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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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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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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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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6.10.0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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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부. 바그랏트의 메칼로 - 프롤로그>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솥에서 수프가 끓기 시작하자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한 손으로는 나무주걱을 쥐고 수프를 저으며 다른 손으로는 불을 조절하고 눈으로는 화덕의 빵을 감시하던 여자가 마침내 짜증을 냈다.

“알리예! 알리예에!”

그녀가 큰 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을 더 불러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수프 솥을 식탁에 옮기며 투덜거렸다.

“해가 지는데 이것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원. 딸이 있으면 뭘 해. 화덕은 항상 내차지니. 제 언니들 같았으면 나보다 먼저 와서 식탁을 차려놓고 기다렸을 텐데. 막내라고 오냐 오냐 했더니 시집 갈 나이가 되어도 천방지축······.”

“누가 시집간다고요? 알리예 누나?”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갔는지, 문이 열리면서 성큼 들어온 소년이 놀리듯 물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드디어 누나를 보낼 작정인가 봐요.”

“누구 마음대로!”

소년을 떠밀듯 들어온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알리예는 아직 열일곱 살이야. 몸도 약해빠진 것을 시집보냈다가 누구에게 원망을 들으라고!”

“열일곱인데 빵도 제대로 못 굽는 계집아이를 데려갈 사람이나 있을 줄 알아요?”

여자가 맞받아치며 구운 빵을 재빨리 바구니에 담았다. 소년과 아버지에 이어 마지막으로 들어온 젊은 남자가 그녀에게 예의바르게 말을 건넸다.

“냄새가 좋네요. 오늘 만찬은 왕의 식탁 같군요, 부인.”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에서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들이 사는 곳은 일 년 내내 외지인 볼 일이 별로 없는 시골이었다. 종일 밭에서 일해 얼굴이 갈색으로 탄 여자에게 ‘부인’이라고 부르며 귀부인 대하듯 깍듯이 행동하는 남자도 당연히 없다.

그 남자가 젊고 외모도 단정한데 성실한 일꾼이기까지 하고 보면 여자는 그로부터 정중한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영주의 부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딸애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귀부인처럼 사뿐사뿐 움직이며 식탁을 차렸다.

“알리예는 어디 있어?”

빗물 통에서 대충 얼굴과 목을 씻고 온 남편이 딸을 찾았다. 그에게 대답한 사람은 소년이었다.

“뻔하죠, 뭐. 또 레 테메드의 신전에 가서 사제님들을 귀찮게 하고 있을 걸요. 사제님들이 쫓아낼 때까지 거기에서 책 같은 거나 읽고 그림 구경하고······.”

“공연히 글을 배워서 저모양이잖아요. 농부 마누라가 될 계집아이가 글이라니 당치도 않지.”

여자가 새삼 부아를 내며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제가 혼자 배운 걸 어쩌라고. 똑똑한 게 잘못이야?”

남편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부부가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젊은 일꾼이 묘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에셀 씨가 가르쳐 줬죠? 글자.”

일꾼의 옆에 앉은 소년이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에셀이 힐끗 보자 소년이 한쪽 눈을 찡긋 하고는 키득거렸다. 겉모습은 열다섯 살 치고 제법 청년 티가 나지만 하는 행동은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비밀이다.’

에셀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일, 네가 가서 누나를 데려와라.”

부인의 잔소리에 넌더리를 내며 남편이 아들에게 말했다. 소년이 인상을 썼다.

“지금요?”

식탁 위의 음식과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소년에게 여자가 쏘아붙였다.

“그럼 지금 가야지. 금방 해가 져서 캄캄해질 텐데 요즘처럼 소문도 안 좋은 때에 계집애가 혼자 밤에 돌아다녀야 하겠어?”

“에이, 그거 다 거짓말일 거예요. 어디서 이야기꾼이 하는 소리를 듣고 와서 누가 엉터리 소문을 낸 거라고요. 가죽을 벗겨가는 괴물이라느니, 상처도 없이 심장만 꺼내 가는 마녀라느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말로 만났으면 분명히 죽었을 텐데 그럼 어떻게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줘요?”

소년은 자신의 논리적인 판단에 스스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녀오지요, 부인.”

에셀이 웃으며 일어섰으나 소년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

“집안에 남자가 둘이나 있는데 남에게 그런 부탁까지 할 수는 없지. 나일, 빨리 다녀와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제법 엄해서 소년은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고 빵만 하나 들고서 나갔다. 에셀이 엉거주춤 폈던 무릎을 다시 굽히고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말은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외지인인 그에게 딸을 맡기지 않으려는 핑계였다. 가족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인정받는 일꾼이었으나 가족은 아니다. 대륙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바그랏트 사람다운 태도였다.

나일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집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흰 얼굴에 주근깨가 잘게 퍼진 소녀가 가쁜 숨을 쉬며 뛰어들었다.

“알리예. 신전에 작작 좀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계집애가 되어서 날이 저물도록 바깥에 있질 않나. 몸이 약하다고 일을 안 시키니 네가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아? 식사 때가 되면 알아서 들어와 식탁이라도 차려야 할 게 아니야. 내가 딸을 키우는지 상전을 모시는지······.”

소녀가 들어오자마자 어머니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알리예는 어깨를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와서 식탁에 앉았다.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힐끗 보고 에셀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제야 가족들은 소녀가 어딘지 겁먹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길 아래 풀숲에서, 꼭 누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알리예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하자 곧 머리를 저었다.

“고양이 소리를 잘못 들었는지도 몰라요.”

“나일은?”

아버지가 물었으나 알리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파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일을 못 만났니? 너를 찾으라고 신전에 보냈다.”

“신전에서 오는 길인데 못 봤어요.”

“길이 엇갈렸나? 신전까지 갔다가 못 찾으면 그냥 오겠지. 식사하자.”

아내가 뭐라고 더 잔소리하기 전에 남자가 재빨리 선언했다. 모두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바그랏트의 음식은 향신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조리도 단순했다. 기껏해야 수프와 함께 넓적하게 구운 딱딱한 빵이나 감자가 약간의 버터를 곁들여 나올 뿐이다. 밀 수확인 한창인 때지만 묵은 곡식을 처분하느라 맛도 볼품없어서 왕의 식탁이라는 에셀의 칭찬이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자랑할 점은 양이 풍족하다는 것뿐이었다. 종일 일하고 돌아와 굶주린 두 남자가 배를 가득 채우고도 식탁에는 충분히 음식이 남았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울 때까지도 나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얘가 어디까지 찾아다니는 거야. 적당히 찾고 없으면 그냥 올 일이지.”

어머니가 딸을 향해 눈을 흘기며 불평하는 소리에 알리예는 어깨를 움츠렸다. 식탁을 정리하고 난로 앞에서 잠시 잡담을 나누고 나서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가족들 모두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일은 거짓말이라고 큰소리 쳤지만 사실 요 근래 무시무시한 소문이 돌아다니기는 했다. 큰 마을에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말도 안 된다고 부정했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외출을 삼가고 문단속을 했다.

어느 집 아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든가 누구네 집 개가 토끼를 잡았다는 따위의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밖에 없는 곳이니 심장을 먹는 마녀나 아이를 물어간다는 괴물의 소문은 첫날 온 마을에 퍼진 이후로 좀처럼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 대화소재였다.

아는 사람의 친척이 죽었다거나 옆 마을 처녀가 시집간 곳에서 누가 사라졌다거나 하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라도, 마을 밖으로 나갔다 오는 사람들에 의해 소문은 날마다 새롭게 가짓수를 늘려갔다. 그리고 이야기가 늘어날수록 괴물들은 더욱 생생해졌다.

“제가 다녀오지요.”

에셀이 일어서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같이 가세.”

그들은 등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보나마나 어디서 해찰하다가 배가 고프니 슬슬 오는 중일 걸세.”라며 희망 섞인 말을 했으나, 길을 따라 한참 걸어도 나일은 만나지 못했다. 신전까지 가서 잠자리에 든 사제들을 깨워 물어보았지만 알리예가 떠난 뒤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사제의 말을 듣고 남자는 이제 누구라도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굳었다.

“중간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서 같이 어디로 간 걸지도 모르죠. 요새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몇 있잖습니까.”

에셀이 위로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자신이 한 말을 믿지 않았다. 나일은 철없는 소년이어도 멋대로 구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지금쯤 아들이 집에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남자의 걸음이 빨랐다. 등을 가지고 있는 에셀을 추월해 그가 앞서 갔다. 에셀은 그를 따라가는 대신 허리를 숙이고 등을 내려뜨려 길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어둠 속에서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들려왔다.

- 오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길 아래 풀숲에서, 꼭 누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알리예의 말을 떠올리고 그가 걸음을 늦추었다.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아래쪽으로 풀이 우거진 곳은 숲으로 가는 입구뿐이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억센 풀밭 너머로 까만 숲이 있었다.

에셀은 등을 가까이 비추며 길 가장자리를 꼼꼼히 관찰했다. 그러다 흙이 팬 흔적과 그 옆의 풀이 거칠게 눌린 자국을 발견했다. 땅이 단단해서 발자국까지는 없었지만 이정도로 흔적이 남으려면 꽤 용을 써야 했을 것이다.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에셀이 문득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무슨 일인가? 왜 그러나?”

훨씬 앞서 가던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에셀에게 소리쳐 물었다. 에셀은 말없이 풀 사이에서 주운 것을 들어보였다. 남자가 달려와서 그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에는 빵조각이 있었다. 반쯤 베어 먹고 남은 것이다.

집을 나서며 빵 하나를 잽싸게 가져가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가 숲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나일! 나일! 대답해라! 나일!”

남자가 아들을 부르며 숲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에셀은 눌린 풀 주변을 더욱 세심히 살폈다. 그는 풀 사이에서 거뭇하게 보이는 얼룩을 발견했다. 만지자 얼룩이 손바닥으로 옮겨왔다.

손끝을 비벼 마찰하니 끈적해졌고 냄새를 맡으니 쇠비린내가 났다.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는 몰라도 피였다. 에셀은 숲으로 가려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집으로 돌아가서 문단속을 하고 여자들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하세요. 마을 사람들을 모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셀이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여주며 말하자 남자는 창백해져서 비틀거리며 달렸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등과 횃불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나일이 없어졌으며 숲의 입구에서 흔적을 발견했다는 말에 두려운 낯으로 웅성거렸다.

“괴물이 온 거야? 설마 우리 마을까지 온 거야?”

“늑대를 만난 게 아닐까?”

“누구 늑대 소리 들은 사람 있어요?”

누군가의 질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마을 가까이까지 늑대가 오는 일은 거의 없지만, 혹시 그랬다고 해도 늑대들의 하울링이 들렸어야 했다.

“틀림없이 괴물이야. 괴물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영주님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절부절못하며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들 하고 있는 거요! 나일이 없어졌단 말이오! 당장 찾으러 가야 한다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을 쫓아간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소문 못 들었어요?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 하룻밤에 시체만 남은 곳도 있대요.”

“영주님의 군대가 길목을 지키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는 걸 우리 마을에서도 몇 명이나 봤잖나.”

“공연히 뒤따라갔다가 우리까지······.”

겁먹은 목소리가 잇따라 떠올랐다. 집에 남은 식구들이 걱정되는지 서둘러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괴물이나 마녀가 말을 타고 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에셀을 보고 몇몇이 놀라 움찔거렸다.

“숲 안에서 말발굽 자국을 발견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숲에 말을 묶어두었다가 나일을 납치한 다음 말에 싣고 떠난 것 같습니다. 숲에서 서쪽으로 벗어나 옥수수 밭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졌습니까?”

에셀이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횃불의 불그스름한 빛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그을린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갑자기 고요한 가운데 돌연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악! 내 아들! 나일!”

집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들을 따라 나온 여자가 바닥에 쓰러지며 외쳤다.

“안 돼! 안 돼! 신들이여, 도와주세요. 안 돼! 나이일!”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나둘 그곳을 벗어났다. 도망가는 것 같았다. 에셀이 떠나가는 남자 하나의 팔을 낚아챘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집니까.”

남자가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델린이다. 그곳 사람들은 마녀와 괴물에게 습격당해서 모두 죽었다고. 저주받은 땅이야!”

등과 횃불로 밝았던 그곳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문과 창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는 불을 환히 밝혔다. 여자들은 성물 앞에서 기도할 테고 남자들은 칼이나 몽둥이를 쥐고 밤을 샐 것이다. 날이 밝기까지.

“자네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이렇게 캄캄한 밤중에······나귀의 발굽을 잘못 본 건지도 몰라.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숲에 왔다 간 걸 수도 있고······.”

남자가 에셀의 어깨를 잡으며 떨면서 물었다. 인심 좋고 낙천적인 농부의 얼굴이 거멓게 타들어간 모습을 보고 에셀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았다.

“말발굽에 밟힌 풀의 상처가 싱싱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거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근처로 핏방울이 이어져 있었고요.”

“아니야!”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까짓 게 사냥꾼도 아니면서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 떠돌이 일꾼 따위가! 악마 같으니라고! 이래서 외지인은 믿을 수가 없는 거야! 저리 가! 꺼져 버려!”

남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더니 그가 들고 있던 등을 낚아채서 달리기 시작했다.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여보! 여보! 가지 말아요! 에셀! 저이를 잡아요! 제발!”

여자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에셀은 남자를 집어삼킨 어둠과 애원하는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숲이 아닌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잠자리인 헛간으로 가서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겼다. 조금 망설였으나 집안으로 들어가 나일의 몫으로 식탁에 남겨진 빵과 감자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 순간 삐꺽대는 소리와 함께 침실의 방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나타난 알리예를 보고 그가 멈칫거렸다.

소녀는 맑고 파란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시선을 떨어뜨려 그의 손에 들린 짐을 보았다.

“그건 칼이에요?”

보따리 옆으로 삐죽 나온 길쭉한 것을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에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에셀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기사님이죠? 그렇죠?”

소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에셀이 이마를 찌푸렸다.

“알프 아저씨가 그랬어요. 말투도 고상하고 행동도 점잖은 게 그냥 떠돌이는 아닐 거라고요. 당신은 글도 쓸 줄 알잖아요. 칼도 가지고 있고, 또 귀족나리처럼 말해요. 이야기 속의 기사들처럼 떠돌아다니며 고행을 하는 거죠?”

“나는 가야 해. 그동안 고마웠다.”

에셀이 짤막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소녀가 옷자락을 붙드는 바람에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 동생을 구해주세요. 기사님은 약한 사람을 돕잖아요. 여자와 아이를 지키고, 괴물과 싸우잖아요. 나일을 구해주세요!”

‘기사가 약한 사람을 돕고 여자와 아이를 지키고 괴물과 싸워?’

에셀은 애원하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알리예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 파르르 떨었으나 옷자락을 잡은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아니야, 알리예. 이 순진한 아가씨야.’

그는 소녀의 손목을 잡아 옷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그녀가 상처받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자 가련한 마음이 들었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기사가 아니다.”

소녀의 눈이 당황과 두려움으로 커졌다. 에셀은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그곳을 나섰다.

“에셀! 기사님!”

알리예가 그의 등 뒤에서 외쳤다.

“기사님! 자비를! 신들의 이름으로 자비를!”

에셀은 거침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몇 번이나 외친 소녀의 간청은 차가운 밤에 잡아먹혔다. 밤은 모든 것을, 나일도 에셀도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삼키고서 굶주린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알리예는 겁에 질려 뒷걸음쳤다. 침실로 뛰어든 그녀가 성물이 걸린 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신들이여,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성물을 향해 팔을 뻗으며 그녀가 간청했다.

“우리를 구해주세요!”


작가의말

3주 정도만 쉴 작정이었는데 일주일 추가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관성의 마니. 노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그러나 돌아왔으니 다시 지각연재의 관성을 따르.....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2부는 호러 미스터리로 기획되었습니다. 1부보다 짧게 쓸 예정이에요.

1부를 건너뛰고 2부부터 읽기 시작해도 별 무리없도록 써볼 생각이지만, 얼마나 성공할지는 모르겠어요. 전에 한 번 그런 걸 시도했다 완패한 기록이 있습니다만....이번에는 무승부라도 되어주길.

그럼 메칼로 2부, 바그랏트의 메칼로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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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부 완결 후기> +39 16.09.02 799 26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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