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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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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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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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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3)

DUMMY

"그게 실리안과의 만남이었지. 최초의 살인이기도 했고."

아첼은 문득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십 년도 지난 일이다. 아직까지 손에 그 핏자국이 남아있을리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보면, 문득 그 날의 지독했던 피비린내가 어렴풋이 느껴질 것도 같았다.

그 날, 실리안이 만들어낸 지옥의 풍경은 그 뒤로도 몇 년간이나 아첼을 괴롭혔다.

매 년 한두 차례, 잊을만하면 다시 악몽에 떠오르는 핏빛 초상화.

그 때마다 아첼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물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라티앙에서 받은 화살, 아직 가지고 있지?"

"응. 여기 있어."

아첼은 티엘이 내미는 화살을 받아들어 가만히 쓰다듬었다.

"실리안이 흔적을 없애면서 함께 치워버렸는지, 내 화살은 그 날 잃어버렸어. 하지만 그 때 잃어버린건 그것 뿐만은 아니었을거야."

사실, 실리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첼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고, 오히려 잘못을 따지자면 죽은 건달들의 죄질이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아첼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그저 도망치듯 레가야로 떠나버렸다.

레가야에서 보낸 첫 한 해가 그리도 힘겨웠던 것은, 그렇게 흐트러져버린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첼은 몇 번째인지 모르는 잔을 다시 채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잔을 비우지 못했다.

티엘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후우, 너무하네. 적어도 생일에는 맘대로 마시게 해 줘."

"그만 마셔, 아첼. 너무 많이 마셨어."

"한 잔만 더 마실게."

"안돼. 흐으읍!"

티엘은 아첼의 잔을 대신 비워버렸다.

순식간에 머리가 핑핑 돌며 뜨겁게 달아오른 한숨을 푹 내쉰다.

하지만 티엘은 힘겨워하면서도 제법 당당하게 아첼의 앞에 놓여있던 술병을 가로챘다.

그리고 혀를 낼름 내밀더니 잔과 술병을 등 뒤로 밀어버린 뒤 팔짱을 끼고 앞을 막아섰다.

"쳇."

아첼은 입맛을 다시다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이야기나 계속 해줄게. 이제 너랑 만나던 부분이야. 그 사고가 있은뒤 두 달쯤 뒤였을 거야. 나는 반쯤 정신을 내놓은 채 걸어다니다 란까지 들어가게 되었지."




* * *



앞으로 얼마나 더 다쳐야 하는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해쳐야 하는걸까.

정처없이 헤매던 아첼은 어느새 레가야의 수도인 란에 다다랐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여정에 목적은 없었다. 그저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이 저지른 죄로부터 도망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도피조차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등에 나타난 각인은 때때로 흉통으로 욱신거리며 제어하지 못하는 마력을 뿜어냈고, 이미 한계를 넘겨버린 생령의 마력은 이따금씩 미약한 영체역류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미숙한 몸으로 대정령의 마력을 담아낸 대가로, 아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를 겨우 유지하는 상태였다.

"꺄아아-! 비, 비켜요!"

"아······?"

몽롱한 정신으로 거리를 걷던 아첼은 불현듯 귀를 찌르는 비명에 멍청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자신의 품 안으로 달려드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누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한 것인지, 제 때 몸을 피하지 못한 아첼은 제법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가차없이 지면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야······."

볼썽사납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엉덩이나 등, 그리고 뒤통수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게다가 머리를 찧은 덕에 눈 앞도 상당히 어질어질, 위태로운 느낌이다.

아첼은 눈물까지 살짝 맺힌 눈으로 자신에게 달려든 녀석을 살짝 노려보았다.

"으아아, 아파아아······."

아첼의 몸 위에는 잔뜩 웅크린 채 머리를 움켜쥐며 울먹이는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 어깨까지 기른 새카만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소녀 역시도 넘어지면서 어딘가 머리를 찧은 것인지 불쌍할 정도로 끙끙 앓고 있었다.

어쩐지 신나게 뛰놀던 아기 고양이가 어딘가에 부딪혀 우는 소리를 내는 듯한 느낌이라, 느닷없이 덮쳐져 쓰러졌던 아첼이 오히려 괜시리 미안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저기, 미안해요."

"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잘못하면 꼭 사과하라고 메리온이 말해줬어. 그러니까 미안, 내 사과를 받아줘······. 저기, 이렇게 사과하는거 맞지?"

"으응? 아, 아마도?"

아첼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제대로 몸을 일으킨 소녀는 아첼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키나 목소리, 말투같은 걸로 보면 아마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정도면 제법 대견한 편이었다.

물론 아첼도 다섯살 때 넘어졌다고 길바닥에서 울어젖히지는 않았지만, 그건 다른 애들과 싸우며 살다보니 자연스레 길러진 악받친 성격 때문이니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첼은 나이에 비해 의젓한 소녀의 태도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뭐니?"

"이······티엘."

"이티엘?"

"아니아니, 티엘. 티엘이야, 언니."

모자 아래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티엘은 아첼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파문당한 이후 좀처럼 맛보기 어려웠던 따뜻한 기분에 아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관심도 없었던 이름을 물어본게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난 아첼."

"아첼?"

"원래는 좀 더 긴데, 귀찮으니까 그렇게만 알아 둬."

"아첼, 아첼······.:

티엘은 몇 번 아첼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다시 배시시 웃었다.

"이름 멋져."

그게 멋진 이름인가?

스승에게 언젠가 듣기로는, 아첼레란도라는 이름은 '매우 빠르게'라는 의미를 가진 이피안 어라고 했다.

성인 라피다멘테 역시 비슷한 의미이니, 따지고 보면 아첼의 이름은 '빠르게, 더욱 빠르게'라는 의미를 가진다.

대체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내심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이름을 멋지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니 느낌이 꽤나 새로웠다.

물론 대여섯 살 꼬맹이가 이피안 어를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테지만, 단순한 느낌만으로도 기분이 크게 바뀐다.

"너도 참 예쁜 이름이야."

"정말? 고마워!"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첼에게 있어 타인이란 대부분 자신을 괴롭히거나 다치게 하는 존재였다.

딱 두 사람에게는 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손에 남아있는 인연 따위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티엘이라는 이 아이는 조금 달랐다.

오늘 처음 만난 것인데도 이상하리만큼 편안한 기분이 들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첼을 편견 없이 대해주는 순수한 어린아이이기 때문일까.

그리 대수롭지 않은 칭찬에도 폴싹 안기며 뺨을 비비는 등 응석을 부리는 모습에 어느새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피우고 말았다.

조금 머뭇거리던 아첼은 손을 들어 티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자는 벗으려 들지 않았기에 얇은 천을 쓰다듬는 느낌 뿐이었지만, 꼬맹이는 고양이처럼 파고들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 맛있는거라도 사줄까? 언니 이래뵈도 꽤 부자라고?"

"피-. 날 먹는걸로 유인하려는거야?"

"그래서 싫어?"

"아니!"

파하하,하고 웃음이 터진다.

티엘은 아첼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유쾌하게 재잘거렸다.

한동안 종알거리는 티엘의 말을 들어주던 아첼은 문득 티엘이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참, 너 바쁜거 아니니? 급하게 뛰어다니는 것 같던데."

"아앗! 깜빡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아첼이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비명을 지른 티엘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쫒기기라도 하는 듯한 행동이라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어린애 다운 허술함에 살짝 웃음이 배어나왔다.

"언니, 미안! 다음에 다시 보자!"

하지만 티엘은 붙잡을 새도 없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자그만 몸집은 금새 사람들 사이로 숨어 곧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쥐고있는 손을 무안하게 바라보던 아첼은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며 손을 거뒀다.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티엘과의 만남이 아무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까지 곧 죽을 사람처럼 어둡기만 했던 아첼의 얼굴에는 이미 그림자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무의식중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진 것이었다.

어쩌면 어린아이의 순수함 덕분에 그동안 마음을 괴롭히던 죄책감이 조금은 희석된 것이리라.

"티엘인가."

아첼은 티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뒤 몸을 돌렸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스쳐가는 인연을 하나하나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아하니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같은데,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아첼이 티엘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혹시 영장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서적상을 찾았던 아첼은 한 구석에서 쪼그려앉아 책을 구경하는 꼬맹이의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넓고 넓은 란 바닥이, 이렇게나 좁았던가.

조금쯤 장난기가 오른 아첼은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티엘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러나 티엘은 책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는지 아첼이 바로 옆에까지 오도록 눈치를 채지 못했다.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감촉에 옆을 돌아본 티엘은 자신의 뺨을 콕 찌르는 손가락에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내 장난을 건 것이 누구인지 알아챈 티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운 기색을 띄웠다.

"아첼 언니?"

"안녕.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정신없이 보는거야? 아하? 이런거에 관심있는거야?"

마력의 이해.

아첼도 한때 읽어보았던, 마력을 모으고 증진시키는 데 관한 입문서였다.

티엘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아대며 곤란한듯 입을 삐죽였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마법사인데, 나 때문에 아바, 아니, 아버지가 실망을 많이 하셔서······."

"그래도 이런건 독학하기 힘들어. 아버지한테 도와달라고 해보면 어때?"

순간 티엘이 풍기는 분위기가 여섯 살 꼬마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무겁고 침울하게 변했다.

"······나 같은 쓰레기는 가문의 수치래. 마주치기만 해도 무서워······."

"저런."

의도치 않게 역린을 건드려버린 아첼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첼은 식은 땀을 흘리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실의에 빠진 티엘을 위로해주려 애썼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

결국 책임지지 못할 말까지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꺼내놓은 말에 오히려 더 크게 당황해버린 아첼은 얼른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티엘의 반응은 그보다 한결 더 빨랐다.

"정말? 정말이야?"

시든 시금치처럼 풀죽어있던 티엘이 반신반의를 거쳐 순식간에 해맑게 되물으며 답싹 안겨들었다. 하마터면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아첼은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하는 티엘에게 차마 거절하는 말조차 하지 못한채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어, 기사급 생령하고까지 계약했으니까 도움은 되겠지······?"

"대단해! 나도 아첼처럼 되고싶어!"

흥분한 티엘이 팔을 붕붕 휘둘렀다.

그 모습이 생각보다 귀여워, 아첼은 그만 티엘을 말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쿡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흥분한 티엘의 손끝이 살짝 스친 책 하나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움직임으로 툭 떨어져내렸다.

은을 입혀 새겨넣은 미라멜 덱시아, '거울의 서'라는 제목이 순간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공교롭게도 앞표지의 중앙에 달린 타원형의 거울이 순간적으로 티엘의 얼굴을 비추었다.

순간적으로 타원형 거울이 기이한 광채로 번뜩였다.

"아체-"

떨어지던 책이 허공에 뚝 멈춰서며 저절로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휘리릭 넘어가는 책장 안쪽으로부터 갑작스레 수은을 연상시키는 은빛 촉수가 뻗어나왔다.

갈래갈래 뛰쳐나온 촉수는 대뜸 티엘의 몸을 휘감았다.

"아, 아첼 언니! 도와줘! 꺄아아아악!"

촉수는 맞닿은 옷자락을 점점 똑같은 은색으로 물들여가며 티엘을 책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첼은 급히 티엘에게 손을 내밀며 외쳤다.

"티엘! 내 손 잡아!"

"모, 못해! 못뿌리쳐어! 안돼애애!"

겁에 질린 티엘이 아첼을 부르며 촉수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하필이면 주위로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책 팔던 노인은 귀라도 먹은건지, 티엘이 저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와 보지도 않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책 속으로 끌려들어가려는 티엘에게 매달린 아첼의 팔에도 어느새 수은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티엘을 붙들던 아첼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거울의 서라는 이름은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스승님이 뭐라고 말해줬더라?

질질 끌려가는 다급한 상황에 마주하자 굳어버린 머리는 답답할 정도로 헤메고 있었다.

그러다 막 티엘의 손이 책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찾고있던 해답이 떠올랐다.

-거울의 서. 특정한 매개를 이용해 이공간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고위 마법서중 하나. 오선 이상의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면 함부로 펼쳐서는 안되지만, 그 조건만 충족하면 책에 깃든 저주를 무효화할 수 있다.

해법을 떠올린 아첼의 얼굴에 겨우 화색이 돌았다.

"이프라이엘!"

기사급의 생령은 일반적으로 오선에서 칠선의 마력을 지닌다.

정확히 측정해본 적은 없지만, 이미 육신을 완성한 이프라이엘이라면 책의 저주를 깨기에 충분할 터였다.

아첼의 팔 위에서 검고 반투명한 덩굴이 휘리릭 풀려나가며 막 두 사람을 끌어당기던 은의 촉수를 얽어맸다.

핏줄처럼 뻗은 환각령의 마력이 은빛 촉수와 얽혔다. 그리고 짧은 힘 겨루기 끝에, 바르르 떨리던 은의 촉수가 갈갈이 찢겨나갔다.

저주가 깨진 책은 이제까지의 요사스러운 기운을 잃은 채 평범한 책처럼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티엘은 발치에 떨어진 책에서 황급히 떨어졌다.

아첼이 없었더라면······.

제자리에서 덜덜 떨던 티엘은 고개를 힘껏 저어 공포를 떨쳐냈다.

"고, 고마워. 언니 덕분에······."

하지만 멋지게 티엘을 구해낸 아첼은 어째서인지 창백한 얼굴로 웅크리고 있었다.

"어, 언니?"

뺨을 따라 흘러내린 식은땀이 후두둑 바닥을 적시고, 바닥을 짚은 손은 가늘게 떨리며 흙먼지를 할퀴고 있었다.

입에서는 목이 졸린 것처럼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이 호흡을 대신해 흘러나왔다.

"아첼 언니!"

아첼에게는 귓가에 울리는 티엘의 목소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동굴처럼 웅웅 울리는 이 소리 때문일까.

온 몸이 저리고, 아프고,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갑자기 마력을 써서 지친 것인지, 아니면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인지, 당혹감에 흐려진 판단력으로는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던 도중 우연히 티엘의 발밑을 구르던 거울의 서에 눈길이 스쳤다.

때때로 금색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 갈색이었던 아첼의 눈동자가, 순간순간 기이하게 일그러진 자색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당황한 아첼은 자신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손톱이 부러진 채로 바닥을 할퀴던 오른손에서는 검은 비늘같은 것이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헛 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영체역류, 아니, 그 한계를 넘어선 침식에 가까운 현상이다.

'어째서? 무리할 정도로 마력을 쓰진 않았는데 어째서! 서, 설마?'

아첼이 기억하는 한계지점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녀는 라티앙을 떠나기 직전, 실리안과 가계약을 맺으며 역류를 막기위한 마력의 최저한도가 기억하는 것보다 큰 폭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찰나가 아까운 순간이었다고는 해도,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당돌하게 침범해버린 대가.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 아첼 언니······. 도, 도움을······!"

"저, 저리 가!"

아첼은 있는 힘껏 티엘을 밀쳐냈다.

들끓는 마력을 억누르지 못하면 이대로 마령이 되어버리고, 혹시라도 자신이 마령이 되어버린다면 가장 가까이에 있을 저 아이가 가장 먼저 희생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거칠게 내던져진 티엘의 울먹이는 얼굴에서 억지로 눈을 뗀 아첼은 가히 초인적인 의지로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전신의 뼈마디가 뽑히고 뒤틀리는 감각.

금방이라도 목이 갈라져버릴 것 같이 지독한 갈증.

어지러워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침식이 악화되며 의식을 흔들었다.

그러나 도시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이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흐려지는 의식을 마지막까지 끌어모아 도착한 곳은 그나마 후미진 곳에 있는 어느 골목 안쪽이었다.

더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다리가 툭 꺾이며 주인의 몸을 흙바닥을 뒹굴게 만들었다.

"으극······."

더이상 이동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첼은 점점 굳어가는 팔을 필사적으로 돌려 짧은 단검을 꺼냈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지금 목숨을 끊어버리면 도시 한 가운데 마령이 풀려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다.

떨리는 팔을 억누르며 칼날을 돌린 아첼은 흐트러지는 자신의 숨소리에 눈을 질끈 감으며 칼끝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두 손은 검은 비늘로 뒤덮인 괴물의 팔로 변해있었다.

칼날에 얼핏 비치는 눈 역시 어두운 자주색으로 물든 채 뱀처럼 가늘게 찢어진 동공으로 노려보고 있다.

며칠쯤 밤을 샌 것처럼 몽롱해진 의식도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심하게 깜빡거렸다.

'뭘 망설이는 거야······. 빨리 해. 이대로면 늦어버려. 빨리······!'

하지만 팔의 떨림은 멈추기는 커녕 한층 더 심해질 뿐이었다.

더이상 칼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려웠다.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이런 쓸쓸한 골목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 슬프고 두려워 차마 칼을 찌를 수가 없었다.

"찌르란말야아아!"

울음기 섞인 절규가 골목을 울렸다.

미련따윈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적어도 하루 전 까지만 해도 정말 미련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티엘의 환영이 자꾸만 아첼의 팔을 멈춰세웠다.

겨우 스쳐지나가는 온정일 뿐인데도, 정에 굶주린 가슴은 그 짧은 온기를 탐하며 눈동자에 그 모습을 새겨버렸다.

왜 하필이면 지금인 것일까.

왜 하필 애정이라는 것을 맛본 직후에 이렇게 냉혹한 현실이 닥쳐오는 것일까.

신이란, 그리고 세계란, 어째서 이렇게까지 불공평한 것일까.

"안돼, 아첼! 그러지 마!"

또 한 명의 티엘이 아첼의 단검을 잡아끌었다.

아니, 이번엔 환영이 아니었다.

쓰고 있던 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얼굴은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로, 온 몸을 던져 아첼의 팔을 끌어내리려 끙끙거리고 있었다.

"너, 너 여긴 어떻······, 크흑, 빠, 빨리 가!"

"싫어!"

"내 손으로 죽여버리기 전에, 가!"

"싫다니까!"

몸안의 피가 열로 뜨겁게 끓어올랐다.

몽롱한 의식은 조금이라도 빨리 편해지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이미 생령에게 반쯤 잠식된 몸은 당장이라도 날뛰려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힘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역류, 그리고 침식.

계약을 나눈 마법사나 생령, 그 어느쪽도 바라지 않더라도, 계약으로 엮여있는 이상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

완전한 인간도, 생령도 아니며 어중간한 중간으로 떨어진 마령은 본능만으로 미쳐 날뛰다 다른 이의 손에 소멸할 뿐이다.

티엘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도 완전히 마령이 되는 순간 씻은듯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오로지 살의와 허기밖에 없다.

때문에 아첼은 겨우 자신에게 온정을 보여준 이 소녀를 필사적으로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티엘은, 그녀를 살리고 싶어하는 아첼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친한 척 하지 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야. 그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고, 우연히 스쳐간 사소한 인연일 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안달하는데?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그렇게 헤어지면······!"

"아프잖아."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아프잖아.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왜 그렇게 날 밀어내는데? 친구가 될 수 없는거야? 왜?"

"어리광 부리지 마! 죽은 친구는 필요 없······, 아흐윽!"

마력의 파도가 아첼에게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폭발한 것은 직접적으로 침식을 일으키는 이프라이엘의 마력.

아첼이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이 쩍 갈라지더니, 매캐한 흙먼지에 독을 뒤섞어 주위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멋대로 치솟는 파드미엘의 마력 역시 희생자를 찾아 애먼 벽과 지면을 바스라뜨리고 있었다.

"도망쳐, 빨리!"

아첼은 사력을 다해 마력을 이끌었다. 하지만 아첼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겨우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양의 마력 뿐이었다. 대부분의 마력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무차별적인 파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첼은 그나마 끌어올린 마력으로나마 티엘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른 생령을 통제하는 것은 깨끗히 단념한 채 켈리아의 마력만을 잡아낸 아첼은 마지막 힘을 다해 티엘의 주위에 방어벽을 쳤다.

"도망가······. 오래 못 버텨!""

"혼자 두고는, 도망가지 않을거야!"

"고집 부리지 마!"

가까스로 쌓아올린 벽이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첼의 피나는 노력을 비웃듯 빠른 속도로 티엘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빌어먹으으을!"

아첼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닥쳐올 현실에서 결국 눈을 돌리고 말았다.

"멈춰라, 비루한 것."

하지만 놀랍게도 티엘에게는 폭주한 마력이 조금도 다가서지 못했다.

마치 티엘만은 다치게 할 수 없다는 듯, 광분하던 마력도 그녀의 주위에서는 산들바람처럼 얌전해진 채 순식간에 위력을 잃고 말았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쳐 날뛰던 마력들이 뭔가에 억눌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위축되며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흩어져버렸다.

마치 아첼의 마력을 강제로 빼앗아 제어하는 자가 있는 것처럼.

"서, 설마?"

티엘은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한 곳을 보고는 딱 굳어버렸다.

아첼 역시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칼을 짧게 기른 남자가 오만하게 서 있었다.

강철로 벼린 듯 차가운 인상에서는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서늘한 위엄이 감돌았다.

자신의 길에 한 치도 의심이나 후회는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칼날처럼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깃에서 빛나는 은빛 해룡과 눈꽃의 문장. 몸에 두른 위압감과 그 문장은, 남자의 신분을 어떤 웅변보다도 선명하게 말해주었다.

제국의 심장중 하나이자 제도 흑마법의 수장이며 아덴 섬에서부터 미해, 로이아와 원해, 미투스에 이르는 제국 해양의 지배자.

레가야의 대공, 미노스티야 필레인 카르티치스라는 사실을.

아첼은 즉시 머리를 숙였다.

사실 제국의 여섯 주인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공화국민인 아첼은 본래 그 권위에 무릎꿇을 필요까진 없다.

그러나 미노스티아로부터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복종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정작 미노스티야는 죽어가는 아첼에게는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는데도.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 또 마음대로 뛰쳐나가면 용서치 않겠다고 했을텐데."

"아, 아버지······."

아버지? 상황이 상황이라 함부로 입을 열진 못했지만, 기겁한 아첼은 티엘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는 처음 만난 아첼에게도 스스럼없이 장난을 걸어오던 티엘이, 지금 이 순간은 바싹 긴장한 채 아버지를 마주대하고 있었다.

아니, 긴장한 것이 아니다.

티엘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며 애를 태우던 아첼은 문득 기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조금 부자연스럽다 싶더니, 티엘의 머리칼이나 옷자락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바닥을 향해 잡아당기듯 팽팽하게 일어나 있었다.

마치 그 하나 하나가 어마어마한 무게를 지니고서, 티엘의 몸을 찍어누르듯이.

"이곳은 네 방이 아니다, 이스티엘. 멋대로 명령을 어기다니, 어디까지 대공가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이냐!"

"죄, 죄송······. 흐윽!"

티엘은 그야말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미노스티야는 조금도 봐주지 않겠다는 듯 냉혹한 얼굴을 하고있을 뿐이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를 중압주문으로 찍어 누르고 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판에, 그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친혈육이라는 사실은 이미 상식을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행되는 비상식은 숨막힐 정도의 긴장감이 되어 아첼의 목을 더더욱 졸랐다.

"대공가의 후계자라는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지는 않을 터이거늘."

가족이라기에는, 소유물을 다루는 것처럼 엄격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티엘의 눈이 어느새 점점 흐려지며 빛을 잃고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티엘을 노려보던 미노스티야의 차가운 눈이 잠시 아첼을 향했다.

"게다가 반쪽짜리 마령과 어울리고 있었던 거냐. 망가진 장난감을 끌어안고 있어봐야 바뀌는건 없다."

"아······."

아첼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그 말에 힘이 턱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아첼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소녀를 보며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그 순간,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짓눌리던 조그만 소녀의 입에서 실낱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면서도 힘겹게 티엘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 아첼을······도와······주세요······."

"도와달라?"

우드득!

이제는 조금 떨어져있던 아첼도 확연히 느낄 만큼 강한 중력장이었다.

더이상 서 있을 수도 없게 된 티엘은 가까스로 무릎을 꿇고 버티려 했지만, 그 여린 무릎조차도 단단한 바닥을 반 뼘 가까이 파고들었다.

관절이 부서지지는 않았을까.

아직 어린 몸으로는 숨조차 쉴 수 없을 가혹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주문의 중심에 있는 티엘은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손을 움켜쥔 것도 모자라, 아예 입술이 터지도록 이를 악물 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얼굴만은 필사적으로 치켜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눈을 보라.

그것이 미노스티야가 어린 티엘에게 가르친 첫 번째 가르침이었고, 또한 지금 이 순간 아첼을 구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상대로 미노스티야는 티엘의 눈을 마주보며 먼저 대화를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시작점일 뿐이다.

미노스티야는 친딸의 부탁을 들은 아버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차가운 말로 그녀의 의지를 짓밟았다.

"너는 내 명령을 어겼다.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부탁이라니, 가당치도 않아. 정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할 수 있어야겠지. 보여봐라. 내가 '저 것'을 도와준다면, 너는 무엇을 제공할 수 있겠느냐."

차가운 계산이었다.

하지만 티엘은 떼를 쓰지도,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노스티야가 내건 조건을 어떻게든 달성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티엘은 아첼의 주위에 흐르는 마력을 간신히 읽어낼 수 있었다.

"언니의 마력······, 나이에 비해, 매우, 강해요. 젊고, 강력한 마법사······. 게,다가 나이차는 저와 얼마 나지 않는······, 제 스승이 될 수도 있는 마법사를······, 흐윽, 쉽게 구하진 못하실 거라······, 생각해요."

떨리는 목소리의 항변이 끝났다.

티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목이 부러지고 무릎이 박살나버리기 전, 과연 쓰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흥."

꽤 긴 시간이 지난 뒤, 문득 티엘은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던 중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아첼 역시 몸을 갉아먹던 생령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으며 놀라움에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레가야 내의 생령들을 조율하는 대령결계의 주인은 바로 카르티치스의 대공이다.

결계 내에서라면 대부분의 생령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따로 주인을 가진 생령들이라면 그 주인의 명을 우선하나, 이처럼 생령들이 폭주할 경우에는 강제로 진정시킬 힘을 가진 사람은 사실상 미노스티야 뿐이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 나이에 비해 보기 드문 마력이다. 침식의 진행속도가 느린것으로 보아 그릇도 작지는 않은 것 같군. 좋다. 허락하도록 하지. 굴러다니는 잡초와 다를 바 없는 줄 알았거늘, 그나마 눈은 길러져 있었던 모양이군."

"감······, 사, 합니다."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버텼다.

찍어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미노스티야의 시선도 치워진 직후, 티엘은 혼절하듯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무거운 중압을 버텨냈던 두 팔은 이미 안쪽부터 엉망으로 망가져 온통 시퍼런 멍으로 뒤덮여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라도 안쓰러운 모습이건만, 미노스티야는 오히려 그 상처를 보며 혀를 찼다.

마력을 끌어내 저항했더라면 저 정도로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리라는, 오로지 그 하나의 사실 때문이었다.

"궁성에 돌아가는대로 시의를 불러 저걸 고쳐놓도록. 언제쯤이나 되어야 써먹을 수 있게 될지 골치가 아프군."

"저 아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옆의 가신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대공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뜻밖에도 아첼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네 녀석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 아첼레란도,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입니다."

대공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첼의 이름은 고대 이피안 어, 그 중에서도 레가야나 피앙투스가 속한 남해 권역에 속하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 아느냐? 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혹시 알고 있느냐?"

"지어준 사, 사람은 모릅니다만 의미는 알고, 알고 있습니다."

대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인까지 나타난, 쓸만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마침 티엘의 수호기사가 하나쯤 필요하기도 했으니 썩 나쁘진 않은 일이다.

"본래 대공가의 치부를 본 네 녀석을 살려두어서는 안될 일이나, 저것의 거래를 받아들였으니 너 또한 거두는 것이 맞겠지. 그러니 너를 저것의 수호기사로 삼겠다. 네 일신을 보장해주는 대신, 네 재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도록 하겠다."

아첼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데없이 대공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다니, 꿈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오히려 그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그 다음엔 뭘 어쩐단 말인가?

이번에 버려진다면, 그때는 확실히 죽는다.

또다시 버려질 각오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구렁텅이에 남겨질 것인가. 선택은 너무나 힘겨웠다.

'그렇지만······.'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 목숨을 붙여준 것이 자신의 나이의 절반조차 되지 않을 조그만 소녀였다는 것을 잊을만큼, 무정한 심장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첼은 대공왕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거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저 아이에게 해라. 이스티엘이 제 몫을 하지 못했다면 즉결처분했을테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 사람에게 있어서 아첼은 그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친딸을 '저것'이라던지, '고쳐놓으라'던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소름끼쳤다.

그것은 아첼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공왕이라 불리는 저 남자는 두 소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았다.

그저 부서지거나 고장나면 버릴 뿐이다.

경악하는 아첼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미노스티야는 허공에 손을 뻗어 마법진을 펼쳤다.

"히펠라. 헬루타와 메리온에게 전해라. 일 주일내로 철저하게 가르치도록."

우르르릉.

가벼운 울림과 함께 마법진이 사라졌다.

대공왕은 찬바람이 날 정도로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쓰러진 딸을 챙겨가려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미노스티야의 모습이 사라진 뒤, 아첼은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곧바로 티엘에게 달려갔다.

고통스러워하는 숨소리가 가슴을 저몄다.

한쪽 무릎은 완전히 부서져 있고, 다른쪽 다리도 정강이뼈에 금이 가 있었다.

어깨 관절도 거의 뽑혀나가기 직전인 상태로, 평범한 또래 아이였다면 한참 전에 고통을 못이겨 기절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울컥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아첼은 티엘의 상처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아직 어린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티엘······. 티엘······.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으응······."

그새 벌써 정신을 차린 것일까.

짧은 신음을 흘리다 눈을 뜬 티엘은 자신을 붙들고 우는 아첼을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이내 모든 것이 잘 풀렸다는 것을 떠올린 그녀는 그런 처람한 몰골로도 배시시 웃으며 엉망이 된 팔을 아첼의 목에 둘렀다.

"응······.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언니······?"




"어라? 티엘?"

한창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갑자기 툭, 하고 부딪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깨에 내려앉아 있다.

술기운 때문인지 숨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거칠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티엘, 얘가? 다 큰 숙녀가 이렇게 아무데서나 자면 어떡하니?"

아마 티엘이 들었으면 '다 큰 숙녀가 나가떨어지도록 술을 먹인 사람이 누구냐'고 되물어올 것이다.

하지만 티엘은 잠꼬대도 없이 순하게 잠든 상태였다.

제풀에 킥킥 웃어젖힌 아첼은 술값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잠든 티엘은 옷깃을 잘 여며주고 얼굴을 한번 닦아준 뒤 조심스레 등에 업었다.

"신기하네. 술 마시고 이렇게 조용하던 사람 별로 못 본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에 접어든 아첼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이런 술버릇, 아첼로서는 정말 드문 경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웃음의 끝맛은 생각보다 씁쓸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아이가 평소에도 별로 내색을 안하는 것도 대견한데, 술에 취해서까지 꾹 참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열 네 살에 피를 보긴 했지만, 너는 되도록 안그러길 바랬는데 말이야.'

"티엘."

조용한 목소리가 눈발에 녹아든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낸 직후라서 그런걸까.

한 가지 소원 정도는, 누구에게 빌어도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다.

아첼의 시야에 문득 하늘을 가득 메울 듯 휘영청 밝은 아이카가 눈에 들어왔다.

엘드리안의 심장, 고고한 밤의 여왕.

흑마법사인 자신은, 어쩌면 우룬의 이름에 기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걸음을 멈춘 아첼은 달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십 년이라도, 아니, 오 년 뿐이라도 좋아요. 이렇게 조용히 지낼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무 많은걸 바라는건 아니겠죠? 이봐요, 나 이제까지 엄청나게 굴렀잖아요. 생일인데, 처음으로 축하받은 생일인데, 이정도 소원쯤은 들어달라고요."

달빛을 머금은 이슬방울이 소리없이 어둠을 적셨다.

순탄한 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승을 만나고, 티엘을 만나며 그럭저럭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불행하기만 했던 삶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소원이란 것도 빌어볼 수 있는 것이리라.

밤안개의 마법사, 아첼레란도는 그 한가지 소원을 조용히 되뇌며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해갔다.


그것은 점점 깊어가는, 어느 겨울날의 이야기였다.


작가의말

3.5장 끝입니다.
티엘 어릴때는.... 르비아는 미노스티야 눈치때문에 자주 보기도 힘들었고, 메리온도 신분상 잘 감싸주긴 어려웠죠. 사실상 아첼 만나기 전에는 사람 취급도 못받은 정도.

이제 본격적으로 스토리 시작되는 4장이네요. 과연 티엘은 아첼의 죽음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4장, 방황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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