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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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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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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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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8쪽

3장-개화開花(4)

DUMMY

"아첼? 아, 아체엘?"

이번에 집어든 돌멩이는 이전보다 '조금' 컸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티엘의 머리 정도 되는 크기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제법 무거울텐데도, 아첼은 별 어려움 없이 돌을 살짝 던졌다 받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아첼의 얼굴이 활짝 개이는 것과는 반대로 티엘의 안색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농담이 아니다.

지금 아첼이 하는 것은 단순히 손장난이 아니었다. 제대로 돌을 날려보내기 위해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첼은 정말 저 돌덩이를 던질 생각이다.

"서, 설마 그, 그거, 지,지, 진짜로 던질 생각이야?"

"아무렴. 자신있다고 했지? 그럼 한번 믿어 봐야지. 그렇잖아?"

"그······. 아하하하, 조금만 작은걸로 하면 안될까?"

티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검지와 엄지로 작은 틈을 만들어보였다. 그러면서도 연신 눈이 아첼의 입과 돌 사이를 오가는걸 보면 애처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아첼은 빙그레 웃으며 돌덩이를 어깨 너머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티엘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라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던 티엘은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드는 큼지막한 돌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제자리에 몸을 웅크렸다.

"꺄아악!"

그 가느다란 팔로 막아봤자 충격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대로 서 있다 방어막이 깨지면 하루나 이틀 침대에 누워있는걸론 끝나지 않을것이다.

티엘은 아첼에게 뭐 잘못한 거 없었나 내심 자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많은 사건들이 티엘의 양심을 쿡쿡 찔렀다.

'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티엘은 별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퍼억, 하는 둔한 소리와 함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티엘이 펼친 방어진이 미처 다 받아내지 못한 충격이 티엘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잠시 바들바들 떨던 티엘은 빼꼼히 눈을 내밀었다.

다행히 티엘이 펼쳐둔 방어막은 깨지지 않은 채 건재했다.

아첼이 던진 돌덩이는 어느새 꽤 멀찌감치 굴러가 있었고, 오히려 큼지막한 균열이 생긴 채 반쯤 부서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겨우 가슴을 쓸어내린 티엘은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손으로 입가를 가린채 쿡쿡 웃는 아첼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티엘은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것도 잊은 채 발딱 일어섰다.

아직도 몸은 떨리고 있었지만,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 든 탓에 목소리는 제법 날카로웠다.

"아체엘! 위험하게 저런걸 던지면 어떡해! 깨지면 어쩌려고?"

"자기 방어막 정도는 믿어야지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단다. 설마하니 깨질 방어막에 저런거 던질리도 없고."

"그래도 너무해!"

발끈하는 티엘을 본 아첼은 간만에 킥킥 웃었다.

티엘 자신보다도 티엘의 역량에 대해서는 잘 아는 아첼이다.

게다가 티엘을 제 몸보다도 아끼는 아첼이 정말로 티엘이 다칠 가능성을 알면서도 저런 위험한 짓을 할 리는 없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티엘의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얼마나 겁을 먹었었는지 목소리에 울음기가 살짝 섞여있었다.

하지만 아첼의 얼굴에는 모처럼 그늘이 없었다.

그동안 얼굴 한구석에 드리워진 그늘때문에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던 것과 대조되는 표정이다.

방어진을 해제한 티엘이 귀엽게 눈을 흘기며 다가왔다. 그런 티엘의 이마에 손가락을 딱 튕겨준 아첼은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에 던져놨던 가방을 찾아들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선물 받을 준비는 됐지?"

티엘은 선물이라는 말에 얼른 표정을 바꾸고 아첼의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첼은 그런 티엘을 놀리려는 듯 가방을 등 뒤로 슬쩍 숨겼다.

어차피 보여줄 거, 그렇게 생색낼 것 없지 않은가. 티엘은 조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첼을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대강은 짚어볼 수 있는 두 사람이다.

아첼은 금새 멋쩍게 웃으며 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갈색 포장지로 꼼꼼하게 쌓인 네모진 물건이 아첼의 손에 끌려나왔다.

포장지로 싸여있다고는 해도 그 형태는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작은 방패 크기에 두께도 굉장히 두꺼운 육중한 물건이지만, 넓이에 비해 두께는 제법 얇은 직육면체.

어느 모로 보아도 한 권의 책이다.

"책?"

"원래 너한테는 무지무지 과분한 물건이다, 이거? 감사히 쓰도록 해."

어디서 귀한 마법서라도 챙겨온 것일까.

하지만 이제 막 마법을 배워가는 티엘로서는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은 별로 없었다.

그걸 아는 티엘이기에 오히려 아첼이 굳이 티엘에게 건네주는 책에 호기심이 일었다.

티엘은 얼른 손을 내밀어 아첼이 내민 물건을 받아들었다.

순간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묵직한 무게가 티엘의 손을 잡아챘다.

"앗!"

"야! 조심해, 조심해!"

하마터면 책을 바닥에 그대로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히 티엘보다 먼저 식겁한 아첼이 몸을 숙여 떨어지던 책을 재빨리 잡아냈다.

포장을 뜯기도 전에 상처를 낼 뻔 했다는 것과, 그래도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린 티엘은 아첼의 눈총을 받으며 다시 조심스럽게 책을 받았다. 그리고 혹여 내용물이 상할까 조심스레 포장지를 뜯었다.

질긴 포장지를 벗겨내자 고급스러운 가죽 정장의 표지와 함께 책의 모서리를 보강하기 위한 듯한 은색의 금속 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 십자형의 별을 형상화한 듯한 작은 금속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것도 꽤나 눈길을 끈다.

금속 테는 단순히 모서리를 둘러친 것 뿐만이 아니라 책 등을 받치며, 책을 잠궈둘 수 있도록 잠금쇠까지 붙어있는 복잡한 형태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제목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 크기만 제외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감상은 마법서라기보다는 일기장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삼스레 일기장을, 그것도 이 정도로 고급스러운 재질을 사용해 만들리는 없다.

게다가 이내 티엘은 표지를 감싼 가죽이 흔히 볼 수 있는 소가죽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질기고, 단단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매끄럽다. 예리한 날붙이를 가져댄다고 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듯한 질감이다.

호기심이 더 커진 티엘은 표지를 물고 있는 잠금쇠를 열고 책을 펼쳤다.

표지와 마찬가지로, 속지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재질은 아니었다.

가장자리에 얇은 은선을 입힌 책장은 한 장 한 장이 휄카야와 미랴에서만 생산되는 최고급 종이, 엘브네스지(紙)였다.

믿을 수 없이 얇고, 매끄러운데다 질기다.

아마 물 속에 쳐박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버텨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급스러운 재료와는 달리, 정작 중요한 내용은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완전한 백지였다.

뒷장도, 그 뒷장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의 손목과 비슷한 두께의 책은 완전히 비어있는 내용없는 책이었다.

"어? 아첼. 이거 이상해. 아무것도 안쓰여있는데?"

티엘은 산화되지 않은 잉크의 날 선 냄새조차도 나지 않은 책을 덮으며 아첼을 돌아보았다.

뭔가 잘못된걸까.

그러나 아첼은 뜻모를 웃음을 지으며 비어있는 책장 중 하나의 귀퉁이를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우습게 찢겨나가야 할 책장은 멀쩡한 채, 육중한 책이 덜컥 움직였다.

보호주문에 의한 파괴내성이다.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급스럽기만 한 빈 책이 보호주문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라고?

"자, 이제부터가 진짜야. 지금부터 이 안에 마력을 흘려넣어봐."

주문서라도 만들 생각일까.

아무리 보존 주문을 걸었다고 해도, 한 낱 종이가 마력을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티엘은 아첼이 시키는대로 순순히 책장에 손을 얹고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이 피부로 흐르는 순간,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얗던 백지 위에 변화가 일어났다.

손 가까운 부분에서부터 먹물이 번지듯, 진한 검은 빛의 얼룩이 책장 위로 빠르게 번졌다.

얼핏 보기에는 불규칙한 형태로 휘갈긴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얼룩은 눈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봐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씌여진 이사드 문자였다.

아첼의 필체로, 한 장에 수백 글자 이상을 써 넣은 듯한 문자들은 교묘하게 숨겨져있다, 티엘의 마력에 반응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이야기로 듣던, 특정한 방식으로만 읽을 수 있는 비밀 문서라도 되는 것일까.

티엘은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을 더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사드는 전부 알고 있지만, 이사드로 적어넣은 이피안어를 해독하는 것은 아직 조금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닫아라. 채워라. 그리하여 남겨라. 세상을 보는 눈을 봉하고, 바람을 느끼는 그 날개를 잘라, 여기 계약의 증거물로 새기노라. 세워 짚은 깃발로, 이 땅에 너의 흔적을 남겨라."

막 해석이 막혀 쩔쩔매려는 순간, 아첼이 먼저 해당 구절을 읽었다.

"아직 이피안어 해석은 조금 어렵지? 그건 천천히 숙달되면 돼니까 걱정 마. 어차피 거기 적어둔건 읽으라고 써둔게 아니니까."

아첼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티엘의 손을 끌어다 책 위에 덮었다.

이상하게도 책장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아첼의 체온은 아니다.

그 온기가 마력의 저항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아직 티엘로서는 알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뜻밖의 온기에 놀라 손을 빼버렸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건 이제 잘 할 수 있을거야. 그걸 응용해서, 책에서부터 마력을 꺼내봐."

"책에서?"

잠시 주저하던 티엘은 책의 표지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낼 때 처럼 머릿속으로 작은 움직임을 그렸다.

그러자 문득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이 그려졌다.

티엘 자신의 마력으로부터 책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선. 당기면 저 너머의 무언가를 끌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어렴풋한 예지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덮여있던 책장 사이에서 어렴풋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 속에서 무심결에 손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 눈을 뜨자, 책장에서부터 자신의 손으로 길게 이어지는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깃털, 혹은 나뭇잎.

마력으로 이루어진 얇은 천 한 장이 티엘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채 아름다운 빛을 품고 있었다.

"총 600장에 달하는 마력 저장용 특수 영장. 마력을 담아두는 책. 네 손에 있는 그건 네가 조금 전에 넣어둔 마력이야."

마력을 얼마나 저장하느냐에 따라 적어넣었던 술식이 시각화되며 저장량을 보여주는 특이한 마도서.

아첼의 선물은, 몸에 많은 양의 마력을 품을 수 없는 티엘을 위해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특별한 영장이었다.

"지금은 마력을 넣거나 뽑는 것 밖에 못할테지만, 좀 더 익숙해지면 주문도 기록할 수 있어. 물론 이것도 한 달 정도 방치해버리면 절반 정도는 소실돼버리지만, 적어도 실전에서 곤란한 수준은 아닐거야."

본래 마정석의 형태로 묶어둔 마력은 그리 오래지 않아 증발해버릴만큼 불안정하다.

때문에 마력이 부족한 마법사들 중에서는 마력을 저장하는 특수영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저장형 영장이라고 해도 손실되는 속도를 늦추는 정도가 한계다.

영장에 한계까지 저장한 마력이 반감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사흘, 길어야 이레 정도가 보편적이다.

한 달이라는,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반감기를 지닌 이런 영장은 그 가치를 이루 말할 수조차 없는 물건이다.

흔한 영장과 이 책은, 바로 그 점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물론, 티엘은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막은 아직 잘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아첼이 건네준 것이 흔히 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직감하고 있었다.

티엘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하는 것을 본 아첼은 흐뭇하게 웃으며 장난스레 콧대를 세웠다.

"사실 이 언니 실력은 어지간한 영장사(靈杖士)들도 못따라올걸. 조금은 더 존경해도 좋아."

아스트라 술식도, 영장 제작도, 확실히 이십대 초반에 이룰 경지가 아니다. 그것도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뤘으니 그야말로 천재라고밖엔 할 수 없으리라.

저 정도 오만함은 오히려 자신감으로 봐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활을 쓰려면 이걸 손에 들 수가 없는데?"

아첼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이게 뭔지 알게된 티엘은 신기한듯 책을 쓰다듬어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어보았다.

지팡이를 들고다니는 미라야 학파의 신언사(백마법사)라면 모를까, 아첼이 배운것처럼 병기를 들고 마법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 흑마법에는 어울리지 않는 영장인 듯 했다.

그러나 아첼은 그것까지도 이미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걱정 마. 조금 익숙해지면 시동어나 의지만으로도 전개할 수 있어. 후훗, 이 정도까지 해줘야 대마법사지."

킥킥 웃던 아첼은 가방에 들어있던 마지막 물건을 꺼냈다. 가죽끈과 사슬로 된 띠였다.

티엘의 손에 들린 책에 띠를 달자 순식간에 어깨에 메고다닐 수 있는 어엿한 마법서가 되었다.

들고다니기엔 제법 무거웠지만, 끈을 달아 어깨에 메니 부담은 훨씬 덜했다.

아니, 아직 티엘이 성장기 도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년이 될 쯤에는 이보다 훨씬 가볍게 메고 다닐 수 있으리라.

"아참, 책 이름을 안가르쳐줬지?"

엄밀히 말하면 마도서는 고사하고 내용이 없는 책이니 제목같은게 있을리가 없다.

그러나 아첼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티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이스티엘레 덱시아(이스티엘의 서)."

"응?"

티엘은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이젠 이피안 어 어느 정도 알고 있잖아. 게다가 귀족들의 이름에는 종종 이피안 어가 사용되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지었어. 그러니까 '별의 서'가 되는거지. 어때? 마음에 들어?"

이스티엘.

신화시대때 지상을 거닐었던 이피안들의 언어로 '별'을 의미하는 단어.

티엘은 새삼스레 표지에 들어간 십자성 모양을 어루만졌다.

"나의 소중한 별, 이스티엘. 날 걱정해주고 사랑해줘서 너무나 고마워. 너도 힘들었을텐데, 이해하기 어려웠을텐데 여기까지 잘 해준 것도 고맙고."

"아첼······."

"방황하던 날들을 따뜻하게 바꿔준 나의 별, 이피안의 땅에 가더라도 언제나 지켜볼테지만. 사랑하는 티엘, 그동안 정말 잘해왔어."

아첼은 몸을 숙여 티엘을 안아주었다.

별의 서. 아첼이 티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작명이다.

티엘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기뻤고, 아첼이 속마음을 이야기해준 것도 기뻤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올것 같은 이유는 뭘까.

티엘은 아첼에게 등을 기댔다.

"가족이니까 당연한 거잖아. 갑자기 떠날 사람같은 말은 그만 해."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쿡쿡 웃는 소리가 들리며 갑자기 아첼이 벌떡 일어나버렸다.

앞으로 확 떠밀린 티엘은 맥없이 나동그라졌지만 아첼은 그런 티엘의 어깨를 팡팡 때리며 웃었다.

"파하하하, 나도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해지는거야? 자, 자, 오늘은 제법 빨리 해냈으니까 오전 수련은 이걸로 마치자. 빨랑빨랑 일어나. 얼른!"

다소 과장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가방과 활을 한 동작으로 집어든 아첼은 휘파람을 불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호수를 계곡을 나아났다.

넘어져있던 티엘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한 채 눈으로 아첼을 쫓다가 얼른 일어나 자신의 활을 챙기고 아첼에게 달려갔다.

티엘이 어느 정도 아첼을 따라잡았을 때 쯤, 아첼은 머리를 묶어둔 끈을 한 손으로 풀어버렸다.

"아아, 여기저기 흙투성이. 이건 싫다, 정말. 안그래?"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손으로 이리저리 헤집던 아첼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툭 던졌다. 온통 산발이 된 터라 앞이 보이기나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티엘은 아첼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기도 따라서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까르르 웃었다.

"이건 이것대로 사람들이 놀리지 않을까?"

"알게 뭐니. 내 머리 내맘대로 한다는데."

티엘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좌우로 쓸어 시야를 확보했다.

아첼 역시 앞머리를 쓸어냈는데, 뭔가 얼굴에 묻었는지 아예 세수라도 하는 듯 얼굴을 문질렀다.

"뭐 묻었어?"

"흠,흠. 빛나는 용모가 묻어나지."

"애인도 없으면서."

"너무한거 아냐? 애딸린 여자를 누가 받아줄려나 모르겠다."

"데려오면 내가 자리 비켜줄테니까 만들기나 해봐?"

티엘은 일부러 아첼에게 끊임없이 지분거렸다.

요즘들어 아첼에게서는 종종 우울한 분위기가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던 티엘은 일부러 쾌활하게 장난을 걸어 아첼의 걱정을 덜어주려 애썼다.

다행히 아첼은 티엘이 짓궂은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웃으며 장난에 어울려주었다.

물론 때때로 장난이 심해지다가 알밤 한두대쯤 맞는 것은, 티엘로서도 사양하고픈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별채로 직행했다.

요즘은 매일같이 오전, 오후에 한 번씩 수련하러 갔기 때문에, 아예 깨끗한 옷을 별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씻기에는 공간이 조금 모자란 관계로, 한 사람이 씻는 동안 다른 사람이 문 앞을 지키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누가 훔쳐보러 올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건 대낮에는 조금쯤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티엘의 양보로 먼저 씻고 나온 아첼은 지친 기색으로 벽에 기댔다. 안에서 여유작작한 콧노래와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다.

티엘은 가볍게 땀을 씻어내는 데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목욕을 일종의 취미에 가깝게 즐기기 때문이다.

항상 아첼에게 먼저 양보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였다.

평소라면 역시 어린애답다며 피식 웃었을 아첼이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어쩐지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흡!"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을 흘려보내던 도중, 갑자기 구역질이 밀려왔다.

저절로 허리가 꺾이며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입을 틀어막고 혀를 깨물어 애써 참았다. 시원한 물로 씻어내렸던 이마가 식은땀으로 다시한번 젖어들어갔다.

아델 시에서 왔던 의사의 충고는 틀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실리안을 부른 뒤 반 년 가량은 전혀 마법을 쓰지 않고 쉬어야 했을 것을, 조금씩 마력을 쓰며 버티다보니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이리저리 몸이 축난 상태였다.

사실, 티엘이 보는 앞에서는 한 번도 마력을 쓴 적이 없었지만, 별의 서를 만들면서는 그리 적지 않은 마력을 소모해야 했다. 애초에 영장을 가공하는데 마력을 쓰지 않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을 축내는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자조하긴 했지만, 그렇게 합리화한다고 깎여나간 생명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걸로 또 얼만큼의 대가를 치른걸까.'

아첼은 내심 조소를 삼켰다.

영장을 만들어내는 마공예의 재능이라면, 분명 아첼은 손에 꼽을만큼 뛰어난 인재였다.

꾸준히 갈고 닦았다면 저 유명한 엘트리안의 작품들에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길을 파더라도 대성하기 어려운 스물 두살의 나이에, 몇 개나 되는 천재성을 모두 발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부분은 어떤 편법을 이용하는 것 뿐.

아첼의 그것은 재능이라도 불러서는 안되는 종류였다.

그녀의 마공예(魔工藝)는, 다름아닌 자신의 혼을 깎아내는 금기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개화하지 않은 재능을 한시적으로 열기 위해, 실리안이라는 대정령의 지식과 마력을 빌려 인과를 비트는 짓을 했다.

그것은 대이적마법이라 불리는 일곱 신언 중 하나에 한없이 가까운 반칙이었다.

당연하지만, 반칙에는 당연히 그에 대한 혹독한 대가가 돌아오는 법이다.

단지 노력하는 티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지만, 아마 아첼이 한 짓이 알려진다면 그 웃음은 몇 배나 되는 눈물로 변해버릴 것이다.

'매혹의 밤안개.'

권호는 마법사의 힘을 상징하는 동시에 운명을 담는다고 한다.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안개'의 칭호가, 갑작스레 서늘한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격통은 역시 참기 어려웠다. 차라리 이프라이엘의 마력으로 통증을 잠재워버리면 어떨까 고민할 정도로.

그러나 마법으로 얻은 병을 마법으로 덧칠하기만 한다면, 결국 먼저 부서지는 것은 아첼의 육신이다.

몸을 부르르 떨던 아첼은 얼마 남지 않은 진통제를 꺼내 억지로 삼켰다.

칼로 찌르는 듯 하던 아픔이 약간 흐릿해지며 둔하게 짓누르는 통증으로 변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순간 물소리가 그치고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몸을 닦고 옷을 입는건가?

흠칫 놀라며 벽에서 떨어진 아첼은 황급히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옷을 바로잡은지 세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머리에 수건을 두른 티엘이 나타났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다행히 눈치는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티엘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아첼은 티엘의 머리위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짜냈다.

"사과는 식사 대접으로 받을게. 맛 없기만 해봐?"

"알았어, 알았어."

티엘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고는 혹시 물에 닿아 못쓰게 될까 싶어 어깨에 걸었던 책을 내려 그 끈을 손에 감아 쥐었다.

영장으로 완성된 시점에서 어지간한 마력의 직접 충돌이 아니면 흠집하나 못낸다는 것은 아직 모르기 때문이리라.

아첼은 뒤에서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 때 티엘의 손에 감긴 또다른 물건이 시선을 붙잡았다.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어쩌다보니 그동안 한 번도 출처를 물어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그러고보니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목걸이 어디서 난 거니?"

"목걸이? 이거 아첼이 준 거 아니었어?"

"내가?"

티엘은 별 생각없이 목걸이를 풀어 아첼에게 건넸다.

하지만 아첼은 목걸이를 받아드는 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단순히 흰 보석 하나가 달린 장신구따위,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귀에 걸고있는 한 쌍의 귀걸이를 제외하면 흔한 팔찌 하나도 없는 아첼이다.

그나마 그 귀걸이도 마력 보조를 위해 착용한 일종의 영장이니, 단순히 치장을 위한 장신구 같은 것은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목걸이에서는 희미하게 마력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첼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마력으로 목걸이를 콕콕 찔러보았다.

하지만 목걸이는 그냥 단순한 쇳덩이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

"나도 잘 몰라. 아르타야에서 눈을 뜬 다음부터는 쭉 가지고 있었어."

"진작 말을 하지, 요것아."

가끔이지만, 티엘은 무서울 정도로 맹한 구석이 있는 느낌이다.

아첼은 티엘의 이마에 딱밤을 날려준 뒤 조금 더 면밀히 목걸이를 살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마력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냉기를 품었다면, 티엘의 마력이 묻어있는 것일까.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특정 속성의 생령이나, '문'에 있는 장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티엘의 마력과 매우 비슷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몸에 지니면서 조금씩 마력이 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영장이나 생령의 심장석이라고 하기에는, 흘러나오는 마력의 양이 지나치게 적다.

아첼은 시험삼아 목걸이를 티엘에게 돌려주고 보석에 마력을 밀어넣어보라고 말했다. 혹시 유사한 속성의 마력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티엘이 얼마 되지 않는 마력을 반도 사용하기 전, 조용히 흐르던 마력이 뭔가에 밀려나듯 옆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까지 마력을 머금었다는 의미였다.

저렇게 약한 마력을 흘리는게 한계라니, 대체 얼마나 약한 물건인가.

"반응이 없네······. 미안, 내가 너무 과민했나봐. 착각한 것 같네."

"다행이다. 조금 놀랐어."

티엘은 다시 목걸이를 손에 감았다. 아첼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들러붙는 생각을 멀찌감치 밀어버렸다.

적어도 아첼이 아는 한도에서는 위험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반응을 보니 뭔가 특정 용도에만 사용하는 특수한 영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종의 자물쇠가 걸려있는 셈이니, 열쇠 역할을 하는 술식이 없다면 그냥 하얀 보석 정도로만 생각해도 될 것이다.


"휴우, 피곤해."

집에 들어가자마자 벽난로 근처의 의자에 앉은 티엘은 마냥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하루 두 번 전력으로 마법행사를 하는건 다소 무리인 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하면 티엘의 진도가 워낙 늦어지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소소한 행복인 흔들의자를 빼앗겨버리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아첼은 게으른 고양이마냥 흔들의자에 달라붙은 티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피곤한건 아는데 네 책은 어디다 잘 놔둬라. 잘 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계란게 있는거야."

"나중에 할래. 지금은 일어서기가 너무 싫어. 오늘은 내가 여기 앉을거야."

"쳇, 약아빠져선. 왜 우리 집엔 흔들의자가 하나밖에 없는거지?"

티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었다. 영악한 표정이 마치 고양이같은 느낌이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가르릉 소리를 낼지도?

아첼은 실없는 생각에 피식거리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책 한권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티엘이 갑자기 눈을 갸름하게 떴다. 조금 못마땅한 분위기다.

"참, 오늘 보름이지? 아첼, 오늘은 낮잠이라도 자는게 어때?"

"······벌써? 쯧. 이럴때는 흑마법사인게 조금 귀찮다니까. 매 달 걸리는 마법은 하나면 충······. 아니, 흠흠."

생령들은 엘드리안의 심장, 혹은 눈동자라고도 불리는 아이카(달)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만월이 뜨는 밤이면 생령들의 힘은 최고조에 달하고, 그만큼 마법사에게 지워지는 부담도 강해진다.

건강한 상태의 아첼이라면 그 정도 부하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겠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상, 지금은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두지 않으면 뜻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마령화.

생령도, 마법사도 바라지 않는 최악의 결말.

대정령처럼 육신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생령들은 매 순간 지독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린다. 때문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살아있는 육신을 가진 자의 피와 살을 먹어, 자신의 육신에 더하는 자들도 있다.

이 경우, 마력으로 구축한 육신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피와 살이 썩어들어가며 급속도로 생령의 육신과 지성을 무너뜨리고, 그 결과 허기밖에 남지 않은 괴물, 마령으로 전락한다.

아첼과 계약한 생령 중, 실리안을 제외한 다른 생령들은 모두 마령화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아니, 그 실리안조차도 자칫 실수해 균형을 잃으면 마찬가지로 강렬한 성장통에 시달린다.

티엘을 위해서든, 아첼 본인을 위해서든, 하다못해 생령들을 위해서든, 오늘 같은 날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느새 아첼의 고민은 자신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만월이 지나면, 자연 발생한 마령들도 제각기 상당한 성장을 이룬다. 힘이 강해진 만큼 공격성이 늘어, 저희들끼리 서로 싸워 잡아먹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상대를 흡수한 직후에는 심장석에 더 많은 마력이 쌓일지언정, 힘 자체는 싸우며 망가진 육체를 재수복하느라 오히려 상당히 약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마령을 사냥하기에는 최적의 시기라는 의미다.

"빨리 나아야 사냥을 나갈텐데."

강력한 생령의 심장이라면 그만큼 더 비싸다.

제대로 육체를 완성시켜 기사급에 오른 생령은 잘 훈련된 인간 기사 수십 명을 혼자서 상대한다.

그러나 그 생령이 마령으로 전락해버린다면 이성도 기술도 크게 퇴화해, 단순히 힘만 센 짐승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렇다보니 기사급의 마령이라면 하나나 둘 정도 강림한 것은 영격사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영격사들의 주된 수입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힘은 여전히 강하다.

티엘의 눈초리에 불안감이 어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위험하잖아. 그냥 짐승이나 잡으면 안돼, 아첼?"

"토끼 두어마리 잡아봐야 우리 둘이 한 끼 먹고 끝나는 것밖에 더 돼? 조금이라도 저축해둬야 요즘처럼 일 못나갈 때 대비하지."

짓궂은 미소와 함께 가벼운 알밤이 떨어졌다.

그러나 걱정해줘서 기쁘다는 것은 채 숨겨지질 않았기에, 티엘은 배시시 웃으며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걱정 마. 대규모 강림을 마주하면 무조건 도망칠테니까."

드물게나마 마령이 두 자리 수 이상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일개 영격사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규모의 강림이다.

물론 그 정도의 대규모 강림이 일어날 정도의 마력집중은 드물지만, 일단계 강림이라면 가능성이 없진 않다.

육신을 완전히 갖춘 마령이 두 자리수로 우글거리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마령사냥에 익숙한 아첼이라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미노스티야의 밑에서 딱 한 번 마주쳐본 일단계 강림 앞에서, 기사급의 생령을 무려 셋이나 거느린 아첼조차도 정면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한다면 어떻게든 혼자만의 안전은 손에 쥘 수 있겠지만, 보호해야 할 사람이나 움직임이 제약되는 상황이라면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된다.

조만간 티엘도 아첼을 따라 사냥에 나서려 할테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도 몸을 빼는 정도라면 가능할테니 다행이려나. 그 이상은 생각하고싶지도 않으니까.'

그나마 일단계 강림이라면 만나서 곤란하다는 정도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빠져나올 확률은 칠 할 이상이다.

그러나 이단계 강림부터는 일개 개인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을 마지막 세 번째 단계라면, 더이상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마지막 발생은 300여년 전 시엘리아 제국 초기. 미라야의 백마법사들과 레가야의 흑마법사들의 거친 대립으로 일어난 전쟁, 통칭 '로겔 카즐레(황혼의 전투)'에서 전장의 모든 생령들이 일제히 폭주해버린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전 대륙을 집어삼킬 정도로 대환란. 단순히 가까운 곳에서 휘말려버린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 이름조차 사토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시대에 유리시엘은 남아있지 않으니까.'

폭발한 재앙을 잠재운 것은 단 한 명의 마법사였다.

7대 신언의 주인중 하나, 제 3마의 권호를 받았던 유리시엘 카타스트린.

제 3신언 '균형'으로 모든 생령들을 심장석으로 되돌려버리고 최악이라 불리는 삼단계 강림을 강제로 끝내버렸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 전해지는 영웅.

순간 아첼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역사서에 마왕 소리를 듣는 흑마법사는 종종 찾아볼 수 있어도, 영웅으로 추대받는 흑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다.

"하아, 너도 백마법이나 배웠으면 이렇게 위험한 짓 안해도 될텐데."

"······나 화 낼거야."

무심결에 농담조로 건넨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외로 날이 서있었다.

티엘은 부루퉁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내 실력, 그렇게나 형편없는거야? 아첼 말고 다른 사람한테 배우긴 싫은데."

"하아, 무슨 말을 못하게 하니. 왜 혼자 주눅들고 그래? 이리 와봐."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꼬맹이가 아첼의 품에 폭 안겼다.

무릎에 걸리는 체중도, 또래보다 지나치게 가벼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착실하게 활과 마법을 배우며 근육도 조금 붙고 키도 제법 컸지만, 여전히 아첼의 눈에는 작고 약하게만 보인다.

"티엘.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빠르게 배우는게 좋은게 아냐. 특히나 흑마법은 함부로 다루면 어떻게 되는지, 숱하게 이야기 해줬지?"

"······그래도 항상 배우는게 느리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얼굴은, 아마 같은 사람의 것이었으리라.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티엘을 '딸'도, '신하'도 아닌 '도구'로 대했던 알 수 없는 남자.

살아남으려면 마력을 읽어내라며, 얇은 홑옷 한 장만 걸친 티엘을 눈밭에 가둬버렸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아첼이 몰래 라피온으로 바람벽을 쳐주지 않았더라면 폐렴이라도 걸렸을지 모른다.

불쾌한 기억에 아첼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아첼이 튕긴 손가락이 티엘의 이마를 시원스럽게 때렸다.

"아얏!"

"요게에? 내가 언제 느리다고 혼낸 적 있니? 날 누구랑 비교하는거야. 실례잖아."

"그, 그치마안-!"

"그치만이 어딨어, 그치만이?"

따악, 하는 호쾌한 소리가 두어 번 더 이어졌다.

티엘의 이마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겨우 손가락 튕기기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첼의 손이 워낙 맵다보니 마력으로 강화한 것은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 말을 들은 아첼이 강화를 건 손가락을 튕겨 조약돌을 부수는 것을 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아첼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마를 문지르던 티엘의 양 뺨을 두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그리고 너, 이 정도면 제법 빠르게 배우고 있는 편이야. 솔직히 어느날 훅 사라져버리는거 아닌가 하고 겁이 날 정도로. 천천히, 나랑 같이 한 발짝씩 천천히 가자. 알았지?"

가슴팍에서 무언가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리라.

물론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못할 고민을 안고 있을테니 이해할 수는 있다.

문제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 경우 살아가는 것이 고난의 연속이 된다는 점이다. 조금 너그러워져도 될 부분에서까지 자신을 옭아매면 버텨낼 수 없다.

조금쯤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를 느낀 아첼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적당한 물건을 발견한 아첼의 입꼬리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쾅!

"힉-! 가, 갑자기 뭐야?"

"내 무릎에서 잠든건 아닌가 해서. 설마 이야기 안듣고 딴생각 한건 아니겠지? 요게 애늙은이 흉내 내면서 응석 부리려고 용쓰기는."

"으으으, 아냐. 설마."

티엘은 손사래까지 치며 아첼의 말을 부정했다.

아첼이 거의 노려보다시피 눈을 번뜩였지만 티엘은 어색하게 한번 웃고는 더이상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첼은 어쩔 수 없다며 혀를 쯧쯧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간 아첼은 하늘을 한번 보고 돌아섰다.

"일단 해가 좀 기울 때 까지는 쉬자. 우리 둘 다 무리할 만한 몸 상황은 아니니까. 오후에도 열심히 해야지?"

"으응. 알았어."

티엘은 자리에서 쪼르르 내려와 별의 서를 챙겨들고 휘적휘적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티엘은 그다지 낮잠을 즐길 생각은 없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잠그고 작은 책 하나를 든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물론 이불을 뒤집어쓴다고 해도, 티엘이 곧바로 잠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첼이 모를리는 없다. 단지 오후 일정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라면 암묵적으로 용인해주는 것 뿐이다.

실제로 낮이든 밤이든, 수련이 끝난 뒤 아첼이 방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티엘이 만족할 만큼 책을 보고 나서 침대에 누운 뒤였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티엘 역시도 너무 늦게까지 책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분 가량 책을 보던 티엘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이불을 걷었다.

살금살금 소리죽여 걷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혹은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상해. 기분 나빠······.'

아첼일리는 없었다.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신경을 조금씩 건드리는 불쾌한 장난은 치지 않는다.

조금씩 심장소리가 커져가기 시작했다.

애냐가 탐색령으로 성장해줬다면 지금같은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었겠지만, 필요한 순간 짠 하고 성장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티엘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머리맡에 둔 활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상대의 명확한 위치도, 목적도 모르는 상황에서 활을 겨눌 수는 없었다.

어정쩡하게 활을 들어올린 채로 알 수 없는 상대와의 대치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티엘은 이제껏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정체불명의 시선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기척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옅어진 것이었다.

마치 농락당한 것 같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착각이었을까······?'

한참을 활을 들고 서있어도 인기척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피곤해서 괜히 신경이 예민해진걸지도 몰랐다.

팔을 돌려 목덜미를 살짝 주물러보자 제법 뭉쳐져있었다.

오후 수련 시작하기 전에 아첼에게 주물러달라고 해야 할까. 몸에서 긴장이 풀리자 힘이 쭉 빠졌다.

티엘은 바보같이 놀란 자신을 비웃으며 다시 책을 향해 몸을 뒤집었다.

달그락!

하지만, 마치 그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순간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작가의말

영장이란건 쉽게 말해 마법사가 들고다니는 지팡이가 원형입니다. 그래서 장(杖)이죠.

백마법사는 아직도 지팡이 형태를 사용하는 일이 많고, 흑마법사는 전투에 서는 일이 많다보니 병장기형 영장을 쓰는 일이 많지만, 둘 다 어디까지나 취향입니다.

물론 장신구나, 오늘 나온 별의 서처럼 보조영장들은 보다 형태가 다채롭지요.


기본적인 효과는 술식 제어 보조 및 위력 증폭. 거기에 추가로 상급 영장들은 특수기능을 갖추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첼의 활 같은 경우 아스트라 술식 보조 및 위력보정 기능이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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