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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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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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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DUMMY

"리버군, 램프를 한번 위로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이렇게요?"


길버트의 요청에 리버는 흔쾌히 램프를 자신의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길버트는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인정한 후 다시 한번 부탁했다.


"아니요. 이렇게 말입니다."


길버트는 머리 위로 램프를 들어 올렸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찬장 위에 숨겨 놓은 과자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의도를 파악한 리버가 길버트와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곧 두 램프가 높이 들어 올려졌고, 그 덕분에 길버트는 방금 전보다 더 윗부분에 있는 벽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길버트는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그려 놓은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테오도르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을 보고 있으니 저와 멀락 추기경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했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저희들도 어떻게든 불을 비춰보려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방식으로는 벽화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하지만 추기경께선 서신에서 벽화를 상당 부분 해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추기경들께선 어떤 방식으로 이 거대한 벽화를 해석하고 계십니까?"


"음.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이 유적 자체의 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본을 말입니까? 그건 혹시 찰흙 같은 것으로 이 유적의 축소판을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들은 아주 긴 원통에 헤르바지를 돌돌 감싼 형태의 본을 만들고 있습니다.

처음엔 일반적인 지도 같은 것을 제작할까 했지만, 보시다시피 이 유적은 원통형이라 그런 방식으로는 전체적인 벽화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평범한 지도 형식으로 만든다면, 우선 벽면의 선을 죽 따라가면서 벽화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떤지 상상해야 합니다. 그것 자체도 어려운 일인데, 나중에는 그것을 펼쳤을 때의 모습까지 상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길버트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저희들에게 그 정도의 공간지각능력은 없었습니다."


길버트는 곧바로 납득했다. 테오도르는 겸양을 떨었지만 길버트가 생각하기에도 그 외에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그 본을 완성하고 나서, 겉면의 헤르바지를 쫙 펼치면 완벽하게 벽화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길버트는 아직도 램프를 치켜들고 있는 리버를 발견하고서 말했다.


"리버군 이제 팔을 내려도 됩니다."


리버가 팔을 내리자마자 테오도르가 부연했다.


"본을 뜨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작업은 아직 반의 반의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길버트는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 인력의 문제겠군요."


"맞습니다. 사람이 많았다면 금방 끝났겠지만, 아무튼 이 유적과 성물의 존재는 세간에 쉽게 공표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잖습니까. 되도록 적은 수의 인원으로 작업하려다 보니, 들인 시간에 비해 성과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에 있는 벽화는 공동에 새겨진 거대한 것들 뿐만이 아닙니다."


테오도르는 지하의 한쪽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저곳에 다섯 개의 방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열 수 있는 것은 가장 왼쪽의 가장 작은 방 뿐입니다. 그 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작은 벽화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저희와 뜻을 함께하는 성실한 두 명의 주교와 한 명의 사제가 본을 뜨는 동안, 저와 멀락 추기경은 주로 저 방 안에 있는 벽화들을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 아무래도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역시 이번에도 직접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지요 멀락 추기경님?"


멀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멀락은 별말없이 테오도르가 말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뗐다.

멀락을 제외한 사람들은 계단을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멀락의 뒤를 따라 걸었다.

유적의 벽면을 빙 두른 계단은 엄청나게 길었지만, 정작 밑바닥의 면적 자체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오래 걷지 않아서 그들은 문 앞에 도달했다.

테오도르의 말처럼 방은 총 다섯 개가 있었고, 멀락은 그중 가장 왼쪽에 있는 문에 멈춰 섰다.

멀락의 앞에 있는 문은 투박하고 큰 돌문이었다.

그리고 일자로 나열된 다섯 개의 문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면적이 배로 커지고 있었고, 그 탓에 가장 오른 편에 있는 문은 높이가 거의 60큐빗쯤은 되는 것 같았다.

길버트가 그 무지막지한 크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때, 유심히 문을 관찰하던 토비가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 문은 뭔가 이상하군. 돌쩌귀나 흰지가 없는 걸로 봐서 이 문은 미닫이 식이야. 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돌을 너희 둘이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심지어 이 문은 힘을 실을 만한 손잡이도 없군."


토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추기경들은 슬쩍 웃으며 토비를 마주 바라보았다. 토비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잠깐만, 설마 나더러 이 무식하게 큰 돌문을 열어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아돌프의 순진한 반응에 순간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장난을 치기에는 사안이 시급했고, 테오도르는 결국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이 문은 힘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침 토비님의 뒤에 있군요. 토비님, 거기서 뒤로 몇 발자국만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토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시에 따랐다. 그러자 토비의 커다란 몸 뒤에 감춰져 있던 마법진이 나타났다.

작은 마법진을 관찰하던 토비가 어느 순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맞아. 생각해보니 너희들은 이미 이 방에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고 말했었지. 하긴 너희들에게 괴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럼 이 문을 여는 데에는 마법을 쓰는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아마 이 문에 새겨진 것은 고대인들의 마법일 겁니다.

애초에 여기 새겨져 있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이건 현대의 마법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저희들은 이 마법진을 똑같이 모방해서 마법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만, 대륙에서 저명하기로 소문난 마법사들도 이것이 어떤 구조의 마법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뭐 나야 마법에 관해선 문외한이고 관심도 없다만,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거지? 너희들은 신관이지 마법사가 아니잖냐."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사실 그 점은 저와 멀락 추기경께서도 언제나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입니다. 토비님의 말씀처럼 신력과 마력은 언제나 상충되는 법이니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떤 원리로 저희들이 마법진을 운용할 수 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분명 저희는 이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사용법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 토비님 옆에 있는 그 작은 마법진에 손을 올리면 됩니다. 마침 토비님이 앞에 계시니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토비는 의심 섞인 눈빛으로 어물어물 마법진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눈이 부실 정도의 섬광. 지하가 울릴 정도의 굉음. 그리고 무시무시한 진동 같은 것들은 일체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진과 돌문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테오도르는 당황한 투로 말했다.


"어라 이게 왜..."


그때 뒤에서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리버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해볼게요. 저리 좀 비켜봐요 토비."


토비가 손을 내려놓자마자 리버가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천재지변이나, 혹은 눈에 띌만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보던 루나가 나섰다.

앞선 두 남자처럼 루나는 마법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마법진은 역시 잠잠했다.

테오도르와 멀락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번에는 길버트가 나섰지만 역시 결과는 똑같았다.


곧 세 남자와 루나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두 추기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추기경은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에 해당하는 얼굴로 마법진과 리버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마치 자기 집 대문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대면서 마법진 앞으로 다가갔다.

긴장 섞인 얼굴로 테오도르는 마법진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이전 시도에 비하자면 괄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눈을 살짝 찡그릴 정도의 빛, 돌가루가 바스러지는 소음, 바닥의 먼지가 떨릴 정도의 미세한 진동 같은 것들이 생겼다.

문이 열리자마자 테오도르는 명백하게 안심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고선 변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평소에는 손만 가져다 대면 곧장 열렸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것도 저와 멀락 추기경, 그리고 두 주교와 사제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테오도르는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여태처럼 마지막에 '길버트님은 혹시 이 현상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와 같은 질문을 덧붙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집주인이 사는 집을 손님이 설명하는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길버트는 멀뚱히 서 있는 테오도르를 달래듯이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문이 열렸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땅 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은 언제나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법이니까요."


"아, 예. 그렇지요!"


테오도르가 얼떨떨하게 대답했고, 이어서 테오도르보다 조금 더 일찍 침착함을 되찾은 멀락이 돌문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가 얼른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다음으로는 리버와 토비가 움직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길버트는 문득 입구에 멀뚱히 서 있는 루나를 발견했다.

입구 밖에 선 루나는 문 오른 편에 쭉 늘어선 네 개의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그 시선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작게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루나양.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


마침내 루나가 들어왔고, 그로써 공동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돌문 안쪽에 서게 됐다. 그러자 돌문이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닫혔다.

리버와 토비가 문을 바라보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자 테오도르가 얼른 설명하고 나섰다.


"밖과 마찬가지로 안에도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잖냐. 나는 세상 모든 심각한 문제들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나치게 마땅한 지적이어서 테오도르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벙찐 테오도르 대신 멀락이 움직였다.

멀락은 문 안쪽의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돌문은 저항 없이 다시 열렸다.

그 이후에 멀락이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확인 시켜준 후에야 리버와 토비는 완전히 안심한 듯했다.

멀락은 미소 지으며 다시 일행의 선두에 섰다.

공동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좁은 복도의 맨 앞에서, 멀락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르며 전진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가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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