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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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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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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0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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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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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8쪽

3장-개화開花(3)

DUMMY

"아, 아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인지, 티엘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이 아득해졌다.

꿈?

악몽?

그러나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은 지금 이 광경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지독할 정도로 생생하게 항변하고 있었다.

티엘은 투명한 벽에 매달려 아첼의 이름을 불렀다.

다급하고 처절한 부름에, 평소의 아첼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금새 티엘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티엘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아첼이 그녀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던 팔이 풀썩 걲이며 바닥으로 쓰러진 아첼은 신음조차 나오지 않을 때 까지 두번 세번 피를 토했다.

순식간에 아첼 주위의 흙이 일부러 피를 쏟아 부은 것처럼 짙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갑자기 왜?

이프라이엘과 아틸리아가 있는 이상 독으로 쓰러질리는 없다.

그렇다고 사냥 도중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병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느 하나라도,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아첼의 몸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유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정말로 아첼이 죽어버릴거란 사실이다.

티엘은 더이상 아프다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쉴 새 없이 결계를 때렸다.

하지만 아첼의 결계는 절망적으로 튼튼했다. 마력을 둘러 내려치더라도 끄떡조차 하지 않을만큼.

애초에 아첼이 진심으로 티엘을 가두려 했다면, 티엘의 혼자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문 티엘은 별 수 없이 매끄러운 결계면을 기어오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무의미한 발버중에 불과했다.

축 늘어져 피투성이가 된 아첼의 기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잦아들어갔다.

회복이 아니다.

남아있는 체력마저 빠르게 소실되는 것에 가까웠다.

"아체엘! 안돼! 죽지마, 언니! 죽지마아아아!"

다급해진 티엘은 다시 한 번 결계를 후려쳤다.

제대로 마력이 담기지 않은 손에서 기어이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관절이 어긋나기라도 했는지,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 후로는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끔찍한 유폐진은 티엘을 풀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점차 작아져가는 헐떡임을 들으며 티엘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싫어······. 또 죽는거야? 또 사라지는거야? 싫어. 싫어! 그 날처럼 혼자 남겨지는건 싫어!'

"애냐!"

티엘은 필사적으로 애냐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말라버릴대로 말라버린 티엘의 마력으로 제대로 된 소환이 가능할리가 없었다. 오히려 헛된 시도로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마력까지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티엘은 펑펑 울면서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애냐! 칼! 아무도 없어요? 제발, 제발 도와달란 말이야! 언니가 죽어버릴거야! 제발 도와줘!"

아첼의 숨소리가 멎어버리는 것 같은 착각이 계속해서 티엘을 괴롭혔다.

산에서 나는 소리는 굉장히 멀리까지 퍼진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인지 하늘에 화라도 내고 싶었다.

아첼이 방음결계를 쳐놨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릴만큼 당황한 티엘은 그대로 목놓아 울어버렸다.

항쟁의 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

생사도 알 수 없는 시녀장 메리온과, 목숨을 버려가며 자신을 탈출시켜준 카릭스 경.

그 이름들 끝에 아첼의 이름이 더해지는 것인가?

미친듯이 약탈하고 죽이고 범하던 병사들.

시야를 불태우던 저주스러운 횃불과 피의 색.

배신한 아버지의 마법사와 피로 물든 숲.

죽음처럼 차가웠던 강물과 추락의 순간들.

싫다.

그 순간을 되풀이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누가 도와달란말야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공터를 뒤흔들었다.


순간, 티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작고 가벼운 것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전, 갑자기 한 방울의 마력이 티엘의 가슴을 싸늘하게 얼렸다.

그녀 자신의 마력보다도 훨씬 짙고, 차가운 은빛의 마력이었다.

그 것이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는 미처 알 수 없었지만, 티엘의 마력을 쓰는 것보다는 몇 배는 더 강력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티엘은 발치에 나뒹굴던 활을 집어들었다.

부서진 손으로는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웠지만, 아예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좋다는 심정을 담아 억지로 팔을 움직였다.

지금은 몸을 보호하는 데 마력을 돌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급하게 당긴 시위에서 제대로 빚어지지도 않은 아스트라가 성급히 날아올랐다.

"하늘의 별, 새벽을 여는 창이여!"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전부 짜낸 혼신의 아스트라가 바로 코앞에 펼쳐진 결계의 벽을 찢었다.

한 쪽 벽에 등을 붙이더라도 겨우 양 팔을 펼칠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한 순간 불어닥친 후폭풍은 티엘의 여린 전신을 거칠게 유린했다.

폭발 지점에 더 가까웠던 왼팔은 거의 피부가 날아가다시피 한 처참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티엘은 신음조차 삼킨 채로 막 부스러져가는 결계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이미 혼절해버려 의식이 없는 아첼을 힘겹게 일으켜 앉혔다.

"흐흑, 언니······. 내가 잘못했어. 언니, 언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티엘은 바들바들 떨며 귀를 아첼의 가슴에 가져갔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대로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지만, 잠시 후 아직 남아있던 가느다란 고동이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듯 불규칙적이고 약한 맥박이었다.

티엘은 망설임없이 아첼을 들쳐업었다.

자기 키의 두 배가 조금 못되는 아첼을 업으니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웠지만 그걸 돌아볼 새도 없이 미친듯이 달렸다.

마을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평소 걸어서 십여 분이 걸리는 거리를,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체격의 사람을 업고 칠 분만에 달린 것은, 그만큼 티엘의 마음이 급했다는 증거이리라.

"무, 무슨 일이니? 아첼씨 왜 그래?"

"흑, 도와, 도와주세요!"

정자에서 쉬던 어른들이 기겁하며 달려나왔다.

완전히 평정심을 잃어버린 티엘은 그 상태로 아첼을 마을까지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놀란 어른들은 황급히 그런 티엘을 붙잡았다.

이렇게 중태인 사람을 막무가내로 끌고다녀서야 악화되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티엘은 그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미친듯이 악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놔! 언니가 아프단 말이야! 이거 놔! 빨리 의사한테, 의사한테 가야돼! 놔아아!"

"지, 진정해, 티엘. 응? 조금만 진정하렴. 티몬을 불러다줄테니까 진정해. 이런다고 아첼씨가 낫는게 아니잖아."

"그 말이 맞아. 내가 가서 의사랑 불러다 줄테니 진정해. 너도 다쳤잖아."

"제발 놔줘······. 언니마저 죽어버리면 어떻해! 놔줘!"

어른들은 평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어버린 티엘을 애써 달랬다.

첫 만남에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던 아이가 애처로울 정도로 악을 쓰며 울부짖는 모습에 몇몇 어른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는 사이 한 사람은 마을로 달려내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아예 말을 타고 아델 시 방향으로 달렸다.

한 명은 쓰러진 아첼을 집안으로 옮겨 눕히고 토해낸 피를 닦아냈다.

티엘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는 내내 아첼을 따라다니며 안절부절 못했다.


잠시 뒤, 마을 사람이 불러온 티몬은 온 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산길을 뛰어올라왔다.

뭘 하다 왔는지 옷이 온통 흙투성이었고, 한 손에 벗어든 장갑은 반쯤 터진 채 얼룩덜룩하게 물들어있었다.

둘러멘 작은 망태기에는 몇가지 풀이 들어 있는걸 보니 급하게 약초를 캐러 갔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망태기에 들어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풀이었다. 설마 계곡 깊은 곳까지 뛰어갔다 온 것일까.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인사조차 없이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티몬의 뒷모습에 안타까운 시선을 나누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짐작 가요, 아넬라?"

"전혀요. 마법사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야지. 뭐 하다 다쳤는지도 모르겠어요."

티몬은 누가 아프다고 해도 직접 오는 일은 별로 없다. 이런저런 약초를 어떻게 쓰면 증세가 나아지더라 정도로 간단히 처방만 해주고 끝나는게 대부분이다.

티몬이 왕진을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일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그런 걱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티몬은 좀처럼 집 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도시로 의사를 부르러 간 사람들이 되도록 빨리 돌아오길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약간씩 붉어질 무렵 드디어 아델 시로 달려갔던 사람도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티몬과는 달리 커다란 가방을 따로 챙겨온 의사는 비쩍 마른 팔로 가방을 끌어내리며 급히 집 앞으로 달려왔다.

"아델 시의 의사 페오른 예메드입니다. 환자는 안에 있습니까?"

"네. 약초 다루는 사람이 돌보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진찰하는 동안 끓는 물을 좀 준비해 주십시오."

의사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을 끌어내렸다. 가죽 북을 두드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마을사람 하나가 거들기 위해 다가섰지만 의사는 손을 내밀어 거절했다.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집 안으로 들어온 페오른은 마침 방에서 걸어나오는 티몬과 마주쳤다.

"늦잖아, 영감! 뭐 하다 이렇게 늦어!"

"고얀 녀석. 환자는 어쩌고 나오는게야?"

"일단 안정 취하게 해줬어. 약초로 다스릴 병은 아니라서. 영감 오기만 기다렸다고."

두사람은 노인의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 정리하며 빠르게 대화를 나눴다.

남들에겐 독학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티몬의 약학은 대부분 이 의사에게 배운 것이었다.

정식 제자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약초에 대한 이해가 높아 몇 가지씩 가르쳐주다보니 이렇듯 손발을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쓸만한 제자가 탄생했다.

티몬 역시 마을에 의사가 없기에 귀찮아하면서도 꾸준히 배웠고, 덕분에 아직도 종종 연락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결국,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아는 사람부터 손이 닿기 마련이다.


꽤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본 두 사람이라 이럴 때도 일처리는 빠른 편이었다.

보통 티몬이 자기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환자가 생기면 둘 중 하나다. 전문적인 수술을 요하거나, 혹은 마법과 관련된 일이거나.

자신이 가르친 티몬의 실력은 안다.

첫눈에 봐도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페오른이라고 마법에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법병의 증상 정도는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일단 진찰부터 해야겠다. 넌 일단 야스티안하고 리펜 가루 꺼내놨다가 우려내서 가져와."

"알았어."

페오른은 가방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낸 뒤 아첼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티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환자에게 안정을 취하게 해야한단다. 잠시 나가주겠니?"

티엘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페오른은 티엘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인가를 몹시 두려워하는 듯한 상처투성이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그 눈에서는 두려움과 슬픔 외에도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물어보지 않아도, 이 아이가 일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정도로.

문득 눈에 들어온 티엘의 양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급한 불을 끄면 이 아이의 상처도 다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의사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아첼에게 다가갔다.

심하게 부서진 오른손은 별도의 치료가 필요했다.

페오른은 아첼의 손을 가볍게 잡은 뒤 마력을 흘려넣어 뼛조각을 조금씩 제자리로 맞춰갔다.

수도로 바위라도 내려친듯, 손의 뼈는 부러졌다기보다는 아예 조각조각 깨진 상태였다.

잘못 치료했다간 평생 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를 지경이었기에, 엉망으로 깨졌던 뼛조각을 다시 맞추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신경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파손된 뼛조각을 몇개 적출하고 소독약으로 한번 닦은 뒤 준비해둔 붕대로 단단히 감쌌다.

손의 상처를 돌보는 동안 티몬이 약초 끓인 물들을 가져왔다.

페오른은 손수건에 약을 적셔 아첼의 입 안에 조금씩 흘려주면서 아첼의 몸에 마력을 약간 흘려넣었다. 아첼의 몸에 마법적인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얘야. 너희 언니-맞니?-, 혹시 흑마법사인게냐?"

티엘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눈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런이런. 곤란한데. 아아, 별다른 뜻은 없단다. 내가 흑마법사를 만난적이 별로 없어서 무슨 이상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뜻이야."

페오른은 곤란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는 티엘을 보며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티엘이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뒤, 페오른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희 언니가 쓰러지기전에 무슨 일이 있었니? 쓰러진 원인을 알려면 그걸 물을수밖에 없구나."

"······마력을 평소보다 많이 썼어요."

"얼마나?"

"많이, 많이요. 제가 아첼을 화나게 해서······. 언니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아서······."

말을 하다보니 점점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의사는 얼른 손을 내저어 티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티엘은 다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페오른은 하는수없이 조심스레 방을 나오고 말았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추측이 불가능했다.

일단 과도한 마력의 사용이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보이지만, 그 이전에 생명력이 크게 약해진 게 아니라면 이정도까지 심각한 상황은 오지 않는다.

내장의 일부가 기능을 멈추고 혈액순환도 엉망으로 엉켜 자칫하면 내출혈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위급한 육체상태는 치유주문으로 돌보면 된다지만 마법적인 후유증은 상세한 정보 없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알겠어요?"

"모르겠군. 마력조사도 안되고 저 아이도 너무 흥분한 상태라 별로 들을게 없었네. 아, 혹시 환자가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

"이틀동안 산지기랑 사냥갔을걸?"

"마법사가 사냥이라······. 축적된 피로에 순간적으로 과도한 마력 사용 때문에 마력이 역류해버린건가?"

페오른은 다시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가방에서 꺼낸 약재를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일전에 아첼이 영체역류를 호전시키기 위해 만들던 것과 비슷한 재료들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몇 가지 특이한 재료도 추가로 들어갔다.

내상을 다스리는 약재와 체력회복을 도와주는 약재 등, 거의 약이란 약은 다 넣는 듯 했다.

"그거 그렇게 섞으면 너무 독하지 않아? 사람 잡는다고."

"몇 가지만 확인해보고 희석을 시키던가 해야지. 그나저나 네 놈, 정말 제자로 안들어올테냐? 남의 책이나 훔쳐가고는 써먹질 못해서 날 다시 부르고 말이야."

티몬은 코웃음을 쳤다.

"일 없어요, 일 없어. 그렇게 독한 약 환자한테 먹여대는 사람 제자는 되고싶지 않아."

마력이 역류한다는 것은 생명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라고 알고있다.

면역력은 물론이거니와, 약의 독성을 이겨낼 체력조차 심각할 정도로 깎여나간 사람에게 지나치게 강한 약들을 처방하는건 좋지 않다.

하지만 페오른은 환자의 상처를 싸맸던 붕대에 몇 가지 시약을 떨어뜨려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몇 가지 정도의 간단한 마력을 판단하는 시약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몇몇 특이한 마력 계통에는 쓸모가 있다.

막 떨어뜨린 시약중 하나가 갑작스레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이 환자에겐 원액으로 써도 되겠군."

"미쳤어, 영감?"

"독 속성의 마력을 몸에 담고있다. 이 여자라면 비소를 날걸로 먹어도 마력이 독성을 억눌러 줘. 좀 독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어."

페오른은 약재의 독성을 조절하느라 진땀을 흘리면서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저 애. 네가 치료했냐?"

"꼬맹이는 걱정 안해도 돼. 어긋난 뼈 맞춰놨고, 왼팔도 소독만 잘 해 주면 문제 없어."

"······그럼 일단 내 할 일은 끝난 거로군."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약재에 가벼운 주문을 불어넣었다.

워낙 다급하게 불려와서였을까, 아니면 어린아이의 처참한 눈빛을 목도해서였을까. 쓸데없는 탄식이, 그 한숨에 함께 섞여나오고 만다.

"이 좁은 시골 구석에서 어쩌다 이리도 감정이 흐트러진 겐지······."




* * *




아첼이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불현듯 눈을 뜬 아첼은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한낮에 쓰러져서 하루의 반을 그대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나 쓰러졌었지. 그럼 누가 날 여기에······.'

의식을 잃기 전, 전신의 피를 모조리 쏟아낼 기새로 피를 토했다는 것은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티엘이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는 것도.

입맛이 굉장히 썼다.


아첼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을 들어올렸다.

희미한 달빛에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아첼 자신의 방이었다.

엉망으로 부서졌던 오른손도 갑갑할 정도로 붕대가 감겨있고, 그밖에 뭔가 약을 먹인 듯 입안이 깔깔하면서도 떫고 쓴 향이 간간히 올라온다.

물이라도 마실까, 무심결에 몸을 일으키려던 아첼은 문득 바로 곁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를 발견했다.

침대 곁에 붙어앉은채 졸고있는 티엘이었다.

얼마나 울고 소리친 것일까.

어두운 달빛만으로도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그런 주제에 손에는 반쯤 마른 수건이, 곁에는 큼직한 세숫대야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아첼은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의식이 없는 동안 열이라도 올랐던 것인지, 이마와 머리칼은 아직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으응······. 아!"

꾸벅꾸벅, 불안하게 졸던 티엘이 화들짝 눈을 떴다.

저 스스로도 기진맥진 할 정도로 힘을 뺀 주제에 밤새도록 병간호를 하다니, 아마도 본인이 고집을 부린 것이겠지만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했다.

"아, 아, 아첼? 정신 든거야? 괜찮아? 아픈데 없어?"

워낙 소리를 지르고 울다보니 목이 꽉 잠겨 쉰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첼은 눈을 티엘과 눈이 마주치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찔끔, 불안하게 떨리던 티엘의 눈동자가 점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자물쇠가 그녀의 입술을 단단히 옭아매고 만다.

"무슨 수로 내려온거니."

아첼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나마 티엘에게 향했던 시선도 무감정하게 정면으로 돌려버렸다. 마치 티엘따위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티엘은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앞으로는 미움받는 일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티엘은 몇 번이나 주저하면서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첼······."

"뭐가?"

"저······."

"어차피 이 위에서도 같은 주제로 싸웠고, 서로 입창차는 조금도 좁히질 못했지. 미안하다고 생각해? 이런 일, 정말 다시는 없을 거라고 할 수 있어?"

티엘은 풀이 죽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아첼의 말 대로였다.

미안하다고?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 번 생령과 맺은 계약은 어느 하나가 죽기 전엔 끊을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생령을 받아들인 흑마법사는, 그 후로는 점점 더 많은 생령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아첼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짓을 저질러버린 자신이, 이제와서 무슨 낯으로 사과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은, 있었다.

"······많이 아픈거야?"

"뭐······?"

"많이 아팠던거지? 나 때문에, 나 같은 거 때문에······."

아첼은 저도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알고있다.

자신은 티엘에게 화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을.

어린 시절, 첫 스승의 문하를 나와 만나게 된 마음 여린 소녀.

잊고있었던 가족의 따뜻함과 애정을 가르쳐준, 또 하나의 생명을 준 아이.

어쩌면 스물 두살에 레가야의 차석 궁정마도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에 걸맞는 실력을 기른 이유이기도 한 아이였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런 때조차 냉정해지지 못한다.

얼굴을 덮었던 가면이 무너졌다.

표정을 무너뜨린 아첼은 눈을 지그시 감고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의기소침해진 티엘을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 아니야."

아첼은 쓸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가만히 왼손을 뻗어 티엘의 손을 찾아 쥐었다.

깊은 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쉬운 시간.

밤의 마력때문일까? 어느순간 아첼은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날, 기억할거야. 레가야를 떠나던 날, 아르타야까지 도망쳤던 그 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너를 보고, 난 너를 구하기 위해 같이 뛰어들었어."

"아첼도, 카제린 강으로?"

"응, 나도 그때 절벽으로 뛰어내렸어. 네가 물에 빠지기 전에 간신히 손을 잡았고, 그리고 아르타야로 갔지."

아첼의 말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뛰어내린 것과 아르타야로 간 것 사이에 연결점이 없었다.

하지만 아첼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네게는 그저 아르타야의 국경이라고만 했지만, 그 날 밤 우리가 가로지른 거리는 단순히 직선거리로만 해도 쉼없이 말을 타고 달려서 며칠이나 걸리는 거리지. 아니, 아르타야는 북부와 중부지역에 산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 달은 꼬박 걸릴지도 몰라. 그걸 가능하게 해준건, 조금 반칙을 썼기 때문이야."

"반칙······."

"공간이동은 고위 주문, 그것도 해당 속성의 마력을 요구하는 주문이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데리고 있는 생령들중에 시공간속성을 가진 생령은 없어.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하지만 사실, 하나가 더 있어. 대정령, 실리안."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 옛 기억을 되짚었다.

스물 두 해, 그리고 그 중에서 마법사로 산 시간은 약 절반.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아첼이 실리안의 힘을 빌린 것은 단 두 번 뿐이었다.


대정령 실리안.

그 속성은 '시공의 여행자'.

공간을 비트는 힘을 지닌 매우 강력한 생령이었지만, 실리안은 아첼에게 힘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계약을 맺은 이후, 단 한 번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며, 처음으로 계약을 한 날, 그 대가로 아첼의 수명을 잘라가고 말았다.

그 날, 아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거래'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적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와 나, 두 사람이 함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초장거리의 공간도약을 하던가, 아니면 둘 모두 강바닥에 부딪혀 죽던가. 그 사이에서의 선택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건 알겠지?"

다행히 두 번째로 실리안과 목숨을 건 '거래'를 마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티엘을 찾아낸 순간, 티엘은 이미 절벽으로 몸을 던진 직후였다.

당황한 아첼은 앞뒤 잴 것 없이 병사들을 제치고 뛰어내리며 실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부른 그 순간에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이미 실리안은 그녀에게 막대한 마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부지불식간에 허공에 새겨진 화려한 마법진이 티엘과 아첼을 감싼 뒤, 잠시 후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티엘의 모습과 아르타야의 한적한 풍경이었다.

"그 날 깎여나간건 대량의 생명력과 마력이었어. 죽지 않은게 천만 다행일 정도였고, 아마 수명도 제법 깎였을테지. 기억하지? 우리가 이 마을에서 처음 맞은 아침에 역류를 일으켰던거. 그 때는 그럭저럭 쉽게 넘겼지만, 몇 달이나 지나도 아직 충분히 회복되진 않은거야. 아직 몸 안쪽은 엉망이야. 그러다보니 고작 마음이 흐트러진 걸로 내상을 입은거고. 따지고보면 이건 전부 그 때 내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 때문이라는거야."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실리안을 부를테니까. 그만, 또 울지 말고. 나쁜 거래도 아니었어. 다만······. 네게는 그런 일이 없길 바랬는데. 그건 좀 아쉽다고나 할까."

정확히 얼마나 수명이 줄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될지도 모른다.

그저 어렴풋이 자신의 시간중 일부가 잘려나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첼은 잔기침을 몇 번 했다. 티엘은 얼른 눈물을 닦고 준비해뒀던 약을 아첼에게 내밀었다.

아첼은 탁한 암록색의 액체를 단숨에 비웠다.

무척이나 쓰고 떫은 맛이었지만 얼굴은 조금도 찌푸리지 않았다.

아첼은 깨끗하게 비운 약그릇을 내려놓다 문득 생각난듯 티엘에게 부탁했다.

"그 아이, 불러볼래?"

"······애냐를 말하는거야?"

"응."

티엘은 조금 주저하다 손을 모아 애냐를 불렀다. 이불 위로 하얗게 마법진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밝은 빛 아래서만 희미한 그림자처럼 보이던 애냐의 모습이 조그만 촛불에 비칠 뿐인데도 조금이나마 눈에 들어왔다.

"역시 자랐구나. 생각보다 많이 컸는데."

"벌써?"

"요정이면 성장하는 데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하진 않을테니까."

애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두 사람 주위를 몇 바퀴씩 날아다녔다.

네다섯 바퀴를 돈 뒤 내려앉은 곳은 티엘의 정수리였는데, 티엘이 손바닥을 가져가자 그 위로 얌전히 옮겨앉는걸 보면 꽤나 쾌활한 성격인 듯 했다.

"생령들은 마력을 먹고 살아. 마법사나 다른 생령의 마력, 혹은 운이 좋다면 다른 영의 심장석을 먹고 성장하지. 아까 네 마력을 먹고 이만큼 자란거야."

아첼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티엘은 순간적으로 낮의 참상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그동안 아첼은 애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냐는 잠시 아첼의 손 끝을 살짝살짝 건드리다 냉큼 손 위로 올라탔다.

티엘은 당황하며 애냐에게 손을 뻗었지만, 아첼은 손을 당겨 애냐를 코앞으로 데려갔다.

"이 아이에겐 사과해야겠지. 사실 아까 널 가둔건······, 이 아이와의 계약을 끊어버리려고 한 거였으니까."

순간적으로 티엘의 얼굴이 굳었다.

생령과 한 번 맺은 계약은 다시는 무를 수 없다. 언젠가 아첼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말이었다.

계약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죽음 뿐.

즉, 아첼은 티엘을 가둬둔 동안 애냐를 소멸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끝으로 생령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습에서, 더이상 그런 의도는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엔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네 한계를 넘어버리면, 생령들이 아무리 널 사랑하더라도 나쁜 일을 겪게 될거야. 그런 일이 없도록, 천천히 배우자. 알았지?"

"무슨······. 의미야?"

"내 몸이 조금 나아지면 마법, 가르쳐 줄게. 아예 시작을 안했으면 모를까, 어설프게 마법을 다루다간 더 큰일이 날테니까."

아첼이 저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것도 드문 일이다.

짧은 한숨과 함께 애나가 주인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아첼. 나한테 이기적으로 살라고 그랬지?"

"응. 앞으로 힘든 일, 어려운 일이 가득할테니까. 넌 너무 착해서 너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게 뻔하고."

"그럼, 날 위해서 아첼의 도움이 되고싶은건······, 안될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뒤집은 말이기에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첼이 말없이 당황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티엘은 아첼을 한번 꼭 안아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잘 자라며 장난스레 뺨에 입맞춤이라도 해줬겠지만, 아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간단히 잘 자라는 말 뿐이었다.

티엘은 아첼을 대신하듯, 평소와는 반대로 아첼의 뺨에 입맞춰 준 뒤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아첼은 티엘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잠시 쓰다듬다 티엘의 방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이는 너무나 빠르게 어른이 되어간다.

언제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싶다고, 짐덩이로 남아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자립심 치고는, 그 결과가 너무나 두려웠다.

"생명의 어머니 아이넬라여······. 너무하지 않으신가요? 어째서 저 아이는 저토록 어린 나이에 엘드리안의 축복을 받아야 하죠? 잠들어버린 신조차 축복을 내리는데 어머니께서는 왜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나요······?"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불을 움켜쥔 손등 위로 이슬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내렸다.

문밖에는 누군가 누군가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다 떠나는 기척이 들렸지만, 아첼은 그 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슬퍼하고 있었다.




* * *




그 후 보름 가량, 아첼은 조금도 마법을 쓰지 않았다.

제멋대로 역류해버린 마력이 어떤 여파를 남길지 알 수 없다며 그 시간동안 요양하도록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티엘이 몰래 버리려 했던, 자신의 피로 흠뻑 젖어버린 옷가지와 몇 번이나 청소를 했어도 수련장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혈흔을 본 아첼은 잠자코 티몬의 권고에 따라 몸을 추스르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티엘과의 생활은 어느새 크게 바뀌어있었다.

보통은 수련장에 올라가 기본적인 마법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애냐와 계약하기 전날에도 이미 혼자서 아스트라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티몬에게 들은 아첼은 머리를 싸쥐었다.

연일 말썽을 피운 티엘은 충분히 응징을 받은 뒤에야 간신히 마력을 운용하는 감을 어느정도 익혔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영창을 끼워넣는 식으로 술식에 손을 댔다고는 해도 아스트라를 성공한 것은 기본기를 완성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수업의 내용은 몇 걸음이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적절하게 생령의 마력을 끌어오는 방법, 상대의 마력에 간섭하는 방법, 술식을 좀 더 간략화하는 요령 등, 혹시라도 지루해질 것을 염려한 것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조금씩 파고들어가는 수업들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티엘에게 뭔가를 사 오도록 심부름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

간단한 약초나 주문서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마력과 반응하는 몇 가지 금속이나 알 수 없는 시약, 생령의 사체 일부 등일 때도 있었다.

일부 재료는 당연히 마을에서 구할 수 없으니 직접 도시 까지 나가서 구해와야 했다.

몇 시간이나 걸리는 도시에 다녀온 티엘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며 입을 쭉 내밀며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직 연금술이나 고위 주문식은 이해 못할거라며 웃을 뿐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력을 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름대로 이것저것 연구를 하는 것 같다고, 대강 정의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거기서는 무리하게 마력을 움직이지 말고 자연스레 흘러가게 내버려 둬. 유도만 잘 해주면 반 정도는 알아서 되는거야."

"이, 이렇게?"

"오호? 잘 하고 있는걸? 그런데 거기서 조금만 힘 빼자. 조금만? 조금만이다? 터질지도 모르니까."

이미 몸은 나무 뒤로 숨긴 상태로 말만 잘한다.

워낙 대놓고 피하다보니 이미 술식이 깨졌다고 판단을 내린거나 마찬가지라는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티엘은 술식을 유지하는 데 온 정신을 쏟으면서도, 머릿 한구석에선 발끈 하고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로만 설명을 하고, 티엘이 이해한 대로 마력을 움직여 시연하는 것이 수업의 기본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가뜩이나 마력이 적어 연습조차 어려운 티엘로서는 뭔가를 배우는데 있어 최악의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마력의 반응이 즉시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한참이나 지연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름난 흑마법사를 대대로 배출한 카르티치스의 피가 울 일이다.

티엘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발현되는 술식을 살폈다.

마력장벽을 둘러 공격을 막는 기본적인 방어주문이었다.

마력만 다룰 줄 알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약한 방어술식이지만, 제대로 완성된다면 어설프게 휘두르는 쇠막대 정도로는 뚫리지 않는다.

티엘이 어느 정도 주문을 유지하는 것을 확인한 아첼은 근처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살짝 던져보았다.

구현이 잘 되지 않았다면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깨져버리지만, 다행히도 나뭇가지가 둥그스름한 보호막을 따라 미끄러졌다.

"오호라. 이젠 조금 낫네. 그럼 조금 난이도를 올려볼까?"

"잠깐, 잠깐만!"

아첼은 잠시 티엘이 펼친 보호막을 살피다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작은 조약돌을 들어올려 티엘의 발치를 향해 날려보냈다.

마력이 실린 것도 아니고 투석구를 이용해 던진 것도 아닌, 강가에 돌을 던지는 정도의 단순한 투척이었다.

그러나 돌멩이가 부딪힌 순간 티엘의 보호막은 유리창처럼 단번에 깨져나갔다. 마력이 중앙으로 지나치게 쏠려 가장자리쪽의 방어력이 형편없었던 탓이다.

생글거리던 아첼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하게 변했다.

"요게 정말! 똑바로 안할래?"

"미, 미안······."

처음에는 상냥하고 친절한 선생님이었던 아첼이 자주 인상을 찌푸리며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한건 약 일 주일 전 부터였다.

자기 말로는 열흘만에 기본 마법은 끝냈다는데, 사실이든 아니든 꽤나 열을 올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마법 안가르쳐준다고 혼자서 제멋대로 생령을 불러버린 티엘로서는 아첼의 '적극적인' 수업방식에 대해 전혀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너무 억울해서 입이라도 열라치면 '언제는 안가르쳐준다고 사고쳤잖니?'라며 호된 잔소리가 쏟아지는지라, 그저 눈물을 삼키며 뒤쫓을 뿐이다.

"그리고······. 언니한테 미안하기도 하니까."

"뭐?"

"아, 아무것도 아냐."

티엘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손을 놀려 술식을 땅에 그렸다.

주문이 깨지면 그 여파로 그려둔 마법진도 망가진다.

원래 마력으로 그려야 할 마법진이지만 언제나 마력 부족으로 허덕이는 티엘은 이렇게 직접 손으로 그려넣은 마법진을 사용했다.

매일 밤 손에 피가 맺히도록 연습한 덕에, 획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사드 문자도 나름대로 빠르게 써내려간다.

처음에는 마법진에 식을 써넣는 것조차 몇 분씩 걸렸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준비를 마친 티엘은 고개를 들어 아첼을 찾았다. 아첼은 조금 따분한 표정으로 티엘의 마법진을 살폈다.

"내가 언제까지 확인해줘야 하니?"

"수업이 너무 불성실하잖아."

"기초나 떼고 그런 말을 하렴. 제대로 됐으니까 얼른 작동해봐. 제대로 성공만 하면 오늘은 깜짝 선물을 줄 테니까."

"선물?"

뜬금없이 웬 선물인가 싶지만 선물 싫다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아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제대로 성공 하면이야. 대신 실패하면······. 그래, 이게 좋겠다. 일주일간 식사랑 설거지, 아참, 빨래 당번까지 혼자 하기다? 자신없으면 둘 다 그만둘까?"

"윽······."

티엘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아첼이 준비했다는 선물은 놓치기엔 지나치게 아까웠다.

아첼이 티엘을 놀리려고 일부러 부당한 과제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 말을 꺼냈다면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있다.

고민을 마친 티엘은 단호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마법진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술식? 빼먹은 부분은 없다.

마력의 분할, 유지, 모두 안정적이다.

그러나 이대로는 뭔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곰곰히 생각을 정리한 티엘은 마법진의 외곽에 몇 개의 이사드를 추가로 써넣었다.

'즉석에서 주문식을 변형하려고? 제대로 해 낼 수 있으려나?'

아첼은 일부러 아무 말도 없이 티엘이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티엘이 새로 써넣은 글귀는 마력 순환을 가속시키는 것이었다.

혹시 방어막이 일부 파손되더라도 마력을 빠르게 돌려 수리하겠다는 의미다.

들고있던 나뭇가지를 원 바깥으로 집어던진 티엘이 마침내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넣었다.

마법진의 외곽을 따라 천천히 장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방패의 기사, 순결의 땅을 지킬 수호자를 청한다."

약간은 도박이다.

순환이 빨라지며 미세한 조절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티엘은 오히려 마법진의 유지에 신경쓸 뿐 마력의 흐름 자체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기로 했다.

주문을 발동시키기 위해 마법진을 그리는 결계술식은, 뒤집어말하면 마법진이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형태를 이룬다.

아첼이 말한 것처럼 마력이 주문식으로 흘러들어가게 유도만 해 주자. 그걸 시험하기 위해, 아예 주문식을 개조하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윽고 보호막이 완전히 전개되어 희푸른 빛을 띄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하나의 얇은 막이지만, 사실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마력의 폭풍이었다. 티엘은 그 폭풍의 눈에 앉아 보호를 받는 것이다.

티엘로서는 나름대로 비장의 한 수였다.

"다 됐어?"

"응. 이번엔 자신 있어!"

티엘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

펼쳐진 방어막을 살펴본 아첼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원형으로 시전자를 둘러싸는 보호막에 회전을 넣는 것은 실전에서 몇 번쯤 구른 마법사들이 흔히 시도하는 방식이다. 회전을 가하는 것으로 힘을 흘리고, 마력을 표면에 고르게 배치시키는 부차적인 효과까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몇 번 실패하다보면 감이 잡히긴 하는 모양이다.

아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허리를 굽혀 돌을 주워들었다. 조금 전에 던진 것과 비슷한 크기의 돌멩이였다.

하지만 손 안에서 돌멩이의 무게를 몇 번 가늠해보던 아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렇게나 휙 내던졌다. 그리고······.

"자신 있단말이지?"

아첼의 얼굴에 불길한 미소가 화악 퍼졌다.


작가의말

요 며칠 문단 재수정하고 오탈자 수정하느라 연재분량이 제법 줄었었네요...

....한 번에 많이 있는게 좋으신가요, 아님 편당 분량을 조금 줄이는게 좋으신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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