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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엔 마약이 흐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도모지
작품등록일 :
2020.08.21 00:57
최근연재일 :
2021.01.08 13:5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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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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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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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7화-전초전

DUMMY

"그럼 여기를 봐주세요."



최하나가 춤이라도 추는 듯한 동작으로 리모컨을 누르자, 뒤에서 큰 스크린이 하나 내려왔다. 한 번 더 누르자, 화면에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다.


멀쩡한 창문이 없고,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있는 낡은 건물과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 같은 도로까지.


마치 전쟁의 포화가 한차례 지나간 폐허가 된 도시 같은 곳이었다.



"이곳이 바로 잠시 후에 도착할 시험 장소랍니다. 이야. 힘들었다고요. 일부러 저런 환경을 만드느라."



최하나가 헥헥 거리며 땀을 닦는 시늉을 하자, 긴장감 없는 몇 명이 이게 선발시험이라는 사실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그저 좋다고 실실 웃고만 있었다.



"여러분들은 이 도시에서 딱 3일만 버티면 됩니다. 그치만 이건 서바이벌 캠프가 아니라 사냥꾼 선발시험이죠?"



손뼉을 짝 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래서 저희 쪽에서 미리 이곳에 흡혈귀 200명을 풀어놨습니다."


"뭐....?"



장난기 넘치는 설명에 조금 풀어졌던 장내는 흡혈귀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바로 차게 식어버렸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유도하려고 최하나는 고의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했다. 단숨에 진지해져버린 분위기에 만족한 최하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쳐보였다.



"시험 합격 조건은 딱 3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 3일 후에 정해진 시간에 이 배에 다시 올라탈 것. 둘, 지금 차고 계신 팔찌를 계속 가지고 있을 것. 그리고 셋, 흡혈귀들을 쓰러트린 증표를 두 개 가져올 것. 어때요. 아주 쉽죠?"



어딘가의 화가가 생각난다. 말로는 쉬운 규칙이다. 근데 수행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았다.


단번에 이 시험의 사악함을 이해한 진은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 규칙 만든 놈 면상이나 좀 보고 싶네."



진이 미간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리자, 아직 사태를 제대로 이해 못한 유키와 미오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규칙에서 악의가 느껴진다. 진짜."


"악의요? 3일 안에 흡혈귀 둘을 쓰러트리고 배에 타면 되는 거 아닌가요?"


"3일 안이 아니라, 3일 후라서 문제지."



배에 타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말은 흡혈귀를 쓰러트린다 해도 배에 탈 때까지 증표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십중팔구는 여기 있는 참가자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아니, 100% 벌어진다. 그냥 흡혈귀보다 무장한 인간이 더 상대하기 쉽다고 여기는 사람은 분명 있을 테니까.



'나도 그렇고.'



진은 이 규칙의 발안자로 추측되는 최하나를 지긋이 노려봤지만, 최하나는 본 체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지금부터는 질문을 받아볼까요? 제 쓰리 사이즈 같은 거 말고. 시험에 관련된 것만 해주세용."



이제 와서 애교 넘치는 행동으로 수습이 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괴리감 때문에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건 시험에 합격하는 것. 필수적으로 확인해야하는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리 생각한 참가자들은 저마다 손을 들고 질문을 시작했다.



"식량이나 물 같은 건 어떡하죠?"


"전투식량을 건물 곳곳에 숨겨 놨답니다. 게임에서 하는 파밍 같은 재미도 있겠죠? 총은 없지만요."


"그 흡혈귀 새끼들. 죽여도 됩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들은 모두 흡혈귀의 힘에 취해 몹쓸 짓을 하다 체포된 범죄자들. 동정을 품을 필요는 없답니다."



참가자들 몇 명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흡혈귀를 죽일 수 있다는 게 좋은 건지, 그냥 죽여도 된다는 게 기쁜 건지는 모르겠다.



"증표라는 건 어떤 거지? 너희 사냥꾼들이 하는 대로 송곳니인가?"


"그건 비밀. 아마 보자마자 이게 증표구나! 하실 걸요?"



최하나는 장난을 꾸미는 어린 아이처럼 손을 입가에 대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이 시험의 발안자가 저 여자가 맞는 모양이다.



"저. 저기 그 흡혈귀들이 우릴 죽이려고 하지는 않겠죠?"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죽이려 들겠죠."


"어?"


"모르셨나요? 접수처에서 작성하신 계약서에 생사에 관한 책임은 온전히 자기가 지겠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을 텐데요? 아, 참고로 시험 참가자가 몰살당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답니다."



몰살이라는 단어는 별 생각 없이 시험에 응시한 이들의 몸을 떨게 만드는 데 충분한 힘을 지녔다. 그 힘에 굴복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최하나는 누구 하나를 특정하지 않고 참가자 모두에게 선포하듯 외쳤다.



"사냥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 물론 인성이나 재력, 다른 능력도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가 상대하는 건 언제나 우리보다 강한 존재랍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 힘이 흡혈귀를 이길 수 있는 지를 시험하는 곳. 즉, 사냥꾼으로서 최소 자격을 확인하는 곳이랍니다."



그녀의 말대로 시험의 규칙에서 악의가 느껴지긴 해도 별 문제없이 굴러간다면 아마 합격하는 건 진짜배기들뿐일 것이다.



"섬에 있는 건 전부 그믐급 흡혈귀들. 흡혈귀의 평균보다 아래의 강함을 가지고 있죠. 미리 말씀드릴게요. 그 정도 상대도 못 이기는 사람에게는 저희는 볼일 없습니다."


"그. 그럴 수가."



질문을 한 남자는 벌벌 떨며, 목을 꽉 말아 쥐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여기 있는 참가자들 중에는 저희가 심어둔 사냥꾼들이 있으니까요. 여차할 때는 그분들이 도와줄 거랍니다."


"휴우...."



최하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이들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들을 보는 눈의 뒷면에는 한심함과 모멸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머저리 새끼.'



일단은 직업상의 이유로 최대한 밝은 미소를 유지하긴 했지만, 그냥 욕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한국이 흡혈귀 안전지대라고 해도.'



저런 머저리까지 시험에 응시할 줄이야.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수입이 괜찮다보니까, 안전한 축에 속하는 한국의 선발시험에는 별의별 인간군상이 다 모인다.


이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자기가 흡혈귀 상대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강자 앞에서는 덜덜 떠는 머저리들. 최하나는 약육강식은 이해하지만, 강약약강은 정말 싫었다.


그들 대부분이 시험이 시작되는 순간, 꼬마 애처럼 울고불고 살려 달라 비는 꼴을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단순히 돈에 미친 머저리들이라면 괜찮았다. 그들 중에도 진짜 물건이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피에 미친놈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당장 최하나의 선발시험에 나타난 미친 놈 손에 3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목숨을 잃었다.



'특히 이번에는 더 하네....'



그녀의 눈에는 이곳에 있는 참가자들 중 절반 이상이 머저리들, 그리고 미친놈들로 보였다.


조금 전의 남자들처럼 벌벌 떠는 이들, 배에서 안 내리고 기권할 생각부터 하는 이들, 겁을 먹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있는 이들, 거기에 참가자들 중에서 먹잇감을 고르고 있는 이들까지.



'질린다. 진짜.'



최하나가 그런 위험한 시험을 발의한 건 저런 쭉정이들을 걸러내기 위함, 적어도 사냥꾼이 될 자격이 있는 이들은 이런 위기 정도는 가볍게 해쳐나가리라 여겼다.


다행히 곳곳에 가능성이 제법 있는 이들도 보였지만, 눈에 확 띄는 참가자들은 마땅히....


아, 있다.


저기 있는 3명. 도저히 이곳에는 안 어울리는 세 사람 중에 눈에 띄게 키가 큰 남자가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애매한 얼굴. 부지부장이 말한 최근에 사냥꾼들이 맡은 사건을 단독으로 해결해 준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와 곁에 동료로 보이는 두 여자들을 눈에 새겼다. 그들을 나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최하나는 팔을 활짝 편 채로 마무리를 지었다.



"아,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네요. 저곳은 딱히 치외법권은 아니지만, 저희는 여러분이 저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하죠. 부디 다시 살아서 뵙기를 빌죠."



콘서트를 끝내고 팬들에게 인사하는 최하나의 말이 진의 귀에는 아주 대놓고 서로 싸우라는 말로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진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입맛을 다시는 놈들이 몇 명 보였다. 특히 이쪽을 보면서.



"섬에는 4시간 후에 도착할 예정이니까, 그 때까지 편히 쉬시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마지막 휴식이 될 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나중에 뵙죠."



절대로 팬들 앞에서는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최하나는 무대를 떠났다.



**



진과 일행들은 객실 하나를 잡고 앞으로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우선은 각자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쫙 깔아봤다.


맨몸파인 미오를 제외하고 진과 유키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쓸 무기는 준비해왔다.


다음은 식량. 진은 육포나 비스킷 같은 건조식품과 생수통 2개, 유키는 초코바 3개, 미오는 본인이 마실 혈액팩 두 개와 통조림 6개였다.



"언니는 두 개만 있어도 괜찮으세요?"


"난 입이 작아서 두 개면 1주일은 충분해. 넌 담피르니까 피는 별로 필요 없지?"


"전 한 달에 한 팩이면 되니까요."



그럼 피 쪽은 문제가 없다. 식량 쪽도 3일이니까 크게 문제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조금 정도는 탄수화물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 제가 식당에서 먹을 걸 좀 찾아볼게요."


"같이 가. 다른 참가자들도 살펴볼 겸해서. 미오 너는 어쩔래?"



미오는 다리를 양팔로 꽉 껴안고 그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티를 안내서 그렇지 진보다 더한 대인기피증인 그녀는 아까처럼 사람이 많은 곳은 고역이었다.



"저는 조금...."


"그래. 그럼 방에서 쉬고 있어."



진과 유키가 방을 나서자, 바로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참가자들이 벽에 기대서 서있던 최하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팬이 가수를 대하는 거지, 참가자가 시험관을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을 이곳에서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진은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악마의 피?"



그리고 웅성거림 속에서 최하나가 진의 체질을 입에 담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녀가 영 신뢰가 안 가던 진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죠?"


"흐응. 당신이 진 오디티 맞구나? 부지부장님이랑 자현이한테 얘기 좀 들었거든요."



최하나는 간을 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손가락을 세운 채 천천히 진에게 다가갔다. 진과 유키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사냥꾼 제안할 때마다, 퇴짜 놓더니, 왜 갑자기 사냥꾼이 하고 싶어진 거예요?"


"....당신이 알 필요는 없어요."


"정답이네요. 흐음."



최하나는 진을 위아래로 스캔하듯이 쭉 훑어봤다. 키는 제법 크고 몸도 나름 탄탄하지만, 시험에 응시한 거한들에 비하면 어린 아이 수준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잘생겼다보다는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선이 얇고 곱상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부잣집의 귀하게 자란 자식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그런데도 인간 중에서는 제일 강하단 말이지?'



그가 지금까지 세운 공적에 대해서 들어온 최하나는 진이 놀라우면서도 신비롭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와는 가까워지는 편이 좋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럼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꼭 합격해요."



요사스럽게 웃으며 진의 손을 붙잡고 흔든 최하나는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진짜 마이페이스네."



만남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만남과 얼이 빠진 얼굴로 진을 보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식당에 도착했다. 거대한 배에 어울릴 만한 넓고 사치스러운 뷔페였다.


그나저나 아까까지만 해도 넓게만 느껴지던 식당이었는데, 갑자기 식사 중인 사람과 조금이라도 식량을 챙기려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조금만 일찍 올 걸."


"그러게요. 그냥 돌아갈까요?"


"그러자. 괜히 여기 있어 봐야 시간 낭.... 뭐야. 저건."



객실로 돌아가려던 진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이 탁자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아이스박스 몇 개와 많은 수의 혈액팩이 늘어져 있었다.


주최 측에서 흡혈귀 참가자들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었다.



"유키."


"없어요. 저 사람들 중에는."



담피르인 유키는 흡혈귀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유키가 없다면 저들 중에는 흡혈귀가 없다는 말이다.


근데 인간들이 저렇게 혈액팩 주변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은.



"머리 좀 썼네."



저들은 참가자들 중 섞여 있는 흡혈귀들을 특정한 후 그들을 견제할 의도였다. 흡혈귀라면 피를 마시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 어떻게 해서든 저 혈액팩이 필요했다.



"흡혈귀들이 저게 필요할까요? 참가자들끼리 싸우게 되면 다른 사람을 물 것 같은데요."


"사람을 무는 흡혈귀가 사냥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냥꾼들이 참가자들 중에 섞여 있는 이유가 그걸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을 걸?"


"그럼 견제의 용도로 쓰지 말고 손잡는 용도로 쓰면 안 돼요? 흡혈귀는 큰 전력이 될 텐데."


"사냥꾼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가 복수일 텐데. 흡혈귀가 곱게도 보이겠다."



유키나 미오가 특이한 경우지,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속에 흡혈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살아간다.


다시 말해 흡혈귀 혐오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자신이 흡혈귀임을 들어냈다가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린치를 당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선상에서는 폭력행위도 금지됐으니까 저렇게 감시하는 건 견제로써는 제법 괜찮은 수단이야."



흡혈귀를 선별해낼 수도 있고, 원한다면 거래에서도 크게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저들이 딱 거기까지만 생각한 것이다.


진은 혈액팩을 보자마자 유키의 말대로 흡혈귀들을 견제하기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재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건 유력한 경쟁자가 없어진다고 해도 합격하는 시험이 아니니까.



"유키. 지금 식당에 흡혈귀 몇 명 있어?"


"7명이요. 얼핏 봤는데 다들 혈액팩 쪽을 난감한 얼굴로 힐끔 쳐다보고 있었어요."


"7명이라. 나쁘지 않네. 좋아. 유키 넌. 지금부터 그 7명이랑 저기 보이는 저 남자 있지?"


"네? 저 사람, 인간...."


"나도 알아. 그래도 필요할 테니까 저 그 8명이랑 접촉해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해. 피를 나눠주겠다고."


"네, 뭐. 알겠어요."



유키는 진의 지령을 머릿속에 꼼꼼히 새긴 후, 진의 곁을 떠났다. 혼자가 된 진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혈액팩 쪽으로 접근했다.


진이 혈액팩에 용건이 있다는 게 확신이 들 정도로 다가오자, 무리 중의 리더인 안경을 낀 남자가 가식적인 얼굴로 진에게 접근했다.



"혈액팩. 필요하세요?"


"일단은요."


"그럼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저희는 딱히 막을 생각이 있는 거도 아니니까."


"그럼. 실례."



진은 가장 큰 아이스박스를 하나 열어서, 그 안에 혈액팩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경과 그의 동료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들의 예상대로 갈증을 이기지 못한 멍청한 흡혈귀 하나가 미끼에 낚인 것이다. 이제 저 흡혈귀는 죽은 목숨이다. 라고 여겼다.


진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뭔데?"



목표가 달성되자, 가식적인 말투와 얼굴을 벌써 집어치우고 평소의 오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진은 여전히 태연하고 무미건조한 모습이었다.



"혈액팩을 독점하자는 아이디어 당신이 낸 거예요?"


"맞아. 괴물들부터 죽이고 인간들끼리의 시험을 시작하려고. 아쉽게도 낚인 건 너뿐이지만."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눈빛 속에 분노와 멸시가 섞여있었다. 진은 관심두지 않고 아이스박스 가득히 혈액팩을 채우는 거에 집중했다.


무겁긴 하지만 들 수는 있는 정도였다. 두 손으로 겨우 혈액팩을 들고 가는 진의 주변에서는 따가운 시선이, 뒤에서는 비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폭력금지인 게 다행이지 않아? 우리가 아니라 너한테 말이야."


"최후의 만찬이나 마음껏 즐기라고. 하하하하하!!!!"



진은 잠시 아이스팩스를 내려놓고 폐가 튀어나올 정도로 웃어재끼는 그들을 무표정하게 돌아봤다. 순간 내려앉은 진의 분위기에 압도된 무리들은 웃는 걸 멈췄다.



"있지. 피가 필요한 게 왜 참가자들 중에 섞여 있는 흡혈귀들뿐이라고 생각한 거야?"


"....뭐?"


"잊었어?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에 흡혈귀가 200명은 있는데?"


"무슨.... 소리지?"



진은 아이스팩에서 흡혈팩 하나를 꺼내들었다.



"만약 거기 있는 흡혈귀들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어떨 것 같냐? 이건 사냥의 미끼가 될 수도 있고 거래의 용도로도 쓸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이런 걸 단순히 경쟁자 견제용도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아?"



진은 혈액팩을 저들처럼 경쟁자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무기. 더 나아가서 생명줄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있잖아? 내가 흡혈귀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 매혹에 걸린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완벽하게 머리 위에서 놀고 있던 진의 말에 안경과 동료들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다른 참가자들 역시 속으로 낭패를 봤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진은 식당에 모인 이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식당을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혈액팩 쪽을 가리키며 한 마디를 남겼다.



"혈액팩. 많이 안 남았는데?"



식당을 빠져나온 지, 약 10초 후. 식당 쪽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쾅하고 소리와 함께 온갖 욕지거리가 들렸다. 머리가 어중간하게 돌아가는데다가 귀까지 얇으니까 행동을 조종하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진은 뒤 한번 안 돌아보고 객실로 향했다.



**



"이. 이봐. 확실하지? 그 작전대로만 하면....“



낡은 소파에 앉아있는 여리여리한 체구에 안경을 낀 남자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모히칸 머리의 말에 적당히 대꾸했다.



"내가 시키는 일만 해. 그럼 성공할 테니까."


“으으. 알았어. 일단은 네 말을 따르지."



모히칸 머리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남자의 부하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리오. 배가 보이기 시작했어."



리오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진 유리창 너머의 지평선에서 점점 커지는 배를 바라보며 리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지개를 펴며 천천히 앞으로 향하는 리오의 곁에는 그와 같은 회색 죄수복을 입은 흡혈귀들이 붉은 눈을 한 채로 함께 서있었다.



"그럼 일단은 배부터 채우고 시작할까?"



저 배에 타고 있는 어리석은 사냥꾼 꿈나무들을 사냥함으로써.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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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54화-소수정예 20.12.18 37 2 16쪽
53 53화-작별 20.12.16 53 2 17쪽
52 52화-상황종료(?) 20.12.14 48 2 16쪽
51 51화-개봉 당일 20.12.11 55 2 17쪽
50 50화-빌드 업 20.12.09 42 3 16쪽
49 49화-시나리오 작성 20.12.07 43 3 15쪽
48 48화-신과 악마 20.12.04 43 3 16쪽
47 47화-선발대 20.12.02 138 3 16쪽
46 46화-영혈교 20.12.01 45 2 17쪽
45 45화-수상한 남자 20.11.30 47 3 18쪽
44 44화-첫 출근 20.11.26 45 2 15쪽
43 43화-최종 합격자들 20.11.25 53 3 16쪽
42 42화-막고라 20.11.23 60 3 15쪽
41 41화-도망자VS추격자 20.11.22 50 4 15쪽
40 40화-탈출 계획 20.11.20 51 4 17쪽
39 39화-한밤 중의 대치 20.11.18 42 3 16쪽
38 38화-첫째날 20.11.17 48 3 19쪽
» 37화-전초전 20.11.15 46 5 19쪽
36 36화-새로운 시작 20.11.13 47 2 16쪽
35 35화-결단 20.11.11 50 2 18쪽
34 34화-마지막 인사 20.11.09 49 4 19쪽
33 33화-입단식 20.11.05 49 3 19쪽
32 32화-새로운 가족 20.11.02 63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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