

그리고 그들 곁으로 날개달린 검은 뱀의 모습을 한 이프라이엘과, 네 개의 집게를 가진 전갈 모습의 파드미엘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지막으로 옅은 자주색의 마법진에서는 흰 로브로 온 몸을 감싼 대정령 실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령들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아첼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아첼은 피식 웃으며 실리안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실······,리안. 계약은, 마음에······들었나?"

"매우. 조금만 더 함께할 수 있었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내 전부를 맡겼을텐데."

대정령의 눈은 매우 슬픈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대한 대정령이라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계약자가 아니고서야 아첼을 무사히 치료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아는 아첼은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위에 죽 둘러선 생령들을 한번씩 바라보았다.

"모두들······그동안 고마웠어. 이젠, 작별이야."

치르르르르······.

생령들은 하나 둘씩 아첼의 주위를 맴돌다 흩어졌다.

아첼과의 유대가 유난히 강했던 켈리아와 라피온은 아첼을 떠나는 것아 아쉽다는 듯 그 주위를 몇 번이나 돌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다른 생령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두 명의 생령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프라이엘."

이프라이엘은 처연한 눈으로 아첼을 보다, 그녀의 곁에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아첼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생령, 그리고 아첼의 권호를 결정해준 생령이 바로 이프라이엘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주인을 찾지 않고 아첼과 함께 잠들 생각이었다.

이프라이엘의 몸이 마정석처럼 빠르게 증발하며 그 자리에는 검은 보라색의 심장석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실리안은 무릎을 꿇고 아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머리를 숙였다.

"너무 이른 시기에 만났고, 또 헤어지는군. 마지막 말 정도는 남기도록 돕지, 나의 주인이여."

"크큭, 마지막인데······무슨 호의야?"

아첼은 피식피식 웃으며 실리안의 인사를 받았다.

실리안은 아첼의 떨리는 손을 가볍게 끌어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 또한,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좋은 여행이 되기를 기도해 주지."

관객에게 갈채를 받은 배우처럼, 인사를 마친 대정령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티엘의 가슴에 다시한번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마지막 말······.

티엘은 입술을 깨문 채 아첼과 눈을 마주쳤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게 될 아첼의 말을 더이상 방해할 수는 없었다.

"저 바보들······. 이러면······내 마음은······어떻게 되냐고, 하하하······."

"아첼······."

아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이라는 것에 손을 댄 지 얼마나 지났던가.

그 동안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뤄오던 마력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본래 인간의 마력은 생명력의 일부가 변한 것.

별다른 이유 없이 마력이 사그라들었다는 것은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아첼은 실리안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도움 덕에 짧은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 수 있었지만, 결국 대정령의 힘으로도 그 이상의 유예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었으까.

이 작은 꼬마가 어른이 될 때 까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돼버렸다.

안타깝고, 또 슬프다.

"그동안 내가 너에게 해준 이야기들······, 기억하지? 머리 좋은 너니까, 분명 그럴거야."

"응, 다 기억해. 다 기억하고 있어!"

"하하하하······. 넌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려. 그래서야 아픔을 겪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아플지도 몰라. 하지만······."

해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말, 다 전할 수 있다면.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티엘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첼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다. 이 이상,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아첼은 목에 꽉 걸려있던 마지막 말을 간신히 끌어낼 수 있었다.

"울지 말고, 네 길을 나아가. 내 방식이 아닌, 그 누구의 방식도 아닌, 너의 길······, 너만의 길을 찾아. 아이넬라의 빛에서 우룬의 안식에 이를 때까지······. 새벽별보다 눈부신 너의 길을 찾아보렴."

주르륵, 아첼의 눈에서도 한줄기 별빛이 흘러내렸다.

"이피안의 땅에서도 잊지 않을거야. 언제나······,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테니까."

점점 아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언제나 반짝였던 눈빛이 서서히 잠겨들어간다.

언제나 따스하던 손이 천천히 식어간다.

아첼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흘러 사라져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잠시만······,잠시만 잠드는 거 용서······해주겠니······?"

아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맞잡은 손에 마지막으로 한 번의 가벼운 떨림이 느껴진 뒤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남겨질 사람을 위해 흘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끝났다.

"언······니?"

티엘의 허망한 목소리가 메마르게 울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추억으로만 들을 수 있을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맞잡은 손의 온기조차도 빠르게 식어갔다. 다시는 그 미소도, 온기도 만날 수 없다는, 그 거대한 허무감이 너무나 가슴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윽, 흐흐흐흑, 으아아아아아!"

873년 1월 15일 밤, '매혹의 밤안개'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가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향년 스물 셋, 한 명의 마법사로서도,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안타까우리만큼 빠르게 져버린 꽃이었다.

어떤 마법사들은 말한다. 권호는 그저 강한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권호가, 그 이름를 받은 자가 어떤 운명을 사는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깊은 밤 피어난 안개는 죽은 자들의 원한을 가라앉히고, 산 자들의 영을 새벽까지 지키는 안식의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새벽이 다가오면 누구보다 먼저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 또한 밤안개일지니.

소녀의 절규는 밤을 건너 새벽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던 밤안개는, 더이상 소녀와 같은 새벽을 나눌 수 없었다.




* * *



1월 20일, 새벽.

티엘은 묵묵히 전날밤 챙긴 짐들을 점검한 뒤 가방을 둘러멨다.

몇 벌의 옷과 얼마 안되는 귀중품이 전부라 가방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아첼의 유품은 특히 주의깊게 챙겨넣는다.

별의 서와 유품인 활, 그리고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

아마 일생동안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손에 닿을 때마다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를 악물며 자신을 힘겹게 억눌렀다.

마지막으로 목에 걸기위해 목걸이를 집어올리던 티엘은 문득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아직 생채기조차 나지 않은, 선물한 모습 그대로인 목걸이가 서글픈 빛을 뿌렸다.

"기껏 선물했는데······. 겨우 하루도 채우지 못한건 너무하잖아, 아첼······."

아직까지도 아첼의 빈자리는 실감나지 않는다.

식탁을 차릴때마다 두 사람 몫을 준비하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이안이 끼니마다 찾아와 식탁을 대신 차려주곤 했다.

밤마다 악몽같은 현실을 저주하며 베개를 적시는 것도 매일의 일과중 하나였다.

"이젠······, 다신 선물같은거 안해줄거야."

티엘은 힘없이 중얼거린 뒤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이전에 하고있던 흰 보석 목걸이는 칼라가스의 강림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티엘의 짧은 마도 지식으로도 그 목걸이가 칼라가스의 부활과 연관이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자세한 설명은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티엘은 사라진 목걸이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쓸 여유가 없었으리라.

첫 발걸음은 계곡 쪽으로 향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라 길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반 년이 넘게 오르내린 길이라 눈감고도 익숙하게 지나는 수준이라 문제는 없었다.

곳곳에 아첼과 자신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 같아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는게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참 산을 올라 계곡 깊은 곳에 이르자 어둠 속으로 희미한 묘석이 눈에 들어왔다.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 한 사람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좋은 언니였고, 따사로운 어머니였던 마법사 영원히 잠들다. 아이넬라여, 그녀의 안식에 축복을 주소서.'

묘비명을 지은 것은 티엘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부르면 아첼이 돌아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손으로 분명히 묻었고, 묘비명까지 쓴 주제에, 아직도 현실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티엘은 묘비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인사는 남겨두어야 후회하지 않을 터였다.

천천히 내민 손이 차가운 묘비에 닿았다.

가늘고 흰 손이 매끄러운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금씩 돌을 데워갔다.

"있지, 아첼. 나 떠나려고."

적막속에 떨리는 목소리가 홀로 대답없는 말을 던진다.

"알아. 멍청한 짓이라는거. 지금도 한 대 때려서 말리고 싶다는거 알아. 그치만······."

울지 않기로 몇 번이고 맹세해놓고서는, 다시 흐느낌에 말을 잃는다.

하지만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새벽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더이상 무엇 하나도 남기지 않고 끊어내겠다 결심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티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음놓고 흐느껴 울었다.

"그치만······. 가끔 찾아올테니까······. 응. 나도 잊지 않을게. 그러니까······, 잊지 않는다는 말, 지켜야 해?"

마침내 간신히나마 말을 마친 티엘은 머리채를 한 쪽으로 늘어뜨려 쥐었다.

다른 손에는 예리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티엘은 그동안 아껴왔던 머리채를 단숨에 잘라내 검은 리본으로 묶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조그마한 상자에 넣어 묘석 앞에 놓았다.

티엘이 아첼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작별 선물이었다.

작별인사를 마친 소녀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산을 내려갔다.


그날 아침, 평소처럼 티엘을 찾아온 이안은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연실색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티엘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마을을 뒤지고, 심지어 말을 탄 채 아델 시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녀도 검은머리에 보랏빛 눈을 가진 소녀의 행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 본 곳에, 딱 한가지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아첼의 무덤 앞에서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바보같은 녀석이······."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지."

아델 시까지 나갔지만 결국 허탕을 친 칼이 눈가를 가리며 탄식했다.

그런 그를 다독거리며 촌장 마르파는 아련한 눈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제 언니 무덤이 여기 있는데, 아예 잊어버리기야 하려고."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도 없이 사라진 소녀 대신 묘석 앞에 놓인 작고 검은 상자 하나는 묘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작가의말

개화편 끝입니다. 끊기가 애매해서 간만에 한번에 두 편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 accelerando는 아시다시피 ‘점점 빠르게’, rapidamente는 ‘급히’라는 뜻을 지닌 음악용어죠. 거기에 언젠가 걷히는 ‘밤안개’라는 권호까지....

이걸로 티엘의 유년기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만, 바로 4장으로 들어가는 대신 아첼과 티엘의 어린 시절을 한 번 짚고 넘어갈 예정입니다.

그럼, 3.5장 ‘밤안개의 별’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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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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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4장-방황彷徨 (3) +2 19.07.16 131 6 40쪽
25 4장-방황彷徨 (2) 19.07.15 134 5 34쪽
24 4장-방황彷徨 (1) +2 19.07.14 161 4 41쪽
23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3) 19.07.14 149 2 37쪽
22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2) 19.07.13 151 5 54쪽
21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1) 19.07.13 142 4 44쪽
» 3장-개화開花(7) +2 19.07.12 172 6 46쪽
19 3장-개화開花(6) 19.07.12 156 5 36쪽
18 3장-개화開花(5) 19.07.11 153 7 37쪽
17 3장-개화開花(4) 19.07.10 167 6 38쪽
16 3장-개화開花(3) 19.07.09 163 5 38쪽
15 3장-개화開花(2) +2 19.07.08 181 5 26쪽
14 3장-개화開花(1) 19.07.07 164 4 30쪽
13 2장-막간幕間(7) 19.07.07 180 6 37쪽
12 2장-막간幕間(6) 19.07.06 177 5 41쪽
11 2장-막간幕間(5) 19.07.06 196 8 42쪽
10 2장-막간幕間(4) +4 19.07.05 207 9 34쪽
9 2장-막간幕間(3) 19.07.05 188 9 35쪽
8 2장-막간幕間(2) 19.07.04 213 6 43쪽
7 2장-막간幕間(1) 19.07.03 209 8 30쪽
6 1장 - 초혼招魂(5) 19.07.03 219 9 28쪽
5 1장 - 초혼招魂(4) +2 19.07.02 288 10 35쪽
4 1장 - 초혼招魂(3) +2 19.07.01 384 10 40쪽
3 1장 - 초혼招魂(2) +2 19.07.01 526 17 27쪽
2 1장 - 초혼招魂(1) +8 19.07.01 1,595 14 31쪽
1 +8 19.07.01 1,573 17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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