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727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4.03.10 21:30
조회
4
추천
0
글자
17쪽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DUMMY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아졸타는 무수히 많은 막사 사이를 무표정으로 거닐고 있었다.

막사는 다 지어진 것과 짓는 도중인 것이 섞여 있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바닥의 흙먼지를 친절하게 아졸타의 얼굴까지 배달했다.

아졸타는 반사적으로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리려다, 간신히 손을 제 위치에 고정시켰다.


아졸타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본 병사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병사들은 각기 제 할 일에 신경을 온통 할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졸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수천 명을 휘하에 둔 지휘관이 흙먼지 따위에 주춤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분명했다.

다른 때라면 위신 같은 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군대에서 상관의 위신이란 군대의 사기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병사들은 위신 없는 상관을 존경하지 않으며,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명령은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아졸타는 나중에 병사들이 불복종하는 불상사를 겪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 얼굴에 흙먼지를 맞는 일이 더 나을 거라 확신했다.


아졸타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의 주위엔 병사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커다란 냄비를 휘젓고 있는 병사, 말먹이를 챙기는 병사, 혹은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또 지시를 받는 병사.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 병사와, 꾸지람을 듣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막사를 짓는 병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 오기 전에 몇천 개의 막사를 만들어야 했고, 그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란스러움과 부산스러움 속에서 문득 아졸타는 자신이 대륙 어디쯤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마법사가 있는 막사로 찾아가는 것이 가장 정확할 테지만 아졸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막사까지 찾아가자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고, 아졸타는 그 길에 쌓인 흙먼지가 영 탐탁지 않았다.


마법사를 찾아가는 대신 아졸타는 지형을 관찰했다.

우수한 측량 기술은 없었지만, 다행히 아졸타는 대륙의 지리를 완전히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아졸타는 제 자리에 서서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곧 아졸타의 시선에 어떤 큰 강이 포착됐다. 강 주변에 헤르바 풀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라호마 강이 분명했다.

강을 바라보던 아졸타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졸타는 라호마 강이 대륙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라호마 강은 대륙의 무릎쯤에 위치한 강이다.

남부군이 북진을 시작한 날은 열흘 전이다. 그런데 이제서야 라호마강이 보인다는 것은 진군속도가 지독하게 느리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약간 아득한 기분을 받으며 아졸타는 이번에는 남부군이 하루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기로 했다.

아졸타는 콜텐에서 라호마강까지의 거리를 계산한 뒤 결괏값을 열흘로 나눴다.

간단한 암산을 끝낸 아졸타는 남부군이 하루에 대략 10만 큐빗 정도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졸타는 그것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딱히 체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멀쩡한 인간 남성이라면 하루에 40만 큐빗쯤은 거뜬히 이동할 수 있다.

심지어 남부군이 여태 지나온 길은 평탄하고 무난한 지형 뿐이었다.

무벤에 가까워질수록 더 험한 지형이 나타날 것이 뻔했고, 그렇게 되면 진군 속도는 지금보다 더 늦춰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졸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봄이 온 뒤에 출정하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 같았다.

북부에 도달하는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기온은 점점 더 추워지며, 그 추위는 남부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출정식이야 눈 깜짝할 새 이루어졌다 쳐도, 병사를 모으는 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실 아졸타는 며칠 전 자드 공작에게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때 공작의 대답은 간단했다.


"꼭 한 곳에서 모병하라는 법은 없다."


공작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시행했고, 그 결과 현재 남부군은 진군 도중에 징집을 병행한다는 어이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막사 사이를 헤쳐나가며, 아졸타는 그날 마차 안에서 이루어졌던 공작의 거국적인 일처리를 떠올렸다.

그날 마차 안에서 공작은 마법사를 통해 남부 전역의 영지와 동시에 통신했다.

마탑이 없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인 전서조를 이용했다.

통신의 주된 내용은 당연히 귀족들에게 전쟁에 필요한 병사와 물자를 보급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날 아졸타는 바로 옆에 앉아서 공작의 신속한 일처리에 감탄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거국적인 징집을 할 작정이라면 어째서 출정식을 그토록 서둘렀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의문들은 아졸타가 겁쟁이라거나, 혹은 지독한 신경과민의 증후들은 결코 아니었다.

국방부 대신의 의문은 당연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공작은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해왔겠지만, 어차피 통일된 대륙에 상비군이 많을 리 없다. 따라서 징집은 필수적이다.

다만 문제는 징집병들에겐 말이 없다는 점이다.

징집병들의 대부분은 언제나 그렇듯 농민이나 농노들이며, 그들이 40실링 가까이 나가는 군마를 구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부 각지에서 종군하러 오는 징집병들을 기다리자면 아마 행군이 더 늦춰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졸타의 수많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징집은 제대로, 그리고 생각보다는 신속히 이루어졌다.

공작이 발표한 남부군의 소집 장소는 콜텐이 아니라 '남부군이 있는 곳'이다.

언뜻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이 공표는 놀랍게도 제대로 실현되고 있기는 했다.


방법은 이렇다.

공작은 귀족들에게 남부군의 진군 속도와 남부군이 이동할 길을 친절히 고지했고, 더불어 일부러 아주 천천히 북진하고 있었다.

군대의 모습은 아주 긴 지렁이처럼 늘어졌고, 그 덕에 귀족들은 휘하의 병사를 끌고 손쉽게 남부군을 찾아 합류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 방법은 수도에 앉은 채 징집하는 것보다는 더 빨리 북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징집병들은 굳이 수도까지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군대와 조우할 수 있었고, 또 북쪽에 가까운 도시에선 북진하는 남부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졸타가 며칠 동안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졸타는 현재 자신들이 아주 먼 곳에 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개미 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부군은 대륙의 발목부터 무릎까지 이동하는 개미 떼의 행렬이며, 귀족들은 그 행렬에 들러붙어 마침내 한 행렬이 되는 다른 개미 떼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모병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야 있겠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남부군의 북진은 이런 식이다.

북부를 향해 몇 천 큐빗쯤 이동하다 보면, 동쪽이건 북동쪽이건, 하여튼 어느 이름 모를 귀족이 개미 떼처럼 나타나 합류한다.

아졸타는 직책에 맞게 그들의 부대를 편성하고, 만약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엔 편제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고, 때문에 아졸타는 하루의 대부분을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헤르바지와 씨름하며 보내야 했다.

아졸타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째서 공작이 이렇게 급하게 진군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찜찜한 얼굴로 걷던 아졸타가 잠시 후 한 막사 앞에 멈춰 섰다.

반쯤 지어진 막사 주위에는 어수룩한 솜씨로 얼기설기 기둥을 세우고 있는 세 명의 병사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군영을 구축한다기보다는 저들끼리 모여 시시덕대고 있다는 평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졸타는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사실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40만 큐빗이나 늘어져 있는, 더불어 매일 편제가 바뀌는 군대에 엄격한 기강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바보 같은 일이 분명했다.


자리에 선 채 이것저것 고민하던 아졸타는 그러나 결국 병사들을 불러 세웠다.

아졸타는 날이 저무는 시각에 병사들이 저들끼리 시시덕대는 것쯤이야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막사를 짓고 있는 위치는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아졸타는 그 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졸타는 근엄하게 일렀다.


"전열보병들의 막사는 이곳이 아니다. 저기 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서 다시 짓도록 해."


세 병사는 멀뚱한 얼굴로 아졸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졸타는 세 병사의 반응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징집되기 전에는 농노였음이 분명해 보였다.

만약 따로 지급한 미늘창만 없었다면 당장 밭을 갈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대꾸하지 않은 채 여전히 아졸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졸타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챘다.

그들은 '지정한 곳에서 고작해야 100큐빗 정도 떨어진 곳에 막사를 지었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아졸타는 그 멍청한 세 병사의 뺨을 차례대로 세차게 후려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본능에 따라 팔을 휘두르고 싶었던 아졸타는 그러나 가까스로 감정을 억눌렀다.

이 경우 본격적인 전쟁의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이 아졸타의 팔을 붙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아졸타는 현재 자신이 병사들의 뺨을 후릴 수 있을 만큼의 직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졸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세 병사를 바라보았다.

세 병사는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아졸타는 바보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 말하는 바보짓이란 당연히 바보와 토론하거나, 바보를 설득하려는 일이다.

아졸타는 침착함을 가지고 병사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각자의 분야가 다른 것 뿐이다.

예컨대 눈 앞의 병사들은 자신의 땅에 두더지가 몇 마리쯤 있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씨를 뿌렸을 때 가장 수확량이 많은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자신들이 100큐빗 옆에 막사를 지음으로써 전체적인 군영이 얼마나 흐트러지고 뭉개지는지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설득이나 이해시키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아졸타는 차라리 세 병사에게 나지막이 경고했다.


"당장 막사를 허물고 지정된 자리에 다시 짓도록. 지금 곧바로 시행하지 않을 시 군법에 회부하겠다."


군법이라는 말에 세 병사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며칠 전에 고작 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된 병사들을 떠올렸다.

세 병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짓고 있던 막사를 허물기 시작했다.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병사들을 확인한 후 아졸타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참을 걸어간 후에 아졸타는 마침내 목적지인 자신의 막사에 도착했다.

아졸타의 막사는 일반 병사의 막사와 거의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 막사는 국방부 대신이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조잡했다.

하지만 아졸타는 막사의 평범한 외관에 만족했다. 어쨌든 나데자 공습 당시에 죽은 남부인들은 예외 없이 화려한 막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사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한 후에 아졸타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준비해 놓았는지 막사 안에는 이미 푸짐한 저녁 식사가 놓여 있었다.

슬슬 출출하던 참이어서 아졸타는 그 사실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아졸타는 곧바로 방금 전에 느낀 만족감보다 더 큰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졸타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식탁에는 공작이 앉아 있었고, 그 맞은 편 의자가 비어 있었다.

공작은 이제 왔냐는 표정으로 아졸타를 바라보았고, 다음으로는 어서 앉으라는 얼굴로 의자 쪽으로 흘끗 눈짓을 보냈다.

아졸타가 하루 정도는 식사를 걸러도 생명 활동에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을 때, 자드가 말을 걸어왔다.


"식기 전에 앉게."


상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아졸타는 별 수 없이 공작과 마주보고 앉았다.

식사는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졸타는 음식의 맛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 아졸타는 차라리 맛을 느끼지 못한 편이 나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무튼 진군 도중에 나오는 식사란 황궁에서 먹었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잠시 후 시종들이 그릇을 치우고 뜨거운 차와, 차가운 헤르바지를 아졸타 앞에 대령했다.

아졸타는 죽을상을 지으며 헤르바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졸타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는 공작이 만년필과 비슷한, 그러나 역할은 전혀 다른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램프의 불에 연초 끝을 가져다 댄 공작이 연기를 한껏 내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의 소식이 아직이군."


"그놈들이라니 누굴 말하시는 겁니까."


"북부와 손을 잡고 남부의 곳간을 몰래 털어버린 놈들 말일세. 출정식 전날, 자네에게 그 놈들을 잡아오라고 부탁한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그래, 놈들의 행방은 알아냈나?"


"...도둑놈들 말이군요. 면목 없지만 놓쳐버렸습니다. 대충 수사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치안대와 함께 콜텐의 술집이란 술집은 다 뒤졌고, 그들의 저택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그놈들은 아마 미리 눈치채고 잽싸게 도망친 것 같습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까요."


말을 끝마친 후 아졸타는 슬며시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됐든 아졸타는 임무에 실패했고, 실패한 부하에게 상관이 할 말은 뻔할 것 같았다.

아졸타는 긴장 섞인 눈빛으로 질책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자드는 아졸타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가만히 보고를 듣고 있던 자드는 무심한 얼굴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렇군. 도둑놈들은 언제나 숨어 다니는 일에 능하지. 그래, 다른 특이사항은?"


아졸타는 안도감과 함께 대답했다.


"딱히 없습니다. 아, 한 가지가 있긴 합니다. 이건 보고 드릴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보고하겠습니다. 병사들의 말에 따르자면 도둑들의 저택에 쿠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쿠니들이?"


"예, 세 명의 쿠니입니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도둑들에게 붙잡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순진한 종족은 가끔 영악한 인간들에게 터무니없이 휘둘리고 이용당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세 쿠니 중 어린 두 쿠니는 얌전히 숲으로 돌아갔지만, 한 중년의 쿠니가 노발대발하며 그 저택에 남기를 원했다고 하더군요."


무심한 표정으로 연초에 집중하던 공작이 그 대목에서 대번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공작은 아졸타 쪽으로 상체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저택에 남길 원했다고? 어째서지?"


"병사들 말로는, 그 쿠니가 '아직 연구할 것이 많이 남았다!'며 큰소리를 쳤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병사들이 그 쿠니를 발견한 것도 저택에 있는 기묘한 실험실 같은 곳이었으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애초에 쿠니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그럼 맞겠군요. 그렇다면 그 쿠니는 어떤 식물이라도 조사하고 있었나 봅니다."


보고를 끝마친 아졸타는 이어질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공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졸타는 타성적으로 들여다보던 헤르바지를 내려놓고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아졸타의 내부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불쑥 공작이 자신이 태우던 연초를 앞으로 내밀었다.

공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졸타와 자신이 들고 있는 연초를 한번 번갈아 본 뒤 질문했다.


"혹시 그 실험실에 이것과 똑같은 연초가 있었나?"


"어,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병사들의 말로는 그 실험실 안에 유달리 연초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연초가 대륙 전역에서 유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설마 쿠니들도 피웠던 걸까요?"


"아졸타."


"예."


"저택에 남겠다는 그 쿠니의 연구 말일세. 그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게."


"예? 저희들이 쿠니의 개인적인 연구를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생각에 그 쿠니는 꽤나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저택을 감시하는 병사들에게 말해 두게, 그 쿠니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지원해주라고 말일세. 그리고 도둑놈을 추적하는 일은 계속 진행하도록 해. 후환을 남겨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뒤 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드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드는 인사를 건네지도 않고 곧장 막사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아졸타는 그제서야 자신의 내부에서 원활한 소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물끄러미 연초를 바라보던 아졸타는 이내 연초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렸다.

대신 아졸타는 다시 식탁 위에 쌓인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적막한 막사 안에서 아졸타는 여태 해왔던 것처럼 남부군의 효과적인 이동 경로를 짜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4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5 0 17쪽
13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1) 24.03.10 10 0 17쪽
133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24.03.10 6 0 12쪽
132 익숙한 것과 낯선 것 (9) 24.03.10 8 0 11쪽
»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24.03.10 5 0 17쪽
130 익숙한 것과 낯선 것 (7) 24.03.03 7 0 12쪽
129 익숙한 것과 낯선 것 (6) 24.03.03 8 0 18쪽
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9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4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9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9 0 12쪽
12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4.02.15 9 0 14쪽
123 얻은 것과 잃은 것 (14) 24.02.15 9 0 18쪽
122 얻은 것과 잃은 것 (13) 24.02.10 7 0 17쪽
121 얻은 것과 잃은 것 (12) 24.02.10 5 0 13쪽
120 얻은 것과 잃은 것 (11) 24.02.10 5 0 11쪽
119 얻은 것과 잃은 것 (10) 24.02.10 6 0 11쪽
118 얻은 것과 잃은 것 (9) 24.02.01 7 0 15쪽
117 얻은 것과 잃은 것 (8) 24.01.29 8 0 13쪽
116 얻은 것과 잃은 것 (7) 24.01.29 6 0 13쪽
115 얻은 것과 잃은 것 (6) 24.01.26 7 0 19쪽
114 얻은 것과 잃은 것 (5) 24.01.21 6 0 15쪽
113 얻은 것과 잃은 것 (4) 24.01.20 7 0 13쪽
112 얻은 것과 잃은 것 (3) 24.01.20 7 0 14쪽
111 얻은 것과 잃은 것 (2) 24.01.16 7 0 13쪽
110 얻은 것과 잃은 것 24.01.14 8 0 13쪽
109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6) 24.01.09 8 0 19쪽
108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5) 24.01.09 10 0 16쪽
107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4) 24.01.06 6 0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