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으로부터(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멀리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방책을 지키던 경비병은 눈을 찌푸리며 그들의 숫자를 헤아린 다음 상관에게 뛰어갔다. 병사의 상관인 기사는 막사 안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그는 보고를 받자 맛없는 스프와 딱딱한 빵을 떠밀어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과연 보고받은 그대로 여남은쯤 되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가장 앞에서 말을 몰던 젊은 남자가 속도를 내어 무리에서 떨어졌다. 그는 병사들이 세워놓은 방책 앞에 다다르자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이런. 이런. 지드 경. 도련님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구먼.”
기사가 웃으며 젊은이를 맞았다. 가까이 온 지드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야전이 체질인 것 같군요, 갈립 경. 성에 있을 때보다 얼굴이 폈어요.”
지드의 아부 섞인 인사에 기사가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신분으로 따지면 향사의 아들이고 아나히드 백작에게 종사하는 기사일 뿐인 갈립은 지드 앞에서 더 공손해야 했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이 젊은이의 부친인 에네스 백작은 그가 섬기는 아나히드 백작과 절친한 사이였다.
영지도 서로 가까워 자주 오갔기 때문에 갈립은 지드가 유모의 품에 안겨 옹알이를 하던 모습이나 강아지에게 빵을 뺏기고 울던 모습을 기억했다. 다른 가문의 기사라도 지드 역시 어릴 때부터 보아 온 그에게 스스럼없이 대했다.
“경이 올 거라고 들었소. 이번에 큰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고 에네스 백작께서 어찌나 자랑하시던지 우리 백작님이 넌더리를 내고 계시지 뭐요.”
“아버지가 자랑을? 설마요.”
못 믿겠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젊은이의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저 사람들이 아르반에서 온 조사대요?”
청년의 어깨 너머로 힐끗 시선을 주며 갈립이 물었다. 지드와 함께 온 사람들이 방책 앞에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직이 속삭였다.
“저들이 어떻게 보고하는가에 따라 지원 정도가 결정돼요. 국왕의 친위대에서 보내준 사람들인데 대부분 행동을 봐서는 귀족 같지 않고, 어쨌든 그래도 다들 여간내기가 아니에요.”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해적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지경이오. 요새 니델린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나히드도 해만 떨어지면 인적이 뚝 끊어진다오. 그렇게들 조심하는데도 누가 사라졌다느니 시체가 나왔다느니 하는 보고는 멈추질 않으니 원.”
갈립이 쓴 입을 다시고는 방책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모두 열한 명인데 아직 수염도 안 날 것 같은 소년으로부터 머리가 희끗한 남자까지 연령이 제각각이었다. 옷은 낡고 수수했으며 여행의 먼지로 볼품없는 모양이었으나 갈립은 지드의 말대로 그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행에 익숙한지 행장이 단순했고 내내 이동했을 텐데도 지친 기색은 없었다. 한차례 훑어보자 몇 명은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내왔다. 지드가 지휘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갈립을 소개했다. 메칼로라는 그 기사는 격식을 차리지도 않고 정보부터 요구했다.
전장에서도 먼저 통성명부터 한다는 아르반의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무례하거나 성급한 것은 아니다. 아직 2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나이인데도 움직임이 무겁고 눈빛은 예리했다.
지휘자뿐만이 아니라 부하들 역시 한 사람도 허술한 데가 없었다.
‘정말로 아르반에서 온 기사인가?’
갈립은 반신반의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적과 싸우며 나이든 그였다. 늙은 지금 전투의 감각은 녹슬었을지 몰라도 전장의 냄새는 아직 잊지 않았다. 피 맛을 본 사람 정도는 구분했다.
눈앞의 남자들이 바로 그랬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심장을 찌를 수 있는 사람들, 시체를 밟으며 싸울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자들의 냄새를 풍겼다.
해적들과 부대끼는 바그랏트와 달리 아르반은 전쟁이 멈춘 지 수십 년이었다. 평화로운 왕국의 기사가 노련한 전사의 눈을 가지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갈립은 담담히 설명했다.
“니델린은 그리 큰 영지가 아닙니다. 영토 자체는 넓은 편이지만 대부분 산림이고 영주님의 성과 마을이 둘, 그 외에는 화전민 촌락이 몇 군데 있을 뿐이지요. 이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반나절 안에 첫 번째 마을에 닿을 겁니다. 하룻밤에 몰살당했다는 마을이 바로 거기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서 시신이 그대로 방치된 상태입니다.”
“그 일은 한 달도 전에 벌어졌는데 아직 내버려 뒀다는 건가?”
메칼로가 물었다. 보수적이며 동시에 신앙심 깊기로 유명한 바그랏트였다. 망자에게 장례도 치러주지 않은 채 시신들이 썩어가게 내버려 두는 경우는 사형당한 죄수뿐이었다.
메칼로의 질문에 노기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마을의 참변을 전해 듣고 확인하러 갔던 병사들도, 그 다음에 찾아간 병사들도, 그 뒤에 우리 쪽에서 파견한 자들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을의 상황을 보고 온 사람은 오직 최초에 전해준 한 명뿐인데, 그 사람도 얼마 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지경이니 누구를 다시 보낸들 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메칼로의 뒤에서 부하 한 명이 긴 휘파람 소리를 내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르반에서 온 사람들에게 긴장하거나 두려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갈립은 계속해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겠지만, 그러면 조사할 시간도 별로 없이 해가 지게 될 겁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의 권유에 메칼로가 씩 웃었다.
“조사라면, 이미 하고 있을 걸.”
갈립은 몰랐지만 그가 메칼로를 처음 본 그 시각, 그곳으로부터 반나절 거리에 있는 마을 입구로 막 여덟 명의 남자들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일행보다 한나절 먼저 도보로 떠나, 길 대신 산을 타고 넘어 곧장 소문의 마을로 갔다. 병사들은 니델린으로 가는 길목만을 지키고 있어서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간 그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정오 무렵이었고 주변을 정찰하고 온 두 명이 매복이나 이상한 낌새는 없음을 확인했다.
마을은 고요했다. 흔한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밭에서는 곡식이 잡초와 뒤섞여 자랐고 멀리 보이는 대부분의 건물은 흙벽에 짚으로 지붕을 얹은 평범한 농가였다.
작은 개울이 입구에서부터 마을 안쪽으로 구불구불 흘렀다. 사방이 적막해서 개울 흐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물은 깨끗했으며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풀이 섞였을망정 밭의 곡식들도 잘 자라는 중이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을 빼면 조용하고 평온한 시골마을이었다. 사람뿐 아니라 가축도 없었다. 농가의 마당에 무리지어 돌아다닐 닭이나 외지인이 오면 시끄러운 소리를 낼 돼지도 개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일행은 건물이 보이자 둘씩 짝을 지어 집안을 확인했다.
농가의 내부도 바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부서지거나 어질러진 흔적은 없다. 집안은 그냥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먼지가 쌓여 오랫동안 인적 없었음을 드러낼 따름이다.
집안을 확인한 그들은 도로 한 자리에 모였다.
“뭐 나온 건?”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묻자 모두 고개를 저었다.
“시체도 없고 핏자국도 없고. 싸우거나 뭐 부서진 것도 없네.”
“집안의 기물들도 그대로고, 뒤진 흔적도 없고.”
“마을 사람들이 다 죽었다던데. 그럼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농기구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니 일하고 돌아온 후나 일하러 나가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두울 때라는 거군.”
“사람들이 모두 집안에 모여 있을 때이기도 하고. 식탁에 안 치운 그릇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저녁 식사할 시간이었는지도 몰라.”
“어쨌거나 이런 마을에서는 어두워지면 다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어두울 때는 도망가기도 쉬워. 누군가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해칠 작정이라면 마을을 포위할 정도로 많은 수를 데려와야 했을 걸.”
“아니. 어쩌면 그렇게 많은 수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야.”
한 명이 문득 말했다.
“이런 곳이라면 분명 마을 어딘가에 레 테메드의 신전이 있지 않을까.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은 한 곳에 모이는 법이고, 가장 적당한 곳이 신전이지.”
그 말에 일행은 다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옳은 말이었다. 농가가 모인 곳에는 풍요의 신이며 농부의 수호자인 레 테메드의 신전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잠시 후 마을 동쪽에 자리잡은 신전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벽돌을 쌓고 너와 지붕을 올린 건물이었다. 보통은 농부들이 바친 곡식이나 열매가 제단에 놓였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여섯 구의 시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패의 과정이 거의 끝나 뼈 위로 가죽이 내려앉은 시신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아나히드의 병사다. 여기 문장이 수놓아졌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가 빳빳이 마른 시체의 겉옷을 들춰보고 한 명이 말했다.
“니델린에서 아나히드의 병사가?”
“어이······. 이봐들.”
신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던 한 명이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동료들을 불렀다. 신전 주변을 살피던 일행이 재빨리 문 앞으로 달려왔다. 동료들이 오자 그는 문을 활짝 열어 신전 안 풍경을 보였다.
“으윽······.”
내부를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지고 누군가는 신음소리를 냈다.
“젠장. 이게 뭐람.”
“펠릭스 씨. 전에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신음소리를 냈던 젊은이가 무리 가운데 가장 나이든 사람에게 물었다. 일행의 뒤편에 서 있던 50대 중반의 남자가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천천히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봤다기보다······ 해본 적은 있다.”
질문한 젊은이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해봤다고······? 저런 것을?’
그가 내키지 않는 시선을 다시 신전 안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레 테메드에게 바치는 곡물다발 같은 것들이 제단뿐 아니라 신전 안 곳곳에 쌓여 있었다. 다만 곡물다발에 비해 훨씬 크고 참혹한 제물이었다. 잘 익은 밀이나 보리 대신 벌거벗은 사람들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볏가리처럼 여러 명이 한데 묶여 세워진 시체가 널린 그곳은 얼핏 추수를 끝낸 밀밭처럼도 보였다. 검붉게 얼룩진 바닥은 기름진 밭의 흙과 같았다.
제단 한가운데에는 둥근 머리들이 과일처럼 쌓여 있었다. 묶인 시체들로부터 잘라낸 머리였다. 신전 안 바닥이 검붉게 물든 것은 이런 끔찍한 과일을 수확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걸까 하고, 젊은이는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그는 애써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동료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계속해서 지켜보기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보는 것도 힘든 광경을 직접 그 손으로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자 잘 아는 동료의 어두운 뒷모습이 어쩐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포로를 포기하고 악명을 감당할 자신만 있다면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이만큼 쉬운 방법도 드물지. 상대는 싸울 줄도 모르는 약한 자들이니 피해를 입을 걱정도 없고, 게다가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제물이 될 사람들에게 시키면 되니까.”
펠릭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킨다고 할까?”
누군가 낯을 잔뜩 찌푸리며 대꾸했다. 펠릭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살고 싶은 욕망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볼만큼 본 네가 무슨 소리지? 물론 하고말고. 두려워서 벌벌 떠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옷을 벗기고, 물건처럼 쌓거나 나무에 매달거나 창에 꿰어 놓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한다. 처음에만 힘들 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다그치지 않아도 미친듯이 일하지. 그러고 나서······.”
펠릭스는 돌아서서 다시 천천히 신전을 나섰다. 그는 신전 입구 앞에 쓰러져 있는 여섯 구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일을 끝낼 때쯤이면 몸은 지치고 정신은 거의 나가 있으니 죽임을 당해도 변변히 저항조차 못하게 된다.”
펠릭스가 시신의 옷자락을 가리켰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신전 앞에 죽어있는 여섯 명의 옷이 모두 핏물에 잠겼다 나온 것처럼 검붉게 물들어 있는 이유를 알았다.
- 작가의말
이렇게 지각으로부터 시작하는 연재......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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