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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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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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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것과 잃은 것 (11)

DUMMY

마르코는 차를 얻어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그대로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말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동안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몇 페이지를 채 넘기지 않아 마르코가 돌아왔다. 마르코는 쟁반과, 그 위에 큰 주전자와 김이 모락모락나는 잔을 들고 있었다.

마르코는 말콤의 책상 위에 찻잔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계피가 잔뜩 들어갔으니 졸음을 쫓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군."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각자의 탁자에 앉아서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집무실 안이 계피향으로 가득 찼다.

어느 시점에 말콤이 탁- 하고 소리 나게 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겠지?"


"예 뭐, 대강은 이해했습니다."


"훌륭해. 그럼 바로 질문해볼까? 어젯밤 렌카의 발견은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지?"


마르코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설명하신 대로 우선 상황정보와 맥락정보로 나눠 보겠습니다.

우선 상황정보는 '자드가 저희들을 통해 무벤에서 연초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외에 '현재 무벤에서 연초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점' 등도 전부 상황정보입니다.

그리고 맥락정보는 '자드 공작이 아무 이유도 없이 저희들에게 사업을 맡길 리 없다'는 점이겠군요. 조금 전 마스터의 예시에선 심문관의 의심이 여기에 해당되겠죠."


"계속해봐."


"음... 그러니까 이런 얘기인 것 같은데요. 렌카가 알아낸 것은 제가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렌카는 '정확한 성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뿐이니까요.

다만 맥락을 따지고 보면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컨대 평범한 니코티아나는 담뱃잎으로만 만들어집니다. 당연한 사실이죠. 하지만 지금 저희는 담뱃잎 외에도 오피디아 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것이 평범한 니코티아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연초를 유통하는 것은 자드와 저희들이지만 이 연초를 제공하는 쪽은 북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연초라면, 북부에서 순수한 목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까?"


말을 끝마친 뒤 마르코는 막 발표를 끝낸 어린아이처럼 긴장 섞인 표정으로 말콤을 바라보았다.

곰곰이 뭔가 생각하던 말콤은 마지막에 가서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매 순간 그 정도로 추리할 수 있다면 안심하고 내 자리를 맡길 수 있겠어."


"맡기다니요? 마스터의 자리를 제게 말입니까?"


"당장 맡긴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그렇게 꼬리 내린 카니쿨라 같은 얼굴은 하지 않아도 돼."


"당장이 아니더라도 마스터는 정보 길드에 계속 있어야 합니다. 지렁이나 돼지를 다룰 수 있는 건 마스터 뿐이니까요. 그 놈들은 아마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달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말콤은 느긋한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물에 완전히 녹지 않은 계피 가루가 찻잔 바닥에 모여 있었다.

말콤은 한 번에 찻잔을 기울여 그것들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알싸하고 매운 맛에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맵고 쓰고 단 맛을 동시에 느끼며, 말콤은 자신이 길드를 떠난 뒤에 남겨질 세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콤은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 글쎄. 지금 생각으로는 한적한 시골에서 소일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싶긴 하군. 어젯밤부터 은퇴 욕구가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던 참이라 말이지."


말을 끝마치고 말콤은 자신의 탁자 위에 있던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말콤의 시선에 마르코가 그제서야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콤의 책상 위로 상반신을 숙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가 쭉 읽고 있던 이 책은 뭡니까?"


"돼지 녀석이 황궁에서 구해준 책이야. 벨퍼 그 녀석, 며칠 전에 보니 살이 쭉 빠졌더군. 당분간 벨퍼에겐 연락하지마. 그 녀석의 유일한 장점은 호방함인데, 살이 빠지면 호방함도 같이 빠지는 법이니까."


"...제 친구에게 사료를 먹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쇼. 어, 잠시만요. 벨퍼가 구했다면, 설마 이게 폐위당한 황태자가 썼다는 책입니까?"


"맞아."


마르코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표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기우뚱하게 바라보기'라니 제목이 좀 특이하군요. 이건 소설입니까?"


"굳이 책의 장르를 따지자면 병법서나 회고록, 혹은 비망록이나 자서전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소설이라고 불러도 큰 이질감은 없겠군. 아무튼 이 책은 아득한 미래에나 일어날 일을 죄다 기술하고 있으니까. 아, 한잔 더 따라줘. 좋은 계피를 썼군."


마르코는 찻잔에 계피를 덜고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차가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며 말콤은 말을 이었다.


"그간 틈틈이 읽었고, 마침내 오늘 아침 통독했지. 뭐, 다 읽긴 했지만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못하겠군. 글을 쓰는 재주에 관해서 왈가불가하기는 싫지만, 이건 독자에 대한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책이야. 총평하자면 난해하고 어려운 사건을,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서순으로 열거해 놨더군."


"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혹시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는 아닙니까?"


마르코는 그렇게 말하며 의심하는 표정으로 말콤을 바라보았다.

말콤은 조금 변명하듯 말했다.


"내 이해력에는 어떤 문제도 없어 마르코. 장담하건대 마르코 너나 돼지가 읽었다면 이해하는 데 몇 개월은 족히 걸렸을 거야."


"그 정도로 어렵습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그 황태자는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들었습니다만. 똑똑한 인간이라면 가장 복잡한 사안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쓰지 않았을까요?"


"제기랄 네 상태를 보니 당분간 은퇴는 꿈도 못 꾸겠군."


말콤이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하며 찻잔을 들었다.

무능한 부하에게 좌절한 모습을 연출하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마르코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마르코는 상사의 지능을 의심하는 대신 직접 책을 집어 들었다.


마르코는 처음 펼친 페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 한 페이지를 넘겼고, 다시 그 페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 번째 페이지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 번째 페이지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마지막 쯤에 마르코는 거의 훑어 보듯이 몇 페이지를 휘리릭 넘겼다.


그렇게 책을 훑어본 마르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확실히 마스터의 말처럼 지루한 책이긴 하군요. "


말콤은 한 페이지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상하게 돌려 말하는 부하에게 상쾌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무리는 아니야. 천재란 항상 그런 면모가 있지.

예컨대 천재들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고가 자신에게 너무 당연한 나머지, 상대방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 여기곤 하지. 그래서 천재들은 사고의 과정을 한없이 압축하고, 일어난 현상의 핵심만 빼놓고서 죄다 생략해버리지.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째서 그토록 당연한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 거야.

이 양반과, 또 이 양반이 쓴 책이 꼭 그렇더군. 생략과 비유가 너무 많아."


"책이 어렵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겠지만 왜 밤을 세워 이 책을 읽고 있었는지는 의문이군요. 지금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잖습니까. 독서를 하기 좋은 시기는 아닐 텐데요."


"마르코,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는 법이야. 크고 무겁고 중요한 일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고 보잘것없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자잘한 일들도 있지.

그럴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은 간단해. 큰 일부터 처리하는 거야. 언제든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작고 사소한 일은 도중에 자연스레 해결되거든."


마르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마스터의 말은 현 시점에서 이 책을 읽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말콤은 피식 웃은 뒤 대답했다.


"좋아 내 행동에 대해 불만이 있는 모양이로군. 그럼 네가 한 번 얘기해 봐. 네가 생각하기에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뭐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야 자드의 목적을 알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잖습니까. 애초에 연초를 분석하는 이유도 그것이고, 무벤의 상황을 감시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니까요. 이제 연초에 대해선 알아냈으니 자드의 움직임과 무벤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해야겠죠."


"과연, 그 정도는 너라도 알고 있군. 좋아 본론부터 말하지. 어제 무벤의 지렁이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이 책의 저자가 현재 무벤에 있다더군."


"길버트 황태자가 말입니까?"


마르코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곧 회의적인 표정으로 바뀐 마르코가 말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가 폐위된 건 거의 이십 년도 더 된 일입니다. 황궁의 모든 인물은 자드의 사람으로 채워졌으니 황태자는 대륙에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그 남자는 이제 여행자에 더 가까울 텐데요."


마르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말콤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르코는 말콤이 무슨 연유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말콤이 다시 책상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황태자는 이제 여행자에 더 가깝겠지. 그런데 말이야. 황태자의 여행 동료들이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더군. 그 전에 마르코, 혹시 우리가 듀라트 영지에서 놓쳐버린 수상쩍은 세 명의 일행을 기억하나?"


"자드가 쫓고 있던 아돌프를 포함한 그들 일행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요. 여전히 추적하고 있긴 하지만, 듀라트 영지에서 사라진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했잖습니까. 어, 혹시 그들이 발견됐습니까?"


"그래. 발견했어. 지렁이의 말로는 지금 무벤에 있다더군. 황태자와 함께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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