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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엔 마약이 흐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도모지
작품등록일 :
2020.08.21 00:57
최근연재일 :
2021.01.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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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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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1화-용서라는 고통

DUMMY

일반적으로 갑자기 나타난 10대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22살 남자한테 아빠라고 부른다면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대부분의 클랜원들처럼 바보 같은 얼굴로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거나, 유쾌한 성격의 하이드나 렌처럼 배를 붙잡고 웃어재낀다거나, 진에게 연심이 있는 여자들처럼 충격에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지려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럼 당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진을 아빠라 부른 여우는 충격발언 이후로 고개를 숙인 채 힐끔힐끔 진의 반응을 살폈다. 겨우 친부를 만났다는 기쁨에 확 지르고 보긴 했지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그녀에게도 미지수였다.


막말로 유전적으로만 이어졌을 뿐,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당장 그가 자신을 죽이려든다 해도 마땅히 할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아빠라 불린 진은 편두통이 몰려오는 머리를 붙잡았다.



"내가 네 아빠라고?"



두통 때문에 눈가를 찌푸린 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여우는 두 손을 모은 채 소심한 자세로 잘게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솔직히 진은 아빠라 불린 것 자체는 딱히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납치 다음으로 많이 당한 게 강간이다. 세계 여기저기에 아들 딸 하나 둘 정도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특히 이자요이바라에 있던 1년간은 농담이 아니라 그곳에서 도망치는 날까지 정말 하루도 안 거르고, 여자들의 장난감 신세였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살이 찢어져도, 골반이 박살나든, 허리가 작살이 나든 간에 진의 피에 홀린 여자들은 하나같이 진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었다. 진이 겨우 대여섯 살이었던 때에 말이다.


최음제를 대신한 매혹에 허구한 날 걸려댄 탓에 매혹에 대한 절대적인 내성까지 생겨버린 사실만으로도 그의 신세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상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이렇게 아빠라 부르는 사람을 직접 만나니까 좀 충격이 오긴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나타난 딸과의 재회를 반길 생각은 없다. 저것 자체가 진의 동요를 노린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으니.


그렇지만 만약 진짜로. 나이 차이도 크게 안나 보이는 저 애가 순전히 아빠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라면....



"후우우우우우우...."



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깊게 내쉬어서, 잡생각을 떨쳐냈다. 우선은 여우의 정확한 정체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발을 천천히 옮기며 여우에게 접근했다. 충격발언 때문에 눈앞이 흐릿해지던 수연은 진이 움직이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손에는 이미 세검이 뽑혀져 있었다.


상황은 백사병에 유리하지만, 궁지에 몰린 여우가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경계심을 높여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너한테 매혹을 좀 걸고 싶은데, 괜찮겠지?"


"네. 상관없어요."



전혀 걸릴 게 없는 여우에게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부탁해."


"맡겨둬요."



수연은 마스크의 눈 부분을 덜어내고, 장갑을 벗은 후 천천히 여우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올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수연이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우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수연이 뒤로 물러나고, 진은 여우의 신상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이는?"


"한국 나이로는 16살이에요."


"6살차이...."



이자요이바라에 있던 시기랑 거의 딱 맞아떨어진다. 뇌세포들로 매듭이 잔뜩 만들어져서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이름은?"


"이가라시 유키네."



순간 발에서부터 신경을 타고 전기가 올라와 매듭이 된 뇌세포들을 감전시켰다. 번쩍이는 전기는 사진기의 플래시가 되어서 한 여자의 사진을 그렸다.



"이가라시는 엄마 성 쓴 거야?"


"네...."



사진에는 이자요이바라에서 이가라시라는 성을 쓰는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가라시.... 세츠나."


"저희 어머니에요."



이제 와서 든 생각이지만 여우. 유키네의 얼굴에서 그 여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근 20년이 지나도 얼굴과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날 만큼 증오하는 그 여자가.


으득.


저절로 말려들어간 입술을 위아래 이빨이 힘을 합쳐서 짓눌렀다. 스스로의 치악력을 얕보고 인내심을 과대평가한 탓인가.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배어나왔다.


혀에 철분을 머금은 피의 맛이 느껴진 후에야, 진은 스스로의 실책을 깨달았다. 백사병은 마스크 덕에 냄새를 못 맡아서 괜찮지만, 눈앞에 서있는 유키네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걸 본 진과 수연은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지켜보던 클랜원들은 서둘러 그들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악마의 피에 홀려서 당장 진에게 달려들 거라 생각했던 유키네는 손을 내저으며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저. 저기.... 전 괜찮아요."


"어?"


"저는 그.... 평범한 흡혈귀는 아니라서요. 악마의 피에는 괜찮아요."



눈의 색만 변하고 태도에도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감미로운 향기에 살짝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있기는 했지만, 악마의 피에 홀린 흡혈귀들의 반응에 비하면 요조숙녀나 마찬가지였다.


흡혈귀의 수준에 따라 반응이 다르긴 한데, 보통 저 정도로 태연하려면 못해도 하이드 수준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유키네는 그렇게까지 강해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왜.



"저 담피르에요."



간단하면서도 효과 넘치는 답이었다. 인간과 흡혈귀의 혼혈 중에서도 양쪽의 장점만을 모아둔 담피르라면 저런 반응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갈증도 흡혈귀에 비하면 훨씬 덜한데, 신체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고 혈주까지 쓸 수 있는데다, 흡혈귀를 판별할 수 있는 패시브까지 타고 나다니.



"어째 잘 도망친다 했다."



태어날 확률이 극도로 낮은 것만 빼면 이런 사기도 없었다. 물론 세계에 10명 정도 밖에 없는 악마의 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 주제는 여기까지로 하고. 이제 가장 중요한 의문을 해결할 차례다.



"날 찾는 이유는?"


"그. 그게.... 엄마와 한 번 만나 주실 수 있나 해서...."


"뭐?"



이가라시 세츠나랑 만나달라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그 여자도 한국에 있어?"


"네. 4년 전에 엄마랑 저랑 둘이서 같이 한국으로 왔어요."



4년 전. 진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시기랑 일치한다. 즉, 이자요이바라는 진 오디티가 그 때의 그 꼬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인데.


무전기에서는 당장 거절하라는 외침이 물밀 듯 몰려왔다. 유키네는 그 의견들을 다 들렸는지 양손을 마주잡고 진을 설득했다.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지만, 엄마랑 저는 8년 전 쯤에 이자요이바라에서 나왔어요. 진짜에요."



곧바로 무전기 너머에서 레오가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면 그만이다. 그 때까지 시간이나 좀 끌어야겠다.



"4년 전쯤에 왔다면서 이제야 날 찾는 이유는?"


"찾는 건 여기 오자마자 시작했어요. 그 때는 가면도 안 쓰고 교복도 아니라서, 전혀 관심을 못 받았지만."



그럼 그 4년 동안 소득이 없어서, 이런 무모한 수법을 썼다는 말이네. 진이 자신을 찾아올 확률보다 다른 흡혈귀들이나 사냥꾼들에게 잡힐 확률이 더 높은 방법을.


그 때 레오에게 무전이 왔다. 유키네의 말에 거짓이 없단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왜 날 그 여자랑 만나게 하고 싶은 건데? 아니, 애초에 왜 한국까지 날 찾아온 건데?"



지금까지 술술 말하던 유키네는 입과 눈을 질끈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에 입을 열었을 때는 마치 죄인이 선교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용서를.... 빌고 싶다고 하셨어요."



진심으로 미쳤냐? 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여자가?



"엄마나 이모들이 저지른 짓은 저도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알고요. 그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죠. 저도 엄마를 변호할 생각은 없어요. 아빠가 엄마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일그러지는 진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본 유키네는 이번에는 양손을 모았다. 선교사가 아닌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반성하면서 진심으로 아빠한테 용서를 빌려고 이 나라에 온 거에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만나주세요."


"앞장서."


"네?"


"앞장서라고. 간만에 그 년 면상이나 좀 보러 가야겠다."



어떻게 요리할지는 만나보고 결정한다.


의외로 별 고민 없이 승낙하는 모습에 유키네는 손뼉을 짝 치며 기뻐했고, 수연을 포함한 나머지 클랜원들은 난리가 났다.



"내가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이래욧!!!"


"쟤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그건."



수연은 유키네에게 무조건 진실만을 말하도록 매혹을 걸었다. 매혹에 있어서는 클랜 내 최고인 수연이기에 유키네의 말이 거짓일리는 없다는 건 알지만, 그곳에 가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안 돼는 건 안 돼요. 굳이 가려면 나 말고 아나라도 설득해 봐요."



말하지 않아도 아까부터 무전기 너머에서 불협화음을 이루는 클랜원들 때문에 귀가 아프다. 특히 아나의 목소리가 유독 크다.


그렇게 불타오르는 이유를 잘 안다. 그러니 설득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내가 거기로 가는 게 그렇게도 걱정 돼?"


"당연하지!!!! 이번만큼은 못 보내."


"난 별로 걱정 안 되는데?"


"또 그런다. 또. 자기 몸 걱정도 조금 하지...."


"너희가 날 지켜줄 건데, 걱정할 필요 있어?"


"읏...."



게임 SET.


바로 출발하자.



**



가넷이 내 전속 메이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에 물어온 적이 있다.



"도련님께서는 복수를 안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냥. 평생 거기에 미쳐서 살기는 싫어서. 그렇다고 복수심이 없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일일이 찾아가 죽이지는 않겠지만 만약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냥 무시할 생각도 없다. 아마 그 때는 죽이려들 거다. 딱 그 정도다.



"그럼 도련님. 만약에. 진짜 만약에요. 도련님을 찾아와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실래요?"


"....사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뇌만큼은 절대 안 썩을 것 같은 그 사이코들이 나한테 찾아와서 사과를 한다고?



"그건 그 때가 돼봐야 알 것 같네."



그럴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라고 농담 삼아 덧붙였는데 말이다.


유키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5평 정도로 좁은 집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세츠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우선은 눈이 안 보였다.


머릿속에서 검은 기억들과 감정들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마약성 물질을 만들어냈다.


눈앞이 탁해져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마약에 취한 몸이 혼자 멋대로 움직인다. 손은 가방 안에 있던 토마호크를 꺼내들었다. 느긋하던 심장은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쿵쾅댔다. 발은 그 여자에게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만약 무언가가 몸으로 움직임을 막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머리를 두 쪽 내버릴 뻔했다.



"제발...."



조금씩 시야가 돌아왔다. 온몸을 떨며 나를 붙잡고 있는 유키네가 보였다.



"제발.... 제발. 얘기만이라도...."



울먹이는 유키네의 너머에는 그녀의 친모. 이가라시 세츠나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도게자라던가, 사죄의 자세라던가 그런 건가.


눈을 채우던 검은 것들이 목을 타고 내려오는지, 목이 뻐근해졌다. 목을 돌리면서 우연히 마주친 수연의 표정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녀가 날 처음 보는 괴물을 보는 듯한 얼굴이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려줬다.


학교에서 난생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건 조금 기분이 그랬다. 끓어오르던 마약에 얼음이 하나 던져졌다.


쿵쾅대던 심장은 제법 가라앉았지만, 머리 안은 여전히 뜨거웠다. 아직도 난 저 무방비한 정수리에 토마호크를 꽂아버리고 싶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렇지만 완벽한 타인이라면 모를까, 유전적일 뿐이라도 딸이라는 애가 목이 쉴 정도로 울면서 빌고 있다.



"이제 됐어. 얘기 정도는 들어볼 테니까."



여전히 끓어오르는 속과는 달리 입에서는 아주 태연한 말투가 나왔다.


유키네의 신변을 수연에게 맡긴 후, 이번에는 내 의지로 세츠나에게 다가갔다.



"....읊어 봐. 들어나 보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아까부터 번데기처럼 몸을 모으고 있는 세츠나는 그 자세 그대로 사죄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죄송.... 합니다."



말과 함께 피도 함께 토하는 것 같은 처절하고 비참한 목소리였다.



"저는. 저희는 당신께 절대로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습니다.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정말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나한테 사과할 마음이 든 이유는?"


"유키네를 낳고 기르다 보니, 제가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딱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근데 진심이라고 해도 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난 쪼그려 앉은 채, 턱을 괴고 세츠나를 내려다봤다.



"있지. 내가 너희한테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이런 식으로 빌었을 때 너희가 어쨌는지 기억해?"


"....예."



흔적은 완전히 살아졌지만, 화상자국들이 있던 곳이 다시 욱신거린다.



"그 날 이후로 난 너희한테는 절대로 안 빌기로 마음먹었잖아."



그런데도 용서를 바래?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그저 무릎 꿇은 채 비는 것 밖에 못했다.



"염치없이 당신의 용서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미 각오는 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그래?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단두대 대용으로 토마호크를 들어 올렸지만 안전장치에 걸려서 내려오지는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유키네가 내 팔을 양팔로 붙잡았다. 내가 노려보자 겁을 먹었는지, 금새 손을 놓고는 친모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엄마가 지은 죄는 절대로 못 씻어낸다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알아요.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충분히 알고요. 하지만...."



이미 목소리와 장판 바닥에는 수분이 가득했다.



"적어도 제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시키는 건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큼은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키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고 있다. 내게는 죽일 년이라도 이 아이한테는 좋은 엄마였나 보긴 한데.



"너. 내가 왜 너희 엄마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는 알아?"


"그야.... 이모들이랑 엄마가 같이...."


"이제 와서 강간범들 족치는 건 별 관심 없어. 그보다 더한 결정적인 일이 하나 있는데, 그건 모르는 거야?"


"....결정적인 일이요?"



아직 수연의 매혹 효과가 안 풀렸을 테니까 모르는 게 확실하다. 시선을 세츠나에게로 돌렸다.



"기억해? 너. 유키네 이전에도 아이를 한 명 낳은 적 있잖아."



흠칫 하고 세츠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얼떨떨한 유키네의 표정을 보아하니 딸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딸에게만큼은 절대로 말할 수 있을 만한 일은 아니지.



"그 아이한테 넌 무슨 짓을 했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 탓인가, 속이 다시 점차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악마의 피는 유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낳아봤다고 했었지?"



아직도 가끔 악몽을 꾸는 광경인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웃으면서 쓰레기봉투처럼 바닥에 내던지는 이 여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지금 난 눈을 뜨고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 애가 악마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넌!!!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그 애를!!!!"



눈앞이 새빨개졌다. 목에서 피가 날듯 소리치며 찔러 죽이는 창처럼 손가락으로 그 년을 가리켰다.



"밟아 죽였어!!!! 내 눈앞에서!!!!"



허억허억....


난생 처음으로 화내다 지쳐서 숨이 가파르다.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는지 습기가 느껴진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주먹을 부여잡은 채 다시 쏘아붙였다.



"너 때문에.... 난 아직도 애기 울음소리 들을 때마다 토할 것 같다고. 미친년아."



속에 담아둔 분노를 모두 토해내자, 무전을 통해 클랜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말한 적 없는 일이니 다들 놀랄 만도 하다.


몇몇은 울면서 나를 위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귀에 거슬릴 뿐이다. 무전기를 귀에서 빼고, 내 앞뒤에 꿇고 있는 모녀를 번갈아 봤다.



“어. 엄마.... 아빠가 말씀하신 게 진짜야?”


“.....”



유키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츠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차라리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세츠나는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그게 내 말이 진짜라는 말보다도 훨씬 솔직한 반응이었다. 난 얼이 나간 유키네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직도 내가 너희 엄마를 살려두기를 바래?”



아무 말도 없다. 딸이 생각하기에도 엄마의 죄가 너무 깊었다. 유키네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에게 고민을 덜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츠나는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며 어설프게 얼굴 근육을 움직여서 처참하게 웃어보였다.



“절 죽이시는 건 상관없지만, 딸 아이. 유키를 돌봐주실 수 있나요?”


“....”



유키네를 어떻게 취급할지는 이미 진작 정해 놨다. 난 모녀를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좁은 집안을 살펴봤다.


옷장을 열어보거나, 화장품을 살펴보고, 책들을 펼쳐봤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하는 내 뒤로 수연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오늘 내 새로운 면모를 여러 번 봐서 그런가, 많이 놀라면서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괜찮아. 나도 조금 놀라서 그래.”



내가 봐도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집안을 살펴보면서 세츠나와 유키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이나마 알게 됐다.


옷은 사이즈가 작고 몇 벌 없는데다가, 화장품은 종류도 적고 싹싹 긁어서 썼다.


진이 기억하는 이가라시 세츠나는 사치와 허영으로 이루어진 여자였는데 말이다. 책상 위에 있는 책들, 일기장 안에는 어느 시점부터 내게 사죄하는 글로 가득했다.


스스로를 저주하거나, 유키네를 위해서라도 자살기도도 못한다거나, 평생 벌어드렸던 돈은 곳곳에 기부했다거나 하는 글은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어찌해야할까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수연이 뒤에서 껴안았다. 놀라긴 했지만, 왠지 뿌리치고 싶진 않았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에 나한테 말한 거 기억하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심플 이즈 베스트. 너희 집 가훈이잖아요.”


“....큭큭. 그렇지.”


“어? 웃었어요?”



날 휘감은 수연의 팔을 살며시 풀고, 다시 모녀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참 재밌는 광경이네.”



이러나저러나 뛰어난 미모의 미혼모와 그 딸이 한 명의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광경.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내가 제일 나쁜 새끼로 보이겠지?”



편두통이 몰려왔다.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의도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은 성대에서 뻑뻑한 소리를 억지로 내뱉었다.


나는 처참하게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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