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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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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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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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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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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것과 잃은 것 (14)

DUMMY

황궁의 복도를 거닐면서 자드는 방금 전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글썽이던 예술부 대신을 떠올렸다.

존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자드는 그 정도는 이해해주기로 했다.

애초에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자드는 예술부 대신 옆에 벌처럼 몰려들어 있던 대신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들 중 어떤 명석한 인물은, 예술부 대신에게 위로나 동정이 아닌 적절한 조언을 건넬지도 모른다.

예컨대 그 조언 중 하나는 '예술부 대신과 똑 닮은 어느 시민의 머리를 효수하는 것'과, '실제 예술부 대신의 머리를 효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조언일 수 있다.


물론 그 조언에 따르는 것은 시민들을 기만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드는 내심 누군가 예술부 대신에게 그런 식의 조언을 건네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쨌든 타인을 속이고 기만하려면 타인보다 월등히 머리가 비상해야 한다.

그러니까 기만은 명석한 자들의 특권 같은 것이고, 곧 벌어질 전쟁에서는 그런 명석한 부하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신들에게 원인 모를 혐오감을 느끼며 자드는 계속해서 복도를 걸었다.

자드의 뒤에는 두 경비병이 따라 걷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자드가 식당을 나선 순간부터 말없이 자드를 호위하고 있었다.


수 많은 방을 지나친 후에야 자드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그 방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방이었고, 방 앞에는 또 다른 경비병 두 명이 있었다.

다만 경비병들이 자드의 앞을 가로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방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별 말 없이 문을 열고 자드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방의 내부는 입구 만큼이나 역시 화려했다.

여러 가구들도 화려했지만 돋보이는 것은 단연코 중앙에 있는 침대였다.

침대는 열 명은 나란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높은 캐노피와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받침대는 북부제가 분명했다.

해가 쨍쨍한 시간이었고, 방의 한 면을 차지한 창도 거대했기에, 햇빛은 들이붓는 것처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빛줄기 중 몇은 침대를 파고들어서 하얀 시트 위에 푸르고 노란 빛을 감돌게 만들었다.


침대 위에는 한 노인이 베개를 등에 끼우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강렬한 태양 빛을 받고 있어서 노인의 얼굴은 누렇게 뜬 것처럼 보였다.

노인이 깨어있는 것을 확인한 자드는 경비병들을 물렸다.

자드는 자신이 데려온 경비병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쫓아낸 뒤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침대 옆에 도달한 자드는 그곳에 있던 여러 작은 의자들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자드가 앉자마자 노인이 자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님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다소 삐걱거렸다.

노인은 무정물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묘한 움직임으로 자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노인의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이 자드를 응시했고, 자드 역시 그런 노인을 지그시 마주 바라보았다.

잠시 말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먼저 고요함을 깨뜨린 쪽은 자드였다.

자드는 인사치레하는 투로 말했다.


"평온해 보이시는군요. 혹시 제가 모르는 새 몸 상태가 갑자기 호전되기라도 하셨습니까."


"전혀 아닐세. 여전히 더 좋아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태지. 하지만 자네는 똑바로 봤네, 자네 말처럼 마음은 더없이 평온하거든. 이런 몸이 되고 보니 이제서야 육체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에 큰 영향을 주는지 알겠구만. 육체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진다네. 그렇지, 조카님도 그 지독한 향상심을 한번 버려보게, 그러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답게 보일 거라 확신하네."


노인의 말에 자드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용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드는 그 내용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쨌든 노인이 자드를 상대로 꺼낸 호칭은 다소 민망한 것이었다.

노인을 이모부라고 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자드는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발전하지 않는 인간은 짐승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향상심을 포기한 개인은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겠지만, 후대에선 아마 그런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라고 부를 겁니다."


노인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자드를 바라보았다.

이해와 관용이 가득 담겨 있는, 또 한편으로는 철이 덜 든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편 노인의 시선을 받아내던 자드는 어쩔 도리 없이 밀려 드는 생경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드가 대화를 할 때 받는 것은 보통 두려움과 존경의 시선이지, 결코 동정이나 이해의 시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궁에서 그런 종류의 시선을 자드에게 보낼 수 있는 인물은 두 명 뿐이며, 적연하게도 그 두 명은 피가 이어져 있다.


노인을 바라보던 자드는 어느 시점에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불편한 감정의 원인은 자명했다. 자드는 노인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노인 역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노인은 통치자들이 가지는 특유의 관대함으로 자드를 동정하고 있었고, 자드는 그 사실이 불편했다.

관대함이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대할 때만 보일 수 있는 감정이다.

문득 자드는 노인이 과연 언제까지 초연하게 굴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자드의 입매가 조금 비틀어졌다.


"오랜만의 문안에 잡설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폐하. 지금은 급박한 시기이니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편히 말하게."


"저는 대륙을 통일할까 합니다. 폐하께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던 것 말입니다."


"그렇구만.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하는 겐가?"


식당의 대신들과 달리 황제는 그 일의 가능성에 대해서 떠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황제는 자드에게 통일의 당위성을 구명했다.

황제는 여전히 관대한 태도였다.

순간 자드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을 설명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유혹을 느꼈다는 사실에 속으로 헛웃음을 머금었다.

자드는 동년배인 여느 남자들처럼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드는 아드리안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 앞의 노인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꽤나 긴 망설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자드는 결국 어느 정도는 속내를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 결정은 황제가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라는 점이나, 혹은 황제가 풍기는 인자한 분위기에 취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북부의 시인 랑그의 말처럼, 비밀이란 잘 구운 하얀 빵과 같다.

빵이 갓 구워졌을 때에는 무엇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하얀 빵이 아까워 먹지 않고 오래 놔두면, 곰팡이가 생기고 어느 순간부터는 독이 된다.

비밀도 마찬가지다. 특히 비밀이란 그것이 더 중요하고 은밀할수록 놔두었을 때 더 많은 독성을 지니게 된다.


비밀의 치명적인 독성에 중독되지 않는 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내부에 비밀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밀의 독성은 가진 자를 옥죄고 옥죄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정신을 파먹어버리고 만다.

완벽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이 끝내 자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밀에 중독된 정신은 반드시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든 비밀을 풀어낼 수 밖에 없다.

비밀의 속성이란 원래가 그렇다.


다만 비밀의 속성이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털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앞서 말한 비밀의 속성은 당연히 내가 아닌 남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비밀을 풀어 놓으려는 자는 항상 비밀을 받아들일 자를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비밀을 풀어 놓으면 가장 좋을지 알고 있다.

바로 낯선 사람, 즉 완전한 타인이다.

비밀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완전한 타인은 비밀을 결코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황제는 비밀을 털어놓기에 더없이 적절한 인물이었다.

침대 위 잔뜩 쇠약해져 있는 노인은 자드가 방에서 나가고 나면, 이제 곧 완전한 타인이 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자드는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노인에게 미약한 동정심을 느끼며 말했다.


"종교전쟁에서 북부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부가 쌓이다 보면 북부는 남부와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많은 것을 얻었다고 했나? 북부가 무엇을 얻었지? 내가 알기론 종교전쟁에서 북부가 얻은 것은 과부와 고아들밖에 없네만."


"그런 감상적인 얘기는 제쳐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대화에 진전이 없습니다. 어차피 폐하께서도 전쟁 이후 북부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막대한 부를 알고 있잖습니까. 하지만 북부가 얻은 것은 고작해야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드리안 황제는 계속 얘기하라는 의미로 턱을 한 번 치켜들었다. 자드는 이어 말했다.


"북부가 얻은 것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이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종교전쟁에서 저희들은 처음 계획과 달리 북부의 머리까지 진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우리들은 올가에서 회군했지. 그건 올바른 결정이었네. 우리가 나데자에서 벌였던 학살은 추한 것이었어. 우린 그런 짓을 하면 안됐지. 아무리 욕심 많고 지독한 사냥꾼도 숲을 태우지는 않아. 짐승들을 잡을지언정 그들이 사는 곳을 죄다 뭉개버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했네.

내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후회했던 결정이고,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나데자에서 야습을 당한 다음 날 곧바로 남부로 돌아왔을 걸세. 북부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땅이야."


거기까지 말한 뒤 황제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일견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느꼈겠지만, 솔직한 말로 북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춥지 않았나. 거기서 더 이상 진군했으면 우리 모두 얼어 죽었을 테지."


이제 곧 노인에게 닥칠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자드는 도무지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의 웃음은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그래서 자드는 어쩔 수 없이 마주 웃어준 뒤 말했다.


"예, 말씀처럼 실질적인 문제는 추위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진저리치며 올가에서 남부로 등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전부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군대가 돌아간 후에도 얼어 붙은 땅에는 아직 네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얼핏 들었던 얘기로군. 자네와 듀라트 백작이 북부의 수도로 올라갔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였나?"


"피오 교단을 대표하는 한 주교와 썰매꾼이었습니다."


"멋진 조합이군. 자고로 멋진 여행이 되기 위해선 언제나 구성원이 짝수가 되어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고작 북부를 여행한 얘기나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테지. 계속 말해보게."


"저와 그 피오의 주교에겐 각자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 대외적인 목적은 물론 북부의 수도 자피나에서의 협상이었습니다. 올가에서 저희들마저 모두 남부로 돌아갔다면 그것은 폐하의 말처럼 단순한 학살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후대에 전쟁으로 기억되기 위해선 적절한 전후처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혈기왕성했던 그 주교의 목적은 정치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 했습니다. 그는 학구열이 넘치는 주교였고, 북부의 머리와 교류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더군요."


황제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수도사란 훌륭한 학자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학자들이 역사나 현실적인 수치, 혹은 윤리적인 문제나 다소 공상적인 숫자들과 씨름할 때, 수도사는 자신의 의지와, 신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실랑이를 벌인다는 작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자드는 이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 목적은 간단히 이루어졌습니다. 자피나에서의 협상은 원만하게 마무리됐습니다. 조약은 누가 보더라도 남부에 유리하게 체결됐고, 그때 얻은 탐사권과 채굴권으로 우리는 북부의 지하자원을 지금도 펑펑 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협상이 끝난 후의 여정입니다. 자피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 저와 백작은 주교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북부의 머리로 향했습니다. 사실, 그 주교가 요구하지 않았어도 저는 북부의 머리에 들를 예정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북부를 통치하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파스토르 대주교라는 이유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도 그곳에서 꼭 확인해둬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자드는 자연스레 그 황량하고 낯선 땅을 떠올렸다.

햇빛에 달궈진 황제의 침소는 따스했지만 그럼에도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드는 한번 몸서리친 뒤 말했다.


"북부의 머리까지 이동했던 과정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그 여정이 한 주교에게 신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험난한 것이었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저희들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몽환적이고 신비롭기 그지없던 극광을 세 번이나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뜬 그 극광에 지루하다는 감상을 품게 됐을 무렵, 저희도 모르는 새에 북부의 머리에 도달해 있더군요. 그 썰매꾼은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예, 마침내 저희는 북부의 머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은 전부 진실이었습니다. 북부의 대주교는 모든 것을 알고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얘기를 종잡기 어렵구만. 자네는 무엇을 상상했고,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지?"


자드는 숨을 한 번 고른 후에 다시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경비병이 자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비병은 회중시계를 자드의 눈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공작님, 시간이 다 됐습니다."


자드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말해야겠습니다. 벌써 출정식을 열어야 할 시간이군요. 그리고, 아쉽지만 폐하께 뒷얘기를 들을 기회는 오지 않을 겁니다."


"거기서 말을 끊다니 자네는 참으로 고약한 사람이구만. 한데, 어째서 뒷얘기를 듣지 못한다는 건가?"


자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이번에 벌일 것은 진짜 전쟁입니다. 종교전쟁에서 저는 군대와 전쟁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쟁에 대해 이해했다면 아마 북쪽에서도 이해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준비한 전쟁이며, 따라서 저는 출정 전에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해 놓을 생각입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위험 요소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만."


자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았지만, 자드는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타레토는 눈 앞에 있는 살기등등한 천 명의 적보다, 등 뒤에 있는 속내 모를 한 명의 적이 더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유명인사들의 격언이나 경구 따위를 무시하는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그 천재적인 전략가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타레토 본인이 그 말처럼 등 뒤에서 칼을 맞고 운명했으니까요. 그 정도면 격언을 신뢰할만 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예상 외로 겁이 많았구만. 그래, 자네가 전선에 있는 동안 내가 황궁의 대신들을 구워 삶기라도 할 것 같은가?"


"겁이 많다는 말은 무모한 자들이 신중한 자를 깎아내릴 때 쓰는 말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선 여전히 폐하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대륙을 상징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자고로 권력의 본질이란 바로 상징성과 대표성입니다. 권력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어떤 무리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일이잖습니까. 비록 폐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인 없는 굴에선 새로운 세력이 탄생할 겁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지배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종족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옹위하고 추대할 인물은 폐하밖에 없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자드는 황제의 표정을 다가올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자드는 품 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안 쪽에 검은 액체가 출렁이는 유리병이었다.

자드는 고개를 돌려 경비병이 허리에 찬 검을 한 번 쳐다봤고, 그 후에는 다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이니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 유리병과 검 중 어떤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황제는 말없이 자드가 들고 있는 유리병을 쳐다보았다. 뚜렷한 승낙의 표시였다. 자드는 조심스레 유리병을 건넸다.

자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유리병을 바라보던 황제가 불쑥 말을 걸었다.


"자네 말처럼 아마 지금이 마지막인 것 같으니, 자네에게 작은 충고를 건네도 되겠나?"


"편히 말하십시오."


"이보게 자드. 자네 곁에 지나치게 우수하고 명석한,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총명하고, 또 천재적인 친구가 있다고 해서 너무 열등감을 가지지는 말게. 천재라는 속성은 그저 타고나는 것일세. 후천적인 천재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자드는 입을 샐쭉거렸다. 그것은 침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이는 뚜렷한 표정 변화였다.

자드는 황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자드는 가만히 황제의 침소를 나섰다.

홀로 남은 황제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가 그대로 들이켰다.

잠시 후에, 황제의 침소는 전에 없이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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