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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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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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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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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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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DUMMY

돌문의 건너편은 한마디로 황량하고, 꽤 휑한 통로였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곳은 갱도와 닮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의 윗부분은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 편에서 나오는 불빛이 없어서, 통로를 걸어가는 일은 마치 괴수의 캄캄한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복도의 벽 역시 갱도의 벽처럼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갱도처럼 무른 벽은 아니었다. 어떤 처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벽은 단단했다.

그리고 그 벽에 가로 세로 1큐빗 정도 되는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길버트는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그 벽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방금 전 넓은 공동과 달리 복도는 폭이 좁았고, 또 계단을 내려올 때보다 더 많은 램프를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길버트의 감상이란 말 그대로 단순한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길버트는 예술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숲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벽화를 관찰했다.

사실 그렇게 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벽화들 중 대부분은 아무렇게나 뭉개진 상한 치즈 덩어리와 비슷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다만 몇몇 치즈 덩어리들은 상당히 익숙한 모습을 띄고 있기는 했다.

가령 네 발로 걸어 다니고 코가 들린 형상을 그려 놓은 벽화는 누가 보더라도 돼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벽화에는 그 외에도 가끔 길버트가 아는 식물이나, 혹은 인간과 여타 짐승들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기괴한 그림들이었다.

가만히 벽화를 감상하던 길버트가 테오도르에게 뭔가 질문을 던지려 했을 때, 불쑥 리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추기경님?"


"예, 리버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음, 그러니까.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던 얘기는 마저 해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북부의 머리로 갔던 네 사람의 행적이 심히 궁금한데요. 추기경님은 거기서 대륙의 비밀을 엿보셨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잊고 있었군요. 이 복도는 꽤 긴 편이니, 그럼 끝에 도달할 동안 남은 얘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 얘기는 어차피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테오도르는 리버 일행을 한번 죽 둘러보았다.

먼저 남부에서 나고 자란 리버는 호기심이 그득한 눈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으로 루나는 얘기에 흥미가 없는 듯 심드렁하게 걷고 있었고, 길버트는 벽화에서 완전히 눈을 뗀 채 테오도르의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기색이었다.

마지막으로 토비는 먼지와 끔찍한 전쟁을 벌이느라 이야기를 듣고 있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토비는 끝없이 콧구멍을 파고드는 먼지에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었고, 그 재채기로 인해 일어난 먼지가 다시 토비를 괴롭히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선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말하자면, 저는 아직도 그 여행길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여행의 과정을 묻는다면 성심성의껏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습니다.

예컨대 북부의 대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엄격한지. 그 장엄한 자연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한지. 혹은 극광의 베일 밑에서 넋을 놓았던 일이나, 크레바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살아 나온 일. 카니쿨라들의 반란과, 그 반란을 제압한 썰매꾼의 이야기 등 멋진 모험담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쯤에서 테오도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슬쩍 일행들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리버는 살짝 들뜬 얼굴로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버는 그 여행 과정이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나는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이었고, 토비와 길버트는 그런 것보다 어서 본론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테오도르는 마음 속으로 자신이 꺼낼 얘기를 간추렸다.


"모험담은 많지만 전부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여행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하겠습니다."


리버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길버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도르가 이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저희들은 솜씨 좋은 썰매꾼 덕에 마침내 무사히 북부의 머리에 도착했습니다.

아직도 그 신전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 그 신전은 꼭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곳곳이 얼어있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재료가 얼음은 아니더군요. 건물들은 평범하게 나무로 건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축 재료가 평범하다고 해서 그곳의 놀라움이 퇴색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부지의 넓이만 놓고 보자면 무벤에 있는 저희들의 수도원이 더 큽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신의 사원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저는 솔직히 그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담컨대 누가 뭐라고 해도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황량하고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묵묵히 수도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따뜻한 콜텐에 있던 저로서는 존경심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얘기를 계속하자면 저희들이 도착하자마자 수도원 앞에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쯤이면 짐작하시겠지만 그들이 바로 디스토니아 중앙 신전의 수도사들과 파스토르 대주교였습니다."


테오도르는 세 남자의 열렬한 시선을 받으면서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들이 저희들의 도착 시일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들은 저희들을 미리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첫만남에서 저는 마침내 소문이 무성하던 파스토르 대주교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대주교의 정확한 첫인상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습니다.

제 기억력에 대해 잠깐 변명하자면, 당시 저는 긴장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피나 협정에서는 제가 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 자피나에서 이루어진 협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협상이었습니다. 종교인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북부의 머리에서 이루어질 협상은 달랐습니다. 그 협상에서 저는 터무니없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자드 공작은 북부의 대주교와의 담판을 제게 일임했습니다. 향후 대륙의 향방을 결정지을 그 중요한 협상을 말입니다."


테오도르가 거기까지 말했을 시점에 리버와 토비는 완전히 흥미가 식어버린 모습으로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다만 길버트는 조금 전보다 더욱 집중한 모습으로 추기경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정리하듯 말했다.


"추기경께서 가지셨을 부담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대륙 전역에서 왕권이란 말은, 골목대장이라는 말과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보다 훨씬 넓은 영토와 많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제후들이 즐비했으니까요. 왕권이 신권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은 카니쿨라가 페루스에게 덤비는 꼴과 비슷하게 느껴지던 시기였지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군요. 얘기를 계속 해 주십시오. 그래서 추기경께선 북부의 머리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저와 대주교는 우선 대륙의 실질적인 문제부터 다뤘습니다. 길버트님도 아시겠지만 디스토니아-피오 협정이라 불리는 그 협상에서, 북부인들은 공식적으로 피오 교단의 북부에서의 포교 활동을 전면 승인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교 활동의 지원, 신권의 단일화, 무벤에서의 전면 철수, 세금과 관세의 조정, 탐사권과 채굴권의 양도, 인력 제공, 문화 교류 등 수 많은 조약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피나에서 저는 북부의 왕에게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상의 왕이니까요. 하지만 파스토르 대주교는 다릅니다.

비록 섬기는 신이 다르다 할지라도 어찌 됐든 그는 한 교단의 대표자이며 교리 해석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과 협상에 임해야 했고, 심지어 이전에 그런 식의 협상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지독하게 긴장했고, 그래서 제가 그 협상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며칠에 걸친 협상이 전부 끝난 후에 일어난 일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일이란 성물과 관련된 일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선 이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협상이 끝난 후에도 저희들은 한동안 북부의 머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더없이 신성한 그곳에서, 또 생활 양식은 낯설지만 충만한 신앙심만은 익숙한 사제들과 함께 교의를 해석하고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욕심 때문에 저희들이 거기서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당시는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썰매꾼의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를 북부의 머리까지 데려다 주었던 그 우수한 썰매꾼은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만용을 부리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썰매꾼은 그 시기에 남하하는 일은 객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저희들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썰매를 모는 일에 관해서 무지했고, 썰매꾼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여행 중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저희가 그를 신뢰할 수 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는 한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북부의 머리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버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끼어들어서 조심스레 말했다.


"저 추기경님, 갑자기 쌩뚱맞은 질문을 해서 죄송하지만, 혹시 그 소문은 사실인가요? 그러니까, 북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추운 겨울이 되면..."


테오도르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들이 기르던 카니쿨라를 잡아 먹는다는 얘기 말이군요.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그야 북부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힘든 일이기는 합니다. 사냥도 할 수 없으니 보존해 놓은 식량이 떨어지고 나면 굶어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북부인들은 어떤 극한의 상황이 와도 절대 카니쿨라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그런 행위는 당장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순간의 갈증이야 가라앉지만 결국 더 큰 갈증이 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겨울을 견디자고 카니쿨라를 잡아먹는다면, 여름이 와도 썰매를 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썰매를 끌 수 없다는 말은 고립된다는 말이고, 또 사냥에 나설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게다가 겨울에 체온이 높은 카니쿨라를 끌어 안고 자는 북부의 전통을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헛소문입니다."


곧바로 토비가 중요한 얘기에 끼어들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식의 핀잔을 줬다.

그리고 토비가 뭐라고 하든 일단 자신의 의문은 해결할 수 있었던 리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테오도르는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럼 본래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북부의 머리에 머무를 당시, 그들의 대접은 황송할 만큼 융숭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남부에서 온 저희들이 불편을 겪는 일은 일절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고 해야겠습니다.

우선 듀라트 백작은 주로 사제들과 어울렸습니다. 그곳의 사제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장작을 패는 일에 투자하더군요. 그리고 그 덕인지 남부에선 수도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락부락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듀라트 백작은 그중에서도 가장 몸이 탄탄한 사제들과 자주 어울리곤 했습니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당시 백작은 꽤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드 공작은 그곳에서도 업무를 보느라 바쁜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대륙을 통일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잖습니까. 아마 공작은 뒷처리에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전후에 이루어진 협상에 대해서도 검토할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공작은 수도원에 머무를 당시 주로 집무실에서 일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저 말입니까? 저야 당연히 모든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대륙의 가장 남쪽에 있는 인간과, 대륙의 가장 북쪽에 있는 인간의 관점은 확연히 차이가 났고, 그 차이로 인해 즐거운 토론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십 명이나 되는 주교들과 토의했고, 또 토론을 벌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들이 여전히 잘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중 디토라는 친구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권능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우리는 권능이 믿음에 기인한 것이라 여기지만..."


당시를 떠올리며 신나게 얘기하던 도중, 테오도르는 길버트의 표정이 묘하다는 점을 눈치채고 말을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르는 그 표정이 '어서 본론이나 말하라'는 점잖은 표현 방식임을 알아챘다.

테오도르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겪었던 일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에 계속 본론에서 벗어나고 있군요. 최대한 주의해보겠습니다.

이어서 계속 말하자면, 저희들은 그렇게 부족함 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파스토르가 저희들을 한 자리에 모으더군요. 아, 물론 썰매꾼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모인 것은 자드 공작과 듀라트 백작, 그리고 저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파스토르는 저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어디론가 안내했습니다. 그가 안내한 곳은 회의장이었고, 회의장에 난 작은 문을 들어가니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곳이 나타났습니다. 다만 가정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파스토르를 따라 그 통로에 들어갔고, 거기서부터 몇 층이나 한참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사실 그때 저희들은 혹시 파스토르가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앞에서는 순순히 협상에 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암살을 시도하려는 계책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 대목에서 길버트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서 길버트의 생각을 알아챈 테오도르는 한번 마주 웃어준 뒤에 이어 말했다.


"예, 길버트님이 하고 계신 생각처럼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암살을 시도할 작정이었다면 그냥 첫만남에 시도했으면 됐습니다. 게다가 저희들을 대체할 인물은 남부에 차고 넘치지만, 파스토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북부에 없습니다. 거기서 저희들과 대주교의 목숨을 교환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요.

아무튼 저희들은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어느 시점에 문이 나타나더군요. 파스토르는 익숙한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저희도 별 생각 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총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선 한 명은 털갈이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지나치게 털이 복슬복슬한 쿠니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주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백발과 백안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고, 쿠니는 소년의 등 뒤에서 그를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비록 종족은 달랐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모성애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 숭고한 감정들은 이해하기도 전에 그저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서신에서 추기경님은 대륙 곳곳에 유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파스토르가 여러분을 안내한 곳은 이곳과 같은 유적입니까?"


여태 가벼운 태도로 얘기하던 테오도르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맞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곳은 북부의 머리에 있는 고대인의 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렸던 얘기는, 사실 그곳에서 파스토르 대주교에게 들었던 얘기들입니다. 그리고 최초에 파스토르 대주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방 안에 있던 것은 분명 작은 소년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얘기가 이상하군요. 저희가 추기경께 정보를 얻었고, 추기경께서 파스토르에게 정보를 얻었고, 파스토르는 다시 그 아이에게 정보를 얻었다면, 그 아이는 대체 어디서 고대인과 성물에 관한 정보를 얻었습니까?"


"악시오마입니다."


처음 듣는 단어였고, 또 낯선 발음이어서 길버트는 잠시 자신의 기억을 이리저리 헤집어 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길버트는 그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정보를 끌어낼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엮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길버트는 자신이 완전히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길버트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 악시오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년이 읽고 있던 책의 이름입니다. 처음에 저는 그 소년이 읽고 있던 것이 동화책 같은 것인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소년은 꼭 그럴 나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책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문자 형태로 남은 고대인의 저서였습니다."


길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질문했다.


"유적이 실제로 있으니, 그런 책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있다고 해도, 저는 그 책이 유아권장도서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만."


테오도르는 동의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도 악시오마를 읽어보았지만 도저히 어린아이들이 읽을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대륙 누구도 관심 있게 읽지 않을 책입니다. 그것은 고대인의 책이며, 고대인의 언어로 적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 그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읽는다는 말은, 단순히 책을 눈으로 본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그 소년은 책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소년은 불세출의 천재였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고대의 문자를 해석할 정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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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0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5 0 12쪽
»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0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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