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836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4.03.10 21:31
조회
6
추천
0
글자
12쪽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DUMMY

"그만두십쇼. 그 짓을 할 기분은 아닙니다."


"어린애 같은 소리는 그만두라고. 어른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실머리를 찾는 일은 꽤나 재밌기도 하고 말이야.

마침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고, 또 네가 바로 옆에 있으니 실머리를 찾기엔 더없이 좋은 상황이군. 좋아! 내 잘못이 있으니 선택권은 네게 주도록 하지. 그럼 누구부터 실의 끄트머리를 잡을지 네가 정해봐라."


마르코는 도저히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머리를 찾는 과정이야 어떻든, 그 방법 자체가 효율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마르코는 마땅찮은 표정으로 실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젠장, 그럼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애매하니 아예 처음부터 짚고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자드 공작은 저희에게 사업을 제의해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바보 같은 연초 사업이었고, 마스터는 꺼벙이 같이 덥석 그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멈춰 봐라 마르코. 이 자식아, 실머리찾기는 도둑들의 전통이자 신성한 작업이야. 그러니 바보나 멍청이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수사는 제외하도록 해. 개인의 판단이 들어갈수록 정보의 본질이 흐려져버리니까."


"죄송합니다.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개인적인 감정은 일체 접어두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한 달 전쯤의 일입니다. 그때 판단 능력이 평균에 한참 미달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어떤 인물의 결정으로, 정보 길드는 어떤 빌어먹을 놈과 동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업이란 물론 연초 사업입니다.

그리고 가끔 부하들을 지나치게 부려 먹는 막돼먹은 어떤 남자는, 부하들에게 북부에서 무벤으로 보내 오는 연초를 남부의 각지로 유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사업 자체는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연초는 불티나게 팔렸고, 위태로웠던 정보 길드의 재정은 몇 주 사이에 놀랄 만큼 풍족해졌습니다.

음, 그 후에 뛰어난 학자이자 약사인 렌카가 연초의 성분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날, 막돼먹은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명현하고 통찰력 있는 부하 한 명이 자드의 속셈을 멋지게 간파해내고서 상관을 피신시켰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에는 남부에서 가장 빌어먹을 녀석이 출정식을 거행했고, 제국군은 현재 거국적으로 병사를 징집하는 동시에 북부를 향해 느릿하게 진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지금 콜텐과 무벤 사이의 이름 없는 숲에서, 더럽게 맛없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지독하게 좁고 냄새나는 움막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를 향해 신세 한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존경하는 마스터께서 실을 잡을 차례입니다."


얌전히 부하의 설명을 듣고 있던 말콤은 마지막쯤에 가서는 결국 실소해버렸다. 말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요약이군. 아주 잘 정리했어. 하지만 서순은 얼추 맞다고 쳐도 여전히 그들의 목적이 불분명해. 마르코 네 생각을 마저 들어 보자구. 지금의 너라면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어때? 네 생각에 자드와 파스토르는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 같냐?"


마르코는 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말콤은 부하가 충분히 생각할 만큼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마침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고, 별은 평소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콤이 낭만적인 기분에 한창 빠져들고 있었을 때 마르코가 다시 설명을 꺼냈다.


"잘 모르겠지만 몇 가지는 알 것도 같습니다.

우선 여기까지 벌어진 상황을 보자면 아무래도 자드 공작은 처음부터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희 길드와, 적당한 대신 한 명을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불쌍한 예술부 대신과 저희는 전쟁의 구실이었을 테죠. 전쟁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고, 남부를 속여 부를 취했다는 것은 명분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다음으로 이 계획의 시작점은 몇 년 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저희가 동업 제의를 처음 받은 것은 불과 몇달 전입니다.

자드의 정치적인 수완을 의심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아무튼 그를 뛰어난 군사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사실 타레토라 해도 몇 달 사이에 몇 천이나 되는 경기병을 양성할 수는 없습니다. 종합하자면 자드는 최소 몇 년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이젠 혼자서도 순조롭게 진행하는군. 좋아 다음은 내가 이어서 하지. 자,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목적이야. 그리고 이 경우 자드의 목적을 알기 위해선 전쟁의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하겠지.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자면, 뭐가 됐건 자드가 이전에 벌인 모든 일은 전쟁의 초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그나마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군. 전쟁의 목적은 보통 두 가지 정도밖에 없으니까. 그 중 한 개가 자드의 진짜 목적이겠지."


"전쟁의 목적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에 반박하고 싶지만, 일단 들어나 보겠습니다. 그 두 가지가 뭡니까?"


"그야 돈과, 영토와, 권력이지."


"잠깐만요. 스튜가 맛없긴 했지만 독을 타지는 않았는데요. 조심스럽게 정정해드리자면 돈과, 영토와, 권력은 세 가지입니다."


"음, 마르코. 그건 일반 시민이었다면 좋은 반문이었겠지만 길드원으로서는 실격인 질문이야.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봐라.

돈과 영토와 권력은 세 가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가지나 다름 없어. 돈과 영토는 같고, 영토와 권력은 같고, 다시 권력은 돈과 같기 때문이지."


마르코는 '세 가지가 어차피 같은 것이라면, 한 가지만 말하면 되는 것 아니냐'에 해당하는 표정으로 말콤을 바라보았다.

말콤은 부하의 도전적인 눈빛에 한번 으르렁거려준 뒤 설명을 이었다.


"이것들은 같은 개념이지만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어. 자 마르코, 우선 이 사실을 알아야 해. 돈과 영토와 권력이라는 녀석들은, 세상에서 가장 긴밀하고도 역설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지. 바로 그 관계성 때문에 이것들은 세 가지로 볼 수도 있고, 동시에 두 가지로 볼 수도 있어."


"어째서 그렇습니까."


"돈과 영토와 권력 중 한 가지를 가지기 위해선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고, 또 두 가지가 있으면 한 가지는 자연스레 충족되기 때문이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 식사에 술은 포함되지 않았을 텐데요."


말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비하하는 부하의 농담을 가볍게 웃어 넘기며 부언했다.


"잘 들어봐 마르코. 예컨대 이런 식이야. 어떤 인물에게 돈과 영토가 있다고 해 보자구. 너는 넘치는 돈과 넓은 영토를 가진 인간이 오로지 권력만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냐?"


"어, 확실히 그건 말이 안되는 얘기처럼 들리긴 하는군요. 돈과 영토가 있다면 이미 귀족이잖습니까."


"그래, 돈과 영토가 있으면 권력은 자연적으로 주어지게 돼있지. 네 말처럼 이미 귀족이거나 귀족의 작위를 받은 놈일 거야.

좋아 그럼 이번에는 세 가지 중 돈과 권력 만을 쥔 인간이 있다고 치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야. 썩어 날 만큼 많은 돈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인간에게 영토가 없다는 건 말이 안돼. 땅을 살 권한과 돈이 있는데 사지 않을 바보는 없으니까.

마지막 역시 똑같다. 영토와 권력을 쥔 인간에겐 반드시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법이야."


마르코는 머릿속으로 세 가지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애매하고 억지스러운 것 같았지만 적당한 반박거리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고요한 숲에서 밤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변변찮은 저녁 식사였지만 어쨌든 배가 부를 만큼은 먹었고, 작고 좁지만 꼼꼼하게 지은 움막은 두 사람의 체온이 가두어져 어느 순간부터 취침에 적당한 온도로 변해 있었다.

마르코는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딱히 눈을 뜨고 있을 이유도 없었으므로 마르코는 슬며시 눈을 감은 채로 질문했다.


"뭐 그건 대강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치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목적이 뭡니까?"


"이럴 때는 언제나 소거법을 적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일단 자드가 돈을 원한다고 볼 수는 없어. 자드에겐 돈이 필요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그를 만났을 때도 금전적 욕심은 전혀 없어 보이더군. 마찬가지로 영토도 필요하지 않아. 이미 대륙은 그 메구 같은 녀석의 것이니까."


"하아아암- 그럼 남은 건 권력이군요."


마르코는 삐져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막으며 대답했다. 상당히 맥 빠지는 말투였고, 그래서 말콤 역시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조곤조곤하게 이루어졌다. 말콤은 마르코처럼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말콤은 감은 눈 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느끼며 말했다.


"아마 그렇겠지. 권력이란 무서운 거야 마르코. 타인을 내 취향껏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지. 어쩌면 자드는 황제가 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종교전쟁은 북부의 머리까지 도달하지 못한 탓에 반쪽 짜리 통일이 되고 말았어. 업적이 애매한 탓에 아드리안 황제 역시 반쪽 짜리 황제가 되고 말았지.

그렇다면 자드는 아드리안 황제처럼 반쪽짜리가 아니라, 진정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황제가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닐까."


"하으음- 그렇군요. 으음- 꼭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미묘하게 어긋난 마르코의 대답에 말콤은 눈을 뜨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르코는 이미 잠에 한창 취해있는 것 같았다.

말콤은 대화 중 거의 잠들어버린 마르코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콤은 반쯤 잠든 상태에서도 상관의 말에 의무적으로 대답해주는 부하에게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말콤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르코가 잠꼬대마냥 중얼거렸다.


"벨퍼..."


중얼거림을 듣고 나서야 말콤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급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벨퍼에게 자드의 계획을 미처 알리지 못했다.

말콤은 이제 완전히 잠들어버린 부하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돼지 녀석은 걱정하지 마라. 그 놈은 잘 도망쳤을 거야. 수도에 있다지만, 그래도 며칠 사이에 잡혀버릴 정도로 수완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물론 말콤은 자드 공작 역시 수도 내에서 평범한 길드원 한 명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수완 없는 남자가 아니라는 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사실 말콤은 벨퍼의 머리가 이미 절구바위 근처에, 그러니까 예술부 대신의 머리 옆에 나란히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콤은 일단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로 했다.

말콤은 투정은 많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자신을 따라와주는 부관에게 걱정거리 하나를 더 떠안기기 싫었다.

어쨌든 현재 가장 급한 것은 마르코와 함께 자드보다 일찍 무벤에 도착하는 일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무벤은 아직까지 공공연한 중립도시다.

도시 안으로 군대는 결코 들어갈 수 없으며 무벤 내에서의 폭력 또한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뒷일에 대한 모든 고민과 계획은 무벤에 도착한 후에 떠올려도 늦지 않다.


"일이 더럽게도 꼬여버렸군. 그 베르미 같은 자식..."


대상이 불확실한 욕설을 몇 번 중얼거리던 말콤은 이내 수마에게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4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5 0 17쪽
13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1) 24.03.10 11 0 17쪽
»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24.03.10 7 0 12쪽
132 익숙한 것과 낯선 것 (9) 24.03.10 8 0 11쪽
131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24.03.10 5 0 17쪽
130 익숙한 것과 낯선 것 (7) 24.03.03 8 0 12쪽
129 익숙한 것과 낯선 것 (6) 24.03.03 9 0 18쪽
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0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5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9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0 0 12쪽
12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4.02.15 9 0 14쪽
123 얻은 것과 잃은 것 (14) 24.02.15 9 0 18쪽
122 얻은 것과 잃은 것 (13) 24.02.10 8 0 17쪽
121 얻은 것과 잃은 것 (12) 24.02.10 5 0 13쪽
120 얻은 것과 잃은 것 (11) 24.02.10 6 0 11쪽
119 얻은 것과 잃은 것 (10) 24.02.10 7 0 11쪽
118 얻은 것과 잃은 것 (9) 24.02.01 8 0 15쪽
117 얻은 것과 잃은 것 (8) 24.01.29 9 0 13쪽
116 얻은 것과 잃은 것 (7) 24.01.29 7 0 13쪽
115 얻은 것과 잃은 것 (6) 24.01.26 8 0 19쪽
114 얻은 것과 잃은 것 (5) 24.01.21 7 0 15쪽
113 얻은 것과 잃은 것 (4) 24.01.20 7 0 13쪽
112 얻은 것과 잃은 것 (3) 24.01.20 8 0 14쪽
111 얻은 것과 잃은 것 (2) 24.01.16 7 0 13쪽
110 얻은 것과 잃은 것 24.01.14 8 0 13쪽
109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6) 24.01.09 9 0 19쪽
108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5) 24.01.09 11 0 16쪽
107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4) 24.01.06 7 0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