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조회수 :
19,981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17 16:30
조회
136
추천
6
글자
40쪽

4장-방황彷徨 (4)

DUMMY

"문제가 찾아왔다."

여관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포장된 옷무더기 사이에서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올로비스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 너머로 슬쩍 보이는 티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내내 리아에게 끌려다닌 모양새다.

때때로 생각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동료의 행태에, 괜히 휘말려버린 티엘에게 동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리아는 되려 근심 걱정으로 속이 쓰린 듯한 올로비스의 표정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응수하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 여관비 모자라? 보태줘?"

"웃겠군. 돈, 많은 여유 있다. 너의 상식 소유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 다친 사람 끌, 아니, 데리고서, 어딜 가고 와?"

"어디 갔다 오긴. 보다시피 옷 몇 벌 사줬는데?"

올로비스의 미간에 다시 굵은 주름이 잡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빼먹었다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의원 방문은?"

"······아차!"

열 두 벌, 그것도 속옷을 제외한 수가 '몇 벌'이라는 검소한 표현에 어울리는가?

아니, 그 이전에 다친 사람이 있다면 옷보다 의원을 찾는게 먼저 아닌가?

리아는 뒤늦게 머리를 감싸쥐며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고, 올로비스는 그런 리아를 바라보며 넌더리가 난다는 듯 이마를 싸쥐었다.

자신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올로비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티엘은 뭐라 끼어들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로 떨떠름하게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침울하게 신음을 흘리던 리아는 이내 제정신을 차렸다.

티엘을 제대로 된 의원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실수지, 문제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다시 데리고 나가면 되는 일을, 괜히 문제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뭔데?"

"공문. 돌아왔어."

올로비스가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 곳에는 커다란 수반(水盤)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찰랑찰랑할 정도로 물이 담긴 대야 안에는 뜻밖에도 한 장의 종이가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실물은 아니다.

특정한 마법식을 새긴 물건을 매개로 물에 사물을 비추는, 투영주문의 일종인 '그림자 던지기'다.

촉매로 삼을 물건에 걸어두는 주문에는 공간계 마력이 필수이기 때문에 주문의 난이도는 굉장히 높지만, 주문의 특성상 전달이 빠르고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종종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본래라면 서로의 얼굴을 비춰 원격으로 대화를 나누는 데도 사용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문서가 오가는 데 그친 듯 했다.

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면을 살짝 건드렸다.

돌돌 말려있던 두루말이의 그림자가 스르륵 펼쳐졌다.

잔뜩 긴장한 여기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수면에 떠오른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아실리아 프로베인. 우선은 알제르망에 있어야 할 네 녀석이 가이신에 있다는 이유부터 물어야할테지만, 이번엔 그 점은 굳이 문제삼지 않겠다.'라고? 로비, 나 이거 끝까지 읽기 무서운데······?"

"읽지 않으면 더 혼나. 동의 있겠지?"

"아이씨······."

울상을 지은 채 얼마간 조용히 글을 읽던 리아가 다시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올로비스는 허겁지겁 몸을 날려 탁자에서 떨어지는 물건들을 잡아챘다.

"뭐야! 보통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파견되는거잖아!"

"사람, 팔람에 없어. 지난 주 몇 사람이나 부상을 가져왔어."

"메리는 한 사흘쯤 놀고 있었잖아!"

"아메르티는 파견."

올로비스는 광분하는 리아를 달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공문을 짚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차분한 태도가 오히려 리아의 분노를 격발시키는 원동력이 된 듯 했다.

길길이 날뛰는 리아를 보며 여관 문밖에 무슨 일이 있나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올로비스와 티엘은 침착하게 리아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채 일행이 아닌 척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리아는 다쳤거나 파견나간 동료들을 씹다못해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우와! 결국 로비랑 나는 당장 파견지로 꺼지라는거네? 세상에, 좀 바꿔주지······."

투덜거리던 리아가 수반을 확 떠밀었다. 덕분에 티엘은 공문의 마지막 부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확보한 소녀는 근방에서 복귀중인 린델에게 인계하도록. 신전에 들러 치유 주문서를 구하라고 일러두었다. 설마 따라온다는 비상식적인 말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지. 상세 보고는 복귀 후에 듣겠다. 리아는 알제르망의 일이 끝나는대로 조속히 복귀할 수 있도록. 미안하지만 올로비스는 리아 대신 소르위에게 지원을 부탁해두겠다. 예정보다 하루에서 이틀 가량 지원이 늦어질테니 단독으로 무리하지말고 기다리도록 해라. 두 사람 모두 무사 귀환을 바란다. 이상. 메이트리아크 카르날 오블리비언.'

리아가 벌레씹은 표정을 한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

깨끗하고 정갈한 글씨였지만, 가늘고 예리하게 그어진 선 때문에 펜이 아니라 칼날을 휘둘러 새긴 듯 싸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필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 정도였다.

겨우 진정한 리아 역시 한층 더 긴장한 모습으로 연거푸 공문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연신 머리를 쓸어넘기며 혹여 빼먹은 말이라도 있는지 몇 번이나 살피는 모습은 일종의 공포까지 얼비치는 것만 같았다.

내용을 빠짐없이 확인한 리아는 진저리를 치며 수반에 손을 담갔다.

수면에 떠올라있던 편지의 모습이 훅 사라졌다.

물 위로 다시 빠져나온 리아의 손에는 작은 금속판이 들려있었다.

옷자락으로 물기를 슥슥 닦아낸 금속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올로비스는 익숙하게 금속판을 잡아채 허리 뒤쪽의 작은 가방에 집어넣었다.

옷가방을 뭉개며 탁자에 늘어져있던 리아는 탁자에 튄 물방울로 손장난을 하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에구, 누가 교대좀 해줄거라고 기대했는데 역시나구나. 더 혼나기는 싫고, 어쩔 수 없지, 뭐. 그래서, 이거 언제 온거야?"

"너랑 이스티엘 양, 외출에 이른 뒤."

"그럼 린은 언제 쯤 온다는 거지······. 아, 망할. 어쩐지 곧 떠날 것처럼 채비하고 있더라니."

올로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곁에는 낡은 천으로 칭칭 감아둔 창이 비스듬하게 기대 세워져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큼직한 가방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리아에게 공문이 온 것만 전해주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사복처럼 보였던 겉옷의 소매 안쪽으로 특유의 검은 제복의 소맷자락이 살짝살짝 보였다.

자신의 창과 가방을 짊어진 올로비스는 탁자나 작은 소도구를 쳐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티엘에게 다가왔다.

"만남, 좋지는 않았지만. 좋은 Fageich······, 아니, 좋은 부탁 요구합니다. 이스티엘 양."

"티엘이면 돼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감사. 좋은 여행 예정을 소망한다."

크고 단단한 손이 악수를 청해왔다. 티엘은 막연한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올로비스의 손을 맞잡았다.

이어서 리아와 간단히 인사를 마친 올로비스는 큰 걸음으로 빠르게 여관을 나섰다.

루온은 가이신에서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야 나오는 중소도시였고, 가이신에서 마차를 구하지 않는다면 제법 서둘러야 늦지 않을 거리였다.

리아의 말에 의하면 검은 가지의 기사들은 적게는 한 명, 많게는 세 명 정도가 각지로 파견되어 마법 관련 범죄를 처단하거나 마령 강림지를 토벌한다고 한다.

이번에 리아와 올로비스는 후자에 속했다.

특히 올로비스는 평야지대에 나타난 소규모 강림지를 맡았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점차 규모가 커져 피해도 기하급수로 늘어나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몇 명의 마법사가 붙어 정화작업을 마친다면 꽤 오랜 기간 마령의 강림을 일어나지 않는다.

지맥 정화에 필요한 최소 인원은 세 명.

루온의 경우 해당 영지에 있는 마법사와, 기사단에서 파견된 두 명의 마법사가 시간을 들여 정화작업을 시도할 예정이었다.

티엘은 무심결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활은 위층의 방에 놓아두었지만, 익숙한 무기와 형태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지난 3년간 티엘이 해온 것은 단순한 사냥 뿐이었다.

리아의 말로는 아무리 규모가 작더라도 한 명의 마법사만으로는 정화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즉, 티엘이 그동안 해온 일들은 다가올 재앙을 조금 늦춰두는 정도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차후 여유가 생기면 기사들을 파견하거나, 아니면 용병 마법사를 고용해 가이신의 지맥도 정화를 해둬야 한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무력감이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날 밤 강림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

지난 일을 후회해도 의미는 없지만, 저도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항쟁의 날 있었던 일들조차도 희미하게 빛바래 과거로 묻혀가는데도, 그날 밤의 기억만큼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남아 티엘을 옭아매고 있었다.

결국 티엘은 의식적으로 그날의 기억에서 눈을 돌렸다.

티엘이 과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동안 리아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짐을 정리했다.

그러나 사실 근접전투 위주로 전열에 서는 올로비스와는 달리 후방지원에 익숙한 리아의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굳이 시간을 들여 정리할 것도 없었고, 오히려 오늘 사온 티엘의 옷이 리아의 짐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티엘 쪽이었다.

본래라면 티엘의 짐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늘 리아가 폭주한 덕에 마차라도 끌고오지 않는 이상 다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짐이 생겨버렸다.

이런 꼴이 될 것을 옷가게에서부터 예상했던 티엘은 한숨을 푹 쉬며 포장지를 뜯어 옷을 세 벌만 골라냈다.

그리고 나머지 옷들을 큼직한 상자에 넣은 뒤 여관 주인을 불렀다.

"여행 중에 입을만한 옷이랑 바꿔주세요. 모자라면 돈은 더 드릴게요."

"자-, 잠깐! 그거 오늘 산-"

"이거 다 들고 움직일 수는 없어요."

그나마 티엘이 남긴 옷들은 비교적 색이 어둡고 그나마 활동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옷 뿐이었다.

팔람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당장 갈아입을 옷이라면 몰라도, 그 이상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하지만 기껏 사준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은 채 처분해서인지, 리아는 서운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단순히 장난인 줄 알았던 티엘은 정말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얼굴에 흠칫 놀랐다.

"리, 리아? 우, 울어요?"

"너무해애애애. 암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가차없이 버리다니."

"죄송해요. 대신 남겨둔 옷은 잘 입을게요."

"······그것도 가다가 버리는 거 아니지?"

"설마요."

아무래도 눈물까지 흘린 것은 연기였던 모양이다.

여전히 토라진 표정이었지만 얼굴은 금새 말짱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여러모로 피곤한 사람이다.

그러나 짧은 실랑이 끝에 아홉 벌이나 되는 옷이 여관 주인에게 넘어갔다.

몸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니 그대로 팔면 제법 짭짤할 터였다. 그런 옷을 헌 옷과 바꾸자니 나름대로 횡재인 셈이다.

덕분에 지나치게 받기만 하는 것은 거부감이 든 것인지, 잠시만 기다리라며 안채로 들어간 여관 주인이 다시 되돌아오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딸이 멀리 다닐 때 입었던 옷인데, 이런 옷이면 되겠니?"

여관 주인의 손에는 면으로 만든 셔츠와 바지, 그리고 모직 재킷이 들려있었다.

색감이나 만듦새에서 조금 낡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못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티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주인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티엘은 직접 갈아입어보려다, 아직 불편한 다리를 생각해 몸에 대 보는것으로 타협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티엘에게는 조금 컸다.

"바지만 줄여주시겠어요? 모양은 틀어져도 괜찮으니 가급적 튼튼하게, 되도록 빨리요."

어차피 셔츠나 겉옷이라면 리아가 사준 옷들로도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말을 탈지 걸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입고 다닐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티엘의 요구대로 대강의 치수를 잰 주인은 얼마 지나지않아 고친 바지를 가져왔다.

하지만 실제로 입고 움직여야 할 옷이니,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티엘은 조금 고심하다, 한 다리로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 직접 입어본 뒤 아래층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리아의 눈이 있는만큼 겉에는 오전에 샀던 옷을 다시 껴입은 상태였다.

바지는 제법 튼튼하면서도 얇은 편이라, 속바지로 입어도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한쪽 다리로나마 활발하게 움직이며 그리 거치적거리는 느낌은 없었으니 여행복으로 써도 문제 없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티엘은 만족한 얼굴로 땀을 닦으며 다시 앉아있던 자리를 향해 외다리 걸음을 시작했다.

"너 보기보다 활동적이네. 생긴건 딱 공주님인데말이지."

한쪽 다리로만 팔짝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안쓰러운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가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한 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티엘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 잠깐의 동요를 본 리아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령처럼 발소리도 없이 리아 옆까지 다가온 티엘은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이해해주세요."

"미안. 주의할게."

기사단원 중 이야기거리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아무렇게나 타인의 과거에 발을 들여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리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티엘 역시 이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리아가 조금 말을 붙이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이번에는 티엘 쪽에서 망설임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이야기속의 기사네요."

"응?"

"목숨을 걸고 범죄자를 잡고 마령과 싸우는 영웅. 그렇잖아요?"

리아의 입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걸렸다.

"이젠 남 일도 아닌데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 확실히 흑마법사랑은 잘 안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이고. 왜, 게시판에 올려줄까? 흑발자안의 미소녀 마법사, 세계를 구하다! 라던가. 멋지지 않아?"

"퍽이나요."

기사단에 몸을 담는 것은 이제와서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 자체에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지킨다는 점은 조금이나마 티엘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 번 마령의 손에 누군가를 잃었던 적이 있기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일을 겪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설령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기피한다고 해도, 스스로 원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은 남을 것이다.

'자부심?'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변명일 뿐이었다.

무심코 팔을 감싸쥔 손끝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닿았다.

그 상처는 리아나 올로비스와 싸우며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그 보다 전, 밤새도록 마령과 싸우며 생긴 상처였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 상처를 꽉 움켜쥐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숭고한 이념따위, 티엘이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살의 뿐.

의미없는 분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상 죽기를 바라며 싸워온 짐승.

과연 지켜야 할 사람과 죽여야 할 마령 중에서, 어느 쪽의 무게를 더 가치있게 볼 것인가.

티엘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오세요, 손······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여관 주인은 반색하며 새 손님을 받아들이려다 어째서인지 뒷말을 흐렸다.

티엘은 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검은 가지를 상징하는 새카만 제복이 가장 먼저 보였다.

막 헝클어지려던 감정이 뚝 끊어지며 티엘의 관심이 세 번째 기사를 향해 쏠렸다.

이번에 나타난 기사는 티엘과 비슷할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수수한 인상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왼손에만 낀 가죽장갑은 은으로 자수를 새긴 화려한 물건이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장갑에서는 은은하게 마력의 잔향이 느껴졌다.

저 장갑이 그녀의 영장인 것일까.

서안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그녀가 바로 린델, 티엘을 팔람까지 데려갈 인물일 터였다.

반쯤 감은 눈을 한 채 여관 안을 빠르게 훑어본 린델은 리아를 발견하고는 죽어가는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죽겠네요······. 여전히 대책없이 일 저지르는군요. 빚 진줄 알아요."

"설마 말 타고 온 거야? 너 제법 멀리 있었을텐데?"

린델의 입꼬리가 둥그렇게 곡선을 그렸다.

즐거움이 아닌, 분노를 담은 일그러진 미소였다.

"아, 그거라도 알아주니 다행이네요. 덕분에 사흘 거리를 하룻밤새 주파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거든요? 일 끝내고 느긋하게 복귀하려는데 추가근무 서는 기분 알아요?"

아닌게 아니라 린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한 상태였다.

눈밑은 검게 죽어있었고 입술도 몇 시간이나 찬 바람을 맞으면 온 것처럼 하얗게 말라들어가고 있었다.

독살스럽게 내뱉는 말도 지치고 기운없는 목소리다보니 얄밉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조, 좀 안쉬어도 되겠어?"

"단장님이 최대한 빨리 안오면 죽이니 살리니 하실 거라는거 알죠? 별로 도움 안되는 걱정보다는 일단 옆의 아가씨부터 소개 해주세요."

린델은 한 눈에 보기에도 제법 쌀쌀맞은 투로 리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리아도 상대에게 빚을 졌다는 것 때문인지, 올로비스 때와는 달리 지분거리는 정도는 훨씬 적었다.

"아, 응. 이쪽은 린델, 평기사중 둘 밖에 없었던 여기사야. 이쪽은 티엘, 우리 귀염둥이 신입."

"이스티엘이에요."

"린델 올핀. 권호는 없어요. 티엘 씨······, 인가요? 조금 더 멀쩡한 상태로 만났다면 좋았을텐데······."

멀쩡하다는 것이 티엘을 말하는 것인지, 린델을 말하는 것인지는 다소 애매했다.

그러나 간단히 인사를 마친 린델은 곧바로 허리춤의 작은 가방을 뒤져 손 안에 들어갈 정도의 갸름한 원통을 꺼냈다.

원통 안에는 아이넬라의 성표로 봉인한 두루말이가 하나 들어있었다.

은빛 봉랍(封蠟)을 찢고 펼친 두루말이는 치유의 주문을 담은 주문서였다.

주문서의 끄트머리에는 둥그렇게 말린 천이 자그맣게 그려져있었다.

치유의 대천사, 사라엘의 사제가 작성한 고위 치유주문서라는 표식이었다.

주문서를 찢은 린델의 손에 옅은 노란빛을 띄는 빛무리가 맺혔다.

빛무리는 린델의 손을 따라 티엘의 상처 부위에 녹아들었다.

붕대를 풀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다리를 둔하게 누르던 통증은 상당히 옅어졌다.

"어때요? 걸어다니는 것 정도는 이제 별 무리 없을거에요."

확실히,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던 조금 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가벼운 움직임은 문제없이 할 수 있을 듯 했다.

치유주문서처럼 값비싼 물건을 써본 적이 없었던 티엘은 그 효과에 놀라워하며 상처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

어느새 새 살이 차오른 상처는 조금 긁힌 수준의 경미한 부상만 남긴 채 싹 아물어 있었다.

근육이 찢겨나간 것이 겨우 어제의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얼마짜리 산 거야? 나도 하나쯤 사서 가지고 다녀야 하려나······."

"전위도 아니고 방어전에서만 활약하면서 치유주문서를 어디다 쓰려고요? 애초에 그거 살 돈이 수중에 남아있기나 한가 몰라."

"그, 그 정도는 아닐걸······? 나, 나도 절약은 한다고······."

"잠꼬대 그만하고 출발해야지 않아요? 시간 여유 없을텐데?"

말투는 제법 날카로웠지만, 그러면서도 제법 친한 듯 초췌한 얼굴에서도 드문드문 미소가 얼비쳤다.

티엘이 오기 전까지, 일반 기사들 가운데선 둘 뿐인 여기사였다고 하니 각별히 친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실제로 린델이 지분거리며 리아를 놀리는 내용은 상당히 다채로웠다.

서로 건드릴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다는 증거다.

"쳇, 알았어. 이 깍쟁이 같으니. 나중에 보자고."

"리아도 괜히 다치거나 사고치지 말아요. 무사히 팔람에서."

"팔람에서."

두 기사의 주먹이 가볍게 맞부딪혔다.

"티엘, 너도 팔람에서 다시 보자!"

경쾌하게 인사를 건넨 리아는 미련없이 문 바깥으로 나섰다.

말로는 투정을 부리거나 빈둥거려도, 무언가를 해야 할 때는 깔끔하게 나선다.

함께 한 것은 겨우 하루 뿐이었지만, 그런 리아의 면모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도 갈까요?"

부드러운 얼굴로 리아를 배웅하던 린델은 빙그레 웃으며 티엘에게 제안했다.

티엘은 챙겨두었던 짐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뜻밖에도 린델은 마구간 앞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마구간은 텅 비어있었다.

하룻밤새 사흘 거리를 달렸다는 말을 했으니 응당 말을 탔겠거니 여겼던 티엘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다리로 그 거리를 주파할 수는 없다.

완전히 육화한 생령이나, 혹은 매우 드물게 보이는 소환계열의 주문을 다룰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쪽이던 승용물을 소환하는 쪽이라면 제법 넓은 공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린델은 마법진을 그리는 대신 허리춤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티엘 씨? 티엘? 혹시 말 탈 줄 알아요?"

"탈 줄 알아요."

"다행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 하거든요. 아, 여기 있네."

한참을 달그락거린 끝에, 린델은 두 개의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꺼내들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작은 말편자였다.

흔들릴 때마다 방울처럼 짤랑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안을 비우고 작은 구슬이나 쇳조각을 넣어둔 것 같았다.

겉모습만으로는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린델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즐기며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든 방울편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린델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일렁이며 커다랗게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그 안으로부터 마찬가지로 새카만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윤기조차 흐르지 않는 짙고 매끄러운 털을 지닌 두 마리의 흑마였다.

생령은 아니었다.

완전히 동일한 모습의 생령은 굉장히 드물고, 일반적인 생명체의 모습을 그대로 본뜨는 경우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생령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짙고 순수한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티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말의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뜻밖에도 대리석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다.

"인형? 갑자기 어디서······?"

르비아가 인형을 다루기도 했기에 인형사라는 개념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본체를 따로 두는 방식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복잡한 마법진이나 막대한 마력의 소모도 없이 불러낸다는 점이 놀라웠다.

하지만 린델은 맞춰보라는 듯 미묘한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잠시 인형을 쓰다듬어보던 티엘은 인형의 몸체가 마력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술자와 주변의 마력을 긁어모아 그 자리에서 간단히 형체만 갖추는 형식이었다.

티엘의 눈으로 보자면 인형술이라기보다는 생령 자체를 소환하는 제국식 흑마법에 가까웠다.

신기해하는 티엘의 곁에 다가선 린델은 티엘처럼 살아있는 말을 대하듯 인형마의 콧잔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인형사를 만나본 적이 있는 말투네요? 그럼 굳이 설명은 없어도 되겠네요. 사실 속도는 빨라도 체력소모는 더 크거든요, 이거."

살아있는 말이라면 장시간 전력질주를 유지할 수 없지만, 인형이라면 다르다.

최대 속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기수의 체력이 한계에 달하기 전까지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물론 인형을 유지하는 린델은 조금 더 빠르게 지칠테지만 그것을 감수할만한 이점은 있는 셈이다.

린델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른 티엘은 가볍게 말의 배를 찼다.

호흡도,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 돌덩이에 앉은 느낌이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인형은 티엘의 의사를 알아듣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익숙한 솜씨로 티엘의 곁을 따라잡은 린델은 문득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녹갈색 덩어리를 꺼내 티엘에게 건넸다.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야스티안이었다.

잘게 간 향초를 꿀이나 설탕에 개어 말린 듯 했다.

"지금부터 굉장히 고생할텐데, 그거 입에 물고있으면 도움 될거에요."

처음으로 마른 잎을 생으로 씹었을 때 톡톡히 보았던 그 효능은 아직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지독한 쓴맛과 혀가 뽑힐 것만 같은 향도 선명하게 떠올린 티엘은 조금 부담스럽게 마른 풀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린델이 그 흉악한 물건을 망설임 없이 입에 머금는 것을 본 티엘은 조금 뒤에 찾아올 고난을 예감하며 야스티안 덩어리를 입에 물었다.

지옥같은 질주가 멈춰선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였다.

막 땅거미가 깔려가는 시간, 간신히 멈춰선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온 티엘은 허리가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을 삼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인형마는 지치지 않는다는 장점을 얻은 대신, 살아있는 말과 달리 땅을 박차는 충격을 거의 흡수하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장 세 시간 동안 돌덩이에 두드려맞은 셈이니 그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몸이 멀쩡할리가 없었다.

"내가 왜······, 그 모양이었는지······, 이해하죠······?"

송장같은 꼴이 된 것은 린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미 하룻밤을 똑같은 일로 보냈던 린델은 티엘 이상으로 녹초가 되어 흐느끼는듯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린델의 발음은 굉장히 부정확했다.

예의 그 향초 덩어리를 씹으며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형을 움직이는 마력까지 충당하는 린델이 졸기라도 했다간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칠 것이 뻔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 수밖에 없었고, 그를 위해 린델은 졸음을 조금이라도 쫓으려 쉴새없이 야스티안을 입에 밀어넣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향초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어질 지경일 터였다.

"마셔요."

보다못한 티엘은 가방 속에 넣어뒀던 도시락에서 포도주를 꺼내 린델에게 던져주었다.

린델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기뻐하며 힘겹게 품 안으로 날아드는 가죽 부대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중간중간 보이는 마을이나 도시까지 모두 무시한 덕에 가까운 곳에는 민가를 찾을 수도 없었다.

마른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한 티엘은 죽어가는 린델을 흘끗 바라본 뒤 주변에 떨어진 잔가지들을 주워모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가방 깊은 곳에서 예전에 쓰던 부싯돌과 부싯깃을 찾아내 제법 능숙하게 불씨를 붙였다.

노숙을 하는 것도 제법 오래간만의 일이다.

가장 가느다란 나뭇가지부터 차례로 옮겨간 불꽃이 이내 중간 정도 굵기의 땔감에 붙는 것을 확인한 티엘은 한 시름 놓았다며 숨을 돌렸다.

그러나 근처에서 모을 수 있는 잔가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밤새 불을 피워놓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티엘은 조금 멀리까지 장작을 주우러 가려다,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린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작 주워올게요."

"아, 같이 가요. 티엘에게만 시키긴 미안하잖아요."

지친 얼굴로 포도주가 든 가죽부대를 기울이던 린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한 차례 땔감을 집어온 뒤였으니 쓸만한 나뭇가지를 찾으려면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린델이 도와준다면 반길 일이다.

그러나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틀며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는 린델에게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내일도 하루 종일 인형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혼자서 충분하니 쉬고 있어요. 도망은 안갈테니까."

"무리라고 생각하면 이쪽에서 먼저 부탁할거에요. 혼자보단 둘이 빠르겠죠."

실랑이 해봤자 아까운 시간만 갈 뿐이다.

티엘은 마음대로 하라며 다시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고, 린델도 반대 방향에서 땔감을 주워모았다.

확실히 혼자보다는 둘이서 모으는 것이 더 빨랐다.

금새 한 아름 가까이 모인 땔감을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 두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포를 두른 채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재미있게도 두 사람의 잠자리는 정확히 반대였다.

깰 때 깨더라도 최대한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모포를 넓게 깔아둔 린델과는 달리, 티엘은 한 장의 모포를 대강 감고 나무둥치에 불편하게 기댄 상태였다.

혹시라도 티엘이 도망갈 것을 염려한다면 오히려 린델쪽이 더 이상한 일일테지만, 정작 린델은 제대로 몸을 누이지 않는 티엘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 년을 전장에서 보낸 용병들이 서로의 등을 기대지 않으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겨우 십대 중후반의 소녀가 잠결에도 주위를 경계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오랫동안 혼자라는 사실에 길들여지며 들어버린 버릇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여관방에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흠칫거리며 깨어나는 티엘이다.

탁 트인 야외에서의 노숙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모닥불에 흔들리는 티엘의 그림자 곁에는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시위를 걸어둔 활이 놓여있었다.

물끄러미 그 활을 바라보던 린델은 일렁이는 불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무서워하는거라도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낯선 곳에 떨어진 어린아이같으니까요."

문득 린델이 부스럭거리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일렁이는 모닥불 너머로 린델과 눈이 마주친 티엘은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활을 들어올렸다.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날부터 변한 곳은 거의 없는, 아첼이 쓰던 그대로의 활이었다.

티엘은 괜히 아스트라를 매기지 않은 빈 활을 당겨보았다.

활을 당기기 위해 팔을 강화하며 소모하는 마력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훨씬 더 가볍게 활을 다루었던 이 활의 본래 주인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멈춰서있는 과거의 그림자조차도 따라잡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했다.

빈 시위를 몇 차례 가볍게 튕겨본 티엘은 활을 끌어안은 채 무릎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채 흥미롭다는 눈으로 자신을 살피던 린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사단 사람들은 다 그래요?"

"뭐가요?"

"만난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람을 가족처럼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요. 방금 전만 해도 그래요. 제가 활을 들었을 때 경계하지 않았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당신의 동료에게 활을 겨눴는데. 무슨 근거로 절 믿는거에요?"

다소 공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딱히 적의를 품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근거라······. 사람이 사람을 믿는데, 그런게 굳이 필요할까요?"

린델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장작더미를 쑤셨다.

탁탁 튀던 모닥불이 다시 잠잠해졌다. 그 위로 몇 개의 나뭇가지를 살짝 던져넣은 린델은 편안한 표정으로 다시 불을 뒤적거렸다.

가볍게 불티가 튀어오르며 불이 활짝 살아났다.

"다들 언제 사라져버릴 지 모르니까, 얼굴 마주볼 수 있을 때만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밖에 없어요. 기사단 내에서 제일 막내가 바로 저에요. 하지만, 티엘이 제 첫 후배는 아니죠.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겨우 한 달도 채 보지 못한 채 다시 이별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로비 말처럼 지금 이 순간 최대한 충실하게 보내는 것 뿐이죠. 키페 디 이엘람이라고 하잖아요?"

또 저 말이다.

흐려지는 티엘의 얼굴을 눈치챈 린델은 장작을 주우러 가기 전 티엘에 던져주었던 가죽부대를 다시 티엘에게 던졌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티엘이라도 포도주라면 조금은 마실 수 있었다.

한 모금 정도면 피로를 잠재우는데도 나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티엘은 선뜻 가죽부대를 열지 못했다.

피로한 몸에 술기운을 안고 잠들어버리면 누가 불러도 쉽게 일어나지 못할만큼 깊게 잠들어버릴 것이다.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 따위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티엘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의미죠?"

"힘든 것, 아픈 것, 속으로 끌어안고 참는 것처럼 보이는걸요. 아닌가요?"

린델은 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하나 하나 접어가며, 오늘 하룻동안 관찰해온 티엘의 모습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내는 강행군에도 불평 한 마디 없었고, 식사때도 어지간한 성직자보다 조촐한 식단이었죠. 일부러 불편한 잠자리에, 깊이 잠드는 것조차 경계하는 고행아닌 고행. 그만둬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해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조차 할 수 없어요. 그건 슬픈 일이랍니다."

마치 훈계라도 하는 듯한, 조금은 얄미운 소리였다.

그러나 어쩐지 뭘 알고 그렇게 말하느냐며 반발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옛날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린델은 손 안에 감춰질만한 작은 상자를 모닥불 옆에 두었다.

얼룩같은 기묘한 구멍이 곳곳에 뚫린 상자 안에서부터 옅은 그림자가 하나 둘 새어나왔다.

근처에 세워둔 인형마와는 달리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제각기 생동감 있게 살아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림자 인형들은 모닥불을 빙 둘러 티엘이 있는 방향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 주인의 목소리에 따라, 우쭐우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종의 그림자 인형극이었다.

"옛날 옛날, 먼 옛날. 어느 한 가족이 살았답니다. 진귀한 인형들을 만들던 조형사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의 뒤를 잇고 싶었던 소녀였지요. 세 식구는 참 행복했답니다."

가장 키 큰 인형이라고 해봐야 손가락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형들은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즐겁게 춤을 추며 손톱만한 조그만 인형들을 만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득, 그 조그만 '인형의 인형'들 가운데 하나가 천천히, 저 혼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모 인형이 아닌, 부모를 동경하며 함께 인형을 만들어온 소녀 인형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만의 인형을 만든 소녀는 그 인형을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어요. 인형은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춤을 추는 예쁜 인형이었지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사람들이 칭찬해주었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인형은 정말로 살아있었어요. 사람처럼 울고, 웃으며, 춤을 추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어느 아저씨에게 작은 선물을 했답니다."

흠칫 놀란 티엘의 눈 앞에서, 춤을 추던 그림자 인형이 팔을 휘둘러 곁에 있던 또다른 인형의 목을 베어버렸다.

종이에 비친 그림자처럼 평면적인 모습이었는데도, 목이 베여나간 순간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무언가는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녀의 인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고, 부모 인형들은 소녀 인형의 눈을 가려주려는 듯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인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급기야 춤추던 인형은 잠시 후 자신을 둘러싸는 다른 인형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넘기며 피의 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튀어오르는 피, 쓰러지는 사람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인형.

소녀 인형을 감싸던 부모 인형조차도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해 쓰러진 뒤, 남은 것은 소녀 인형과 춤추던 인형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소녀가 특별히 장식용으로 붙여준 빛나는 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했던 소녀의 재능에 저주가 섞인 것일까. 불행히도 소녀의 인형에는 좋지 않은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집어삼킨 악마는 마지막으로 소녀의 피를 원했답니다. 하지만 우연히 지나친 어느 기사가 악마를 쓰러뜨려주었고, 그렇게 소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어쩌나, 이미 소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흑마법사의 재능에 이끌리는 마령이 하나 뿐일리도 없었지요. 그래서 소녀는 자신을 구해준 기사님을 따라갔답니다. 무서운 검은 제복을 몸에 걸치고, 검은 가지의 이름을 짊어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년 후, 소녀는 새로운 기사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기사에게, 소녀는 물었답니다. 과연 제가 괴로워보이시나요?, 라고."

후욱, 하며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던 인형들이 사라졌다.

인형극을 펼치던 상자를 도로 회수한 린델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티엘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소녀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보였다.

"불행한 것 같진 않아요."

"그렇죠?"

"······그 소녀도, 자신을 미워한 적이 있었어요?"

"있었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우울한 소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거든요. 사사건건 끼어드는 바보들과 어울리다, 문득 돌이켜보면 더이상 자책하고 있는 소녀는 없었어요. 남아있는건 바보병이 옮아 똑같은 바보가 된 소녀 하나였죠."

어둠 속에서 춤추는 불꽃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따스한 온기, 그리고 쉴새없이 흔들리는 빛.

그것은 흔들리는 진자처럼,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발갛게 물든 티엘의 얼굴이 조금씩이나마 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 고마워요."

"후후후, 별 거 아니에요. 물론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을거에요. 과거를 쉽게 놓아줄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미래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중요한건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네에. 예를들면 그 때의 소녀의 경우. 지금 당장은, 한 잔 하고 푹 자고 싶다고 하네요."

마지막 한 마디에, 두 사람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픽 새어나왔다.

티엘이 한 모금을 마신 주머니는 또다시 린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하룻밤 새 주인이 자주도 바뀌는 셈이다.

남은 포도주는 그리 많지 않았고, 티엘의 눈짓을 이해한 린델은 사양없이 남은 포도주를 독차지했다.

딱히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룻밤의 숙면을 위한 비약으로는 충분한 술이었다.

"잘 자요."

"네. 티엘도 잘 자요."

티엘은 모포로 몸을 감싸며, 린델의 권고대로 편안히 몸을 뉘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녀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앞으로는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 편이, 저도 좋아요."

"응, 그럼 편하게 말 놓을게, 티엘. 좋은 꿈 꿔."

누군가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을까.

티엘은 모처럼 활을 손에 쥐지 않고서도, 조금씩 깊은 잠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삼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의말

린델과 티엘은 곁에서 멘탈 케어를 해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꽤 달라졌죠.

거기다 티엘과 아첼은 좋게 말하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자매지만, 나쁘게 말하면 서로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는 면도 있었던만큼 후유증도 큰 편이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4장-방황彷徨 (3) +2 19.07.16 133 6 40쪽
25 4장-방황彷徨 (2) 19.07.15 134 5 34쪽
24 4장-방황彷徨 (1) +2 19.07.14 162 4 41쪽
23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3) 19.07.14 150 2 37쪽
22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2) 19.07.13 151 5 54쪽
21 Sub Stream / Tale of Accelerando - 밤안개의 별(1) 19.07.13 143 4 44쪽
20 3장-개화開花(7) +2 19.07.12 173 6 46쪽
19 3장-개화開花(6) 19.07.12 156 5 36쪽
18 3장-개화開花(5) 19.07.11 154 7 37쪽
17 3장-개화開花(4) 19.07.10 168 6 38쪽
16 3장-개화開花(3) 19.07.09 164 5 38쪽
15 3장-개화開花(2) +2 19.07.08 182 5 26쪽
14 3장-개화開花(1) 19.07.07 165 4 30쪽
13 2장-막간幕間(7) 19.07.07 181 6 37쪽
12 2장-막간幕間(6) 19.07.06 178 5 41쪽
11 2장-막간幕間(5) 19.07.06 197 8 42쪽
10 2장-막간幕間(4) +4 19.07.05 208 9 34쪽
9 2장-막간幕間(3) 19.07.05 188 9 35쪽
8 2장-막간幕間(2) 19.07.04 214 6 43쪽
7 2장-막간幕間(1) 19.07.03 209 8 30쪽
6 1장 - 초혼招魂(5) 19.07.03 220 9 28쪽
5 1장 - 초혼招魂(4) +2 19.07.02 290 10 35쪽
4 1장 - 초혼招魂(3) +2 19.07.01 385 10 40쪽
3 1장 - 초혼招魂(2) +2 19.07.01 527 17 27쪽
2 1장 - 초혼招魂(1) +8 19.07.01 1,595 14 31쪽
1 +8 19.07.01 1,573 17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