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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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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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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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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진흙탕 위 나룻배 (8)

DUMMY

알카탄 공국의 발뺌으로 키펠 왕국이 부실한 협상을 하고, 오슬레아 대왕국은 키펠 왕국을 어르고 갈래는 중이었다. 이 부분에서 굳이 펠릭스가 카난리아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하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오슬레아 협상단이 말한 그대로 '소드마스터의 존재감'이 절실했다. 키펠 협상단이 미친 척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도록, 무력이라는 협상 카드를 싹 봉인하는 누름돌이 펠릭스였다. 이러니 협상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키펠 왕국이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무력인데, 그걸 못 쓰고 있으니까.

펠릭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 카드는 늘리고, 상대 카드는 작게 만든다···. 정석이지만, 이걸 현실로 만드는 건 다른 이야기지.'


인데브 남작이 떠난 뒤, 펠릭스는 협상을 추진한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이 계획을 설계하고 실천한 실무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펠릭스의 입지가 공고했기에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사델라 공작의 딸, 다르멜 오트갱이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카난리아프에 없었다. 사델라 공작령은 오슬레아 동부 끝자락이고, 다르멜 오트갱은 수도에 머무르며 매일 협상단과 통신을 나누며 조건을 조율한다고 통신담당 마법사가 말했다.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지만, 신분과 실력이 확실한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놀랍군.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던가?"

"안바다스 산의 현자에게 수학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저는 이름만 들어봤는데, 사델라에서는 저명한 인물이랍니다."

"현자라고 불린다면 실력은 확실하겠지. 그런데 현자가 이런 정략을 가르쳤을까?"

"사델라 공작께서 가르치셨을 수도 있지요. 공작가이니, 가정교사는 몇 명이고 붙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펠릭스는 통신담당 마법사와 함께 잡담을 깠다. 펠릭스는 정보가 필요했고, 마법사는 휴식이 필요해서 맞아 떨어진 짝짜꿍이었다.

이 대화로 카난리아프에서 벌어지는 대략적인 판의 구조를 파악한 펠릭스. 거나하게 취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마법사를 정문까지 배웅하며, 머릿속으로 영입 순번을 정했다.


'공작위를 노리는 야심가에, 숱한 구혼을 물리친 아가씨라. 그만한 능력을 갖췄으면 분명 자신과 걸맞은 사람을 곁에 두려는 심산이겠지. 끌어들이기에는 적당해.'


흔한 인간군상 중 하나였고,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골드미스(gold miss)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진취적인 엘리트 여성인 알파걸(alpha girl)이 30, 40대까지 쭉 미혼을 유지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세계는 신여성(Modern girl)이라는 단어가 생길 껀덕지가 전혀 없었기에, 담백한 의미에서 능력주의에 가깝다. 마력만 있으면 출산에서 아무런 사고가 없고, 험한 전장에서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데 왜 차별이 생기겠는가.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아, 이건 김칫국인가? 일단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야겠네.'


펠릭스는 그렇게 일축하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네리카가 숙제를 다 끝낼 시간이다.


* * * *


"정말 그 조건으로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카난리아프에서 협상이 한창일 때, 펠릭스는 도시의 유력자들을 끌어모았다. 협상에서 뒷방으로 물러난 현지 유력자들은 펠릭스가 모이라고 하자 '무슨 용무지'하며 찾아왔다.

평소에 모난 구석 없이 부드럽게 돌아다닌 덕분에 좋은 인상이 짙어 유력자들은 대리인을 보내지 않고 직접 방문했다.


"그대들은 여윳돈으로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실패하면 소드마스터인 내가 용병처럼 굴러서라도 갚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대들의 손해라고 해봐야 시간 정도야."

"으음···."


펠릭스는 그동안 꺼렸던 투자은행을 설립하려고 카난리아프의 유력자를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 초대를 받고도 찾아오지 않은 가문이 셋 있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가주가 병을 앓고 있다거나 계승 문제가 얽혔다거나 한 콩가루 집안인지라 바로 미련을 버렸다.

일단은 사교회 형식이었고, 펠릭스는 자신에게 배정된 저택의 홀을 개방해서 이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돈을 모으고, 돈을 낸 만큼 지분을 받는 식이었다. 그리고 펠릭스가 선택한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면 수익 일부를 배당받는 식.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표현하자면 주식이었다.

손해를 본다면 펠릭스가 소드마스터의 경지로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전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갚겠다고 하자 이들은 내심 솔깃한 심정이었다. 평소였다면 사기꾼이라며 거절했겠지만, 지금처럼 카난리아프의 상업이 몰락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샛길은 꽤 절실했다.


"수익의 절반은 남작께서, 나머지 절반을 지분에 따라 배당이라···."

"언뜻 듣기에는 저희의 몫이 좀 적은 것 같습니다만."


유력자 중 한 명이 계약의 허점을 짚었다. 맞는 말이었다. 돈을 낸 당사자의 몫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절반이 뜯기고 셈을 시작할뿐더러 수입이 아니라 수익 기준이면 안 그래도 작은 지분을 더 나눠야 했다.

펠릭스는 예상하던 질문이었기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긍정했다.


"맞다. 돈만 보면 그렇지."

"흠."

"불편해하진 말게. 돈을 가진 사람은 드물어. 하지만 소드마스터 상급보다 드물까?"

"남작님의 명예가 가진 무게라···. 맞는 말씀이군요."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오슬레아의 거인이자 기둥이었다. 망하면 용병으로 활동하겠다며 말하긴 했지만, 오슬레아의 대귀족이 그걸 두 눈 뜨고 놔둘 리 없었다. 빚을 인수하던가 대신 갚아주는 식으로 명예를 온존하려고 할 게 뻔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배짱 장사 이상이 될 수 없었지만, 유력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기적이라면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 구도였다. 소드마스터 상급에게 빚을 씌울 기회였다. 그것도 익스퍼트로 각성시킬 수 있는 소드마스터에게.


"이번 사업에 10만 골드 내겠습니다."

"저는 15만 골드 내겠어요."

"부족한 몸입니다만, 8만 골드 보내겠습니다."


카난리아프 한 곳에서 모은 돈이 물경 170만 골드. 박박 긁어서 모은 돈이 아니라 유력가 19곳에서 가볍게 받은 돈으로 기간트 골렘 외장갑 20벌을 사고도 남았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재력을 확인한 펠릭스는 내심 혀를 휘둘렀다. 트렐라드 변경백이 말했듯 이만한 돈과 물자를 가지고도 돕지 않았다는 걸 직접 확인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구체적인 방안이나 계획이 있으시다면 돕고 싶습니다."

"이번에 지세트 백국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국가가 생겼다는 건 다들 알겠지?"

"아, 물론입니다. 남작님의 결투는 익히 들었습니다. 골렘으로 그들의 명예를 보살피셨으니, 편히 잠들었을 겁니다."


유력자들은 삼삼오오 그때의 일을 떠들었다.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세세한 내용이었고, 골렘 안에 있던 펠릭스보다 더 명확히 전장의 흐름이나 과정을 꿰차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펠릭스는 이들의 재잘거림을 멈췄다.


"이번에 사업하는 곳은 새로운 백국이 될 거야. 그곳에 170만 골드를 투자해 이것저것 인수하거나 계약해야지."

"확실히···. 백국의 유력한 신하들이 모두 도망친 탓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요. 왕궁에서는 그곳에 투자를 금했던 거로 압니다만···."

"내가 누군지 잊었나? 트렐라드 침공군 소속일세. 왕궁이 아무리 무책임하다고 해도, 백국이라는 결실을 독점하지는 않아. 지금까지는 변경백님께 일임했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자니 심심해서 말이지."


펠릭스는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했다. 엄밀히 따져서 지세트 백국은 오롯이 트렐라드 변경백 및 인근 소영주가 모여서 함락시켰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지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알카탄 공국 침공에 끼어들었지만, 국왕의 신묘한 벼랑 끝 전술 덕분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백국의 처우를 놓고 공국과 밀약을 나눠 재건하기까지 했다. 펠릭스는 통신 마법사와 술친구가 되면서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통신을 걸어 사정을 들었다.

분노했던 펠릭스는 변경백에게 사정을 듣고서야 분을 가라앉혔다. 당연한 내용이기도 했는데, 트렐라드 변경백은 지세트 백국을 통치하기는커녕 제어할 인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놓아줘야 할 땅이었고, 오슬레아 정계나 나서서 적당히 조정해준 쪽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땅을 포기하고 이권을 가져간다. 말이 쉽지···. 국가의 보증 없이는 엄두 못 내.'


새로 재건되는 지세트 백국의 투자를 오슬레아 측에서는 침공군 당사자로 국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본도 트렐라드와 인근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알카탄 공국을 거쳐서 들어갈 수도 있긴 하지만, 자본력이라는 힘에서 오슬레아 대왕국을 이길 국가는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이번 백국 재건의 조건으로 알카탄은 키펠의 뒤통수를 친 것과 마찬가지인데, 키펠 왕국이 알카탄을 통해 지세트에 투자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기껏해야 마게트 왕국인데, 마게트 왕국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경제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국력에 걸맞은 수준이라고는 할 수 있었지만, 국외 투자에 거리낌 없이 돈을 턱 내놓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 어차피 이쪽이 먹을 영향력인데, 내가 나서서 긁어모아도 무방하지.'


알카탄 공국의 입장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알카탄 공국은 키펠 왕국보다 오슬레아 대왕국의 우산을 더 선호했다. 그러니까 이런 '지고 들어가는 협상'에 임하는 것으로 오슬레아 대왕국의 기를 세워주었고, 그 대가로 명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슬레아 대왕국이 큰 지출을 하지 않았다는, 즉 실질적인 손해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이었다.


'이걸 주도한 게 사델라 공작의 딸이라는 거지. 대체 이걸로 이득을 몇 개나 본 거야?'


펠릭스는 본인의 실력과 명예를 모두 베팅한다고 보장했는데도 겨우 170만 골드를 모았다. 그런데 공작의 딸은 본인의 머리만으로 국가를 좌우하며 한 국가를 뇌사 상태로 만들며 두고두고 이득을 뽑아먹는 지갑으로 만들었다.

이건 펠릭스의 배경이 없는 것도 있었다. 만약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나 뛰어난 석학을 모시고 대범한 경험을 쌓았다면 곱절은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겨우 카난리아프라는 도시 하나가 아니라 주변 도시의 유력가에서 돈을 모았을 것이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좀 낙관하던 것도 있다.'


이런 걸 좌지우지하려면 신에게 빌 때 좀 더 자세히 말했어야 가질 수 있는 요소였다. 따라서 펠릭스는 깔끔하게 질투를 접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펠릭스가 말을 줄이는 사이 유력자들은 보증서류를 돌려보았고, 한 유력자가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란소스 남작님. 서명란이 좀 낯선 것 같습니다."

"응? 무엇이?"

"성함이 제가 알던 게 아닌데···."

"아. 아아아, 그거."


서명란에는 '펠릭스 란소스 오브 텔로드'라고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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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진흙탕 위 나룻배 (5) 20.06.16 90 2 12쪽
39 진흙탕 위 나룻배 (4) 20.06.01 89 3 11쪽
38 진흙탕 위 나룻배 (3) +1 20.05.30 95 2 11쪽
37 진흙탕 위 나룻배 (2) +1 20.05.28 97 3 12쪽
36 진흙탕 위 나룻배 (1) 20.05.26 101 3 11쪽
35 펙시스 공략전 (6) 20.05.23 102 1 12쪽
34 펙시스 공략전 (5) 20.05.19 101 2 11쪽
33 펙시스 공략전 (4) 20.05.18 107 3 12쪽
32 펙시스 공략전 (3) 20.05.14 111 4 12쪽
31 펙시스 공략전 (2) 20.05.12 108 2 12쪽
30 펙시스 공략전 (1) +1 20.05.11 13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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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세트 최후의 날 (2) 20.05.08 144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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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벌 준비 (5) 20.05.04 158 3 11쪽
23 정벌 준비 (4) 20.05.03 165 6 11쪽
22 정벌 준비 (3) +1 20.04.29 183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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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임식 (5) 20.04.22 224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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