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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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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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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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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것과 잃은 것 (10)

DUMMY

새벽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애매한 시각에 마르코는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지만 처리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집무실로 들어선 마르코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몇백 장이나 되는 헤르바지가 쌓여 있었다.

헤르바지는 각종 보고서와 서류, 혹은 서신 같은 것들이었고, 그리 질이 좋지 않았다.

고갱이가 제대로 마르지 않았고, 풀을 제대로 먹이지 않은 탓에 그것들은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마르코는 조심스럽게 서류들을 분류했다.

곧 탁자 위에 서류가 몇십 장씩 차곡차곡 쌓였다.

종이를 옮기는 과정에서 풀 향기가 폴폴 올라와서 마르코는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불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많은 양의 서류들을 양피지로 대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자면 아마 정보 길드의 재정 대부분을 종이를 사는 데 써야 할 것이다.

긴 분류 작업을 마친 마르코는 펜을 집어 들었다.

그때 집무실 창가 쪽에서 말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났군."


마르코는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마르코는 창가 앞 탁자에 말콤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르코는 말콤을 관찰했다.

말콤은 멀끔한 차림과 얼굴이었고, 머리도 제대로 감은 것 같았으며, 심지어 얌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큰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말콤의 뒤편에서 역광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얼핏 신성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마르코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상관에게 신성함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감정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마르코는 고개를 한 번 젓고 나서 얼떨떨한 투로 물었다.


"이런 아침부터 집무실에는 웬일입니까. 평소에는 낮이나 돼야 겨우 일어나잖습니까. 저는 업무를 좀 보다가 몇 시간 뒤에나 깨우러 갈 생각이었는데요."


"지금은 바쁜 시기잖냐,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지."


놀랄 만큼 착실하고 성실한 대답이었고, 그래서 마르코는 더더욱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마르코는 말콤이 차림새는 멀쩡하지만 퀭하고 수척한 얼굴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마르코는 적잖이 안심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일어난 게 아니라 아예 자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일이 바쁘다고 해서 밤을 새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마스터도 항상 말했잖습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는지라구요."


"네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지금 시국은 너무 위태로워. 그래, 어젯밤에 나는 우리들이 격류 한 가운데 있다는 점을 알아버렸거든. 도저히 잠이 오질 않더라고."


"어젯밤 말입니까? 밤에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습니까?"


"별건 아니야. 드디어 알아냈더군."


마르코는 무덤덤하게 대답한 뒤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마르코는 주어와 목적어가 죄다 생략된 말콤의 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르코는 놀라며 되물었다.


"설마 그 밥만 축내던 쿠니들이 드디어 해낸 겁니까?"


말콤은 무뚝뚝한 얼굴로 책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해냈다. 어젯밤 렌카가 찾아와서 성분을 밝혀냈다고 얘기해주더군. 그 바람에 잠이 달아나서 한숨도 못 잤다."


그제야 마르코는 말콤이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에 나와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말콤은 어젯밤 일을 얘기한 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상관에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지만 마르코는 궁금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성분이 밝혀졌다면 책만 읽지 말고 빨리 말해주십쇼. 대체 니코티아나의 성분은 무엇이었습니까?"


"렌카가 말하길 연초는 담뱃잎과 오피디아잎으로 이루어져 있다더군."


"오피디아 말입니까?"


당연히 거기서 대화가 더 이어질 줄 알았지만 말콤은 마르코의 기대를 배반했다.

말콤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말콤은 그저 태연하게 책장을 한 장씩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 마르코는 말콤이 언제나처럼 자신을 안달나게 하기 위해 입을 다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콤은 실제로 독서에 집중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침내 마르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코는 말콤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슬며시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혹시 렌카가 오피디아의 성분까지 알아냈습니까?"


"아니, 그건 대륙의 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 식물은 환경에 따라 제 멋대로 자라니까. 오피디아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까지 밝혀내라고 하는 건 양심 없는 부탁이야."


"그럼 그건 반쪽짜리 답안지잖습니까. 오피디아의 성분을 알 수 없다면 결국 니코티아나의 성분을 알아내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진 않아."


말콤이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마르코는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마르코는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렌카가 어젯밤에 알아낸 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잖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쯤에서 말콤이 책을 덮었다. 말콤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의자를 마르코 쪽으로 돌렸다.

말콤은 의자를 한껏 젖힌 뒤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대며 말했다.


"마르코, 너는 가끔씩만 똑똑하다는 말이야."


"...가끔씩 만이라면 평소에는 어떻단 말입니까?"


"그야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지."


차마 상관의 머리를 쥐어 박을 수 없었던 마르코는 조금 으르렁댔고, 그 모습에 말콤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이렇게 장성할 때까지 업어 키웠는데 너는 아직도 정보의 본질을 전혀 모르고 있군."


"심술은 그만 부리고 얼른 설명이나 해주십쇼. 성분을 알아내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잖습니까. 도대체 렌카가 알아낸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콤은 탁자 위를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생각에 깊게 빠질 때면 나오곤 하는 오랜 습관이었다.

그 툭툭하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할 무렵 말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꽤 어려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바보라도 알 수 있도록 친절히 예시를 들어 설명해보지."


"잡설은 그만하고 본론만 말하십쇼."


"일단 이런 가정을 한번 해 보자구. 어느 날 밤, 콜텐에서 악질적인 살인 사건이 벌어진 거야.

유능한 치안대원들은 열심히 사건을 조사했고, 그 결과 하루 만에 세 명의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지. 다만 세 명 중에 누가 범인인지 확정하진 못한 단계야.

자 여기서 마르코 네가 치안대원이고, 눈 앞에 세 명의 용의자가 있다고 치자. 너는 당연히 심문으로 누가 범인인지 밝혀내야 해. 그런 상황에서 너는 용의자들을 어떻게 심문할 거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어서 마르코는 곧장 대답했다.


"그야 세 녀석이 어젯밤 뭘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야겠죠. 사건 당시에 알리바이가 없는 녀석이 아무래도 가장 수상쩍을 테니까요."


"좋아 아주 합리적인 심문 방식이야. 그리고 바로 거기서 정보의 특수성이 드러나지.

자, 상황을 조금 진전 시켜 볼까? 이번에는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자. 예컨대 용의자 세 명 중, 두 녀석은 심문에 술술 대답을 하고, 한 녀석은 쭉 입을 다물고 있는 거야."


"그럼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이 범인일 확률이 높죠."


"어째서 그렇지? 그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치안대원 마르코는 그 녀석에게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셈이지. 대답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그 녀석이 어젯밤 살인을 저질렀는지, 술집에서 질펀하게 놀아났는지 너는 알 수 없어. 그런데 왜 너는 대답하지 않은 놈이 범인일 거라 생각하지? 네가 얻은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뭔가 대답하려던 마르코가 갑자기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삼켰다.

맞은 편에서 말콤은 웃으며 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에 마르코가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답하지 않은 놈은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입을 다물었겠죠? 만약 어젯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결백하다면 대답을 하면 그만이니까요. 심문에 응하지 않아서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어라?"


마르코는 창가에 선 채로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그렇게 멈춘 자세로 서 있었다.

어느 순간 마르코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얼핏 알 것도 같은데 어떻게 말로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마스터의 말처럼 분명 상황 자체는 변한 게 없군요. 하지만 저는 분명 침묵하는 용의자를 의심하게 됐고... 음, 그러니까..."


마르코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부하의 당황한 모습에서 충분히 재미를 느낀 말콤은 그쯤에서 친절하게 계도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자 들어봐. 정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돼.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맥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두 가지지. 설명을 위해 간단하게 전자를 상황정보, 후자를 맥락정보라고 하겠어.

그럼 예시 중에서 이 두 가지를 구분해 보자고.

우선 상황 정보는 '어젯밤 콜텐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거나, '용의자는 세 명'이라는 사실이야. 그 외에도 무수히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두 가지니 나머지 것들은 일단 제쳐두자.

이 정보들은 그저 상황의 나열에 불과한 정보들이야. 동쪽에는 산이 많다거나, 바다는 강물이 흘러 모인 것이라거나, 혹은 콜텐에 사는 아무개가 이사를 했다는 식이지.

이것들은 이미 벌어진 일이거나 현재 진행형이야. 그래서 그저 알게 되는 정보들이지.

해석이나 가공의 여지도 거의 없어. 벌어진 일을 수정할 수는 없으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보란 거의 이 상황정보라고 할 수 있지."


"반면에 맥락정보는 그저 알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일반적으로 맥락정보는 사고와, 또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곤 하거든.

처음 예에서 상황정보만 따지면 '용의자는 심문에 어떤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가 되겠지. 실제로 그런 상황이고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없으니까.

하지만 맥락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져.

여기서 맥락은 '심문을 하고 있는 유능한 치안대원 마르코가, 용의자 녀석이 공연히 의심 받을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용의자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네 사고와, 범인이 처한 상황을 전부 고려해야 해. 그렇게 되면 용의자가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보가 되는 거지.

그 상황에서 너는, 적어도 그 용의자가 어젯밤 쉽게 말하지 못할 어떤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침묵에서도 정보를 얻은 셈이지."


얌전히 말콤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마르코가 불쑥 집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말콤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는 거야? 혹시 얘기를 듣다가 현기증이라도 난 건가?"


"현기증이 조금 나긴 합니다만, 토하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사용인들에게 차를 얻어오겠습니다. 이 시간쯤이면 아마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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