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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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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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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0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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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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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2장-막간幕間(4)

DUMMY

활을 산 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마시장이었다.

귀족의 필수항목인 승마 정도는 티엘도 어느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물론 장시간 질주하는 것을 버텨낼 정도의 기량이나 체력은 없지만, 다행히 경주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 곳으로 여행을 가려는 것이니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 터였다.

예상대로 아첼은 말을 그리 빠르게 몰지 않았다.

느긋하게, 그저 서쪽을 향해 천천히 말을 걷게 시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미지의 땅으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첼과 함께 있다는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할정도로 안심이 된다.

'하지만······. 뭘까, 이 기분은······.'

문득 티엘은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모는 아첼을 돌아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석양빛에 물들어버린 아첼의 옆모습은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아첼이 허상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그런 황당한 생각이 은연중에 떠올랐다.

그런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첼이 홀연히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럴리 없는도, 아첼이 자신을 두고 사라져버릴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아······."

아첼의 이름을 부르려던 티엘은 무심결에 뒷말을 삼켰다.

아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삐마저 느슨하게 쥔 채 말의 움직임에 몸을 내맡긴 상태였다.

그런 무방비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첼은 티엘이 얼버무린 목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궁금한 거라도 있어?"

꽤 나지막하게 불렀는데도 용케 알아듣고 곧바로 뒤돌아본다.

티엘은 약간 당황하다가 재빨리 질문거리를 생각해냈다.

"진짜로 활 가르쳐줄거야?"

"그럼. 너도 앞가림 정도는 해야지."

"앞가림······."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말이 꽤나 어색하게 들린다. 그동안 너무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것일까.

"내 기억이 맞다면 서부에 라간 계곡이라고 좀 깊은 산골이 있어. 그 근방에 자리 잡으면 아마 조용히 사는덴 지장 없을거야."

"조용히?"

"심심한게 위험한 것 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하하, 나야 떠돌이로 사는게 나쁘지 않지만 너는 아니잖아. 공주님 출신의 떠돌이라니."

"신경쓰지마, 그런거."

티엘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별 애착도 없는 걸.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무리는 하지 마. 내 나이 반도 안되는 꼬맹이 마음쯤은 짚어낼 수 있으니까. 힘들면 얼마든지 기대도 돼. 아직은 혼자 설 필요 없잖니."

깍지 낀 손을 머리에 대고 기지개를 켠 아첼은 몸을 앞으로 되돌리며 고삐를 살짝 당겼다.

"내일 일은 내일 이야기하고, 일단은 여기서 하룻 밤 보내자. 바람 피하기엔 딱 좋잖아?"

티엘도 얼른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바람 정도는 막을 수 있을만한 장소였다.

먼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아첼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말을 묶고 짐을 풀어냈다.

조금 전 까지 티엘이 느꼈던 불안감을 완전히 씻어버리는 유쾌함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티엘은 한 차례 머리를 흔들어 남아있던 상념을 지운 뒤 아첼을 따라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아첼이 시키는대로 주위에 떨어진 잔가지들을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티엘, 너무 멀리 가지 말고. 그냥 근처에 있는 것만 모아주면 충분할거야."

"응, 알았어."

티엘이 땔감을 모아오는 사이, 아첼은 시장에서 산 모포를 대강 깔아 자리를 만들고 돌 몇 개를 세워 간이 화덕을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티엘이 다시 돌아온 뒤, 두 사람은 한 가지 문제점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야숙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첼은 끙끙거리며 오늘 새로 산 부싯돌과 철편을 수없이 부딪혔다.

그러나 서투른 손짓에 불씨는 얼마 생기지도 않았고, 가까스로 일으킨 불씨 역시 부싯깃에 옮겨붙기도 전에 호르륵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첼에게 화염계 생령은 없다.

불을 피우지 못하면 추위는 둘째치고 들짐승이 꼬여들지도 모른다.

고민끝에 기름먹인 종이를 가늘게 자른 것과 잘 마른 솔잎을 부싯깃으로 삼고서야 가까스로 불이 붙었다.

혹여 꺼질세라 조심스레 나뭇가지를 얹고, 그 불이 차츰 굵은 나뭇가지로 옮겨붙으며 겨우 하룻밤 온기를 제공해줄 모닥불이 완성되었다.

'그냥 칼로 긁으면 되는걸로 사올걸.'

부싯돌을 치느라 물집까지 잡힌 손을 비참하게 내려다보던 아첼은 늦은 후회를 하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에 솥을 걸었다.

고비를 넘기기가 무섭게, 숨 돌릴 시간조차 없이 두 번째 난관이 닥쳐왔다.

아첼은 요리를 배운 적이 없었다.

진땀을 흘리던 아첼은 낮에 가죽부대에 한가득 사 둔 물을 솥에 붓고 밀가루와 잘게 찢은 육포를 넣어 간단한 수프를 끓였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최대한 간단한 조리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티엘은 아첼이 시킨대로 생령의 마력을 응결시킨 마정석을 사방에 깔아두고 있었다.

풍령 라피온과 수호령 켈리아의 마력이 간단한 결계를 이루었다. 물리적인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들개나 바람을 막아주기에는 충분했다.

결계가 제대로 완성된 것을 확인한 티엘은 그 즉시 쪼르르 다가와 담요를 두른 채 방긋 웃었다.

볼수록 귀여운 녀석.

아첼은 피식 웃으며 막 끓기 시작한 수프를 크게 한 그릇 떠 티엘에게 건넸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르긴 했지만, 처음으로 아첼이 티엘을 위해 준비하는 식사이기도 했다.

항쟁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직후는 아르타야의 여관에서 식사를 해결했고, 배에서도 끼니마다 식사가 나왔으니 처음으로 아첼의 요리솜씨를 감상하는 셈이다.

티엘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아첼이 건네는 수프 그릇을 받아들었다.

"으, 으음······."

티엘은 아첼의 수프를 한 입 가득히 먹어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성찬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 기묘한 맛은 아첼의 노고를 생각해서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불 조절을 잘 못했는지 덜익은 밀가루 맛이 나는데다가 군데군데 눌어붙은 반죽이 덩어리 져 있기도 했다. 소금도 너무 많이 넣어 입안에 머물수록 괴롭다. 차라리 아르타야에서 맛본 해조류 수프가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입에 머금은 수프를 한참이나 굴리다 삼키는 티엘을 보며, 자신의 그릇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아첼도 떨떠름하게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입에 스푼을 물고 티엘을 바라보던 아첼이 수프가 든 솥을 발로 툭 찼다.

"맛 없지?"

"아, 아니! 맛있······, 있어!"

"거짓말이라도 하려면 인상은 펴고 하렴. 맛 없다는 소리보다 더 무서우니까. 나도 내 솜씨 어떤지는 알아. 말은 고맙지만, 잔뜩 굳은 그 표정은 좀 풀어라."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사실 아첼이 죽기살기로 애를 쓴 덕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즉, 원래는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괴이한 물건이 나오곤 한다는 소리다.

태우지 않기위해 애를 쓴 덕에 시커먼 숯덩이는 면했지만, 결과물 자체는 본인도 별로 먹고싶지는 않은 물건이 나온다.

못 먹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입이 관대한 티엘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다지 내키지 않는 손을 꾸준히 움직였다.

"아첼도 못 하는게 있다니까 뭔가 어색해."

"······날 뭐로 보는거니. 난 뭐든지 잘하는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스물 둘 아가씨일 뿐이라고."

아첼은 뚱한 표정으로 한 입 크게 뜬 수프를 삼켰다.

나름대로의 고충을 토로하는 말이지만, 오히려 투정하는 아첼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여전히 입에 들어가는 것은 맛이 없었지만, 저 웃음소리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풀어졌다.

맛이 좀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 것을.

"아참. 아까 마른 빵 사지 않았나? 그거 먹자, 우리."

"······그럼 이거 치울까?"

"지금 당장."

괜히 고행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결국 수프 대신 마른 빵을 씹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수프를 빙자한 잔해는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나중에 밀가루라도 더 부어 팬케이크라도 만들면 먹을만 할지도 모른다 자위하며.

대강 옷을 뭉쳐 베개로 삼고 모포로 몸을 감던 아첼은 아직까지도 옆에서 피식피식 웃는 티엘에게 그만하라고 정답게 핀잔을 주며 두 다리를 쭉 폈다.

아직 서쪽 하늘에는 빛이 약간 남아있었지만, 하늘 복판에는 이미 별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다.

어느덧 밤이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밤하늘을 보니 최소한 내일까지 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불침번을 서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어차피 켈리아의 마력을 사방에 펼쳐뒀으니 굳이 일어나 있을 필요까지는 없다.

오히려 마력을 쓰면서 괜히 불침번을 서며 이중으로 체력을 소모하느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편이 낫다.

티엘도 간만에 말을 타며 제법 지쳐 눈이 가물가물 하는 눈치였다.

오늘 밤은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끝나면 좋으련만. 아첼은 탄식같은 기도를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바라지 않는 일은 꼭 벌어지는 법일까.

막 잠들려는 순간, 갑자기 먼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첼은 옆에 두었던 활을 집어들며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기 소리처럼 작게 들리지만, 이름모를 짐승의 포효와 함께 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간간히 뒤섞이고 있었다.

"아첼, 들었어?"

"깼구나. 그야 들었지."

티엘은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 모닥불을 보고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마령이 불을 두려워하진 않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면 그만큼 쉽게 물리칠 수 있을테니까.

"······망할, 마령인가 본데. 부탁인데 이쪽으로 오진 마라, 제발."

그러나 뜻밖에도 긴장한 아첼이 중얼거린 말은 티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티엘은 아첼의 중얼거림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지 말라고?

잘못 들은 것일까?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쓰지 마."

아첼은 계속해서 어둠 속을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티엘은 아첼이 마치 털을 세운 고양이같다고 느껴졌다.

싸움을 준비하는 듯, 어둠속에 도사린 아첼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엘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들어갔다.

비명이 들린 쪽에서부터 거뭇한 그림자가 달려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림자에겐 아직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은데다가, 이미 모닥불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티엘의 눈은 어둠속에서 그림자를 자꾸 놓쳤다.

하지만 아첼은 말없이 오른손을 시위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에서는 순식간에 새하얀 전격의 화살이 생겨나며 날카롭게 방전했다.

"거기 멈춰! 쏴버리기 전에!"

아첼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림자는 겁먹은 듯 속도를 줄이면서도 여전히 쉬지않고 달렸다.

아첼은 두 말 없이 그대로 시위를 놓았다.

흰 벼락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그림자의 바로 곁을 스쳐갔다.

그림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고, 다행히 화살은 그를 지나쳐 허공으로 날아가 소멸했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상대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아스트라가 지나쳐가며 순간적으로 빛을 제공한 덕에 그의 모습을 잠깐동안 볼 수 있었던 티엘은 새파랗게 질려 아첼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사, 살려주시오!"

벼락줄기가 지나는 순간 드러난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무언가에 물리기라도 했는지 왼쪽 어깨는 옷과 살점이 뜯겨나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손에 들고있는 것은 창인듯 했지만 중간쯤에서 부러져 있어 그냥 막대기로만 보였다.

무기로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몸을 지탱할 지팡이 대용으로 들고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그의 한쪽 다리 역시도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처들은 이제 막 생긴 듯 뜨거운 피를 쏟아내며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마령, 마령이오! 마령이 나타났소!"

무슨 일인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레가야는 대공국 전역에 펼쳐진 대령결계(對靈結界) 덕분에 생령이 마령화 하는 일이 거의 없고, 혹시 나타나더라도 그 힘과 흉폭성이 어느정도 억눌린다.

생령을 직접 소환해서 부리는 레가야 학파의 마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공화국은 달랐다.

레가야는 대공가에서부터 흑마법사의 핏줄을 타고나기에 국가 차원에서 이런저런 지원이 가능하지만, 공화국에서는 어디까지나 법이라는 명제 하에 묵인하는 수준이었고, 더군다나 공화국에는 레가야처럼 마령의 발생을 억눌러줄 결계가 없었다.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삼분의 일 가량은 마령에 의한 것이다.

성장의 고통과 굶주림을 줄이기 위해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한 끝에 기껏 쌓아올린 지성을 잃고 뒤틀려버린 마령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재앙이나 다름없다.

눈 앞의 사내는, 바로 그런 마령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내는 상처를 꾹 누르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대로 지혈조차 하지 않은 상처로 사내의 좌반신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어갔다.

한 번 피를 맛보고 타락해버린 마령은 이처럼 쉽게도 인간들을 덮쳐 잔혹한 살육을 벌인다.

"상단이 습격당했소. 이런 일이 있을까봐 마법사도 데리고 있었지만 그가 제일 먼저 먹혔단 말이오! 도와주시오! 빨리 가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말거요!"

"왜요?"

순간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농담이라 하기에도 어색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첼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첼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사내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대가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네요. 물론, 마령이 여기까지 쫓아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일부러 찾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왜 제가 당신을 도와야 하죠?"

"다, 당신······!"

"네. 이기적이죠.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거 아닌가요?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더러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거, 그것도 이기적인 말 아닌가요?"

사내가 달려온 곳에서는 아직도 간간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햇병아리인 티엘에게도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마력의 확산이 와 닿았다.

티엘은 아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첼은 티엘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낯설게 보인 것은.

"뭐, 굳이 도움을 원한다면 도와드릴 수야 있지만······. 금화로 이백 칼브람. 그 정도는 이쪽에서 요구할 수 있겠죠. 안그래요?"

"이, 이백 칼브람?"

한 상단이라고 해도 길거리에서 툭 던져주기에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백 칼브람이 아니라 이천 칼브람을 들여서라도 마령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돈이 먼저라는 듯, 그녀는 사내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첼을 향해 주머니를 집어던졌다.

"좀 모자란데. 뭐, 착수금 조로 생각해 두죠. 티엘, 잠깐 있어. 다녀올게. 결계 안에선 나오지 말고."

아첼은 결계를 그대로 둔 채 사내가 도망쳐온 방향으로 달렸다.

방향을 잡는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여전히 마령은 미쳐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마력이 진하게 풍겨져왔고, 거기에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아직 들려오고 있었다.

모닥불을 피워놓는 것 만큼이나 확실한 지표가 있으니, 아첼이 잘못 찾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첼이 어둠 저편으로 모습을 감춘 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마력폭발이 대기를 흔들었다.

아스트라가 울리는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와 해방된 마력이 휘몰아치는 소리, 그리고 마령의 비명.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되어버린 마령과 생령을 지배하는 마법사의 싸움은 너무나 일방적일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우!"

어느 한순간, 늑대를 연상시키는 길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어둠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로 더이상 비명소리나 포효는 들리지 않았다.

사위가 어색한 적막으로 들어찼다.

마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어버린 것처럼, 비명소리보다도 더더욱 끔찍한 적막이 스멀스멀 심장을 파고들었다.

도움을 요청한 사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어둠속을 응시했다.

넋을 놓은 목소리가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내가······, 내가 악마에게 도움을 부탁한건가···?"

"······악마······."

아첼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티엘의 입술은 겨우 그 한 마디만을 내놓은 채 굳어버렸다.

조금 전, 상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해버린 아첼이, 어째서 남을 도와야 하냐는 그녀의 물음이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잠시 뒤, 풀잎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아첼의 걸음소리는 이유모를 낯설음이 가득했다.

조금 전 달려갔을 때 처럼 한 손에 활을 헐겁게 쥔 그녀는 주저앉은 상인의 앞에 차가운 표정으로 멈춰섰다.

그녀는 어둠 속을 향해 가볍게 손을 튕겼고, 그와 함께 티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해제되었다.

"가죠. 확인은 해야할테니까."

"어, 어떻게 됐소?"

"열 여섯 명 중 다섯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다, 다섯? 분명히 자렌은-"

"한 명은 제가 도착하자마자 눈 앞에서 죽었어요. 안됐지만, 사망자는 다섯 명이에요."

사내는 머리를 감싸쥐며 상처입은 짐승처럼 처절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첼은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금 전 상인이 도망쳐왔던 자리로 서슴없이 걸어갔다.

뒤쳐져있던 상인은 조금씩 비척거리면서 그 뒤를 따라왔다.

이내 진한 피비린내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아첼이 티엘의 눈을 가려주긴 했지만, 티엘은 녹슨 쇳물을 몇 배는 농축한 듯한 그 피비린내만으로도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오던 사내는 살아남은 자신의 동료들과 만나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 사이에 억눌린 속삭임이 오가기 시작했다.

비통함에 가득 차있던 분위기가 점점 거칠고 뜨거운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불안해진 티엘은 아첼의 손을 쥐려다, 문득 그녀의 손에 약간의 혈흔이 남아있는 것을 눈치챘다.

화들짝 놀라, 저도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티엘이 흠칫하는 동안, 잔뜩 붉어진 눈을 치뜬 사내는 아첼을 노려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당신이 자렌을 죽였다는게 사실이오!"

"머리 묶은 남자를 말하는거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말장난 하지마! 다들 당신이 애원하는 그를 죽였다고-"

"그럼 마령에게 먹혀버린, 몸뚱이만 살아있는 사람을 내버려 둘까요?"

짜악!

호된 손찌검이 아첼의 뺨에 날아들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아첼이었지만, 찢어진 입술에서 붉은 피가 가늘게 흘러내렸다.

잠시 혀를 굴리던 아첼은 입술 뿐만 아니라 입 안쪽도 찢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며 피섞인 침을 뱉어냈다.

그녀를 때린 상인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숨을 몰아쉬다, 한참 후에야 씹어뱉듯이 한 마디를 남긴 채 뒤돌아섰다.

"저주받을 흑마법사들······. 마령이나 당신들이나 다를게 없어."

짧은 폭풍이 끝났다.

아첼은 터진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피섞인 침을 뱉어내고 티엘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평소라면 괜찮냐고 물어왔을 티엘은, 그녀를 마주보지 않은 채 땅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아첼은 몇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간 뒤 조용히 티엘의 이름을 불렀다.

"티엘."

티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스티엘."

즐거웠던 시간은 이제 다 흘러가버린 듯, 냉랭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아첼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티엘과 조금 거리를 둔 곳에 앉았다.

활을 놓고 가방을 뒤져 조금 지저분한 천 조각을 꺼낸 아첼은 반대쪽 손에 들고있던 것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엉겨붙어있던 피와 흙이 떨어져나간 뒤 녹황색 띤 돌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의 돌 너머로 희미하게 반대편이 비쳐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돌 자체가 녹황색인 것이 아니라, 투명한 껍질 안쪽으로 녹황색의 안개같은 기운이 조금씩 흐르고 있는것을 알 수 있었다.

"티엘, 이게 뭔지 알아?"

티엘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첼은 상관 없다는 듯 돌을 손바닥 안에서 살짝 굴린 뒤 천조각 위에 내려놓았다.

"기사급 생령의 심장석이야. 조금 전, 그 남자를 습격한 녀석이지."

굳게 닫힌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공화국은······ 레가야 이상으로 생령이 많아. 육신을 구성하며 지성을 키워나가려면 자신의 것이 아닌 마력을 먹어야지. 하지만 자연상태의 생령은 이성을 갖추기가 어려워. 굶주린 상태인데도, 내키는대로 사람을 습격해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치고, 그 지독한 허기를 참아내야만 이성을 잃지 않은 채 성장할 수 있어. 그게 얼만큼 힘든 일일까?"

육신이 없는 생령은, 의외로 불안정한 존재다.

힘과 의지는 있으나 이 세계에 속해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없기에,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마력으로 육신을 구성해 대지에 선다.

그러나 심장석이 성장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그 성장을 가장 쉽고 빠르게 촉진시키는 것은 다른 자의 마력, 다시말해 다른 생령이나 마법사의 마력이다.

하지만 이 넓은 땅에서, 갈증을 채워줄 정도의 생령을 만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자연적으로 고이는 마력도 한정되어있다.

그 상황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피와 살을 바탕으로 육신을 만드는, 그 끔찍한 갈증에서 벗어나는 또다른 방법을 택하는 자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결과가 애써 쌓아올린 지성을 모두 허물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갈증은 지독할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레가야와는 달라. 여긴 생령들을 보호해줄 결계도 없고, 그들이 목말라하는 마력도 그렇게 흔하진 않지. 그래서 이 땅에서는 쉽게 사람을 믿어선 안돼. 언제 마령에게 낙인이 찍혔는지, 언제 마령에게 먹힐 지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한가득이거든."

아첼은 심장석 위에 자신의 마력으로 글자를 새긴 뒤 주의깊게 천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여며 한 구석에 밀어놓은 그녀는 자신의 모포를 끌어당겨 몸에 휘감았다.

"하아,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어쨌건······. 너는 보다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어설프게 이기적으로 살기엔······, 세상이 너무나 무서우니까."

그제서야 티엘은 고개를 살짝 들어 아첼을 보았다.

하지만 아첼은 이미 눈을 감은 채 돌아누운 상태였다.

티엘은 아첼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다시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 뒤 나흘간, 두 사람 사이는 서먹하기만 했다.

두 개의 도시를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점차 산맥이 가까워지자 말을 몰던 티엘의 체력도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그러나 티엘은 조금 의기소침해 있을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첼은 그런 티엘에게 말을 붙이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지은 뒤 티엘보다 조금 앞서서 말을 몰곤 했다.

마음이 복잡한 것은 티엘도 마찬가지였다.

아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첼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선을 긋는 아첼의 모습,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마저 망설임없이 죽였다고 말하는 싸늘한 표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자매처럼 따랐던 아첼의 따뜻함을 덮어버릴 정도였다.

하염없이 레가야로부터 도망치는 처지, 다른 사람과의 호감, 냉정, 계산적인 삶······.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을 휘몰아치며 열 세살 밖에 되지 않은 그녀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남아있는 끈은 있었다.

공화국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던 날, 아첼은 티엘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 주었다.

'그래, 너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있어야겠지. 얼마든지 기다릴게. 뭐······. 그동안 할 일도 없을테니 한 번 활시위라도 걸어봐.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하는거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한번 해보렴. 그 때 쯤이면······, 네 가슴에 패인 구멍도 조금은 메워지겠지.'

티엘은 자신의 안장 한쪽에 매달린 활을 말없이 매만졌다.

아첼과 말을 하지 않은 이후로 어느 순간부터 생겨난 버릇이었다.

낮과 밤이 네 번이나 교차하는 동안 티엘은 벌써 몇 백 번이나 활시위를 걸어보려 시도했다.

아첼과 제대로 된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면서 그녀가 시킨 일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게 어딘지 우스웠지만, 적어도 지금의 티엘에겐 이것이 전부였다.

다각거리는 말편자 소리에 맞춰 여유롭게 흔들리는 활을 바라보던 티엘은 다시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활을 들어올렸다.

사실 이런 강궁을 하루 아침에 단번에 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교적 약한 활로 시작해 짧게는 반 년,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자신의 몸을 가꾸고, 그 뒤에 다시 활을 바꿔가며 결국에는 활을 몸에 새기는, 일종의 업(業)을 쌓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 주일도 채우지 못한 어줍잖은 솜씨로, 건장한 어른들조차 제대로 걸지 못하는 강궁을 부리는 것은 당연했다.

팔이 떨어질 것 같은 아픔을 참고서 가까스로 쥐고있던 활이 고집스럽게 튕겨나갔다.

활을 다룰 때 팔 힘만이 아닌, 전신의 근육을 유연하게 써야 한다는 것조차 아직 모르는 티엘로서는 당연한 실패였다.

"으큭!"

하지만 전신의 힘을 다 끌어내도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나 굽는다.

아첼의 활과 마찬가지로, 새로 산 활 역시 시위를 풀어놓았을 때 반대 방향으로 굽어버린다. 즉, 부린 상태의 활을 반대로 꺾은 뒤 시위를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티엘의 힘으로는 반대로 꺾기는 커녕 굽어있던 방향으로조차 구부릴 수 없었다.

사실, 생령의 사체 일부를 사용해 만든 이런 무기들은 원래부터 무기를 익숙하게 다뤄온 사람들 조차도 애먹을 만큼 억센 물건들이다. 그런 것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초짜가 다루자니 마음처럼 될리가 없다.

피잉! 부들부들 떨리던 활 몸이 거칠게 튕겨지며 활시위가 티엘의 뺨을 스쳤다.

"아-"

티엘은 무의식적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실이라고는 해도 일부러 질기게 만든 물건인지라 볼에 가볍게 상처가 나버렸다.

시위를 얹은 뒤 칼날처럼 써도 될 만큼 단단하고 질긴 물건이다보니 활을 당길때도 마력으로 손을 보호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잘릴 위험까지 있는 것이다. 시위를 거는 것만으로도 그리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하아······."

가슴이 답답해진 티엘은 저도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해. 힘들면 쉬어가면서."

아첼은 돌아보지 않은 채 툭 던지듯이 말했다. 순간 티엘은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나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물론 아첼이 마령으로 변하거나 티엘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일은 없었다.

며칠 전 밤의 싸늘하던 아첼의 얼굴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평소대로의 아첼이었다.

티엘의 뺨에 긁힌 자국을 발견한 아첼은 가지고 다니던 연고를 손에 묻혀 티엘에게 다가왔다.

순간 티엘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알아차린 아첼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티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하지만 자, 됐다. 혼잣말처럼 말하며 다시 원래대로 거리를 벌리는 아첼의 얼굴은 상당히 울적해보였다.

'미안······.'

자신이 아첼에게 겁을 먹는 모습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떨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한층 더 우울해진 티엘은 별 소득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금 활을 쥐었다.

그때 갑자기 아첼이 자신의 활을 꺼내 천천히 시위를 걸었다. 티엘은 마령이라도 나타난건가 싶어 움찔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마령은 커녕 산 새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느끼지 못한 마력을 느낀 것일까?

하지만 잔뜩 긴장해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아첼이 쏠 때 까지조차 아무런 이상도 찾을 수 없었다.

피잉!

아첼의 손을 떠난 아스트라가 맥없이 수풀을 꿰뚫었다.

애먼 땅을 파헤치며 흙먼지가 풀썩 솟구쳤지만, 그 곳에는 짐승도, 마령도, 그밖에 두 사람이 주의해야 하는 그 어떤 존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못 본건가?"

아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활을 풀었다.

잔뜩 긴장했던 티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긴장했네. 아첼도 긴장한걸까? 전엔 한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첼을 부르려는 순간 굳어버린 혀는 간신히 신음 비슷한 소리만 냈을 뿐이었다.

아첼을 불러세우려던 손으로 그저 허공만 움켜쥔 티엘은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활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첼은 그 뒤로도 십 분에 한 번 꼴로 그런 실수를 하곤 했다.

몇 번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던 티엘조차 반복되는 긴장에 문득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오늘따라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첼이 표적을 착각하는 일이 있을리가 없었다.

어쩌다 한 번이라면 몰라도 수 차례나 반복하면 고의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오늘따라 괜히 민감한 것 같네. 놀랐다면 미안해."

아첼은 또 다시 활 시위를 풀며 대답했다.

기가 막힌 티엘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첼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그때 문득 아첼의 손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수인(手印)?'

아첼의 손은 평소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활을 힘있게 잡고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손가락을 펼친 각도나, 활을 짚은 위치 등은 기묘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아첼이 시위를 거는 속도가 매우 느렸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응?"

"아, 아무 것도······."

혹시 나한테 보여주려고 했던 거야?

그 짧은 말이 왜 그리도 힘들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첼은 일부러 티엘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웃었다.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으니까.

어느 정도 숙련된 마법사라면 마력을 끌어올리는 데 수인같은 것은 필요없다. 하지만 티엘은 마력 자체를 끌어낸 적이 없는 초심자다. 천천히, 마력을 다룬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티엘은 다시 자신의 활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활 몸에 박혀있는 서펜트의 비늘이 매끄러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자신의 마력으로 적셔보지 못한 자신의 활.

아첼이 보여주었던 수인을 맺은 티엘은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삼키기 시작했다.

다각,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리는 것이 점점 멀어져간다.

일종의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은 초보 마법사들이 마력을 느끼기 위해 흔히 하는 방식이었다.

아직까지 마력 탐지조차 하지 못하는 햇병아리중의 햇병아리인 티엘이라도 마법사 집안의 후예였다. 명상을 통한 망아(忘我) 과정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잠시 애먹던 티엘은 한참 후 자신의 마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략 십여 분.

자신의 마력을 인식하기까지의 시간은 대공가에서 연습할 때보다는 확실히 짧아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실전은 불가능할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더구나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마력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고집스러운 마력은 단 한 번도 티엘의 부름에 응해준 적이 없었다.

티엘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든 것은, '실패해도 혼을 낼 아버지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카르티치스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거나, 아직까지 생령조차 부르지 못하는 쓰레기라는 둥 그녀를 상처입히는 폭언은 없다.

전신을 찍어누르는 가혹한 처벌도, 경멸어린 싸늘한 눈초리도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작은 새처럼 떨리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급할 거 없어. 아첼의 말처럼, 천천히 해도 돼. 천천히, 천천히······.'

비유하자면 얼어붙은 호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흘러가는 모습도 보이고,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 처럼 가깝다. 하지만 손을 담가 그 물을 꺼내오진 못했다.

아무리 호수의 물이 많더라도 떠낼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티엘은 다소 긴장을 품은 채 마력을 끌어당겼다.

몇 번이나 겪어왔던 줄다리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 자리를 지키는 마력은 언제나 그래왔듯 고집스레 티엘의 의식을 뿌리쳤다.

하지만 불안하게 떨리는 마음이 그대로 흘러들어간 탓일까.

마력이 다시 멀리 물러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돼······. 가지 마······.'


작가의말

생령은 이 세계의 존재이면서도, 육을 가지지 못한 영체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이런 생령은 성장단계에 따라서

의지를 갖게 된 마력 덩어리를 ‘요정’이라 부르고

자아가 형성되며 의사적인 육체를 구현, 여기에 마력의 속성이 확연히 나타나면 ‘정령’.

육신을 완성한 단계가 ‘기사’.

마지막으로 인간계에 섞이기 쉽도록 완성한 육신을 해체하여 새롭게 구성한 최상위권 생령이 ‘대정령’.


이와 별개로 ‘용’은 막 태어났을 때는 육체/속성만 있지 요정보다 약하지만, 완전히 성체가 되면 대정령 이상으로 강한 개체로 자라납니다. 진화 트리가 전혀 다른 케이스.


용과 대정령이라는 명칭은 홍염의 성좌의 영향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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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78 하무린
    작성일
    19.07.17 18:32
    No. 1

    잘보고 가요^^
    건필하시고 행복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LWintere..
    작성일
    19.07.17 21:13
    No. 2

    매번 댓글 감사합니다 :)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3 ch******
    작성일
    20.01.02 14:36
    No. 3

    사람들 반응이 과하게 느껴지긴 하네요 저런 일 많이 겪었을 거 같은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LWintere..
    작성일
    20.01.02 15:38
    No. 4

    상인들이 저렇게 반응하는건 전반적으로 흑마법사의 인식이 워낙 나쁘다는 것이 더 큽니다.
    (백마법사였어도 욕은 꽤 먹었을거에요. 단지 대놓고 삿대질만 안할 뿐.)
    음... 위쳐 시리즈에서 위쳐에 대한 인식이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더군다나 위쳐와는 달리 백마법사와 영격사라는, 마령과 대적할 수 있는 또다른 집단들이 있기도 하지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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