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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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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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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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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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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0쪽

4장-방황彷徨 (3)

DUMMY

올로비스는 심란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솔페이람의 마력은 지나치게 거칠다.

최대한 억눌렀는데도, 가볍게 일으킨 바람은 이미 골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상황이었다.

"그 애는?"

"너 때문이잖아, 바보야! 몸놀림 보니 잠깐만 눈을 떼도······. 잠깐, 로비! 따라와!"

막 짜증을 내려던 리아는 지면을 흠뻑 적신 핏방울들을 발견하고 낯빛을 바꾸었다.

허겁지겁 올로비스를 끌고 피가 낭자한 골목으로 들어선 리아는 이내 피로 흠뻑 젖은 티엘을 발견했다.

출혈을 막을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한 채 새하얗게 질린 티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위독해보였다.

리아는 허겁지겁 티엘의 뺨을 때리며 가물가물 멀어지려는 티엘의 의식을 끌어당겼다.

"정신차려! 괜찮아? 아아, 정말! 눈 감지 마! 자지 마! 그러다 진짜 죽어!"

저항할 힘도, 의지도 사라진 티엘은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아버렸다.

죽이던 살리던,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올로비스는 재빨리 허리에 차고있던 전대를 끌러 지혈대와 약초를 꺼냈다.

갈아서 환부에 발라 지혈과 소독을 함께 하는 약초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약초의 절반이 리아의 손으로 넘어갔다.

리아는 받은 약초를 입 안으로 밀어넣는 동시에 자신의 몸으로 티엘을 누르듯이 고정했다.

"조금 참아. 정말 죽을만큼 아플테니까."

리아는 불길한 말을 티엘에게 속삭여준 뒤 잘게 씹어 으깬 약초를 티엘의 상처에 발랐다.

순간 축 늘어져있던 티엘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상처에 소금을 바르고 불로 지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날카로운 통증이 온 신경을 건드렸다.

"아윽, 악! 아아악!"

"참아! 그냥 두면 썩는단말야!"

혹여 고통에 몸부림치다 혀라도 깨물까 걱정한 리아는 자신의 옷자락을 뭉쳐 티엘의 입에 쑤셔넣었다.

덕분에 티엘은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무력하게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조금 더 침착하게 약초를 씹은 올로비스는 발목이나 팔 등 다른 곳에 긁힌 상처에도 꼼꼼히 약초를 발라 주었다.

물론 상처는 얕을지 몰라도 자극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새 티엘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잔뜩 지쳐있어 힘을 쓰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발광하기 직전까지 몰린 티엘은 너덜너덜한 상태로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리아의 몸까지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팔팔할 때였더라면 아마 두 사람을 뿌리치고 약초를 떼어버렸을 것이다.

가뜩이나 몸을 돌보지 않는 티엘이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살이 썩어들어가거나, 혹은 파상풍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강압적으로라도 치료를 받는 것이 나았다.

티엘이 발버둥을 멈춘 것은 십여 분이나 흐른 뒤였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 티엘은 리아가 물러난 뒤에도 힘겹게 숨만 쉬고 있었다.

리아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입에 물려두었던 재갈을 빼고 이상하게 끈적이는 액체를 티엘에게 마시게 해 주었다.

일종의 진통제인지, 상처를 바늘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겨우 누그러졌다.

"자아, 다 끝났어."

리아는 티엘의 창백한 얼굴을 흠뻑 적신 식은땀을 닦아주며 조곤고존하게 말을 걸었다.

그 사이 올로비스는 상처의 봉합을 끝내고 지혈대를 묶었다.

"미안해. 이 바보 때문에 지독한 꼴을 당하게 해서. 내가 대신 사과할게."

"저기, 리아, 나도, 미안한 지식 가지고 있어. 말이 좀······서툴, 아니, 서툰 것 뿐이야."

"칫. 우리말 못배우게 방해하는건데.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지 참. 별로 좋은 분위기에서 만난건 아니지만, 아실리아 프로베인이야. 리아라고 부르면 돼. 저 쪽은 로비."

"초면, 애칭, 부담스러우면, 부르면 돼. 편할대로. '바람의 선고' 올로비스 란티엘. 너, 말해주는 이름?"

"······이스- 이스티엘. 이스티엘이에요."

무심코 본명을 말하려던 티엘은 반사적으로 말을 끊었다.

제국의 여섯 대공가 중 하나이며 강력한 흑마법사의 피로 유명한 카르티치스가(家).

흑마법사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무심결에 뱉어버릴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제와서 이 이름을 밝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굳이 가능성을 들자면, 검은 가지를 통해 티엘의 신병이 밝혀지며 레가야에서 암살자가 파견될 가능성이 약간 생긴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저 말한다고 해도 딱히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을 말하지 않는 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리아는 늘어져있던 티엘의 손을 꼭 잡았다.

"애칭은 티엘일 것 같은데, 맞지? 그렇게 부를게?"

"좋을대로 해요. 어차피 별 상관 없으니까."

"너무 쌀쌀맣게 굴지 말아달라구, 티엘. 흠흠, 우선 우리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지?"

그동안 표정없이 죽어있던 티엘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마른 가시나무의 기사들."

흑기사단, 악령의 전위대, 검은 칼날의 순례자, 마른 가시나무의 기사······.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하나같이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다.

마법사들은 그들을 두려워한다. 마법사를 사냥하기 위한 마법사이기에.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들도 그들을 두려워한다. 언제 미쳐버릴지 모르기에.

티엘은 사냥꾼에게 잡혀버린 사냥감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화국에서 그 검은 제복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있을거라 생각해요?"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앙투스의 상징은 국기(國旗)에도 있는 신수(神樹) 나드라와 나이팅게일이다.

공화국 군제에서 일반병과와 황금가지 기사단의 제복은 그것을 그대로 따와서, 흰 바탕에 금색으로 나무와 새를 나타낸 장식이 들어간다.

하지만 검은 가지 기사단은 그와 반대인, 흑색 바탕에 은색의 장식을 사용한다.

임무의 특성상 더러워지기 쉽기에 검게 물들이고, 마력의 증폭을 위해 은장식을 사용한 탓이다.

그러나 그 어두운 제복 위에 새겨진 은빛은 오히려 '흑마법사'라는 이미지를 몇 배로 두렵게 만드는, 족쇄의 역할을 겸하곤 했다.

그 때문인지, 리아는 비교적 가벼운 언행으로 티엘을 대하고 있었다.

인식과는 달리 그리 무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티엘에게 살갑게 대해줄 이유라면 몇 가지 정도 짐작은 갔다.

흑마법 사용으로 검은 가지에 붙잡힌 흑마법사는 식민지에 유배되어 말라죽거나, 검은 가지의 일원이 되어 싸우다 죽거나, 끝까지 반항하다 처형되거나, 이 세 가지의 결말로 귀결된다.

구성원의 사망률이 비교적 높은 이상, 아마도 검은 가지로 포섭하기 위한 밑작업일 터였다.

아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티엘의 눈매가 고울리가 없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날을 세우는 티엘의 분위기에, 이제껏 헤실헤실 웃으며 대해주던 리아도 조금 어렵다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됀다고. 잡아먹거나 제물로 바치는건 아니니까. 상처부터 제대로 치료 해야지."

"내버려 두세요.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하아, 그래.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신용이 안가겠지. 그래도 일단 같이 좀 갈까? 아, 아프면 말해야돼?"

리아는 가시돋힌 티엘의 말에 혀를 차면서도 조심스레 티엘을 안아들었다.

뻣뻣하게 고집을 피우고는 있지만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깨문 입술 사이로 숨막히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끝내 아프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금니가 바스라져라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으면서도, 결코 나약한 소리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눈에 선했다.

"하아, 너도 참 독하네······. 실은 우리 다른 곳으로 파견나가는 거였거든. 너랑은 순전히 운이 나빠서 만난 셈인데, 그래서 오늘은 기사단에 공문을 보내고 내일 오후에 기사단으로 출발할거야. 너는 아마 따로 단장님을 만나러 갈 거고."

"그래서요?"

"어······. 따로 움직일 시간은 주기 힘들거야. 지금부터 우리가 예약해둔 여관으로 갈 거니까, 혹시 다른 용건 있으면 거길 먼저 들러도 좋거든. 어떻게 할래?"

일정은 별로 관심없이 듣던 티엘의 눈에 문득 생기가 돌았다.

티엘은 조금 주저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금붙이같은 것이라면 없어도 상관없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두고 온 짐이 있어요. 그것만 챙겨오면 아무래도 좋아요."

"짐?"

여관에 놓고 온 몇 안되는 짐 속에는 아첼의 유품인 목걸이가 남아있었다.

두 개의 영장은 생령과 싸울 때 필요하기에 들고 나왔지만, 혹여 싸우는 도중 줄이라도 끊어져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팬던트만은 언제나 자신의 방에 놓아둔 채 나왔다.

활과 마법서, 그리고 목걸이.

아첼을 추억하기 위한 마지막 물건들은, 어찌보면 지금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과연 그것을 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반쯤 죽은 채로 살아가는 티엘을 현세에 붙들어주는 물건들인 것을.

"유리엘 거리쪽······. 네, 이쪽이에요."

티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길을 안내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어설프게 함정으로 유도해봤자 의미없는 반항으로 보일것이다. 게다가 티엘이 설치해둔 함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안되는 결계를 지나치며 결계석으로 삼은 매개물을 확인할 때마다 리아의 탄성이 들려왔다.

"이야아, 너 대단하구나. 환각결계에 물리결계까지······. 독학으로는 무리인데, 가르쳐준 사람이 있지?"

"······있었죠."

"어떤 사람이었어? 흠, 이런 제자라면 거의 확실하게 '문'에 넣을 수 있을텐데 아쉽네."

리아는 티엘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곁에 있던 올로비스가 몇 번씩 눈치를 주었지만, 나름대로 티엘과 친해져 보려는 노력을 시도하던 리아는 끝내 알아채질 못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면 안될까요······?"

결국 몇 번째인지 모를 리아의 목소리를 가로막은 티엘은 침울하게 고개를 떨궜다.

"왜, 왜그래?"

놀란 리아가 자신의 목을 두른 티엘의 손목을 두드렸다.

하지만 티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복받쳐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대수롭지않은 대화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흔드는 리아의 말이 아물어가던 상처를 찌르는 것 같았다.

일부러 기억속에 묻어두고 있었던 이름을 억지로 끄집어낸 티엘은 그동안 철저하게 죽여왔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올로비스는 리아를 보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티엘이 소리죽여 우는것을 깨달은 리아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티엘은 그리 오랫동안 울지는 않았다.

몇 분 뒤 고개를 든 티엘의 얼굴에는 눈물자국 같은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가 맺힌 입술이나 조금 충혈된 눈만 아니라면 잠시 잠들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끔한 얼굴이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티엘은 생기 없는 눈으로 자신이 그동안 머물렀던 여관을 가리켰다.

"저 여관, 2층 마지막 방에 조그만 가방 안에 들어있어요."

"정말 그거면 돼? 다른건 필요없어?"

"네."

리아는 조금 주저하다 티엘을 근처에 앉혀놓은 뒤, 올로비스를 두고 홀로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리아는 사정을 설명하고 여관 주인에게 열쇠를 건네받으며 여관 주인에게 그동안 티엘의 행적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그저 조촐한 식사를 할 때 외에는 오로지 죽은 듯이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마저도 새벽에 들어와 낮동안 잠시 머무는 정도 뿐이었다는 것.

교우관계는 커녕, 다른 사람과의 접촉 자체가 거의 없어 보였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때문에 볼품없는 열쇠를 건네받아 잠겨있던 문을 연 리아는 잠시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티엘처럼 체구가 작은 소녀가 아니면 몸을 뻗는 것조차 어려울 것만 같은 어둡고 좁은 공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생활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거의 관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정도로 쓸쓸한 공간.

원래 창고로 쓰던 방을 티엘이 부탁해서 침대나 들여놓고 방으로 내줬다고 했던가.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그 흔한 꽃병이나 그림 하나도 없다.

옷장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자 하나에는 열 여섯 소녀다운 예쁜 옷은 커녕, 어둠에 녹아들기 위한 시커먼 옷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피로 물든 붕대로 가득 찬 쓰레기통과 진통제로 보이는 약병들이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한두 달 지낸 것도 아니라는데,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지독하게 차갑고 쓸쓸한 방이었다.

"대체 여기서 몇 년이나 산 거야······? 한 달만 이런 데 지내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이거······."

방 안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물건은 티엘이 말했던 조그만 가방 하나뿐이었다.

어쩐지, 방 곳곳에서 티엘의 한탄과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릴것 같은 착각이 리아를 덮쳤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런 곳에서 조용히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리아는 조금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리아는 티엘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리고 저 아이가 정말 어디에도 마음붙일 곳이 없었다는 사실에 내심 한숨을 삼켰다.

"이제 갈까?"

끄덕끄덕.

이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방 안에서 꺼낸 목걸이를 소중하게 감싸쥔 티엘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 두 사람이 들을 수 있었던 티엘의 대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기사가 머물던 여관에 들어선 티엘은, 마치 죽은 것처럼 하루를 꼬박 잠들어버렸다.

마치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꿈 속으로 도피하는 것처럼.




* * *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리아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침대 끄트머리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티엘이었다.

티엘은 아직 어두운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둔 무언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리아가 깨어났다는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리아와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인형처럼 생기없던 티엘에게서, 지금만큼은 정말 살아있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생동감은 그리 유쾌한 계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를 보고 겁에 질린 듯, 품 안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종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슬프고 괴로운 감정이 가득했다.

열 때문에 헛것이라도 보는걸까, 아니면 무언가 마음을 꺾어버릴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그러나 리아가 티엘을 부르려던 순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괴로워하던 티엘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껏 거칠어진 숨으로 헐떡이며 무릎 위에 놓인 것을 움켜쥐던 티엘은 뜨거운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떨궜다.

순간 티엘의 팔 너머로 그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새벽, 리아가 가져다 준 가방 속에서 나왔던 그 목걸이였다.

분위기에 눌려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던 리아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다시 자는 척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침대가 삐걱이며 넋을 잃고 있었던 티엘의 의식을 끌어당겼다.

리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티엘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생기가 빠져나갔다.

다시 인형같은 얼굴로 되돌아온 티엘은 조금 어색한 손길로 무릎에 있던 목걸이를 다시 옷 안쪽으로 숨겼다.

리아는 무언가 발을 들여놓아선 안될 곳을 침입한 기분이 들어 조금 마음이 켕겼다.

"아하하하······. 잘 잤어······?"

한참을 머뭇거리던 리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어 아침인사를 건넸다.

티엘의 눈에서 희미한 감정이 빠르게 흘러갔다.

분노에서 원망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허까지.

저런 눈이라면 리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저주와도 같은 무언가에 얽메여 주위로 눈을 돌릴 여유도, 스스로를 살필 이유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사정을 모르니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피곤하네.'

도망칠 곳을 찾던 리아는 우선 잠을 깨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밤 동안 묵은 공기가 바깥의 공기와 뒤섞이며 제법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던 리아는 다소 활기를 되찾고 가슴을 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도 대강 쓸어넘기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대강 문지르던 리아는 문득 티엘을 떠올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는 아직 잠도 덜깨고 어두워서 그냥 지나쳤지만, 티엘의 머리칼은 제대로 감은 게 아니라 그냥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해초처럼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에서 지금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설마 그 상처를 달고 걸어다닌걸까. 흘끗 곁눈질을 해보니 허벅지에 감아둔 붕대에 옅은 핏자국이 떠올라있었다.

"너 설마 그 다리로 걸어다닌거야?"

긍정도 부정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미 답은 나와있었다.

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티엘에게 다가갔다.

리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마치 사로잡힌 새처럼 티엘의 근육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짐짓 못본 척, 마른 수건을 꺼내 티엘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하아-. 너도 참 피곤하게 사네. 아프지도 않았어?"

"아픔은 잠시 재워두면 돼요."

"얘가? 그러다 정말 큰일나!"

"그럼 어때요. 따로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의 몸을, 생명을, 마치 기계나 도구처럼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듣는 리아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역시 그 작은 골방에서 몇 년이나 살면서 살짝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밝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다보면 조금쯤은 생기를 되찾을까.

리아는 죽은 채 사는 듯한 소녀의 머리를 빗기며 익숙치 않은 고민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기운좀 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 기운 날 만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유배나 처형은 없어. 아직 침식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마령이 들러붙지도 않았지? 뭐, 이제까지와는 달리 좀 빡빡하긴 하지만, 우리들도 아직 앞길 창창한 너를 죽이는건 반대거든."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라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훨씬 무른 조건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많은 마법사들에게 입단을 권유해도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수는 얼마 안된다는 말이다.

검은 가지의 기사의 수는 보통 스물 안팎이다.

많을 때라고 해봐야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기사단.

은연중에 쓴웃음을 품은 눈빛이 리아를 향했다.

조금 찔린다는 듯한 표정을 한 리아는 무안한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며 시선을 피했다.

"그- 휴우, 그래. 사실 다들 오래 못버티고 죽어나가. 그래서 더욱 악명이 높은 거겠지. 그래도 우리 기사단 규정은 은근히 헐렁하니까 그리 갑갑하지는 않아. 거기서 사람 냄새도 좀 맡고, 부대끼고, 그러다 보면 무시무시한 악명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보 멍청이들 집단으로 보일걸? 엇차아, 자! 됐다."

리아는 티엘의 머리를 한데 묶는 것으로 손질을 끝내고 물러났다.

늘상 머리를 풀고 지내왔던지라, 뺨이나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제법 괜찮은데? 음······. 티엘이라고 했지. 몇 살 정도 먹었어?"

"열 여섯이에요."

"엑, 진짜?"

어려보인다 싶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린 나이에 조금 이상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마력이 강한 것 정도라면야 어린 나이에도 고위급 생령과 계약한 경우라면 쉽게 설명이 되지만, 전투중의 빠른 대응까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저 나이에 리아와 비슷할 정도로 전투감각이 길러져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의미이리라.

그러나 점차 그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리아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잠시 티엘을 노려보던 리아는 대뜸 그녀의 이마를 한 번 쥐어박았다. 따악, 하고 제법 아플 법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 갑자기 무슨 짓-"

따악!

"겨우 열여섯살짜리 애가 무슨 날마다 죽상만 짓고 있는거얏! 얼굴 좀 펴고 살앗!"

얻어맞은 티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리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리아는 물러서는 대신 호된 알밤으로 티엘의 시선을 꺾어놓았다.

어제부터 느끼는거지만, 이 녀석은 지나치게 어두운 성격인것 같다.

물론 나잇값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게 보기 좋은건 아니지만, 이렇게 곧 죽을것처럼 푹 썩어있는 것도 나잇값 못하는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리아는 그 때부터 일부러 장난을 치듯 티엘을 콕콕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같은 여자끼리다.

약간 짓궂은 장난으로 조금쯤 마음의 벽을 허물면 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한 순간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거나 애늙은이처럼 꾹꾹 참다보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떤 방식이라도, 가슴에 쌓인 것을 풀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물론 순식간에 서너 대나 얻어맞은 티엘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그만해요······!"

다행히 리아의 의도는 조금씩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꽁 하니 얼어있던 티엘의 가면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아침도 먹지 않은 이른 시간,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손짓과 입씨름을 반복하며 표정이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왔다.

사실 한 사람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끝없이 장난을 걸어오는데, 그것을 언제까지고 무시하기란 쉬운 일도 아니다.

더구나 리아가 노리는 것은 화를 내던, 장난에 장단을 맞추던,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행동'을 끌어내려는 것이었으니 어떻게 하더라도 티엘이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티엘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벽을 세워왔던 티엘에게, 억지로 그 벽을 허물며 끼어들어오는 리아의 존재는 분명 특별한 것이었다.

얼마만에 복잡한 계산 없이 마음 가는대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일까.

더욱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는, 똑같은 흑마법사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시덥잖은 고충들, 고민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흠, 뒷골목 건달패들이랑 손 안잡은거 정말 잘하긴 했어. 그 놈들은 뜯어먹어야 할 놈들이지 거래 대상은 아니지. 흠흠."

"······기사가 입에 담기에 바람직한 이야기는 아니네요."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는데. 애초에 우리 기사단에는 기사다운 기사는 없는걸? 술통 하나씩 안겨주면 하룻밤도 안가서 전부 비워버릴 주정뱅이가 한가득인데."

"물리적으로 뱃속에 들어가는건가요, 그거?"

"마시다 보면 다 들어 가. 아, 그러고보니 슬슬 배도 고프네. 뭐 먹고싶은 건 없어?"

티엘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약 한 시간만에 얻은 장족의 발전이다.

리아는 흔쾌히 티엘이 고민을 마치도록 기다리며 내심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잠시 후, 티엘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좋다'였다.

'아직 멀었구만. 아직도 자기 주장을 하는게 익숙치 않은거겠지?'

딱히 식욕이 당기는 것도 아니고, 뭔가 특별한 음식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는데 맥빠진 대답으로 보답받은 리아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티엘. 너 옷 없지?"

"네? 네······."

"나가자. 옷부터 사고, 그 다음에 마른 빵만 먹으면서 맛이 가버린 입에 맛있는 것좀 물려주지! 이 언니가 오늘 산다!"

"자, 잠깐-, 잠깐만요!"

거절하는 말은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다.

티엘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리아는 다친 상처 때문에 거동이 불편할 티엘을 막무가내로 들쳐업고 방을 나섰다.

인간의 모습을 한 산사태나 해일의 등에 업힌 기분이 들 지경이다.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간 바닥에 질질 끌려갈 판이었던 티엘은 떨떠름한 얼굴로나마 리아의 목에 매달렸다.

그러자 리아의 웃음소리가 시원스레 터져나왔다.

" 꺄하하하하! 너 살좀 찌워야겠다?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잖아."

그야 먹는 것도 부실하게 먹고, 하루가 멀다하고 몸을 혹사시키며, 수시로 악몽을 꿔 잠조자 제대로 자지 못하는 신경쇠약 상태이니 살이 찌는게 이상한 일이다.

덕분에 리아는 더더욱 티엘을 사람답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듯이 달린 끝에 처음으로 리아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옷가게였다.

정확히는 가이신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티엘로서는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커다란 의류점이었다.

당황한 티엘은 리아의 어깨를 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 리아? 다, 다른데로 가면······."

"왜? 예쁜 옷 많은데."

"여긴 너무 화려하잖아요······!"

"그래? 그럼 무조건 여기서 골라. 칙칙한 색으로 고르면 혼내준다!"

티엘은 눈앞에 펼쳐진 색색의 옷들 사이에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슬쩍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색상의 옷들이 부담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원래 레가야에서도 화려한 옷을 그렇게 즐기지 않았던 티엘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단색으로 수수하고 깔끔한 옷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가게에서 가장 수수한 옷조차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화려한 색으로 눈이 아팠다.

무채색 계열의 바탕색을 가진 옷조차도 주렁주렁 달린 장식 때문에 오히려 번잡스러워 보였다.

"내가 골라줄까? 이런건 어때?"

보다못한 리아가 옷 한 벌을 골라 티엘에게 내밀었다.

티엘은 단번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옷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아찔한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에 살짝 달라붙는 진홍빛의 원피스는 한쪽 어깨부터 등 전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치맛자락에도 길게 옆트임이 들어가 한쪽 다리를 절반 넘게 노출하는 등, 자신의 몸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소화하기 어려울 옷이었다.

"그, 그냥 제가 고를게요!"

"소, 손님? 이 분께는 보다 청초한 느낌의 옷이 어,어울릴것 같은데요······."

"그래요??"

전반적으로 고혹적이고 색기를 강조하는 옷이었기에 아직 성장중인 티엘에게는 어울리기 힘든 옷이었다.

애초에 티엘은 제정신인 이상 저런 옷을 걸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옆에 따라붙었던 종업원도 난처하게 웃으며 티엘을 거들어주고서야 겨우 납득한 리아는 못내 섭섭해하며 한 발 물러주었다.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린 티엘은 조금 전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옷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리아에게 맡겨뒀다간 무슨 재앙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시간이 약간 흐른 후 겨우 옷 한벌을 골라낸 티엘은 한숨을 쉬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 다리의 상처에 주의하며 주섬주섬 옷을 벗고 있자니 리아의 목소리가 탈의실 너머로 들려왔다.

"여자애가 옷도 예쁘게 좀 입어야지. 얼굴은 참 예쁜데, 옷이 너무 안예뻐서 마음에 안들었거든. 이왕이면 팔랑팔랑한 치마로 여성미를 풍겨보자?"

"······치마같은거 입으면 도약주문은 어떻게 쓰나요······."

"또 그런다, 또. 열 여섯이나 먹고도 머릿속에 모래바람이 날릴 정도로 삭막하니. 그 나이에는말야, 연애나 꿈 같은 달콤한 걸로 가득해야하는거야. 안돼겠다. 팔람에 보낼 때까지는 쭉 이렇게 입혀야겠네."

"너무해······."

"잔말말고, 나와봐. 어울리나 보자."

티엘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탈의실 문을 열었다.

티엘이 고른 옷은 연보라색 바탕에 흰 칼라와 허리끈으로 강조를 준 원피스였다.

평범하게 셔츠와 바지를 고르려던 시도조차 리아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된 끝에 간신히 도달한 타협점이었다.

리아의 바람과는 달리 양 어깨가 파인 것을 제외하면 노출이 거의 없는 수수한 옷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몸매 덕분에 섬세하면서도 깨끗한 분위기가 잘 드러났다.

네 갈래로 뾰족하게 갈라지며 살짝 겹쳐진 치맛자락은 이슬을 머금은 수국의 꽃잎을 연상시켰다.

같이 있던 머리끈으로 한데 묶어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도 그런 은은한 아름다움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리아는 티엘의 주위를 한바퀴 돌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거 봐. 잘 어울리네. 일부러 눈동자랑 맞춘거야? 예쁜 보라색이라 질투날 정도로 부러워."

마침 점원이 다가와 전신거울을 옆에 놓아주었다.

티엘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죽 훑어보았다.

조금 얼굴이 어두워보이긴 했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진 않았다.

그러나 삼 년 동안 키도 조금 자랐고,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얼굴도 이제는 제법 어른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거울 너머에서 이 쪽을 바라보는 투명한 보라색의 눈은 조금 놀라워 하는 기색으로 연신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눈이지만 어째서인지 조금 낯설었다.

잠시 이유를 생각해보던 티엘은 이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삼 년간 거울을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꾸미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는 티엘은 말 그대로 삼 년 만에야 자신의 얼굴을 다시 만난 셈이었다.

"자자, 그것만 입어보고 말거야? 이제 다른것도 입어봐야지."

티엘이 다시 우울한 기분으로 빠져들어가려던 것을 눈치챈 리아가 디엘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슬슬 티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감을 잡아가는 듯한 모습이다. 리아의 한 마디에 막 어두워지려던 티엘의 얼굴이 다시 새하얗게 질렸다.

울상을 지은 티엘이 뭐라고 항의해보려 했지만, 어느새 한 구석으로 달려가버린 리아는 다른 옷들을 주섬주섬 꺼내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점차 리아가 집어드는 옷의 면적이 줄어드는 것을 깨달은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굳혔다.

저 옷을 입으라 강요한다면 마법을 써서라도 도망치고 말겠다고.



* * *



한참 뒤, 티엘은 리아의 등에 업혀 간신히 의류점을 빠져나왔다.

가게의 옷 중 삼분의 일은 몸에 대보고, 그 중 다시 삼분의 일 가량은 입어본 티엘은 차라리 마령밭 한 가운데 들어가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 지쳐있었다.

그 난리통에 리아가 티엘의 몫으로 산 옷은 무려 열 두 벌이었다. 헌 옷은 리아의 강경한 주장으로 결국 쓰레기통에 들어갔고, 가장 처음 티엘이 골랐던 연보라빛 원피스를 제외한 열 한 벌의 옷은 여관으로 보내달라 주문한 리아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그럴듯해 보이는 음식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뭐 싫어하거나 못먹는 거 있어? 좋아하는 거는?"

"아뇨, 아무거나 상관 없어요."

꾸욱, 하고 허벅지를 받치던 팔이 조여들었다. 상처가 있는 쪽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압박감만큼은 충분할 정도로 전해졌다.

"좋아하는거 빨리 셋 이상 안대면 옷가게로 돌아간다?"

"보리빵, 치즈를 곁들인 감자, 사과 파이."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한 티엘의 입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음식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어지간히 옷 고르는게 싫은 모양이다.

"보리빵? 살 안찌는 이유 대충 알겠다, 알겠어. 좋아, 어디 보리빵 잘 하는 집 있는지 찾아볼까?"

늦은 아침이라기보다는 이른 점심에 가까워질 무렵, 마침내 두 사람은 어느 음식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차례쯤 탐문을 거듭하다 한 아저씨가 추천해준 집이었다.

그동안 줄곧 티엘을 업은 상태였던 리아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오랜 시간 티엘을 업고 다닌 피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려서 걷겠다고 우겨대는 티엘과 옥신각신하며 소모한 체력이 더 많을 터였다.

레몬 과즙을 살짝 탄 물로 더위와 갈증을 가라앉히면서도 맞은 편에 있는 고집쟁이를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영 사랑스럽지가 않은 녀석 같으니."

"딱히 사랑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런 점이 사랑스럽지 않다는거야."

리아는 투덜거리면서 재빨리 음식을 주문했다.

보리빵 이인분, 오븐에 구운 통감자 하나, 베이컨을 곁들인 달걀, 매콤한 양념을 발라 재벌구이한 훈제 닭.

두 사람이 먹기에는 제법 많은 양인데도 주문하는 모습에는 거침이 없었다.

종업원은 주문사항을 주방에 알린 뒤, 비어있던 리아의 잔에 다시 레몬수를 채워놓은 뒤에야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리아는 음료수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티엘이 살짝 입만 적신데 비해, 두 번째 잔까지 시원스럽게 비워버린 리아는 전채로 나온 오렌지 타르트를 우물거렸다.

그러다 문득 물잔만 만지작거리던 티엘이 눈에 밟히는지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티엘쪽으로 바짝 밀어주었다.

티엘은 순순히 타르트 하나를 집어들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으로 확 퍼졌다.

이 역시, 제법 오래간만에 맛보는 것이었다.

"리아."

"응?"

"오늘 고마웠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격렬하게 싸웠던 상대지만, 티엘의 얼굴에는 조금 어색하게나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직 마음을 활짝 연 것도,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 것도 아니지만, 리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후후, 그런 말을 뭘 그렇게 심각하게 해? 그래도 이제 좀 얼굴이 밝아진 것 같으니 다행이야.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웃는게 좋은거야. 내일 내가 울지 웃을지 모른다면, 적어도 오늘만큼은 활짝 웃어야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잠시 손좀 내밀어 볼래?"

"······왜요?"

물론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고는 해도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 까지는 아니었다.

장난처럼 보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 정도로 경계심을 풀었다면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솔직히 스스럼없이 손을 내주었다면 리아쪽에서 더 놀랐을 터였다.

그러나 딱히 그런 생각은 없었던 리아는 한발 늦게 또 장난치려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아니, 뭐 이상한 거 하려는건 아니니까 한 번만 믿어주면 안될까?"

미심쩍은 눈빛, 쭈뼛거리는 손끝. 괜한 말로 더 의심을 산 듯 했다.

"저기? 진짜라니까? 믿어달라니까?"

경계심 가득한 손이 주춤거리며 가까스로 내밀어졌다.

손가락 끝에 살짝 마력을 모은 리아는 티엘의 손바닥을 잡고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선명한 붉은 색의 마력이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지며 한 줄의 문장을 이뤄갔다.

리아가 적은 것은 뜻밖에도 공화국의 문자가 아니었다.

시엘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대륙 동부의 국가, 리가르트의 문자였다.

"키페······, 디 이엘람?"

"어라? 너 왕국문자 읽을 줄 알아?"

티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고위 귀족층이라면 대륙에서 쓰는 제국 공용어와 리가르트의 왕국어, 그리고 신흥강국인 피앙투스의 공화국어 정도는 반드시 익힌다. 당연히 왕국문자 역시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리아가 왕국문자를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키페 디 이엘람.

직역하자면 '순간을 즐겨라'.

그 것은 십 년 째 내전으로 어지러운 상황인 왕국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리가르트 출신으로 보이지 않는 리아에게는 제법 어울릴 듯한 말이긴 했지만.

티엘의 시선을 눈치챈 리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내가 읽고 쓸 수 있는 왕국문자는 이게 전부야. 로비가 알려준거거든. 그 녀석, 왕국 출신이야. 말이 어색했지? 스무 살 넘어서 처음부터 말을 배우려니 어려운 모양이더라."

"왕국에서 온 분이었군요."

"로비 이야기니까 내가 맘대로 해주긴 어렵지? 하지만 그 녀석도 제법 험하게 구르다 들어온 녀석이거든. 그런데도 나한테 이 말을 가르쳐주더라고."

리아는 다시 한 번 허공에 똑같은 글귀를 써 넣었다. 순간을 즐겨라.

"삶은 한 번 밖에 없으니까 웃으며 살라고, 그렇게 말하더라. 그 때 마침 좀 힘든 일이 있었는데 내전 사이에 끼여 죽도록 구르다 온 사람이 지금을 즐기래. 어떻게 불평을 할 수가 있겠어? 그러다보니 어느새 이 말이 머릿속에 붙어버렸지. 키페 디 이엘람, 현재를 즐겨라."

티엘의 손가락이 손바닥 위에 적힌 글자 위를 더듬었다.

마력으로 쓰여진 선홍빛 글자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리아가 손을 놓아준 뒤에도 손바닥의 글자들을 바라보던 티엘이 속삭이듯 글귀를 읽었다.

"순간을, 현재를, 즐긴다······."

몇 차례 곱씹는 동안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울었다.

지금도 의자 아래나 탁자의 틈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검은 그림자가 얼비쳐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과거에 묶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에게, 현재라는 말은 너무나 무거웠다.

겨우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조차 어느새 잃어버린 티엘은 문득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묶어두었던 끈을 풀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씁쓸한 감상을 씻어내렸다.

순간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티엘의 손바닥이 리아의 눈길을 끌었다.

순식간에 지나쳐버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리아가 새겨놓았던 글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뒤바뀌어 있었다.

'씨르페 에오 디엘라이렌······.'

왕국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국어나 공화국어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학자나 마법사 등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오래된 말, 이피안어.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한 문자, 이사드.

청백색의 마력으로 새겨진 그 글귀의 의미는 '기억은 죽지 않는다'.

마치 '현재를 살아라'라는 리아의 말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글귀였다.

그러나 잠시 후 아무렇지 않게 다시 탁자에 내려놓는 손에는 더이상 아무런 글귀도 남아있지 않았다.

잘못 본 것일까.

아니, 문자의 형태라면 몰라도, 순간적으로 빛난 마력의 색까지 착각할리는 없었다.

스펠글로스의 선홍빛 마력에는 누구보다 익숙한 것이 리아다.

조금 전의 청백색 빛은 오히려 전날 싸우면서 보여주었던, 티엘 자신의 마력에 가까웠다.

"왔네요."

"응?"

잠시 멍하니 사라져버린 글자를 생각하던 리아는 문득 티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음식, 왔어요."

"응, 어, 그래. 고마워."

테이블 곁에는 리아가 주문했던 음식들이 한가득 실린 작은 손수레가 도착해 있었다.

막 접시를 받아들던 티엘은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잠시 잊어두자.'

순순히 고민을 집어치운 리아는 다시금 쾌활한 태도로 자신의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티엘의 움직임 속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것처럼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굳이 상처를 헤집어 팔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라면, 언젠가 한 번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아직 티엘이 어떤 상처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과거에 묻혀 살아가는 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작가의말

뭐, 당연히 오리지널은 카르페 디엠이죠 하하하.

왕국은 본문에 나왔듯 10년째 내전중이라 정말 개판입니다.  올로비스도 그 내전 때문에 나라를 버린 케이스.


내일 울지 모른다면 오늘이라도 웃어라... 이건 초안때 이미 써둔 글이었는데, 몇 년 뒤 코노스바의 아쿠아 교단에서 똑같은 교리가 나와서 조금 웃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리아는 아쿠아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들어갔을 성격이더군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42 롬곡옾눞
    작성일
    19.12.18 12:42
    No. 1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생겨 글을 남깁니다. 묘사를 보면 주인공은 주 양육자에게 단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으며, 그나마 친밀한 관계이던 사람까지 죽어서 환각 및 망상 증세까지 보이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루 전에 목숨걸고 싸우던 사람과 저렇게 급격하게 친해지는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글쎄요. 진행을 위한 소설의 허용이라기에는 제게는 좀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LWintere..
    작성일
    19.12.18 20:49
    No. 2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니 감사한 말씀입니다:)

    다소 급격하게 가까워진 것은 인정합니다8^8
    정에 굶주리고 정신적으로도 지쳐있는 나머지, 모처럼 살갑게 다가오는 상대에게 조금 끌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썼던 부분이네요.
    가능한 한 변명을 해보자면 1.리아가 티엘에게 살상이 가능한 수준의 공격은 되도록 피했다는 점, 2.리아의 나이가 아첼과 가깝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더불어 아직은 친해졌다기보다는 리아의 행동에 휩쓸리는 것에 가까운 편입니다. 아직 경계심은 남아있는 상태로 속내는 꼭 닫아두고 있다는걸 보여드리려 했지만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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