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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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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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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30,491

작성
16.07.1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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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로망스(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래번은 섭정공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바한의 보고를 들었다.

“쉬프레사에서 보네라로 옮겨가는 상인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건물들이 불타서 일부 사용 불가능한 것도 있고, 전쟁에 가까운 소동이 벌어져서 사람들도 혼란한 상태이지만 그보다는 사전에 작업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상인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리가 없죠.”

‘하루만에.’

쉬프레사와 보네라의 전투는 바로 어제의 일이다. 다음날 곧바로 상인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해뒀다는 뜻이었다. 바한의 말대로 사전에 작업이 있었다. 래번은 날카롭게 뻗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보네라의 영주는 계산속이 빠르고 돈 버는 일이라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두 도시의 싸움을 단번에 끝내버린 걸까. 머리싸움이라면 몰라도 전투에서는 자랑할 재주가 없는 보네라다. 오히려 지금까지 섭정공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알센은 어떻게 됐지?”

쉬프레사와 보네라 외에도 대왕로에 관문을 설치하는 문제로 동서 양진영이 신경전을 벌이는 곳이 있었다.

“관문의 건축공사가 시작된 곳으로 알센의 병력이 배치되어서 테멜 백작이 병력 파견을 검토중입니다.”

“양쪽 다 막나가는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지만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있었다.

섭정공이 움직이면서부터 무력충돌은 예상한 일이었으나 생각보다 동부 귀족들의 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수장이라고 할 아베디스 루신도 무시 못 할 남자였다. 눈에 띄는 능력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가 개입하는 일은 묘하게 운이 따랐다.

섭정공의 발호 이후 잠시 움츠러들었던 동부 귀족들은 얼마 안 가 아베디스의 지휘와 함께 전세를 회복했다. 그로부터 고작 며칠 사이, 아르반 각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불꽃처럼 터졌다.

승패는 평균을 내면 양 진영에 비슷하게 돌아가겠지만, 섭정공이 양보나 타협 없이 전적으로 뒤를 밀고 있는데도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부 귀족들은 여우같이 대처하는데 섭정공만 믿고 생각 없이 움직이는 서부 귀족들의 탓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들을 조율해야 할 타니엘은 지금 알마스트에 없었다. 그를 대신하고 있는 래번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섭정공이 몇 번이나 서향 기사단으로 전령을 보내 타니엘을 찾았지만 래번은 며칠 후에 돌아온다는 대답밖에 돌려줄 것이 없었다.

지금도 타니엘 대신 보고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분명 힐책에 가까운 질문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니 골치가 지끈거렸다. 타니엘이 떠난 지는 이제 닷새. 돌아오려면 아직도 닷새가 남았다. 그것도 최단시간을 계산한 결과다. 이대로라면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섭정공 때문에 말라죽을 지도 몰랐다.

래번은 짧은 한숨을 쉬고 섭정공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문을 지키는 친위기사에게 가로막혔다. 서향 기사단이 아닌, 섭정공이 바그랏트에서 데려온 진짜 친위대였다.

“아직 배알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누군가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방금 오셔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저도 여쭙기 힘들군요.”

정중하지만 확실한 거절이었다. 누가 섭정공의 방에 들어갔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으나 래번은 묻기 전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향기다. 대기실에 떠도는 은은한 향기였다.

그 향기의 정체를 기억해내고 래번이 저도 모르게 섭정공의 방을 쳐다보았다. 설마? 아직 닷새는 남았는데······. 마차로는 무슨 짓을 해도 아예 불가능하고, 아무리 빠른 말로 달려도 밤에 잠조차 자지 않는다면 모를까 벌써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각 섭정공의 방안에는 래번이 설마라고 생각한 바로 그 타니엘이 있었다. 그것도 일리스 가 저택에 들러 제대로 단장하고 온 모습이었다.

섭정공은 며칠 만에 모습을 보인 기사단장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패를 맡겨놓았더니 알마스트를 팽개치고 보고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비하면 거칠어진 얼굴이지만 차림은 흠잡을 데 없었다.

게다가 피곤이 쌓여 붉은 흰자위나 볼이 들어간 얼굴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생기가 넘쳤다. 그런 모습으로 타니엘이 며칠간의 일을 보고했다. 듣고 있던 섭정공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하코브 네르세스가 지니고 있던 금속 통에서 포고스의 흙과 함께 나왔다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냈다.

“포고스 백작부인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정황상 아닙니다. 사람들을 풀어 놓았으니 좀 더 정보가 모이면 확실해지겠지만 직접 만나본 느낌도 틀림없었습니다.”

“세다란 말인가.”

중얼거리는 섭정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니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트로스 바그랏트의 창황한 모습이었으나 그럴 만했다.

“그 상아 조각은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내탕국(內帑局)과 내장원(內藏院)에는 지시해 두었습니다. 선왕께서 사용하셨던 모든 물건을 조사해 상아조각이 들어맞는 물건이 나오기만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물건이 아직 남아있다면 말이지.”

“없어졌어도 상관없습니다. 왕의 물품은 아무나 손댈 수 없습니다. 상아가 들어간 귀중품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물건을 찾지 못해도 범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타니엘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견고했다.

그러나 섭정공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하코브 네르세스의 죽음도, 그가 가지고 있던 결정적인 증거물도, 모두 두려운 진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든 예상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타니엘 경. 그것이 가능한 자, 범인인 자는 세 사람 중 하나가 되네.”

“그렇겠지요.”

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그에 비해 섭정공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타니엘에게 손짓했다.

섭정공 앞에서 물러난 타니엘은 문밖에 기다리고 있던 래번을 보고 웃었다. 웃어보였다고 생각했으나 래번의 표정을 보니 제대로 못한 것 같았다.

타니엘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할 보고는 내일로 미루자고. 전하께서도 만나주지 않으실 테니까.”

그들은 서향 기사단 건물까지 말없이 걸었다. 타니엘의 집무실로 들어간 후에야 래번이 입을 열었다.

“포고스에는 안 가신 겁니까?”

“뭐 하러 거기까지 가겠어. 시간도 없는데.”

타니엘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럼 포고스 백작부인은······.”

“출발하면서 일리스 가의 연락망을 좀 이용했거든. 양쪽 모두 대왕로를 따라 이동해서 중간지점에서 만났지. 백작부인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운이 따라주더군.”

운이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타니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래번은 상관의 피곤해 뵈는 얼굴에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표정이 뒤섞인 것을 알아차렸다.

“포고스 백작은 역시 죽었다. 시체는 수습한 모양인데 그의 시신에서 재미있는 것이 나왔다는군. 백작이 셈레의 신자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도 늘 포고스의 흙을 지니고 다니는데, 그것을 담은 통에 손가락 한마디 길이의 상아 조각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래번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잠자코 들었다. 뭔가를 묻기에 타니엘의 얼굴이 위태로워보였다.

“소문 말이야, 래번. 포고스 백작이 뭔가 찾아냈을 거라던 그 소문. 빌어먹을. 그는 정말로 찾아냈던 거야. 찾아내서, 그것 때문에 죽은 거다.”

섭정공 앞에서는 보일 수 없었던 감정의 파문이 뒤늦게 그의 표면에 번졌다.

“어딘가의 장식용으로 붙어있던 상아 조각이었어. 최고의 재료를 흠잡을 데 없는 실력으로 깎아 만든······ 왕에게나 어울릴 물건이 변색되어서 발견되었다는 거야. 변색된 상아가 무슨 뜻인지 가르쳐줘야 하는 건 아니지? 분명히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그런 주장도 있었지. 세다의 신자를 의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황이 없었어.”

“그때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은 메칼로의 각인자로부터 검사를 받았습니다. 세다의 신자가 있었더라도 발견되었을 겁니다.”

“메칼로의 각인자가 만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잖아.”

타니엘이 속삭이듯 말했다. 들을 사람은 없었으나 그의 말에 래번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셋 중 하나가 아니라면 누가 왕의 물건을 빼돌릴 수 있지?”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세 분 모두 다른 곳에 계셨습니다. 변색된 물건을 빼돌린 사람이 있더라도 세 분은 아니······.”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래번.”

타니엘이 비웃듯 말했다.

“세다의 신자가 선왕 폐하를 암살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선왕께서 승하하신 그 자리에 세다의 신자가 있어야 하잖아. 그 자리에서 변색된 물건도 발견되었을 테고.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조사는 철저했다고. 아무 것도 안 나왔어. 그런데도 포고스 백작은 찾아냈다. 내 말은 말이야, 반대라는 거다. 살린 거야.”

“예?”

도대체 상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래번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타니엘이 기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죽음의 신이며 명부의 왕인 세다의 권능으로 살린 거라고. 죽인 것이 아니라 살린 거다. 살렸지만, 그 생명은 하루의 절반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이 규칙.”

래번은 잠시 후에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가면 같던 표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타니엘이 키득거리며 목안으로 웃었다.

“어때? 굉장하지? 무려 세다의 각인자다. 세다의 신자는 이따금 나타나지만,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의 각인자라는 건 그야말로 드문 건데 말이야. 그 보기 드문 존재가 여기에 있다고. 씨팔, 술 좀 가져와. 입에서 썩은내가 날 것 같아.”

래번이 말없이 일어나서 술을 가져왔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 가면부관으로 불리는 그였지만 술잔을 같이 가져오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타니엘이 상관 않고 술병에 입을 대고 마셨다.

벌컥거리며 몇 모금이나 마신 후 그가 술 냄새 나는 한숨을 쏟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어떻게 된 일인지 누구의 짓인지 몰라도 에듀아드 코스탄딘은 죽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감추려고 세다의 각인자가 그를 살려낸 거지. 죽은 자를 일으키는 권능으로 말이야. 살아난 에듀아드 코스탄딘은 멀쩡히 움직이다가, 세다의 권능이 사라진 순간 죽은 거다.”

이미 깨달았던 래번이지만 타니엘의 설명에 다시 한 번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하루의 절반, 그러니까 열두 시간 전에 선왕이 되살아났다면, 그가 죽어있던 때는 새벽이라는 말인데, 그때 그의 옆에 누가 있었는가.”

타니엘이 술병을 든 손을 늘어뜨렸다.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부관에게 물었다.

“래번, 세다의 금기가 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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