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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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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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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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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6)

DUMMY

방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리버 일행과 홉스가 건물로 들어선 순간부터, 콥스는 침대 옆에 무릎 꿇은 채 침대 위의 루디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침대 위에는 루디가 앉아있었다.

루디는 침대가 푹신한 것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물론 얼굴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어서 웃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서 확인할 수 없더라도, 꼭 행복해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콥스는 멍한 얼굴로 루디를 지켜보다가, 루디가 가끔 어떤 움직임을 취하면 의미 없는 아- 아- 하는 소리를 내뱉곤 했다.

어떤 일에 감탄하는 소리 같기도 했고, 어떤 일에 절망해버린 소리 같기도 했다.

콥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불쑥 콥스가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콥스는 지나치게 밀도가 높은, 무거운 공기를 휘저어 놓으며 말했다.


"너는... 너는 전부 알고 있겠지. 말해 줘. 이게 정말 루디인가?"


콥스는 루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루나가 아니라 침대 위에서 나왔다.


"나. 루디. 당신. 콥스."


확실하진 않지만 루디는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것 같았다.

그리고 콥스에게는 그 목소리 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 듯했다.

콥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디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랑. 결혼. 반지."


그렇게 말하고서 루디는 마치 홉스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팔을 들어 올렸다.

콥스는 가만히 루디의 팔을 양 손으로 받치고서 루디의 손을 바라보았다.

루디의 약지에는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죄다 부풀어 있던 탓에 반지가 있는 부분은 소세지의 중간 부분처럼 잔뜩 죄여든 상태였다.

콥스는 귀중한 보물을 만지는 것 같이 섬세하게 그 부위를 매만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냐.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일이..."


질문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당연히 사람들에게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때 루나가 침대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루나는 루디의 팔을 들어 보거나, 얼굴을 만져보다가 말했다.


"이 여자는 후와 몸을 섞은 모양이군. 희미하게 후의 기운이 느껴져. 몸에 상처가 없는 걸로 봐서 그 과정에서 크게 저항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야.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군. 아무튼 정조는 목숨에 비하자면 값어치가 상당히 낮은 편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개체가 유일하게 적응한 것 같군. 아마 동굴에 남겨진 다른 것들은 금방 죽어버리겠지. 애초에 인간과 요괴가 섞인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니까."


순간 콥스가 증오 어린 눈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방에 있던 사람들 역시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루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콥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물어서 대답해주고 있는 것 뿐이야. 조금 더 추측해 보자면, 아마 이 여자가 반항하지 않은 건, 너희들이 금방 구하러 와 줄 거라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르지."


거기서 루나는 홉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홉스 너도 봤겠지, 방금 전 마을에 쳐들어온 성체 후들은 고작 열댓 마리였어. 열댓 마리라면 너희들이 마음먹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숫자야. 그러니까 이 여자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너희들이 구하러 와 줄 거라는 식으로 생각했겠지. 안타깝게도 마을의 남자들이 죄다 겁쟁이들 뿐이라는 걸 모른 채 말이야. 그래서 이 여자는 희망을 가지고서 후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만! 그만 지껄이란 말이다! 이 베르미 같은 년이 뚫린 입이라고!"


콥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곧바로 리버가 움직였다. 리버는 콥스의 행동을 말리기 위해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콥스를 본 리버는 그를 제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멱살을 쥐고 있었지만 압도당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콥스 쪽인 듯했다.

리버의 추측은 거의 정확했다.

실제로 콥스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루나에게 거의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루나의 눈빛은 감정의 바다 가장 밑바닥에 숨어 있던 작은 양심을 쥐어 터트릴 만큼 차가웠고, 두려움이라는 껍질 속에 감춰져 있던 비겁함이라는 알맹이를 익혀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콥스는 멱살을 풀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오래된 흙탕물이 바닥으로 가라앉듯 한없이 계속 가라앉았다.

침대 옆에 멍하니 선 채 루디를 바라보고 있는 콥스의 등은, 왠지 모르게 처음 만났던 때보다 훨씬 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홉스가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려가자 콥스. 겉모습이야 어쨌건 그녀는 루디가 분명하다. 이 저주 받은 마을을 떠난 뒤, 깊은 산 속에 다시 마을을 짓자. 그리고 루디와 함께 살아가자. 마을 놈들이 따라올지 말지는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겠지만, 나는 끝까지 너와 루디를 도울 테니."


콥스가 뒤돌아보았다.

콥스의 눈빛은 애틋했고 표정은 전에 없이 온화했다.

순진한 시골 청년 같은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콥스가 침대 옆에 있던 낫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루디의 목에 대고 있는 힘껏 그었다.

그 행동은 찬찬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또 너무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콥스는 마치 그릇을 씻고, 밥을 짓고, 물을 마시는 아주 일상적인 행동처럼 그렇게 움직였다.

그래서 방에 있던 사람들은 잠깐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루디의 목에서 갈색의 피가 주룩주룩 삐져나왔다.


"피. 아파. 아파."


루디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졌다.


"아파..."


마지막 쯤에 간신히 쥐어 짜내는 듯한 소리를 한번 남겼다. 그리고 이후로는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입을 벌린 채 굳어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콥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불현듯 리버가 악을 쓰듯이 소리 질렀다.


"콥스! 이 미친 자식이..!"


리버는 콥스에게 들러 붙어 낫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콥스는 놀라운 힘으로 리버를 밀쳤다.

바닥 한 구석으로 내팽개쳐진 리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콥스는 다시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낫의 뾰족한 끝이 향한 곳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었다.

사실 휘두른다기보단 박아 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콥스는 한 손으로는 낫의 손잡이를 쥐었고, 반대 쪽 손바닥을 낫공치 부분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대로 손바닥을 밀었다.

날카롭고 뾰족한 낫의 끝부분은 금새 목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뼈에 막힌 것인지 어느 부분에서 턱 걸린 것 같았다.

콥스는 귀를 막으려는 것과 비슷한 동작으로 낫공치를 더욱 밀어 넣었다.

낫이 억지로 목을 파고 들면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어이없게도 리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딱 한 번 맛보았던 얼음을 갈아 만든 디저트를 떠올렸다.

콥스의 목에서 나는 소리는, 그때 그릇 가득한 얼음 조각에 스푼을 힘껏 박아 넣었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낫은 이제 거의 반 뼘 가까이 목에 박혀 있었다.

그 상태에서 콥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지독한 정신력으로 콥스는 박혀 있는 낫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꽈드득하는 무언가 억지로 부서지고 갉아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콥스는 주의 깊고 신중한 얼굴로 몇 번 더 손잡이를 비튼 뒤에, 마지막에는 기어코 박혀 있던 낫을 뽑아냈다.

푸쉭하는 소리와 함께 콥스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끝내고 나서야 콥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누운 콥스의 목에서 피가 공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주 커다란 분무기로 정원에 물을 뿌리는 모습을 역전시킨 것 같은 장면이었다.

처음에 압력이 강한 분무기처럼 솟구치던 피는,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콥스의 입에서 꼴깍 꼴깍하는 작고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얼어붙은 채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콥스는 눈을 부릅뜬 채 침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적막한 와중에 홉스가 동생에게 다가갔다.

홉스는 동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홉스는 손을 뻗어 부릅뜨여 있는 콥스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 뒤 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생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길버트를 향해 말했다.


"고맙소. 당신들 덕분에 겨우 마지막 순간에야 우리들은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이건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오. 정말 고맙소. 진심이오. 덕분에 우리는 인간인 채 생을 끝낼 수 있게 됐소."


선택을 한 것은 콥스였지만 홉스는 우리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길버트는 어째서 홉스가 우리라고 했는지 되묻지 않았다.

그리고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홉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홉스는 원인 모를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시오. 당신들은 급한 용무가 있다고 했잖소. 그러니 가시오. 이 마을을 당장 떠나시오."


리버는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길버트가 리버의 어깨를 붙잡았다.

길버트는 울상을 짓고 있는 리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끼익-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나가 건물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루나에 이어서 토비가 움직였다. 토비는 두 사람의 어깨를 양 팔로 감싸면서 낮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없다. 가자."



*



네 사람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숲 속을 행군했다.

루나가 앞장서서 걸었고 세 남자는 각자 그녀의 등이나 정강이 쪽을 보며 걸었다.

걷던 도중 길버트는 마을에 말을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되찾으러 갈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나머지 세 사람 역시 말은 더 이상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몇 걸음마다 마을 쪽을 뒤돌아보던 리버가 말했다.


"저기 봐요."


길버트와 토비는 몸을 돌렸다.

거대한 규모의 시커먼 연기가 마을이 있던 자리에서 뭉게뭉게 솟아나고 있었다.

길버트는 선명한 기시감을 느끼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문득 토비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불이 숲으로 번지면 어떡하지?"


"괜찮을 겁니다. 마을과 숲은 거리가 꽤 있었으니까요."


딱히 의미 없는 질문이었고 길버트 역시 거의 타성적으로 대답했다.

세 남자는 불길이 치솟는 마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리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버는 분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아마 자신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리버군. 혹시 폭포로 가던 길에 나눴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인간성에 관한 얘기였죠.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저는 인간성이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또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성은 인간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고, 그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타인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거기엔 근본적인 전제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마을을 바라보던 리버는 길버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은 아닌 것 같았지만, 길버트는 지금은 좀 떠드는 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이 설명을 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루디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녀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니니 그녀에게 인간성을 부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 그것이 숨은 대전제였습니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하기 위해선, 일단 그것이 인간처럼 생겨야 했습니다. 여태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루디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까지 저는 인간성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뇨, 아마 처음 길버트씨의 생각이 맞을 거에요. 루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음이 저릴 일도 없었겠죠. 저는 콥스가 루디의 목을 벴을 때, 그것이 짐승이나 요괴의 죽음이라고 생각되진 않았어요. 길버트씨는 언어와 개념이 모호하다고 말했었죠. 그렇다면 그냥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겠죠. 저는 루디를 인간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길버트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채 리버를 바라보았다.

리버는 공허한 눈으로 마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 마을에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이렇게 뒤숭숭한 마음도 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동의합니다. 리버군의 말처럼 차라리 처음부터..."


말을 하던 도중 길버트는 어떤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리버의 말에서 길버트는 자연스레 맨처음 마을을 발견했을 때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루나는 멀거니 서서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길버트는 경악하며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세 남자가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루나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었다.

길버트는 자신의 사고를 멈추고 싶었다.

현재 길버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고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생각을 멈추기란 불가능했다.

오히려 멈추려고 의식하는 순간 사고는 더욱 확장되며 끝없이 가지를 뻗쳐나갔다.

길버트는 루나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갔다.

남겨진 두 사람은 멀뚱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뒤를 따라 발을 뗐다.

길버트는 루나의 옆에 다다랐다. 길버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나양. 이것은 정말로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지만... 당신은 설마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습니까?"


"내가 뭘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


"처음 이 마을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수풀 속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 당신은 제 인기척에 놀라 도망쳤던 그 작은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단순히 그것이 작은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 나니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그때 당신이 보고 있던 것은 분명 아직 덜 자란 후였습니다."


"맞아. 그건 새끼 후였지. 그것이 후라는 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거라면, 그래 나는 알고 있었어."


길버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길버트는 이번에는 다른 것을 물었다.


"식당에서 술을 마실 때 말입니다. 루나양은 본인이 결코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쓰러진 것도, 그 뒤 후에게 끌려간 것도 전부 의도적인 일이었습니까?"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런데 길버트,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본론을 말해.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근처에 후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마을에 들르지 않고 그대로 산을 내려갔으면 됐잖습니까. 대체 당신의 목적이 뭡니까. 왜 알면서도 그 마을에 들어가서 그런 연기를 한겁니까?"


루나의 걸음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거친 숲길을 헤쳐갈 때도 빨랐지만, 지금 걷고 있는 오솔길은 꽤 잘 닦인 편이어서 루나의 속도는 거의 구보에 가까웠다.

길버트는 루나가 대답하기 곤란한 탓에, 일부러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잠깐 뒤돌아보자 리버와 토비가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알고 싶었어. 네가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뭘 알고 싶었다는 말입니까."


"후들은 원래 얌전한 요괴야. 자신들의 영역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숲에서 조용히 살아가. 하지만 이 마을을 덮친 후들은 그렇지 않았어. 인간을 공격하고, 심지어 인간과 구합했지. 어때,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아?"


길버트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곧 길버트는 마을의 상황을 듣자마자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난 몇 달 간 겪었던 상황과 지나치게 흡사했다.

루나는 길버트의 표정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마을은 듀라트 영지와 너무 닮아 있어. 베르미들도 원래는 온순한 요괴지."


길버트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루나의 얘기에 분명 어떤 중요한 실마리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리버와 토비가 두 사람에게 붙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접근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내 길버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홉스는 그것들이 양털을 벗길 시기에 덮쳐왔다고 했습니다. 추정해보자면 아마 잎새달이 뜰 때쯤이겠지요. 그 시기는... 듀라트 영지에 베르미들이 습격해온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나양. 당신은 설마 요괴들이 난폭해진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그만 둬 길버트."


"무엇을 그만 두란 말입니까."


"오밤중에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겁박하는 비신사적인 일 말이야."


길버트와 리버 그리고 토비가 거의 동시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과도한 자기애의 발현 이후 루나는 쭉 앞으로 걸어나갔다.

세 남자는 루나와의 거리가 꽤 멀어지고 난 후에야 허겁지겁 루나의 뒤를 따랐다.

이후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네 사람은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길버트는 역광이 서린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뒷모습에서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길버트는 루나가 어떤 생각으로 마을에 들렀는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루나의 의도야 어쨌건, 루디는 구원 받았으며, 콥스와 마을 사람들 역시 가장 마지막에 인간답게 죽을 수 있었다.

더불어 후들 역시 원래의 그들로 돌아갔다.

만약 그때 마을에 들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면.

루디는 끝까지 그 동굴에서 비루한 삶을 연명해야 했을 테고, 홉스와 콥스는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길버트가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탓에, 리버와 토비는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길버트를 흘끔대고 있었다.

잠시 후에 길버트는 자신이 두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버트는 의문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극히 미신적이고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길버트는 이 여정의 끝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립이 전한 서신의 내용을 생각해봤을 때도 그렇다.

어쩌면 무벤의 추기경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점에 길버트의 표정이 단단하게 바뀌었다.

길버트는 리버와 토비를 향해 말했다.


"서두릅시다. 한시라도 빨리 무벤으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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