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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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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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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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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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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2장-막간幕間(3)

DUMMY

은비늘 호의 선장은 가을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무르익은 밀밭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노쇠한보다는 강건함이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격식을 갖춘 품위있는 옷 아래에서도 잘 발달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연륜이라는 것은 참 멋진 것이다.

흑마법사라는 존재에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항해사의 모습에서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흑마법사라는 다소 음울한 명패에는 신경쓰지 않는 선장의 의연한 태도는 두 사람을 한결 더 안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칼을 쥔 자가 모두 강도인 법은 아니지 않소?"

선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식탁에는 이미 잘 차려진 음식들이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쭉 도열해 있었다.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고 싶었던 것인지, 흔히 선상에서 떠올리기 쉬운 짜디짠 염장고기나 이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비스킷은 보이지 않았다.

노릇하게 구워져 짭짤하고 기름진 향기를 피워올리는 신선한 연어에, 희고 부드러운 빵과 충분히 숙성된 치즈. 그리고 배 위에서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음식일 신선한 과일이 몇 개. 한 쪽에는 아직 마개를 따지 않은 백포도주가 냉수를 담은 대야 안에 기대 있었다.

"화려하군요. 평소에도 이런 식사를 한다면 부러운데요."

"어디서든 가장 윗 자리에 앉은 사람은 소소한 특권을 누리는 법이지. 대신 아껴둔 포도주를 접대하는 걸로 눈감아주지 않겠소?"

선장은 준비된 물그릇에 손을 씻으며 아첼의 농담을 능청스럽게 받아넘긴 뒤, 직접 포도주를 따 잔을 채웠다.

달콤한 백포도주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옅은 금빛을 띤 술이 맑은 잔을 채웠다.

티엘을 위해서는 따로 작은 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과 주스인가?

선장은 티엘의 잔에까지 음료를 따라주었다.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잠시 감상하던 아첼은 살짝 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셨다.

"향이 꽤 좋군요."

"13년 된 아일레 리누아요. 귀한 녀석이지."

공화국의 리누아 지방에서 나는 청포도는 상당히 유명하다. 공화국의 대표적인 특산물중 하나인 리누아 포도주는 산뜻한 향으로 이름높았다.

그중에서도 아일레 리누아, 아이넬라 신전의 제주(祭酒)로도 사용되는 술은 작은 술집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술이었다.

가볍고 청량한 맛에 더불어 막 딴 포도의 싱그러움을 담은 듯한 향기에 부드럽게 미소가 새어나왔다.

"덕분에 소문으로만 듣던 귀한 술을 마셔보는군요. 고마워요."

"이쪽야말로 당신 덕에 인명피해도 줄이고 배도 크게 다치지 않았잖소. 감사의 의미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군."

선장 역시 말을 끝내며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그러나 식탁 위로 내려앉는 잔은 조금 거친 소리로 울었다.

내려놓던 도중 손이라도 미끄러진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대화를 끊기 위해서일까.

조금 부자연스럽게 중단된 대화에 약간의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첼은 손에 든 잔을 살짝 굴렸다.

이 포도주를 거두어들이는 신은 거짓으로 진실을 숨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고해성사의 자리에도 놓여지는 술의 향기가 경계심에 날을 세웠다.

"벽을 세워도 물결은 멈추는 일이 없다죠. 그걸 억지로 멈춘다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고. 괜히 빙 두르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슬슬 본론을 꺼내주시는게 어때요?"

아첼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득 손끝으로 잔에 담긴 물을 살짝 휘저었다. 그리고 다시 식탁보 위로 손가락을 그어 선 하나를 그렸다.

나른한 동작이어서 위협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야기가 늘어지는 것이 지루해서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일단 부탁한 서펜트의 사체는 수거했소. 공화국 금화로 3만 칼브람 정도의 가치가 있을 거라 추정되더군."

"반은 드리죠. 아니, 필요하다면 다 드릴게요. 대신-"

"그보다 먼저 할 이야기가 있지. 그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소?"

아첼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하게나마 반응을 보인 것은 티엘이었다.

평온한 얼굴과는 반대로, 손끝이 순간적으로 흔들려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미노스티야의 혹독한 눈길 아래에서 자라며 어느 정도의 동요는 자연스레 감출 줄 알았지만, 아직까지는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빈틈이 있었다.

물론 다른 두 사람은 티엘의 실수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선장은 티엘이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도 무언가 짐작가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차분하게 입안의 음식을 씹어 삼킨 아첼은 약간의 웃음기를 보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승선 명부에 적은 이름을 보시면 될텐데요."

"알텐데. 내가 원하는 이름은 그게 아니오. 서펜트를, 그것도 세 마리를 한 자리에서 잡을 실력이면 흔히 볼 실력은 아니지. 흔한 잔챙이 마법사는 아니고 필시 권호를 가지고 있을거요."

농담을 들은 듯 반응하는 아첼의 의도가 단번에 차단당했다.

이제 어떻게 나가야 할까.

망설임이 뱃속을 무겁게 눌렀다.

그때 문득 아첼의 무릎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티엘이었다. 마주친 눈빛이 살짝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아첼 편할대로 해. 내 걱정 말고.'

고약한 꼬맹이다. 저런 눈을 하면 더더욱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대며 고민하던 아첼은 '수 틀리면 다 뒤집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혹의 밤안개', 아첼레란도 라피다멘테."

선장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공화국 출신으로 제국의 상위층에 오른 마법사의 이름은 마법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제법 유명했다.

나이가 조금 있는 마법사들이라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권호를 받고서 홀로 제국으로 향한 소녀의 소문 정도는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하지만 최초의 놀라움이 잦아들며 뒤이어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십여 년 만에 고국을 찾는다면 이유는 대충 알겠군. 하지만 당신도 알잖소. 공화국에서 불법으로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소. "

아첼은 선장의 무거운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손끝을 놀렸다.

직각을 그리는 꺾인 선이 새롭게 나타났다. 티엘은 교차하는 두 개의 선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눈감아주시죠. 산 속에 쳐박혀 조용히 살려고 길 나선건데."

"검은 가지와 마주치면 어쩌실 생각이오?"

"마른 가시나무의 기사들? 물론 그 위명은 알지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들을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린아이까지 매달고 그들과 싸울 생각이오??

아첼은 하나의 선을 더 그었다.

그제서야 선장은 아첼이 그린 세 개의 선을 보았다. 하나의 직선과 그를 꿰뚫은 꺾인 선, 그리고 그 둘을 아우르는 세 번째의 곡선.

"뭐 하는거요?"

"라피온, 켈리아, 이프라이엘."

낮고 빠르게 생령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젖은 흔적 위로 날카로운 마력의 선이 새어나왔다.

"수호의 바람을 이 곳에, 환혹의 불꽃은 칼날로, 빛조차 나갈 수 없는 미궁을 세우라."

일그러진 삼각형에서 마력이 타오르며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색색의 불꽃이 바닥과 벽을 타고 복잡하게 뻗어나가며 서로 교차하고 뒤얽혔다.

그어진 선을 따라 무수한 이사드가 새겨지며 한층 더 진한 빛을 머금고 타올랐다.

순식간에 선장실 전체가 결계에 휘감겼다. 조금씩 흔들리던 바닥이 거짓말처럼 멈추고, 은은히 들려오던 파도나 바람 소리마저 침묵속에 잠들었다.

이 것으로 방 안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 안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바깥에선 문에 귀를 붙인 사람조차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다.

하지만 선장은 놀랍게도 아첼이 마력을 움직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무기를 움켜쥐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자리를 지킨 채, 아첼이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놀라진 않는군요?"

결계를 세운 아첼은 그런 선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만 받아들이시면, 뭐든지 다 답하죠."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첼은 식탁 위에 있던 조그만 칼을 들어 손가락 끝을 베었다.

이어 품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낸 아첼은 손가락에 흐르는 피로 무언가를 적어 선장에게 건넸다.

살이 찢기는 섬뜩한 소리와 피로 적은 흉흉한 문서에 선장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나 혈서는 생각처럼 투박한 형태가 아니었다.

상처에서 흐른 피를 받아 손가락으로 그은 선일텐데도 날카로운 펜으로 적어넣은 것처럼 예리한 선이 기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 하나의 획만을 남겨둔 아첼의 이름이, 한층 더 신비로운 빛을 머금은 채 은은히 빛났다.

"마력종속계약. 그 안에 적어넣은 맹세를 어기면 제 각인이 파기되고, 마법사로서의 생명이 끊기죠. 물론 당신에게는 아무런 억제력도 없지만, 그 정도의 각오로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해주시길 바라요."

"아, 아첼!"

아직 마법사로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한 티엘이지만 마력각인이 파기된다는 것의 의미는 잘 안다.

마력각인, 다시말해 마법사의 마력이 생성되는 '영핵'이 소실된다면 다시는 마력을 쓸 수 없을뿐만 아니라, 몸에 남아있는 마력을 노리고 마령이 나타나더라도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티엘을 말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밝힐 이야기에 대해서 함구할 자신이 없다면 그 계약서를 돌려주시면 돼요. 그러면 우린 라티앙에서 무력을 써서라도 몸을 숨길테고 피차간에 괴로운 시간을 가질테죠. 하지만 받아들이신다면 라티앙에서 관리를 매수할 수 있도록 서펜트 대금을 넘기겠어요."

"······좋소. 받아들이지."

망설이던 선장이 마침내 승락했다.

그러자 아첼은 이제 괜찮다는 듯 티엘을 제지하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티엘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눈치챈 티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살짝 빠져나왔다.

"레가야 대공왕 미노스티야 필레인 카르티치스의 후계자,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입니다. 은비늘 호의 선장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본래대로라면 하대를 하는게 원칙이리라.

하지만 상대는 레가야의 사람도 아니며, 계급제와도 거리가 먼 공화국의 선장.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선장은 티엘의 말을 듣고나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귀한 분을 만났군요. 과연, 매혹의 밤안개가 이렇게나 보호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대공의 친혈육 정도가 아니면 어색하겠지요. 처음 권호를 들었을 때는 웬 소녀를 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네?"

각자 따로 발견되었다면 모를까, 아첼 정도의 마법사가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소녀가 있다면 당연히 항쟁에서 밀려난 대공녀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아첼이 이름을 밝히길 꺼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항쟁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 아니셨나요?"

"레가야에서 국경폐쇄령이 내려졌다거나 추적대가 편성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소. 정적이 살아있다면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지. 어렴풋이 레가야에 항쟁이 있었다는 소문과, 레가야의 고위 마법사인 당신이 공화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조합했을 뿐이오."

아첼은 불길한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티엘이 살아있다면, 언젠가 그녀를 중심으로 새로이 항쟁이 일어날 불씨가 남는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제국의 귀족가는 언제나 가느다란 몇 개의 줄기만을 남길 뿐, 가까운 혈육조차 쉽사리 그 피를 끊어버린다.

목숨을 걸고 항쟁을 일으키기까지 한 뒤에, 남은 뒷처리를 그렇게까지 허술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

항쟁을 주도한 사람에 대해 뭔가 더 아는게 없느냐고 물어보려던 아첼은 순간 곁에 있던 티엘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 시점에 레가야의 대공위를 노릴 수 있는 사람은 둘밖에 없고, 그 중 한 명이 이 방 안에 있다.

르비아와 워낙 가까이 지냈던 티엘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반쯤은 의도적으로 르비아를 의심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답을 굳이 캐물어, 아물지 않은 가슴에 못을 박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알더라도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와서 대공위를 다시 찾겠다는 허황된 미래 따위는 티엘이나 아첼이나 바라지 않는 것을.

"······이런 사정으로, 저흰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갈거에요. 시대에 묻혀, 이름없는 시민으로,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 거에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젊은이들이 입에 담기에는 슬픈 포부요. 하지만······좋소. 선원들을 단속하도록 하지. 그리고······."

선장은 몸을 돌려 구석에 있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류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그 중 어음 한장을 찾아낸 선장은 자신의 이름을 빠르게 적어넣었다.

일금 3만 칼브람, 일시불로 지급, 스텔바인 엑스티나.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어음이 아첼의 손으로 건네졌다.

"공화국에 도착하거든 어떤 상회든 찾아가 그걸 보여주시오."

"이건 전액 아닙니까?"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로. 당신이나 내가 나고 자랐던 나라는 그걸 목적으로 세워지지 않았소. 이건 당신이 정당하게 얻은 물건의 값이지, 나는 어디까지나 배가 무사한 것으로 만족하오."

선장의 얼굴에 인자한 할아버지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소중한 동생을 잘 지켜주시오."




* * *




이 주 후, 피앙투스 라티앙항.

거의 한 달 만에 땅을 밟은 티엘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팔짝팔짝 뛰어다니는게 제국의 대귀족이라기보다는 철없는 또래 꼬마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아첼은 그런 티엘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어쩌면 정확히는 라티앙의 전경을 훑어보느라 티엘에게 신경쓰지 못한다는 쪽에 가까웠으리라.

항구도시 라티앙은 대표적인 상업항이었다.

타국과의 무역 및 교류가 주를 이루는 항구는 다목적항인 바네타와는 달리 산뜻하고 깔끔한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푸른 지붕과 새하얀 벽은 아득하게 펼쳐진 녹옥빛 바다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며 어우러져 그림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잊은 듯 여기저기 강인하게 자라난 소나무의 푸른 빛과, 그 사이를 재치있게 날아다니는 피앙투스 바다갈매기의 흰 날개도 쉽게 질리지 않을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십여 년 만에 보는 모습이구나······. 생각보다 반갑진 않네, 뭐."

열네 살짜리 꼬맹이였던 아첼은 이 곳에서 타국의 마법사가 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십이 년 뒤, 그녀는 열세 살짜리 꼬맹이를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묘한 감상에 시큰둥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화끈거리는 콧잔등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한 번 스쳐지나갔을 뿐인 이 항구도, 십 년을 지나 다시 보면 그리운 구석은 있는 법인가.

아첼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픽 웃었다.

묘하게 들뜬 가슴을 겨우 달랜 아첼은 열세 살인지 여섯 살인지 모를 정도로 들떠있는 티엘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갈까?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못찾는다, 너?"

"아체엘!"

"역시 느리다니까! 빨리 오라고!"

"치사하잖아! 거기 서!"

겁주려는 듯한 말투에 걸맞게 짓궂은 웃음소리가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티엘은 악을 쓰며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다리 길이에서부터 반은 진 셈이니 따라잡는게 쉬울리가 없다.

항구에 나와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두리번거리고, 때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떫은 시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쾌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한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으며 항구를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은비늘호가 멀어지고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지만, 아첼은 티엘을 약올리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도망을쳤다.

겨우 두 사람의 추격전이 끝난 곳은 어느 상회의 앞이었다.

티엘이 무릎을 짚은 채 헉헉대는 동안 어음을 현금으로 바꿔온 아첼은 쿡쿡 웃으며 티엘의 콧잔등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얏!"

"우후후후, 이런 약골. 겨우 그것 좀 뛰었다고 숨이 차니? 운동 좀 해야겠다, 너."

"다음엔 안 질거야!"

아첼은 깔깔 웃으며 티엘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불만어린 시선이 아첼을 노려보다 홱 돌아갔지만 아첼의 웃음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짐짓 토라진 척 하던 티엘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짧게 탄성을 질렀다.

이따금씩 몰래 란의 번화가로 놀러갔던 티엘이지만, 항구 바로 앞에 형성된 어시장은 한 번도 구경해본 일은 없었다.

상업항이라고는 해도 어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보니 신선한 해산물을 취급하는 가게도 그리 적지는 않았다.

"아, 아첼! 이, 이거 뭐야?"

"흐음- 낙지가 싱싱하네요, 아줌마. 티엘, 먹어볼래?"

"낙지?"

티엘은 살아있는 낙지가 꿈틀거리는 모습에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질쳤다.

아첼은 푸하하 웃으며 아줌마가 호의로 내미는 조개를 하나 맛보았다.

짭짤한 바다내음과 함께 달달한 조갯살이 입안에 가득 찼다.

비교적 마법사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그런지, 어패류가 많이 나지 않는 항구인데도 꽤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해물을 팔고 있었다.

라티앙을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바짝 말린 생선들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아첼은 순간 조금쯤 충동구매의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쉽게 부패해버리는 어패류는 여행식으로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아쉬워하는 아줌마에게 큼지막한 소금 주머니를 몇 개 산 아첼은 바들바들 떨던 티엘을 끌고 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날걸로 먹는거야······?"

"날걸로도 먹고 요리해서도 먹고······. 아, 조심해. 건초 수레에 걸리겠다."

"이크-!"

건초 수레를 피하려다 미끄러진 티엘이 아첼에게 부딪혔다.

아첼은 낄낄 웃으며 티엘을 잡아 일으켰다. 티엘은 짓궂게 웃는 아첼에게 똑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모처럼 허물없이 웃어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장의 활달한 분위기가 두 사람의 가슴에 남아있을 얼룩까지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장가에 들어선지 삼십분 쯤 지난 뒤에는, 아첼의 추측이 제법 정확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두 사람의 배낭에는 갖가지 식재료와 식기가 가득했고, 두 손에는 옷을 담은 가방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리고 티엘로서는 어디에 쓰는지 알 수도 없는 몇 가지 약재까지 그 안에 포함되어있었다.

필요보다는 흥미에 의해 사들인 물건들이었다.

아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충동구매 하는 버릇은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딴 것 까지 잔뜩 사버린거야? 아아, 한심해 정말로. 이게 다 쓸데없이 시장을 지나가서 생긴 일이야.'

누구를 씹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우스워보인다.

티엘은 킥킥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아첼의 뒤를 따라다녔다.


중간중간 노점에서 파는 먹거리도 시장한 두 사람의 발길을 잡아채는데 한몫했다.

티엘에게는 낯선, 다소는 거친 음식이었지만 의외로 입에 맞는지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씨익 웃곤 했다.

거의 서너걸음마다 한 번씩 멈춰서는 두 사람의 지갑은 도무지 닫힐 줄을 몰랐다.

"우리 너무 많이 먹는거 아닌가 몰라."

"그러면서 또 뭘 먹으려고 눈이 그리 바쁘니."

"입가에 묻은 크림이나 닦고 얘기해, 아첼."

이제 노점도 거의 없는 시장가의 끝 부분이라 주위는 비교적 한산했다.

좀 구석진 곳이라 그런지 주위에 빛도 잘 들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때 아첼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조금 두리번거리는 것이 따로 찾는 가게가 있는 듯 했다.

"또 살 거 있어?"

"아, 원래 이것 때문에 들어온거야. 진짜라고, 이 녀석아. 언니 말을 그렇게나 못 믿어?"

한동안 두리번거리던 아첼은 한참 후에야 원하던 것을 발견하고는 티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제까지 식량이나 간단한 옷가지, 야영물자 등 생필품에 가까웠던 물건들을 팔던 가게를 전전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아첼이 향하는 가게는 조금 다른 물건을 팔고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흐르는 흑갈색의 몸체, 만지면 날카롭게 소리를 낼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

한없이 강인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우아하게 이어지는 예술적인 곡선.

활이었다.

단순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것부터 다양한 재료를 짜맞춰 만든 복합궁까지, 모양도, 크기도 천차만별로 다른 활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첼에게는 이미 활이 있으니, 그녀에게 활이 필요한 일은 없을 터였다.

화살이라면 아스트라가 있으니 이 역시 목적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첼은 무엇때문에 궁시점(弓矢店)을 찾은 것일까.

"어서 오시지요."

딸랑딸랑!

오래 묵은 듯한 종소리가 뜻밖에도 경쾌하게 울렸다.

묵직한 먼지가 감도는 실내와 어쩐지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입구 가까운 곳에서부터 들린 목소리였다.

화살 하나의 촉을 조금씩 손질하고 있던 주인은 문이 열리며 울린 종소리에 화살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막 마흔을 넘긴듯한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지만, 조금 전 화살을 다듬던 손놀림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모양새는 상당히 능숙했다.

아마도 나이의 반 이상을 이 가게에서 보낸 것이리라.

아첼은 내심 만족스레 웃으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잠시 둘러보고 싶은데요. 괜찮겠죠?"

주인은 아첼의 등 너머로 삐져나온 활을 눈으로 살폈다.

딱히 부서지거나 수리해야 할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활만 두 개를 가지고 있어봐야 의미도 없고.

금새 진짜 손님을 알아차린 주인은 이해했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활을 쓰시는 것 같은데, 선물할 생각인가 보군요?"

"네. 푸후훗, 이 꼬맹이를 좀 가르쳐 볼까 해서요. 아, 이쪽에서 고르면 될까요?"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챈 티엘의 눈이 커졌다.

사실 이전에도 활을 가르쳐달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첼은 딱 잘라 거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아첼이 먼저 나서서 활을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기쁘지 않을리 없었다.

그러나 주인은 막 기대의 눈길을 보내려는 티엘을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잠깐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 있는것들은 죄다 성인용이라 동생분은 시위를 거는 것도 벅찰겁니다. 조금 작은 연습용 활을 꺼내드리지요."

"아, 그건 괜찮아요. 어디······. 이거 한 번 봐도 될까요?"

한 구석으로 들어가려는 주인을 도로 불러세운 아첼이 집어든 것은 커다란 장궁이었다.

시위를 걸면 티엘의 키와 비슷할 정도의 커다란 활이었다.

주목을 잘 다듬어 만든 몸체는 나무의 안쪽 부분과 바깥 부분의 물성을 잘 살려, 단일소재를 사용한 활 중에서는 매우 훌륭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아첼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아첼의 활은 합성궁(Composite Bow)이면서도 그 크기가 방금 집어든 주목나무 장궁과 비슷할 정도로 크다.

합성궁은 크기에 비해 탄성이 더 강한만큼, 시위에 걸리는 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의 티엘로서는 아첼의 활은 커녕 장궁쪽만 해도 다루는 게 무리일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첼의 눈에 차지 않았다.

활을 다루려면 약궁중시(弱弓重矢)라고는 하지만, 가르치는 아첼이 평범한 궁사는 아니지 않은가.

다소 탐탁찮아하는 아첼의 기분을 눈치챈 주인은 아첼의 손에서 활을 받아들어 시위를 걸었다.

가볍게 시위를 튕기자 제법 무거운 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이건 실전용으로 만든거라 성인들도 여간해선 당기기 어렵습니다. 이제 막 활을 배우는 아이에겐 지나치게 강합니다. 활은 천천히 익혀야 하는 기술이지 않습니까. 이보다 강한 활은······."

"괜찮다니까요. 영격술을 같이 가르칠 생각이니까."

그러나 기어이 주인은 주목나무 활의 시위를 풀어 원래 자리에 두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주인이 기어코 구석에서 상자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은 오래된 물건이었지만, 뿌연 먼지를 닦아낸 뒤 드러난 상자는 겉으로 보기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거울처럼 얼굴이 비치는 매끄러운 검은 표면이나, 모서리마다 붙어있는 금속 장식은 작은 긁힌 상처 하나조차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존의 주문이 걸린 상자였다.

내용물이라면 모를까, 상자 자체에까지 보존 주문을 걸 정도로 귀중한 물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주인은 아첼의 눈에 기대감이 얼비치는 것을 보며 단단히 걸려있는 걸쇠를 직접 벗겨냈다.

찰칵거리는 금속음이 기분좋게 울렸다.

"활만 배우는거라면 몰라도, 그 활로는 마력을 얼마 버티지 못할겁니다. 직접 가공을 하시더라도 수고로우실텐데, 이걸 쓰시는게 어떻습니까?"

마침내 잠금장치가 모두 벗겨진 상자가 열렸다.

아첼은 상자 안쪽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고풍스러운 남색 공단으로 댄 안감 위에 은은한 빛을 품은 활 하나가 곱게 놓여 있었다.

시위를 풀어놓은 상태에서 거의 완벽하게 원을 이루는 고탄성의 활.

활채의 안쪽 면-그러니까 부려놓은 상태의 바깥 면-은 마치 대리석처럼 윤기가 흐르는 하얀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반대로 활채의 바깥 면에는 한 점의 광택조차 찾을 수 없는 새카만 비늘이 장식으로 죽 둘러 있었다.

아첼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활을 집어들었다.

아첼의 활에 비해 크기는 약간 작았지만, 무게는 오히려 조금 더 무거웠다. 게다가 옅게나마 마력의 잔향이 활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서펜트 비늘인가요? 안쪽 재료는 흔히 보기 힘든 녀석 같은데. 뭐죠?"

"육화한 생령, 성체로 자란 용의 이빨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고, 그것을 들은 아첼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굉장한 물건을 만나버렸다.

"용의 이빨? 어디서 구하신거에요?"

"조부께서 우연히 구한것을 아버지께서 다듬어 만드셨죠. 손님의 활만큼은 못되어도, 이 정도면 극상품입니다."

티엘은 두 자루의 활을 번갈아 보았다.

티엘이 기억하는 한, 아첼의 활은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할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었다. 그런 활과 비교할 정도라면, 이 활도 보통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첼은 가만히 손 끝으로 활 몸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빛의 마력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마법적 가공 없이도 이 정도라면 길들이기에 따라서는 정말 거물이 될지도······. 얼마나 해요?"

"팔천 칼브람, 제국 공용금화로는 사천 이백 시엘란입니다."

지방 중소도시에 번듯한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다.

그 동안 돈 걱정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던 티엘조차 흠칫 놀라며 아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영장이란 단순히 마법이 깃든 물건인 마도기(魔道器)와는 달리, 외부의 마력과 반응하고, 증폭시키며, 제어해주는 마법사의 무기다. 마법적인 가공도 필요하지만, 가공하기 이전의 기초가 빼어날 수록 완성된 이후에 더 강력한 영장으로 태어나는 법이다.

때문에 애시당초 별볼일 없는 물건을 살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지금 당장 아첼이 쓰는 아첼의 활 역시 흑마법으로 위명을 떨치는 레가야에서도 그 이상의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극상품이었다. 아마도 대공인 미노스티야도 이 정도의 영장은 채 세 개를 넘기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그 위력은 십여 년에 걸쳐 꾸준히 마력을 먹이고 이사드를 새겨가며 가공을 거친 덕분이었다.

처음 손에 넣었던 순간의 활이라면 아마도 지금 이 활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팔천이라······.'

물론 팔천 칼브람이라는 거금이 부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용의 이빨은 구하기 어렵다. 앞으로 이 정도의 활을 구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지금의 열 배 까지도 아깝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다.

"한번 시험해봐도 돼죠?"

"물론입니다, 손님."

아첼은 어렵지 않게 활을 반대로 꺾었다.

오랫동안 부려놓은 활이었지만 시위를 거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순간이었다.

이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가볍게 튕기자 카랑카랑하는 가느다란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시위 역시 보통의 물건은 아니었다. 마물의 사체 일부를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평범한 실에 마법적인 가공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거의 금속이라 할 만큼 질기고 강한 감촉이 손가락에 휘감겨왔다.

가볍게 튕겨볼 때마다 마치 악기의 현을 튕기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던 아첼은 시험삼아 검지와 중지로 빈 시위를 가볍게 튕겨보다, 천천히 세 손가락으로 단단히 쥐고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완전히 당겨진 시위 위로 아스트라를 맺었다.

시위와 아첼의 마력이 서로 은은하게 공명하며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창가로 다가간 아첼은 여유롭게 활을 들어 하늘 높은 곳을 향해 아스트라를 쏘아올렸다.

아스트라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뒤, 아득할 정도로 높은 고공에서 폭발해 작은 꽃을 그렸다.

아첼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활 시위를 다시 풀어 티엘에게 넘겼다.

"살게요. 이제까지 본 것들중에서도 첫 손에 꼽을만큼 좋은 활이네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실겁니다."

주인은 가슴을 손에 얹으며 가볍게 몸을 숙였다.

고작 10년만에 수 세기를 넘겨 위명을 떨치는 엘트리안의 작품과 나란히 설만한 영장을 만들만큼 빼어난 마법사의 찬사다.

장인으로서 이 이상의 상은 없을터였다.

"참, 혹시 화살이나 시위의 여분도 필요하실테지요?"

"그건 얼마죠?"

"그냥 드리겠습니다. 화살은 100발, 시위는 마령의 털로 짠 녀석으로 드리면 충분하실테지요."

마령으로 변이한 생령에게서 얻은 재료는 다소 품질이 떨어진다.

하지만 어차피 연습용으로 쓸 것에다, 무엇보다도 공짜로 준다지 않는가. 아첼은 보기 드물 정도로 싱글벙글 웃었다.

그 사이 주인은 티엘에게서 활을 받아 상자에 넣고 잘 포장했다.

가죽으로 싼 화살과 실까지 넣은 꾸러미를 넘겨받은 아첼은 가볍게 목례하고 출구로 향했다. 그 때 주인은 티엘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 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첼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주인은 판매대 아래에서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갸름한 상자 하나 더 꺼내왔다. 그리고 불러 세운 아첼이 아닌, 활을 받게 될 티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주인이 몸을 숙인 덕분에 두 사람의 눈이 어렵잖게 똑바로 마주쳤다.

"꼬마 아가씨, 활을 처음으로 배운다고 했지?"

"네? 아, 네."

솔직히 배운다는걸 알지도 못했지만 말이죠.

티엘은 내심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진지한 눈으로 방금 꺼내든 상자를 티엘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음엔 많이 힘들거다. 하지만 활이라는건 자신과의 싸움이란다. 끈기를 가지고, 너 스스로를 뛰어넘어보거라."

티엘은 주인이 건네주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화살이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희뿌연 바탕 위로 머리칼처럼 가는 은으로 덩굴모양의 세밀한 세선세공이 휘감긴 화살촉이 눈길을 끌었다.

흔히 보는 맑은 은빛이 아닌 그 금속은 우룬의 사슬이라는 금속으로 만든 것이다.

촉의 중앙에는 특이하게도 갸름한 마름모 꼴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겨자씨처럼 작은 한 줄의 글귀가 안쪽 면을 따라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화살 끝에 실린 무게를 잊지 말라.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진 티엘은 다시 주인을 바라보았다.

"대대로 우리 가문에 내려온 전통이야. 처음 활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이 화살을 선물하곤 했지. 네가 활을 배워 어떻게 쓸 지는 모르겠지만, 무기를 든 사람은 그 무게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만 알아두렴."

"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잊지는 말아라."

티엘은 화살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화살에 씌여진 글귀가 어렴풋이 이해될 듯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주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따뜻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문득 아첼이 주인에게 물어왔다.

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지막하게 오년 전,이라고 중얼거렸다.

"저 화살을 보니 이제야 생각났네요. 이 가게, 전에도 들른 적이 있었다는 걸······. 이 활, 여기서 구해서 길들였었죠."

아첼은 추억을 더듬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돌이켜보면 마법사 아첼레란도가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곳이 이곳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손님이셨군요. 당신의 작품이 십여년간 주인을 지켜줬다는 사실을 아시면, 아버지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아버지라······. 당신이 아니라요?"

주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지만, 아첼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비어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티엘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화살을 받았던 것이 엊그제같았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그 화살은 너무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십 년 전의 꼬마는 잃어버린 화살의 무게에 짓눌리는 나이가 돼버렸네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뭔가 바꿀 수 있을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언가를 바꾼 뒤 다시 십년이 지나면, 바꿔버린 과거를 다시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잖습니까."

부드러운 웃음에, 아첼 역시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푸훗, 글쎄요. 그 때 까지 기다려줄까요?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죠."

"기대하겠습니다. 오랜 친구를 기다리듯이······."


작가의말

이 세계관의 신은 둘입니다. 창조와 질서, 유지를 관장하는 시초여신 아이넬라와 종말과 혼돈, 소멸을 관장하는 마신룡 엘드리안.

이 중 엘드리안은 ‘우룬’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언급된 우룬의 사슬은 바로 그 엘드리안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입니다. 이 세계에선 비교적 흔한 마법금속 중 하나.


사실 티엘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큰 기복이 없는 편이라 빨리 넘기고 싶지만, 이 부분이 아니면 이후 티엘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네요. 다소 답답할지도 모르지만,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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