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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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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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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DUMMY

테오도르의 말이 끝나고, 멀락을 제외한 사람들은 묘한 시선으로 길버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선의 당사자인 길버트는 어째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사람들은 추기경이 말한 내용 중 천재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소 민망한 기분을 받았지만 길버트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요약하자면 그 천재적인 소년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봐야겠군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합니다.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소년이 책을 해독해 파스토르에게 고대인과 성물에 관한 것을 알려주었고, 파스토르는 다시 그 정보를 남부에서 온 세 명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됩니다

하지만 저는 북부의 대주교가 어째서 그 중요한 사실을 자드 공장과 듀라트 백작 그리고 추기경께 알려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성물에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스토르는 굳이 남부에 그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길버트는 한번 뜸을 들인 후 이어 말했다.


"...결국 여기에 대해 알기 위해선 성물이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길버트님. 사실 저희들은 바로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분을 이곳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테오도르는 발걸음을 멈췄다.

관성에 따라 몇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나간 길버트는 멀락의 등에 부딪히고 나서야 멀락이 어느샌가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따르던 일행이 세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둘 전부 멈춰 섰다. 테오도르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곳이 복도의 끝입니다."


길버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연하게 복도의 끝에는 미지의 방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굳이 묘사하자면 그곳은 미로의 막힌 구간처럼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투박한 장소였다.

벽면은 여태 지나왔던 복도와 똑같은 흙벽이었고, 마찬가지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길버트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벽화의 앞으로 걸어갔다. 벽화를 그린 솜씨는 조잡했지만 내용을 알아볼 만큼은 되었다.

한 사람이 빛나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고, 그 주위로 수 많은 사람이 숭배하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길버트가 그 장면에 집중하고 있자 자연스레 리버와 토비 그리고 루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네 사람이 주의 깊게 벽화를 관찰하고 있었을 때, 테오도르가 말을 걸어왔다.


"어떠십니까. 여러분께선 혹시 벽화를 보고 짚이는 점이 있으십니까?"


테오도르는 네 사람 중 길버트와 루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물론 리버와 토비는 그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리버와 토비는 자신들에게 질문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감상하는 척 굴었다.

테오도르의 질문에 먼저 루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테오도르는 살짝 실망한 기색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집중하던 길버트 역시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가장 직관적으로 보자면 벽화 속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은 성물이고,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런 해석쯤이야 두 추기경께서 이미 하고도 남았겠지요."


길버트가 확인의 눈빛을 보내자 두 추기경이 동의의 표시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서로 간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꾸준히 벽화를 관찰하던 어느 시점에 길버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길버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기지 넘치는 해석을 내놓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벽화들은 공통적으로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


테오도르가 화색을 띄며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벽화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복도를 지나오면서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 보이는 것들은 아무래도 고대의 짐승이나 요괴로 추측됩니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여기 그려진 것은 누가 보아도 돼지이고, 여기 이건 까마귀일 겁니다. 이건... 불명확하지만 아마 사슴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건 더욱더 애매하지만 베르미거나 혹은 도마뱀일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엉성하고 모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너무..."


길버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잠잠히 듣고 있던 리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길버트씨는 고대인들이 그림을 너무 못 그린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두 추기경이 선선하게 웃었고, 토비는 리버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끌어 내며 타박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하고 뒤에서 가만히 좀 듣고 있어라 욘석아."


리버가 강제로 끌려간 뒤 두 추기경과 리버 일행은 다시 길버트를 주시했다. 길버트는 꿈뻑거리는 눈으로 리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토비군, 리버군을 놓아 주십쇼. 리버군의 말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그림이 조잡해 보일 정도로 못 그렸다는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뭐야?"


토비가 미심쩍은 눈으로 길버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토비의 바람과 다르게 길버트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고, 아무튼 도무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곧 리버가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토비를 쳐다보았다. 토비는 어쩔 수 없이 리버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토비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초리였지만, 질문은 그보다 먼저 테오도르에게서 나왔다.


"저는 지금 길버트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못 그렸다는 사실이 어째서 이상한 일인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오해들을 하고 계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저는 고대인들의 화풍이나 혹은 미적감각의 빈곤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보리와 귀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있어도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노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때까지 자신만만하던 리버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리버의 표정은 빠르게 주위로 전염됐다.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길버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루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루나는 길버트 옆에 서서 벽화를 훑어보다가 이내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개구리가 억척스럽게 울어 댈 때면, 아이들은 개구리와 함께 노래하지만 노인들은 다음 날 비가 올 것을 염려한다는 말이군."


"정확합니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길버트와 루나는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심각한 표정으로 벽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추기경이 신음을 흘렸다. 이어서 토비가 얼굴에 다분한 폭력성을 드러냈고, 마침내 토비의 털이 빳빳해지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길버트는 입을 열었다.

길버트는 얼핏 장난스러운 투로 설명했다.


"이런 말입니다 토비군. 이 그림이 조잡하다는 것 자체는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는 고대인의 유적이잖습니까. 만약 이 그림을 그린 것이 고대인들이라면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 토비군은 그림을 그려본 일이 있습니까?"


"나 말이냐? 경험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야 있지. 잠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이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보라거나 하는 요구를 할 셈은 아니겠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내 그림 실력은 정말로 형편없다."


"그런 것을 요구할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단지 이것만 물어보겠습니다. 만약 지금 나무 막대기 하나를 쥐어준다면 토비군은 이 벽화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소릴! 애초에 예술에 대한 조예가 형편없는 놈들도 이 씹다 뱉은 소시지 같은 것보다야 잘 그리지 않겠냐.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고대인들이 그림 좀 못 그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응?"


말하던 도중 토비는 문제를 발견했다. 그리고 토비와 길버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추기경과 리버 역시 토비와 동시에 어떤 점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장 먼저 테오도르가 자책하는 투로 말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길버트님이 말하신 것처럼 이 벽화는 고대인이 그렸다고 하기엔 너무 조잡한 것이고, 또 토비님이 말하신 것처럼 아무리 예술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로 형편 없이 그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두 분이 어떤 의미로 얘기하신 것인지 정확히 알겠습니다. 고대인들은 지금 저희들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을 이룩했었습니다. 예, 그렇군요. 한살배기 꼬마보다 그림 실력이 떨어지는 노인은 없습니다. 전자는 아예 그림이라는 개념조차 모를 테니, 이 경우 예술에 대한 타고난 기량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상한 일입니다. 마법과 건축의 수준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사회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를 만든 것은 고대인들일 테니, 당연히 고대인들도 우수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야 하겠지요. 고대인들 모두가 예술가는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발전된 문명에서 이렇게 형편없는 그림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길버트는 흥분에 찬 테오도르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대답했다.


"제가 이곳에서 파악한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면 얘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군요. 조금 전 추기경께서 말하신 악시오마라는 책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대신 추기경께서 알고 계신 것들을 전부 말해주십쇼. 성물에 관한 얘기를 전부 듣고 나면, 이 벽화들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순서를 혼동해버렸습니다. 충분한 설명 후에 이곳에 모셔오는 편이 더 좋았겠습니다. 확실히 길버트님의 말처럼 저희들은 아는 것 밖에 알지 못하고, 아는 것밖에 볼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성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요 토비님?"


테오도르가 갑자기 토비를 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토비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그간의 언행으로 미루어 테오도르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토비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 꼼꼼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토비는 잠깐 동안 쑥쓰러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금방 시선을 거뒀다. 사실 오래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토비의 변화는 뚜렷했다.

토비의 털은 어느샌가 젖어 있었다. 땀으로 무거워진 털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고, 그 모습은 오래된 관용구처럼 꼭 물에 빠진 무스꼴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눈빛이 관찰에서 동정으로 바뀐 것을 확인한 토비는 낮게 으르렁댔다.


"생각해줘서 고맙군 조금만 더 빨리 생각해줬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야. 뭐, 나가서 해도 될 얘기라면 일단 이 방을 좀 벗어나자. 사실 저 녀석이 말한 대로 한참 전부터 더워서 죽을 지경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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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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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얻은 것과 잃은 것 (12) 24.02.10 5 0 13쪽
120 얻은 것과 잃은 것 (11) 24.02.10 5 0 11쪽
119 얻은 것과 잃은 것 (10) 24.02.10 7 0 11쪽
118 얻은 것과 잃은 것 (9) 24.02.01 8 0 15쪽
117 얻은 것과 잃은 것 (8) 24.01.29 9 0 13쪽
116 얻은 것과 잃은 것 (7) 24.01.29 7 0 13쪽
115 얻은 것과 잃은 것 (6) 24.01.26 8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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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얻은 것과 잃은 것 (4) 24.01.20 7 0 13쪽
112 얻은 것과 잃은 것 (3) 24.01.20 7 0 14쪽
111 얻은 것과 잃은 것 (2) 24.01.16 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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