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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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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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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DUMMY

사람들은 두 번째 방 앞에 옹기종기 모여섰다.

처음에 굳건하게 방을 지키던 돌문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돌문이 있던 주변은 엉망이었다. 벽면에는 높이가 8큐빗 그리고 폭이 5큐빗 정도 되는 보기 흉한 구멍이 가득했다.

벽을 관찰하던 길버트는 무의식적으로 공동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벽의 구멍은 자갈로 이루어진 작은 동산의 부피와 꼭 맞아 떨어질 것 같았다.

길버트는 다시 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흉악하게 변한 전면을 얼마간 응시하던 길버트는 이내 다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갑시다."


길버트를 선두로 사람들이 한 명씩 방 안으로 진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번째 방은 먼젓번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긴 복도, 복도의 옆면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벽화들, 텁텁하고 더운 공기와 바닥의 먼지.

벽화의 내용 역시 처음의 방과 완전히 동일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동일하다는 말은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당최 무엇을 그려 놓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완벽하게 동일했다는 말이다.

두 번째 방은 먼젓번 방을 모사한 것 같은 방이었지만 그럼에도 탐색에는 이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탐색이 길어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누가 보더라도 길버트와 두 추기경에게 있는 듯했다.


길버트와 멀락 그리고 테오도르가 그 긴 복도를 걸어가는 방식을 요약해 보자면 이런 식이었다.

세 남자는 마치 상점에서 물건을 품평하는 사람처럼 벽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그러다 불쑥 세 남자 중 한 명이 제자리에 멈춰 선다.

멈춰선 사람이 자신의 앞에 놓인 기묘한 벽화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동시에 멈춰선 사람은 '호오-' 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뱉거나 '흐음-' 하며 신음하기 시작한다.

한 명이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하면 나머지 두 남자가 얼른 멈춰선 한 명의 곁으로 다가선다.

거기서 격렬한 토론이 시작된다.

토론의 내용은 이렇다.

한 벽화를 보며 멀락은 그것이 꼬리가 4개 달린 뱀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르는 반대하며 그것이 다리가 5개 달린 도마뱀이라고 주장하며, 둘의 주장을 듣고 있던 길버트는 그것이 지느러미가 좀 특이한 물고기라고 주장한다.

그 끝날 것 같지 않은 격렬한 토론은 마지막에 가서 결국 적절한 합의점이 도출되기는 한다.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면 세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서 다시 두리번거리며 복도 안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다 불쑥 세 남자 중 한 명이 제자리에 멈춰 선다.

멈춰선 한 명은 자신 앞에 있는 벽화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렇게 한 명이 멈춰 서면 나머지 두 남자가 얼른 그 한 명 곁으로 다가간다.

곧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다. 그들은 각자 벽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무리의 맨 뒤에서 세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토비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혀를 내두른다는 것은 토비가 어이없는 심정으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경우 혀를 내두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표현에 가깝다. 토비는 기막힌 심정이었던 것과는 전혀 별개로 실제로도 혀를 쭉 내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에 땀샘이 부족한 아돌프들이 더울 때 취하곤 하는 행동이었다. 아돌프들은 그렇게 입 안의 침을 증발시켜 체온을 조절하곤 한다.

토비는 몸을 몇 번 비틀었다. 그의 자랑거리인 북슬한 털은 땀의 무게로 이미 축 처져있었고, 특히 겨드랑이 쪽은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다.

혀를 빼고 거친 호흡을 내뱉던 토비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돌프들의 전통적인 체온 조절 방법이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체온을 조절하자면, 1도를 내리기 위해 먼지를 한움큼정도는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토비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일행은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다시 탐구심과 학구열로 가득한 시간이 흘렀다. 세 남자는 이번에는 복도 끝 작은 공동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길버트가 서두를 뗐다.


"처음 방과 비슷한 내용의 벽화인 것 같습니다. 성물을 든 남자와 그를 향해 엎드린 사람들이군요."


"어라, 미묘하게 뭔가 다른 것 같은데요? 여길 보세요. 첫 번째 방의 남자는 성물을 치켜들고 있었잖습니까. 이 남자는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멀락과 길버트는 좀 더 자세히 벽화를 관찰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확실히 먼젓번 방에 있던 벽화와 다른 점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벽화 속 사람들의 덩치가 조금 작아졌다든가 혹은 남자 앞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줄었다든가 하는 사소한 차이였다. 게다가 애초에 그림 자체가 뭉뚱그려져 있어서 그것조차도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 사소한 차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중 길버트가 생경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것은 참 알 수 없는 벽화군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사실 처음 방에서 저는 이 벽화가 고대의 어떤 신성한 제사나 의식 같은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신성함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불길하다고 해야 할까요. 여기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도 지나치게 높지 않습니까."


"그런가? 어디... 음, 그렇구만. 길버트 자네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도 같군 그래. 잠깐, 그런데 불길한 분위기는 어디서 나온 추측이지?"


멀락이 채근하자 길버트는 약간 주저하며 대답했다.


"...이건 유치한 추측일 가능성이 높으니 추기경께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도 됩니다. 벽화를 보시면 울타리 안에는 아이가 한 명도 없습니다. 즐거운 분위기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빠지지 않는 법이잖습니까. 그래서 이 그림 속 상황이 적어도 축제처럼 신나는 분위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 길버트의 발언에 대한 추기경들의 반문이 몇 개나 얹혔고 지지부진한 토론이 다시 시작됐다.

토비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세 남자의 수다에 질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토론이 맥없이 끝나버렸다.

이유는 이렇다. 세 남자는 어느 시점에 해석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그림을 그린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명확한 답을 알 수 없었고, 그 탓에 어떤 주장을 내놓아도 반문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내 토론은 완전히 시들해졌다. 세 남자는 입맛을 다시다가, 이번에는 벽화의 중심 부분이 아니라 가장자리의 세세한 부분까지 뜯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울타리 안에 있는 이 형체가 사람을 나타낸 거라면 여기 이 점은 도마뱀일까요?"


"예끼 이놈아, 대체 도마뱀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게냐? 이건 누가 봐도 뱀이 아니냐."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물고기 같습니다만..."


토비는 여태 묵묵히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남자가 사뭇 진지한 태도여서 처음에는 토비 역시 덩달아 몇번 그 옆에서 벽화를 관찰하는 시늉을 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토비는 그 그림이 물고기인지 뱀인지 도마뱀인지가,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톱으로 몇번 흙벽을 긁고, 갈기털을 위에서 아래로 몇번 쓸어 내리고, 리버의 옆구리를 한번 찌른 다음에 토비는 완벽히 할 일이 없어졌다.

어느 순간 토비는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토비는 길버트의 어깨를 툭 쳤다. 길버트는 뒤돌아봤다. 토비는 분명 자신이 지금부터 할 말이 투정 부리는 모양새로 보일 것임에 언짢음을 느끼며 말했다.


"이봐 길버트.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 어차피 첫방처럼 시시한 그림들 뿐이잖냐."


테오도르와 한창 토론하고 있던 길버트는 그제서야 토비의 존재를 눈치챈듯했다. 길버트는 땀에 젖어 있는 토비를 확인하고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토비군, 당신에게 이곳은 너무 덥겠군요."


이어서 길버트는 두 추기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충분히 둘러본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도 충분히 둘러 보셨습니까?"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자의적인 해석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 마지막 벽화의 모습은 완전히 눈에 새겼으니 됐습니다. 그리고 만약 기억이 나지 않으면 다시 내려오면 될 일입니다. 토비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으니 이만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간이 아돌프의 육체를 걱정해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례한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토비 역시 자신의 몸상태를 걱정해주는 테오도르의 말에 약간의 수치심 같은 것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토비는 이미 한계였다. 지하는 왠지 점점 더 더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토비는 마지막 남은 자제력과 이성을 끌어모아 대답했다.


"...내가 힘들다는 말은 아니야. 그게 그러니까.. 그 뭐냐, 슬슬 램프의 기름이 다 떨어져가잖냐. 그렇지?"


"예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것은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토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램프의 불이 떨어지면 큰일이지요. 자, 그럼 이만 올라가시죠."


테오도르는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토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김을 한번 거나하게 불어준 후 등을 돌렸다.

곧 사람들은 두 번째 방을 빠져나갔다. 들어왔을 때 맨 뒤에 있었기에 나가는 길에는 자연스레 토비가 앞장서게 됐다.

토비는 중앙 공동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서둘렀다. 보폭이 큰 토비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거의 뛰다시피 뒤를 쫓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다시 공동으로 빠져나왔다. 토비가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계단 쪽으로 향했을 때 길버트가 황급히 토비를 불러 세웠다.


"토비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토비는 천천히 길버트에게 몸을 돌렸다.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길버트는 헛웃음을 지은 후 토비를 안심시켰다.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그 걱정은 기우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곳에 더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낮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었잖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피곤해 쓰러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꼭 확인해두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토비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대신 '무엇을 확인하던 최대한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사단을 내겠다'에 해당하는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상대방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어준 뒤, 방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첫 번째 방과 두 번째 방을 응시하던 길버트는 이내 조금 더 고개를 돌려 세 번째 방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세 번째 방문은 앞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바윗덩어리였다. 그것들은 높이가 거의 15큐빗은 족히 되어 보였다. 길버트는 그 육중하고 위압감 넘치는 돌문을 응시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루나를 쳐다보았다.

루나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흐리멍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 저는 루나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루나양은 아까 전에 두 번째 방이 리버군의 방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루나양의 말대로 입구의 마법진은 리버군에게만 반응했습니다."


"그랬지."


"그렇다면 세 번째 방에도 주인이 따로 있는 겁니까?"


"그래, 아마도."


토비는 그쯤에서 다음에 이어질 길버트의 질문을 예상했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길버트는 세 번째 방을 확인하러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지하에 머물기 싫었던 토비는 길버트를 만류하려 했지만 한발 늦어버렸다. 토비가 말리기도 전에 길버트는 질문했다.


"혹시 저 세 번째 방의 주인은 저입니까?"


질문이 끝나자마자 총 열 개의 눈동자가 전부 루나를 향해 모였다. 정면에서 다섯 남자가 멀뚱한 얼굴로 주목하는 가운데, 루나의 고개가 특정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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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1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5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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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얻은 것과 잃은 것 (13) 24.02.10 8 0 17쪽
121 얻은 것과 잃은 것 (12) 24.02.10 6 0 13쪽
120 얻은 것과 잃은 것 (11) 24.02.10 6 0 11쪽
119 얻은 것과 잃은 것 (10) 24.02.10 8 0 11쪽
118 얻은 것과 잃은 것 (9) 24.02.01 9 0 15쪽
117 얻은 것과 잃은 것 (8) 24.01.29 9 0 13쪽
116 얻은 것과 잃은 것 (7) 24.01.29 8 0 13쪽
115 얻은 것과 잃은 것 (6) 24.01.26 9 0 19쪽
114 얻은 것과 잃은 것 (5) 24.01.21 8 0 15쪽
113 얻은 것과 잃은 것 (4) 24.01.20 8 0 13쪽
112 얻은 것과 잃은 것 (3) 24.01.20 8 0 14쪽
111 얻은 것과 잃은 것 (2) 24.01.16 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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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4) 24.01.06 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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