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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연재수 :
17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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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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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30,491

작성
16.07.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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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10쪽

로망스(2)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래번은 타니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질문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그의 생각은 세다의 각인자가 선왕을 살렸고 그때 그의 옆에 누가 있었는가에서 멈추었다. 누가 있었는가. 그날 밤.

“죽음의 왕에게 선택받은 신자들이 어겨서는 안 되는 금기. 한 달에 한 번, 죽은 자의 체온으로 심장을 덥히라.”

타니엘은 말하고 나서 피식 웃었다.

“무시무시하게 들리지? 하지만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으니까 너무 겁먹지 말라고. 갓 죽어 체온이 남아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거야. 개든 고양이든 염소든 돼지든. 도축업자 집안에서 태어나면 횡재겠는 걸. 아무렴 어때. 한 달에 한 번 동물 한 마리가 필요할 뿐이니 어지간하면 금기를 지킬 수 있어. 쉽지. 그런데도 세다의 신자는 흔치가 않아. 어째서 그럴까.”

정작 그의 말을 듣고 있어야 할 래번은 다른 생각으로 다른 두려움에 빠져 있었지만 타니엘은 부관의 무반응에 신경쓰지 않았다.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신자가 적지. 봉인된 신들은 아예 없고. 그래서 본래부터 신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그믐이 되면 신자들의 몸에는 이 무시무시한 저승의 왕, 죽음이 직접 강림하시는 거다. 쉽게 말해줘? 죽는다고.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진다 그 말이야.”

“예······?”

멍한 래번의 귀에도 죽는다는 말은 들렸는지 그가 타니엘을 돌아보았다.

“하루의 절반동안 죽은 상태가 된다. 말 그대로 죽어서 몸은 부패하고 썩은내를 풍기고 벌레가 꼬이지. 그런 다음 하루의 절반이 지나면 되살아나고 말이야. 시체가 살아나는 광경, 볼만하겠지. 걱정 마. 걱정 마. 그 썩은 몸 말인데, 다시 하루의 절반동안 천천히 회복된다고 해. 이런 걸 감수하면서 얻는 것은 병이나 일으키는 힘이니까 보통 사람들은 신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타니엘이 손에 든 술병을 흔들었다. 유리병 안에서 맑은 술이 찰랑거렸다.

“어쨌든 세다의 신자는, 한 달에 한 번 그믐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야. 하루의 반은 죽은 채로, 나머지 반은 썩은 몸인 채로 지내야 하니 말이야. 어때? 래번. 그믐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 명이 바로 세다의 각인자라는 말이다.”

“그, 그러니까 단장님은 세 분 중 한 분이 세다의 각인자라는······.”

래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으나 타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몰라. 한 달에 하루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는데 세 분 모두 그건 힘들지. 뭐 선왕을 죽인 사람은 셋 중 하나가 확실하지만.”

“단장님!”

래번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타니엘이 부관의 당황한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생각해 봐, 래번. 메칼로의 각인자가 사람들에게 ‘너는 국왕을 죽였느냐’고 묻지 ‘너는 국왕을 살렸느냐’고 묻진 않았을 거 아냐. 그러니 세다의 각인자는 메칼로의 각인자에게 시험을 받았더라도 얼마든지 통과했을 거라고. 이런 식으로 의심을 피하다니 감탄해야 할지 저주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런 것을 고민할 때입니까.”

래번이 힘없이 대꾸했다.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관을 보며 타니엘은 천천히 평소의 그로 돌아갔다.

타니엘이 마시던 술을 래번에게 건넸다. 반쯤 줄어든 술병을 받은 래번은 타니엘 못지않은 기세로 술을 넘겼다.

“고민할 거야 많지. 이제부터 우리는 상아장식이 있는 물건을 찾아내서 포고스 백작부인이 가진 것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물건을 찾아내면 그것이 선왕 승하시에 어디에 놓여있었는지 알아내야 하고,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도 밝혀야 한다. 물론 세 사람이 모두 메칼로의 각인자에게 검사받을 수 있게 만든다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지만. 저쪽에서도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하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타니엘은 씩 웃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도 메칼로의 신자라고 믿지 않는 메칼로의 각인자가 하나 있잖아. 아직 다루기 힘든 녀석이지만, 포고스 백작부인이 먼저 손을 내민 이상 메칼로도 협력하게 될 거야.”

“백작부인이 용케 그런 결정을 내렸군요.”

“뒤쫓던 중요한 증거를 놓친데다 에밀리오 녀석이 감시하던 상인을 죽여 버려서 그쪽도 돌파구가 필요했거든. 그래도 굉장한 여자지. 남자가 아닌 것이 아쉬웠다고. 포고스 백작을 죽인 자들이 누구든 편히 잘 수는 없을 거야.”

그로서는 드문 칭찬을 한 뒤에 타니엘이 눈을 감았다.

닷새 동안의 강행군에 포고스 백작부인과 담판 짓느라 몸도 마음도 쉴 틈이 없었다. 섭정공에게 보고도 했고 래번에게도 알리고 나자 꾹꾹 눌러두었던 피로가 갑자기 그를 덮쳤다. 가라앉듯이 잠에 빠지며 그는 새로운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한 달에 한 번······ 그믐에······ 있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몸이 응하지 않았다. 그는 곧 죽음 같은 잠에 빠졌다.

타니엘이 죽은 듯 자고 있을 때 메칼로는 졸음과 싸우느라 죽을 것 같았다. 쉬프레사는 왕복에만 거의 한나절 걸리는 곳이었다. 알마스트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치료도 대충하고 잤지만 다음날의 근무 때문에 새벽에 깨어나야 했다.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라 몸은 쉬고 싶은데 그날따라 공주는 방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그래도 잠을 떨칠 수 있을 터였으나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니 머리가 멍청해지며 눈꺼풀이 내려갔다.

공주의 거처는 왕궁 깊은 곳이었다.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니 긴장감도 없다. 게다가 어쩐지 다른 기사들도 그날따라 경비를 대충 서고 있었다. 그 이유를 메칼로는 뒤늦게야 알았다. 평소보다 피곤한 얼굴의 그를 안쓰럽게 보던 시녀가 “오늘은 공주님이 밖으로 나오시지 않을 테니 일찍 쉬어도 된다”고 말해준 것이다.

이유를 묻자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공주의 월경통이 유난해서 한 달에 하루 이틀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메칼로는 여자들은 고생이라며 픽 웃었다. 그러고 나서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시녀들은 식사를 가져갈 때 외에 공주의 방에 출입하지 못했다. 공주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문 앞을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오직 유모만 종일 그녀와 함께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쉬어야 할 정도로 괴로운데도 식사 때마다 음식은 말끔히 먹어치웠던 것이다. 게다가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놀로파의 사제를 부르거나 아편이나 허브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기색은 없다.

메칼로는 기회를 노렸다.

평소보다 방만한 기사들 덕분에 공주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시녀들은 돌아다니지 않고 방안에 모여서 수를 놓거나 차를 마셨다.

아르반에서 미혼의 여성이 거주하는 방은 전통적으로 부모의 침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공주의 경우에는 유모의 방이 부모의 침실을 대신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기 시작한 초로의 유모는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중이었으나, 지금은 무릎 위에 떨어뜨리고 입을 좀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종일 뜨개질만 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지루한 나머지 졸린 것이 당연했다. 메칼로는 소리 없이 그녀를 지나 공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이불에 덮인 그 몸은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메칼로는 가까이 다가가서 기복 없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턱 아래의 정맥을 눌렀다. 손바닥 밑의 목덜미는 차갑고 고요했다.

‘죽었다?’

시체라면 남이 만든 것도 직접 만든 것도 얼마든지 경험해 보았다. 눈앞에 있는 이것은 시체였다. 방안에 뿌려진 향수냄새가 진해서 금방 알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공주의 방에 시체가 있었다. 유모는 알 터이다. 공주를 위해 준비한 식사를 대신 먹은 사람은 그녀일 테니까.

들키기 전에 여기에서 나가야 했다. 메칼로가 침대에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시체가 눈을 번쩍 떴다. 메칼로가 멈칫했다. 열린 눈꺼풀 안의 고동색 눈동자는 마치 성에가 낀 유리처럼 흐릿했다. 그 눈을 깜박이지도 않으며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이 모호했다. 아직 해지기 전이라 방안이 환했으나 그 눈은 메칼로를 못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 알고 있었다. 이불 밑에서 손이 빠져나와 천천히 메칼로를 향해 움직였다. 길고 가는 손끝이 메칼로의 허리에 닿았다. 손가락이 더듬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누구냐.”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칼로.”

메칼로가 나직이 대답했다. 옷자락을 쥔 손이 움찔 떨었다. 조금 전까지 죽은 자의 것이었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나를······ 봤구나.”

“그래.”

메칼로는 관절이 하얗게 변하도록 꽉 잡고 있는 손을 자신의 옷에서 떼어놓았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곤란해져. 이래 봬도 신입이라 농땡이 피우면 선배님들에게 혼난다고.”

그는 아직 꽉 쥔 채로 떠는 손을 이불 밑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방에서 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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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8

  • 작성자
    Lv.49 Fragarac..
    작성일
    16.07.16 09:14
    No. 31

    맞춤법은 언제나 헷갈린단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6.07.16 23:39
    No. 32

    이래 봬도는 띄어 쓰는 게 맞아욤. 언제나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있어요. 오타나 맞춤법 실수는 글 쓰는 사람에게만 안 보이는 버그 같은 거라 알려주시는 분들이 늘 고맙답니다.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6.07.16 09:23
    No. 33

    누가 또 무슨 비밀을 숨겼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6.07.16 23:39
    No. 34

    제가 숨겼어요.(당당)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5래비
    작성일
    16.07.17 22:23
    No. 35

    반전의 반전 뭔가 매듭이 풀리는듯하면서 점점 더 머리를 아프게 만들어가고잇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6.07.19 01:11
    No. 36

    (두피 마사지를 해드립니다. 꾹꾹.)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사만다
    작성일
    16.08.23 04:45
    No. 3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6.08.24 18:04
    No. 3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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