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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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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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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 낯선 것 (14)

DUMMY

무벤의 수도원은 넓다.

그것도 허허넓은 것이 아니라 빼곡하게 넓다.

가끔 일반 신전이나 지역의 대교구 정도의 크기를 예상하고 방문한 손님들이, 수도원 내부에서 길을 잃고서 며칠 후에 구조되는 일은 무벤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토록 거대한 수도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먼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세속구역이 있다.

이 구역의 크기만 해도 작은 도시와 비견될 정도로 크다. 그리고 세속구역에서 신도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도시의 시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세속구역의 신도들 역시 거리를 치우고, 곡물을 빻고, 빵을 굽고, 식물을 재배하고, 옷감과 재목을 수선하고 재단하며,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서 새 건물을 짓곤 한다.


다만 도시와 달리 세속구역에 시장은 없다.

시장의 본질은 생산이 아니라 유통이며, 교단의 섭리에 따르자면 유통은 신성한 일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이유지만 어차피 경제학자들이 세속구역에서 활동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세속구역에는 아직 사제가 되지 못한 신도들이 머물고 있다.


다음으로는 신성구역이 있다.

세속구역과 마찬가지로 크기는 역시 웬만한 도시와 비견될만하다.

다만 이곳의 사제들은 일반 시민들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지는 않는다.

신성구역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사제들의 기숙사와 신전 그리고 스콜라리움 등이다. 따라서 생산을 위해 헌신하는 시민들과 같은 생활을 벌일 여지가 없다.

실제로도 신도를 벗어나 사제가 된 이들은 하루의 절반을 스콜라리움에서 보낸다. 스콜라리움은 전도유망한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보내고 싶어하는 곳이며, 그곳에서 사제들은 언어를 가르치거나 배우고, 교리 전파를 위한 실습을 하거나, 혹은 역사를 집필하는 일과 교리 해석이다.


이 두 구역을 합친 면적은 남부에서 제일 큰 도시인 콜텐보다 크다. 그리고 그토록 거대한 수도원이 고작해야 무벤의 삼분지 일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은 무벤이 얼마나 광막한 도시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바로 그 광활함이 수도원 내부에서 떠도는 온갖 비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 부지가 워낙 광활하고, 또 구역들마다 직위에 따른 입장 제한이 있는 탓에 평생을 수도원에 기거한 사람들조차 수도원 내부를 전부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가령 신성구역에 있는 사제들의 기숙사와, 신전을 구분 짓는 커다란 담벼락에는 카니쿨라나 드나들 만한 작은 구멍이 하나 있다.

카니쿨라구멍이라 불리는 이 자그마한 구멍은 늦잠을 잔 어린 사제들이 애용하곤 하는 일종의 비밀 통로다.

이 구멍 덕에 잠이 많은 사제들은 아침 미사에 간신히 지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담벼락에 난 비밀스러운 구멍으로 말하자면 세속구역에도 비슷한 것이 하나 있다.

다만 이 구멍은 앞서 말한 카니쿨라구멍과는 달리 비밀스러움이 덜한 것처럼 보인다.

세속구역의 외곽, 즉 무벤의 시가지와 이어진 담벼락에는 세로로 긴 자그마한 균열이 있다. 그 균열은 덩치 큰 성인 남자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작고 좁았다.

하지만 세속구역의 신도들에게는 그 정도 크기면 충분했다.

신도들은 그 자그마한 균열을 더없이 슬기롭게 이용했다.

그러니까 온갖 규제와 규율로 점철된 수도원 생활에 신물이 난 신도들은, 현재 세속구역에 기거하고 있음에도 그 균열을 통해 더욱 더 세속적인 것들을 바깥과 주고 받곤 했다.

내용물은 다양하다. 수도원에선 금지된 향신료나 버터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은 아주 수시로 그 균열을 오갔고, 달달한 과일이나 말린 고기처럼 조금 더 세속적이고 큼지막한 것들은 빈번할 정도로 그 균열을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가끔씩은 체구가 자그마한 여성이 균열을 통과하는 일도 발생하곤 한다.


역사 깊은 수도원의 두 구멍들 외에도 수도원에 비밀스러운 장소는 많다. 부지 내 숲에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사제들이 모이는 터가 있었고, 건축상의 문제로 버려진 오래된 건물 같은 것들도 밀회의 장소가 되곤 했다.

그 모든 장소는 전부 비밀스러운 장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밀스러움에 경중이나 심도를 따지는 일은 딱히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따져보자면 그 수 많은 장소들 중 가장 비밀스러운 곳은 역시 중앙신전 내부의 어느 작은 회의실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더 적을수록 그리고 비밀이 누설되었을 때의 파급력이 클수록 더 중요한 비밀로 취급된다.

그런 이유로 그 회의실은 수도원에서 가장 비밀스럽다.

일단 수도원에서 회의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곤 다섯 명밖에 없다. 게다가 회의실 밑에 있는, 총 면적이 짐작도 되지 않는 무식한 지하 유적이 세간에 공표되었을 때의 파급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현재 수도원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그 회의실에서 다섯 남자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두 추기경은 체통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테오도르와 멀락은 사제복을 내팽개치고서 바닥에 완전히 엉덩이를 깔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하의 입구를 중심으로 추기경들의 맞은 편에 있는 리버 역시 그 두 명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버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토비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차가웠고, 토비는 그 차가운 공기가 사막의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신 헥헥거리며 들이마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길버트는 숨을 고르고 있는 동시에 존경 어린 시선으로 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하에서 올라오는 일은 내려가는 일보다 몇 곱절은 더 힘들었다. 게다가 지하에서 보낸 시간은 여가시간이라고 보기엔 너무 위급했고, 크기가 들쭉날쭉한 계단을 오르는 일은 무난한 등반이라고 하기엔 너무 험난했다.

멀락을 바라보며 길버트는 자신이 멀락의 나이쯤 먹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멀뚱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보던 길버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체력을 관리하려 발버둥쳐도 멀락처럼 늙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방금 전의 등반은 그만큼 끔찍한 경험이었다.


두 종교인에게 존경의 시선을 던진 후에 길버트는 이번에는 루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방 안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다섯 남자와 달리 루나의 숨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루나는 여전히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는 듯했다.

루나를 관찰하던 길버트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신음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 상식을 루나에게 만큼은 적용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물론 루나와 함께하는 동안 그녀에 대해 알아낸 사실이 하나도 없지는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길버트는 적어도 '그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기는 했다.

그때 루나가 길버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쭉 루나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탓에 두 사람의 눈빛이 한 지점에서 부딪혔다. 곧 루나가 위로하는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 됐어, 세 번째 문이 네 것이 아니라서."


"...그리 아쉽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보자면, 방을 거치면 거칠수록 더 위험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보는 게 타당합니다. 제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루나는 길버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잠시 후에 피식하고 작게 웃었다.


"생긴 것만 보면 능청스러울 것 같지만, 길버트 너는 거짓말에 상당히 약한 편이군. 하지만 계속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을 필요는 없어. 네 방은 따로 있으니까."


"제 방... 말입니까?"


"그래. 길버트 네 성물은 머리, 그러니까 이성이지. 이성은 고매한척 굴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녀석이야. 그래서 그 녀석은 낮은 곳에 머무르는 일을 극도로 싫어해. 낮은 곳에 있는 우리는 쉽게 마주하기도 어렵지."


루나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멀락과 리버는 여전히 숨을 고르고 있었고, 테오도르는 루나의 말에 무궁한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루나는 잠깐 질린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말을 잇기로 한 것 같았다.


"이건 네가 지하에서 했던 얘기와 비슷할 것 같아. 너는 개념 이전에 반드시 인식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어. 물론 형이상학적인 얘기에 정답은 없겠지. 하지만 길버트 네 식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인식이 있기 전과 그 후에 있는 것들도 있다고 할게."


"잘 모르겠군요. 인식 전과 후에 무엇이 있습니까?"


"감성과 이성이 있지. 그 방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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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1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6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1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1 0 12쪽
12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4.02.15 11 0 14쪽
123 얻은 것과 잃은 것 (14) 24.02.15 10 0 18쪽
122 얻은 것과 잃은 것 (13) 24.02.10 9 0 17쪽
121 얻은 것과 잃은 것 (12) 24.02.10 7 0 13쪽
120 얻은 것과 잃은 것 (11) 24.02.10 7 0 11쪽
119 얻은 것과 잃은 것 (10) 24.02.10 8 0 11쪽
118 얻은 것과 잃은 것 (9) 24.02.01 9 0 15쪽
117 얻은 것과 잃은 것 (8) 24.01.29 10 0 13쪽
116 얻은 것과 잃은 것 (7) 24.01.29 8 0 13쪽
115 얻은 것과 잃은 것 (6) 24.01.26 9 0 19쪽
114 얻은 것과 잃은 것 (5) 24.01.21 8 0 15쪽
113 얻은 것과 잃은 것 (4) 24.01.20 9 0 13쪽
112 얻은 것과 잃은 것 (3) 24.01.20 9 0 14쪽
111 얻은 것과 잃은 것 (2) 24.01.16 1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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